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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인터뷰

제주4·3 실화소설 《눈[目]》 발간한 한철용 예비역 장군

“4·3사건의 무고한 희생자는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공로자”

글 :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군사전문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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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향 후 소설가 변신… 4·3 당시 김녕리 비극 소재로 4년 만에 탈고
⊙ 김달삼이 작성한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를 토대로 스토리 구성
⊙ 金大中 대통령 CNN 인터뷰, “4·3의 시작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
⊙ “너븐숭이·굴왓 양민 학살은 군인들의 부끄러운 토벌작전”
⊙ “4·3 희생자 1만5000여 명 중 군경에 의한 무고한 희생 1만1000명 추산”
⊙ 제주 청년들, ‘빨갱이’ 누명 벗으려 해병대 자원… 도솔산 전투 맹활약
⊙ “제주도민, 4·3사건·조총련·북송으로 연좌제 고통당해”
⊙ “4·3의 성격은 두 가지… 좌익 무장 폭동과 군경의 강경 진압 참사”

韓哲鏞
1946년 제주 출생. 제주 오현고, 육군사관학교 졸업(26기), 고려대 경영학 석사, 미 펜실베이니아대학 국제관계학 석사 / 백마부대 28연대 수색대대 소대장(베트남전), 연합사(CFC) 정보참모부 정보운영실(CIOC) 실장, 제8사단장(소장), 국가정보원 국방보좌관, 국군777사령부 정보사령관, 건국대 초빙교수, 미래통합당 제주도당 위원장 역임 / 상훈: 인헌무공훈장, 미 공로훈장 2개, 월남동성훈장 2개 / 저서: 문예사조 소설가 등단(2020년), 《진실은 하나》 《유기견 진순이와 장군 주인》 《사랑의 영웅들》
  김포를 떠난 항공기가 제주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인근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푸른 바다 위에 떠있는 형형색색(形形色色)의 보석, 제주도가 눈 아래 펼쳐졌다. 한 해 10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파라다이스 섬’이지만, 77년 전 이곳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킬링필드’였다. 1948년부터 1957년까지 9년 동안 도민(島民) 30만 명 가운데 1만5000명이 좌우 이데올로기 틈바구니에서 속절없이 죽어 갔다.
 
 
  논쟁은 현재진행형
 
한철용 장군의 실화소설 《눈》. 제주 4·3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뜻에서 동백꽃을 표지로 했다.
  올해는 제주4·3 발발 77주년, 제주4·3사건특별법 선포 25주년을 맞는 해다. 제주4·3은 좌·우의 시각에 따라 성격 규정이 극과 극으로 갈렸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때는 제주4·3에서 ‘이념’을 빼라 했고, 문재인(文在寅) 정부는 군경의 학살만을 부각해 제주4·3을 ‘국가폭력’이라 규정했다. 제주4·3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토벌작전인가, 북 남로당 지령에 따른 반란 사건인가? 그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국군 777사령부 정보사령관을 지낸 한철용(韓哲鏞·79) 장군이 최근 제주4·3을 소재로 한 실화소설 《눈[目]》(나눔사)을 펴냈다. 부제는 ‘제주4·3사건의 실체적 진실’. 한 장군은 “4·3사건을 민중 항쟁으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 장군은 1946년 제주에서 태어나 오현고와 육군사관학교(26기)를 졸업했다. 베트남전에 백마부대 수색소대장으로 참전했고 이후 육군본부 정보처장, 8사단장, 국군 777사령부 정보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소장으로 전역했다.
 
  한철용 장군의 집은 제주시 구좌읍 김녕해수욕장이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집 마당에 들어서자 유기견 진순이와 그 새끼들이 꼬리를 저으며 마구 짖어 댔다. 2019년 제2연평해전을 소재로 쓴 소설 《유기견 진순이와 장군 주인》의 그 진순이다. 돌하르방 옆으로 하귤(夏橘)이 겨울 볕에 탐스럽게 반짝였다.
 
 
  4·3사건 발발 때 세 살
 
한철용 장군이 제주시 구좌읍 김녕해수욕장이 바라다 보이는 자택에서 제주4·3사건 당시 폭도들이 출몰하던 묘산봉(일명 고살미)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오동룡
  1948년 제주4·3사건이 발발했을 때 한철용은 3살이었다. 그가 사는 김녕은 이웃 북촌리의 너븐숭이 학살사건, 동복리의 굴왓 학살사건 등 인민유격대(山폭도)의 출몰로 주민 희생이 극심한 지역이었다. 한 장군은 이곳 사람들이 ‘고살미’라 부르는 묘산봉(猫山峰·115m)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폭도들이 출몰해 밤에 봉홧불을 올리던 곳”이라고 했다. “마을 한가운데 오름(단성화산)에 폭도들이 봉홧불을 피우면 마을 전체는 공포의 도가니가 됐지요. 그때 아랫동네 김녕리 민보단장 이한정이 김녕경찰지서 망루에 올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인민유격대와 결연히 싸우자는 연설을 하곤 했습니다.”
 
