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원, 인턴기자 거쳐 MBC 공채 개그맨으로 연예계 입문
⊙ 선후배 사이에 서열이 엄격한 개그맨 특유의 문화, ‘기를 죽인 다음 색깔을 입히기 위해’
⊙ 무대에서 내려오면 웃음이 없어지는 개그맨들
金容載
⊙ 연세대 독어독문과 졸업.
⊙ 前 이랜드·SPC 사원. 월간조선 인턴기자.
⊙ 19기 MBC 공채 개그맨, <코미디에 빠지다> 출연 중.
⊙ 선후배 사이에 서열이 엄격한 개그맨 특유의 문화, ‘기를 죽인 다음 색깔을 입히기 위해’
⊙ 무대에서 내려오면 웃음이 없어지는 개그맨들
金容載
⊙ 연세대 독어독문과 졸업.
⊙ 前 이랜드·SPC 사원. 월간조선 인턴기자.
⊙ 19기 MBC 공채 개그맨, <코미디에 빠지다> 출연 중.
“안녕하세요. 개그맨이 네 번째 직업인 꿈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나그네킴입니다.”
2012년 7월. MBC 공채 19기 개그맨에 합격했다. 내 나이 31살. 네 번째 직장이 생긴 것이다. 이직이 잦긴 했지만 설마 개그맨이 되리라고는 부모님이나 친구들, 심지어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
대학시절 나는 방송사 PD 지망생이었다. 한 방송사에서 일년에 몇 명밖에 뽑지 않는 PD 시험에 수차례 떨어지기를 반복한 후, 꿈보다는 현실을 선택하기로 했다. 꿈을 접고 일반기업에 들어갔다.
네 번째 명함, 개그맨
처음 들어간 곳은 기독교계 기업이었다. 그 특유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아쉽지만 퇴사를 하고 다른 기업에 들어갔다. 이곳에서도 오래 근무하진 못했다. 첫 번째 퇴사의 경우, 회사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해서였다면, 두 번째 퇴사는 내가 회사 업무를 견뎌 내지 못해서였다.
두 번째 퇴사를 준비하며 ‘기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활발한 성격과 진취적인 태도를 업무에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이지 싶었다.
2012년, 31살의 나이로 《월간조선》에서 최고령 인턴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여러 선배 기자들의 격려와 안타까운 시선 속에서 정식 기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시험에 응시했다.
그러던 중 ‘조선비즈’ 최종 면접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나의 짧은 광화문 생활은 끝이 나는구나. 《월간조선》 인턴기자도 그만둔 참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개그맨 시험에 붙었다. 실의에 빠진 백수가 얼마 안돼 개그맨이 되었다며 나타나자 《월간조선》 식구들은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최병묵 편집장뿐 아니라, 심지어 김창기 조선뉴스프레스 대표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조선뉴스프레스 역사상 인턴기자가 개그맨이 돼서 나타난 것은 처음”이라며 “기자는 세상에 영향력을 어필하고픈 욕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요즘은 개그맨이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세상이니 열심히 하라”는 조언을 해 줬다. 귀에 확 들어오는 말이었다.
꿈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처럼 우연처럼 운명처럼 개그맨이 되어 버렸다. 개그맨의 길을 진지하게 걸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 31살의 나이테는 더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는 표지판과도 같았다. PD 지망생 시절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MBC를 직종은 좀 다르지만 들어갔다는 게 어쨌든 기쁘기도 했다. 기쁜 마음으로 첫 출근을 했다.
“고대생을 뽑았어야 했는데”
막연히 생각한 것과 다른 현실, 나는 MBC 개그맨들 사이에서 ‘이방인’이었다. 내 동기들은 개그맨이 되기 위해 대학로에서 적어도 2년 이상 시간을 보내다 왔다. 실전에서 관객들과 직접 부딪치며 현장경험을 쌓았다는 얘기다. 나는 그들과 달랐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개그맨이 됐기 때문에 잘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타고난 연기자이길 소망했지만 내 연기는 공기마저 어색하게 만드는 수준이었고, 코너를 기획해 본 경험도 전혀 없었다. 개그맨들끼리 쓰는 기초적인 개그용어조차 몰라서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어리버리하고 거기에 나이까지 많은 국외자였다. 선배들이나 동기들은 내게 말도 잘 안 걸었다. 나중에 들어 보니 다들 내가 금방 그만둘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입사하고 얼마 후 MBC는 <코미디에 빠지다>라는 개그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여기에 박명수 선배가 진행하는 ‘거성사관학교’라는 코너가 있었다. 신인 개그맨들이 개그를 겨루며 배운다는 내용의 코너였다. 동기들은 저마다 장기를 가지고 ‘코너 검사’를 받았다. 준비한 아이템이 웃긴지 안 웃긴지 검증받는 절차다. 코너 검사를 통과해 방송에 출연하고 싶어 열심히 준비했다. 하지만 번번이 ‘탈락’이었다. 탈락 정도가 아니라 매번 검사실 들어가는 게 무서울 정도로 호되게 혼이 났다. “고대 출신을 뽑았어야 했는데 연대 출신을 뽑아서 이 모양이다”는 비난은 애교 수준이었다. 검사를 받고 났는데 어느 새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고 있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탈락 이유는 ‘일반인 같아서’였다. 뭐를 해도 일반인스러워서 색깔이 없다고 했다. 담당 PD는 ‘네 색깔을 찾으라’고 했다.
