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현의 ‘아트토크’ - 미술, 테크놀로지를 만나다! : 월간조선

미술관의 첫 전시실에 들어서니 LED 조명을 부착한 레버가 사방에서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다. 그 때문에 LED 빛이 방 안 곳곳에 퍼진다. 마치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방 안에 ‘빛’의 방울이 떨어지는 설치작품이다.

작품 제목도 설치한 모양 그대로 <떨어지는 빛(Falling Light)>이다. 이 작품은 서울 경복궁 옆에 있는 대림미술관에서 지난 4월 시작해 10월까지 장기간 하고 있는 ‘트로이카: 소리, 빛, 시간, 감성을 깨우는 놀라운 상상’이라는 전시에 설치되어 있다.

이런 작품을 만든 작가는 런던에서 ‘트로이카(Troika)’라는 이름의 그룹으로 활동 중인 세 명의 아티스트 코니 프리어(Conny Freyer), 세바스찬 노엘(Sebastien Noel), 에바 루키(Eva Rucki)다. 이들은 각각 디자인, 엔지니어링, 사진을 전공했다. 함께 머리를 맞대 아이디어를 내고 어떤 기술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지 의논해 공동작업을 한다. 그래서 아티스트 개인의 이름을 쓰지 않고 ‘트로이카’라는 그룹 이름을 사용한다.

이들은 영국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에서 공부할 때 만났고, 현재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아티스트들이다.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 시카고 미술관 등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미술관에서 이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소장했다. 2010년 상하이(上海) 월드엑스포 때엔 영국 출신이 아닌데도 영국관(館)을 대표하는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술과 과학기술은 상반?

기술을 이용한 트로이카의 작품 〈The Weather Yesterday〉. 대림미술관 제공.

이런 유명 아티스트인 ‘트로이카’의 작품 핵심에는 ‘기술(Technology)’이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의 작품 중 <어제의 날씨(The Weather Yesterday)>라는 작품은 말 그대로 어제의 날씨를 가르쳐 주는 ‘기기(器機)’ 같은 작품이다.

우선 미술관이 있는 지역의 기상청에서 실제로 일기예보 정보를 받는다. 이번 대림미술관 전시의 경우 서울 지역의 기상청에서 정확한 일기예보 정보를 받은 뒤 그 데이터를 미국에 있는 서버로 전송한다. 그리고 그 정보를 24시간 뒤 인터넷을 통해 이 기기(작품)로 들어오게 한다. 그래서 이 기기에는 24시간 늦은 날씨 예보가 나타나게 된다. 예보는 30분마다 업데이트되니, 진짜 날씨를 알려주는 기기 같다.

재미있는 발상이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쯤 되면 ‘그런데 이게 미술작품인가?’ 하는 의문이 들 법하다. 미술은 시각예술이고, 그래서 시각적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예술이라는 게 상식이다. 그러니, 이런 작품은 그냥 기술을 이용해서 만든 기계일 뿐, 예술작품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트로이카’는 현재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미술작가들이고, <어제의 날씨>는 이들의 대표적인 미술작품이다. 원래 이 작품은 런던의 한 광장에 설치되어 있던 것이다. 이 작품의 외형이 독특하고 눈에 띄며, 작품이 24시간 멋진 빛을 내고 있으니, 영국의 광장에 설치되어 있을 때 시민들에게 많이 사랑을 받았고 약속장소로도 많이 쓰였다고 한다. 오랜 시간 작품을 바라보게 하고 미소 짓게 만드는, 그런 유쾌한 작품이다.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해주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역할

하지만 외형이 독특하고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이 <어제의 날씨>가 ‘기계’에서 ‘예술’로 업그레이드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작품에 작가가 어떤 주제, 즉 콘셉트를 담았느냐 하는 것이다.

‘미술=시각(視覺)예술’이라는 단순 공식만 있던 과거에는 미술은 단지 눈을 자극하는 예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볼 것’은 세상에 널렸다. 영화, 음악, 문학 등 미술이 아닌 다른 문화예술도 감상자의 감각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또 굳이 미술을 전공한 아티스트가 아닌 아마추어들도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힘으로 예쁜 그림, 예쁜 사진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시대에 미술작가의 진짜 역할은 ‘볼 것’만을 제공해 주는 게 아니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주는 것이다.

사실 수백 년 전 과거 미술의 작가들의 역할도 그랬다. 전통적인 그림을 통해 관객들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다. 그게 미술작가의 원래 역할이었다. 시각적인 자극이 넘쳐나는 지금 시대에 그 역할은 조금 바뀌었을 뿐이다. 미술작품에 어떤 새로운 주제를 담아서, 뻔히 알고 있는 사물을 갖다놓더라도 그 사물을 통해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 생기거나 새로운 재미가 생긴다면 그게 곧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보람과 이유가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어제의 날씨>를 예로 들면, 이 작품을 통해 작가들은 “첨단기술이 꼭 미래만 바라봐야 하는가? 과거를 알려주는 첨단기술은 없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또 우리 현대인들이 실시간 정보를 알기 위해 얼마나 전자기기에 의존하는지도 꼬집고 싶었다고 작가들은 말한다. 날씨가 궁금하면 창문을 열어 하늘을 보면 되는데, 굳이 스마트폰의 날씨앱을 클릭해서 확인하는 우리의 습성을 이런 방법으로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런 주제의식을 기술을 이용해 미술작품이라는 외형으로 만들어냈으니, 이게 바로 각광받는 오늘날 현대미술 작품이 된 것이다.