  — 제주4·3사건 실화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2020년 처음으로 《김녕리지(金寧里誌)》가 발간됐는데, 제9장 ‘김녕리와 4·3사건’이란 챕터에 눈길이 멈췄습니다. 40쪽 분량인데, 제주도 사람인 내가 모르는 사건들이 가득했어요. 그 무렵 김영중(金英仲) 전 제주경우회 회장(경찰서장 출신)이 《제주4·3사건: 문(問) 과 답(答)》이란 책자를 보완해 발간했는데, 그걸 읽는 순간 ‘아! 이것도 나에게 4·3사건 관련 소설을 쓰라는 하늘의 계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컴퓨터 앞에 앉아 4년간 자판을 두드렸지요.”
 
  한 장군은 “또 인민유격대 초대 사령관 김달삼(金達三·1925~1950년)의 극비 문서인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를 입수했고, 이 보고서가 4·3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는 열쇠라는 생각에 소설 《눈》의 등뼈로 삼았다”며 “이 극비 문서는 1949년 6월 7일 제2대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李德九·1920~1949년)를 사살했을 때 그의 부관(양생돌)의 배낭에서 획득한 47쪽 분량의 ‘작전상황일지’로, 4·3사건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라고 했다.
 
  — 책 제목을 ‘눈’으로 한 까닭은?
 
  “원래 제주 민요 ‘오돌또기’를 제목으로 하려다, 제주4·3을 외눈박이가 아니라 두 눈으로 똑바로 보자는 뜻으로 ‘눈[目]’으로 했습니다. 4·3사건 희생자를 상징하는 동백꽃을 표지로 했습니다.”
 
  한 장군은 책 머리에서 “전체적으로 볼 때 소설의 대부분이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제주 출신 병사들이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동원돼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는 내용 등 일부는 창작”이라며 “소설의 공간은 제주 전역이 아니라 고향 김녕리와 인근 부락으로 한정했다”고 밝혔다. 또한 “군 장성 출신으로서 4·3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 4·3사건으로 속절없이 희생된 무고한 양민들의 비극이 다시는 여기 ‘평화의 섬’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한밤중에 들이닥친 폭도들
 
  소설은 한철용 장군의 아버지인 김녕리 대동청년단 간부 한재순의 집에 복면한 산폭도가 들이닥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948년 봄, 야삼경에 산폭도들이 ‘재순이 삼춘(아저씨) 이수꽈(있습니까)?’라며 아버지(한재순)를 해치려고 김녕리 남흘동 집에 침입했습니다. 갓 태어난 딸을 안고 있던 어머니(부두순)가 놀라자, 괴한 중 하나가 복면을 벗으며 ‘나양(나요), 우장걸 아덜(아들) 경원이우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훗날 경찰에 체포된 우경원은 제주농업중학교를 나오고 좌익 사상에 빠진 김녕 유일의 인민유격대원이었지요. 어머니는 동네 어르신 우장걸을 아는 터라 ‘지금 삼춘은 아랫동네 친척 집에 제사가 있어 거기에 가서 엇쩌(없다)’라고 했어요. 그날 밤 살아남을 운명인지, 아버지는 제사를 마치고 그곳에서 밤새 친구들과 노름을 했어요.”
 
  — 폭도들의 위협을 받았는데,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않았나요?
 
  “폭도들의 습격에 놀란 어머니는 이튿날 아버지와 상의해 지서가 가까운 아랫동네로 이사 갔지요. 세 살배기였던 내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보리밭길을 걸어 아랫동네로 가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형(한우용)이 한밤중에 대피 훈련을 한답시고 ‘폭도가 침입했다’며 나를 깨워 벽장이나 구들묵(온돌아궁이)에 숨는 연습을 시키곤 했어요. 잠든 나를 수시로 깨우는 바람에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지요.”
 

  — 제주4·3사건 때 고향 김녕리는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나요?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 전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기 전에 이미 김녕리에서는 그동안의 자경단을 해체하고 1948년 경찰의 하부 조직인 민보단(民保團)을 결성했어요. 단장은 이한정이었고, 예하에 2개 대대 250여 명의 민보단원으로 편성됐는데 아버지가 제2대대장이었지요. 이렇듯 김녕리는 민보단 청년들을 중심으로 경찰과 혼연일체가 돼 인민유격대 토벌작전에 임했기 때문에 이웃 북촌리, 동복리에 비해 4·3사건의 피해가 적었습니다.”
 
