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집] 독립운동가의 아들이 말하는 韓日 어제, 오늘, 내일 : 월간조선

“일본은 어제까지는 우리의 가장 큰 원수였지만, 오늘부터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해방 다음 날인 1945년 8월 16일. 어머니(김숙자·金淑姿)가 하신 말씀이다. 이날 감추어 두었던 당신의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이화여고) 졸업장에 새겨져 있는 태극기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우리나라 국기”라고 가르쳐 주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어릴 때 어머니의 그 한마디는 평생 내가 일본사람들을 대할 때 잠재의식 속에 머문 하나의 지침(指針)이 되었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 언론인이었던 장도빈 선생.

사실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 집안 내력을 생각하면 뜻밖일 수도 있었다. 아버지(산운 장도빈・汕耘張道斌)는 구한말(舊韓末) 항일지(抗日紙) 《대한매일신보》의 마지막 주필이었다. 일제(日帝)에 나라를 빼앗긴 후, 관헌(官憲)에 잡혀가다가 탈출한 아버지는 만주 국자가(局子街)로 가서 명동학교에서 국사(國史)를 가르쳤다. 1911년에는 러시아 연해주(沿海州)로 망명, 그곳에서 신채호(申采浩) 선생과 함께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필을 하는 등 항일독립투쟁을 했다. 얼마 후 미국에 있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독립운동가 이갑(李甲) 선생과 아버지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아버지는 이갑 선생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떠났지만, 이르쿠츠크에서 그만 이갑 선생이 병들고 말았다. 아버지는 이갑 선생을 모시고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이갑 선생이 돌아가신 후 아버지도 지병(持病)으로 귀국해서 평북 영변 약산 선운사에서 숨어 살았다. 때문에 3・1운동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이후 아버지는 잡지 《조선지광(朝鮮之光)》 등을 창간, 우리의 역사, 특히 고구려·발해의 역사를 알리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1941년 12월 8일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버지는 어린 나를 업어 주면서, “망했지! 망해!”라며 기뻐했다. 다음 날 아버지는 집을 떠나 평남 중화의 깊은 산속 숯막에 들어갔다. 당시 그 지방에 살던 유창순(劉彰順) 전 국무총리에 의하면, 일본 경찰이 찾아오자 아버지는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면서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아버지는 평북 영변에 있는 우리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서울로 올라가 《민중일보》를 창간했다. 이 신문은 당시 유일하게 보수지(保守紙)를 표방하는 신문이었는데, 후일 윤보선(尹潽善)씨를 거쳐 장기영(張基榮)씨에게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지금의 《한국일보》가 되었다.

어머니도 독립운동하다 獄苦 치러

이화여고보 시절의 어머니 김숙자(원안). 앞줄 오른쪽이 김활란.

어머니는 3·1운동 당시 25살의 나이로 경기여고보에 재학 중이었다. 어머니는 그때 일본유학을 꿈꾸고 있었는데, 사립(私立)인 이화여고보 학력으로는 일본의 대학에 들어갈 수 없어서 관립(官立)인 경기여고보에 다시 편입해 있었던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어머니는 최은희(崔恩喜·전 《조선일보》 기자) 등과 함께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을 이끌고 파고다공원으로 나가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쓰러진 여학생을 일본기마 경찰이 말발굽으로 밟고 넘어가는 장면도 보았다. 어머니가 시위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자 일본인 사감은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 후 어머니는 고향인 평북 영변으로 돌아와 숭덕여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김마리아·유각경(兪珏卿)·황애덕(黃愛德) 등이 주도하던 애국부인회의 평남조직책을 맡았다. 어머니는 얼마 후 독립군 군자금(軍資金) 조달을 하다가 발각되어 서울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다. 이때 어머니는 임신 7개월이었다. 그때 조선인 형사는 지나갈 때마다 어머니를 발로 툭툭 차면서 “야, 이 ×아! 네가 그런다고 독립이 되냐”고 이죽거린 반면에, 일본인 형사는 “임산부가 참 고생한다”며 빵과 우유를 사다 주면서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임산부이기 때문에 검찰에 송치되지 않고 석방되던 날에도 그 조선인 형사는 “나가서 잘 먹고 잘살아라”면서 엉덩이를 걷어찼지만, 일본인 형사는 “참 잘되었다. 부디 순산(順産)하기 바란다”며 기뻐해 주었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일본은 우리 민족의 원수지만, 일본사람이라고 해서 다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은연중 품게 되었다. 우리 스스로의 부끄러운 오점(汚點)도 있었음을 알았다.

