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행한 연애를 신비한 滋養으로 섭취해 문학으로 나아가
⊙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산중 樵夫와 ‘들병이’ 등과 어울려
⊙ “《朝光》 편집부엘 갔더니 웬 거지 같은 놈이 오는가 했더니 그가 裕貞이야”(金文輯)
⊙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산중 樵夫와 ‘들병이’ 등과 어울려
⊙ “《朝光》 편집부엘 갔더니 웬 거지 같은 놈이 오는가 했더니 그가 裕貞이야”(金文輯)
김유정기념사업회가 1994년 펴낸 두 권짜리 《김유정 전집》에는 생전 유정이 썼던 소설과 수필이 모두 실려 있다. 스물아홉에 요절한 김유정은 4년(1933~1937)이라는 짧은 창작기간 30여 편의 소설과 10여 편의 수필을 남겼는데 사후 유고(遺稿)가 발견됐다는 기록이나 증언은 없는 상태다.
《김유정 전집》에는 안회남, 김문집, 이석훈, 채만식, 모윤숙, 강로향, 박태원 등 동료 문인들이 유정의 죽음을 애도하는 회고 글이 다수 실렸다. 이들 중 유정과 가장 가까운 문인은 휘문고보 동문인 안회남이다. 안회남의 중편 〈겸허-김유정전〉은 문학연구자들 사이에 회자했으나, 《월간조선》이 소개하는 산문 〈작가 유정론-그 일주기를 당하여〉와 〈악동(惡童)-회우수필(懷友隨筆)〉은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김유정기념사업회가 펴낸 《김유정 전집》에도 실리지 않았다.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 안회남은 1944년 일본의 징용으로 규슈(九州)로 끌려갔다가 8·15광복 후 귀국해 좌익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소설부 위원장(시부 위원장은 김기림, 평론부 위원장은 양주동)을 지냈다. 월북한 뒤 1960년대 중반에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가 裕貞론—그 一週忌를 當하여〉
유정이 일찍 잡담 끝에 “인류의 역사는 애(愛)의 투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그의 소상(小祥)을 당하여 작가 유정의 생애를 회고하며 이 말을 생각하게 될 때 이것은 그대로 그의 자신에 완전히 들어맞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항상 가난하고 텅 빈 자기의 생활을 그는 사랑하는 정열을 가지고 화려하게 장식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직 나이 어린 시절의 옛날부터 별세하던 마지막 날까지 그 대상으로서 언제든지 연애하는 여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무로서 방관하고 제삼자의 입장에서 비판하여 본다면 참 너무도 딱하고 불행한 것들뿐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정히 투쟁이었고 피 흘리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면 유정은 이겼는가, 졌는가, 나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연애에 실패하는 것이, 즉 싸움의 패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는 사랑에는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투쟁에는 이겼다고 봅니다.
그것은 유정이 언제든지 연애를 획득하려 하는 행동보다 연애를 창조하려는 정열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 번 실연(失戀)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사람의 가슴을 치고 감격시키는 비장한 실연의 걸작품이 창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하면 그의 말한바, 애의 투쟁의 전적은 나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게 합니다. 아무 이기와 공명도 없이 빤히 가능치 못하고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실행하였습니다. 그것은 우선 자기의 양심에조차 추호라도 사실을 은폐하거나 기만하려 하지 않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컸기 까닭이었습니다. 그것은 흡사히 무서워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려는 심정이었습니다.
시종(始終)이 여일(如一)하게 그는 이토록 경건하고 비세속적이었으며 그의 정신적 유혈은 온 생활을 청정하게 씻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어 또한 허무하고 빈약한 그의 삶을 스스로 의의 있게 채색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외쪽 사랑에서 중세기 암흑시대의 일대 광휘인 《신곡(神曲)》을 생산하였거니와 우리의 요절한 작가 유정에게도 이러한 면영(面影)이 있어 그의 생애와 작품은 진실과 정열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풍족한 생활과 행복된 연애가 있지 못했던 것은 인간 유정을 위하여 몹시 아픈 일이고, 또 그러한 가운데에서 걷어지는 수확을 보지 못했음도 아쉬운 일이로되 그가 그렇게 빨리 가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보다 더 위대한 문학을 그에게 기대하여 보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압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의 보수(報酬)는 사랑한다는 마음과 태도 그 자체라고 누가 말하였지만, 유정의 생애가 이것을 실증하고 잘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 ‘테니슨’은 연애하다가 실패하는 것은 당초부터 연애하지 않은 것보다 훨씬 훌륭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어떠한 사람은 실연은 오히려 연애에 성공하는 것보다도 나은 것이라고 극언하였습니다.
이 말의 정곡(正鵠)은 여기서 따질 바 아니나 여하간 유정은 불행한 연애 속에서 늘 그것을 헛되이 하지 않고 거룩하며 신비한 자양(滋養)으로 섭취하여 스스로 연애의 고귀한 보수를 받아서는 그것을 오로지 문학의 세계에로 흡수한 것입니다.
