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사랑꾼〉으로 연애 과정 공개, 국립묘지에서 프러포즈해 4월 결혼
⊙ “방송인은 과자와 같아요. 진열대에서 안 보이면 잊어버려요”
⊙ “사람들이 저를 애잔하게 본 적이 많았어요. 저는 동의하지 않았어요”
⊙ “北 테러로 돌아가신 아버지, 10년 투병 후 돌아가신 어머니… 다시 태어나도 두 분 아들로”
⊙ 보증 빚 15억6000만원 갚고 나니, 모친 병환으로 10년 간병, 기저귀 갈다 뛰쳐나간 순간도…
⊙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지지… “노무현 당선되자 연예대상 코미디 최우수상 결과 바뀌어”
沈賢燮
1970년생. 서울예전 시각디자인과 졸업 / MBC 〈개그박스〉로 데뷔(1994), SBS 공채개그맨 5기(1996), 〈개그콘서트〉 〈웃찾사〉 〈조선의 사랑꾼〉 등 출연 / 前 국민대통합위원회 홍보대사
⊙ “방송인은 과자와 같아요. 진열대에서 안 보이면 잊어버려요”
⊙ “사람들이 저를 애잔하게 본 적이 많았어요. 저는 동의하지 않았어요”
⊙ “北 테러로 돌아가신 아버지, 10년 투병 후 돌아가신 어머니… 다시 태어나도 두 분 아들로”
⊙ 보증 빚 15억6000만원 갚고 나니, 모친 병환으로 10년 간병, 기저귀 갈다 뛰쳐나간 순간도…
⊙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지지… “노무현 당선되자 연예대상 코미디 최우수상 결과 바뀌어”
沈賢燮
1970년생. 서울예전 시각디자인과 졸업 / MBC 〈개그박스〉로 데뷔(1994), SBS 공채개그맨 5기(1996), 〈개그콘서트〉 〈웃찾사〉 〈조선의 사랑꾼〉 등 출연 / 前 국민대통합위원회 홍보대사
- 사진=조준우
‘비는 내리고 어머니는 시집간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집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글귀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뜻한다. 원문은 ‘天要下雨 娘要嫁人(천요하우 낭요가인)’. 홀어머니의 재가를 아들은 반대했다. 어머니는 입고 있던 비단치마를 두고 말했다. ‘이 치마를 오늘 빨아 내일까지 마르면 떠나지 않겠다.’ 청명했던 하늘이 문득 흐려져 비가 내렸다. 결국 어머니는 떠났다.
아버지의 마지막 용돈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인 1983년 10월 8일 아침, 서울에도 비가 내렸다. 열세 살 소년은 길을 나설 아버지의 구두를 닦았다. 왠지 그날따라 그러고 싶었다. ‘비가 오는데 구두는 왜 닦니’ 아버지가 말했다. 그러더니 1000원을 꺼내 소년의 손에 쥐여주곤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곤 빗속을 뚫고 김포공항으로 떠났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버지 심상우(沈相宇) 11대 국회의원은 그다음 날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묘역에서 숨졌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을 노린 북한의 폭탄 테러에 희생된 것이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 45세, 민망할 정도로 젊은 나이였다. 13세였던 소년은 이제 그때의 아버지보다 열 살 많은 어른이 됐다. 개그맨 심현섭 얘기다.
대한민국에서 1990년대를 살아간 이들 중 심현섭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개그콘서트〉의 전성기를 이끌며 ‘밤바야~’ ‘가슴이~ 가슴이~’ 같은 유행어를 낳았다. 여기저기 TV만 틀면 등장하곤 했다. 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 한동안 잘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부턴 〈조선의 사랑꾼〉(TV조선)에 출연 중이다. 여성을 소개받고 연애하는 과정이 중계됐다. 연애에 서툴고 소탈한 모습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국립묘지 내 부모님 묘역 앞에서 프러포즈를 하는 모습은 큰 화제가 됐다. 그의 가족사도 다시 주목받았다. 지난 3월 7일 그를 만났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부터 밥상머리 교육”
“그날 아버지가 주신 용돈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어요. 40대 때까지도 갖고 있었는데 이사하면서 없어졌어요. 사실 미얀마로 떠나시기 한 달 전부터 아버지가 좀 이상했어요. 안 하던 행동을 하셨어요.”
— 무슨 행동이요?
“그때 아버지는 정치하느라 무척 바쁘셨거든요. 그런데 오후 4시30분이면 귀가하셨어요. 그러곤 가족들과 저녁을 같이 먹었어요. 3남 2녀를 앉혀놓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말씀을 해주셨어요. ‘아버지가 신문사를 운영했잖니. 너희는 신문 배달, 우유 배달 해보면서 세상을 느껴봐라. 운전하시는 분들께 아저씨라고 하지 마라. 선생님이라고 불러라.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은 어머님, 이모님이라고 불러라. 돈이 많이 생기면 다른 사람 도와줘라….’”
—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한 말씀이네요.
“유언이 되어버렸죠. 돌아보면 그때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싶어요. 묘한 밥상머리 교육이 계속되더니 아버지가 출국하는 날이 됐어요. 그날 아침 아버지 표정이 무척 안 좋았어요. ‘아버지 표정이 왜 저리 안 좋지’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그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슬퍼요. 소[牛]가 도살장 끌려가며 느낀다잖아요. 얼마나 가기 싫으셨을까, 두려움 때문이었을까요. 슬퍼 보였던 뒷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재벌집 막내아들
그의 친가는 호남에서 손꼽히는 부호(富豪)였다. 심상우 전 의원은 호남전기(후에 로케트전기로 개칭) 사장이었다. 전남매일신문사(후에 광주일보사가 됨)를 경영하는 언론 사주(社主)이기도 했다. 1981년엔 정계에 진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전라남도 광주시 동구-북구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1983년 3월엔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이 됐다.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하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도 지역감정이 심했다. 호남 출신의 의원을 요직에 임명한 걸 보면, 전두환 대통령이 심 전 의원을 얼마나 좋게 평가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아버지 덕에 심현섭의 어린 시절은 풍요로웠다. 3남 2녀 중 막내아들이었으니 ‘재벌집 막내아들’이었던 셈이다.
“집이 무척 컸어요. 운전기사, 식모 누나가 있었죠. 아버지는 술에 취해 귀가하시면 클리프 리처드의 ‘영 원(The Young Ones)’을 엘피(LP) 판으로 틀어놓고 어머니와 춤을 추셨어요. 쉬는 날이면 차 트렁크에 이젤을 싣고 온 식구가 산에 갔어요. 아버지는 이젤을 세워놓고 풍경화를 그리셨고, 어머니는 옆에 앉아 소녀처럼 아버지를 보고 있었지요.”
심 전 의원은 퍽 유쾌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유머감각이 무척 좋았다고 한다. 기자 출신의 정치인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정치에서 경험한 제일가는 재담꾼은 심상우 의원이었다. 당시 정계의 만장일치일 게다. 함께 있으면 몇 시간이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웃긴다. 돌발적인 일에도 즉각 유머다. 내장산에서 세미나를 할 때, 심 의원 선거구인 광주의 무등산 수박을 차로 실어 왔다. 쪼개 보니 거의가 설익은 것이다. 그랬더니 심 의원이 마이크를 잡고 “사무국장에게 수박을 보내라고 말했더니 잘못 듣고 호박을 보냈지 뭐예요.”… 심상우 의원이 불행을 당한 후 그의 재담 메모 노트가 복사되어 나왔다는 설도 나돌았다.〉
악몽 같은 1983년
— 심 의원님은 친구도 많았겠네요.