  — 책을 보니 초등학교 1~2학년 때, 4·3사건을 소설을 써서 무도한 경찰을 고발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더군요.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들이 예쁜 아가씨와 강제 결혼하려고 치근덕거리고, 초가지붕의 닭도 총으로 쏴서 잡아가곤 했다는 등, 어릴 적부터 부정적인 말을 듣고 살았어요. 그런데 1970년 장교로 임관해 군 생활을 하면서 4·3사건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71년 백마부대 28연대 수색대대 소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는데, 양민을 학살하는 베트콩들의 게릴라전이 그 23년 전 제주4·3 때의 인민유격대와 판박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美軍政의 뼈아픈 실책들
 
  — 제주4·3은 막을 수 있었고, 미 군정이 뼈아픈 실책을 범했다고 주장했는데.
 
  “해방 직후 제주 경찰은 불순분자 안세훈(安世勳)과 이덕구 등 핵심 세력 221명을 검거해 수감하고 있었습니다. 미 군정이 채용한 일제강점기의 순사들은 공산주의자 색출에는 단연코 베테랑들이었거든요. 그런데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5·10 총선거를 위해 이들을 석방해야 한다고 미 군정에 권고했고, 이에 따라 윌리엄 딘 군정장관이 1948년 3월 31일 전국의 정치범 3140명을 석방할 때 제주의 핵심 좌익인 221명이 포함됐습니다. 미국이 4·3사건의 참혹한 비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입니다. 석방된 좌익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제주도를 좌경 사상으로 의식화해 나갔습니다.”
 
  — 육지에선 해방 4주 만인 1945년 9월 11일 아널드 소장이 군정장관으로 취임해 미 군정을 실시했는데 제주에선 해방 3개월 후에야 실시됐습니다. 이것도 좌익들이 발호하는 계기가 됐다고 보는 건가요?
 
  “1945년 9월 28일 그린 대령이 인솔하는 항복접수팀이 미군 수송기 C-47을 타고 도착해서, 제주농업학교에서 제주도 주둔 일본군 제58군사령관 도야마 노보루(遠山登) 중장에게 항복 문서를 받아 냅니다. 하지만 제주에서의 본격적인 군정 업무는 그해 11월 10일에야 실시됐어요. 결과적으로 해방 후 거의 3개월간 좌익들의 독무대를 만들어 준 셈이지요. 그렇게 제주에 인민위원회가 설립됐고, 이것이 4·3사건의 온상이 됐습니다.”
 
  — 미 군정은 군인과 말단 경찰까지 불순분자에 대한 즉결처분 권한을 주었는데.
 
  “미 군정은 제주4·3 진압작전 때 야만적인 처형 등 인권 탄압이 없도록 감시·감독했어야 합니다. 1947년 2월 28일 대만에서 2·28사건(대만 원주민 봉기사건)이라는 대학살극이 벌어진 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았어야 하는데, 즉결처분 권한을 준 게 제주4·3 때 도민들의 커다란 희생을 불러왔습니다.”
 
  — 해방 직후 김녕리는 양곡 창고를 부수고 양곡을 탈취하는 사건이 일어날 정도로 민심이 흉흉했는데, 미 군정은 패주하는 일본군이 식량을 폐기하는 것을 방관했다고 적었군요.
 
  “항복한 일본군은 저장해 두었던 엄청난 양의 군량미를 제주비행장에서 휘발유를 뿌려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어요. 30만 제주도민이 4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을 불태운 건데, 미군이 이를 막지 않고 수수방관한 겁니다. 일본군이 양곡을 불태우지 못하도록 막고 그 양곡을 도민들에게 분배해 주었더라면 민심이 그렇게까지 흉흉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민심이 흉흉하니 공산주의의 선전선동이 잘 먹혀든 거죠.”
 
 
  “4·3사건은 공산 폭동”
 
이승진이 본명인 김달삼. 그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 겸 유격대 사령관으로, 제주4·3사건을 주도했다. 1949년 8월 유격대원 300여 명을 이끌고 38선을 넘어 침투해 경북 보현산 일대에서 대한민국 전복 활동을 하다가 6·25전쟁 직전인 1950년 3월 20일 국군에게 사살됐다. 사진=위키피디아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기해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의 총지휘 아래 인민유격대 460여 명이 제주 전역의 경찰지서 24개소 중에서 12개소를 공격해 경찰관 10명과 우익 인사 17명을 살해하는 것으로 4·3사건은 시작된다. 남한만의 단선(單選)·단정(單政)에 반대해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하기 위한 무장 반란이었다. 그동안 경찰에게만 치안 유지 임무를 맡겨 왔던 미 군정은 무장 반란이 일어나자 군까지 투입해 군경이 함께 한라산의 인민유격대 토벌에 나선다.
 
