임도경의 컬처토크 〈31〉 론다 로우지처럼

  • 글 : 임도경 (사)지역문화소통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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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격투기 시청을 피하던 나를 TV 앞으로 끌어낸 여성 파이터 론다 로우지
⊙ ‘일과 결혼한 여자’와 같은 시대착오적 시각보다 일도 잘하고 결혼도 하는 여자이기를…

임도경
⊙ (사)지역문화소통연구원 원장, 경희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객원교수.
홀리 홈과의 경기에서 KO패를 당한 론다 로우지(왼쪽).
사진 : SPOTV 방송화면 캡처.
결혼을 한 이후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힌 문제 중 하나는 내가 싫어도 배우자가 좋아하는 일이면 무조건 외면만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중 하나가 잠들기 직전까지 TV에서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미국 이종격투기) 경기를 보는 일이었다. 철조망 옥타곤에서 짐승처럼 싸우고 피를 흘리는 선수들을 보면, 쉽게 잠들기도 힘들었고 꿈자리까지 뒤숭숭했다. 인간들이 투견으로 보였다.
 
  그래서 남편이 UFC 경기로 채널을 맞추면 난 슬그머니 공부방으로 퇴장을 해버렸다. 그러다 보니 UFC는 우리 부부 사이를 갈라놓는 주범이 됐다. 남편은 이 경기를 보면 하루 스트레스가 날아간다고 하니 무조건 못 보게 가로막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냥 내가 자리를 피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UFC를 보는 시각을 완전하게 뒤바꿔준 존재가 나타났다. 바로 UFC 여성 밴텀급 전 챔피언 론다 로우지(Ronda Rousey·28)이다.
 
  론다 로우지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사실 경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인터뷰 기사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 인터뷰에서 UFC 여자 선수들이 반라의 옥타곤 걸(대회 라운드 걸)보다 적은 파이트머니를 받는 게 과연 옳은 일이냐는 말을 던졌다. 우리나라에서 이름이 알려진 로드 FC(Road Fighting Championship·아시아 이종격투기) 여자 선수의 파이트머니가 50만원 선이라 선수생활로는 생계가 해결되지 않는 애로를 겪고 있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이 말에 더 관심이 갔다.
 
  UFC에서 가장 유명한 옥타곤 걸인 아리아니 셀레스티(Arianny Celeste)가 일 년 24개 경기에 나서서 받는 연봉이 1억원 중반대를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한 게임당 700만원 정도를 받는다는 말이다. UFC에 진출해 있는 김동현 선수가 한 인터뷰에서 “한 게임당 4만 달러씩 일 년에 세 번 출전하면 1억6000만원 정도 받는다”고 했는데, 연봉으로 치면 비슷한 수준이다. 이러다 보니 UFC의 유명 선수들조차 옥타곤 걸들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한다.
 
  론다 로우지의 말대로 같은 여성인데, 피 흘리고 싸우는 선수보다 몸매 가꿔서 링을 한 바퀴 도는 라운드 걸의 수입이 더 많다는 건 내 판단에도 좀 억울해 보였다. 특히 론다 로우지는 옥타곤 걸 못지않은 미모와 몸매를 갖고 있는 베이징 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였기 때문에 그녀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 이후 그녀가 출전한 경기를 보기 위해 기다렸다. 그녀는 나와 같은 팬들의 지대한 관심에 보답이라도 하듯 2015년 3월 챔피언 5차 타이틀 방어전에서 캣 진가노(Cat Zingano·33)를 상대로 현란한 기술을 선보이며 1라운드 14초 만에 서브미션 승리를 거두는 멋진 장면을 보여줬다. 같은 해 8월에는 브라질 현지에서 베스 코레이아(Bethe Correia·32)를 상대로 6차 방어전을 가졌는데, 이 경기조차 1라운드 34초 만에 다시 서브미션 승을 거두는 장면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거쳐간 경기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으며, 상대방을 공격해서 일거에 무너뜨리는 놀라운 격투기 기술이 그대로 재현됐다. 이종격투기에 관심조차 없었던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도 그녀의 기술은 상당한 수준급이었고, ‘무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존재로 보였다. 이 경기를 보기 위해 비싼 돈을 들여 경기장을 찾은 사람들은 너무 쉽게 승부가 갈려 돈이 아깝다는 말을 했다는데, 그 말에 전혀 동의가 되지 않을 정도로 멋진 한판 승부였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녀의 경기 동영상을 되돌려가며 몇 번이나 다시 봤는지 모른다. 그만큼 멋졌다.
 