“탤런트 이낙훈 아저씨와 가장 친하셨어요. 아버지보다 세 살 많으셨는데, 같이 11대 국회의원을 지내셨어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무슨 협회 회장을 많이 맡고 있었어요. 그런 곳에 기부를 많이 했어요.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한 적도 있어요. ‘자식이 다섯이나 있고 우리도 살아야 하는데 오지랖도 참….’ 지금도 아버지가 광주분들에게 덕망이 있어요. ‘심상우 의원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이런 말씀들을 하세요.”
심현섭은 어른이 된 후에도 아버지를 추억하는 이들과 종종 마주쳤다.
“십육칠 년 전에 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어떤 어르신이 다가와요. ‘심현섭씨, 미안해요. 내가 그때 아버님과 코드원(대통령 전용기)을 같이 탔어요. 저는 청와대 출입기자였어요. 우리 심 실장님이 언론인이셨기 때문에 우리를 보면 늘 재미있게 해주셨는데, 그날은 희한하게 말씀이 없었어요. 몸이 안 좋으신가 했어요.’”
— 그래서 뭐라 답했나요.
“이랬죠. ‘오늘은 제가 좀 웃겨드릴까요?’”
1983년은 대한민국 외교사에서 악몽 같은 해다. 버마 테러 한 달 전인 9월 1일엔 뉴욕에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KAL) 보잉 747 여객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됐다. 승객과 승무원 269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북한 공작원 3인이 아웅산 묘역에 폭탄을 설치했다. 그들은 원격으로 폭탄을 터트렸고, 한국의 각계 최고위급 엘리트 17명이 한자리에서 희생됐다. ‘아웅산’은 산 이름이 아니고, 미얀마에서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정치인을 뜻한다. 딸 아웅산 수치가 대를 이어 정치를 했다.
사과 안 한 북한
테러가 일어난 후 한동안 여러 얘기가 있었다. 일각에선 전두환 정권의 자작극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마치 드라마처럼 간발의 차로 테러를 피했다는 이유에서다. 역시 부친을 아웅산 묘역에서 잃은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은 사건 40주기에 쓴 칼럼에서 ‘어처구니없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음모론과 억측들’이라고 일축했다.
테러범 3인 중 1인은 검거 도중 피살됐고, 한 명은 사형됐다. 나머지 한 명은 미얀마 감옥에서 무기징역을 살았다. 북한이나 남한으로 가고 싶어 했지만 양국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 2008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남한으로 망명한 황장엽 전(前) 북한 조선로동당 비서는 ‘1983년 당시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소행임을 인정하는 문제를 두고 대립했다’고 증언했다. “김일성은 ‘저 밑의 일선 과격분자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얘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김정일은 ‘절대 부인해야 된다’고 강경하게 반대했다. 결국 김정일의 의견이 채택됐다.” 북한은 지금까지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남한의 자작극’이라는 게 북의 주장이다.
버마는 수사 후 북한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범죄 집단인 북괴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을 뿐만 아니라 북괴 정권의 승인 자체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누가 거길 가보고 싶겠어요”
남한 사회는 들끓었다. 휴전선에 접한 육군 1군단과 6군단은 병사들을 완전무장시키고 전쟁을 준비했다. 육사 12기를 중심으로 하는 장교집단은 ‘벌초계획’이라는 이름의 김일성 암살 작전을 세웠다. 특수부대 30명을 평양에 보내 주석궁을 폭파한다는 계획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훗날 “격분한 군 지휘관들이 육·해·공군 할 것 없이 북한을 때리려고 해서 전방을 돌아다니며 말렸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군의 기개가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그때 만약 ‘벌초계획’이 실행됐다면 지금쯤 한반도 정세는 많이 달랐을 게다.
테러 5일 후인 10월 13일 여의도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100만 명이 모였다.
— 영결식이 기억나나요.
“그럼요.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였지? 고맙네’ 생각했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살아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이런 생각도 했고요. 영결식 마치고 규탄대회 할 때는 엄청 화가 났어요. ‘아니, 안 갔어야 했는데 왜 아버지는 거길 가신 거야. 다 어른들이었는데 발언권도 없었던 건가’ 눈물도 안 났어요.”
사실 당시 정부 내에서도 버마행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노신영 당시 안기부장, 이범석 당시 외무부 장관이 대표적이었다.
— 아웅산 묘역 현장은 가봤나요.
“외교부에서 몇 번 가자고 요청이 왔는데 안 갔어요. 다른 유가족들도 거의 안 갔어요. 누가 거길 가보고 싶겠어요? 저희는 오랫동안 그 일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어요. 형제끼리도 아버지 얘기가 나오면 다른 화제로 돌렸어요. 집에서 가족들이 모여 밥 먹고 있는데 TV에서 그래요. ‘아웅산 테러 몇 주기를 맞아…’ 그러면 우리는 밥도 못 먹었어요.”
“유가족들, 가족 같지만 전화 연락만 하고 지내”
2023년 10월 9일 국립묘지에서 4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최초로 정부(국가보훈부)가 주최한 추모식이었다.
— 40주기 추모식에 참석했나요.
“그럼요. 유가족끼리는 ‘어머님’이라 부르거든요. 연세 많은 여성 참석자에게 ‘안녕하셨어요, 어머님’이라고 인사를 건넸는데, 세상에 누나였던 거예요. 유자녀(遺子女)들도 다 나이가 든 거죠. 어머님들도 한 분 두 분 돌아가시고요. 어머님들끼리는 오랫동안 계속 만나셨어요. 매해 모여서 식사를 하셨죠.”
— 자녀들도 모였나요.
“만났어요. 아웅산에서 돌아가신 함병춘 비서실장님 장남 재봉이 형이 회장이었어요. 세 번인가 모이고 그 후론 안 모여요.”
— 왜요?
“만나면 무척 반가워요. 가족 같아요. 그런데 소주 몇 잔 들어가면 분위기가 우울해지는 거예요. 아버지들 얘기가 나오잖아요. 저도 모르게 슬퍼져요. 생각해 보세요. 그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보고 싶지만 서로 전화 연락만 하고 지내요.”
“어머니 빚보증으로 15억6000만원 빚 생겨”
그는 중동고를 졸업했다. 중동고에는 그 말고도 아웅산 묘역 테러 유자녀가 한 명 더 있었다. 이재관 청와대 공보비서관의 아들 이용이었다.
“이원석 전 검찰총장이 고등학교 2년 선배예요. 제 기억에 그 선배가 3학년 규율부장이었어요. 저희가 입학하자 이 선배가 2학년 교실을 돌아다니며 그랬대요. ‘이번에 우리 학교에 유자녀가 두 명 들어왔다. 친절하게 잘 대해줘라.’ 중동고가 선후배 간에 규율이 셌거든요.”
아버지의 이름은 입대한 후에도 그를 따라다녔다.
“제가 해군에 지원해서 들어갔거든요. 선임들이 이러더라고요. ‘넌 여기 어떻게 왔니? (현역이 아니라) 방위로 갈 수도 있지 않았어? 진짜 애국자구나.’ 서너 달은 저만 기합을 안 줬어요. 한데 시간이 지나니 까먹었는지 똑같이 취급하더라고요.”
— 왜 개그맨이 됐나요.
“원래는 자동차 디자이너를 하고 싶었어요. 서울예전 시각디자인과에 들어갔지요. 군대 다녀와서 뉴욕의 프랫(Pratt)이나 파슨스로 유학 가려 했어요. 1990년에 해군에 입대했어요. 휴가를 나오는데 언젠가부터 어머니가 ‘왔니, 밥 먹어라’ 이러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시는 거예요. 휴가 받고도 집에 안 오고 그냥 배에서 머문 적도 여러 번이에요. 모범 수병으로 상도 받았어요.”
