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세종과 양녕의 우애 : 월간조선

조선 3대 태종(太宗)은 정비(正妃)인 민씨(閔氏)와의 사이에 네 아들, 즉 양녕(讓寧), 효령(孝寧), 충녕(忠寧·세종), 성녕(誠寧)을 두었다. 그 밖에 후궁들에게서 둔 아들이 8명이었다.

양녕은 첫째 아들로서 이름은 제(禔)라 하였다. 세자(世子) 자리를 내놓고 난 후엔 양녕대군(讓寧大君)이란 군호(君號)로 불렸다. 양녕이 첫째 아들로서 세자가 되었다가 폐세자(廢世子)가 된 것은 불륜(不倫)과 광패(狂悖)한 짓을 곧잘 저질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역대 임금들 중에서 태종이란 시호가 붙은 군주는 재위 중 왕권(王權)을 튼튼하게 한 사람이다. 중국에서는 당(唐)나라의 이세민(李世民) 등에게, 우리나라에서는 삼국통일에 나섰던 신라 무열왕(김춘추)과 조선 3대 군주 이방원(李芳遠)에게 태종이란 시호가 붙었다.

강력한 통치자였던 조선 태종은, 다른 한편으로 보면 무섭고 냉혹한 인물이었다. 고려 말에는 조선 개국에 걸림돌이 되는 정몽주(鄭夢周)를 죽였고, 개국 후에는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鄭道傳)을 제거했다. 태종이 이런 면모를 보이지 않았으면 조선은 정도전의 나라가 되었을 수도 있다.

太宗, 처가와 사돈 집안을 박살내다

태종은 왕권을 확립한 후 조정 대신들이나 왕실의 인척(姻戚)들이 세도(勢道)를 부릴 것을 염려했다. 태종은 처남인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등 형제들이 세자 양녕을 끼고 조정 신하들을 안하무인(眼下無人)격으로 대하자, 이들을 귀양보냈다가 죽여버렸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세종의 처가(妻家)가 주목을 받자 이들 일족 또한 숙청했다.

세종이 즉위한 후, 영의정인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의 위상이 높아졌다. 당시 심온의 아우 심정(沈貞)은 고위 무관직(武官職)인 총제(總制) 자리에 있었다. 그는 병조참판(兵曹參判) 강상인(姜尙仁)과 함께 금위(禁衛·수도를 경비하는 군대)의 위사(衛士·대궐이나 군영을 지키는 장교)들을 상왕(上王)인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임의대로 분속(分屬)시켰다.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讓位)한 후에도 군사(軍事)에 관계된 일은 직접 챙기고 있었다. 영의정 심온의 아우였지만, 자신의 재가(裁可)없이 군사를 처리한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내 자리를 세자에게 전하였음은 애초에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편히 좀 지내고자 하였음이다. 다만 군사(軍事)에 대해서만 친히 보살피려 함은 이것은 임금이 아직 나이가 젊어서 군사를 알지 못하는 이유 때문이다. 그가 나이 삼십이 되어서 일에 경험을 많이 쌓은 뒤 전해주려 하는 것이다.〉(《국조보감(國朝寶鑑)》)

결국 심온은 물론 심정까지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는 태종이 심정의 잘못을 빌미로 삼아 장차 외척으로 세도를 휘두를 수도 있는 심온 일족을 미리 제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태종은 세종도 자기처럼 강력한 군주, 중신(重臣)들이나 권신(權臣)들의 간섭에 놀아나지 않는 군주가 되기를 원했다.

양녕의 장인은 太宗의 과거급제 동기

태종은 지략이 있는 군주였다. 고려 말, 태조 이성계의 아들 중에서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자리에 오른 사람이 태종이었다. 명종·선조 때 문신 이정형(李廷馨)이 지은 《동각잡기(東閣雜記)》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태조는 본시 유학(儒學)을 좋아하여 비록 군(軍) 일에서라도 창을 놓고 쉬는 때면 유명한 선비를 청하여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논하고 밤중까지 자지 아니한 경우가 많았다. 가문(家門)에 유학하는 사람이 없어 똑똑한 태종에게 배움길에 나가게 하였는데 태종은 글 읽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고려 우왕 때 태종이 과거를 보았는데 급제를 하였다. 이에 태조의 기쁨은 대단하였고 감격해서 눈물까지 흘렸다.〉

태종은 후일 양녕의 장인이 되는 김한로(金漢老)와 함께 급제했다. 그때 태종은 병과(丙科)였고 김한로는 을과(乙科)에서 장원을 하였다.

