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여성골프史 새로 쓰는 한국 선수들… 출전 선수의 3분의 1이 한국(계) 선수
⊙ 큰 경기 때는 김치·된장찌개 먹고 출전… 한국말 ‘힘내’라는 말 한마디에 정신 번쩍 들어
⊙ 女戰士 이민지, 남편과 함께 뛰는 박인비, 아빠는 나의 행운 허미정, 매너 좋은 김효주,
승부욕 강한 유소연
崔智仁
⊙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 전 아트 선재 큐레이터, 새누리당 차세대 수석 부위원장, 다애다문화학교 교사.
⊙ 큰 경기 때는 김치·된장찌개 먹고 출전… 한국말 ‘힘내’라는 말 한마디에 정신 번쩍 들어
⊙ 女戰士 이민지, 남편과 함께 뛰는 박인비, 아빠는 나의 행운 허미정, 매너 좋은 김효주,
승부욕 강한 유소연
崔智仁
⊙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 전 아트 선재 큐레이터, 새누리당 차세대 수석 부위원장, 다애다문화학교 교사.
지난 5월 13일부터 18일까지 미국 버지니아주 윌리엄스버그 킹스밀리조트에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킹스밀 챔피언십(LPGA Kingsmill Championship)’이 열렸다. 미국 골프 투어를 취재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국내외를 오가며 살아 해외 경험이 일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이번 취재는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대회가 끝나고 최종 우승자는 물론 상위 입상자 대부분이 한국 여성 골퍼였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킹스밀 챔피언십은 올해로 11년째를 맞았다. JTBC 후원으로 열린 이번 대회는 한국 여성 골퍼들과 인연이 많다. 2003년 박지은을 시작으로 2004년 박세리, 2012년에는 신지애 선수가 우승했다.
LPGA는 KLPGA판
필자는 이번 대회 취재를 앞두고 대회 주최 측으로부터 ‘특별취재’ 허가증을 받아 뉴스룸과 경기장 필드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한국 선수들의 경기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한국 언론에 대한 대우도 달랐다.
대회 첫날과 이튿날은 아마추어 선수들의 경기가 있었고 5월 15일부터는 본 대회가 열렸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프로골퍼 명단을 보고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효주, 허미정, 박인비, 유소연, 이지은, 이지영, 양에이미, 김수빈, 이미향, 신제니, 이미나, 김인경, 김세영, 오지영, 강혜지, 이일희, 장하나, 박희영, 최첼라, 박주영, 곽민서, 유선영 선수가 한국 국적이었고, 이민지(호주), 리디아 고(뉴질랜드), 앨리슨 리(미국), 미쉘 위(미국), 김초롱(미국), 다니엘 강(미국), 제인 박(미국), 제인 라(미국) 선수가 외국 국적이었다. 3라운드 출전 선수 81명 중 한국 국적이 15명, 한국계 선수가 7명에 달했다. 그야말로 ‘한국판’이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국에서 여자프로골프의 인기가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선수들이 대부분인 LPGA는 ‘KLPGA’라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도 출전 선수의 3분의 1이 한국(또는 한국계) 선수였고, 커트를 통과한 선수의 4분의 1이 한국(계) 골퍼였다. 일부 미국 갤러리들은 대회 마지막 날 우승자를 포함해 한국(계) 선수가 상위권을 차지하자 실망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내보였다.
그러나 미국 갤러리들은 골프 매너를 끝까지 지켰다. 특히 필자의 눈에는 대회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들어왔다. 자원봉사자들의 자부심은 상당했다. 그들은 수많은 갤러리와 선수들, 그리고 이를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갤러리 중에는 가족 단위가 많았는데 그들은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과 같이 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으면서 경기를 즐겼다. 어린이 미니골프, 페이스 페인팅 등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들을 위한 행사도 마련됐다. 관람객 중에는 한인(韓人)들과 그들의 아이들로 보이는 골프 꿈나무들도 적지 않았다.
워싱턴DC에서 30년 넘게 티칭프로로 활동하고 있는 염태수씨가 이번 취재에 많은 도움을 줬다. 그에게서 개별 선수들의 경기 성적과 심리 상태 그리고 대회의 전체 흐름 등을 들을 수 있었다.
LPGA에 출전할 정도의 선수라면 대부분 비슷한 실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시시각각 달라지는 경기 상황에서 흥분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잘 컨트롤하는 사람이 최종 승자(勝者)가 된다. 마지막 날 갑작스런 천둥, 번개로 두 시간 가까이 경기가 중단됐다가 날이 저물어 그 다음 날 마지막 경기를 치러야 했던 이번 대회처럼, 선수들은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마인드 컨트롤을 잘해야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다.
버디 트레인·女戰士풍의 이민지
이번 대회 우승자는 올 시즌 LPGA 투어에 처음 출전한 이민지 선수였다. 올해 열아홉 살인 민지 양은 ‘호주의 리디아 고’로 불린다. 뉴질랜드 국적인 리디아 고보다 한 살 많다.
이민지 선수와 리디아 고는 각각 호주와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한인 2세라는 공통점이 있다. 둘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골프 라이벌이었다. 여러 경기에서 둘은 마주쳤다. 리디아 고의 경기 성적은 꾸준했지만 이민지는 기복이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민지는 한 번 불이 붙으면 줄 버디를 건져내는 ‘버디 트레인(Birdie Train)’으로 통했다.
아마추어 세계랭킹 1위였던 리디아 고가 2013년 프로로 전향하면서 이민지가 1위 자리를 이어 받았다. 이민지는 일본에서 열린 월드 아마추어팀 챔피언십에서 호주팀을 우승으로 이끈 후, 작년 9월 프로로 데뷔했다. 좋아하는 선수는 케리 웹(Kerry webb)이다.
