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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강직한 공직자의 표본 金之岱

글 : 김정현  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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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權臣 최우의 아들 최항의 청탁 거절하고 그 수하를 강에 던져 죽여
⊙ 젊었을 때에는 거란이 침입하자 아버지를 대신해 입대
⊙ 김장생, “공의 학문은 조리가 주자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金丁鉉
⊙ 78세. 한양대 사학과 졸업.
⊙ 저서: 《흥하는 성씨 사라진 성씨》 《우리 겨레 성씨 이야기》 《상상 밖의 한국사》.
《고려사》 열전에 실린 ‘김지대’에 대한 기록.
  《월간조선》 4월호에 ‘국내 최초 복원사찰 비슬산(琵瑟山) 대견사(大見寺)’라는 기사가 실렸다. ‘비슬산’ 하면 많은 사람은 봄철 산에 장관을 이룬 진달래를 떠올린다. 비슬산 인근 주민들은 진달래를 ‘참꽃’이라고 말한다.
 
  비슬산은 유서가 깊은 산이다. 신라 때부터 명산(名山)으로 알려져 곳곳에 사찰이 들어섰고, 이를 찾는 사람도 많았다. 조선시대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비슬산에 있는 사찰들로 대견사 외에도 유가사(瑜伽寺), 소재사(消災寺), 도성사(道成寺), 속성사(速成寺)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찰들의 명칭을 보면 비슬산이 풍수지리적으로 어떠한 곳인가를 느낄 수 있다. 대견사에는 크게 본다는 ‘견지(見地)’의 의미가 있다. 유가사에는 ‘아름다운 옥과 같은 가람(伽藍)’, 즉 ‘수도(修道)하는 곳’이란 의미가 있다. 소재사에는 ‘재앙을 없애준다는 의미’, 도성사는 ‘성공의 길에 이른다’는 의미, 속성사는 ‘빨리 성공을 가져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비슬산에는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세 개나 있다. 천왕봉(1084m), 조화봉(1058m), 대견봉(1035m)이다. 대견사는 대견봉에 위치한 사찰인데, 인근 다른 사찰보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많아 경관이 뛰어나다.
 
  대견사는 통일신라 헌덕왕(憲德王·809~826) 또는 흥덕왕(興德王·826~836) 때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폐사(廢寺)되었는데, 일제(日帝)가 이곳이 풍수지리상 명당자리여서 인물들이 나올 것을 저어해 절을 없앤 것이라고 한다.
 
  인근 유가사도 대견사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했다. 대견사와 달리 산골짜기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데, 고려시대에 일연선사(一然禪師)가 머물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집필한 곳이다.
 
 
  안개 서린 노을 속에 절은 조용하고…
 
비슬산 유가사의 일주문. 유가사에는 김지대가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 있다.
  고려시대 유명 인물로 일연선사보다 먼저 유가사를 찾은 사람이 있었다. 고려 23대 고종(高宗·1213~1259) 때 명신(名臣)으로 시문(詩文)과 청렴(淸廉) 재상으로 알려진 김지대(金之岱·1190~1266)가 바로 그분이다.
 
  유가사에는 바로 그가 지은 시(詩)를 새긴 현판이 있다. ‘유가사’라는 제목의 7언율시(七言律詩)다.
 
  〈寺在煙霞無事中(사재연하무사중)
  亂山滴翠秋光濃(난산적취추광농)
  雲間絶磴六七里(운간절등육칠리)
  天末遙岑千萬重(천말요잠천만중)
  茶罷松簷掛微月(다파송첨괘미월)
  講闌風榻搖殘鍾(강란풍탑요잔종)
  溪流應笑玉腰客(계류응소옥요객)
  欲洗未洗紅塵踨(욕세미세홍진종)
 
  안개 서린 노을 속에 절은 조용하고, 푸른 첩첩산은 가을빛 짙구나.
  구름 사이 절벽은 6, 7리나 뻗어 있고, 하늘 끝 먼 높낮은 산 천만 겹이로다.
  차 들고 나니 처마에 초승달 걸렸고
  설법(說法) 끝나니 평상(平床)에 막 종소리 울린다.
  시냇물도 벼슬아치 보고 응당 웃으리라.
  씻고 싶어도 씻을 수 없는 속세의 흔적이여.〉
 
  이 시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지은 것으로 보인다. 벼슬아치의 무상(無常)을 표현한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詩 ‘義城客舍北樓’에 얽힌 일화
 
유가사에 있는 ‘의성객사북루’ 현판.
  김지대의 이 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 등이 찬술(撰述)한 《동문선(東文選)》에도 실려 있다. 조선 숙종 때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남용익(南龍翼)은 《호곡집(壺谷集)》에서 이 시를 두고 “등초하다”고 평했다. “초연(超然)한 맛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김지대의 다른 시 ‘의성객사북루(義城客舍北樓)’에는 흥미로운 일화(逸話)가 있다. 이 시는 그가 경상도안찰사(按察使·도지사)로 있을 때 지었다. ‘의성’은 현재의 경북 의성읍으로 여기에는 문소루(聞韶樓)라는 누각이 있다.
 
