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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제기

在美 詩人 정치학자가 한국文壇에 던지는 통렬한 비판

글 : 최연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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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가 지난 10년 한국에 살면서 바라본 문학세계를 기록한 것이다. 이 글은 네 개의 문학적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의 문학세계와 한국문학의 세계화, 북한 문학인과의 교류에 대한 필자의 논평이고, 60년대 한국에서 찾을 수 없었던 인문학이란 보석과 백제의 여행기가 된다. 미국에서 30년 살다가 조국으로 가서 살았던 10년은 한국을 다시 보게 했다. 미국에서 바라본 한국과 크게 다를 것은 없지만 거기서 숨 쉬면서 바라본 한국을 기록함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리라.

崔然鴻
⊙ 74세.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美인디애나대 정치학 박사.
⊙ 美위스콘신대 조교수, 올드도미니언대 부교수, 미시시피대 교수, 美 국방장관실 환경정책보좌관,
    워싱턴대 교수, 서울시립대 도시과학대학원 교수 역임. 연세대 재학 중 《현대문학》으로 등단.
⊙ 저서: 시집 《정읍사》 《한국行》 《최연홍의 연가》 《아름다운 숨소리》 등.
한국 문단의 양대 산맥인 《창작과 비평》의 백낙청(왼쪽)과 《문학과 지성》의 김병익.
  한국문학은 양적으로 풍성해졌다. 그러나 그 풍성함 뒤에는 신인상을 팔아 문학지를 만드는 장사꾼들이 있다. 문학의 품질관리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00만원에서 300만원이면 신인상으로 시인, 수필가, 작가, 문학평론가가 된다. 단순문장을 쓰지 못하는 자들이 수많은 문예지를 통해서 문인으로 데뷔한다. 신인 3인을 배출하면 잡지 한 권 만들 수 있고, 발행인은 밥 먹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문인이고자 하는 사람들의 명예욕을 충족시킨다. 그래서 풍성함 뒤에는 시를 모멸하고 문학을 모멸하는 군중이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문학세계에 너무 많다. 그들이 문학인구의 80% 내지 90%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이 천민 문인이라면,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문학사상》과 거래하는 귀족 문인도 있다. 백낙청(서울대 교수), 김병익(《동아일보》 퇴직기자)이 주도한 《창비》와 《문지》는 출판사로 돈을 벌었고, 계간지를 내고 있다. 《문학사상》은 월간으로 나오고 있는데, 60년대 현대문학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 전문지로는 《시문학》이 월간으로 나오고 있고, 대개 계간지로 나오고 있다. 동인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60년대 최고의 문예지였던 《현대문학》도 계간으로 나오고 있는데 동인지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 문학에 뜻을 두고 있으면 《창비》나 《문지》에 소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필자가 서울시립대에 도착하니 국문과의 젊은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L이 “선생님도 《창비》나 《문지》에 속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내 나이에 어디 파벌에 든다는 것이 구차하잖아!”하고 대답했다. 파벌정치는 정치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도처에 있더라.
 
 
  문학과 권력
 
북한 핵실험을 비판하는 詩를 쓴 시인 정현종.
  물론 박경리, 박완서, 이문열, 황석영… 잘나가는 작가는 파벌에 속할 필요가 없다. 30년 외국에서 살다가 온 나는 잘 알려지지도, 잘 팔리는 시인도 아니었으니 그의 조언은 타당했다고 본다. 그렇다. 한국은 인정으로 사는 사람들의 나라이고, 인정의 뒤칸에는 파벌이라는 것이 있다.
 
  《창비》는 민중, 민족문학을 표방하고 활동했던 문인들의 집합체다. 백낙청, 고은은 북한과의 문학교류, 민족통일을 표방하고 있다. 《문지》는 《창비》의 정치성 문학을 거부하는 문인들의 집합체다.
 
  《창비》가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싸운 공로로,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자 득세하게 되었다. 《문지》는 김병익이 문학권력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순수문학을 지향하고 있다.
 