LPGA 투어 루키(rookie·신인)인 이민지는 이번 대회에서 프로 데뷔 첫 우승을 차지했다.
우연찮게도 필자는 5월 16일 2라운드가 끝나고 이민지 선수를 가장 먼저 인터뷰했다. 인터뷰 시간도 가장 길었다.
이민지 선수는 국적만 호주일 뿐, 한국 이름을 그대로 쓰고 한국말도 아주 잘했다. 삼겹살과 김찌찌개를 좋아하는, ‘외국 물’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선수였다. 말할 때는 항상 미소를 짓는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170cm 가까운 키에 온몸이 근육질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여전사(女戰士)와 같은 체격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리라고 필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민지 선수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2라운드까지의 경기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최종 우승을 기대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현장에서 만난 이민지 선수는 경기 성적과 상관없이 즐거운 표정이었다. 이민지 선수의 어머니 이성민씨는 “《월간조선》에 민지가 나오는 것이냐”며 인터뷰를 반겼다. 이민지 선수는 한국의 ‘하나금융’의 후원을 받고 있다.
—한국 경기에도 자주 출전했나요.
“하나은행이 주최하는 경기에만 참가했어요.”
—한국 프로 대회와 미국 대회의 차이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주로 외국 경기만 참가해서인지 잘 몰라요. 하지만 해외 경기에 한국 선수들이 많이 출전하고 갤러리도 한국인이 많아 큰 차이를 느끼지는 않아요. 한 가지 재미있는 얘기가 있는데요, 한국이든 외국이든 경기장에 한국사람이 많다 보니 제 귀에 한국말이 많이 들려요.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다 알아듣지요. ‘이 선수는 이렇고, 저 선수는 저렇다’며 개별 선수들을 평가하는 얘기도 다 들려요. 농담하는 얘기가 들릴 때는 저도 속으로 웃어요. 여기가 한국인가 외국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큰 경기가 있을 때는 긴장감이 대단할 텐데 이를 이겨 내는 특별한 비법이 있나요.
“특별한 건 없어요. 밥 먹고 퍼팅 연습하고, 그냥 일상대로 준비해요. 다른 선수들도 아마 그럴 거예요.”
—골퍼라는 직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특히 여성 골퍼로서의 어려운 점은요.
“골퍼 자체가 좋은 직업인 것 같아요.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요. 좋은 곳에서 훌륭한 선수들을 만나 좋은 경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제겐 축복입니다. 개인적으로 힘든 점은 경기를 많이 하다 보니 가족과 떨어져 있는 날이 많지요. 편안한 집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골프 즐기는 연습벌레
이민지 선수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어머니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생글생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 선수의 어머니 이성민씨는 티칭프로 출신이다. 이 선수의 아버지 이수남씨도 호주에서 골프클럽 챔피언을 차지할 정도로 상당한 실력파이다. 남동생 민우(17) 군도 골퍼로 활동해, 이 선수의 가족은 ‘골프가족’인 셈이다.
민지 양의 어머니는 다른 선수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딸의 뒤를 묵묵히 받쳐 주는 전형적인 한국형(型) 어머니였다. 그녀는 인터뷰를 하는 딸을 옆에서 지켜보며 간혹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어머니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다 가슴이 저민다”며 이렇게 말했다.
“민지가 집을 무척 그리워해요. 덩치만 컸지 아직 애잖아요. 그래도 자기 일에는 항상 최선을 다하고 아빠, 엄마가 걱정하지 않게 힘든 일이 있어도 크게 내색하지 않아요. 오늘 경기에서 민지가 초반에 조금 흔들렸어요. 코치 선생님과 민지의 체력을 관리해 주시는 선생님이 계시는데 이번 대회에 같이 하지를 못했어요. 이번처럼 큰 대회에서는 코치 선생님의 조언이 필수적이죠. 프로 선수가 되면서 공식 후원을 받게 되니까 아무래도 부담도 크지요. 그래도 오늘 경기에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을 거예요.”
—한국 부모님들 중에는 간혹 자식들에게 강제로 골프를 시키는 분들이 있잖아요. 민지 양은 골프라는 운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다행히 골프하는 것 그 자체를 즐겨요. 그리고 민지는 굉장한 연습벌레예요.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연습 그만하고 쉬어라’고 해도 성에 안 차면 멈추질 않아요.”
—대회 출전을 앞두고 있을 때는 주로 무슨 얘기를 해 줍니까.
“편안하게 대해 줘요. ‘그래 또 대회구나. 그냥 가서 고생 좀 해라’며 신경 안 쓰는 척 말해요. 경기 결과가 안 좋아도 절대 뭐라 말하지 않지요. 제가 운동을 해 봐서 알잖아요. 멘털 운동인 골프를 즐기지 못하면 굉장히 힘든 운동이라는 걸 아니까요. 민지보다 두 살 아래인 동생도 현재 호주 국가대표 골프 선수지요. 둘에게 종종 ‘힘든 거 안 했으면 좋겠는데’라고 해도 개의치 않지요. 둘이 만나면 골프 얘기뿐입니다.”
— ‘운동선수 엄마’는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제 딸도 체조를 하는데 경기가 있을 때는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맞아요. 부모로서도 힘든 일이지요.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 말이에요. 또래 아이들이랑 놀지도 못하고요. 그래도 민지가 골프할 때만큼은 행복해하니까 계속 밀어줄 수밖에요.”
—오늘 경기에서 이민지 선수가 홀을 돌면서 경기하는 것을 봤는데 필드를 걸어갈 때도 얼굴에 미소를 띠더군요.
