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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현장

청춘의 꿈을 찾아 주는 꿈.틀.이展

꿈을 이룬 젊은이들의 이야기

글 : 백윤호  월간조선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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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꿈을 이뤄 가는 과정 보여줘
⊙ 사회적 시선 때문에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사람은 ‘멍청이’
⊙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해 보는 게 모든 꿈의 시초

취재지도 :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Boys, be ambitious!’
 
  청년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격려하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 20대가 꿈을 갖는 것을 시대상황은 허락지 않는다. 꿈을 갖는 일이 사치가 된 시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관리’한다는 말이 요즘엔 당연한 상식이 됐다. 결혼, 출산, 육아를 포기하던 ‘삼포세대’ 20대들이 꿈마저 포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꿈을 가지라고 권하는 청년들이 있다. 그들이 지난 1월 21부터 26일까지 충무로 토익 갤러리에서 ‘꿈.틀.이展(전)’을 열었다. 전시회를 관람한 유하람(25)씨는 “뻥 뚫린다”고 말한다.
 
  “저도 곧 졸업인데 막막했거든요. 뭘 하면서 살아야 할지. 스펙을 좀 더 쌓아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있는 걸 알았어요. 제 고민을 말하니 뭔가 시원해요.”
 
  20대 젊은 작가들은 어떤 꿈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을까. 전시회가 끝나고 그들을 만나봤다.
 
 
  “의류 관련 사회적 기업가가 되고 싶어요”
 
자신의 전시물을 설명하고 있는 김지원씨.
  “어릴 때 사촌언니가 예쁜 옷을 입고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출근하는 모습이 멋있었어요.”
 
  의류 관련 사회적 기업가가 되고 싶다는 김지원(金祉媛·21)씨는 패션에 대한 첫 경험을 ‘구두소리’로 말한다. 그 이후 패션에 눈을 떴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찢어진 바지를 입고 다니며 스스로 멋을 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꿈으로까지 연결되리라고는 알지 못했다. 단지 옷을 좋아했을 뿐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한사랑이란 봉사캠프에 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부터 제 꿈이 시작됐죠.”
 
  한사랑은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서로 조를 이뤄 어려운 이웃에 봉사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때 만난 대학생들이 너무 멋있었다. 로봇이 너무 좋아 세계대회 1·2·3등을 휩쓴 사람, 작가가 되고 싶어 고등학교 때 책을 낸 사람. 그들을 보며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캠프 끝나자마자 4일을 울었어요. 스스로가 한심해 보였거든요.”
 
  밤낮 울던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같이 참여했던 친구들과 패션 동아리를 만들었다. ‘리센느룩’의 시작이었다.
 
  “옷을 좋아해 패션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우린 패션 동아리니까 옷을 만들자’ 해서 무작정 옷을 만들었죠.”
 
  김씨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들이 만든 옷을 지역에 있는 보육원에 기증했다. 또한 아프리카에 헌옷을 보내는 ‘옷캔’이란 프로젝트도 기획했다. 지금이야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모든 게 순탄치만은 않았다.
 
  “인문계 고등학교였는데 반대가 심했어요. ‘옷 만들 거면 동대문을 가지 왜 여기 왔냐’는 비아냥도 많이 받았고요. 하지만 열심히 활동하니까 점점 인정해 줬어요. 언론에도 나왔고요.”
 
  그는 고등학교 때 받은 동아리 활동 우수상이 가장 뿌듯하다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전주대학교 패션산업학과로 진학했다.
 
  “공부하다 보니 디자인보다는 마케팅 쪽이 더 재밌었어요. 그래서 패션디자인이 아닌 패션산업학과로 진학했죠.”
 
  관심이 바뀌니 꿈도 바뀌었다.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했지만 지금은 의류 관련 사회적 기업만 입점한 복합쇼핑몰을 만드는 게 꿈이다. 현재 목표는 신발 관련 사회적 기업인 ‘탐스’(toms) 입사다.
 
  “목표를 꼭 세워야 해요. 꿈이란 게 어떻게 보면 허황된 것일 수 있는데 계획을 만들어 놓으면 현실이 되잖아요.”
 
  그렇다면 꿈을 찾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 그는 실행이라고 말한다. 실행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하고 싶었던 걸 지금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두발자전거도 처음 타 보는 게 중요하잖아요.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잘 탈 수 있어요. 꿈도 그런 것 같아요.”
 