  최근 문지파의 정현종이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하는 시를 발표하면서 “문인들은 왜 아무 말이 없느냐”고 성토했다. 그의 말이 《창비》를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한 비수가 되었다. 사실 《창비》는 그동안 사회 문제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정권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북을 찾아가고 민족통일만 주장해 왔지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정권의 특혜를 받고 있었으니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창비》는 정현종에게 “너는 유신시대에 왜 침묵하고 있었느냐”고 반박하고 나설 수 있다. 정현종은 “나는 은유적인 시로 저항했노라”고 “너희처럼 시위나 구호적인 문학을 하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 있을 것이다. 2006년 북한의 핵실험 후 쓴 정현종의 시가 얼마나 문학성을 갖추고 있는지는 다음에 나올 논전이 되겠다.
 
  이제 노벨문학상을 겨냥하는 시인, 작가들이 정권과 코드가 맞아서 황금시대를 맞고 있다면 그들은 정말 문학을 모독하는 자들이다. 문학은 정권과 결탁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권력이 문학을 타락게 한다. 공자는 시는 깨끗한 마음이라고 했다. 시는 언어의 사원이 아닌가.
 
  미국의 노벨상 수상 작가들은 백악관 전화를 사절했다. 백악관과 문학은 아무 상관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1960년대 케네디 대통령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윌리엄 포크너를 백악관에 초청하려 했을 때 포크너는 “저녁 한 끼 먹으러 가기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며 사양했다. 그는 미시시피 대학촌에 살고 있었다. 그가 정일품 작가가 아니겠는가.
 
  청와대 식객이 되고 평양에 가서 단군 능에 큰절을 하고 김일성 생가를 방문하는 자들이 행여 노벨상 작가가 될까 두렵다. 북한에 문학이 없는데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임금님은 발가벗고 있는데 비단 옷을 입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남북 문인교류를 추진하는 남(南)의 문인들은 김정은 체제의 붕괴가 북에도 문학다운 문학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달라진 문학세계
 
  이효석의 아름다운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가 고등학교 국어책에서 사라졌다. 일제 식민지 시대 커피 냄새를 찾던 이효석을 정신병자 취급을 했다. 그 자리에 민중, 민족, 반미 시인의 작품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친일문학의 거장이던 서정주의 묘지는 나라에서 추방되어야 하지 않을까. 숨도 쉬지 말고 항일운동을 하든가, 그런 문학만을 기대한다면 그들은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숭상문학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시, 소설은 오로지 주체사상 길들이기용이다.
 
  미국에서 한국을 동경하면서 살던 때가 좋았다. 나는 1960년대 내가 살았던 문학세계를 그리워하며 미국의 삶을 살았다. 그때 《현대문학》엔 적은 돈이었지만 원고료를 정성으로 챙겨주던 박재삼 형이 있었고, 김수영 시인의 누이 김수명씨가 있었다. 지금은 원고료 챙겨주는 사람이 없다. 《문학사상》이 원고료를 보낸다고 내 은행 계좌번호를 묻기에 《문학사상》 1년 구독료로 쓰라고 했다.
 
  시인들이 100명이 안 되었던 가난했던 시절 한국의 문학은 오히려 품위가 있었다. 진정성은 사라지고 현학적인 것이 비틀어져 있는 문학에 문학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집단과, 민중, 민족, 남북교류가 문학이라고 밀고 가고 있는 집단 사이에, 내가 설 자리는 없었다. 나는 고독이 문학의 산실이라고 생각하면서 쓸쓸히 웃고 만다. 자기 골방이 문학의 산실이지 파벌이나 집단이 문학의 산실은 아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하여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왼쪽)와 오에 겐자부로(오른쪽)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좋은 번역가들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하여 번역가를 대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 번역가를 잘 대접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에 좋은 번역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있다. 한국문학은 노벨상을 받을 만한데 번역이 잘못되어 그 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아우성 하는 비평가들도 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필자는 지난 10년 한국에서 번역가를 대접하는 시인이나 작가를 만나지 못했다. 한국에서 이름을 얻은 시인, 작가는 번역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사는 것 같았다. 이미 한국의 독서시장이 저명한 시인, 작가를 먹고살 만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밖으로 안 나가도 먹고살기에 지장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문학은 국경을 넘을 수 있어야 정말 좋은 문학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세계적인 시인이나 작가가 될 야망이 없었든지.
 