  — 왜 유독 제주도에서 폭동이 일어났을까요?
 
  “해방 직후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인 70%가 공산주의를 선호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공산주의의 정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다’는 선전선동에 속아 그런 성향을 보인 것으로 보입니다. 해방이 되며 일본에 거주하던 5만여 명이 고향 제주도로 돌아옵니다. 특히 일본 유학생과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귀향하는데, 이들은 이미 신사조(新思潮)인 공산주의에 물들어 있었어요. 인민유격대 제1대 사령관 김달삼과 제2대 사령관 이덕구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고 일본 관동군 장교로 근무했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 김일성의 공산 독재가 싫어 월남한 이북 사람들이 육지에는 많았지만 제주에는 드물어서, 공산주의의 실체가 무엇인지 몰랐어요.”
 
  — 소설 부제가 ‘제주4·3사건의 실체적 진실’입니다. 한마디로 4·3사건은 항쟁입니까 폭동입니까?
 
  “공산 폭동입니다. ‘항쟁’은 정의를 위한 저항입니다. 합법적인 공권력에 대항해 먼저 총을 든 쪽을 항쟁이라고 부르지는 않아요. 4·3사건은 남한만의 단선·단정을 반대할 목적으로 인민유격대가 먼저 총을 들고 경찰지서를 습격한 사건입니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도 1998년 11월 미 CNN과의 인터뷰에서 ‘원래 시작은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지만…’이라며 4·3사건이 공산 폭동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공표한 적이 있습니다.”
 
  4·3사건의 성격과 관련, 헌법재판소는 2001년 재판관 전원일치로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고 5·10 총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을 지지하는 공산 무장 세력이 주도한 반란사건”이라고 결론 내렸다.
 
  — 그런데도 일각에선 왜 아직도 끈질기게 ‘항쟁’이라 주장할까요?
 
  “제주4·3사건이 그 1년 전 삼일절 경찰 발포 사건으로 촉발됐고, 또 4·3사건이 중앙당 지시 없이 남로당 제주도당이 단독으로 일으킨 투쟁이라며 ‘항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4·3 무장 반란을 총지휘한 김달삼마저도 ‘4·3사건은 3·1투쟁과 3·10 총파업 투쟁 이후에 정치적 탄압에 저항한 투쟁으로서 삼일절 경찰 총격 사건과는 관계가 없으며, 단선과 단정을 반대할 목적으로 일으킨 투쟁’이라고 ‘투쟁보고서’ 1쪽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 39쪽을 보면 ‘전라남도 도당(道黨)의 올구(조직책) 이(李) 동무의 지시 하에 4·3 무장반격전을 결정하였다’고 실토하고 있어요.”
 
  — 하지만 제주4·3은 삼일절 경찰의 폭력적 탄압이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1960년 4월 11일 마산 부두에 떠오른 고등학생 김주열(金朱烈)의 시신을 보고 4·19혁명이 분출한 것처럼, 감정의 폭발은 사건 직후에 이뤄집니다. 1947년 삼일절 총격으로 6명이 사망한 데 대한 직접적인 반응은 그 직후 3·10 총파업으로 이미 분출했어요. 분노가 1년 후에 폭발하는 법은 없습니다.”
 
 
  오라리 방화사건의 전모
 
1948년 4·3 진압을 위해 5·5 최고수뇌회의 참석차 제주에 온 군정청 수뇌부들. 맨 오른쪽이 김익렬 중령, 그 왼쪽 뒤가 경무부장 조병옥이다. 이날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였고, 김익렬은 해임됐다. 사진=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金益烈) 중령은 미 육군 제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으로부터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라”는 지시를 받고 1948년 4월 28일 구억리초등학교 건물에서 김달삼과 만난다.
 
  — 그 사흘 뒤인 5월 1일 ‘오라리(현 제주시 오라동) 방화사건’이 일어났고, 김익렬은 김달삼과의 소위 ‘4·3 평화회담’이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결렬됐다고 주장합니다.
 