“낙천적인 성격이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위해 이민지 선수와 어머니에게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취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휴, 우리 딸만 잘 나오면 된다”며 딸의 등을 떠밀었다. ‘19살 이민지’는 사진을 찍을 때 천생 어린 소녀였다.
“예쁘게 잘 나오게 찍어 주세요. 얼굴 크지 않게요.”
민지 양은 ‘얼짱’ 각도와 포즈를 빼놓지 않았다.
아내 위해 자기 人生 접은 박인비 남편
필자는 이튿날 3라운드가 끝난 직후 우리의 자랑, 여자골프 세계 랭킹 2위인 박인비 선수를 만났다. 남편 남기협씨가 외국인 캐디와 함께 부(副)캐디로 같이 뛰었다. 남기협씨는 1981년 경북 경주 출신으로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골퍼 경력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은 고3 시절 ‘임진한골프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남기협씨는 박인비의 캐디를 자처하며 자신의 운동을 포기했다. 남편은 박인비 선수가 ‘골프 여제’로 거듭나기까지 6년간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 왔다. 이번 대회에서 박인비 선수는 다음 경기(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를 위해 컨디션을 조절한 탓인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박인비 선수는 한국과 미국의 골프장 환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미국이 코스 세팅이나 그린이 좀 더 어려운 거 같아요. 우리나라는 그린 브레이크(골프공이 그린 위에서 구르는 정도)가 덜한 편입니다. 미국 대회의 특징은 경기 코스가 다양하다는 점입니다. 날씨도 지역마다 천차만별인데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해야 해요. 그만큼 재미도 있지요.”
—오늘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경기가 두 시간가량 중단됐는데 페이스에 지장이 없었나요.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요. 퍼팅도 난조를 보였고, 아이언 샷도 마음대로 안됐어요. 경기를 하다 보면 이럴 때도 있기 때문에 큰 신경을 쓰지는 않습니다.”
—현재 리디아 고 선수 다음으로 세계랭킹 2위를 달리고 있는데 오랫동안 골프 선수로 활동하면서 가장 힘든 점을 든다면요.
“집을 떠나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비행기를 타고 장시간 이동해야 한다는 것도 곤욕스럽지요. 그것 말고는 다 좋아요.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골프 선수로 산다는 것이 제겐 큰 즐거움입니다.”
—박인비 선수는 그동안 우승도 많이 했고 그에 걸맞게 명예와 상금도 많이 받은 걸로 압니다. 골프란 박 선수에게 무엇인가요.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 인생 자체라고 생각해요. 골프에서 인생을 배우기도 해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팬들이 박 선수의 경기를 항상 지켜보고 있습니다. 컨디션에 따라 공이 잘 맞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경기할 때 마인드 컨트롤은 어떻게 합니까.
“선수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이제 경기는 제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어요. 그래서 어떤 상황이 생기더라도 긴장을 하거나 초조해하지는 않아요. 평소 하는 대로 해요.”
—대회 주최 측이 발간한 출전 선수 자료를 보니 좋아하는 음식이 ‘스테이크’라고 돼 있던데 오늘 아침식사로 어떤 걸 드셨나요.
“동서양 음식을 가리지는 않아요. 하지만 중요한 경기가 있을 때는 꼭 한식(韓食)으로 해요. 우리나라 음식이라면 아무 거나 잘 먹어요.”
“영향력 있는 사람 되고파”
박인비 선수와의 인터뷰에 이어 허미정 선수를 만났다. 대전 출신의 허 선수는 2014년 일본 요코하마타이어 LPGA 클래식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경기 도중 천둥이 치고 폭우가 내렸는데 오늘 컨디션은 어땠습니까.
“전반에는 많이 좋았는데 비가 오면서 흐름이 끊겼어요. 경기가 재개됐을 때 ‘차분히 경기에 임하자’고 마음먹었는데 마음대로 안 됐네요.”
—이번 경기에 아버님께서 캐디로 나오셨네요.
“캐디 선생님이 몸이 안 좋아 이번 대회에 같이 못했습니다. 많이 속상해요. 빨리 나으셔야 하는데…. 작년에도 캐디 선생님이 몸이 안 좋아 아버지가 캐디를 대신 해 주셨습니다. 다행히 그때 제가 우승을 했는데 이번 대회에서도 작년 경우를 기대해 봅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는 분이니까요.”
—여가 시간에 요리하는 게 취미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쉴 때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어요. 제가 골프 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요리사가 되었을 거예요. 최근 미국 댈러스로 이사했어요. 댈러스에는 한인(韓人)식당이 많아 외식을 자주 하는데 그전에 살던 올랜도에는 한인식당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우리나라 음식을 직접 해 먹는 경우가 많았죠. 나중에 레스토랑을 운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꿈이 있다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기를 원합니다. 꿈이 대단하죠?(웃음)”
“비가 오면 그냥 비가 오나 보다 생각하죠”
파죽지세로 KLPGA에 이어 미국 여자프로골프에 진출한 김효주 선수는 이번 대회에서 최종 합계 10언더파, 274타로 수잔 페테르센(노르웨이), 폴라 크리머(미국)와 함께 공동 5위를 차지했다. 김효주는 시즌 다섯 번째 ‘톱10’을 기록했다. 골프를 조금이라도 하는 사람이라면 이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것이다.
대회 기간 내내 김효주 선수는 베테랑답게 여유롭게 경기에 임했다. 그녀를 만난 필자의 첫 느낌은 ‘매너가 아주 좋은 선수’라는 것이었다. 김 선수의 캐디는 필자에게 “경기가 이제 막 끝났으니 조금 쉬었다가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그런데 김효수 선수가 땀을 닦으며 “취재하러 여기까지 와 주셨는데 당연히 인터뷰해야죠”라며 곧바로 응했다.