  필자가 2002년 한국 PEN 전무이사로 일할 적에 번역가를 찾았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10명이라도 찾아야 할 것 같아서 내외의 번역가 명단을 만들다 그만둔 적이 있다. 이제 국제교류진흥회라는 조직이 생겨나고 번역자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왔다. 나는 그 광고를 읽다가 아연했다. 필자조차 그 모집에 응모할 수 없으니까. 오직 문학 전공의 사람들만이 응모할 수 있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인재의 풀(pool)은 가능한 한 커야 좋다. 물론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자가 번역문학가일 기회는 문학을 전공한 자보다 적겠지만 문(門)은 모두에게 열어놓으라고 주문하고 싶다. 문을 열어놓은 후에 품질평가를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필자는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시인이다. 연세대 재학시절 《현대문학》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지금까지 시를 떠난 적이 없다. 연세대 비문학인 출신으로 정공채, 유경환, 마종기, 내가 있다. 나는 인디애나대학으로 유학차 떠나 1996년 서울시립대로 돌아왔다. 그 긴 세월 미국에서 대학교수와 연방정부 고급공무원 생활도 했고, 영문시집도 냈고, 단편소설도 발표했고, 《워싱턴 포스트》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지면에 글도 발표했고, 미국 속의 한국문학 작품집을 편집하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코리아 타임스》 번역문학상도 받았고, 저명한 몇 작가의 작품들을 번역, 발표하기도 했다. 이제 은퇴하여 남은 생 번역문학에 기여하려 하고 있는데 문이 닫혀 있으니 어찌해야 좋은가.
 
  열려 있는 사회가 닫혀 있는 사회보다 훨씬 역동적이다. 예를 들면, 미국이 열려 있는 나라이고 한국은 닫혀 있는 나라이다. 불필요하게 닫아두는 것이 한국의 병폐다. 한국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폐쇄적인 사회 성격이다. 정권이 코드인사를 하는 것도 닫혀 있는 인사제도를 말하고 있다. 열어놓아도 인재를 등용하기 어려운데 한정된 풀에서 사람들을 쓰니 최선의 정부를 만들기 어렵다.
 
 
  노벨상은 도적처럼 와야
 
  《딕테》라는 책을 내고 요절한 차학경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녀의 오빠 차학성은 생애를 한국문학 작품의 번역에 쓰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가 번역하고 싶은 작품은 대산재단이나 한국문학 번역원이 추천하는 명단에 들어 있지 않다고 불평한다. 번역가에게 자유재량이 필요한데, 그 자유를 주지 않고 있다. 그러면 번역가는 실망하게 된다. 한국의 유명한 문학상을 받은 작품을 번역하라 해서 했는데 그 작품은 미국, 유럽 어느 문예지에도 게재될 만한 가치가 없었다. 한국의 작품 추천이란 것이 웃기는 것이다. 그러나 추천위원들이 문학의 권력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에서 잘나가는 시인이나 작가가 세계에서 잘나간다는 보장은 없다. 오늘의 불행한 현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번역자를 ‘모집’한다는 천박한 말보다는 번역가를 ‘초빙’한다는 문장이 훨씬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적절한 문장이 아닐까. 번역의 초년생, 일등병을 모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번역가의 지위를 얻은, 아니면 그런 지위를 얻었다고 생각되는 분들을 초빙해야 하지 않을까. 성문을 열어두는 것이 좋고 길은 다원화할수록 좋다.
 
  노벨문학상이 한국에 오지 않는 이유를 번역의 품질저하에서 찾으려는 자는 문학작품의 품질저하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이라는 나라, 국경을 넘어서 타민족에게도 읽힐 수 있는 문학작품이 몇이나 되느냐 물어야 한다. 우선 외국문학을 접해야 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이태리, 프랑스, 스페인, 쿠바, 아프리카에 ‘살면서’ 얻은 체험을 문학작품으로 승화한 문학적 삶을 보라.
 
  가을이 되면 올해의 노벨상 수상자가 결정될 것이고, 우리는 또 ‘번역이 잘 안 되어서’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고 불평할 것이다. 단풍이 북한산 자락으로 내려올 때쯤 노벨상에 눈독을 들인 시인이나 작가는 스칸디나비아 하늘 아래 어느 술집에서 로비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의 여비를 정부가 지원한다는 소문도 퍼져 있다. 정부기관은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벨상은 도적처럼 와야지, 그렇게 찾아가서 구걸해서 얻어오면 품위를 잃는다. 어느 정치인이 오랜 세월 로비해서 평화상 받게 되니 문학상도 그렇게 오는 줄 알고 있는 한심한 자들이 있다. 정치가 문학을 타락하게 만들었다.
 