색깔이라, 사람한테 색깔이라니? 그때까지 내가 살던 세상은 사람을 색깔로 구분하던 세상이 아니었다. 굳이 찾자면, 보수냐 진보냐 그 정도밖에 없었다. 동기들은 달랐다. 한 동기는 아기 연기를 기가 막히게 하고, 다른 동기는 수다스럽게 말을 기막히게 잘해 방송에 데뷔했다. 나는 5주간 번번이 통편집을 당해 방송에 뒷모습만 나왔다. 부모님은 뒷모습으로 방송 데뷔를 한 아들을 보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
‘색깔 만들기’라는 과제
좌절에 몸부림치는 모습이 안됐는지 선배들이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선배는 “다이어트를 열심히 해서 학력에 걸맞은 몸매를 갖추어 엘리트 개그맨으로 색깔을 정해라”고 조언했다. 다른 선배는 “살을 찌워서 김준현을 능가하는 돼지가 돼라”고 했다. 왜 하필 정반대 방향의 조언들일까. 무엇을 해도 어색한 날들은 끝날 줄을 몰랐다.
술을 마시며 신세 한탄을 하는 나에게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네가 제일 웃긴 건 다른 게 아니라 31살에 개그맨이 된 그 신세 자체다.” 이 말에서 얻은 힌트로 ‘나그네킴’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나의 첫 번째 배역이었던 ‘나그네킴’은 캐릭터라기보다는 그냥 내 얘기였다. 이 직업에서 저 직업으로 꿈을 따라 떠돌아다니는 나그네킴. 다행히 방송 후 주변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야, 그만둬. 너희 부모님을 생각해!”라고 하던 박명수 선배도 ‘나그네, 나그네’라고 부르며 신경을 써 주기 시작했다. 한때 네이버 실시간 검색순위 6위까지 올라가는 신기한 경험도 했다.
그렇게 비로소 개그맨이 됐다. ‘어차피 그만둘 이방인’이라던 주변의 눈초리도 사라졌다. 심지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진로와 꿈에 대한 강연 의뢰도 들어왔다. 적은 수지만 응원하는 팬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색깔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개그맨들의 선후배 문화
직업이 개그맨이라고 하면 특유의 위계질서 문화 때문에 힘들지 않냐며 묻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이야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처음에는 솔직히 많이 힘들었다. 힘들었다기보다 ‘짜증이 났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도대체 이걸 왜?’라는 반발이 드는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다. 개그맨 선배들은 “요즘 개그맨들 군기는 옛날에 비해 군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소위 ‘각 잡힌 생활’이 당연히 군대로 끝난 줄로만 알았던 나로서는, 심지어 개그맨 되기 하루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사회생활을 했던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군기의 이유는 이랬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 좀 웃겨 봤다던, 난다 긴다 하는 개성 있는 사람들이 한 집단에 몰려 있다. 통제를 할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막연히 생각했던 개그맨 생활과는 전혀 다른 날들이었다.
나이 서른하나에 막내라니! 과장을 좀 보태면 첫사랑에 실패만 안 했으면 초등학교 학부형도 될 수 있을 나이인데, 이건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어느 직장에서였더라, 하여튼 전 직장 중 한 곳에서 ‘점장님’이란 얘기 들어 가며 누군가에게 일을 지시했던 내가, 이제는 모든 선배들 얘기 하나하나에 꼼짝 못하게 된 거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서 선배에게 확인 전화 드리기, 10평 남짓한 코미디언실에 꼼짝없이 앉아 있기, 휴대폰 금지, 반바지 금지, 새벽에 선배가 전화해도 부르면 달려나가기 등등 …. 심지어 선배들의 술자리를 거절하지 못해 매일매일 불려가 술을 마신 결과, ‘통풍’이라는 평생지기를 만나게 될 줄도 개그맨이 되기 전엔 전혀 상상조차 못했다.
하지만 이게 개그맨들의 문화라면 따르는 게 당연하다고 다짐하길 수십 차례. 매일 혼자 중얼거렸다. ‘적응하자, 적응하자.’
기적같이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나에게도 ‘후임병’이 들어왔다. 군대라면 이등병이 일등병이 된 것이다. 서서히 군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어느날 선배에게 왜 이렇게 군기를 잡는지 물었다. 답은 이랬다. “기를 죽여서 원래 있던 색깔을 없애야 개그맨으로 새롭게 색깔을 입힐 수 있다.” 아직 정답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좋은 점은 있다. 일반기업 다닐 때의 회사 동료들과는 달리 개그맨 동기는 의리가 있다. ‘전우애’였다. 해병대 생활을 해 본 적은 없지만, 해병전우회인들 이만 할까. 기수(期數) 문화는 완전 현역군인 수준이다. 선후배 경조사? 이건 본인 사망 외엔 참석이다.
평소엔 웃지 않는 개그맨들
나는 대학 시절부터 ‘분위기 메이커’로 통했다. 웃기는 놈이라는 얘기가 돌았는지 공짜로 동아리나 과 MT를 다녔다. 수업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과제는 별로인데 수업 참여도는 높다”며 교수님들이 좋은 점수를 주셨다.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내가 개그맨이 되고 달라졌다. 사석에서 진지해졌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이게 바로 개그맨들의 ‘직업병’인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꽤 많은 개그맨들이 무대를 내려오면 조용해진다. 웃기는 게 ‘업(業)’이 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사석에서 가수한테 노래 부르라고 시키면 빼는 사람이 많다. 그것과 같은 이치다.