失戀한 불행의 덕택으로 훌륭한 작가가 돼
〈소낙비〉 1등을 가지고 눈부시게 문단에 등장하여 작년 3월 28일 그가 영면한 날까지 3년 내외의 세월을 유정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하였고 작가 유정은 말할 수 없이 찬란하였습니다.
부모도 가정도 없이 병마에 신음하는 그를 위하여 전 문단인이 총출동으로 연복(捐福)하는 금전(金錢)을 모아본 것도 우리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그만치 짧은 시일에 장편소설 한 개, 중편 한 개 및 30여 편을 산(算)하는 단편소설을 내어 질적으로는 물론 양적으로도 그렇게 우리를 경탄하게 한 것도 그가 비로소 처음이었습니다.
유정은 언제든지 가난하고 병고에 시달렸으며 언제든지 한 여성을 숭배하고 연모하였으며 언제든지 문학을 생각하고 소설을 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생활이 빈한하면 할수록, 공허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순결한 정열로 사랑의 투쟁을 계속하였고 그의 연애가 불행하면 할수록, 비장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의 싸움의 열혈은 문학으로 주입되었나니 유정은 실연하고 불행한 덕택으로 오히려 그토록 훌륭한 작가가 되었다고 말하여도 그것이 그냥 역설로만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의 투쟁이 원동력이 되어 그의 문학의 투쟁을 유도하였으나 그것이 작품의 재료로 직접 사용되는 법은 퍽 적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작품 속에는 자기 자신을 이야기한 소위 신변소설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인데 그의 생애가 그렇게 주관적 색채로 농후한데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은 아주 완전히 객관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유정이 대단(大端) 우수한 작가의 소질을 가졌었다는 것을 가장 잘 표명하여 주는 사실입니다. 당최 조그마한 세계에 구애되지 않고 얼마든지 넓고 길게 굴신(屈伸)할 역량 아래에서 된 것으로 인간적으로는 그렇게 ‘센티멘탈’하고 ‘로맨틱’하면서도 작가적으로는 전연 상이한 성격을 나타내어 어디까지든지 ‘와일드’하고 호흡이 억센 것입니다.
처녀작 〈산골 나그네〉나 당선작 〈소낙비〉나 금번 《현대조선문학전집》 속에 수록된 〈봄봄〉 〈총각과 맹꽁이〉 등등 어느 것을 잡아보나 크고 당당하고 야성적입니다. 생각건대 조선의 향토색과 민속을 제멋대로 가장 잘 표현한 작가가 그였으며 이 땅의 언어와 문장이 가지는 고유한 전통에다 제일 곱고 멋진 재조(才操)를 부려 완성한 문인이 유정입니다.
그는 한때 순진후박(純眞厚朴)한 소년이 인생의 초년병으로 어지간한 신고(辛苦)를 겪은 다음 아주 삶에 대한 회의파(懷疑派)로 전락한 시대를 겪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의 고향인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산중의 초부(樵夫)들과 ‘들병이’라는 이를테면 조선의 ‘집시’를 따라다니며 막걸리나 마시고 그들의 노래나 배워 부르고 하며 그러한 풍습에 철저하게 젖었었습니다.
원래가 그의 성격은 조선 정조(情調)에 예민한 인물이지만 이 시절에 그냥 흠뻑 그의 작품에 그려진 것 같은 세계에 침투하고 그들의 생활과 심리를 잘 관찰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의 모든 작품은 도회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진기한 이야기와 특이한 분위기로 가득하여 있는 것입니다. 아마 ‘들병이’라는 부녀(婦女)들의 생활과 풍속이 소개된 것도 유정의 작품이 효시일 것이며 ‘들병이’라는 한 개의 단어가 말의 상식으로 우리 문단에 널리 전파된 것까지가 유정의 작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상 위 ‘謙虛’라는 두 글자
그는 병상에 누워 신음하는 몸이면서도 쉬지 않고 싸웠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동정할 만한 인간 유정보다도 오직 작가 유정이 찬란한 것이나 당자(當者) 유정에게 있어서는 문학적 성공을 기뻐하게 될 보다 아마 인간적으로 자기가 당하는 비애가 더욱더 애끓게 아팠던 모양입니다.
너무나 약하고 너무나 쪼들려서 항상 슬픈 비극에 사로잡혀 있는 몸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인격으로서 훌륭함과 생활상으로 지극히 청순함과 문학적으로 광채 있는 것을 스스로 조금밖에는 인식하지 못하고 늘 자기의 하잘 것 없는 꼴만이 마음에 걸렸던 상 싶습니다. 그래서 싸우고 노력하여 아름다운 유혈로 그것을 장식하여 놓으면 놓을수록 그 정신적이요, 비물질적인 것이 더욱 보잘 것 없고 텅 빈 것만 같아서 초조하였던 것입니다.