 
  “한국을 유럽에 알렸어요”
 
  금쪽같은 대학생활을 허비하기 싫었다. 주위 동료들은 스펙에 목매고 있었다. 하지만 정혜인(鄭惠仁·23)씨는 아직 자신의 꿈이 뭔지 몰랐다. 꿈 없이 스펙에만 매달리기 싫었다. 그래서 휴학을 했다.
 
  “휴학하니 시간도 많아서 책을 읽었어요. 그러다 김수영씨의 《드림레시피》라는 책을 본 거예요. 그 책에서 제가 하고 싶은 걸 적어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행을 적었죠.”
 
  하고 싶은 것은 정했지만 어떻게 할지 막막했다. 그러다가 카우치 서핑을 알게 됐다. 카우치 서핑은 현지인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새로운 여행트렌드다.
 
  “유럽에서는 인지도가 높아요. 신혼부부도 한 달간 카우치 서핑을 하기도 해요. 여러 가정을 방문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배우고 오는 거죠.”
 
  친구와 함께 카우치 서핑을 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하지만 평범한 여행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문득 동남아시아를 갔을 때의 경험이 떠올랐다.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국적이 북한인지 남한인지 물어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잖아요. 북한이 여행할 자유도 없는 나라인 건 당연하니까요. 그런데 외국사람들은 한국을 잘 모르는 거예요.”
 
  카우치 서핑을 다니며 현지인에게 한국을 알리기로 했다. 한옥마을로 유명한 전주와 경주를 배경으로 엽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카우치 서핑을 할 때마다 현지인들에게 나눠주며 한국에 대해 알렸다.
 
  “딸 4명 있는 집에서 카우치 서핑을 할 때였어요. 관광하고 돌아왔는데 애들이 전부 남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거예요. 알고 보니 엄마가 아이들이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니까 틀어 준 거죠. 김치도 같이 만들고 태극기도 그렸어요. 한국에 대해 알린 것 같아 너무 뿌듯했어요.”
 
  정씨는 친구와 함께 작년 8월부터 12월까지 3개월간 유럽 9개국(영국,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을 돌았다. 일반적인 유럽 여행 경로와는 달랐다.
 
  “계획이 따로 없었어요. 그냥 카우치 서핑으로 잠시 지내다가 거기서 친해진 친구들이 있으면 그곳으로 넘어가고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한국인이 많이 찾는 프랑스 같은 나라가 빠졌다. 뚜렷한 계획이 없어 목적지가 바뀔 때도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에서 테살로니키라는 생소한 도시로 목적지가 바뀌기도 했다. “그리스에서 터키로 넘어가는 방법을 몰라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그리스 남자들을 만났는데 테살로니키에서 버스를 타면 넘어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행지를 바꿨죠.”
 
  많은 것을 배우고 온 여행이었다. 유럽에서 많은 집을 보다 보니 홈파티 같은 생소한 문화를 체험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 우리나라 주거 공간의 최저 수준을 너무 낮게 잡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유럽은 방 3개 거실 1개인 집의 월세가 우리나라에서는 원룸 월세 수준이에요. 물론 땅이 좁기 때문에 비싼 것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가 주거 공간에 대한 기준을 너무 낮게 잡고 있는 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어요.”
 
  꿈을 찾기 위한 여행에서 정씨는 꿈을 찾았다. 합리적인 주거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본인의 전공인 주거환경하고도 잘 맞았다. 뒤처진단 생각은 안 해 봤냐는 물음에 그는 “안타깝다”고 말한다.
 
  “무작정 취업을 위해 스펙 쌓는 사람은 결국 사회적 통념만을 쫓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번 여행을 통해 꿈이 생겼어요. 그래서 중국의 주거문화를 보기 위해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고요. 제가 즐겁게 열심히 하면 스펙은 금방 쌓일 거라 생각해요.”
 
  오히려 두려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걸 먼저 하라고 조언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다 보면 길이 하나씩 생긴다는 것이다.
 
  “저도 여행을 갔다와서 전시회를 하게 됐잖아요. 하다 보면 새로운 길이 생겨요. 늦는 거에 너무 조바심 내지 않았으면 해요. 1년 늦는 거 진짜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차라리 지금 한번 해 보고 후회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죽을 때까지 영상꾼으로 살고 싶어요”
 
자신의 영상을 소개하고 있는 김혜수씨.
  김혜수(金惠秀·24)씨는 영상이 너무 좋았다. 중학교 때부터 디지털카메라로 친구들과 촬영을 다녔다. 5초밖에 안 되는 영상도 너무 소중했다. 처음엔 장난으로 시작한 촬영이었다.
 