개그맨들끼리 있으면 웬만한 것에는 웃지 않는다. 폭력적이거나 수위가 아주 센 야한 개그에만 웃는다. 감각을 느끼는 역치가 올라갔다고 할까, 발라드 같은 템포가 느린 곡도 잘 안 부른다. 2년 동안 개그맨들끼리 노래방을 간 모임에서 발라드를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댄스음악뿐이다. 음악이 시작되면 리듬에 맞춰 무아지경으로 쇼를 하기 바쁘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일반인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뭔가 어색해진다. 수위가 센 것들에 익숙져서인지 친구들의 재치있는 유머에도 입꼬리가 1밀리미터도 안 올라간다. ‘보통사람들’의 웃음이 사라진 거다. 내 생각에는 ‘고작 이걸로 웃어?’ 하는 뻔한 유머인데, 사람들이 웃는 걸 보고 문득 놀라기도 한다. 중병이다. 반대로, 개그맨들끼리 모이는 자리에서 하는 재밌는 개그를 일반인 친구들에게 선보였다가, 그들의 당황하는 표정을 보기도 했다.
이제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내가 개그맨이라는 걸 안다. 그들은 나에게 웃음을 기대한다. 작은 웃음도 아니고 ‘큰 웃음’을 기대한다. 요즘은 대중의 코드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개그맨 동료들이 아닌 일반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대중적인 개그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중요한 일과다. 방송에서나 사석에서나 언제나 밝은 기운을 내뿜는 개그맨이 되는 게 내 목표니까.
철저한 개인사업자
나는 패션회사 이랜드와 식품관련 회사인 SPC 그룹에서 정규직으로 근무했었다. 적지 않은 월급이 꼬박꼬박 나와서 좋았지만, 야근이 참 싫었다. 얼마나 싫었을까. 정시 퇴근할 사람은 월급 일부를 반납하라고 했다면 난 당연히 정시 퇴근을 택했을 터였다.
그랬던 내가 자유로운 출퇴근을 할 수 있는 개그맨이라는 프리랜서 직업을 갖게 됐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나는 이제 프리랜서니까 한가롭게 스케줄 있으면 나가서 방송하고, 없으면 집에서 자기 계발을 하면 되겠다.’ 이게 개그맨이 된 나의 첫 소망이었다. 참 야무진 꿈이었다.
개그맨은 프리랜서가 맞긴 맞다. 일찍 가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스케줄 끝났다고 일찍 퇴근하는 사람은 없다. 경쟁이기 때문이다. 개그맨은 코너 경쟁에서 실패하면 방송에 나올 수 없다. 방송에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돈을 주지 않는다. 프리랜서기에 월급이란 건 아예 없다. 회당 출연료만 있다.
야근(夜勤) 공포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싶었는데 이번엔 ‘24시간 근무’란 괴물을 만난 거다. ‘생존의 공포’. 개그맨이 된 후 2년간 밤 12시 전에 집에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회의하고 또 회의하고, 끙끙대며 아이템을 고민한 후 또 회의하고 …. 답답한 게 싫고, 자유로운 직업을 갖고자 개그맨이 됐지만 한 번도 ‘자발적’ 야근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내가 불평하고 있을 시간에 다른 개그맨들은 코너를 짜고 대사를 다듬는다. 뒤에서 궁시렁거리고 있어 봤자 앞서 나간 개그맨들에게는 들리지조차 않는다. 이런 ‘개그맨의 진리’를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랬다. 프리랜서는 정규직보다 자유로운 직업이 아니었다. 정규직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생존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숙취에 지끈거리는 머릿속에 하나의 문장이 흘러갔다. ‘나는 이제 편하게 살기는 틀렸구나.’
수시로 메모하는 개그맨들
개그맨이 된 후 하루 일과가 단순해졌다. 대부분 아이디어 회의다. 일주일 중 <코미디에 빠지다>를 녹화하는 날을 뺀 6일 내내 아이디어 회의만 한다. 개그맨이 이렇게 회의를 많이 하는 직업인 줄은 상상도 못했다. 몇 명의 개그맨 팀원들과 작가가 한방에 모여 하루종일 아이디어 회의를 한다. 회의 분위기는 제각각이다.
어떻게 하면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나올까.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잡은 방법이 시대적 트렌드를 훑어보는 거였다. <무심한 사람들>이란 코너를 만든 적이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형사 캐릭터는 당시 시대 트렌드였던 ‘먹방’에서 착안한 거였다.
인터넷에서 ‘윤후 먹방’, ‘하정우 먹방’ 등 스타들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연일 화제였다. 먹는 모습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해서 돈을 버는 일반인도 있었다. 주제를 ‘먹방’으로 잡았다.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여러 가지의 웃음 기법을 고민하다가 안 먹을 것처럼 하다가 먹는 콘셉트로 나가기로 했다. 형사가 사람을 도와줘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먹을거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맛있게 먹는 모습으로 웃음을 유도하자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콘셉트를 정하고 매번 똑같은 패턴으로는 지루해지니까 조금씩 변화를 주면서 코너를 진화시켰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할 만한 유행어를 만들고자 했다. 유행어는 공감에서 얻는 게 제일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 중에서 먹방과 관련된 단어로 생각했다. 가장 간단하게 “맛있다. 맛있어. 이 집 잘한다”로 유행어가 될 만한 대사를 정했다.
초짜 신인이 만든 코너치고는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12회 방송이 나갔다. <코미디에 빠지다>에서 맨 처음 코너로 방송되는 경험도 세 번이나 했다. 개그 프로그램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건 신인 개그맨에게는 큰 영광이다.
사람들은 개그맨이 머리가 좋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좋은 코너를 만드는 개그맨은 결국 머리보다는 엉덩이로 승부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 사람들과의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후 좋은 코너가 탄생한다. 개그맨들은 거의 항시 아이디어를 고민한다. 수시로 휴대폰이나 노트에 메모를 하는 사람이 많다.
출연 못하면 돈 못만져
의류회사에 다닐 때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한 적이 있다. 중국 명품 시장을 조사하고 분석해 발표하는 자리였다. 한 달 동안 중국 시장을 쏘다니며 자료조사를 했다. 프레젠테이션을 심사하는 임원진 앞에서 어떻게 하면 잘보일까 마음 졸이며 발표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많이 긴장하기도 했다.