— 어머님은 왜 그러신 걸까요.
“알고 봤더니 1990년에 어머니가 지인의 보증을 잘못 서 빚을 떠안은 거예요. 15억6000만원이었어요. 어머니가 새벽에 코피를 흘리기도 하셨대요. 휴가 나온 저에게 미안해서 무슨 말을 못 하신 거죠.”
“그래도 빚 갚아야 되니 했어요”
당시 대치동 은마아파트 1채 시세가 1억원쯤이었다. 서울 강남 아파트 15채 금액의 빚을 지게 된 거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어떻게 하면 그 빚을 갚을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학교 다닐 때 교수님이 그러셨거든요. ‘넌 연극영화과에 가지 왜 여기로 왔니.’ 이 말에 배우나 가수는 아닌 것 같고, 개그맨을 하자 생각했어요. 제대하고 보름 후에 MBC 개그맨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어요. 군인 개그를 했으니 통했겠어요? 그 후에 SBS 공채에 붙었죠. 정작 인기를 얻은 건 KBS에서였어요.”
— 무명(無名) 생활이 길진 않았죠?
“25세에 데뷔해 5년간 무명 생활을 하다 30세에 〈개그콘서트〉를 만났어요. 아주 운이 좋았지요. ‘사바나의 아침’으로 얼굴이 알려지고 7~8년 만에 빚을 다 갚았어요. 하루에 스케줄이 14개였던 날도 있었어요. 아침부터 라디오 녹음, CF 촬영, 체육대회 가서 잠깐 ‘밤바야’ 한 번 하고 다른 행사 갔다가, 저녁 9시부터 나이트클럽 6군데를 도는 거예요. 의정부, 수유리, 일산… 하루에 3억원 넘게 번 날도 있었어요.”
— 대단하네요.
“제가 원래는 내향적이에요. MBTI(성격 유형 검사의 일종) 검사를 해보면 I예요. 쑥스러움도 많이 타요. 살아야 되니까 마이크 잡고 웃겼어요. 밤무대 일은 진짜 하기 싫었어요. 술 취한 분들이 과일 던지고, 머리에 파슬리가 붙어 있고… 모멸감이 들었어요. 그래도 빚 갚아야 되니 했어요.”
DJ 앞에서 DJ 성대모사
— DJ 성대모사도 자주 했죠?
“제가 최초로 대통령 성대모사를 한 글자로 했잖아요. ‘에~!’ 2000년 어린이날에 개그콘서트팀이 청와대로 갔어요. 비서관 중 한 분이 저한테 와요. ‘성대모사 잘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생방송이니 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 그래서 안 했나요.
“했죠. 성대모사로 ‘제가 저번에 감기에 걸려갖고 앰뷸런스를 탔는데 사이렌 소리가 희호 희호 희호’, 그러니 저쪽에서 비서관들이 하지 말라고 손짓을 하고 난리예요. 근데 이희호 여사님을 보니 웃고 계세요. 그래서 계속했죠. ‘분위기 이상하니까 다시 올게요. 희호 희호 희호!’”
— 재밌네요.
“프로그램 마지막에 어린이들과 대통령이 박을 터트렸어요. 그런데 박이 한 개만 터지고 하나는 약간만 벌어져서 색종이 한 장이 빙그르르 떨어져요. 둘러보니 KBS 스태프들이 난리가 났어요. 박권상 사장님도 긴장해서 난리고요. 제가 재빨리 마이크를 들었어요. 다시 대통령 성대모사를 했죠. ‘여러분,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는 빵 터지고 하나는 색종이 한 장이 나왔어요. 저 색종이가 뭔지 아십니까? 바로 제 사인이 들어간 겁니다.’”
— 순발력이 좋네요.
“그랬더니 분위기가 대번에 좋아졌어요. 저쪽에서 비서관들이 잘했다고 난리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언제는 하지 말라며?’ 그랬더니 폭소가 빵 터졌어요. 이게 유머의 힘이죠. 벌써 25년 전 일이네요.”
그는 2002년 의외의 무대에 올라섰다. 바로 대선 유세장.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 이회창 후보는 왜 지지했나요.
“처음엔 그분을 잘 몰랐어요. 정치에 크게 관심도 없었고요. 소속사에서 행사라고 해서 갔는데 대선 유세장이었어요. 무대에 올라가래요. ‘여러분 이회창 후보님을 지지하는 개그맨 심현섭씨가 왔습니다’ 사회자가 이러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어요. 그렇게 기호 1번 이회창 후보의 지지자가 돼버렸어요. 대학로를 필두로 명동, 동대문, 남대문 유세를 함께 다녔죠.”
— 본인 뜻이 아니었던 거군요.
“유세를 다니면서 이 후보님을 만나보니 재밌는 분이더라고요. 매력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분을 지지해야겠다’ 생각하게 된 거죠. ‘대쪽 같은 나라, 나라다운 나라, 깨끗한 나라, 반듯한 나라’ 지금도 안 까먹었어요.”
— 결과적으로는 지지하게 됐군요.
“그런데 신문에 이렇게 보도됐어요. ‘〈개그콘서트〉는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다.’ 후배들에게 미안해 죽는 줄 알았어요. 각자 생각이 다 다르잖아요. 요즘도 연예인이 누구를 지지하는지를 두고 뭐라고 하잖아요.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가족끼리도 정치 성향이 다를 수 있잖아요.”
“어머니, ‘정치 쪽으론 가지 마라’”
2002년 대선은 노무현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공교롭게도 그해 연예대상 코미디 최우수상은 최고의 인기를 달리고 있던 심현섭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신인이었던 ‘갈갈이’ 박준형에게 돌아갔다.
“당시에 제가 받기로 정해졌다고 들었는데 대선 결과 나오고 바뀌었어요. ‘상이 뭐가 중요하냐. 나는 그냥 웃기고 싶은 사람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밖에 나가서 소주를 마셨죠. 이제는 충분히 이해해요. 박준형씨는 저에게 고마워했지만 저는 ‘네 복’이라고 말했어요. 전 예전부터 상복(賞福)이 없었어요. 그 상 받는다고 운명이 바뀌는 것도 아니잖아요.”
— 정치하라는 얘기는 안 들었나요.
“여러 번 들었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회의원 해보라고요. 근데 어머니가 신신당부하셨어요. 정치 쪽으로 절대 가지 말라고요. 시사 코미디도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당신 남편이 정치계로 갔기 때문에 돌아가신 거잖아요. 어머니에겐 그게 컸던 거 같아요.”
그는 한때 방송계를 떠나 드라마 제작사에 몸 담기도 했다. 그렇게 40대에 들어섰다.
어머니 10년 간병
“빚도 갚았겠다, 나도 이제 여행도 다니면서 살아야겠다 했는데, 어머니가 아프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10년을 투병하셨어요. 나중엔 뇌경색이 와서 누워만 계시고 말도 못 하셨어요. 병원에서 간병하던 어느 날이었어요. 어머니가 차고 계신 성인용 기저귀를 새 기저귀로 갈아야 되는데 쉽지 않은 거예요. ‘엄마 허리를 이쪽으로 돌려보세요’ 거듭 몸을 들어도 안 돼요. 엄마가 차고 계셨던 기저귀를 나도 모르게 벽에 던졌어요. ‘다시는 안 올 거야’ 이러곤 병원에서 뛰쳐나왔어요.”
— 어디로 갔나요.
“병원 앞 사우나에 갔어요. 잠깐 눈을 붙였는데 아버지가 나타나요. 옛날 집에서 웃고 계세요. 예전 모습 그대로요. 그게 더 무서웠어요. 차라리 ‘야, 인마, 너 빨리 안 들어가’ 혼내는 게 낫죠. 병실에 돌아갔더니 수간호사님이 이래요.