  “그건 오비이락(烏飛梨落)입니다. 오라리 방화사건 이틀 전인 4월 29일 대동청년단 2명이 폭도들에게 납치당했고, 이튿날 30일에는 대동청년단원 부인 2명이 납치당해 1명은 죽고 1명은 살아 돌아왔어요. 죽은 여인(강공부)의 장례식을 5월 1일 오라리 연미마을에서 치렀지요. 이때 참석한 대동청년단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 청년단원 30명이 장례식이 끝난 후 좌익 활동 혐의자 5명의 초가집에 불을 질렀어요. 이를 본 인근 민오름의 산폭도 20여 명이 현장에 내려왔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경찰도 출동했습니다. 경찰과 산폭도 간 교전은 없었으나, 이 과정에서 산폭도의 공격으로 경찰관 모친이 죽고, 경찰의 총에 여인 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것이 오라리 방화사건의 전모입니다.”
 
  — 김달삼의 극비 문서에서는 ‘오라리 방화사건’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던가요?
 
  “‘투쟁보고서’에 의하면, 오히려 5월 1일 인민유격대가 평화회담을 결렬시키는 도발을 자행한 걸로 돼 있어요. 12쪽에 ‘5월 1일 개(경찰) 7명, 반동(청년단원) 2명이 화북리 3구에 침입하여 탄압하는 것을 아(我) 부대원 20명이 포위, 도주하는 개들을 추격, 반동 1명 숙청’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척동자도 결렬의 책임은 인민유격대에 있다고 할 겁니다.”
 
  — 김익렬 중령은 실제로 인민유격대에 우호적 입장이었나요?
 
  “김익렬 중령은 제주 미 군정 지휘관 맨스필드의 지시에 따라 평화회담을 하기 전, 비밀리에 9연대 대대장 오일균(吳一均·공산당 세포책임) 소령을 대동하고 김달삼을 만났어요. 김달삼의 극비 문서 ‘투쟁보고서’ 41쪽에 2회에 걸쳐 ‘적장(賊將)’을 만났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어요. 평화회담 목적은 평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온데간데없고 기껏 합의 본 사항이란 게 ‘4·3 구국항쟁의 정당성 인정’이고 ‘경찰 불법성에 대한 의견 일치’였습니다. 국군 연대장이 적장을 만나 이러한 합의를 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이지요. 더 충격적이게도 김익렬은 교전 중인 적인 인민유격대에게 카빈 실탄까지 제공했다고 김달삼의 ‘투쟁보고서’엔 나옵니다.”
 
1948년 5월 6일 제9연대장으로 부임한 박진경(맨 오른쪽) 중령이 작전에 참여한 연대 참모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1920년 경남 남해에서 출생한 박 대령은 제주도 지리를 잘 알고 영어가 능통해 미군의 신뢰가 높았다. 남로당 무장대와의 평화협상과 소극적 진압을 해온 김익렬과 달리, 박진경은 선무공작과 아울러 적극적 진압작전을 펼쳐 유격대를 산속으로 몰아넣어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진=박철균 제공
  1948년 5월 5일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이 주재하는 긴급 대책회의가 제주 미 군정청 사무실이 있는 제주중학교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익렬은 ‘경찰의 기강이 문란해 진압작전에 지장이 많으니 제주도경의 지휘권을 내게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김익렬이 평소 남로당 유격대에 유화적이라는 보고를 받고 있던 조병옥(趙炳玉·당시 경무부장)은 ‘경찰을 중상모략하기 위한 허위 조작’이라며 맞서, 두 사람 사이에 멱살잡이가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김익렬은 이튿날 전격 경질되고 후임으로 박진경(朴珍景) 중령이 임명됐다.
 
  — 좌파들은 왜 김익렬 중령을 의인(義人)으로 칭송하고 박진경 대령을 악마화하는 겁니까?
 
  “김익렬 중령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을 막겠다며 소위 ‘평화회담’을 하고 토벌도 제대로 하지 않아, 폭도들의 입장에선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은 ‘의인’이죠. 반면 박진경 대령은 선무공작(宣撫工作)과 아울러 진압작전을 강도 높게 실시해 불순분자 5000여 명을 체포했으니 ‘악마’로 부를 수밖에요.”
 
 
  초토화작전과 즉결처분
 
  1948년 6월 17일 연대장 박진경 중령 암살에 이어 9연대 병력 41명이 집단 탈영해 입산(入山)하고, 연이어 남로당 프락치 고승옥(高升玉) 상사가 부하 7명을 동반해 입산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미 군정은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토벌작전을 전개한다. 10월 17일 군과 경찰은 인민유격대와 주민을 분리하는 ‘초토화(焦土化)작전(scorched-earth policy)’을 펼친다. 해안으로부터 5km 밖의 소위 중산간마을의 주민을 해안으로 소개(疏開)하고 마을은 불을 질러 전부 태워 버리는 작전이었다. 11월 17일 계엄령 선포와 맞물려 초토화작전을 강력하게 전개하면서 무고한 희생자가 엄청나게 발생했다.
 
  — 그렇다면 토벌작전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했을까요?
 