태종이 비정(非情)한 인물로 알려지게 된 데에는 양녕을 폐세자 한 데도 원인이 있다. 원래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위에 오른 태종은 세자 자리를 장남에게 주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폐세자라는 고뇌 어린 선택을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태종실록》을 보자.

〈내가 일찍 맏아들 제(禔)를 세자로 삼았는데 나이 20세가 되자 학문은 둘째 치고 음악과 여색(女色)에 빠지기만 하였다. 나는 그가 젊었기 때문에 장성해서는 고치겠지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스무 살이 넘어서도 개과천선은 없었다. 갈수록 막된 무리와 어울리면서 옳지 못한 행동을 하였다. 그 일로 벌을 받은 사람도 여럿 있었다.〉

이런 내용의 기록도 있다.

〈궐 밖에 어리(於里)라는 젊은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은 곽선(郭璇)의 첩으로 양녕의 처갓집에서도 잘 알고 있었다. 양녕의 장인은 김한로(金漢老)로 조정의 재상인데 양녕이 수시로 궐 밖으로 나가서 주색(酒色)에 빠지는 것을 알고서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비위를 맞추듯 감싸주기만 하였다. 양녕은 어리를 알고서는 몰래 동궁(東宮)까지 불러들여 놀아났는데 아이까지 잉태시켰다. 이런 불륜관계는 조정 재상들 귀에까지 들어갔는데 김한로는 막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헌부(司憲府)와 대간원(臺諫院)에서 양녕의 방탕 행각을 묵과하지 않고 주상(태종)께 간언하고 김한로에게도 죄를 물을 것을 청하였다.〉

충녕에 대한 太宗의 評

崇禮門 현판 글씨는 양녕대군이 썼다고 전해진다.

태종의 양녕 폐세자에 대해 인조 때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시양(金時讓)이 쓴 수필집 《자해필담(紫海筆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양녕대군이 세자가 되었을 때 태종의 뜻은 앞서 세종에게 있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양녕은 일부러 미친 체하고 세자의 자리를 충녕에게 줄 뜻으로 세자의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은 곧 양녕을 세자에서 폐하고 세종을 세자로 세웠다.

양녕은 때에 따라 자기의 재주를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양녕의 모습에 내외(內外)에서 또 아래위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세종은 형 양녕이 취하는 모습을 짐작하고 우러러보며 사랑하고 하여 매양 대궐로 맞아들여 술을 대접하며 즐기기를 곧잘 하였다. 양녕이 사냥을 좋아하여 세종도 함께 성 밖으로 나가곤 하였는데 정의(情誼)가 두터웠다.〉

《자해필담》에는 “양녕이 젊어서부터 문장을 잘하였는데 세종이 성덕(聖德·임금이 될 자질)이 있음을 보고 짐짓 글을 모르는 체하고 또 미친 체하며 방자하게 놀아났던 것이다”라는 내용도 있다.

조선 말기 작자 미상(作者未詳)인 《축수편(逐睡篇)》에는 “양녕이 비록 실덕(失德)을 하여 폐세자 당하였지만 지금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崇禮門) 석 자는 그가 쓴 글씨로 굉장하고 뛰어난 것이다. 그 글씨로 사람됨을 상상할 수가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태종실록》에는 충녕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도 나온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社稷)의 복이 된다 하였는데 왕자들을 두고 볼 때 효령대군은 자질이 미약하고 성질이 심히 곧아서 치밀성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한다. 나와 중전(왕비)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 보았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학문을 꽤 좋아하고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해도 밤새도록 글을 읽고 하였다. 나는 병이 날까 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늦게 글 읽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내 책을 모두 가져갔다. 알아서 하는 일이 당연히 있었고 생각은 뜻밖에 기발하였다. 중국의 사신이 와서 접대할 때면 몸가짐과 언동이 두루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다. 술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함을 알아도 접대하는 자리에선 주인의 입장으로 한 모금도 안 마실 수가 없는 바 충녕은 자신이 술을 잘 마시지 못해도 적당히 마셨다. 또 그에게는 아들 가운데 건장한 놈도 있었다. 효령대군은 술을 한 모금도 못 마시고 하는데 그런 자리에선 불가(不可)한 것이다. 충녕대군이 큰 자리를 맡을 만하다고 생각해서 나는 그를 세자로 정한 것이다.〉

충녕의 성실성

양녕을 폐세자 한 이상 둘째 아들 효령에게 세자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 당연하지만 태종은 셋째 아들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준 것이다. 《태종실록》에는 충녕을 칭찬하는 기록이 또 보인다.