개그맨은 그런 프레젠테이션을 매일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개그맨들끼리 아이템을 모아 코너를 짜고, 만든 코너를 무대에서 선보인다. 프레젠테이션의 결과는 냉혹하다. 관객들이 웃으면 방송 나가고 웃지 않으면 ‘통편집’이다. 그게 몇 번 이어지면 코너는 없어진다. 코너 폐지는 바로 생존의 문제다.
인기 스타가 된 개그맨이 방송에 나와, 예전의 무명 시절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다. 예전에는 ‘에이, 연출하는 눈물이겠지’ 생각했다. 지금은 안다. 그건 꾸며 낸 눈물이 아니다. 라면 몇 박스와 즉석밥으로 몇 달을 버텨야 하는 시절도 올 수 있는 게 개그맨이다.
가까스로 무대 데뷔는 했지만 고난의 연속이었다. 준비한 개그를 했는데 눈에 들어오는 건 관객들의 무표정한 얼굴, 이럴 때는 민망함을 넘어서 머리 속이 온통 새하얘지곤 했다. 이 상태가 이어지면 엔지(NG)가 난다.
난 무대 경험 없이 개그맨이 됐기 때문에 공개무대에 익숙하지 못했다. 거짓말 안 하고 대본을 수백 번씩 외우고 연습했지만, 어김없이 나에게도 ‘화이트아웃(White Out)’의 순간은 찾아왔다. 한 번 하얘진 시야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500명 관객 앞에서 똑같은 대사를 10번 넘게 엔지를 냈다.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결국엔 나도 모르는 러시아어 혹은 방언 같은 걸 반복해서 내뱉다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날 느낀 패배감과 절망감은 지금까지 평생 동안 느낀 절망감을 다 합쳐도 모자랄 만큼이었다. 불 꺼진 편집실 앞에서 30분을 울었다. 울음을 그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직업을 계속하면 오래 살지는 못하겠구나.’
그만큼 누군가를 웃긴다는 건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대선배님이신 이주일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코미디 인생을 회고하는 공연을 연 적이 있다. 그 공연의 제목이 ‘울고 웃긴 30년’이었다. 자신은 울면서 타인을 웃겨야 하는 사람, 그게 바로 개그맨이다.
하지만 남을 웃긴 후에 몰려오는 기쁨은 힘들었던 시간에 비례한다. 그 기쁨에 중독되어 힘든 초짜 개그맨 생활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는 것 같다. 녹화가 없으면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 성공적으로 녹화를 한 날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래서 선배들이 그러나 보다. “무대 맛을 한 번 본 놈은 무대를 떠날 수가 없다”고. 관객들 속에 웃음이 번질 때 개그맨은 한없이 빛난다.
‘6등급 연예인’
나는 6등급 연예인이다. 한우도 아니고 무슨 등급이 있을까. 아니다, 연예인에게도 등급이 있다. 실력과 인지도에 따라 등급은 언제나 실시간으로 상향 혹은 하향 조정이다. 신인상을 받게 되면 한 등급이 올라간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 연예인들도 다들 등급이 있다. 등급별로 출연료가 달라진다. 몇 년 전 분명 입사동기였는데, 몇 년 지나고 보니 연봉이 열 배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하는 게 이 세계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 현장은 냉정한 프로의 세계다. ‘온에어(On Air)’를 알리는 빨간 불이 들어오면 선후배 사이, 그런 건 없다. 최대한 빛나야 한다. 자신의 실력과 끼를 유감없이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인정받고 등급도 올라간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이 브랜드고, 그 브랜드 가치를 올리기 위해 애쓴다. 몸뚱이가 사업장이고 세치 혀가 기계설비인, 그 자체가 개인사업자다.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개그맨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거야.” 동고동락을 했던 동기나 친구가 어느 날 스타가 될 때도 평상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실력을 기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선배는 말해 줬다.
그런 일은 나에게도 다가왔다. 나보다 늦게 들어온 후배 개그맨 맹승지가 어느날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르며 세상의 화제가 됐다. 맹승지가 <무한도전>에 출연한 직후였다. 그때 비로소 선배의 조언을 떠올렸다. 선배가 고마웠다. 한순간에 유명해진 후배의 처지가 내심 부러웠지만 크게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나한테는 내가 제일 웃긴 놈이다.’ 마음속으로 백 번 외쳤다.
내 가치는 아직 시장에서 바닥이다. 경제적 여유? 그런 건 생각도 못한다. 실력이 없어서 코너를 하지 못해, 코너에 끼워 달라고 애걸하며 선배들을 쫓아다닌 적도 있다. 그러다 거절당할 때면 ‘여기는 왜 이렇게 정이 없어?’ 생각하기도 했다. 아직 직장인의 습성을 못 버린 거다.
이제는 스스로를 개인사업자로 받아들인다. 실력이 없으면 방송에 출연할 수 없고, 등급에 따라 손에 들어오는 돈이 달라지는 것도 당연하다. ‘SKY 출신’이라는 이름표도 가슴에서 떼어낸 지 오래다. 나에게 세상의 인간은 두 종류다. ‘웃기는 놈’, ‘못 웃기는 놈’.
MBC 코미디의 부활을 향해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의 송곳은 결국 주머니를 뚫고 비어져 나온다. 재능과 실력이 있다면 언젠가 두각을 나타내리라. 이 말을 <코미디에 빠지다>를 만드는 감독님은 항상 강조한다. 현재 MBC 코미디의 현실은 어둡다. 대다수 사람들이 월요일을 준비하며 잠드는 일요일밤 12시가 <코미디에 빠지다> 의 방송시간이다. 이 시간이면 일주일을 준비하며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때다. 백수조차 잠드는 시간이다.