‘이럴 거면 간병인 쓰세요. 원래 자식이 간병 못 해요.’
어머니는 안면근육이 다 마비돼서 말도 못 하고 기침만 하시고요. 기저귀를 치우고 변이 묻은 벽을 닦으면서 울컥했어요.”
— 왜요?
“한 번에 쓱 닦이는 거예요. 맨날 콧줄로 똑같은 것만 몸에 들어가니 변에 뭐가 없어요. 그냥 누런 물인 거죠. ‘다시는 도망가지 말아야지’ 결심했어요. 이게 10년 전 얘기네요. 그때는 하루가 1년 같았는데…. 지나고 보니 10년이 일주일 같네요. 어머니에게 잘못한 것만 생각나요.”
— 간병하면서 우울 증상은 안 겪었나요.
“겪었죠. 새벽에 어머니 옆 보조 침대에 누워 있으면 병실 특유의 소리가 나요. 약간 쇳소리 같은 소리예요. 그 소리가 이명(耳鳴)처럼 크게 들렸어요. 앰뷸런스를 하도 여러 번 타서 사이렌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고 그랬어요. 우울증도 왔어요. 형들이 교대해 주면 저는 격투기 체육관으로 갔어요. 무에타이를 배웠어요.”
— 그걸로 스트레스를 풀었군요.
“졸면서 샌드백을 치기도 했어요. 5년 동안 배웠어요. 그게 저의 탈출구였어요. 거기 가서 땀 빼고 회원들과 얘기하는 게 재밌었어요. 그때 라디오 DJ를 하고 있었어요. 밤새우고 큰 형과 교대해 라디오 진행을 하러 가요. 댄스 노래가 나갔는데 끝나고 제가 ‘발라드가 참 좋네요’ 이런 거예요. 졸 면서 진행을 한 거죠. 나중엔 작가가 노래 끝날 때쯤 제 등을 쳤어요.”
— 정신 차리라고요?
“네. 나중엔 미안해서 못 하겠다고 했어요. 어떻게든 할 걸 싶기도 해요. 병원비가 계속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걸 지출이라고 생각 안 했어요. 엄마잖아요. 그치만 새엄마가 생기면 두 번은 못 할 것 같아요.”
— 이제 와서 새엄마가 어떻게 생길 수 있죠?
“누가 저를 입양해 주시면 생기겠죠? 그래도 못 할 것 같아요. 어머니 입관할 때 전 안 울었어요. 엄마 귀를 솜으로 막은 거예요. 그게 너무 싫었어요. ‘엄마는 답답한 거 싫어하는데…’ 매장하러 국립묘지 가서도 그 생각만 했어요. ‘엄마가 얼마나 답답할까.’ 그런데 얼마 후에 퍼뜩 깨달았어요. ‘아, 엄마가 이제 그렇게 그리워했던 아버지 옆으로 가시는구나.’”
“방송인은 과자 같다”
— 효자군요.
“전 효자는 아니에요. 예전에 외할머니가 이런 말을 했어요. ‘네가 앞으로 살면서 언제 누굴 만날지 모른다. 소중한 인연이다. 설사 강도를 만나더라도 잘 달래줘서 보내라.’ 엄마와 어릴 때부터 한번도 떨어져서 살아본 적이 없었어요. 엄청난 인연인 거죠. 이런 인연이 있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그리워하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까, 이런 생각을 자주 했어요.”
— 어머니 간병하면서 방송 활동도 뜸해진 거죠?
“어떤 분이 그래요. ‘심현섭씨는 음주운전을 한 것도 아니고 도박을 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방송에 안 나온 거예요? 산에 들어갔어요?’ 엄마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쉬니까 계속 쉬게 되더라고요. 방송이란 게 그래요. 활동 안 하고 3~4년이 넘으면 방송 관계자들이 존재를 아예 잊어버려요.”
— 그렇겠네요.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등장하니까요.
“방송인은 과자와 같아요. 진열대에서 안 보이면 잊어버려요. 다른 과자 사 먹죠. 팔리려면 일단 보이는 곳에 있어야 해요.”
그는 재작년에 여동생을 잃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선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잖아요. 여동생이 아파서 세상을 뜨니 너무 힘들었어요. 인생이 허망하더라고요. 청송 심씨들 사는 어느 시골에 내려가려고 했어요. 진심으로요. 그런데 심혜진 고모가 이래요. ‘궁상떨지 말고 주말에 와서 밥 먹어.’ 심혜진 고모가 먼 친척이에요. 네 살 차이니 나이로 보면 누나지만요.”
— 그래서 주말마다 갔나요?
“갔죠. 고모가 소개팅도 주선해 주고 데이트하라고 돈도 줬어요. 그때는 경제적으로도 힘들었거든요. 결과적으로는 고모 덕에 결혼하게 된 거예요. 발동을 걸어주신 거죠.”
그와 배우 심혜진은 본관이 같다. ‘청송 심씨’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시기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가 시조(始祖)다. 조선 시대엔 왕비만 3명(세종비 소헌왕후, 명종비 인순왕후, 경종비 단의왕후)을 배출했다. 그의 말이다.
“청송 심씨 종친회가 대단해요. 해병대 전우회, 호남향우회보다 더해요. 심씨 누가 아프거나 재난을 당해서 누워 있잖아요? 십시일반 성금 모아요. 금방 1억원이 넘어요.”
일리가 있는 게 종친회 행사도 대단한 규모로 열린다. 2023년 10월 청송에서 청송 심씨 종친행사 ‘한마음대회’가 열렸는데 7000명이 모였단다. 전국에 청송 심씨가 약 24만 명(2015년 기준) 있으니, 30명 중 1명은 청송으로 갔단 얘기다. 그는 청송 심씨 행사에 있어 단골 사회자다.
항렬에 따라 돌림자를 엄격하게 지키는 편이다. 24세는 ‘○섭(燮)’, 25세는 ‘재(載)○’ 하는 식이다. 심현섭은 24대손이고, 심재륜(沈載淪) 전 고검장, 심재철(沈在哲) 전 국회부의장은 25대손이다.
“유머치유센터 짓는 게 꿈”
그는 지난해부터 〈조선의 사랑꾼〉에 출연 중이다. 드디어 4월에 결혼한다.
“〈조선의 사랑꾼〉은 〈개그콘서트〉와 맞먹을 정도로 제 인생을 바꿔놓았어요.”
— 주례는 누가 보나요.
“주례는 없어요. 하객들이 많이 입장할 수 있는 곳을 찾느라 고생했어요.”
— 인생의 반려자도 만났으니, 이제 남은 꿈이 뭔가요.
“전국에 유머치유센터를 짓고 싶어요. 가본 적은 없지만 존스홉킨스병원이란 곳에선 웃음으로 환자를 치료한다고 하더라고요. 웃으면 NK세포가 나오는데 항암 효과도 있고, 치매 예방도 된다는 거죠. 보통 ‘웃음 치료’라고 하는데 저 같은 사람은 ‘치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본인도 웃고 남도 웃기는 거죠.”
— 유머를 배울 수 있나요? 타고나는 거 아닌가요.
“선천적인 것도 있긴 해요. 특히 성대모사는 타고나야 해요. 솔직히 50대가 갑자기 어느 날 자고 일어나서 (성대모사로) ‘안녕하세요, 전유성입니다’ 이러기는 힘들어요. 그런데 이야기로 웃길 수 있는 포인트는 배울 수 있어요. 일단 사람들이 공감해야 웃잖아요. 그러면 어떤 게 더 공감되는 말인지 같이 고민하다 보면 늘어요. 초등학생들도 유머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서울역으로 간다고 했다. 예비 신부가 있는 울산으로 가기 위해서다. 매니저 없이 행인들 사이를 걷는 그의 모습은 어쩐지 홀가분해 보였다.