〈충녕은 평상시에도 부인에게 깎듯이 대우하였다. 부인이 나오고 물러갈 때에는 반드시 일어나서 맞고 바래다주었다. 임금이 창덕궁에 있을 때, 높고 낮은 관리들이 말을 타고 경복궁 앞을 지나칠 때 말에서 내리는 사람이 적었으나 충녕은 지날 때마다 반드시 내렸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충녕의 그 모습은 그의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그의 경건한 그런 행동은 변함이 없었다.〉

《태종실록》에는 태종이 양녕을 폐세자 하고 궐 밖으로 내보낼 때 한 말도 기록되어 있다.

〈너는 비록 광패(狂悖)하였으나 너로 하여금 새사람이 되길 바라서 여태 그냥 있었는데 어찌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는지 이 지경에 이르리라고 생각도 못 했는가? 백관들이 너를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상소까지 하였기에 부득이 군신(群臣)의 여론에 안 따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알라.

너 스스로가 화(禍)를 자초한 것이니 나와 부자지간이라도 군신(君臣)의 도리(道理)가 있는 것으로 처음엔 그 상소를 보고 몹시 떨었다. 언젠가 네가 “소자는 세자 자리를 양보하고 싶다” 하였는데 나는 안 된다고 거절했다. 이제 네가 세자 자리에 안 있겠다고 한 것에 뜻을 이룬 셈이 되기도 한다.

효령대군은 바탕이 나약하고 충녕대군은 고명(高明)하여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다 우러러보는 바이라 그들의 소청으로 세자 자리를 충녕에게 주었다. 전에 네가 나한테 말하기를 “소자가 충녕을 사랑하는 것이 매우 돈독하여 비록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고자 한다” 하였다. 이제는 충녕이 너의 자리를 대신하였으니 마찬가지로 너를 그렇게 대접할 것이다.

병정들을 가지고 너를 해칠 생각은 아니할 것이다. 너는 평생을 편안하게 지내는 데 아무 이상이 없을 것이다. 너로서는 충녕한테 무슨 죄가 있으랴. 그러니 아무 탈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군신들이 너를 먼 지방으로 안치하게 청하였으나 중전(왕비)이 울면서 “제(禔)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먼 지방으로 간다면 안부를 알기가 어려우니 가까운 곳에다 두소서” 하며 애원하였다. 너도 또한 목석(木石)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그렇게 되길 바라겠는가? 이에 군신들에게 나 또한 청하였는데 그들은 내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멀지 않은 광주(廣州)에 안치키로 한 것이다.〉

황희와 유정현

왕조시대에는 세자 자리를 잃고 나서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었다. 세자 자리를 잃은 쪽에서 반역을 꾀할 수 있어 예방 조치로 폐세자의 목숨을 빼앗았던 것이다. 이런 역사를 잘 알았던 태종은 양녕을 폐세자 하면서 그의 목숨을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

태종의 중전 민씨도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자로 하는 것은 장차 화난(禍亂)을 가져오는 근원이 된다”고 경계한 적이 있었다. 때문에 태종도 양녕을 폐세자 하는 것을 적잖게 망설였다. 한때 태종은 세손(世孫·양녕의 아들)으로 하여금 양녕을 대신케 하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신들이 다섯 살밖에 안 되는 세손을 세우는 데 반대해서 충녕으로 정했다고 한다. 양녕을 폐세자 한 태종이지만, 막상 충녕을 새 세자로 책봉한 날엔 남몰래 목이 쉬도록 울었다고 한다.

양녕 폐세자에 대해 중신들은 대부분 찬성하였으나, 이직(李稷)과 황희(黃喜)만은 반대를 하였다. 두 사람은 이 때문에 귀양을 갔지만, 세종(충녕) 즉위 후에는 중용되어 영의정까지 올랐다.

이들과 달리 양녕을 폐세자 하는 데 앞장선 사람도 있다. 그도 세종 즉위 직후 영의정에 오른다. 바로 백성들을 상대로 고리채(高利債) 놀이를 하여 ‘장리(長利) 재상’으로 알려진 유정현(柳廷顯)이다.

양녕의 폐세자와 관련해 이런 일화가 있다.