개그맨이 되고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왜 KBS 개그맨으로 안 가셨어요?”다. 몇몇 선후배는 “이 코너를 KBS 개그콘서트에서 했으면 대박 났을 텐데”라고 한다. ‘위로’하려는 깊은 뜻을 모를 리 없건만 나에게는 ‘비수’나 다름없다. MBC는 그냥 MBC다.
이렇게 MBC 코미디 프로그램이 반향을 몰고 오지 못할 때 감독님이 자주 인용하는 어구가 바로 낭중지추다.
연예인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개그맨에게 피드백은 생명이다. 길을 가다가 나를 알아보고 “힘내세요”라고 응원해 주면 정말이지 주머니에 있는 5만원짜리를 꺼내 주고 싶다. 나중에 ‘사람 잘못 봤다’는 말이 나올 때 나오더라도.
최근까지 개그맨 이홍렬 선생님과 콤비로 활동했다. 만나자마자 물었다.
“선생님. MBC 개그맨도 낭중지추가 될 수 있나요?”
이홍렬 선생님은 주저함이 없었다. 낭중지추란 말을 많이 들어 익히 알고 계셨나 보다.
몸뚱아리 여기저기, 얼굴도 둥그런 김용재도 정말 ‘송곳’이 될 수 있을까. 앞으로 만원 버스, 만원 지하철도 많이타고 다녀야겠다. 사람들 틈에 끼이면 행여 날카로워지지 않을까. 삐져나오려면 일단 뾰족해져야 하니까. 김용재라고 언제까지나 주머니 속에만 있으란 법이 있으랴.⊙
2012년 7월. MBC 공채 19기 개그맨에 합격했다. 내 나이 31살. 네 번째 직장이 생긴 것이다. 이직이 잦긴 했지만 설마 개그맨이 되리라고는 부모님이나 친구들, 심지어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
대학시절 나는 방송사 PD 지망생이었다. 한 방송사에서 일년에 몇 명밖에 뽑지 않는 PD 시험에 수차례 떨어지기를 반복한 후, 꿈보다는 현실을 선택하기로 했다. 꿈을 접고 일반기업에 들어갔다.
네 번째 명함, 개그맨
처음 들어간 곳은 기독교계 기업이었다. 그 특유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아쉽지만 퇴사를 하고 다른 기업에 들어갔다. 이곳에서도 오래 근무하진 못했다. 첫 번째 퇴사의 경우, 회사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해서였다면, 두 번째 퇴사는 내가 회사 업무를 견뎌 내지 못해서였다.
두 번째 퇴사를 준비하며 ‘기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활발한 성격과 진취적인 태도를 업무에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이지 싶었다.
2012년, 31살의 나이로 《월간조선》에서 최고령 인턴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여러 선배 기자들의 격려와 안타까운 시선 속에서 정식 기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시험에 응시했다.
그러던 중 ‘조선비즈’ 최종 면접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나의 짧은 광화문 생활은 끝이 나는구나. 《월간조선》 인턴기자도 그만둔 참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개그맨 시험에 붙었다. 실의에 빠진 백수가 얼마 안돼 개그맨이 되었다며 나타나자 《월간조선》 식구들은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최병묵 편집장뿐 아니라, 심지어 김창기 조선뉴스프레스 대표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조선뉴스프레스 역사상 인턴기자가 개그맨이 돼서 나타난 것은 처음”이라며 “기자는 세상에 영향력을 어필하고픈 욕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요즘은 개그맨이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세상이니 열심히 하라”는 조언을 해 줬다. 귀에 확 들어오는 말이었다.
꿈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처럼 우연처럼 운명처럼 개그맨이 되어 버렸다. 개그맨의 길을 진지하게 걸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 31살의 나이테는 더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는 표지판과도 같았다. PD 지망생 시절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MBC를 직종은 좀 다르지만 들어갔다는 게 어쨌든 기쁘기도 했다. 기쁜 마음으로 첫 출근을 했다.
“고대생을 뽑았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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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그네킴’이라는 캐릭터로 무대 데뷔를 했다. |
타고난 연기자이길 소망했지만 내 연기는 공기마저 어색하게 만드는 수준이었고, 코너를 기획해 본 경험도 전혀 없었다. 개그맨들끼리 쓰는 기초적인 개그용어조차 몰라서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어리버리하고 거기에 나이까지 많은 국외자였다. 선배들이나 동기들은 내게 말도 잘 안 걸었다. 나중에 들어 보니 다들 내가 금방 그만둘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입사하고 얼마 후 MBC는 <코미디에 빠지다>라는 개그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여기에 박명수 선배가 진행하는 ‘거성사관학교’라는 코너가 있었다. 신인 개그맨들이 개그를 겨루며 배운다는 내용의 코너였다. 동기들은 저마다 장기를 가지고 ‘코너 검사’를 받았다. 준비한 아이템이 웃긴지 안 웃긴지 검증받는 절차다. 코너 검사를 통과해 방송에 출연하고 싶어 열심히 준비했다. 하지만 번번이 ‘탈락’이었다. 탈락 정도가 아니라 매번 검사실 들어가는 게 무서울 정도로 호되게 혼이 났다. “고대 출신을 뽑았어야 했는데 연대 출신을 뽑아서 이 모양이다”는 비난은 애교 수준이었다. 검사를 받고 났는데 어느 새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고 있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탈락 이유는 ‘일반인 같아서’였다. 뭐를 해도 일반인스러워서 색깔이 없다고 했다. 담당 PD는 ‘네 색깔을 찾으라’고 했다.