나중에 그는 흡사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고 하는 따위의 심정을 갖게도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단판씨름이었습니다. 그의 생전에서도 이러한 기적을 희구했던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지만 그의 예술에 있어서도 가령 생명까지를 돌보지 않고 죽기 얼마 전까지 역작을 계속 발표하여 온 것 역시 허둥지둥하여 어떻게 하면 삶의 무상함과 생의 공허함을 막아볼까 하는 안타까운 행동이었던 것이라고 봅니다.
이때에 와서 유정에게는 자기 자신에게 무슨 이익 되는 것을 찾는 것보다 사람으로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일층 절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행복스러운 인생보다도 나는 인제 절망이요, 그것을 바랄 수 없으니 그저 의의 있는 인생을 발견하리라는 태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초조한 그에게는 이러한 것까지 그리 탐탁하게 여겨지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유정이 세상을 떠나기 조금 앞서서 문병을 갔더니 그의 책상 위에는 ‘겸허(謙虛)’라는 두 글자가 커다랗게 씌어서 붙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욕망하였던 인간이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을 때의 일일 것입니다. 오직 절망이요, 그냥 허무한 그 속에 ○○(판독불가=편집자註)히 귀의하겠다는 무저항의 한 개 종교의 세계였으며 진실하고 착한 사람만이 도달하는 최후의 가장 깨끗하고 거룩한 경지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참 인간이고 이 같은 인물이 단 한 개의 소설을 썼어도 그가 정말 예술가입니다. 나는 그때 아무 말도 않고 그 ‘겸허’ 두 글자를 바라다보고 앉았었으나 속으로는 유정을 불쌍히 여기고 존경하였던 것입니다. (3월 28일 記)
(출처=《조선일보》 1938년 3월 29일, 31일)
〈惡童—懷友隨筆〉
동무들 이야기를 하려니까 죽은 유정 생각이 먼저 난다. 그에 대하여서는 여러 번 붓을 들었었건만 지금에 또다시 말머리가 그곳으로 향하여지는 것을 어찌할 도리 없다.
언젠가 유정은 그 기름때가 족 흐르는 검정 주의(周衣)에 팔짱을 끼고 모자도 없이 봉두(蓬頭) 그대로의 모양으로 나를 찾아와서는 어느 병원에 갔다가 푸대접받은 하소연을 했다. 그때 그 가엾은 그의 안색이 이따금 눈과 마음에 아른거린다.
김문집(金文輯) 군도 유정을 처음 대면하고 나서 “《조광(朝光)》 편집부엘 갔더니 아주 헌털뱅이를 입고 웬 거지(乞人) 같은 놈이 들어오는데 그것이 소설가 유정이었단 말이야” 말하였다.
그 후 이것을 유정 군에게 이야기했더니 내가 박장대소하는 옆에서 그는 쓸쓸히 웃었다.
유정과 사귀기는 중학시대였는데 그때 우리 ‘클래스’에서 결석, 지각, 조퇴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둘이 있었다. 그것이 유정과 나였다. 우리는 그때 1주 평균 3, 4일은 으레 학교를 메어 따렸는데 유정과 나와는 이것으로 서로 알게도 되었고 나중에 친하게도 되었던 것이다.
다음부터 내가 학교엘 가기 싫으면 유정을 찾아갔고 유정이도 같은 의사를 품었으면 나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혼자서 결석을 하면 학교 선생님이라든지 부모님이 공연히 무서워지고 속이 종일 불안한 것이었으나 동무와 함께 공모를 하고 둘이 노는 때에는 이상스럽게 그 공포심이 없어지고 든든했던 것이다.
책보를 끼고 집에서 나오면 우리 둘이는 약속한 장소에서 영락없이 만났고 만나서는 서로 일부러 늦장 피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각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고 지각이 되고 말 시간이면 “늦었으니까 오늘도 그만두자” 서로 무언지중(無言之中)에 바라는 심리였다.
그때 신조사(新潮社) 출판 《세계문학전집》이 출간되기 비롯한 때였는데 그러면 우리는 취령산이나 남산으로 올라가서 독서도 하고 운동도 하고 또 ○○○○○○(판독불가=편집자註)을 알려주면 변또(도시락=편집자註)도 먹었다. 변또를 먹어치우는 것은 그날의 특별한 근무로 집에다 빈 변또를 내어놓는 것은 학교엘 잘 다녀왔다는 표적이 되는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등교할 때만 우리는 같이 가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올 때에도 으레 동행이었다. 우선 두 학생이 우리 집으로 와서는 오늘 학교를 메어 따리고 딴 데서 땅재주를 넘으며 재미있게 놀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부모님께 꾸중을 안 듣고 외려 칭찬을 듣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자기 집으로 갔다. 그러면 이번에는 나의 차례였다. 동무를 바래다준다고 나는 유정 군과 그의 집에까지 함께 가서 그가 무사한 것을 본 후에야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몇 해를 지냈다.