  “영상이 좋았다기보다는 장난으로 찍었어요. 그런데 정말 재밌는 거예요. 친구들이 웃고 떠드는 데 희열을 느꼈죠. ‘아, 영상을 해야겠구나.’”
 
  친구들도 응원했다. 스스로도 자신의 길은 ‘영상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탄탄대로는 아니었다.
 
  “반대가 있었어요. 전 중학교 때부터 미디어고로 진학해서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었거든요. 부모님이 진학을 못하게 하는 거예요.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창밖을 보면서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하지만 곧 잊었다. 대신 취미로 영상을 했다.
 
  “미디어고 애들은 나보다 빠르다는 생각에 영상을 외면했어요. 대신 사진 동아리, 문화교류 프로그램 같은 대외활동에 매진했죠. 영상 말고 다른 꿈이 있나 찾고 싶었거든요.”
 
  영상은 점점 ‘현실’이란 이름으로 멀어져 갔다.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하면 ‘영상꾼’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상과 관계없는 홍보디자인학과로 진학했어요. ‘여자 감독은 힘들어’, ‘나중에 더 전문적으로 배우고 영상을 해 보자’고 핑계를 대며 계속 외면했죠.”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영영 ‘영상꾼’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사고를 쳤다. 작년 7월, 친구와 함께 ‘해보자 영상제작소’를 만들었다.
 
  “인디뮤지션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주는 프로젝트였어요. 지금 아니면 영상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의외로 부모님이 지원해 주셨어요. 대학생 딸이 하는 일이니 믿고 도와주신 것 같아요.”
 
  제작 의뢰도 받았다. 정말 가슴 뛰는 시간이었다. 경비도 거의 스스로 충당했다. 밤을 새워 가며 영상을 다듬었다. 완성본을 의뢰자에게 보냈다. 결과는 참담했다.
 
  “만들면서도 한계를 많이 느꼈어요. 결국 의뢰자가 영상을 올리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의 수준이 안 됐나 봐요. 통보받을 때가 전시회 전날이었거든요. 펑펑 울었죠.”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시회 기간 동안 상영할 수 있게 허락 받았다.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서였다.
 
  “‘까인 뮤비’라고 이름 붙였어요. 처음엔 왜 ‘까인’인지 설명할 때마다 울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점점 괜찮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깨달았죠. ‘아, 이건 평생 해도 되겠다. 날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구나.’”
 
  그가 꿈을 찾을 때 가장 도움을 받았던 건 ‘경험’이었다. 지금 20대들도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도전해야 돼요.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어요. 무서워하지 말고 이것저것 해 봐야 해요.”
 
  —너무 늦지 않을까요. 특히 졸업을 앞둔 사람들한테는?
 
  “전혀. 이거는 평생 찾아야 할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언제든지 바뀔 수 있어요. 그래서 더 다양한 경험을 해 보려고 하는 거고요. 물론 그것이 영상으로 하는 것이겠지만요.”
 
 
  하자-한다-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꿈을 적은 포스트잇이 벽면에 빼곡히 붙어 있다.
  석은원(昔恩源·24)씨와 박남혁(朴南赫·24)씨는 군 전역 후 할 일이 없었다. ‘잉여’처럼 시간을 보냈다. 석씨의 말이다.
 
  “원래는 세계여행 가려고 했어요. 저는 대학에서 제적당했고 저 친구는(박씨) 대학을 안 다니거든요. 돌아갈 곳도 없고 아직 취업 걱정도 없었어요. 시간만 많이 남았죠.”
 
  세계여행을 준비하다 더 재밌는 일이 생각났다. 해 보고 싶은 모든 것을 해 보자는 것이었다.
 
  “청춘은 길가다가 바닥에서 자도 괜찮은 시기잖아요. 그래서 청춘을 무기 삼아서 모두 경험해 보자는 취지로 시작했어요.”
 
  기타 치며 웃고 떠들며 노는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운 좋게 석씨의 지인으로부터 상가 옥상에 있는 컨테이너를 얻었다. 그들은 ‘옥상 프로젝트’란 팀을 만들고 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로의 꿈이 궁금해졌다.
 
  “서로에게 뭐 하고 싶으냐고 물어봤어요.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꿈도 궁금한 거예요. 길 가는 사람들부터 버스기사님, 서울대생까지.”
 