색깔이라, 사람한테 색깔이라니? 그때까지 내가 살던 세상은 사람을 색깔로 구분하던 세상이 아니었다. 굳이 찾자면, 보수냐 진보냐 그 정도밖에 없었다. 동기들은 달랐다. 한 동기는 아기 연기를 기가 막히게 하고, 다른 동기는 수다스럽게 말을 기막히게 잘해 방송에 데뷔했다. 나는 5주간 번번이 통편집을 당해 방송에 뒷모습만 나왔다. 부모님은 뒷모습으로 방송 데뷔를 한 아들을 보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
‘색깔 만들기’라는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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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성사관학교>라는 코너를 통해 무대 데뷔를 할 수 있었다. |
술을 마시며 신세 한탄을 하는 나에게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네가 제일 웃긴 건 다른 게 아니라 31살에 개그맨이 된 그 신세 자체다.” 이 말에서 얻은 힌트로 ‘나그네킴’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나의 첫 번째 배역이었던 ‘나그네킴’은 캐릭터라기보다는 그냥 내 얘기였다. 이 직업에서 저 직업으로 꿈을 따라 떠돌아다니는 나그네킴. 다행히 방송 후 주변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야, 그만둬. 너희 부모님을 생각해!”라고 하던 박명수 선배도 ‘나그네, 나그네’라고 부르며 신경을 써 주기 시작했다. 한때 네이버 실시간 검색순위 6위까지 올라가는 신기한 경험도 했다.
그렇게 비로소 개그맨이 됐다. ‘어차피 그만둘 이방인’이라던 주변의 눈초리도 사라졌다. 심지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진로와 꿈에 대한 강연 의뢰도 들어왔다. 적은 수지만 응원하는 팬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색깔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개그맨들의 선후배 문화
직업이 개그맨이라고 하면 특유의 위계질서 문화 때문에 힘들지 않냐며 묻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이야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처음에는 솔직히 많이 힘들었다. 힘들었다기보다 ‘짜증이 났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도대체 이걸 왜?’라는 반발이 드는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다. 개그맨 선배들은 “요즘 개그맨들 군기는 옛날에 비해 군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소위 ‘각 잡힌 생활’이 당연히 군대로 끝난 줄로만 알았던 나로서는, 심지어 개그맨 되기 하루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사회생활을 했던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군기의 이유는 이랬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 좀 웃겨 봤다던, 난다 긴다 하는 개성 있는 사람들이 한 집단에 몰려 있다. 통제를 할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막연히 생각했던 개그맨 생활과는 전혀 다른 날들이었다.
나이 서른하나에 막내라니! 과장을 좀 보태면 첫사랑에 실패만 안 했으면 초등학교 학부형도 될 수 있을 나이인데, 이건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어느 직장에서였더라, 하여튼 전 직장 중 한 곳에서 ‘점장님’이란 얘기 들어 가며 누군가에게 일을 지시했던 내가, 이제는 모든 선배들 얘기 하나하나에 꼼짝 못하게 된 거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서 선배에게 확인 전화 드리기, 10평 남짓한 코미디언실에 꼼짝없이 앉아 있기, 휴대폰 금지, 반바지 금지, 새벽에 선배가 전화해도 부르면 달려나가기 등등 …. 심지어 선배들의 술자리를 거절하지 못해 매일매일 불려가 술을 마신 결과, ‘통풍’이라는 평생지기를 만나게 될 줄도 개그맨이 되기 전엔 전혀 상상조차 못했다.
하지만 이게 개그맨들의 문화라면 따르는 게 당연하다고 다짐하길 수십 차례. 매일 혼자 중얼거렸다. ‘적응하자, 적응하자.’
기적같이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나에게도 ‘후임병’이 들어왔다. 군대라면 이등병이 일등병이 된 것이다. 서서히 군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어느날 선배에게 왜 이렇게 군기를 잡는지 물었다. 답은 이랬다. “기를 죽여서 원래 있던 색깔을 없애야 개그맨으로 새롭게 색깔을 입힐 수 있다.” 아직 정답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좋은 점은 있다. 일반기업 다닐 때의 회사 동료들과는 달리 개그맨 동기는 의리가 있다. ‘전우애’였다. 해병대 생활을 해 본 적은 없지만, 해병전우회인들 이만 할까. 기수(期數) 문화는 완전 현역군인 수준이다. 선후배 경조사? 이건 본인 사망 외엔 참석이다.
평소엔 웃지 않는 개그맨들
나는 대학 시절부터 ‘분위기 메이커’로 통했다. 웃기는 놈이라는 얘기가 돌았는지 공짜로 동아리나 과 MT를 다녔다. 수업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과제는 별로인데 수업 참여도는 높다”며 교수님들이 좋은 점수를 주셨다.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내가 개그맨이 되고 달라졌다. 사석에서 진지해졌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이게 바로 개그맨들의 ‘직업병’인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꽤 많은 개그맨들이 무대를 내려오면 조용해진다. 웃기는 게 ‘업(業)’이 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사석에서 가수한테 노래 부르라고 시키면 빼는 사람이 많다. 그것과 같은 이치다.
개그맨들끼리 있으면 웬만한 것에는 웃지 않는다. 폭력적이거나 수위가 아주 센 야한 개그에만 웃는다. 감각을 느끼는 역치가 올라갔다고 할까, 발라드 같은 템포가 느린 곡도 잘 안 부른다. 2년 동안 개그맨들끼리 노래방을 간 모임에서 발라드를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댄스음악뿐이다. 음악이 시작되면 리듬에 맞춰 무아지경으로 쇼를 하기 바쁘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일반인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뭔가 어색해진다. 수위가 센 것들에 익숙져서인지 친구들의 재치있는 유머에도 입꼬리가 1밀리미터도 안 올라간다. ‘보통사람들’의 웃음이 사라진 거다. 내 생각에는 ‘고작 이걸로 웃어?’ 하는 뻔한 유머인데, 사람들이 웃는 걸 보고 문득 놀라기도 한다. 중병이다. 반대로, 개그맨들끼리 모이는 자리에서 하는 재밌는 개그를 일반인 친구들에게 선보였다가, 그들의 당황하는 표정을 보기도 했다.