“칼을 받을 테냐, 주먹을 받을 테냐”
하루는 그를 데리고 가니까 별안간 안마당에서 추상같은 호령이 들려왔다. 어린 나는 우쭐해서 친우의 안부가 궁금하므로 가만히 중문을 들어서서 엿을 보니까 유정은 대청 가운데 가서 고개를 조용히 숙이고 있고 술이 얼근하게 취한 그의 백씨(伯氏)가 그 앞에 서서 “너 이놈 유정아, 칼을 받을 테냐. 그렇지 않으면 주먹을 받을 테냐” 대성질호(大聲叱呼)하는 것이다. 가엾은 유정은 물론 칼을 사양하고 주먹을 받았는데 이튿날에는 또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우리는 산으로 가서 하루를 제 세상처럼 잘 노는 것이었다.
생각하니 유정이 학교엘 결석하게 된 것은 그의 불화한 가정 사정으로 말미암은 듯하였다. 후년에는 영락하였으나 그때에는 김문집 군에게 거지같이 보였던 유정도 수십만 원 재산가의 대갓집 도련님이었었다. 그러나 유정은 그때부터서 불행하였던 것이다.
유정은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외로웠다. 그의 백씨는 아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몹시 방탕하였으며 주벽이 괴악하였다. 수십만의 거재를 그냥 물 뿌리 듯하여 없앴고 밤낮 술을 먹었으며 취하면 으레 당시 유정이 결단코 품행 방정한 생도가 못 된 것은 이러한 가정의 분위기가 연유하였음이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뒤에 오래도록 유정의 성격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유정과 내가 같이서 술이 취하여 무슨 문제로 논쟁(論爭)하다가는 그의 비굴한 태도를 꾸짖고 그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 그때 유정은 한 살 연소(年少)한 동무의 앞에서도 흡사히 포학한 자기의 형님에게서 무서운 칼을 사양하는 때처럼 오직 유순(柔順)하게 뺨에다 나의 주먹을 받는 것이었다. 나는 착하고 가엾은 동무를 때리고 나서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였다.
후일 그의 집안이 아주 몰락하여졌을 때 유정과 그의 형님은 형제가 똑같은 모양으로 더북한 머리에다 검정 두루마기에 팔짱을 끼고 다니었다.
하루는 깊은 밤에 대문 밖에서 누가 찾길래 나가보았더니 그들 두 사람이었는데 유정이 득의만면의 표정으로 “필승(必承-안회남의 본명=편집자註)아, 우리 형님을 뫼시고 왔는데 우리 막걸리나 먹으러 가자” 그때부터 한동안 흑색 주의의 우리 봉두 삼인조는 찹쌀막걸리 집이니, 빈대떡 집이니, 갈비 집이니, 뼈다귀 집이니 하는 목로로 횡행하였다.
그러나 유정과 나와는 처지가 서로 정반대로 되었다. 나는 나의 원하는 대로 결혼에 성공하였건만 그는 실연하였고 나는 조모님의 유산을 받았건만 그의 집안은 영패(零敗)하였고 나는 건강하였건만 그는 병상에 눕게 되었다. 아니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데 그는 작고한 지 이미 오래다. 지금 나는 고우(古友) 유정의 작품이며 일기며 서간 등속(等屬), 일체의 유묵을 보관하여 가지고 있는데 내가 결혼하던 날 당일의 유정일기를 보면 그 일절(一節)에 자기는 행복된 생활이란 영원히 단념하고 오직 예술 그것과의 일생을 살겠다고 기록하였다. 그때 그는 실연한 즉후(卽後)인지라 동무의 이 경사가 기쁘면서도 일변 끔찍이 부럽고 애달팠던 모양이다.
‘행복된 생활을 영원히 단념하고 예술과 일생을 살겠다’
아아, 그러나 하늘은 어찌하여 예술과 결혼하여 일생을 고독하게 지내겠다는 그에게 수명까지를 아까워하여 요절케 하였던고.
지금 나에게는 친밀한 벗이 많으나 아직 유정과 같은 동무는 없다. 그러나 현재 회남(懷南)은 퍽 행복스럽다. 세상의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고 아무것도 탐내지 않으며 마음에 걸리는 무엇도 없다. 외람(猥濫)한 소리이나 혹은 유정이 꿈꾸었던 일부의 이상을 나는 지금 실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회남은 사랑하는 처자와 희롱하며 불행한 친우 유정을 곧잘 잊어버리고 만다. 이 한 가지 일로 생각하면 불행한 유정에게 또 한 가지의 새로운 불행일 거다. 유정을 위하여서는 자꾸 슬프기만 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어쩌는 수 없이 가끔 유정을 생각하게 되고 한 번 그를 추억하게 되면 아쉽고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 옛날 학교를 공모하고 메어 따린 생각이 난다. 그의 형님까지 휩쓸려서 술로 울분을 풀던 생각도 난다. 김문집 군의 평언(評言) 말마따나, 거지 같은 꼴로 동무를 찾아 방황하던 모양이 눈에 어른거린다. 항상 외쪽 사랑하는 연애를 하소연하고 또 이론을 펴놓던 그의 일이 되풀이된다.