해방 후 어머니는 영변에서 근무하다가 소련으로 잡혀간 일본인 판사의 부인을 남장(男裝)을 하게 하고 몇 달간 집에 숨겨 주었다가 두 아들과 함께 남한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아버지, 거물 親日派 김대우 등 변호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일제 때문에 평생 고난을 겪은 분이었다. 3·1 만세운동으로 유학의 꿈을 접어야 했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집을 나갔다가 몇 년에 한 번 나타나는 아버지를 대신해 가난한 집안을 건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대해 미움을 품지 말라고, 일본은 우리의 이웃이라고 몸소 실천으로 가르친 것이다.

아버지도 그런 점에서는 어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민족사학자였던 아버지는 일부에서 ‘친일사관(親日史觀)의 좌장(座長)’이라고 비판하던 사학자 이병도(李丙燾) 선생과도 소통했다. 평생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지만, 건국 후 반민특위(反民特委)를 만들어 친일파(親日派)를 단죄(斷罪)하려 할 때에는 ‘관용’을 주장했다. 일제하에서 전북·경북지사를 지낸 김대우(金大羽), 안둥(安東) 총영사를 지낸 김우영(金雨英) 등이 법정에 서게 되자 아버지는 “그들은 일본의 통치하에서도 나름대로 우리 국민을 위해 일한 면도 있다. 그들의 행정경험을 신생(新生) 조국을 위해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버지가 보여주었던 그런 태도나, 당시 ‘반민족행위 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되어 있던 친일파에 대한 규정 등을 생각해 보면, 근래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친일파’의 범위는 너무나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성택, 나에게 ‘신의 성취’라는 메모 건네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런 부모님으로부터 애국심과 함께 유연한 사고(思考)를 물려받은 것 같다. 6·25전쟁이 나자 15살이던 나는 나이를 속이고 육군종합학교에 입학, 장교로 임관한 후 3년 동안 전쟁터를 누빈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어려서부터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독립운동가인 부모님을 두고 있으면서도 일제시대에 대본영(大本營) 참모였던 세지마 류조(瀨島龍三)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의 기업인·정치인들과 사귀면서 사업을 일굴 수 있었던 것이나, 6·25 때 중공군과 혈전(血戰)을 벌였으면서도 후일 한중(韓中)수교 당시 일익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월간조선》 2014년 9월호 참고)은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교훈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 교훈은 ‘과거에 얽매여 미래를 저버리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북한과도 마찬가지였다. 6·25 때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나의 적(敵)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에 나는 북한을 드나들면서 김일성(金日成)·김정일(金正日)과 만나 금강산 개발, 나진·선봉 개발 사업 등 남북경협(經協)을 모색했다. 정경분리(政經分離) 원칙에 따라 2000년 장성택(張成澤)과 만났을 때, 나는 자신을 핍박하고 애굽에 노예로 팔아먹었던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일구어 낸 《성경》 속 요셉을 생각하면서 메모지에 ‘참용사-참고, 용서하고, 사랑한다’라고 써서 건네주었다. 그는 한참 동안 메모지를 들여다보다가 ‘신의 성취’라고 적어서 건네주었다. 지금 북한과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대화와 화합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난 일본인들

1970년 일본 미쓰이석유화학 연수차 도일한 고려합섬 관계자들. 왼쪽부터 한동수, 구로이와 마사미쓰, 양갑석(전 고합 사장), 황의준.

1950년대 중·후반 홍콩에서 언론인 생활을 하다가 경제계로 뛰어든 나는 1961년 5·16혁명 뒤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5년간 나는 일본 도쿄(東京)에서 지내면서 일본을 알게 되었다. 그 시절 나는 간다(神田) 진보초(神保町) 서점(書店) 거리를 드나들면서 독서에 푹 빠져 지냈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을 통해 일본의 근대사(近代史)도 공부했고, 새로운 경제학·경영학을 소개하는 책들도 많이 읽었다. 한번은 서점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를 사 보려 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주인에게 물어보자 그는 같은 서점 안에 있는 ‘고서(古書)’라는 푯말이 붙은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일본에서는 마르크스주의는 그때 이미 낡은 것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전차(電車) 안에서였다. 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나는 옆에 선 젊은이의 발을 밟고 말았다. 그는 말쑥한 정장(正裝) 차림에 반짝반짝하게 닦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런데 밟힌 그가 먼저 “미안합니다”라며 사과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얼른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했다. 그러자 그가 다시 사과했다. 나는 그때 교활하고 잔악한 일본인이 아닌, 일본 사람의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었다.