  한국 시인이나 작가가 세계를 누비고, 번역가를 초빙하는 사회가 오면 노벨상도 도적처럼 한국으로 날아올 것이다.
 
  필자는 미국 안에 한국문학의 전초기지 역할을 담당할 출판사를 미국의 수도에서 누군가 시작하기를 바란다. 일본문학의 세계화는 Stone Bridge라는 출판사가 해냈다. 미국 출판사에 보조금을 주어서 만들어진 전초기지가 아니다.
 
 
  북한문학
 
2006년 10월 30일 금강산에서 만난 남북한 및 해외동포 문인들이 ‘6·15 민족문학인협회’를 결성했다.
  햇볕정책이란 말이 유행어가 되기 전에도, 북한에 문학이 있느냐 없느냐는 논의는 있었다.
 
  표현의 자유가 없는 나라에 문학이 있을 수 없는데…. 어느새 있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것 같고, 남북의 100여 명 문학인들이 지난 2006년 10월 30일 금강산에 모여 6·15 민족문학인협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통일문학을 발행하고, 통일문학상을 제정하고, 통일을 한목소리로 내자고.
 
  남과 북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남북의 문인들은 어느 정치인, 학자보다도 열렬히 주장할 수 있다. 문인들에게 민족분단이란 있을 수도 없고, 지금이라도 당장 분단 종식, 통일이 와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필자도 그런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문인들은 꿈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상향을 꿈꾸며 살고 있기 때문에. 한 민족이 하나로 뭉쳐야 하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분단이 되었고, 지금까지 문인들은 분단 상황에 속수무책이었다. 지금 그들이 모여서 문학을 통해 한 민족의 복원을 시도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북한에 문학은 없고, 문학이 있다면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의 숭상문학 정도가 있다고 본다면, 그리고 통일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식 통일이라면, 금강산 회동이 지극히 낭비적이었고, 낭비적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레닌은 공산당 혁명이 성공하면서 문학에 공산주의 혁명도구로서의 성격을 부여했다. 마오쩌둥도, 김일성도 공산주의 혁명도구로서 문학을 예찬했고, 인정했다. 그 이외의 문학, 그러니까 문학으로서의 문학은 반동이고, 퇴폐적이고 부르주아 문학이라고 숙청했다. 지금도 북한은 남한의 문학이나 세계의 문학이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퇴폐하게 만드는 반동문학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런 북한의 문인들이 남한의 문인들과 만나 문학다운 문학을 논의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남한의 민족, 민중 지향의 문인들과 공동의 영역이 있을 것 같지만 결국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고 남한 시민들의 혈세 낭비로 끝낼 가능성이 높다. 북한과 만나서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온 회의를 아직 본 적이 없다.
 
 
  문학 위에 黨性
 
  문학의 최상위에는 당성(黨性)이 있어야 하고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가르침이 있어야 하는데, 남한의 민중·민족 문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문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노동자, 농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모티브와 일치되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북한의 김정은 명령 아래서 제작되는 문학은 너무 유치하고 단순한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1947년 9월 문학의 당성 원칙에 반대하였던 시인과 작가들을 종파분자로 규정, 숙청했고, 1955년 북조선 문학예술총동맹은 리순영의 서정시 〈노을〉 〈봄〉 〈산딸기〉, 안막의 〈무지개〉, 전초민의 〈꽃씨〉, 김영석의 소설 〈이 청년을 사랑하라〉가 전투성과 호소성이 부족하다고 숙청했다. 그 후 숙청은 없었다. 알아서 하니까.
 
  북으로 간 좋은 시인, 작가들은 문학작품다운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타계했다. 1980년대, 90년대 김정일의 종자론, 공산주의 인간학, 우리 식대로 살자, 철학적 깊이가 문학의 지침이 되었다. 〈꽃파는 처녀〉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 〈성황당〉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가 북한의 불멸의 예술작품이 되었다. 안중근보다 김일성이 위대하고, 불교, 유교, 기독교보다 김일성이 위대하다고 부르짖는 문인들과 어떻게 문학을 통한 통일의 문을 열 수 있겠는가?
 