 
  격투가이면서 여성성을 잃지 않는 모습이 좋아
 
드레스를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론다 로우지. 링 밖에서의 그녀는 여성성과 보편성을 보여준다. 사진 : 론다 로우지 인스타그램.
  그녀의 경기를 보면서 UFC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사람들이 이 경기에 열광을 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신발까지 벗고 맨몸으로 나서 인간이 갖고 있는 원시적인 힘을 겨루는 아날로그식 대결이 요즘 같은 전문화, 디지털화하고 있는 세상에서 스트레스를 날리는 출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세상이 달아준 계급장 다 떼고 맨몸뚱이로 한판 붙는 경기의 매력을 알게 됐다고나 할까.
 
  거친 공격으로 상처를 입기 마련이지만, 타이틀 매치가 아니면 3회전 만에 끝나기 때문에 다른 격투기보다 오히려 선수들이 입는 손상은 덜할 것 같다. 또 본인이 싸우기 어려운 상황이면 항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로마시대 글래디에이터(Gladiator·검투사)처럼 목숨을 내놓고 승부를 내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이젠 느긋하게 UFC를 즐기는 관객이 됐다.
 
  2015년 11월에 있었던 론다 로우지의 7차 방어전은 스마트폰에 일정으로 기록을 해놓으면서 경기를 기다렸다. 상대는 복싱 선수 출신인 홀리 홈(Holly Holm·34). 또다시 싱거운 승부가 이어질지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아웃복서 스타일인 홀리 홈은 전략적으로 론다 로우지를 요리했다. 무조건 저돌적으로 달려들어 승부를 내려고 서두는 론다 로우지를 요령껏 피해가며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고, 2회전에서는 멋진 하이 킥을 날려 KO승을 거뒀다. 쏟아지는 펀치를 피하지 못해 얼굴이 피투성이로 변한 론다 로우지는 링에 무기력하게 쓰러지면서 여왕의 체면을 구겼다.
 
  이 경기에서 론다 로우지의 모습은 아마추어 같았다. 상대방에 대한 연구를 전혀 안 한 듯 그저 자신의 스타일대로 ‘한 방’에 끝내려는 조급함을 보이며 홀리 홈을 쫓아다니기 급급한 모습이었다. 홀리 홈과의 경기를 끝내면 세계 웰터급 챔피언인 메이웨더(Floyd Mayweather Jr.·38)와 성대결을 벌이고 싶다고 공언하던 그녀였기에 이런 졸전을 치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외신에 따르면, 이 경기가 끝난 뒤 론다 로우지는 집에만 칩거하며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 경기에서 입은 부상에서 회복하는 데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니 몸과 마음이 모두 상했을 것 같다. 오만함이 병이었다면, 이것까지 치료하고 나왔으면 한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난 그녀가 멋지게 재기할 것이라 믿는다.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불모지나 다름없던 분야에서 한 발씩 전진하며 정상에 오른 여자이기 때문이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2015 여성스포츠 선수 수입랭킹에서 그녀는 650만 달러(한화 76억3000만원)로 8위를 기록했다.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녀의 실질 총수입은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론다 로우지는 유명 토크쇼 〈엘렌〉에 출연해 “난 UFC에서 가장 비싼 파이터”라면서 “내가 수입 순위에 든 것은 꽤 멋지고 재미있다고 생각한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옥타곤 걸보다 못한 대접을 받던 파이터에서 시작해 이젠 갑부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다.
 
  UFC가 흥행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그녀가 UFC 선수로서는 유일하게 스포츠 스타 수입 톱 10 순위에 진입한 건 스스로 대견스럽게 여길 만한 일일 듯하다.
 