미술감상=감각 깨우기

각종 기계를 늘어놓고 기계가 내는 소리를 확대해 들려주는 트로이카의 설치작품 〈Electroprobe〉. 대림미술관 제공.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준다는 것은 곧 무뎌진 우리 감각을 깨워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미술작가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준다. ‘트로이카’의 또 다른 작품 <일렉트로프로브(Electroprobe)>는 전시장 바닥에 컴퓨터, 전화 같은 일상 기기들이 둥글게 늘어서 있는 설치작품이다. 그 한가운데에 설치된 마이크가 빙글빙글 돌며 이 기기들에서 나오는 미세한 소리를 잡아낸다. 이 마이크는 우리가 미처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기계에서 나오는 전자기장 소리를 확대해 들려주는 특수 제작 마이크다.

이 작품 앞에 서 있으면, 전화기, 라디오, 컴퓨터도 각각 뭔가 자기의 말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우~웅’ ‘지이직’ 하는 소리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세상에, 사실 무심히 우리의 손발을 거쳐가는 이 기계들은 그들이 내는 특유의 소리를 통해 나름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술관에 작품으로 설치된 이 기계들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던 현실을 깨닫고 ‘아~’ 하고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네모난 캔버스에 그린 그림이나 나무와 돌을 깎아 만든 조각만 미술작품이 아니라, 이런 기술을 껴안은 작품으로 관객에게 ‘체험’의 기호를 주는 것이 미술작품인 시대다.

이 시대의 기술 이용한 작품

자비에 베이앙의 조각 〈Annina〉(브론즈, 폴리우레탄, 2014)와 <모바일>(알루미늄 등 혼합재료, 2013)이 함께 전시되어 있는 모습. 313아트프로젝트 제공.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적인 미술작품을 만들 때에도 현대미술은 현대의 기술을 이용한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 올해 6월까지 서울 313아트프로젝트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는 프랑스의 대표적 현대미술가 자비에 베이앙(Xavier Veilhan·51)은 조각작품 제작방식이 독특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인물 조각을 할 때 모델을 우선 3D 스캐닝이라는 기법으로 전신(全身) 스캔하고, 그 이미지를 기반으로 조각을 완성하는 그의 기법에 많은 사람이 호기심을 가진다. 그리고 이 작가는 알루미늄, 나무, 폴리우레탄, 브론즈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데, 그러다 보니 재료에 따라 조각을 만드는 기술도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알루미늄 소재를 깎아 조각을 할 때엔 수압절단기를 이용해 기초 작업을 하고 그 뒤에 손으로 다듬는다.

기계로 깎는 작업이 밑바탕인 자비에 베이앙의 조각 〈Cassandre〉(알루미늄, 2014, 176X50X30cm). 313아트프로젝트 제공.

이런 방법을 통해 표면이 아주 모던하면서 독특하게 마감되는 조각이 나오기 때문에 그는 작품 제작방식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지난 4월 서울에서 열렸던 기자회견에서도 물론 작품 제작방식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전통적인 조각의 형태를 취하지만 컴퓨터와 기계 등 첨단장비와 현대적인 프로세스를 이용해 형상을 쪼개고 재결합하는 테크닉에 대해 묻자 그는 “나는 내 시대의 예술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앤디 워홀은 그 시대의 기술(실크스크린)을 이용해 그 시대의 작품을 만들었다. 내 작품들은 (테크닉의 현대성 때문에) 19세기나 20세기에는 나올 수 없었던 작품이다. 이렇게 나는 나의 조각이 이 시대의 조각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다. 나는 작가가 그 자신의 시대에 가장 맞아야 결국 영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시대를 탈출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반대다.”

“그 시대에만 나올 수 있는 미술”

현대미술작품과 기술, 즉 테크놀로지는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리고 현대미술작가들은 이를 인지하고 작업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백남준의 대표작 <다다익선>은 작품을 이루는 TV 브라운관 모니터 1003개를 이미 교체한 바 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모니터가 수명을 다할 때마다 교체를 해야 하는지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백남준은 자신의 작품에 사용한 기기들이 언젠가는 수명을 다해 교체해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작품의 부품을 교체하는 것이 작품의 훼손이 아니라 그 시대에 맞는 진화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앞서나가는 뉴미디어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미술은 과거에 캔버스에만 의존하던 시대와 완전히 달라진 ‘이 시대의 미술’이다. 미술이 어때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첨단기술이 진화함에 따라 미술의 제작방식도 그 기술과 함께한다. 기술이 곧 예술의 일부가 되는 그런 시대의 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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