“다 고마운 일들이었어요”

“다 고마운 일들이었어요. 하늘이 도와 1999년에 〈개콘〉을 하게 됐고, 원없이 코미디를 해봤어요. 개그맨이 된 걸 후회한 적은 없어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것, 어머니를 간병하며 긴 시간 보낸 것 다 인연이죠. 사람들이 저를 애잔하게 본 적이 많았어요. 저는 동의하지 않았어요. 어린 나이에 남들보다 일찍 겪은 거라 생각했어요. 결혼만 안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나타난 거죠.”
— 만약 인생의 한 순간을 바꿀 수 있다면요?
“가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요. 만약 타임머신이 있다면 1983년 10월 7일로 돌아가서, 아버지한테 수면제를 먹이는 거예요. 다음 날 못 일어나게요. 아니면 주무실 때 다리를 부러뜨리는 거죠. 못 가게요. 아버지가 그리 가시지 않았다면 어머니도 많이 아프지 않았을 테니까요. 이런 허망한 생각을 가끔 해요. 전 다시 태어나도 심상우씨와 임옥남씨의 아들로 태어나고 싶어요. 정말 좋은 아버지, 어머니였거든요.”⊙
아버지의 마지막 용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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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로 떠나기 전 김포공항에 도열해 있는 정부 인사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심상우 당시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이다. 사진=조선DB |
아버지 심상우(沈相宇) 11대 국회의원은 그다음 날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묘역에서 숨졌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을 노린 북한의 폭탄 테러에 희생된 것이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 45세, 민망할 정도로 젊은 나이였다. 13세였던 소년은 이제 그때의 아버지보다 열 살 많은 어른이 됐다. 개그맨 심현섭 얘기다.
대한민국에서 1990년대를 살아간 이들 중 심현섭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개그콘서트〉의 전성기를 이끌며 ‘밤바야~’ ‘가슴이~ 가슴이~’ 같은 유행어를 낳았다. 여기저기 TV만 틀면 등장하곤 했다. 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 한동안 잘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부턴 〈조선의 사랑꾼〉(TV조선)에 출연 중이다. 여성을 소개받고 연애하는 과정이 중계됐다. 연애에 서툴고 소탈한 모습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국립묘지 내 부모님 묘역 앞에서 프러포즈를 하는 모습은 큰 화제가 됐다. 그의 가족사도 다시 주목받았다. 지난 3월 7일 그를 만났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부터 밥상머리 교육”
“그날 아버지가 주신 용돈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어요. 40대 때까지도 갖고 있었는데 이사하면서 없어졌어요. 사실 미얀마로 떠나시기 한 달 전부터 아버지가 좀 이상했어요. 안 하던 행동을 하셨어요.”
— 무슨 행동이요?
“그때 아버지는 정치하느라 무척 바쁘셨거든요. 그런데 오후 4시30분이면 귀가하셨어요. 그러곤 가족들과 저녁을 같이 먹었어요. 3남 2녀를 앉혀놓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말씀을 해주셨어요. ‘아버지가 신문사를 운영했잖니. 너희는 신문 배달, 우유 배달 해보면서 세상을 느껴봐라. 운전하시는 분들께 아저씨라고 하지 마라. 선생님이라고 불러라.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은 어머님, 이모님이라고 불러라. 돈이 많이 생기면 다른 사람 도와줘라….’”
—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한 말씀이네요.
“유언이 되어버렸죠. 돌아보면 그때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싶어요. 묘한 밥상머리 교육이 계속되더니 아버지가 출국하는 날이 됐어요. 그날 아침 아버지 표정이 무척 안 좋았어요. ‘아버지 표정이 왜 저리 안 좋지’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그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슬퍼요. 소[牛]가 도살장 끌려가며 느낀다잖아요. 얼마나 가기 싫으셨을까, 두려움 때문이었을까요. 슬퍼 보였던 뒷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재벌집 막내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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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심상우 전 의원(오른쪽)과 집 마당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삼 형제. 맨 왼쪽이 심현섭이다. 사진=심현섭 |
당시에도 지역감정이 심했다. 호남 출신의 의원을 요직에 임명한 걸 보면, 전두환 대통령이 심 전 의원을 얼마나 좋게 평가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아버지 덕에 심현섭의 어린 시절은 풍요로웠다. 3남 2녀 중 막내아들이었으니 ‘재벌집 막내아들’이었던 셈이다.
“집이 무척 컸어요. 운전기사, 식모 누나가 있었죠. 아버지는 술에 취해 귀가하시면 클리프 리처드의 ‘영 원(The Young Ones)’을 엘피(LP) 판으로 틀어놓고 어머니와 춤을 추셨어요. 쉬는 날이면 차 트렁크에 이젤을 싣고 온 식구가 산에 갔어요. 아버지는 이젤을 세워놓고 풍경화를 그리셨고, 어머니는 옆에 앉아 소녀처럼 아버지를 보고 있었지요.”
심 전 의원은 퍽 유쾌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유머감각이 무척 좋았다고 한다. 기자 출신의 정치인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정치에서 경험한 제일가는 재담꾼은 심상우 의원이었다. 당시 정계의 만장일치일 게다. 함께 있으면 몇 시간이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웃긴다. 돌발적인 일에도 즉각 유머다. 내장산에서 세미나를 할 때, 심 의원 선거구인 광주의 무등산 수박을 차로 실어 왔다. 쪼개 보니 거의가 설익은 것이다. 그랬더니 심 의원이 마이크를 잡고 “사무국장에게 수박을 보내라고 말했더니 잘못 듣고 호박을 보냈지 뭐예요.”… 심상우 의원이 불행을 당한 후 그의 재담 메모 노트가 복사되어 나왔다는 설도 나돌았다.〉
악몽 같은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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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당시 심상우 전 의원의 선거 포스터. |
“탤런트 이낙훈 아저씨와 가장 친하셨어요. 아버지보다 세 살 많으셨는데, 같이 11대 국회의원을 지내셨어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무슨 협회 회장을 많이 맡고 있었어요. 그런 곳에 기부를 많이 했어요.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한 적도 있어요. ‘자식이 다섯이나 있고 우리도 살아야 하는데 오지랖도 참….’ 지금도 아버지가 광주분들에게 덕망이 있어요. ‘심상우 의원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이런 말씀들을 하세요.”
심현섭은 어른이 된 후에도 아버지를 추억하는 이들과 종종 마주쳤다.
“십육칠 년 전에 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어떤 어르신이 다가와요. ‘심현섭씨, 미안해요. 내가 그때 아버님과 코드원(대통령 전용기)을 같이 탔어요. 저는 청와대 출입기자였어요. 우리 심 실장님이 언론인이셨기 때문에 우리를 보면 늘 재미있게 해주셨는데, 그날은 희한하게 말씀이 없었어요. 몸이 안 좋으신가 했어요.’”
— 그래서 뭐라 답했나요.
“이랬죠. ‘오늘은 제가 좀 웃겨드릴까요?’”
1983년은 대한민국 외교사에서 악몽 같은 해다. 버마 테러 한 달 전인 9월 1일엔 뉴욕에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KAL) 보잉 747 여객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됐다. 승객과 승무원 269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북한 공작원 3인이 아웅산 묘역에 폭탄을 설치했다. 그들은 원격으로 폭탄을 터트렸고, 한국의 각계 최고위급 엘리트 17명이 한자리에서 희생됐다. ‘아웅산’은 산 이름이 아니고, 미얀마에서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정치인을 뜻한다. 딸 아웅산 수치가 대를 이어 정치를 했다.