  조선 성종 때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청파 이륙(靑坡 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에 실린 ‘의성객사북루’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다.
 
  〈‘의성객사북루’는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뒷날 현(縣)의 공관이 전화(戰火)에 불타 없어졌는데 시 또한 없어졌다. 어느 암행어사가 이 고을에 와 김지대의 시를 급히 찾는데 고을 사람들은 어찌할 줄 몰랐다.
 
  고을 원의 딸이 장(張) 재상(원종 때 재상을 지낸 장일)의 아들과 혼인 약속을 해놓고 있었는데 멀리 다른 곳으로 장가들어 원의 딸은 미쳐버렸다. 마침 그녀가 문득 김지대의 시를 읊고 있어서 고을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고, 그 시를 받아써서 암행어사에게 바쳤다. 그래서 시는 지금도 현의 누각에 걸려 있다.〉
 
  이 이야기는 서거정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도 실려 있다.
 
 
  최항의 청탁을 거절
 
이제현의 《역옹패설》.
  김지대는 시와 문장으로뿐 아니라 명상(名相)으로 《고려사》는 물론, 권근(權近)의 《동국사략(東國史略)》, 김종서(金宗瑞)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서거정의 《동국통감(東國通鑑)》, 유계(兪棨)의 《여사제강(麗史提綱)》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 고려말의 학자이자 재상인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은 김지대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양공(晋陽公·최씨 무인정권의 2대 집권자인 최우)의 서자인 선사(禪師)의 이름은 만전(萬全·최씨 무인정권의 3대 집권자가 되는 최항)이다. 그는 진도(珍島) 고을의 한 절에 있으면서 수하들과 함께 고을 사람들에게 횡포가 심하였다. 그중에 통지(通知)라는 자가 더욱 심했다.
 
  영헌공(英憲公) 김지대가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로 내려가서 소문을 듣고 만전을 찾았다. 절에서 만전을 만났는데, 만전이 청탁을 했지만 공은 들어주지 않았다.(생략)
 
  이후 진양공이 죽고 만전이 정권을 세습하여 잡았는데 이름은 최항(崔沆)이라 하였고 진평공(晋平公)이라 불렀다. 만전은 비록 지난날에 김지대공에게 감정이 있었으나, 공은 워낙 청렴결백하고 과오가 없었기로 해치지 아니하였다.〉
 
  《고려사》 열전(列傳)도 비슷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당시 최이(최우)의 아들인 승려 만전이 진도의 한 사원에 주지로 있었는데, 문도들이 함부로 횡포를 부렸다. 통지라는 자가 특히 심하였는데, 김지대는 그가 청탁하는 것을 모두 거절하고 들어주지 않았다.
 
  김지대가 그 사원에 들르자, 만전이 거들먹대며 욕설을 퍼붓고는 만나려 하지 않았다. 김지대가 곧바로 들어가 마루에 오르더니 마루에 있던 피리와 거문고를 잡고 비장한 가락을 몇 차례 연주했다. 이에 만전이 혼연히 나와, “마침 몸이 조금 아파 공이 오신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라며 사과한 후, 함께 즐겁게 술을 마셨다. 그 자리에서 십여 가지의 일을 부탁해 오자 바로 해결해 준 뒤 몇 가지 일을 보류하면서 “행영(行營)에 가야 해결되는 일이오니 통지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제가 기다리지요”라고 속였다.
 
  행영으로 돌아온 며칠 뒤 과연 통지가 왔기에 김지대가 그를 결박하고 죄를 따진 뒤 강에 던져버렸다. 만전은 곧 최항인데, 이 일을 두고 묵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김지대가 청렴하고 조심하는데다 허물이 적었으므로 끝내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
 
 
  최항의 횡포
 
  유계의 《여사제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고종 35년 최항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왕명 하달과 군사 관계 직위로 정3품)로 삼았다. 최항은 최우의 아들이다.
 
  처음에 그의 형 만종(萬宗)과 함께 중이 되어 이름을 만전(萬全)이라 했다. 둘은 단속사(斷俗寺)와 쌍봉사(雙峰寺) 등에 거주하였는데 무뢰배들을 모아 문도(門徒)로 삼고 식화(殖貨·재물을 늘리는 일)를 일삼고 하여 금백(金帛·돈과 비단)이 엄청나게 많았다. 비축한 쌀만 하여도 50여만 석에 이르렀다. 백성들에게 쌀을 장리(長利)로 빌려주었는데, 백성들이 그들의 횡포에 견디지 못하였다. 그들 수하의 무뢰배는 권세를 업고 포악하기가 그지없었다. 관리들마저 능멸하기가 예사였다.
 