김효주 선수의 캐디는 국내 골프계에서 유명한 서정우씨다. 국내 전문 캐디가 미국 골프 투어에 진출한 첫 케이스로 억대 연봉을 받는 스타 캐디로 알려져 있다. 그는 김효주 선수의 컨디션을 아주 세밀히 체크하는 등 전문가의 면모를 발휘했다.
서정우씨는 미국 애리조나에서 열렸던 경기에서 ‘벌집사건’으로 유명해졌다. 당시 경기에서 김효주 선수가 친 공이 필드 가장자리의 큰 나무 아래로 떨어졌는데 그 나뭇가지에 벌집이 있었던 것이다. 서정우씨는 벌떼가 선수를 해칠 수 있으니 공의 위치를 옮길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그의 ‘어필’이 끝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김효주 선수는 긴장을 풀 수 있었고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를 마쳤다. 그 결과 김효주는 우승을 차지했다.
서정우씨는 여느 캐디들과는 다른 ‘확실한’ 전문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김효주 선수도 LPGA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선수처럼 보였다.
—오늘 비가 와서 많이 힘들지 않았나요.
“새로운 경험이었죠. 비가 오면 ‘비가 오나 보다’ 하고 즐기죠. 그래도 좋은 경기였어요. 날씨나 어떠한 조건에도 구애 받지 말고 경기를 즐겁게 하자는 게 저의 운동 철학입니다.”
—미국 투어에 데뷔한 지 얼마 안 됐는데 한국과 비교해서 어떻게 다르던가요.
“우리나라 골프 환경도 몇 년 사이 아주 많이 좋아졌어요. 물론 아직까지는 미국과 비교할 수 없지요. 예를 들어 미국은 대회 일주일 전부터 숏게임을 허락하는데 우리나라는 사흘 정도 여유를 주지요. 물론 요즘 우리나라도 일주일을 주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국 골프장 코스가 한국보다 확실히 다이내믹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지요. 큰 나무들이 곳곳에 있고, 특히 그린이 좁고, 그린의 경사가 엄청 심한 곳도 많아요. 하지만 이런 상황을 많이 경험해서인지 부담감은 없어요. 한국의 KLPGA에서 통하면 미국 LPGA에서 통한다고 봅니다. 먼저 진출한 선배님들이 길을 잘 닦아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 가지, 미국에서 골프하는 것 중 가장 힘든 점은 이동거리가 멀다는 점입니다.”
—경기를 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떻게 해결합니까.
“경기 중에는 ‘대화’를 통해 풀어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죠. 그런 상황이 오면 캐디와 편안하게 얘기를 주고받아요. 캐디 선생님은 저의 감정상태까지 다 파악해요.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으면 물 한 잔을 내밀죠. 대회가 없는 날에는 음악을 많이 들어요.”
—오늘 식사는 어떤 걸로 했나요.
“한국사람은 ‘밥심’으로 일한다고 하잖아요. 아침에 밥 한 공기 해치우고 나왔어요. 대회 출전으로 장거리 비행을 할 때도 밥은 꼭 챙겨 먹어요.”
김효주 선수는 여성 골퍼들 중에서 유연성과 리듬감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는 ‘성실한 노력파’로도 알려져 있다. 김 선수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겉보기와는 달리 아주 강한 멘털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승부사 기질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닥치더라도 쉽게 무너지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박인비와 ‘밥값내기’ 퍼팅 대결하는 유소연
이번 대회에서 유소연 선수는 이민지 선수와 2타 차이로 2위를 차지했다. 서울 출생으로 2012년 프로로 데뷔한 그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방과후 수업으로 골프채를 잡으며 골프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서울 시내에 두 개의 실내 골프장을 운영하고 있는 그녀는 박인비 선수와 에이전트사도 같고 멘털 트레이너도 같다. 박인비 선수보다 두 살 아래인 유소연 선수는 박인비의 동갑내기 친구들 최나연, 김인경과 함께 ‘박인비 결혼식 LPGA 3인방 들러리’ 중 한 명이었다. 박인비와 유소연은 ‘밥값내기’ 퍼팅 대결도 자주 한다.
유소연 선수는 이번 대회에서 이틀 연속 ‘굿샷’을 날리며 시즌 첫 승을 정조준했었으나 3라운드째 천둥·우천으로 경기가 중단되면서 다소 흔들렸다. 그러나 마지막 날 15번과 16번 홀에서 연속 버디를 잡으며 이민지 선수와 격차를 좁혀 최종 2위를 차지했다.
유소연 선수는 자신의 캐디와 경기 내내 즐겁게 대화하며 18홀을 돌았다. 그녀의 캐디는 유소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배려심이 아주 많은, 인성(人性)이 훌륭한 선수입니다. 물론 경기할 때는 승부욕이 철철 넘칩니다. 그녀는 대부분의 한국 선수들처럼 연습을 열심히 합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선수들은 정말 뛰어난 감각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승부욕이 강하다는 캐디의 말대로 유소연 선수는 최종 경기를 마치고 난 후 필자에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숫자는 1번입니다. 언젠가는 꼭 1등이 되고 싶습니다”라며 열정을 나타냈다.
“예쁜 가방 하나 사도 될까요?”