사과 안 한 북한
테러가 일어난 후 한동안 여러 얘기가 있었다. 일각에선 전두환 정권의 자작극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마치 드라마처럼 간발의 차로 테러를 피했다는 이유에서다. 역시 부친을 아웅산 묘역에서 잃은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은 사건 40주기에 쓴 칼럼에서 ‘어처구니없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음모론과 억측들’이라고 일축했다.
테러범 3인 중 1인은 검거 도중 피살됐고, 한 명은 사형됐다. 나머지 한 명은 미얀마 감옥에서 무기징역을 살았다. 북한이나 남한으로 가고 싶어 했지만 양국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 2008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남한으로 망명한 황장엽 전(前) 북한 조선로동당 비서는 ‘1983년 당시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소행임을 인정하는 문제를 두고 대립했다’고 증언했다. “김일성은 ‘저 밑의 일선 과격분자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얘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김정일은 ‘절대 부인해야 된다’고 강경하게 반대했다. 결국 김정일의 의견이 채택됐다.” 북한은 지금까지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남한의 자작극’이라는 게 북의 주장이다.
버마는 수사 후 북한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범죄 집단인 북괴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을 뿐만 아니라 북괴 정권의 승인 자체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누가 거길 가보고 싶겠어요”
남한 사회는 들끓었다. 휴전선에 접한 육군 1군단과 6군단은 병사들을 완전무장시키고 전쟁을 준비했다. 육사 12기를 중심으로 하는 장교집단은 ‘벌초계획’이라는 이름의 김일성 암살 작전을 세웠다. 특수부대 30명을 평양에 보내 주석궁을 폭파한다는 계획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훗날 “격분한 군 지휘관들이 육·해·공군 할 것 없이 북한을 때리려고 해서 전방을 돌아다니며 말렸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군의 기개가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그때 만약 ‘벌초계획’이 실행됐다면 지금쯤 한반도 정세는 많이 달랐을 게다.
테러 5일 후인 10월 13일 여의도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100만 명이 모였다.
— 영결식이 기억나나요.
“그럼요.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였지? 고맙네’ 생각했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살아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이런 생각도 했고요. 영결식 마치고 규탄대회 할 때는 엄청 화가 났어요. ‘아니, 안 갔어야 했는데 왜 아버지는 거길 가신 거야. 다 어른들이었는데 발언권도 없었던 건가’ 눈물도 안 났어요.”
사실 당시 정부 내에서도 버마행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노신영 당시 안기부장, 이범석 당시 외무부 장관이 대표적이었다.
— 아웅산 묘역 현장은 가봤나요.
“외교부에서 몇 번 가자고 요청이 왔는데 안 갔어요. 다른 유가족들도 거의 안 갔어요. 누가 거길 가보고 싶겠어요? 저희는 오랫동안 그 일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어요. 형제끼리도 아버지 얘기가 나오면 다른 화제로 돌렸어요. 집에서 가족들이 모여 밥 먹고 있는데 TV에서 그래요. ‘아웅산 테러 몇 주기를 맞아…’ 그러면 우리는 밥도 못 먹었어요.”
“유가족들, 가족 같지만 전화 연락만 하고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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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9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아웅산 묘역 테러 희생자 4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맨 오른쪽이 개그맨 심현섭이다. 사진=조선DB |
— 40주기 추모식에 참석했나요.
“그럼요. 유가족끼리는 ‘어머님’이라 부르거든요. 연세 많은 여성 참석자에게 ‘안녕하셨어요, 어머님’이라고 인사를 건넸는데, 세상에 누나였던 거예요. 유자녀(遺子女)들도 다 나이가 든 거죠. 어머님들도 한 분 두 분 돌아가시고요. 어머님들끼리는 오랫동안 계속 만나셨어요. 매해 모여서 식사를 하셨죠.”
— 자녀들도 모였나요.
“만났어요. 아웅산에서 돌아가신 함병춘 비서실장님 장남 재봉이 형이 회장이었어요. 세 번인가 모이고 그 후론 안 모여요.”
— 왜요?
“만나면 무척 반가워요. 가족 같아요. 그런데 소주 몇 잔 들어가면 분위기가 우울해지는 거예요. 아버지들 얘기가 나오잖아요. 저도 모르게 슬퍼져요. 생각해 보세요. 그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보고 싶지만 서로 전화 연락만 하고 지내요.”
“어머니 빚보증으로 15억6000만원 빚 생겨”
그는 중동고를 졸업했다. 중동고에는 그 말고도 아웅산 묘역 테러 유자녀가 한 명 더 있었다. 이재관 청와대 공보비서관의 아들 이용이었다.
“이원석 전 검찰총장이 고등학교 2년 선배예요. 제 기억에 그 선배가 3학년 규율부장이었어요. 저희가 입학하자 이 선배가 2학년 교실을 돌아다니며 그랬대요. ‘이번에 우리 학교에 유자녀가 두 명 들어왔다. 친절하게 잘 대해줘라.’ 중동고가 선후배 간에 규율이 셌거든요.”
아버지의 이름은 입대한 후에도 그를 따라다녔다.
“제가 해군에 지원해서 들어갔거든요. 선임들이 이러더라고요. ‘넌 여기 어떻게 왔니? (현역이 아니라) 방위로 갈 수도 있지 않았어? 진짜 애국자구나.’ 서너 달은 저만 기합을 안 줬어요. 한데 시간이 지나니 까먹었는지 똑같이 취급하더라고요.”
— 왜 개그맨이 됐나요.
“원래는 자동차 디자이너를 하고 싶었어요. 서울예전 시각디자인과에 들어갔지요. 군대 다녀와서 뉴욕의 프랫(Pratt)이나 파슨스로 유학 가려 했어요. 1990년에 해군에 입대했어요. 휴가를 나오는데 언젠가부터 어머니가 ‘왔니, 밥 먹어라’ 이러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시는 거예요. 휴가 받고도 집에 안 오고 그냥 배에서 머문 적도 여러 번이에요. 모범 수병으로 상도 받았어요.”
— 어머님은 왜 그러신 걸까요.
“알고 봤더니 1990년에 어머니가 지인의 보증을 잘못 서 빚을 떠안은 거예요. 15억6000만원이었어요. 어머니가 새벽에 코피를 흘리기도 하셨대요. 휴가 나온 저에게 미안해서 무슨 말을 못 하신 거죠.”
“그래도 빚 갚아야 되니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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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가 큰 인기를 끌던 2000년의 〈개그콘서트〉 출연진. 사진=조선DB |
“어떻게 하면 그 빚을 갚을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학교 다닐 때 교수님이 그러셨거든요. ‘넌 연극영화과에 가지 왜 여기로 왔니.’ 이 말에 배우나 가수는 아닌 것 같고, 개그맨을 하자 생각했어요. 제대하고 보름 후에 MBC 개그맨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어요. 군인 개그를 했으니 통했겠어요? 그 후에 SBS 공채에 붙었죠. 정작 인기를 얻은 건 KBS에서였어요.”
— 무명(無名) 생활이 길진 않았죠?
“25세에 데뷔해 5년간 무명 생활을 하다 30세에 〈개그콘서트〉를 만났어요. 아주 운이 좋았지요. ‘사바나의 아침’으로 얼굴이 알려지고 7~8년 만에 빚을 다 갚았어요. 하루에 스케줄이 14개였던 날도 있었어요. 아침부터 라디오 녹음, CF 촬영, 체육대회 가서 잠깐 ‘밤바야’ 한 번 하고 다른 행사 갔다가, 저녁 9시부터 나이트클럽 6군데를 도는 거예요. 의정부, 수유리, 일산… 하루에 3억원 넘게 번 날도 있었어요.”