아아, 유정은 작년 이맘때 조금 앞서서 죽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사실 수없이 그를 추억하고 몇 번이나 괴로워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 유정은 한 번 죽고 말았으되 그것을 생각하는 나는 앞으로 일평생을 두고두고 몇천 번이라도 슬퍼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조선일보》 1938년 6월 8~9일) (자료제공=金鍾旭)⊙
《김유정 전집》에는 안회남, 김문집, 이석훈, 채만식, 모윤숙, 강로향, 박태원 등 동료 문인들이 유정의 죽음을 애도하는 회고 글이 다수 실렸다. 이들 중 유정과 가장 가까운 문인은 휘문고보 동문인 안회남이다. 안회남의 중편 〈겸허-김유정전〉은 문학연구자들 사이에 회자했으나, 《월간조선》이 소개하는 산문 〈작가 유정론-그 일주기를 당하여〉와 〈악동(惡童)-회우수필(懷友隨筆)〉은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김유정기념사업회가 펴낸 《김유정 전집》에도 실리지 않았다.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 안회남은 1944년 일본의 징용으로 규슈(九州)로 끌려갔다가 8·15광복 후 귀국해 좌익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소설부 위원장(시부 위원장은 김기림, 평론부 위원장은 양주동)을 지냈다. 월북한 뒤 1960년대 중반에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가 裕貞론—그 一週忌를 當하여〉
유정이 일찍 잡담 끝에 “인류의 역사는 애(愛)의 투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그의 소상(小祥)을 당하여 작가 유정의 생애를 회고하며 이 말을 생각하게 될 때 이것은 그대로 그의 자신에 완전히 들어맞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항상 가난하고 텅 빈 자기의 생활을 그는 사랑하는 정열을 가지고 화려하게 장식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직 나이 어린 시절의 옛날부터 별세하던 마지막 날까지 그 대상으로서 언제든지 연애하는 여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무로서 방관하고 제삼자의 입장에서 비판하여 본다면 참 너무도 딱하고 불행한 것들뿐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정히 투쟁이었고 피 흘리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면 유정은 이겼는가, 졌는가, 나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연애에 실패하는 것이, 즉 싸움의 패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는 사랑에는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투쟁에는 이겼다고 봅니다.
그것은 유정이 언제든지 연애를 획득하려 하는 행동보다 연애를 창조하려는 정열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 번 실연(失戀)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사람의 가슴을 치고 감격시키는 비장한 실연의 걸작품이 창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하면 그의 말한바, 애의 투쟁의 전적은 나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게 합니다. 아무 이기와 공명도 없이 빤히 가능치 못하고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실행하였습니다. 그것은 우선 자기의 양심에조차 추호라도 사실을 은폐하거나 기만하려 하지 않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컸기 까닭이었습니다. 그것은 흡사히 무서워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려는 심정이었습니다.
시종(始終)이 여일(如一)하게 그는 이토록 경건하고 비세속적이었으며 그의 정신적 유혈은 온 생활을 청정하게 씻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어 또한 허무하고 빈약한 그의 삶을 스스로 의의 있게 채색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외쪽 사랑에서 중세기 암흑시대의 일대 광휘인 《신곡(神曲)》을 생산하였거니와 우리의 요절한 작가 유정에게도 이러한 면영(面影)이 있어 그의 생애와 작품은 진실과 정열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풍족한 생활과 행복된 연애가 있지 못했던 것은 인간 유정을 위하여 몹시 아픈 일이고, 또 그러한 가운데에서 걷어지는 수확을 보지 못했음도 아쉬운 일이로되 그가 그렇게 빨리 가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보다 더 위대한 문학을 그에게 기대하여 보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압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의 보수(報酬)는 사랑한다는 마음과 태도 그 자체라고 누가 말하였지만, 유정의 생애가 이것을 실증하고 잘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 ‘테니슨’은 연애하다가 실패하는 것은 당초부터 연애하지 않은 것보다 훨씬 훌륭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어떠한 사람은 실연은 오히려 연애에 성공하는 것보다도 나은 것이라고 극언하였습니다.
이 말의 정곡(正鵠)은 여기서 따질 바 아니나 여하간 유정은 불행한 연애 속에서 늘 그것을 헛되이 하지 않고 거룩하며 신비한 자양(滋養)으로 섭취하여 스스로 연애의 고귀한 보수를 받아서는 그것을 오로지 문학의 세계에로 흡수한 것입니다.