마지막 라운드가 열리던 날, 천둥과 폭우로 경기가 중단됐다가 결국 해가 지면서 최종 승부는 이튿날로 연기됐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이민지 선수가 최종합계 15언더파, 269타를 쳐 우승을 차지했다. 2위는 유소연 선수, 3위는 재미교포 앨리슨 리(한국명 이화현)였다. 앨리슨 리는 이민지 선수와 시즌 퀄리파잉스쿨(Q스쿨·시즌 참가 자격대회)에서 동반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다시 만난 이민지 선수는 “오늘 아침 보쌈하고 된장찌개를 먹고 경기에 나섰어요.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응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첫 우승인데 승리 요인을 들자면요.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경기를 즐겁게 한다는 생각만 했어요.”
—어린 나이에 이렇게 큰 결과를 안고 시작한 데 대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어리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기회가 있다는 거겠죠. 열심히 할게요.”
—첫 우승 상금은 어떻게 쓸 생각입니까.
“이것저것 맛있는 거 사먹을 거예요.”
—그 많은 돈을 먹는 데 다 쓴다고요.
“아직 어려서인지 먹는 거 외에는 생각해 본 게 없는데…. 그냥 뭐, 예쁜 가방 하나 사도 될까요?”
미국 현지에서 만난 한국 선수들과의 인터뷰는 짧다면 짧겠지만 그들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뜻깊은 만남이었다. 대부분 20대인 그들에게 골프는 ‘밥벌이’ 이전에 하나의 ‘즐거운 게임’이었다. 기존의 선배 프로선수들과는 많이 달랐다.
한국 선수들은 ‘경기 성적표’에서는 라이벌로 표시됐지만, 필드라는 ‘놀이터’를 같이 밟고 거닐며, 웃고 대화하는 아주 편한 친구 사이였다. 경기가 끝나면 밥도 같이 먹고 쇼핑도 같이 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먹고 힘을 낸다는 점도 같았다.
낯선 외국에서 한국말로 “화이팅!”이라는 말 한마디만 들어도 기운이 난다는 그녀들. 미국 팬이 응원해 주는 어떤 말보다 “힘내”라는 한국말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든다는 그녀들. 그래서일까. 멘털(정신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 선수들이 이국(異國) 땅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선수들의 체력이었다. 장거리 이동을 많이 해야 하는 해외 골프 투어는 체력싸움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선수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밥, 김치 많이 먹고 힘내세요. 파이팅!”⊙
필자는 어릴 때부터 국내외를 오가며 살아 해외 경험이 일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이번 취재는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대회가 끝나고 최종 우승자는 물론 상위 입상자 대부분이 한국 여성 골퍼였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킹스밀 챔피언십은 올해로 11년째를 맞았다. JTBC 후원으로 열린 이번 대회는 한국 여성 골퍼들과 인연이 많다. 2003년 박지은을 시작으로 2004년 박세리, 2012년에는 신지애 선수가 우승했다.
LPGA는 KLPGA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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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클럽 뉴스룸. 필자는 이번 대회 취재를 앞두고 대회 주최측으로부터 ‘특별취재’ 허가증을 받았다. |
대회 첫날과 이튿날은 아마추어 선수들의 경기가 있었고 5월 15일부터는 본 대회가 열렸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프로골퍼 명단을 보고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효주, 허미정, 박인비, 유소연, 이지은, 이지영, 양에이미, 김수빈, 이미향, 신제니, 이미나, 김인경, 김세영, 오지영, 강혜지, 이일희, 장하나, 박희영, 최첼라, 박주영, 곽민서, 유선영 선수가 한국 국적이었고, 이민지(호주), 리디아 고(뉴질랜드), 앨리슨 리(미국), 미쉘 위(미국), 김초롱(미국), 다니엘 강(미국), 제인 박(미국), 제인 라(미국) 선수가 외국 국적이었다. 3라운드 출전 선수 81명 중 한국 국적이 15명, 한국계 선수가 7명에 달했다. 그야말로 ‘한국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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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DC에서 30년 넘게 티칭프로로 활동하고 있는 염태수씨가 이번 취재에 많은 도움을 줬다. |
그러나 미국 갤러리들은 골프 매너를 끝까지 지켰다. 특히 필자의 눈에는 대회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들어왔다. 자원봉사자들의 자부심은 상당했다. 그들은 수많은 갤러리와 선수들, 그리고 이를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갤러리 중에는 가족 단위가 많았는데 그들은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과 같이 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으면서 경기를 즐겼다. 어린이 미니골프, 페이스 페인팅 등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들을 위한 행사도 마련됐다. 관람객 중에는 한인(韓人)들과 그들의 아이들로 보이는 골프 꿈나무들도 적지 않았다.
워싱턴DC에서 30년 넘게 티칭프로로 활동하고 있는 염태수씨가 이번 취재에 많은 도움을 줬다. 그에게서 개별 선수들의 경기 성적과 심리 상태 그리고 대회의 전체 흐름 등을 들을 수 있었다.
LPGA에 출전할 정도의 선수라면 대부분 비슷한 실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시시각각 달라지는 경기 상황에서 흥분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잘 컨트롤하는 사람이 최종 승자(勝者)가 된다. 마지막 날 갑작스런 천둥, 번개로 두 시간 가까이 경기가 중단됐다가 날이 저물어 그 다음 날 마지막 경기를 치러야 했던 이번 대회처럼, 선수들은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마인드 컨트롤을 잘해야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다.
버디 트레인·女戰士풍의 이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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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밀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호주교포 이민지(19·하나금융그룹) 선수. |
이민지 선수와 리디아 고는 각각 호주와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한인 2세라는 공통점이 있다. 둘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골프 라이벌이었다. 여러 경기에서 둘은 마주쳤다. 리디아 고의 경기 성적은 꾸준했지만 이민지는 기복이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민지는 한 번 불이 붙으면 줄 버디를 건져내는 ‘버디 트레인(Birdie Train)’으로 통했다.