  직업으로 얘기하는 꿈은 듣고 싶지 않았다. 사소하게 하고 싶은 목표나 다짐 같은 꿈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을 불러모으기로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옥상쇼’다.
 
  “의사여도 기타 치는 의사란 꿈이 듣고 싶었어요. 옥상에 사람을 불러모으고 들어 보자고 했죠. 처음에는 지인 위주였어요. 그러다가 점점 모르는 사람이 모이는 거예요. 신기했죠.”
 
  옥상쇼는 작년에 15회가 열리고 180명의 사람이 참석했었다. 옥상쇼의 묘미는 ‘포스트잇 타임’이다. 자신의 다짐이나 꿈을 포스트잇에 적어 컨테이너 벽에 붙인다. 그러면 석씨나 박씨가 각자의 꿈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을 연결해 준다.
 
  “철학과를 다니는데 피팅모델 하고 싶은 사람과 패션브랜드를 내고 싶은데 피팅모델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죠. 그러면 서로를 연결해 주는 거예요. 서로의 꿈을 이룰 수 있잖아요.”
 
  옥상프로젝트는 옥상쇼를 기점으로 라디오, 대신 여행하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반드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 스태프를 뽑을 때도 독특한 기준을 적용한다.
 
  “술 한잔 마시고 꿈을 듣는 거죠. 만약 옥상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온다? 그러면 탈락이에요. 전 옥상에서 빼먹을 수 있는 건 전부 뺏어가라고 해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오는 곳이 옥상이죠.”
 
  옥상쇼가 유명세를 타자 사업화 제의도 들어왔다. 석씨와 박씨는 사업화에 전혀 생각이 없다. 돈을 받게 되면 그만큼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면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정부 보조금을 받아 보라는 제안도 있었는데 거절했어요. 나랏돈 받으려면 기획서 쓰고 확인도 받아야 하고…. 전 못해요.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려고 만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재미 없잖아요.”
 
  최근에는 약간 생각이 바뀌었다. ‘주름진 꿈을 피다’ 프로젝트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는 노인세대의 못 이룬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청년들이 도움을 주는 것이다.
 
  “자전거 타는 게 소원인 할머니에게 자전거 타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더 유명해지고 후원을 받으면 이뤄 드릴 수 있는 꿈의 영역이 더 커지는 거잖아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살고 있는 그들이 봤을 때 20대들이 꿈을 못 찾고 헤매는 게 이상하다. 석씨의 말이다.
 
  “멍청이들이에요. 꿈이 있는데 못하고 있는 건 다 핑계예요. 아무것도 아닌 저희 둘도 하는데 우리보다 나은 사람들이 왜 못하고 있나요? 저희를 보고 영감을 얻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올해 좌우명을 ‘No come, I go’로 정했다. 꿈이 안 오면 자기가 두드리겠다는 것이다. 박씨는 꿈에는 ‘어중간한 사람’이 도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적으로 딱히 어렵지 않고 그렇다고 무언가에 독하게 매달리고 있지 않은 ‘어중간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뭔지 고민해 봐야 해요. 남들이 한다고 따라하지 말고 정말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찾아봐야 해요.”
 
 
  “무대 맛을 봐 버렸죠”
 
  7살 때 처음 가야금을 접했다. 피아노보다도 먼저 배웠다. 그때부터 전통예술에 심취했다. 가야금과 사물놀이를 배우며 10살의 나이로 무대에 섰다. 권단(權旦·24)씨는 그렇게 무대 맛을 알아 버렸다.
 
  “한 번 서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 와요. 시선과 마음과 무대가 끝났을 때 박수, 공연이 끝났을 때 나만 존재하는 느낌, 이게 무대의 맛이죠.”
 
  그는 커다란 탈과 봉산탈춤 의상을 전시했지만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건 공연이라고 한다.
 
  “제 꿈은 공연이지 정적인 전시물이 아니거든요. 강연 끝나고 항상 판을 벌였죠. 관객들을 불러모아 제 공연을 보여줬어요.”
 
  현재 그는 봉산탈춤을 전수(傳受)받고 있다. 처음에는 사물놀이와 가야금을 했지만 17살 이후로 봉산탈춤을 하고 있다.
 
  “우연히 인간문화재 김기수 선생님과 예능보유자 장준석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 두 분을 사사(師事)하고 있어요. 지금도 한국가면극연구회 봉산탈춤예술단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있죠.”
 