失戀한 불행의 덕택으로 훌륭한 작가가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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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유정(裕貞)론-그 일주기(一週忌)를 당(當)하여〉가 게재된 《조선일보》 1938년 3월 29일자. 원 안의 사진이 소설가 안회남이다. |
부모도 가정도 없이 병마에 신음하는 그를 위하여 전 문단인이 총출동으로 연복(捐福)하는 금전(金錢)을 모아본 것도 우리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그만치 짧은 시일에 장편소설 한 개, 중편 한 개 및 30여 편을 산(算)하는 단편소설을 내어 질적으로는 물론 양적으로도 그렇게 우리를 경탄하게 한 것도 그가 비로소 처음이었습니다.
유정은 언제든지 가난하고 병고에 시달렸으며 언제든지 한 여성을 숭배하고 연모하였으며 언제든지 문학을 생각하고 소설을 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생활이 빈한하면 할수록, 공허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순결한 정열로 사랑의 투쟁을 계속하였고 그의 연애가 불행하면 할수록, 비장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의 싸움의 열혈은 문학으로 주입되었나니 유정은 실연하고 불행한 덕택으로 오히려 그토록 훌륭한 작가가 되었다고 말하여도 그것이 그냥 역설로만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의 투쟁이 원동력이 되어 그의 문학의 투쟁을 유도하였으나 그것이 작품의 재료로 직접 사용되는 법은 퍽 적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작품 속에는 자기 자신을 이야기한 소위 신변소설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인데 그의 생애가 그렇게 주관적 색채로 농후한데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은 아주 완전히 객관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유정이 대단(大端) 우수한 작가의 소질을 가졌었다는 것을 가장 잘 표명하여 주는 사실입니다. 당최 조그마한 세계에 구애되지 않고 얼마든지 넓고 길게 굴신(屈伸)할 역량 아래에서 된 것으로 인간적으로는 그렇게 ‘센티멘탈’하고 ‘로맨틱’하면서도 작가적으로는 전연 상이한 성격을 나타내어 어디까지든지 ‘와일드’하고 호흡이 억센 것입니다.
처녀작 〈산골 나그네〉나 당선작 〈소낙비〉나 금번 《현대조선문학전집》 속에 수록된 〈봄봄〉 〈총각과 맹꽁이〉 등등 어느 것을 잡아보나 크고 당당하고 야성적입니다. 생각건대 조선의 향토색과 민속을 제멋대로 가장 잘 표현한 작가가 그였으며 이 땅의 언어와 문장이 가지는 고유한 전통에다 제일 곱고 멋진 재조(才操)를 부려 완성한 문인이 유정입니다.
그는 한때 순진후박(純眞厚朴)한 소년이 인생의 초년병으로 어지간한 신고(辛苦)를 겪은 다음 아주 삶에 대한 회의파(懷疑派)로 전락한 시대를 겪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의 고향인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산중의 초부(樵夫)들과 ‘들병이’라는 이를테면 조선의 ‘집시’를 따라다니며 막걸리나 마시고 그들의 노래나 배워 부르고 하며 그러한 풍습에 철저하게 젖었었습니다.
원래가 그의 성격은 조선 정조(情調)에 예민한 인물이지만 이 시절에 그냥 흠뻑 그의 작품에 그려진 것 같은 세계에 침투하고 그들의 생활과 심리를 잘 관찰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의 모든 작품은 도회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진기한 이야기와 특이한 분위기로 가득하여 있는 것입니다. 아마 ‘들병이’라는 부녀(婦女)들의 생활과 풍속이 소개된 것도 유정의 작품이 효시일 것이며 ‘들병이’라는 한 개의 단어가 말의 상식으로 우리 문단에 널리 전파된 것까지가 유정의 작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상 위 ‘謙虛’라는 두 글자
그는 병상에 누워 신음하는 몸이면서도 쉬지 않고 싸웠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동정할 만한 인간 유정보다도 오직 작가 유정이 찬란한 것이나 당자(當者) 유정에게 있어서는 문학적 성공을 기뻐하게 될 보다 아마 인간적으로 자기가 당하는 비애가 더욱더 애끓게 아팠던 모양입니다.
너무나 약하고 너무나 쪼들려서 항상 슬픈 비극에 사로잡혀 있는 몸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인격으로서 훌륭함과 생활상으로 지극히 청순함과 문학적으로 광채 있는 것을 스스로 조금밖에는 인식하지 못하고 늘 자기의 하잘 것 없는 꼴만이 마음에 걸렸던 상 싶습니다. 그래서 싸우고 노력하여 아름다운 유혈로 그것을 장식하여 놓으면 놓을수록 그 정신적이요, 비물질적인 것이 더욱 보잘 것 없고 텅 빈 것만 같아서 초조하였던 것입니다.
나중에 그는 흡사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고 하는 따위의 심정을 갖게도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단판씨름이었습니다. 그의 생전에서도 이러한 기적을 희구했던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지만 그의 예술에 있어서도 가령 생명까지를 돌보지 않고 죽기 얼마 전까지 역작을 계속 발표하여 온 것 역시 허둥지둥하여 어떻게 하면 삶의 무상함과 생의 공허함을 막아볼까 하는 안타까운 행동이었던 것이라고 봅니다.