  사실 내가 그녀를 눈여겨보는 이유는 이런 기록 때문이 아니다. 천하무적의 격투가면서도 여성성과 보편성을 잃지 않는 모습이 매력 있다. 론다 로우지는 화보 모델로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사진 속에서 은은한 화장을 한 그녀의 모습은 한창 예쁜 20대 처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일상생활 속의 그녀는 비디오 게임 마니아로 알려져 있다. 포켓몬스터 광팬이고, 마리오 카트에서는 늘 ‘블랙 요시’를 선택한단다. 워낙 게임을 좋아해 가끔은 스토리라인 컨설턴트도 한다. 연애도 열심히 해서 남자친구가 없었던 적이 없으며, 성 문제에 관해서도 개방된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현재의 애인은 같은 이종격투기 선수인 트래비스 브라운(Travis Browne·33)이다.
 
 
  ‘운동만 잘하는’ 여자가 아니라 ‘운동도 잘하는’ 여자가 인기인 세상
 
잠실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열린 2015 KLPGA 대상 시상식. 한국 여자 골프선수들이 반전의 매력을 보이며 시상식에 참석했다. 사진 : SBS Golf 방송화면 캡처.
  요즘 세계적인 여성 운동 선수들은 론다 로우지처럼 하나같이 ‘운동만 잘하는’ 여자가 아니라 ‘운동도 잘하는’ 여자로 다각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연말이면 스포츠 분야에서도 각종 시상식이 진행되는데, 이 중 세계를 무대로 뛰고 있는 한국 여자 골프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시상식을 보고 이런 트렌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필드 위의 그 무서운 소녀들이 맞는지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게 될 정도로 드레스를 입은 근사한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전의 매력을 갖고 있는 여성이야말로 멋지다.
 
  요즘 세상이 이런 분위기인데, 얼마 전 한 대기업 임원 승진 인사에서 여성 부사장으로 발탁된 한 중년 여성에 대한 기사와 칼럼을 읽고 입맛이 씁쓸했다. 이야기인즉, 회사에서 일에 매진한 증거로 취업한 이후 수십 년간 화장을 한 적이 몇 번 없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또 쉬지 않고 회사 일만 생각한다는 정황으로 “쉬는 시간에는 지방에 있는 어머니를 만나 함께 TV를 본다”고 했다. 그런 그녀를 두고 주변에서는 “자신의 일과 결혼한 여자”라고 했단다.
 
  내 생각에는, 이 기사로 인해 회사 임원으로 성공해 보려는 생각을 갖는 여성들이 많이 줄었을 것 같다. 특히 요즘 같은 세태에 화장을 안 하는 습관을 꼭 집어 근면한 여자의 상징으로 기사화한 것도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분야에서든 국제적인 위상에 이르는 성공신화를 쓴 여성들이 화장 안 한 부스스한 얼굴로 대중 앞에 등장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여성적 화사함을 줄 수 있는 옅은 화장은 복식과도 마찬가지라 공식적인 활동을 하는 여자라면 누구라도 갖춰야 할 예의이다. 격투를 하러 링에 올라온 선수가 아니라면 말이다.
 
  또 대기업 연구팀을 이끌고 있는 임원이 세상과 등을 진 채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한다는 점을 과연 미덕으로 봐야 하느냐는 의구심도 생겼다. 세상을 알아야 기발한 제품 아이디어, 포용적 리더십이 나올 수 있다. 결혼도 안 하고 쉬는 시간에 부모와 TV를 보는 게 취미활동의 전부라는 그가 일반 대중이 갖는 보편적 사고를 이해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이런 그를 두고 일과 결혼한 여자라고 주변에서 이야기를 한다는데, 결혼 안 한 채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그 구태의연한 말 속에 담긴 진심이 무엇인지 알고 기사화한 것인지도 궁금했다.
 
  론다 로우지가 남성적인 모습의 파이터였다면, 지금처럼 폭발적인 인기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 링에서는 화장을 지운 격투가가 되지만, 링 밖에서는 누군가의 애인도 되고 게임 마니아도 되는 금발의 예쁜 20대 아가씨라 더 매력 있는 것이다.
 
  여자로 태어났으면 여자로서 존재감을 지닌 상태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 문제는 스스로의 마음가짐일 뿐, 성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아야 오래 버티고 일할 수 있던 시절은 지났다. 철의 여인인 박근혜 대통령도 거친 정치판에 홀로 서 있을 때조차 여성성을 버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세상이 변했는데, 아직도 세상을 바라보는 창(窓) 역할을 해야 할 언론이 일하는 여성에 대한 구시대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엉뚱한 관점을 미화하고 있다면 조롱만 받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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