  과학기술의 발전, 농업생산성을 강조하는 단편소설들이 눈에 띄어도 김일성·김정일의 가르침 안에서 가능해야 한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김정일 스스로 모순을 느꼈지만 그는 그 모순을 깰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모순의 타파는 자기의 파멸이기 때문이다.
 
  남한문학을 김동인, 이상과 같은 반동, 부르주아 문학 전통을 잇고 있으며 인생의 무목적, 무의미성을 설교하며 변태적 성적 방종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북한 문인들과 모여서 무엇을 함께 논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南北 文人의 만남
 
  그러나 문익환의 시집 《두 하늘 한 하늘》, 김준태의 시집 《칼과 흙》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선언을 좋게 평가한 평론이 보이고 있으니 그것을 토대로 진지한 문학의 길을 열어간다면 다행이다. 민중의 권리, 민족통일의 주장이 공동의 영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북한엔 파스테르나크나 솔제니친, 조정래, 황석영 같은 작가가 없다. 남북한 새 연구를 하나로 묶어서 내라는 노인의 유언을 담은 단편 〈쇠찌르러기〉(《조선문학》 1990년, 3월호)의 작가 림종상 정도가 북한 측의 좋은 문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나 유럽의 문학이 지극히 퇴폐적이라고 보는 북한 문인들과 제3세계문학, 남미문학을 세계 문학으로 가는 길목에서 토의한다면 조금은 좋은 시작이 되지 않을까.
 
  앞으로 남북한의 문인들이 모여 북한에도 진정한 문학이 자리 잡도록 유도하기 바란다. 그리고 북한 사회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문학의 길을 열기 바란다. 이 바람이 환상이 아니길 바란다. 제발 문인들이 남한 시민들의 혈세를 환상으로 끝낼 일에 쓰지 않기를 바란다. 통일문학을 간행하고, 통일문학상을 시상하는 일에 남한 시민의 세금이 한 푼 들어가지 않고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러나 금강산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여비도 통일부 자금(세금)으로 가능했었으리라고 추측한다. 문인들도 세금을 눈먼 돈이라고 보고 쓰면 곤란하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닥터 지바고》를 다시 읽기 바란다. 아니면 영화라도 다시 보기 바란다. 금강산 모임에서 그 영화를 남북 문인들이 함께 감상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 역사의 보석
 
  외국에서 30여 년을 살다가 조국에 돌아와서 발견한 것은 한국 역사의 보고(寶庫)에서 찾아낸 보석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고 있었지만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1960년대에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90년대 조국에 돌아와 내가 그 속의 고전을 자유롭게 읽게 되었을 때 역사의 보고에서 보석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한문을 남보다 많이 알고 있던 필자에게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조실록》 《난중일기》는 접근하기 어려운 문헌들이었다. 그 고전들이 이제 한글로 번역되어 언제든지 읽을 수 있는 고전들이 되었다.
 
  한국의 경제적 발전은 강남, 여의도의 높은 건물들과 산처럼 높은 아파트, 무수히 생겨난 한강다리들, 홍수처럼 넘치는 자동차들, 고속도로, 시골마을의 중소도시화, 그런 모습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의 수준은 오히려 후퇴했고, 정치자금은 경제발전과 비례해 그 규모가 천문학적으로 커졌고, 그래서 정경유착이나 정치적 부패는 사과상자로부터 차떼기로 확대되어 있었다.
 
  한국의 경제발전이 한국 문화에 미친 영향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한글로 번역된 《삼국유사》 《난중일기》를 처음 대했을 적에 느낀 감정을 표현하기 어렵다. 이제야 한국 역사를 바로 읽는구나, 그 기쁨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기쁨이었다. 한국의 고전이 거의 모두 번역되어 있었다. 도서관에 가면 언제나 꺼내어 읽을 수 있는 우리의 고전이 있다는 사실이 60년대와 다른 한국의 모습이었다.
 
  한국 역사를 자랑스럽게 느끼게 하는 것이 고전의 힘이다. 그 고전을 보고, 만질 수 있을 때 지성의 행복이 온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고,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고, 이순신이 《난중일기》를 썼다는 사실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60년대 역사 시험문제들은 누가 그것들을 썼는가를 물었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묻지 않았다. 참으로 부끄러운 시절, 부끄러운 교육이었다.
 