아마추어 세계랭킹 1위였던 리디아 고가 2013년 프로로 전향하면서 이민지가 1위 자리를 이어 받았다. 이민지는 일본에서 열린 월드 아마추어팀 챔피언십에서 호주팀을 우승으로 이끈 후, 작년 9월 프로로 데뷔했다. 좋아하는 선수는 케리 웹(Kerry webb)이다.
LPGA 투어 루키(rookie·신인)인 이민지는 이번 대회에서 프로 데뷔 첫 우승을 차지했다.
우연찮게도 필자는 5월 16일 2라운드가 끝나고 이민지 선수를 가장 먼저 인터뷰했다. 인터뷰 시간도 가장 길었다.
이민지 선수는 국적만 호주일 뿐, 한국 이름을 그대로 쓰고 한국말도 아주 잘했다. 삼겹살과 김찌찌개를 좋아하는, ‘외국 물’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선수였다. 말할 때는 항상 미소를 짓는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170cm 가까운 키에 온몸이 근육질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여전사(女戰士)와 같은 체격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리라고 필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민지 선수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2라운드까지의 경기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최종 우승을 기대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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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를 차지한 유소연(24·하나금융그룹) 선수. 유 선수는 “챔피언이 되고 싶다”며 강한 열정을 내보였다. |
—한국 경기에도 자주 출전했나요.
“하나은행이 주최하는 경기에만 참가했어요.”
—한국 프로 대회와 미국 대회의 차이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주로 외국 경기만 참가해서인지 잘 몰라요. 하지만 해외 경기에 한국 선수들이 많이 출전하고 갤러리도 한국인이 많아 큰 차이를 느끼지는 않아요. 한 가지 재미있는 얘기가 있는데요, 한국이든 외국이든 경기장에 한국사람이 많다 보니 제 귀에 한국말이 많이 들려요.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다 알아듣지요. ‘이 선수는 이렇고, 저 선수는 저렇다’며 개별 선수들을 평가하는 얘기도 다 들려요. 농담하는 얘기가 들릴 때는 저도 속으로 웃어요. 여기가 한국인가 외국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큰 경기가 있을 때는 긴장감이 대단할 텐데 이를 이겨 내는 특별한 비법이 있나요.
“특별한 건 없어요. 밥 먹고 퍼팅 연습하고, 그냥 일상대로 준비해요. 다른 선수들도 아마 그럴 거예요.”
—골퍼라는 직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특히 여성 골퍼로서의 어려운 점은요.
“골퍼 자체가 좋은 직업인 것 같아요.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요. 좋은 곳에서 훌륭한 선수들을 만나 좋은 경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제겐 축복입니다. 개인적으로 힘든 점은 경기를 많이 하다 보니 가족과 떨어져 있는 날이 많지요. 편안한 집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골프 즐기는 연습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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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관계자가 출전 선수들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
민지 양의 어머니는 다른 선수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딸의 뒤를 묵묵히 받쳐 주는 전형적인 한국형(型) 어머니였다. 그녀는 인터뷰를 하는 딸을 옆에서 지켜보며 간혹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어머니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다 가슴이 저민다”며 이렇게 말했다.
“민지가 집을 무척 그리워해요. 덩치만 컸지 아직 애잖아요. 그래도 자기 일에는 항상 최선을 다하고 아빠, 엄마가 걱정하지 않게 힘든 일이 있어도 크게 내색하지 않아요. 오늘 경기에서 민지가 초반에 조금 흔들렸어요. 코치 선생님과 민지의 체력을 관리해 주시는 선생님이 계시는데 이번 대회에 같이 하지를 못했어요. 이번처럼 큰 대회에서는 코치 선생님의 조언이 필수적이죠. 프로 선수가 되면서 공식 후원을 받게 되니까 아무래도 부담도 크지요. 그래도 오늘 경기에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을 거예요.”
—한국 부모님들 중에는 간혹 자식들에게 강제로 골프를 시키는 분들이 있잖아요. 민지 양은 골프라는 운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다행히 골프하는 것 그 자체를 즐겨요. 그리고 민지는 굉장한 연습벌레예요.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연습 그만하고 쉬어라’고 해도 성에 안 차면 멈추질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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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밀 챔피언십 참가 선수 명단. 3분의 1이 한국 또는 한국계 선수이다. |
“편안하게 대해 줘요. ‘그래 또 대회구나. 그냥 가서 고생 좀 해라’며 신경 안 쓰는 척 말해요. 경기 결과가 안 좋아도 절대 뭐라 말하지 않지요. 제가 운동을 해 봐서 알잖아요. 멘털 운동인 골프를 즐기지 못하면 굉장히 힘든 운동이라는 걸 아니까요. 민지보다 두 살 아래인 동생도 현재 호주 국가대표 골프 선수지요. 둘에게 종종 ‘힘든 거 안 했으면 좋겠는데’라고 해도 개의치 않지요. 둘이 만나면 골프 얘기뿐입니다.”
— ‘운동선수 엄마’는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제 딸도 체조를 하는데 경기가 있을 때는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맞아요. 부모로서도 힘든 일이지요.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 말이에요. 또래 아이들이랑 놀지도 못하고요. 그래도 민지가 골프할 때만큼은 행복해하니까 계속 밀어줄 수밖에요.”
—오늘 경기에서 이민지 선수가 홀을 돌면서 경기하는 것을 봤는데 필드를 걸어갈 때도 얼굴에 미소를 띠더군요.