이때에 와서 유정에게는 자기 자신에게 무슨 이익 되는 것을 찾는 것보다 사람으로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일층 절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행복스러운 인생보다도 나는 인제 절망이요, 그것을 바랄 수 없으니 그저 의의 있는 인생을 발견하리라는 태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초조한 그에게는 이러한 것까지 그리 탐탁하게 여겨지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유정이 세상을 떠나기 조금 앞서서 문병을 갔더니 그의 책상 위에는 ‘겸허(謙虛)’라는 두 글자가 커다랗게 씌어서 붙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욕망하였던 인간이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을 때의 일일 것입니다. 오직 절망이요, 그냥 허무한 그 속에 ○○(판독불가=편집자註)히 귀의하겠다는 무저항의 한 개 종교의 세계였으며 진실하고 착한 사람만이 도달하는 최후의 가장 깨끗하고 거룩한 경지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참 인간이고 이 같은 인물이 단 한 개의 소설을 썼어도 그가 정말 예술가입니다. 나는 그때 아무 말도 않고 그 ‘겸허’ 두 글자를 바라다보고 앉았었으나 속으로는 유정을 불쌍히 여기고 존경하였던 것입니다. (3월 28일 記)
(출처=《조선일보》 1938년 3월 29일, 31일)
〈惡童—懷友隨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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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938년 6월 8일과 9일 두 차례 연재된 안회남의 〈악동(惡童)―회우수필(懷友隨筆)〉. |
언젠가 유정은 그 기름때가 족 흐르는 검정 주의(周衣)에 팔짱을 끼고 모자도 없이 봉두(蓬頭) 그대로의 모양으로 나를 찾아와서는 어느 병원에 갔다가 푸대접받은 하소연을 했다. 그때 그 가엾은 그의 안색이 이따금 눈과 마음에 아른거린다.
김문집(金文輯) 군도 유정을 처음 대면하고 나서 “《조광(朝光)》 편집부엘 갔더니 아주 헌털뱅이를 입고 웬 거지(乞人) 같은 놈이 들어오는데 그것이 소설가 유정이었단 말이야” 말하였다.
그 후 이것을 유정 군에게 이야기했더니 내가 박장대소하는 옆에서 그는 쓸쓸히 웃었다.
유정과 사귀기는 중학시대였는데 그때 우리 ‘클래스’에서 결석, 지각, 조퇴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둘이 있었다. 그것이 유정과 나였다. 우리는 그때 1주 평균 3, 4일은 으레 학교를 메어 따렸는데 유정과 나와는 이것으로 서로 알게도 되었고 나중에 친하게도 되었던 것이다.
다음부터 내가 학교엘 가기 싫으면 유정을 찾아갔고 유정이도 같은 의사를 품었으면 나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혼자서 결석을 하면 학교 선생님이라든지 부모님이 공연히 무서워지고 속이 종일 불안한 것이었으나 동무와 함께 공모를 하고 둘이 노는 때에는 이상스럽게 그 공포심이 없어지고 든든했던 것이다.
책보를 끼고 집에서 나오면 우리 둘이는 약속한 장소에서 영락없이 만났고 만나서는 서로 일부러 늦장 피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각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고 지각이 되고 말 시간이면 “늦었으니까 오늘도 그만두자” 서로 무언지중(無言之中)에 바라는 심리였다.
그때 신조사(新潮社) 출판 《세계문학전집》이 출간되기 비롯한 때였는데 그러면 우리는 취령산이나 남산으로 올라가서 독서도 하고 운동도 하고 또 ○○○○○○(판독불가=편집자註)을 알려주면 변또(도시락=편집자註)도 먹었다. 변또를 먹어치우는 것은 그날의 특별한 근무로 집에다 빈 변또를 내어놓는 것은 학교엘 잘 다녀왔다는 표적이 되는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등교할 때만 우리는 같이 가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올 때에도 으레 동행이었다. 우선 두 학생이 우리 집으로 와서는 오늘 학교를 메어 따리고 딴 데서 땅재주를 넘으며 재미있게 놀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부모님께 꾸중을 안 듣고 외려 칭찬을 듣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자기 집으로 갔다. 그러면 이번에는 나의 차례였다. 동무를 바래다준다고 나는 유정 군과 그의 집에까지 함께 가서 그가 무사한 것을 본 후에야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몇 해를 지냈다.
“칼을 받을 테냐, 주먹을 받을 테냐”
하루는 그를 데리고 가니까 별안간 안마당에서 추상같은 호령이 들려왔다. 어린 나는 우쭐해서 친우의 안부가 궁금하므로 가만히 중문을 들어서서 엿을 보니까 유정은 대청 가운데 가서 고개를 조용히 숙이고 있고 술이 얼근하게 취한 그의 백씨(伯氏)가 그 앞에 서서 “너 이놈 유정아, 칼을 받을 테냐. 그렇지 않으면 주먹을 받을 테냐” 대성질호(大聲叱呼)하는 것이다. 가엾은 유정은 물론 칼을 사양하고 주먹을 받았는데 이튿날에는 또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우리는 산으로 가서 하루를 제 세상처럼 잘 노는 것이었다.