이제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내가 개그맨이라는 걸 안다. 그들은 나에게 웃음을 기대한다. 작은 웃음도 아니고 ‘큰 웃음’을 기대한다. 요즘은 대중의 코드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개그맨 동료들이 아닌 일반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대중적인 개그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중요한 일과다. 방송에서나 사석에서나 언제나 밝은 기운을 내뿜는 개그맨이 되는 게 내 목표니까.
철저한 개인사업자
나는 패션회사 이랜드와 식품관련 회사인 SPC 그룹에서 정규직으로 근무했었다. 적지 않은 월급이 꼬박꼬박 나와서 좋았지만, 야근이 참 싫었다. 얼마나 싫었을까. 정시 퇴근할 사람은 월급 일부를 반납하라고 했다면 난 당연히 정시 퇴근을 택했을 터였다.
그랬던 내가 자유로운 출퇴근을 할 수 있는 개그맨이라는 프리랜서 직업을 갖게 됐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나는 이제 프리랜서니까 한가롭게 스케줄 있으면 나가서 방송하고, 없으면 집에서 자기 계발을 하면 되겠다.’ 이게 개그맨이 된 나의 첫 소망이었다. 참 야무진 꿈이었다.
개그맨은 프리랜서가 맞긴 맞다. 일찍 가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스케줄 끝났다고 일찍 퇴근하는 사람은 없다. 경쟁이기 때문이다. 개그맨은 코너 경쟁에서 실패하면 방송에 나올 수 없다. 방송에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돈을 주지 않는다. 프리랜서기에 월급이란 건 아예 없다. 회당 출연료만 있다.
야근(夜勤) 공포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싶었는데 이번엔 ‘24시간 근무’란 괴물을 만난 거다. ‘생존의 공포’. 개그맨이 된 후 2년간 밤 12시 전에 집에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회의하고 또 회의하고, 끙끙대며 아이템을 고민한 후 또 회의하고 …. 답답한 게 싫고, 자유로운 직업을 갖고자 개그맨이 됐지만 한 번도 ‘자발적’ 야근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내가 불평하고 있을 시간에 다른 개그맨들은 코너를 짜고 대사를 다듬는다. 뒤에서 궁시렁거리고 있어 봤자 앞서 나간 개그맨들에게는 들리지조차 않는다. 이런 ‘개그맨의 진리’를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랬다. 프리랜서는 정규직보다 자유로운 직업이 아니었다. 정규직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생존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숙취에 지끈거리는 머릿속에 하나의 문장이 흘러갔다. ‘나는 이제 편하게 살기는 틀렸구나.’
수시로 메모하는 개그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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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방에 주목해 만든 캐릭터. 먹을거리에 집착하는 형사를 표현했다. |
어떻게 하면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나올까.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잡은 방법이 시대적 트렌드를 훑어보는 거였다. <무심한 사람들>이란 코너를 만든 적이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형사 캐릭터는 당시 시대 트렌드였던 ‘먹방’에서 착안한 거였다.
인터넷에서 ‘윤후 먹방’, ‘하정우 먹방’ 등 스타들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연일 화제였다. 먹는 모습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해서 돈을 버는 일반인도 있었다. 주제를 ‘먹방’으로 잡았다.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여러 가지의 웃음 기법을 고민하다가 안 먹을 것처럼 하다가 먹는 콘셉트로 나가기로 했다. 형사가 사람을 도와줘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먹을거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맛있게 먹는 모습으로 웃음을 유도하자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콘셉트를 정하고 매번 똑같은 패턴으로는 지루해지니까 조금씩 변화를 주면서 코너를 진화시켰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할 만한 유행어를 만들고자 했다. 유행어는 공감에서 얻는 게 제일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 중에서 먹방과 관련된 단어로 생각했다. 가장 간단하게 “맛있다. 맛있어. 이 집 잘한다”로 유행어가 될 만한 대사를 정했다.
초짜 신인이 만든 코너치고는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12회 방송이 나갔다. <코미디에 빠지다>에서 맨 처음 코너로 방송되는 경험도 세 번이나 했다. 개그 프로그램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건 신인 개그맨에게는 큰 영광이다.
사람들은 개그맨이 머리가 좋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좋은 코너를 만드는 개그맨은 결국 머리보다는 엉덩이로 승부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 사람들과의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후 좋은 코너가 탄생한다. 개그맨들은 거의 항시 아이디어를 고민한다. 수시로 휴대폰이나 노트에 메모를 하는 사람이 많다.
출연 못하면 돈 못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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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간 관객들을 웃겼던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 |
개그맨은 그런 프레젠테이션을 매일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개그맨들끼리 아이템을 모아 코너를 짜고, 만든 코너를 무대에서 선보인다. 프레젠테이션의 결과는 냉혹하다. 관객들이 웃으면 방송 나가고 웃지 않으면 ‘통편집’이다. 그게 몇 번 이어지면 코너는 없어진다. 코너 폐지는 바로 생존의 문제다.
인기 스타가 된 개그맨이 방송에 나와, 예전의 무명 시절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다. 예전에는 ‘에이, 연출하는 눈물이겠지’ 생각했다. 지금은 안다. 그건 꾸며 낸 눈물이 아니다. 라면 몇 박스와 즉석밥으로 몇 달을 버텨야 하는 시절도 올 수 있는 게 개그맨이다.