“낙천적인 성격이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위해 이민지 선수와 어머니에게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취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휴, 우리 딸만 잘 나오면 된다”며 딸의 등을 떠밀었다. ‘19살 이민지’는 사진을 찍을 때 천생 어린 소녀였다.
“예쁘게 잘 나오게 찍어 주세요. 얼굴 크지 않게요.”
민지 양은 ‘얼짱’ 각도와 포즈를 빼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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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골프 세계 랭킹 2위인 박인비(27·KB금융그룹) 선수가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남편 남기협씨가 아내의 모든 것을 챙기고 있다. |
“아무래도 미국이 코스 세팅이나 그린이 좀 더 어려운 거 같아요. 우리나라는 그린 브레이크(골프공이 그린 위에서 구르는 정도)가 덜한 편입니다. 미국 대회의 특징은 경기 코스가 다양하다는 점입니다. 날씨도 지역마다 천차만별인데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해야 해요. 그만큼 재미도 있지요.”
—오늘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경기가 두 시간가량 중단됐는데 페이스에 지장이 없었나요.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요. 퍼팅도 난조를 보였고, 아이언 샷도 마음대로 안됐어요. 경기를 하다 보면 이럴 때도 있기 때문에 큰 신경을 쓰지는 않습니다.”
—현재 리디아 고 선수 다음으로 세계랭킹 2위를 달리고 있는데 오랫동안 골프 선수로 활동하면서 가장 힘든 점을 든다면요.
“집을 떠나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비행기를 타고 장시간 이동해야 한다는 것도 곤욕스럽지요. 그것 말고는 다 좋아요.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골프 선수로 산다는 것이 제겐 큰 즐거움입니다.”
—박인비 선수는 그동안 우승도 많이 했고 그에 걸맞게 명예와 상금도 많이 받은 걸로 압니다. 골프란 박 선수에게 무엇인가요.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 인생 자체라고 생각해요. 골프에서 인생을 배우기도 해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팬들이 박 선수의 경기를 항상 지켜보고 있습니다. 컨디션에 따라 공이 잘 맞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경기할 때 마인드 컨트롤은 어떻게 합니까.
“선수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이제 경기는 제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어요. 그래서 어떤 상황이 생기더라도 긴장을 하거나 초조해하지는 않아요. 평소 하는 대로 해요.”
—대회 주최 측이 발간한 출전 선수 자료를 보니 좋아하는 음식이 ‘스테이크’라고 돼 있던데 오늘 아침식사로 어떤 걸 드셨나요.
“동서양 음식을 가리지는 않아요. 하지만 중요한 경기가 있을 때는 꼭 한식(韓食)으로 해요. 우리나라 음식이라면 아무 거나 잘 먹어요.”
“영향력 있는 사람 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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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미정(26·하나금융그룹) 선수와 캐디를 맡고 있는 아버지 허관무(60)씨. 허 선수는 “아빠는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라 했다. |
—경기 도중 천둥이 치고 폭우가 내렸는데 오늘 컨디션은 어땠습니까.
“전반에는 많이 좋았는데 비가 오면서 흐름이 끊겼어요. 경기가 재개됐을 때 ‘차분히 경기에 임하자’고 마음먹었는데 마음대로 안 됐네요.”
—이번 경기에 아버님께서 캐디로 나오셨네요.
“캐디 선생님이 몸이 안 좋아 이번 대회에 같이 못했습니다. 많이 속상해요. 빨리 나으셔야 하는데…. 작년에도 캐디 선생님이 몸이 안 좋아 아버지가 캐디를 대신 해 주셨습니다. 다행히 그때 제가 우승을 했는데 이번 대회에서도 작년 경우를 기대해 봅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는 분이니까요.”
—여가 시간에 요리하는 게 취미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쉴 때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어요. 제가 골프 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요리사가 되었을 거예요. 최근 미국 댈러스로 이사했어요. 댈러스에는 한인(韓人)식당이 많아 외식을 자주 하는데 그전에 살던 올랜도에는 한인식당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우리나라 음식을 직접 해 먹는 경우가 많았죠. 나중에 레스토랑을 운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꿈이 있다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기를 원합니다. 꿈이 대단하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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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주(20·롯데) 선수와 캐디 서정우씨. 매너 있고 여유 있는 그녀의 캐디는 국내 캐디 출신으로 미국 투어에 처음 진출한 서정우씨다. |
대회 기간 내내 김효주 선수는 베테랑답게 여유롭게 경기에 임했다. 그녀를 만난 필자의 첫 느낌은 ‘매너가 아주 좋은 선수’라는 것이었다. 김 선수의 캐디는 필자에게 “경기가 이제 막 끝났으니 조금 쉬었다가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그런데 김효수 선수가 땀을 닦으며 “취재하러 여기까지 와 주셨는데 당연히 인터뷰해야죠”라며 곧바로 응했다.
김효주 선수의 캐디는 국내 골프계에서 유명한 서정우씨다. 국내 전문 캐디가 미국 골프 투어에 진출한 첫 케이스로 억대 연봉을 받는 스타 캐디로 알려져 있다. 그는 김효주 선수의 컨디션을 아주 세밀히 체크하는 등 전문가의 면모를 발휘했다.
서정우씨는 미국 애리조나에서 열렸던 경기에서 ‘벌집사건’으로 유명해졌다. 당시 경기에서 김효주 선수가 친 공이 필드 가장자리의 큰 나무 아래로 떨어졌는데 그 나뭇가지에 벌집이 있었던 것이다. 서정우씨는 벌떼가 선수를 해칠 수 있으니 공의 위치를 옮길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그의 ‘어필’이 끝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김효주 선수는 긴장을 풀 수 있었고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를 마쳤다. 그 결과 김효주는 우승을 차지했다.