  경제발전은 출판의 발전으로도 나타났다. 한국의 출판기술은 세계 정상급이다. 북한과의 비교는 평양에서 나오는 간행물의 질에서 나타난다. 화려하다고 출판문화가 높은 것은 아닐지 몰라도 남북한의 격차는 너무나 크다. 미국의 출판문화와 비교해도 좋다. 베스트셀러가 되면 몇십만 부 나가니 시인이나 작가가 행복한 나라가 되었다.
 
  박정희 시대 그의 경제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시인, 작가들이 박정희가 거둔 경제발전으로 글만 써서 먹고살 수 있게 된 사실이 재미있는 모순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많은 시인, 작가, 시민들이 경제발전의 덕을 보고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불평하지만 가난한 60년대보다 훨씬 많은 독서인구가 있다. 문학작품을 읽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불평하나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한국에 돌아와서 박정희는 한국 역사와 문화를 생각한 대통령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현충사를 방문했었을 때 오늘의 현충사를 박정희 대통령이 조성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경주 국립박물관이나 통일전, 대능원이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늘의 경주는 그가 만든 것이다. 1960년대 버려진 역사유산을 그가 찾아내 보전한 것이다. 왕의 교지, 대원군의 난초가 벽지로 쓰이던 시대, 그 시대엔 역사의 귀중함이 없었다. 그가 성취한 경제발전이 우리나라의 역사의 보고에서 보석을 찾게 한 것이다. 그는 좋은 민족주의자로 보인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그가 자본과 기술을 외국으로부터 들여와, 과학과 학문의 발전을 도모하고, 에너지와 물의 절대적 필요를 인식해, 원자력발전소와 댐을 짓게 했고, 제철, 조선 산업을 일으킨 것은 민족의 자긍을 일으켜 세우려 했던 그의 의지와 노력으로 보인다.
 
 
  백제를 찾아서
 
  필자가 1960년대 후반 한국을 떠나 1990년대 후반에 돌아와 30년 사이의 한국의 변화를 말하라 하면, 한국 역사의 보고에서 찾은 보석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변화의 주역은 한자로 쓰인 한국의 고전을 한글로 번역한 인문학의 힘이다. 한글로 쓰인 《삼국유사》를 읽으며, 《난중일기》를 읽으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으며 우리 역사의 지성을 보고 있으면 인문학의 위기란 말이 어불성설이다. 인문학은 바로 문학, 역사, 철학을 담은 고전이 아닌가.
 
  한국의 경제발전이 가져온 보석 가운데 인문학이 들어 있다. 경제발전이 인문학을 파괴한 것처럼 오도하지 마라. 경제발전이 인문학의 발전을 가져왔으니. 그러나 인문학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는 데 실패하면 그것은 온전히 인문학의 책임이다.
 
  난생처음 공주에 갔다가 부여에 들렀다. 부여엔 초등학교 시절 수학여행 후 처음이니 50년 만의 재방문이다.
 
  “시인이 공주를 다녀오지 않았으면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소설가 정소성 교수를 따라 공주로 갔다. 오후 1시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1시간20분 후 공주 터미널에 도착한다. 거기서 택시를 타고 금강을 건너 무령왕릉으로 갔다가 공주박물관을 다녀와 저녁 어스름 공산성을 둘러보고 밤을 맞았다.
 
  이튿날 아침 부여로 가서 부소산성 속 몇 개의 누와 낙화암, 고란사, 그리고 부여 중심가에 있는 정림사지에 와서 백제5층탑을 보고 서울로 돌아왔다.
 
  공주여행은 무령왕릉을 찾는 일이었다. 공주는 무령왕릉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고, 백제 유적이 무령왕릉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백제는 사라진 왕국이고, 남아 있는 것이 없다. 700년 역사가 그렇게 모두 사라질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한강에서 시작해서 금강으로 밀려났다가 금강 하류에서 사라진 비탄의 왕조, 그 왕조를 그나마 구한 것이 무령왕릉이다. 공주국립박물관도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들을 보존, 전시하기 위한 것이다. 무령왕릉 발굴 시 공주 시민들이 그들의 문화유적이 공주에 남아 있기를 바라서 생겨난 박물관이다.
 