  봉산탈춤의 매력은 흥이다. 남사당놀이, 사물놀이, 봉산탈춤을 전통연희라고 한다. 그는 이것이 주는 흥과 맛은 더 특별하다고 말한다.
 
  “전통연희 하는 사람은 다른 걸 못해요. 그 흥과 맛이 너무 좋아서요. 오히려 악기를 하는 분보다 끼가 많으신 분들이 계시죠.”
 
  그의 꿈은 ‘권단’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공연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실력도 키우고 유명해지고 싶다.
 
  “배움은 끝이 없는 거니까요. 평생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저란 사람을 표현하는 공연을 할 수 있죠. 또 ‘우주대스타’가 돼야 해요. 그래야 저란 사람이 궁금해서 관객들이 보러 올 거잖아요.”
 
  권씨는 아직 큰 무대에 서 본 적이 없다. 게다가 따로 월급이 나오질 않아 아르바이트는 필수다. 하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좋아하지 않는 일은 안 한다고 말한다.
 
  “전 성격이 게으르고 의지도 약해서 좋아하지 않으면 안해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건 재밌고 좋아하니까 하는 거예요. 이런 일에 돈을 따질 수 있겠어요?”
 
  공연을 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그다. 하지만 자신과는 달리 요즘 청년들이 꿈도 없이 허덕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즐겁게 살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안타까워요. 평생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한다면 슬프죠.”
 
  20대들이 꿈을 위해 노력하기에는 현실이 어렵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강변을 토했다.
 
  “그게 왜 현실인지 모르겠어요. 저도 공연이 없으면 굶어죽어요. 그래서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하죠. 그러면서 제가 배우고 싶은 걸 하잖아요. 자기만의 틀이 있는데 자꾸 사회적인 틀에 맞추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실천하는 용기가 필요해요.”
 
 
  “정체성을 알아야 꿈을 찾을 수 있죠”
 
자신이 직접 쓴 꿈노트를 들고 있는 최석민씨.
  중학생 때 책을 읽으며 꿈에 대해 고민했다. 꿈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리더십을 기르기 위해 ROTC 50기로 임관했다. 어느 날 당직사관으로 중대원을 관리하는데 축 늘어진 병사들이 보였다. 그때 최석민(崔碩民·28)씨는 꿈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에게 꿈을 주기 위해 시작했죠. 한 명, 두 명에게 꿈컨설팅을 해 주면서 사람이 변화하는 걸 볼 수 있었어요. 그 모습에 저 자신도 보람을 느꼈죠.”
 
  그 이후부터 최씨는 대대 내 유명인사가 됐다. 대대장에 눈에 띄어 꿈에 대한 강연을 했다.
 
  “정말 행복했어요. 그때 감동 받은 이등병이 있었는데 저한테 덕분에 감사하다고 SNS 메시지를 보낸 적도 있거든요.”
 
  전역 후에는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결국 다시 사람들에게 꿈을 묻고, 커다란 노트에 자신의 꿈을 하나씩 적게 만들었다. 노트 맨 앞 장에는 ‘드림 프로젝트’라고 썼다. 그 노트는 4권을 다 채우고 5권째 쓰고 있다.
 
  “전시회 때도 제 노트에 꿈을 적고 사진을 찍었어요. 그렇게 자신의 꿈을 인증하는 거죠. 남들 앞에서 자신의 꿈을 말했으니 할 수밖에 없잖아요. 자신과 모두에게 약속을 한 거니까요.”
 
  최씨에게 꿈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매개체’다. 꿈이 없어 사람들이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지금 꿈이 없는 세대가 불행해 보인다.
 
  “꿈이 있어야 해요. 진정한 꿈. 지금 사람들은 좋은 직장, 좋은 대학에 매몰돼 있어요. 그러다 보니 제대로 꿈을 생각할 겨를이 없죠.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인 건 다 이 때문인 것 같아요.”
 
  그는 이런 세대에게 꿈을 심어 주기 위해 강연을 하고 있다. 특히, 군에 관해서는 더 관심이 많다. 최근 병사들의 자살 문제도 꿈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전에 복무했던 군부대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이 재미없는 편이에요. 개그를 못하거든요. 그런데 모두들 졸지도 않고 보더라고요. 피드백을 받았을 때도 반응이 좋았어요. 오히려 그쪽 대대장님이 교육제안서를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사단 내에서 시범적용해 보겠다고요.”
 