그 시절 사귄 일본인 지인(知人)들이 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특히 미쓰이(三井)농산의 구로이와 마사미쓰(黑岩正光), 미쓰이석유화학의 나가미(長見) 전무와 마부찌(馬淵) 부장, 도요(東洋)면화의 온다(恩田) 부사장, 마쓰모토(松本)유지(油脂)의 기무라 고로(木村五郞) 사장 등의 고마움은 잊을 수 없다. 일제시대 용산중학교를 나온 일본인 선배들도 도움이 됐다. 이 밖에 이토추, 히다치(日立), 유니치카, 가네보, 무라다(村田)기계, 니혼(日本)정밀 등의 도움을 받아 나는 1966년 고려합섬을 창립했다. 일본에서 들여온 새로운 기술과 경영기법에 힘입어 나는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특히 미쓰이석유화학으로부터 배운 시스템엔지니어링과 PERT(program evaluation and review technique) 기법 덕분에 고합은 우리나라 최초로 플랜트(Plant) 국산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공장이 지금의 롯데케미칼 울산 공장이다.

그 시절 내가 만났던 일본인들 중에는 새로운 한국의 발전을 진심으로 바라면서 한국을 돕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양국이 진정 가까운 이웃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나도, 개발연대(開發年代)의 대한민국도, 그런 일본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세지마 류조–和戰兩面의 전략가

도쿄전범재판 당시 증인으로 법정에 선 세지마 류조.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세지마 류조 이토추(伊藤忠)상사 회장도 그런 일본인 중 하나였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0년 이토추상사 서울지점의 감바야시 다카스케(上林孝典) 씨와 고문 하야시 시게루(林茂) 씨를 통해서였다. 나는 당시 이토추상사 부회장이던 그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만남을 주선해 준 일이 있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자민당 의원이 그때 동행했다.

한번은 태평양전쟁 당시 대본영 작전참모였던 세지마 회장에게 “일본은 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일본은 유럽전선(戰線)에서 독일이 승전(勝戰)할 것이고, 일본이 진주만 기습에 성공하면 미국이 휴전(休戰)을 제안해 올 것이라고 오판(誤判)했다”고 고백했다. 일본이 그때 꿈꾸었던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적극적 추진자 중 한 사람이 지금 아베 신조(阿部晉三)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였다.

자기가 입안(立案)했던 전쟁에서 패하고, 자신도 11년간 시베리아 억류라는 쓰라림을 맛본 세지마 회장은 이후 경제협력을 통해 동양의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를 위해 그는 내게도 많은 조언과 도움을 주었다. 그는 “앞으로는 중국과 잘 지내야 한다”면서 1986년에 중국 국제우호연락회 관계자들을 소개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덩샤오핑(鄧小平) 라인과 친교(親交)를 맺게 되었고 한중수교 과정에서 일조(一助)할 수 있었다. 그는 1980년대 후반 북한과의 경협과 금강산 개발을 권유하기도 했다. 나는 그를 온화, 관대하고 친절한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궁극적으로는 힘을 키워야 정의(正義)를 유지할 수 있다”는 신념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물론 내가 본 모든 일본인이 선했던 것은 아니다. 포항종합제철을 만들 때 진심으로 도움을 주려 애썼던 신일본제철 같은 회사가 있는가 하면, 도면을 불태우면서 기술이전을 한사코 외면했던 회사도 있다.

일본인들이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 대해 갖고 있는 우월감도 문제다. 몇 년 전 일본 재계 인사들과 모인 자리에서 어떤 일본 측 인사가 “솔직하게 말해 달라”면서 “장 회장은 ‘아시아의 일본’이라고 생각하느냐, ‘일본의 아시아’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 나는 “이제 일본은 ‘글로벌시대의 세계의 일본’”이라는 말로 넘어갔지만, 그 말 속에서 일본이 아직도 19세기 ‘탈아입구(脫亞入歐)적’ 사고(思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다.

韓日 양심세력의 제휴가 필요한 때

공장을 돌아보는 장치혁 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구로이와 도쿄출장소장(오른쪽 첫 번째).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일본, 혹은 일본인의 어느 한쪽만 보고 그것이 일본, 일본인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일본인의 나쁜 모습, 일본이라는 나라가 저질렀던 악행(惡行)만 부각시키면서 그게 일본의 전부라고 여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뼈아픈 과거사들은 철저히 뿌리를 뽑아내야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각성하게 해야겠지만, 그런 잘못이 시정되기 전에는 일본과 일절 상종하지 않겠다는 자세는 곤란하다. 오히려 더 높은 차원에서 감정보다는 실리(實利)를 찾아 협력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앞으로 한일 양국민의 양심세력 제휴가 더욱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우리 스스로의 품격을 높이고 이를 지킬 수 있는 국력(國力)을 키워야 한다. 힘이 정의(正義)는 아니지만 정의를 지키는 데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억울하면 강해져야 한다.