 
  아! 무령왕릉
 
백제 문화의 精髓를 보여주는 공주 무녕왕릉.
  1971년 성산리 고분의 배수로를 만들기 위한 작은 공사가 1400년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무령왕릉을 발견하게 했다. 묘비에는 분명히 무령왕과 그의 왕비의 묘라는 글씨가 지금도 선명하게 쓰여 있다.
 
  그 당시의 감격이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금 보아도 감동이다. 두 개의 관이 놓여 있던 현실(玄室)의 벽돌이 하나하나 예술품이다. 벽돌의 무늬가 다양하고 정교하여, 지금 막 구워낸 벽돌 같다. 천장은 아치(arch)형으로 만들었으니 백제의 건축술이 6세기에 상당했으며 벽에 호롱불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 놓은 것, 모두 경탄할 만하다. 그 안에 있던 부장품들 가운데 왕비의 팔찌가 오늘의 예술품이라고 해도 세계 제일의 것이다. 팔찌를 만든 다리(多利)라는 장인이 금속공예 대상을 받을 만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 양나라의 동전이며 일본 남부에서 자라는 금송으로 만든 관이 백제 전성기 이웃 나라와의 문화교류를 실감케 한다. 돛단배가 금강에서 황해로, 남해로 가 이웃들과 교류했는데 오직 고구려와는 교류가 없었다. 가장 치열한 교전국이었으니까.
 
  그 많은 왕이 죽어갔을 때 크게 왕릉을 만들었는데 그 능이 누구의 능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무령왕은 능의 이름을 밝히게 했는가? 경주에 가면 천마총이란 능이 있다. 말안장이 나온 능이라 천마총이라고 후일 이름 지었을 뿐이고, 지안에 있는 광개토대왕의 능이란 것도 추정만 가능한데, 어찌하여 백제의 무령왕은 그의 이름을 밝혔는가? 참으로 다행스럽다. 그는 1400년 후대를 생각하고 살았던가?
 
 
  공주의 보물 공산성
 
  한강의 도읍을 버리고 금강으로 내려온 백제의 왕이 비통해 하면서 새로운 백제를 건설하려 했을 것이다. 거기서 60년 통치하다 부여로 내려간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와 신라의 위협에서 조금 더 멀어졌겠지만 무령왕의 아들 성왕도 부여에서 백제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100년이 다 가기 전에 신라와 당의 연합국에 완전히 패해 멸망해 버렸다. 너무나 혹독한 멸망이었는지, 너무나 혹독한 도굴이었는지 남은 것이 없다.
 
  공산성은 공주의 보물이다. 금강을 옆에 두고 쌓은 성인데 그 안에 백제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흔적이 남아 있고 연못이 있고,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여기에 머물렀다는 기록들이 있다. 금강 건너에서 바라본 공산성의 야경은 괜찮았다. 60여 년 백제의 흔적은 무령왕릉과 공산성에 집중됐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가도 새로운 유적이 나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부여, 백제 멸망의 슬픔이 남아 있는 유적은 낙화암이다. 꽃처럼 떨어져 간 삼천궁녀들의 혼을 위로하는 고란사와 고란사 옹달샘 위에 자라는 풀잎, 고란. 초등학교 수학여행에서 남아 있는 부여는 고란사와 낙화암, 그때 군수기지창이었던 부소산성에서 캐낸 타버린 쌀이 다였다.
 
  50년 세월이 지난 부소산성엔 김해의 고등학생들 졸업여행이 있었고, 언론중재위원들의 방문이 있었다. 감개무량, 그것은 내 심정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때는 없었던 누각들이 있고, 백제의 3충신,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부소산성엔 현대인이 장식해 놓은 장식품들이 많이 생겨났다.
 
  금강의 하류를 부여에서는 백마강이라 부른다. 백마강은 군산으로 빠져 황해로 나간다.
 
  부여는 발전되지 않은 읍으로 남아 있다. 택시 기사는 JP에 대한 불만이 많다.
 
  부여의 다른 유적은 정림사지 5층탑 하나뿐이다. 정림사란 절터의 이름도 고려 기와에 새겨진 이름일 뿐, 백제시대에 건축된 절 이름도 모른다. 석탑이어서 남아 있는 것뿐. 국보 9호다. 정림사지에 들어가면 석불좌상이 하나 집 속에 갇혀 있는데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태만 겨우 남아 있다. 추상파 조각가가 만들어 놓은 석불좌상 같다. 풍상에 마모된 것을 보호하기 위해 집을 짓고 보호하고 있지만 이 불상도 백제의 것이 아닌 고려시대 보존불로 추정되고 있다.
 