  꿈을 찾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정체성이라고 강조한다. 꿈을 찾는 일은 결국 자신이 누군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름에 선풍기를 사는 이유는 확실해요. 더우니까. 하지만 뭣에 쓰는지 모르는 가전제품을 샀다면 설명서를 봐야 해요. 이것을 어떻게 쓰는지 알아야 산 이유가 명확해지잖아요. 전 그 설명서를 찾는 시간이 20대 때라고 보는 거죠.”
 
  —그럼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해 봐야 해요. 작은 것이나마 직접 실천해 보는 거죠. 그래서 성취해 봐야 합니다. 그래야 더 큰 도전을 할 수 있어요. 성적을 이전보다 더 올린다면 성취감이 생기잖아요. 그러면 장학금을 목표로 공부할 거예요. 그렇게 조금씩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워 가야 합니다.”
 
 
  “엉엉 우는 관객도 있었죠”
 
  꿈이 없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갔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리고 학사경고 두 번을 받고 도피하듯 군대를 갔다. 조경모(趙慶謨·25)씨는 그곳에서 꿈을 갖게 됐다.
 
  “군에서 적응을 못했어요. 선임하고도 트러블이 생기고 여자친구와도 헤어졌었죠. 그때 《청춘, 거침없이 달려라》를 읽게 됐어요. 생각이 확 트였죠.”
 
  그때부터 자신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노트를 펴고 고민하던 그는 결국 좋아하던 걸 찾았다. 사람이었다.
 
  “제가 부유하지도 않고 명석한 뇌도 없었어요. 결국 사람만 남더라고요. 입대 전에도 사람 만나는 걸 좋아했거든요.”
 
  사람을 위한 일을 찾다가 《톱클래스》에 사회적 기업 CEO(최고경영자) 인터뷰를 읽게 됐다. 그리고 조씨는 사회적 기업 CEO를 꿈으로 삼았다.
 
  “얼마나 좋은 직업이에요. 사람도 만나고 도움도 주고 돈도 벌고. 매력적인 직업이죠.”
 
  자신이 얻은 이 꿈을 남들도 얻었으면 했다. 더 많은 사람이 꿈에 대해 생각하고 영감을 얻길 바랐다. 그래서 ‘꿈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꿈에 관한 커뮤니티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SNS 페이지로 처음 개설했죠. 초창기엔 지인들이 회원이었어요. 제가 군에 있을 때 만든 커뮤니티거든요. 그러다 점점 사람이 늘어났죠.”
 
  전역 후 이 모임은 점점 더 커졌다. 오프라인상에서 만남을 갖는 횟수도 늘었다. 거기에 자신감을 얻어 오프라인 모임으로 확장했다. 확장 후에는 강연, 모임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직접 면접을 통해 스태프도 뽑았다. 커뮤니티가 커지자 더 큰 활동을 원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작년 2월 모임에서 한 지인을 만났거든요. 거기서 꿈을 전시해 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다른 스태프를 만났는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되는 거다 해 보자고 해서 하게 된 거죠.”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난관에 부딪혔다. 제일 큰 어려움은 돈과 사람이었다.
 
  “아이디어는 있는데 이걸 어필해서 후원받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또 스태프들이 대부분 대학생이나 직장인이다 보니 이것에 온전히 시간을 투자할 수 없었어요. 작가들을 모으는 것도 힘들었고요.”
 
  조씨는 하나씩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돈은 클라우딩 펀드와 후원을 통해 충당했다. 모자라는 사람들은 직접 한 명씩 섭외했다. 2명뿐이던 작가가 전시회 직전에는 12명으로 늘었다. 전시회는 성황리에 끝났다. 꿈이 이뤄진 것이다.
 
  “전시회 동안 깨달은 게 많았어요. 어떤 관객은 울더라고요. 너무 고맙다고. 자신감이 결여돼 있고 꿈에 대한 생각이 없었는데 여기서 영감을 받아간다며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모습을 보며 요즘 20대들이 불행하다는 것을 느꼈다. 즐거움이 결핍돼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좀 더 아껴야 한다고 말한다.
 
  “좋은 직장, 스펙. 자신이 왜 해야 하는지 알고 하나요? 내가 안 하니까 뒤떨어진다는 그런 느낌이 드나요? 결국 사회에 자신을 내던진 거예요. 그러지 말고 자신을 아꼈으면 좋겠어요. 정말 자신이 뭘 해야 즐거운지 생각해 봤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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