〈양녕이 미친 체하고 방황을 하니 효령은 장차 자기가 서열로 봐서 세자 자리를 이을 것이라 여기고 집에 들어앉아 글을 읽고 했었다. 양녕이 이 모습을 보고 “어리석구나, 네가 충녕이 임금 자질이 있는 것을 어찌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다. 이 말에 효령은 뒤늦게 깨닫고 곧 절간으로 들어가서는 두 손으로 북 하나를 종일토록 두드려댔다. 그 바람에 그 북 가죽이 축 늘어졌다. 부드럽고 축 늘어진 사람을 빗대 ‘효령대군 북가죽’이라는 말이 나왔다.〉

충녕은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형 양녕을 정성껏 예우했다. 조정 대신들은 양녕이 폐세자 된 이후에도 품행이 바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죄 주기를 청했지만, 세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선 역대의 사적(史蹟)을 적은 《국조보감(國朝寶鑑)》에는 세종이 김종서(金宗瑞)에게 한 말이 나와 있다.

〈경(卿)이 자주 양녕대군의 일을 말하며 죄를 말하였다. 경은 나의 참된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있는 이 자리를 말하면 차례가 실로 양녕대군의 자리였던 것이다. 오늘날 내가 대신하여 백성들로부터 봉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보통 백성이라도 형제 사이에는 잘못을 덮어주는 것이고 잘한 것은 드러내어 칭찬하는 것이다. 불행히 죄에 걸리면 간혹 뇌물도 쓰고 혹은 애걸도 하여 모면하려 드는 것이 사람들 심정인데 내가 나라의 임금으로서 도리어 백성들만 못하게 형 하나를 감싸주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는가? 낸들 어찌 정의(情誼)가 없겠는가?〉

臺諫, 세종의 양녕 접견 비난

서울 상도동에 있는 양녕대군의 묘소.

〈세종이 일찍이 동쪽 교외에 나가서 양녕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밤에 궁으로 돌아온 뒤에 양녕은 이천(利川)의 귀양 간 처소로 돌아갔다. 여러 신하가 처음에는 우연한 행차인가 했을 뿐 제(禔)를 부르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다음날 양사(兩司·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그 일이 옳지 못하다고 논란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제, 즉 양녕을 접견하지 마시라”고 주청하였다.

또 상참(常參·임금이 신하와 정사를 논하는 것)하는 날에 극력 논란을 보였다. 우의정 맹사성(孟思誠)과 형조판서(刑曹判書) 신개(申槩)는 묵묵히 말 한마디도 안 꺼냈다. 이에 사헌부(司憲府)에서 법조당상(法曹堂上·형조판서를 칭함)과 대신(大臣·우의정을 칭함)으로서 양녕을 다시는 불러보지 못하게 상감께 말 한마디 주청도 하지 않은 것을 힐문하였다.

이에 맹사성은 “양녕을 불러 보지 마시라 하는 말은 전에 한번 아뢴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아뢰지 않았다” 하였다. 신개는 “나는 본래 절개가 없으므로 용서하시오”라고 답하였다.

세종을 이해한 맹사성

헌부(사헌부)에서는 둘에게 죄를 주자고 주청했는데, 세종은 그 주청을 접어두고 맹사성에게 “그대로 자리에 나아가 정무(政務)를 보라”고 하였다. 이에 맹사성은 아뢰기를 “정승은 백관(百官)의 수장(首長)이라 딴말이 사람으로부터 나오지 않아야 그 직책을 다할 것이온데, 지금 대관(臺官·사헌부)의 논박을 당하였으니 나아가 정무를 볼 수는 없습니다” 하고 사직을 청했다. 세종은 허락지 않았다.〉

태종이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고 다음해 자신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그는 4년 뒤인 세종 4년(1422)에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태종 사후(死後)에 조정 중신들 가운데 일부는 또 양녕을 벌주자는 논의를 했다. 그러나 세종은 그런 논의를 도외시했다. 오히려 형 양녕을 찾아보고 만나는 일, 또 불러서 잔치를 베푸는 것을 계속하였다. 정승 맹사성과 형조판서 신개가 사헌부의 논박을 받아도 담담해 한 것은 이런 세종의 뜻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맹사성은 양녕이 스스로 세자 자리를 양보하여 준 것이고 비록 한동안 문란한 행동을 보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왕권에 도전하는 행동들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양녕의 행동이 무슨 큰 죄라고 두고두고 논죄의 대상으로 삼느냐는 것이 맹사성의 생각이었다. 세종도 그의 뜻을 알았기에, 맹사성의 사의(辭意)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태종이 스스로 세웠던 장자 세습의 원칙을 번복하고 충녕을 세자로 책봉한 결과, 성군(聖君) 세종이 나올 수 있었다. 양녕과 충녕이 권력의 자리를 두고 반목하지 않았던 것은 두 사람의 심성(心性)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모두 성덕을 보여준 것이었다. 왕조시대에 권력을 놓고 인간관계나 인륜이 망가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세종과 양녕의 우애는 좋은 모범이 된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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