  이에 순문사(巡門使·병마사라고도 하며 지역 군사령관) 송국첨(宋國瞻)이 최우에게 글을 올려 폐단을 보고하였다. 형부상서(刑部尙書·법과 형벌을 맡은 수장) 박훤(朴喧)이 역시 최우에게 만전의 비행을 상소하였다. 이에 최우는 처음에 만종과 만전을 소환하여 죄를 묻고 모은 곡식을 백성들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만전은 박훤을 모함해서 귀양가게 하였다. 송국첨까지 벼슬을 강등시키게 하고 자기의 무뢰배를 석방케 하였다. 최우는 만전을 환속시켜 최항이라 이름하고 벼슬을 주었다.〉
 
  최항은 정권을 잡은 후 지난날 자신의 비행을 아버지에게 고발했던 송국첨과 박훤을 귀양 보냈다가 죽였다. 하지만 지난날 진도에서 자신의 청탁을 거절하고 아랫사람들의 비행을 엄하게 다스려 죄준 김지대한테는 아무런 보복을 하지 못한 것이다.
 
 
  高僧처럼 앉아서 숨 거둬
 
  몽골군이 북쪽 변방에 침입했을 때 그 지역을 지키던 지병마사(知兵馬使·변방 군사령관) 홍희(洪熙)가 여색(女色)에 빠져 군무(軍務)를 돌보지 않아 그곳 백성들의 민심이 흉흉해졌다. 김지대는 홍희를 대신해서 현지에 가서 진무(鎭撫·안정시키는 일)를 하고 서북 40여 성을 안정시켰다. 이 공로로 그는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졌다.
 
  김지대는 원종(元宗) 때 평장사(平章事)로 있다가 사임했는데, 왕은 그를 수태부(守太傅)로 증직(贈職)시킨 후 퇴임을 허락했다. 태부는 고려시대 삼공(三公)의 하나로 조선시대 정승과 같은 정1품의 품계이다. 앞에 수(守)를 붙인 것은 명예직이란 표시였다. 77세로 사망하자 영헌공(英憲公)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고려사》 열전은 그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좌서(坐逝)’라고 표현했다. ‘좌서’는 ‘앉은 채 죽었다’는 의미로, 주로 옛날 고승(高僧)들이 ‘좌서’했다고 한다. 김지대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기록일 것이다.
 
  《고려사》 열전은 김지대가 과거에 급제하기 이전 행적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종 4년에 강동싸움(거란 침략)에 자신의 부친을 대신하여 군대에 입대하여 행군을 하는데, 다른 병사들은 방패머리에 괴상한 짐승을 그렸는데 김지대는 유독 자기가 지은 시 한 수를 방패머리에 써놓았다. 그 시는 “나라의 근심은 신하의 근심이요(國患臣之患), 아버지의 걱정은 자식의 걱정이다(親憂子所憂).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하면(代親如報國), 충(忠)과 효(孝)를 함께하는 것이리(忠孝可雙修)”라는 것이었다.
 
  조충(趙沖) 원수가 군대를 점검하다가 이 시를 보고 놀랐다. 그리고 김지대를 측근에 두고 아껴 부렸다. 이듬해 조충이 지공거(知貢擧·과거시험 수장)가 되고 김지대는 응시를 하였는데 제1위로 뽑혔다.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임명되자,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구휼하고 세력 있는 향호들을 억눌렀으며, 귀신과 같이 잘못을 적발하니 향리와 백성들이 존경하고 두려워하였다. 내직으로 들어와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으로 임명되었다가 뒤에 전라도안찰사로 나갔다.〉
 
 
  김장생의 평가
 
  김지대는 학문도 높았다. 그 내용이 자세히 전해지지는 않지만, 조선 인조 때 예학(禮學)의 최고 권위자였던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은 이렇게 평했다. “당시 중국의 주자학(朱子學)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 김지대 공의 학문은 조리가 주자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정립한 주자학(성리학)은 고려 후기 안향(安珦)에 의해 전래됐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학문과 사회의 근간이 되었다. 때문에 김장생이 “공의 학문은 조리가 주자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 것은, 조선시대 유학자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라고 보아야 한다.
 
  사서(史書)를 살펴보면, 역사에 큰 글자로 기록된 인물들 가운데서도 한 겹 벗겨보면 부정·비리 같은 흠을 가진 이들이 종종 있다. 그게 널리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김지대의 경우, 재상급 고위직에 오른 인물임에도 평생 흠을 남기지 않았다. 청렴 강직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았다. 무엇보다도 외침이 있었을 때 말단 병사로 전장(戰場)에 나간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요즘 국무총리, 도지사, 국회의원 등 공직자들의 비리와 관련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청문회를 하면, 본인이나 아들의 병역면탈(免脫)이니 위장전입이니 하는 문제들이 불거져 나온다. 흠 없는 공직자를 찾아보기가 정말 쉽지 않다. 당대 최고 권력자의 청탁을 거절하고, 그 때문에 원한을 샀지만, 그 권력자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김지대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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