서정우씨는 여느 캐디들과는 다른 ‘확실한’ 전문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김효주 선수도 LPGA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선수처럼 보였다.
—오늘 비가 와서 많이 힘들지 않았나요.
“새로운 경험이었죠. 비가 오면 ‘비가 오나 보다’ 하고 즐기죠. 그래도 좋은 경기였어요. 날씨나 어떠한 조건에도 구애 받지 말고 경기를 즐겁게 하자는 게 저의 운동 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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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갤러리들은 골프 매너를 잘 지켰다.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자원봉사자들도 많았다. |
“우리나라 골프 환경도 몇 년 사이 아주 많이 좋아졌어요. 물론 아직까지는 미국과 비교할 수 없지요. 예를 들어 미국은 대회 일주일 전부터 숏게임을 허락하는데 우리나라는 사흘 정도 여유를 주지요. 물론 요즘 우리나라도 일주일을 주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국 골프장 코스가 한국보다 확실히 다이내믹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지요. 큰 나무들이 곳곳에 있고, 특히 그린이 좁고, 그린의 경사가 엄청 심한 곳도 많아요. 하지만 이런 상황을 많이 경험해서인지 부담감은 없어요. 한국의 KLPGA에서 통하면 미국 LPGA에서 통한다고 봅니다. 먼저 진출한 선배님들이 길을 잘 닦아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 가지, 미국에서 골프하는 것 중 가장 힘든 점은 이동거리가 멀다는 점입니다.”
—경기를 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떻게 해결합니까.
“경기 중에는 ‘대화’를 통해 풀어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죠. 그런 상황이 오면 캐디와 편안하게 얘기를 주고받아요. 캐디 선생님은 저의 감정상태까지 다 파악해요.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으면 물 한 잔을 내밀죠. 대회가 없는 날에는 음악을 많이 들어요.”
—오늘 식사는 어떤 걸로 했나요.
“한국사람은 ‘밥심’으로 일한다고 하잖아요. 아침에 밥 한 공기 해치우고 나왔어요. 대회 출전으로 장거리 비행을 할 때도 밥은 꼭 챙겨 먹어요.”
김효주 선수는 여성 골퍼들 중에서 유연성과 리듬감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는 ‘성실한 노력파’로도 알려져 있다. 김 선수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겉보기와는 달리 아주 강한 멘털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승부사 기질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닥치더라도 쉽게 무너지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박인비와 ‘밥값내기’ 퍼팅 대결하는 유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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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희(29·한화) 선수와 그녀의 캐디. |
유소연 선수는 이번 대회에서 이틀 연속 ‘굿샷’을 날리며 시즌 첫 승을 정조준했었으나 3라운드째 천둥·우천으로 경기가 중단되면서 다소 흔들렸다. 그러나 마지막 날 15번과 16번 홀에서 연속 버디를 잡으며 이민지 선수와 격차를 좁혀 최종 2위를 차지했다.
유소연 선수는 자신의 캐디와 경기 내내 즐겁게 대화하며 18홀을 돌았다. 그녀의 캐디는 유소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배려심이 아주 많은, 인성(人性)이 훌륭한 선수입니다. 물론 경기할 때는 승부욕이 철철 넘칩니다. 그녀는 대부분의 한국 선수들처럼 연습을 열심히 합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선수들은 정말 뛰어난 감각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승부욕이 강하다는 캐디의 말대로 유소연 선수는 최종 경기를 마치고 난 후 필자에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숫자는 1번입니다. 언젠가는 꼭 1등이 되고 싶습니다”라며 열정을 나타냈다.
“예쁜 가방 하나 사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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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교포 앨리슨 리(20·한국이름 이화현) 선수. 그녀는 이민지 선수와 시즌 퀄리파잉스쿨(Q스쿨ㆍ시즌 참가 자격대회)에서 동반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날 앨리슨은 경기 도중 코피를 흘리기도 했다. |
시상식이 끝나고 다시 만난 이민지 선수는 “오늘 아침 보쌈하고 된장찌개를 먹고 경기에 나섰어요.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응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첫 우승인데 승리 요인을 들자면요.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경기를 즐겁게 한다는 생각만 했어요.”
—어린 나이에 이렇게 큰 결과를 안고 시작한 데 대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어리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기회가 있다는 거겠죠. 열심히 할게요.”
—첫 우승 상금은 어떻게 쓸 생각입니까.
“이것저것 맛있는 거 사먹을 거예요.”
—그 많은 돈을 먹는 데 다 쓴다고요.
“아직 어려서인지 먹는 거 외에는 생각해 본 게 없는데…. 그냥 뭐, 예쁜 가방 하나 사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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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교포 크리스티나 김(31·한국명 김초롱) 선수가 경기 도중 물을 마시고 있다. |
한국 선수들은 ‘경기 성적표’에서는 라이벌로 표시됐지만, 필드라는 ‘놀이터’를 같이 밟고 거닐며, 웃고 대화하는 아주 편한 친구 사이였다. 경기가 끝나면 밥도 같이 먹고 쇼핑도 같이 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먹고 힘을 낸다는 점도 같았다.
낯선 외국에서 한국말로 “화이팅!”이라는 말 한마디만 들어도 기운이 난다는 그녀들. 미국 팬이 응원해 주는 어떤 말보다 “힘내”라는 한국말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든다는 그녀들. 그래서일까. 멘털(정신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 선수들이 이국(異國) 땅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선수들의 체력이었다. 장거리 이동을 많이 해야 하는 해외 골프 투어는 체력싸움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선수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밥, 김치 많이 먹고 힘내세요.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