  “토벌군의 초토화작전은 꼭 필요한 전술이었습니다. 다만, ‘초토화작전’과 ‘초토화’는 개념이 다릅니다. 가옥에 방화(放火)해 소실시키는 것은 같지만, ‘작전’ 개념으로는 주민들을 먼저 안전하게 소개한 후에 방화하는 것이고, 작전이라는 개념이 없으면 산폭도들처럼 방화하고 동시에 사람까지 살상하는 것이죠. 2연대 함병선(咸炳善) 연대장은 선무작전으로 하산한 주민들을 갱생원(집단피난수용소)에 수용해 하산 주민이 늘어나도록 하는 등 모범적인 초토화작전을 펼쳤어요.”
 
  — 군경이 좀 더 신중했어야 하는데 속전속결식, 군경 편의식 작전을 한 건 아닌가요?
 
  “군경은 중산간 지역에서 농사를 짓거나 마소를 방목하는 등으로 당장 소개에 응하지 않은 주민을 불순분자로 간주해 그 자리에서 처형했어요. 또한 군경이 두려워서 자연동굴 속에 잠시 피신해 있던 사람까지 공산 인민유격대와 연결된 불순분자로 간주해 처형했고요.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양민은 처형하는 게 아니라 일단 체포해 격리하고 집단 수용한 다음에 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군경의 편의대로 현장에서 즉결처분한 겁니다. 당장 대식구를 거느리고 해변 마을로 가라는데, 솥단지 하나 없이 어떻게 살라는지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소개부터 한다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너븐숭이·굴왓 양민학살사건
 
조천읍 북촌리에 있는 ‘너븐숭이 4·3 기념관’. 기념관 앞 옴팡밭은 1949년 1월 17일 북촌초등학교에 모인 마을주민 1000명 가운데 270명을 학살한 현장이다. 사진=오동룡
  한철용 장군은 4·3사건 토벌작전 중 군인들이 벌인 가장 부끄러운 토벌작전으로 조천면 북촌리 너븐숭이 양민학살사건과 이웃마을 동복리 굴왓 양민학살사건을 꼽았다. 그는 “특히 초급장교들에게 생명 존중과 인권 중시 등 휴머니즘(인류애) 교육을 확실하게 하지 않은 결과로 무고한 양민을 집단으로 총살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했다.
 
  1949년 1월 17일 인민유격대의 북촌리 매복작전으로 목숨을 잃은 4명의 부하의 시신을 목도한 젊은 중대장이 이성을 잃고 만다. 전날도 이웃마을 동복리에서 무장대의 매복에 걸려 4명의 부하를 잃어 독기가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어제는 이성을 잃지 않고 참고 또 참고 있었는데 오늘 또다시 4구의 부하 시신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은 중대장은 부하들을 출동시켜, 집합한 북촌리와 동복리 주민에게 복수극을 벌인다. 이것이 북촌 너븐숭이와 동복 굴왓 양민학살사건이다.
 
  뒤늦게 2연대(연대장 함병선) 3대대장 정준철 대위가 달려와 총살 중지 명령을 내려서 그나마 추가 총살은 막을 수 있었다. 북촌초등학교에 모인 마을 주민 1000명 가운데 270명이 처형당했는데, 4·3사건 기간중 마을 단위로 단 하루 동안의 희생자 수에서 최다 희생 기록이다.
 
  — 안타까운 사건이군요.
 
  “북촌초등학교에 모인 약 400가구의 북촌리 마을 주민 1000명 가운데 군경 가족, 공무원 가족을 제외한 270명이 처형당했지요. 먼저 민보단장을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하고, 민보단원 19명을 우선 처형했어요. 2개 소대 병력이 대검을 꽂고 마을 주민을 학교에 비치한 장대 2개를 연결해 40명씩 잘라 내어 ‘함덕으로 소개하려고 격리하는 것’이라 속여 함덕 방향의 너븐숭이로 끌고갔어요. 너븐숭이에 다다르자 옴팡밭(움푹 들어간 밭)으로 주민들을 밀어넣은 다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을 난사해 학살하기 시작했어요. 너븐숭이에서 처절한 주민 처형을 벌이고 있을 때, 1개 소대는 마을로 내려가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라 독려하면서, 횃불을 들고 다니며 초가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고요. 주민도 죽이고 집도 불태우는 천인공노할 ‘초토화’를 수행한 겁니다.”
 
  — 너븐숭이박물관에는 죽은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 아기의 유화가 있습니다.
 