  백제→통일신라→고려→조선→한국으로 넘어온 그 기간, 이 나라 역사는 보전되지 않았고 풍상에 마모되었고 전란에 파괴되었고, 도굴꾼들에 의해 도둑 당했다. 역사의식은 이제 만 30년 되었으니 너무나 늦은 감이 있다. 그러나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 과거를 보전할 만한 의식이나 인식, 여유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역사 문화를 보전하는 시민의식을 높일 필요가 있다. 쓸데없이 박정희를 무너뜨리기 위한 과거사 규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나라 국토에서 2000년의 역사 유적을 찾는 일이고 보전하는 일이다.
 
  내 시 한 편 함께 소개한다.
 
  비탄의 강
 
  ‌1
  이 나라의 중심을 흐르는 한강 연안에
  도읍을 세우고도 500년 후 금강 연안으로
  천도하고 60여 년,
  그 후 금강 하류로 떠내려가
  100여 년 더 지탱하고
  망해버린 왕조
  어디에도 그 왕조의 유적, 흔적 하나 없다
  여자들 이 꽃처럼 떨어져 간
  낙화암이 비탄의 강을 지켜주고 있다
  그들의 불쌍한 혼을 위로하는
  고란사가 강가에 서 있다
  5만의 적군에
  5천의 군사로 대적한 장군은
  마지막 전쟁터로 떠나기 전
  그가 사랑한 아내와
  아이들의 목을 베었다
  이 처참하고 슬픈 역사가
  백제의 흔적이고 유적이다
 
  2
  백제를 받쳐주고 있는
  무령왕릉,
  왕과 왕비가 합장된 묘지
  1971년 우연히 찾아진 능 하나가
  찬란했던 백제 역사를
  어두운 현실(玄室)에서
  꺼내놓았다
  28개의 다양한 벽돌 하나하나가
  받쳐주고, 세워주고
  천장으로 올라간 아치
  누가 저렇게 견고하고 단정한
  연꽃무늬 벽돌을
  구워 내놓을 수 있을까?
  벽면의 백자등잔(白瓷燈盞) 놓일
  불꽃형 공간,
  묘지석(墓地石),
  …예술이다
  다리(多利)가 만든 왕비의 은팔찌
  오늘 뉴욕의 티파니에 가서도 살 수 없는
  백만 달러짜리 금속공예품
  왕과 왕비의 뼈도 공기로 산화했지만
  일본에서 온 금송(金松) 목관이
  결 고운 문화의 교류를 보여주고 있다
 
  3
  1400년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왕릉 하나가 700년 백제를 증언하고 있다
  도굴당한 1400년 세월이 부끄럽지만
  역사의 파편 하나
  비탄의 강에서 나와
  곰나루를 지켜주고 있다

 
 
  맺는 말
 
  미국에 살고 있는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들이나 문학인들이 지나치게 한국 문학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는 시선을 미국 속의 한국문학이나 미국문학으로 옮겨야 한다. 로스앤젤레스, 워싱턴, 뉴욕, 애틀랜타, 대도시에 한국 문인들의 단체들이 있다. 그 단체들이 미국 속의 한국문학을 미국 속의 소수민족 문학으로서 한국문학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영어로 쓰는 1.5세대, 2세대의 문학만이 미국 속의 한국문학이 아니다. 1세대의 문학작품 속에 있는 진정성이 미국 사회에 노출될 필요가 있다. 그들의 문학작품을 여기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번역할 수 있도록 번역가 풀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번역문학상을 만들 필요가 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오히려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시인이나 작가의 작품으로 가능하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국과 세계가 부딪치는 문화의 충격을 수용하고, 완화하고, 때로 방황하고, 때로 여행하고, 때로 순례하는 순례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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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용파    (2015-01-11) 찬성 : 235   반대 : 79
님의 용기와 작가정신, 창작과 문학의 본질과 그리고 문인의 정도에 관한 예리하고도
정면돌파적인 지적과 현실문제의 해부에 깊이 감사드리며 마음으로부터의 성원을
보냅니다. 가슴을 적시는 토로와 해부 그리고 용기있는 비판에 다시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배용파시인 드림.

2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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