생각하니 유정이 학교엘 결석하게 된 것은 그의 불화한 가정 사정으로 말미암은 듯하였다. 후년에는 영락하였으나 그때에는 김문집 군에게 거지같이 보였던 유정도 수십만 원 재산가의 대갓집 도련님이었었다. 그러나 유정은 그때부터서 불행하였던 것이다.
유정은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외로웠다. 그의 백씨는 아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몹시 방탕하였으며 주벽이 괴악하였다. 수십만의 거재를 그냥 물 뿌리 듯하여 없앴고 밤낮 술을 먹었으며 취하면 으레 당시 유정이 결단코 품행 방정한 생도가 못 된 것은 이러한 가정의 분위기가 연유하였음이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뒤에 오래도록 유정의 성격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유정과 내가 같이서 술이 취하여 무슨 문제로 논쟁(論爭)하다가는 그의 비굴한 태도를 꾸짖고 그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 그때 유정은 한 살 연소(年少)한 동무의 앞에서도 흡사히 포학한 자기의 형님에게서 무서운 칼을 사양하는 때처럼 오직 유순(柔順)하게 뺨에다 나의 주먹을 받는 것이었다. 나는 착하고 가엾은 동무를 때리고 나서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였다.
후일 그의 집안이 아주 몰락하여졌을 때 유정과 그의 형님은 형제가 똑같은 모양으로 더북한 머리에다 검정 두루마기에 팔짱을 끼고 다니었다.
하루는 깊은 밤에 대문 밖에서 누가 찾길래 나가보았더니 그들 두 사람이었는데 유정이 득의만면의 표정으로 “필승(必承-안회남의 본명=편집자註)아, 우리 형님을 뫼시고 왔는데 우리 막걸리나 먹으러 가자” 그때부터 한동안 흑색 주의의 우리 봉두 삼인조는 찹쌀막걸리 집이니, 빈대떡 집이니, 갈비 집이니, 뼈다귀 집이니 하는 목로로 횡행하였다.
그러나 유정과 나와는 처지가 서로 정반대로 되었다. 나는 나의 원하는 대로 결혼에 성공하였건만 그는 실연하였고 나는 조모님의 유산을 받았건만 그의 집안은 영패(零敗)하였고 나는 건강하였건만 그는 병상에 눕게 되었다. 아니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데 그는 작고한 지 이미 오래다. 지금 나는 고우(古友) 유정의 작품이며 일기며 서간 등속(等屬), 일체의 유묵을 보관하여 가지고 있는데 내가 결혼하던 날 당일의 유정일기를 보면 그 일절(一節)에 자기는 행복된 생활이란 영원히 단념하고 오직 예술 그것과의 일생을 살겠다고 기록하였다. 그때 그는 실연한 즉후(卽後)인지라 동무의 이 경사가 기쁘면서도 일변 끔찍이 부럽고 애달팠던 모양이다.
‘행복된 생활을 영원히 단념하고 예술과 일생을 살겠다’
아아, 그러나 하늘은 어찌하여 예술과 결혼하여 일생을 고독하게 지내겠다는 그에게 수명까지를 아까워하여 요절케 하였던고.
지금 나에게는 친밀한 벗이 많으나 아직 유정과 같은 동무는 없다. 그러나 현재 회남(懷南)은 퍽 행복스럽다. 세상의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고 아무것도 탐내지 않으며 마음에 걸리는 무엇도 없다. 외람(猥濫)한 소리이나 혹은 유정이 꿈꾸었던 일부의 이상을 나는 지금 실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회남은 사랑하는 처자와 희롱하며 불행한 친우 유정을 곧잘 잊어버리고 만다. 이 한 가지 일로 생각하면 불행한 유정에게 또 한 가지의 새로운 불행일 거다. 유정을 위하여서는 자꾸 슬프기만 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어쩌는 수 없이 가끔 유정을 생각하게 되고 한 번 그를 추억하게 되면 아쉽고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 옛날 학교를 공모하고 메어 따린 생각이 난다. 그의 형님까지 휩쓸려서 술로 울분을 풀던 생각도 난다. 김문집 군의 평언(評言) 말마따나, 거지 같은 꼴로 동무를 찾아 방황하던 모양이 눈에 어른거린다. 항상 외쪽 사랑하는 연애를 하소연하고 또 이론을 펴놓던 그의 일이 되풀이된다.
아아, 유정은 작년 이맘때 조금 앞서서 죽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사실 수없이 그를 추억하고 몇 번이나 괴로워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 유정은 한 번 죽고 말았으되 그것을 생각하는 나는 앞으로 일평생을 두고두고 몇천 번이라도 슬퍼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조선일보》 1938년 6월 8~9일) (자료제공=金鍾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