— 대단하네요.
“제가 원래는 내향적이에요. MBTI(성격 유형 검사의 일종) 검사를 해보면 I예요. 쑥스러움도 많이 타요. 살아야 되니까 마이크 잡고 웃겼어요. 밤무대 일은 진짜 하기 싫었어요. 술 취한 분들이 과일 던지고, 머리에 파슬리가 붙어 있고… 모멸감이 들었어요. 그래도 빚 갚아야 되니 했어요.”
DJ 앞에서 DJ 성대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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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현섭(오른쪽 첫 번째)이 2002년 대선 전 이회창 총재와 귓속말을 나누고 있다. 왼쪽 첫 번째는 함께 선거운동을 했던 탤런트 박철. 사진=조선DB |
“제가 최초로 대통령 성대모사를 한 글자로 했잖아요. ‘에~!’ 2000년 어린이날에 개그콘서트팀이 청와대로 갔어요. 비서관 중 한 분이 저한테 와요. ‘성대모사 잘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생방송이니 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 그래서 안 했나요.
“했죠. 성대모사로 ‘제가 저번에 감기에 걸려갖고 앰뷸런스를 탔는데 사이렌 소리가 희호 희호 희호’, 그러니 저쪽에서 비서관들이 하지 말라고 손짓을 하고 난리예요. 근데 이희호 여사님을 보니 웃고 계세요. 그래서 계속했죠. ‘분위기 이상하니까 다시 올게요. 희호 희호 희호!’”
— 재밌네요.
“프로그램 마지막에 어린이들과 대통령이 박을 터트렸어요. 그런데 박이 한 개만 터지고 하나는 약간만 벌어져서 색종이 한 장이 빙그르르 떨어져요. 둘러보니 KBS 스태프들이 난리가 났어요. 박권상 사장님도 긴장해서 난리고요. 제가 재빨리 마이크를 들었어요. 다시 대통령 성대모사를 했죠. ‘여러분,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는 빵 터지고 하나는 색종이 한 장이 나왔어요. 저 색종이가 뭔지 아십니까? 바로 제 사인이 들어간 겁니다.’”
— 순발력이 좋네요.
“그랬더니 분위기가 대번에 좋아졌어요. 저쪽에서 비서관들이 잘했다고 난리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언제는 하지 말라며?’ 그랬더니 폭소가 빵 터졌어요. 이게 유머의 힘이죠. 벌써 25년 전 일이네요.”
그는 2002년 의외의 무대에 올라섰다. 바로 대선 유세장.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 이회창 후보는 왜 지지했나요.
“처음엔 그분을 잘 몰랐어요. 정치에 크게 관심도 없었고요. 소속사에서 행사라고 해서 갔는데 대선 유세장이었어요. 무대에 올라가래요. ‘여러분 이회창 후보님을 지지하는 개그맨 심현섭씨가 왔습니다’ 사회자가 이러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어요. 그렇게 기호 1번 이회창 후보의 지지자가 돼버렸어요. 대학로를 필두로 명동, 동대문, 남대문 유세를 함께 다녔죠.”
— 본인 뜻이 아니었던 거군요.
“유세를 다니면서 이 후보님을 만나보니 재밌는 분이더라고요. 매력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분을 지지해야겠다’ 생각하게 된 거죠. ‘대쪽 같은 나라, 나라다운 나라, 깨끗한 나라, 반듯한 나라’ 지금도 안 까먹었어요.”
— 결과적으로는 지지하게 됐군요.
“그런데 신문에 이렇게 보도됐어요. ‘〈개그콘서트〉는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다.’ 후배들에게 미안해 죽는 줄 알았어요. 각자 생각이 다 다르잖아요. 요즘도 연예인이 누구를 지지하는지를 두고 뭐라고 하잖아요.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가족끼리도 정치 성향이 다를 수 있잖아요.”
“어머니, ‘정치 쪽으론 가지 마라’”
2002년 대선은 노무현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공교롭게도 그해 연예대상 코미디 최우수상은 최고의 인기를 달리고 있던 심현섭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신인이었던 ‘갈갈이’ 박준형에게 돌아갔다.
“당시에 제가 받기로 정해졌다고 들었는데 대선 결과 나오고 바뀌었어요. ‘상이 뭐가 중요하냐. 나는 그냥 웃기고 싶은 사람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밖에 나가서 소주를 마셨죠. 이제는 충분히 이해해요. 박준형씨는 저에게 고마워했지만 저는 ‘네 복’이라고 말했어요. 전 예전부터 상복(賞福)이 없었어요. 그 상 받는다고 운명이 바뀌는 것도 아니잖아요.”
— 정치하라는 얘기는 안 들었나요.
“여러 번 들었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회의원 해보라고요. 근데 어머니가 신신당부하셨어요. 정치 쪽으로 절대 가지 말라고요. 시사 코미디도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당신 남편이 정치계로 갔기 때문에 돌아가신 거잖아요. 어머니에겐 그게 컸던 거 같아요.”
그는 한때 방송계를 떠나 드라마 제작사에 몸 담기도 했다. 그렇게 40대에 들어섰다.
어머니 10년 간병
“빚도 갚았겠다, 나도 이제 여행도 다니면서 살아야겠다 했는데, 어머니가 아프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10년을 투병하셨어요. 나중엔 뇌경색이 와서 누워만 계시고 말도 못 하셨어요. 병원에서 간병하던 어느 날이었어요. 어머니가 차고 계신 성인용 기저귀를 새 기저귀로 갈아야 되는데 쉽지 않은 거예요. ‘엄마 허리를 이쪽으로 돌려보세요’ 거듭 몸을 들어도 안 돼요. 엄마가 차고 계셨던 기저귀를 나도 모르게 벽에 던졌어요. ‘다시는 안 올 거야’ 이러곤 병원에서 뛰쳐나왔어요.”
— 어디로 갔나요.
“병원 앞 사우나에 갔어요. 잠깐 눈을 붙였는데 아버지가 나타나요. 옛날 집에서 웃고 계세요. 예전 모습 그대로요. 그게 더 무서웠어요. 차라리 ‘야, 인마, 너 빨리 안 들어가’ 혼내는 게 낫죠. 병실에 돌아갔더니 수간호사님이 이래요.
‘이럴 거면 간병인 쓰세요. 원래 자식이 간병 못 해요.’
어머니는 안면근육이 다 마비돼서 말도 못 하고 기침만 하시고요. 기저귀를 치우고 변이 묻은 벽을 닦으면서 울컥했어요.”
— 왜요?
“한 번에 쓱 닦이는 거예요. 맨날 콧줄로 똑같은 것만 몸에 들어가니 변에 뭐가 없어요. 그냥 누런 물인 거죠. ‘다시는 도망가지 말아야지’ 결심했어요. 이게 10년 전 얘기네요. 그때는 하루가 1년 같았는데…. 지나고 보니 10년이 일주일 같네요. 어머니에게 잘못한 것만 생각나요.”
— 간병하면서 우울 증상은 안 겪었나요.
“겪었죠. 새벽에 어머니 옆 보조 침대에 누워 있으면 병실 특유의 소리가 나요. 약간 쇳소리 같은 소리예요. 그 소리가 이명(耳鳴)처럼 크게 들렸어요. 앰뷸런스를 하도 여러 번 타서 사이렌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고 그랬어요. 우울증도 왔어요. 형들이 교대해 주면 저는 격투기 체육관으로 갔어요. 무에타이를 배웠어요.”
— 그걸로 스트레스를 풀었군요.