가까스로 무대 데뷔는 했지만 고난의 연속이었다. 준비한 개그를 했는데 눈에 들어오는 건 관객들의 무표정한 얼굴, 이럴 때는 민망함을 넘어서 머리 속이 온통 새하얘지곤 했다. 이 상태가 이어지면 엔지(NG)가 난다.
난 무대 경험 없이 개그맨이 됐기 때문에 공개무대에 익숙하지 못했다. 거짓말 안 하고 대본을 수백 번씩 외우고 연습했지만, 어김없이 나에게도 ‘화이트아웃(White Out)’의 순간은 찾아왔다. 한 번 하얘진 시야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500명 관객 앞에서 똑같은 대사를 10번 넘게 엔지를 냈다.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결국엔 나도 모르는 러시아어 혹은 방언 같은 걸 반복해서 내뱉다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날 느낀 패배감과 절망감은 지금까지 평생 동안 느낀 절망감을 다 합쳐도 모자랄 만큼이었다. 불 꺼진 편집실 앞에서 30분을 울었다. 울음을 그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직업을 계속하면 오래 살지는 못하겠구나.’
그만큼 누군가를 웃긴다는 건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대선배님이신 이주일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코미디 인생을 회고하는 공연을 연 적이 있다. 그 공연의 제목이 ‘울고 웃긴 30년’이었다. 자신은 울면서 타인을 웃겨야 하는 사람, 그게 바로 개그맨이다.
하지만 남을 웃긴 후에 몰려오는 기쁨은 힘들었던 시간에 비례한다. 그 기쁨에 중독되어 힘든 초짜 개그맨 생활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는 것 같다. 녹화가 없으면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 성공적으로 녹화를 한 날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래서 선배들이 그러나 보다. “무대 맛을 한 번 본 놈은 무대를 떠날 수가 없다”고. 관객들 속에 웃음이 번질 때 개그맨은 한없이 빛난다.
‘6등급 연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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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코미디의 전성기를 열어줬던 <웃으면 복이 와요>. |
그렇기 때문에 방송 현장은 냉정한 프로의 세계다. ‘온에어(On Air)’를 알리는 빨간 불이 들어오면 선후배 사이, 그런 건 없다. 최대한 빛나야 한다. 자신의 실력과 끼를 유감없이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인정받고 등급도 올라간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이 브랜드고, 그 브랜드 가치를 올리기 위해 애쓴다. 몸뚱이가 사업장이고 세치 혀가 기계설비인, 그 자체가 개인사업자다.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개그맨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거야.” 동고동락을 했던 동기나 친구가 어느 날 스타가 될 때도 평상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실력을 기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선배는 말해 줬다.
그런 일은 나에게도 다가왔다. 나보다 늦게 들어온 후배 개그맨 맹승지가 어느날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르며 세상의 화제가 됐다. 맹승지가 <무한도전>에 출연한 직후였다. 그때 비로소 선배의 조언을 떠올렸다. 선배가 고마웠다. 한순간에 유명해진 후배의 처지가 내심 부러웠지만 크게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나한테는 내가 제일 웃긴 놈이다.’ 마음속으로 백 번 외쳤다.
내 가치는 아직 시장에서 바닥이다. 경제적 여유? 그런 건 생각도 못한다. 실력이 없어서 코너를 하지 못해, 코너에 끼워 달라고 애걸하며 선배들을 쫓아다닌 적도 있다. 그러다 거절당할 때면 ‘여기는 왜 이렇게 정이 없어?’ 생각하기도 했다. 아직 직장인의 습성을 못 버린 거다.
이제는 스스로를 개인사업자로 받아들인다. 실력이 없으면 방송에 출연할 수 없고, 등급에 따라 손에 들어오는 돈이 달라지는 것도 당연하다. ‘SKY 출신’이라는 이름표도 가슴에서 떼어낸 지 오래다. 나에게 세상의 인간은 두 종류다. ‘웃기는 놈’, ‘못 웃기는 놈’.
MBC 코미디의 부활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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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렬 선생님과도 콤비로 활동했다. |
개그맨이 되고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왜 KBS 개그맨으로 안 가셨어요?”다. 몇몇 선후배는 “이 코너를 KBS 개그콘서트에서 했으면 대박 났을 텐데”라고 한다. ‘위로’하려는 깊은 뜻을 모를 리 없건만 나에게는 ‘비수’나 다름없다. MBC는 그냥 MBC다.
이렇게 MBC 코미디 프로그램이 반향을 몰고 오지 못할 때 감독님이 자주 인용하는 어구가 바로 낭중지추다.
연예인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개그맨에게 피드백은 생명이다. 길을 가다가 나를 알아보고 “힘내세요”라고 응원해 주면 정말이지 주머니에 있는 5만원짜리를 꺼내 주고 싶다. 나중에 ‘사람 잘못 봤다’는 말이 나올 때 나오더라도.
최근까지 개그맨 이홍렬 선생님과 콤비로 활동했다. 만나자마자 물었다.
“선생님. MBC 개그맨도 낭중지추가 될 수 있나요?”
이홍렬 선생님은 주저함이 없었다. 낭중지추란 말을 많이 들어 익히 알고 계셨나 보다.
몸뚱아리 여기저기, 얼굴도 둥그런 김용재도 정말 ‘송곳’이 될 수 있을까. 앞으로 만원 버스, 만원 지하철도 많이타고 다녀야겠다. 사람들 틈에 끼이면 행여 날카로워지지 않을까. 삐져나오려면 일단 뾰족해져야 하니까. 김용재라고 언제까지나 주머니 속에만 있으란 법이 있으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