  “너븐숭이 학살사건에서 가장 슬픈 장면입니다. 군인들이 군경이나 공무원 가족을 분리하려 할 때,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이장에게 눈감아 달라며 그쪽 줄로 갔어요. 이때 아기를 안고 있던 한 젊은 아낙이 교문 쪽에서 공무원 가족 모인 쪽으로 줄달음을 치다 경계병이 쏜 총에 맞아 그 자리에 쓰러졌어요. 아기는 엄마가 누워서 젖을 먹이려는 것으로 착각하고 엄마의 젖을 빨기 시작했고요. 1조 40명씩 순서대로 8조가 처형장을 향해 교문을 나설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었는데, 그때까지 아기는 죽은 엄마의 젖을 빨고 있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의 젖이 식어 가는 걸 느꼈겠지만, 그게 엄마의 죽음이란 걸 아기는 몰랐을 거예요. 땅거미가 질 무렵, 아기 엄마의 시신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지만 아기는 사라졌어요. 학살을 면한 부부가 자식이 없는 동생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북촌초등학교로 달려가 젖먹이를 구출해 간 거죠.”
 
  — 북촌리 마을 주민 1000명 가운데 750명 정도가 처형 대상이었는데, 중단시키지 않았더라면 더 끔찍한 결과가 나올 뻔했습니다.
 
  “경험이 많고 합리적인 정준철 3대대장이 마침 제주읍내 토벌작전 회의에 참석하느라 함덕리 소재 대대본부에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참극입니다. 한재원 대동청년단장이 정준철 대대장에게 ‘북촌리에 큰일 났다. 빨리 와달라’고 요청했고, 정준철은 전화를 끊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려와 권총을 뽑아들고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이놈들아, 누가 죄 없는 주민을 죽이라고 했어? 중대장 어디 있어?’라며 제지했습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학교 운동장에 남은 500여 명도 모두 학살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지옥문 앞에까지 갔던 8조 40여 명의 주민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구세주 대대장이 나타나 기적적으로 살아났고요.”
 
 
  제주도민의 ‘생존법’
 
  당시 8조에 속했던 9세 소녀 고완순(86) 전 제주노인회장은 2019년 6월에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를 찾아 ‘제주4·3 유엔 인권 심포지엄’에 참석해 사건을 눈물로 증언했다. 그녀는 남동생과 이모 등 6명의 가족을 잃었고, 북촌리 4·3 희생자 유가족 대표다. 그녀는 “옴팡밭에는 이미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고, 붉은 피가 흘러 흙은 까만색으로 변해 있었다. 겨울철이라 흥건하게 흐른 피가 살짝 얼어서 햇빛이 비치자 유리처럼 빛났고, 햇빛이 구름에 가리면 없어졌다가 또 해님이 나오면 유리처럼 빛나기가 반복되었다”고 처형 직전에 본 참상을 설명했다.
 
  — 동복리 굴왓 학살사건도 같은 날에 벌어진 거죠.
 
  “너븐숭이 학살사건과 같은 날인 1949년 1월 17일, 동복리에서도 86명의 양민을 집단으로 학살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전날 1월 16일 월정리를 향해 달리던 군용 차량이 개여물동산에서 인민유격대의 매복공격을 받아 군인 4명과 민간인 1명이 죽습니다. 이튿날 아침 또 인민유격대가 북촌리 어귀 마가리동산에서 매복작전으로 군인 차량에 탄 4명을 죽입니다. 북촌리 매복 지역을 수색하던 1개 소대가 동복리에 투입돼, 가가호호 방문해 주민들을 ‘굴왓’밭에 집합시킵니다.”
 
  — 이때 불길함을 느낀 사람들은 숨거나 도망치지 않았을까요?
 
  “학살사건 전날, 김건상이라는 어린이가 아버지와 함께 소를 몰고 밭으로 가다 폭도들이 군인들을 습격하러 가는 것을 보고, ‘아부지, 저것들 산폭도 담쑤다(같습니다). 모수완 죽어지쿠다(무서워 죽겠습니다)’라고 하자, 아버지는 ‘얼굴을 돌리지 말고 못 본 척하고 앞만 보고 걸어라. 만약 우리가 마을로 내려가면 우리가 신고하는 줄 알고 죽일 것’이라 했어요. 이게 당시 제주도 사람들의 생존법이었습니다. 학살 당일 김건상 가족은 군인들이 집합시킨다는 소식을 듣고 온가족이 밭으로 달아났고, 집에서 쉬고 있던 농부와 물질하는 해녀들만 영문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지요.”
 
  한철용 장군은 “단지 폭도 가족이라거나 폭도들에게 쌀을 주었다는 이유로 군경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이것은 관계없는 사람에게 연대(連帶)책임을 물은 것”이라며 “이런 일들 때문에 제주4·3사건의 ‘공산 폭동’이라는 실체가 규명되지 못하고 좌파 단체들의 목소리만 커졌던 것”이라고 했다.
 