오늘날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까딱 잘못하다가는 다시 한번 역사의 낙오자가 될 수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자.

그 강성했던 고구려가 왜 패망(敗亡)했나? 당(唐)나라가 신라와 손잡고 백제를 멸망시켰을 때에 고구려가 변화하는 동북아(東北亞)정세를 인식하고 대내외(對內外)정책을 바꾸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고구려는 내부분열로 화(禍)를 자초(自招)했다.

구한말에는 또 어떠했던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엄중한 시기에 세계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웃나라들이 이 땅에 대해 어떤 야욕을 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당파(黨派)싸움과 고식적(姑息的)인 외교로 일관하다가 결국은 일제에 나라를 잃고 말았다.

35년간의 식민통치 끝에, 선열(先烈)의 고귀한 희생과 미국 등 연합국의 승리에 힘입어 광복(光復)의 날이 왔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겪기도 했지만, 지난 70년간 흘린 피와 땀과 눈물에 힘입어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 여기까지 왔다.

100년 전 역사 되풀이 말아야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나라의 명운(命運)을 걱정하게 됐다. 정치도 걱정이고, 경제도 그렇지만, 가장 큰 걱정거리는 이 나라가 또다시 세계사의 흐름에서 낙오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남북한 모두 마찬가지다.

북한은 강성대국(强盛大國)을 외치면서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지만, 이는 오히려 일본이 재무장(再武裝)하고 강성대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고 있다. 우리는 과거사 문제에 매몰되어 일본과의 친선 관계가 콱 막혀 있다.

일본은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 자리를 중국에 내주기는 했지만, 중국의 굴기(崛起)를 오히려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중국 견제’를 키워드로 삼아서 미국과 경제·안보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일본을 보면, 러시아의 극동진출을 막으려는 영국·미국과 손을 잡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던 100여 년 전 일본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가 과거사 문제에 매달려 있는 사이에 미국에 손을 내밀어 새로운 태평양시대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일본을 보면,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의 망령(亡靈)이 떠오른다.

대한민국은 100년 전의 대한제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세계 속에서, 다른 나라들과 협력하면서, 자유와 번영을 누려 왔다. 그게 앞으로도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과도 미래를 위해 함께 나아갈 바를 모색해야 한다. 세계 인류사에 유례 없는 일본의 간악한 정략(政略)과 침략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래도 대화하고 화합해야 한다.

다행히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 등 많은 분이 경색된 한일관계를 걱정하면서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덕분에 근래 들어 조금씩이나마 한일관계가 나아지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모리 전 총리는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사태 때 우리나라 은행들의 디폴트를 막기 위해 많이 애를 써 주었다. 그는 당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대장상(大藏相·재무상)과 협의하여 단 하루 만에 한일 은행 간 거래를 회복시켜 주었다.

한일 양국간 관계의 모델로 스위스 사례 참고할 만

나는 요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델로 스위스를 생각하고 있다. 스위스는 자유와 정의라는 공동의 가치(價値) 아래 서로 다른 네 개의 민족이 하나의 나라를 만들어 번영하고 있다. 이웃 나라들과도 선린(善隣)관계를 항상 유지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도 스위스의 경우를 모델로 삼을 수는 없을까? 한국과 일본이 하나의 나라를 이루자는 말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더 나아가 자유·평화·정의 같은 이상(理想) 아래서 함께 번영할 수 있는 격조 높은 선진(先進)의 길을 찾아보자는 얘기다. 스위스가 하루아침에 오늘날과 같은 나라가 된 것은 아니다. 스위스도 3세기에 걸친 분쟁의 역사를 넘어 오늘날 같은 평화와 풍요의 나라, 존경과 선망을 받는 나라를 이룬 것이다.

나는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참용사-참고, 용서하고, 사랑한다-를 생각한다. 한일 양국이 당당하게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갔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솔직한 바람이다.

대한민국은 고구려의 강성함, 신라의 지략(智略), 백제의 문화가 조화를 이룬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화합부터 다져야 한다. 그리고 실력으로 세계화에 성공한, 화합과 평화로 존경받는 모범국가가 되어야 한다. 이 길만이 일본이 다시는 과거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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