“졸면서 샌드백을 치기도 했어요. 5년 동안 배웠어요. 그게 저의 탈출구였어요. 거기 가서 땀 빼고 회원들과 얘기하는 게 재밌었어요. 그때 라디오 DJ를 하고 있었어요. 밤새우고 큰 형과 교대해 라디오 진행을 하러 가요. 댄스 노래가 나갔는데 끝나고 제가 ‘발라드가 참 좋네요’ 이런 거예요. 졸 면서 진행을 한 거죠. 나중엔 작가가 노래 끝날 때쯤 제 등을 쳤어요.”
— 정신 차리라고요?
“네. 나중엔 미안해서 못 하겠다고 했어요. 어떻게든 할 걸 싶기도 해요. 병원비가 계속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걸 지출이라고 생각 안 했어요. 엄마잖아요. 그치만 새엄마가 생기면 두 번은 못 할 것 같아요.”
— 이제 와서 새엄마가 어떻게 생길 수 있죠?
“누가 저를 입양해 주시면 생기겠죠? 그래도 못 할 것 같아요. 어머니 입관할 때 전 안 울었어요. 엄마 귀를 솜으로 막은 거예요. 그게 너무 싫었어요. ‘엄마는 답답한 거 싫어하는데…’ 매장하러 국립묘지 가서도 그 생각만 했어요. ‘엄마가 얼마나 답답할까.’ 그런데 얼마 후에 퍼뜩 깨달았어요. ‘아, 엄마가 이제 그렇게 그리워했던 아버지 옆으로 가시는구나.’”
“방송인은 과자 같다”
— 효자군요.
“전 효자는 아니에요. 예전에 외할머니가 이런 말을 했어요. ‘네가 앞으로 살면서 언제 누굴 만날지 모른다. 소중한 인연이다. 설사 강도를 만나더라도 잘 달래줘서 보내라.’ 엄마와 어릴 때부터 한번도 떨어져서 살아본 적이 없었어요. 엄청난 인연인 거죠. 이런 인연이 있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그리워하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까, 이런 생각을 자주 했어요.”
— 어머니 간병하면서 방송 활동도 뜸해진 거죠?
“어떤 분이 그래요. ‘심현섭씨는 음주운전을 한 것도 아니고 도박을 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방송에 안 나온 거예요? 산에 들어갔어요?’ 엄마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쉬니까 계속 쉬게 되더라고요. 방송이란 게 그래요. 활동 안 하고 3~4년이 넘으면 방송 관계자들이 존재를 아예 잊어버려요.”
— 그렇겠네요.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등장하니까요.
“방송인은 과자와 같아요. 진열대에서 안 보이면 잊어버려요. 다른 과자 사 먹죠. 팔리려면 일단 보이는 곳에 있어야 해요.”
그는 재작년에 여동생을 잃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선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잖아요. 여동생이 아파서 세상을 뜨니 너무 힘들었어요. 인생이 허망하더라고요. 청송 심씨들 사는 어느 시골에 내려가려고 했어요. 진심으로요. 그런데 심혜진 고모가 이래요. ‘궁상떨지 말고 주말에 와서 밥 먹어.’ 심혜진 고모가 먼 친척이에요. 네 살 차이니 나이로 보면 누나지만요.”
— 그래서 주말마다 갔나요?
“갔죠. 고모가 소개팅도 주선해 주고 데이트하라고 돈도 줬어요. 그때는 경제적으로도 힘들었거든요. 결과적으로는 고모 덕에 결혼하게 된 거예요. 발동을 걸어주신 거죠.”
그와 배우 심혜진은 본관이 같다. ‘청송 심씨’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시기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가 시조(始祖)다. 조선 시대엔 왕비만 3명(세종비 소헌왕후, 명종비 인순왕후, 경종비 단의왕후)을 배출했다. 그의 말이다.
“청송 심씨 종친회가 대단해요. 해병대 전우회, 호남향우회보다 더해요. 심씨 누가 아프거나 재난을 당해서 누워 있잖아요? 십시일반 성금 모아요. 금방 1억원이 넘어요.”
일리가 있는 게 종친회 행사도 대단한 규모로 열린다. 2023년 10월 청송에서 청송 심씨 종친행사 ‘한마음대회’가 열렸는데 7000명이 모였단다. 전국에 청송 심씨가 약 24만 명(2015년 기준) 있으니, 30명 중 1명은 청송으로 갔단 얘기다. 그는 청송 심씨 행사에 있어 단골 사회자다.
항렬에 따라 돌림자를 엄격하게 지키는 편이다. 24세는 ‘○섭(燮)’, 25세는 ‘재(載)○’ 하는 식이다. 심현섭은 24대손이고, 심재륜(沈載淪) 전 고검장, 심재철(沈在哲) 전 국회부의장은 25대손이다.
“유머치유센터 짓는 게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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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의 부모님 묘역 앞에서 영림씨에게 프러포즈하는 심현섭. 사진=〈조선의 사랑꾼〉) 캡처 |
“〈조선의 사랑꾼〉은 〈개그콘서트〉와 맞먹을 정도로 제 인생을 바꿔놓았어요.”
— 주례는 누가 보나요.
“주례는 없어요. 하객들이 많이 입장할 수 있는 곳을 찾느라 고생했어요.”
— 인생의 반려자도 만났으니, 이제 남은 꿈이 뭔가요.
“전국에 유머치유센터를 짓고 싶어요. 가본 적은 없지만 존스홉킨스병원이란 곳에선 웃음으로 환자를 치료한다고 하더라고요. 웃으면 NK세포가 나오는데 항암 효과도 있고, 치매 예방도 된다는 거죠. 보통 ‘웃음 치료’라고 하는데 저 같은 사람은 ‘치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본인도 웃고 남도 웃기는 거죠.”
— 유머를 배울 수 있나요? 타고나는 거 아닌가요.
“선천적인 것도 있긴 해요. 특히 성대모사는 타고나야 해요. 솔직히 50대가 갑자기 어느 날 자고 일어나서 (성대모사로) ‘안녕하세요, 전유성입니다’ 이러기는 힘들어요. 그런데 이야기로 웃길 수 있는 포인트는 배울 수 있어요. 일단 사람들이 공감해야 웃잖아요. 그러면 어떤 게 더 공감되는 말인지 같이 고민하다 보면 늘어요. 초등학생들도 유머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서울역으로 간다고 했다. 예비 신부가 있는 울산으로 가기 위해서다. 매니저 없이 행인들 사이를 걷는 그의 모습은 어쩐지 홀가분해 보였다.
“다 고마운 일들이었어요”

“다 고마운 일들이었어요. 하늘이 도와 1999년에 〈개콘〉을 하게 됐고, 원없이 코미디를 해봤어요. 개그맨이 된 걸 후회한 적은 없어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것, 어머니를 간병하며 긴 시간 보낸 것 다 인연이죠. 사람들이 저를 애잔하게 본 적이 많았어요. 저는 동의하지 않았어요. 어린 나이에 남들보다 일찍 겪은 거라 생각했어요. 결혼만 안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나타난 거죠.”
— 만약 인생의 한 순간을 바꿀 수 있다면요?
“가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요. 만약 타임머신이 있다면 1983년 10월 7일로 돌아가서, 아버지한테 수면제를 먹이는 거예요. 다음 날 못 일어나게요. 아니면 주무실 때 다리를 부러뜨리는 거죠. 못 가게요. 아버지가 그리 가시지 않았다면 어머니도 많이 아프지 않았을 테니까요. 이런 허망한 생각을 가끔 해요. 전 다시 태어나도 심상우씨와 임옥남씨의 아들로 태어나고 싶어요. 정말 좋은 아버지, 어머니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