  “내 외가 동복리는 군인들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완전히 초토화되어 고즈넉했던 어촌마을이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아요. 이날 북촌리와 동복리에서 한날한시에 무고하게 죽은 300여 명(북촌 약 300명, 동복리 86명)의 제사가 한날한시에 서로 이웃마을에서 거의 모든 집마다 모셔집니다. 제수품(祭需品)도 보잘것없고 다들 제사라 서로 돕지도 못하는 까닭에 제사가 초라해서 까마귀조차 모를 정도라는 뜻에서 ‘가메기(까마귀) 모른 식께(제사)’라고 합니다.”
 
 
  목사를 산 채로 매장
 
제주도의 첫 순교자인 이도종 목사(1892~1948). 예배를 인도하러 가다 순교한 제주 대정교회에는 교인들이 직접 순교지인 산방산 돌을 캐와 세운 순교기념비가 서있다. 사진=제주일보
  — 제주도 출신 이도종(李道宗) 목사는 선교 활동을 하다 폭도들에게 살해당하면서 제주의 1호 순교자가 됐습니다.
 
  “이도종 목사(당시 56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 발각돼 투옥돼 옥고를 치르는 바람에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었어요. 목회 활동을 하면서 마을마다 다니며 반공 강연을 하기도 해서 공산주의 좌익 세력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지요. 1948년 6월 16일, 이 목사는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대정면 인성리 대정교회를 향해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길목을 지키고 있던 산폭도들에 의해 산 채로 매장당했습니다. 폭도들은 일본군이 파놓은 가슴 깊이의 개인 산병호(대피호)에 이 목사를 밀어넣었다고 해요. 자갈흙이 배꼽까지 차오르자 이 목사는 회중시계와 성경책을 폭도들에게 주며 ‘예수를 믿어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습니다. 폭도 두목은 성경책은 그 자리에서 던져 버리고 회중시계만 챙겼습니다. 얼마 후 체포된 폭도가 회중시계를 갖고 있는 것을 수상히 여긴 경찰의 심문에 폭도가 이 목사 살해를 자백한 거죠. 경찰이 폭도 일당이 진술한 매장 장소에 가서 산병호를 파보니 이 목사가 꿇어앉아 기도하는 자세로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 폭도들은 김녕리 이웃마을인 월정리를 습격해 태아까지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1948년 10월 18일 밤 10시경, 폭도 10여 명이 300여 호가 사는 김녕리 동쪽 이웃마을 월정리를 습격했어요. 침입한 무장대는 먼저 월정리 공회당에 불을 질러, 새빨간 불길이 새까만 밤하늘을 타고 오르자 ‘불이야! 불!’이라며 악을 쓰고 다녔습니다. 초가집에 ‘줄불’이 붙는 것을 막으러 불을 끄러 나오면 죽창으로 찔러 죽이려는 속셈이었죠. 이들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박 이장 집을 급습해 박 이장 장모의 입을 틀어막고 고팡(고방)을 털기 시작했어요. 박 이장의 젊은 부인은 막내아들 박서동의 손을 잡고 한쪽 팔에는 두 살 난 딸 매화를 안고 돗통시(돼지우리)로 뛰어들었어요. 폭도들은 돗통시까지 따라 들어와 이장 딸 매화와 임신한 아내를 죽창으로 살해하고는, 뱃속 태아까지 꺼내 날카로운 일본도로 찔렀습니다. 6살의 박서동은 어머니가 돼지우리 안쪽으로 깊이 밀어넣었는데 박서동과 어머니 사이에 돼지가 비집고 들어와 눕는 바람에 눈에 띄지 않아서 살 수 있었고요. 폭도들이 떠난 후 어머니와 여동생의 시신을 방안에 나란히 뉘고 외할머니(박 이장 장모)는 울부짖었고, 시신에서 피가 밤새 빠져도 마르지 않았는데 그것은 태아의 피였지요. 박서동의 외할머니는 ‘니네 어멍(엄마) 창 맞은 자국이 서른여섯 곳이었져, 이놈아! 이걸 이지면(잊으면) 안 된다’고 생전에 넋두리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박서동이 6살 때 겪은 사연은 1988년 월간 《관광제주》 10월호와 11월호에 실렸습니다.”
 
 
  숟가락을 군복에 꽂고 다닌 이덕구
 
이덕구 체포(사살)작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 문창송 전 화북지서장이 1995년 소책자로 발간한 《한라산은 알고 있다》와,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영인본 10~11쪽. 보고서는 김달삼이 남로당 대표자회의에서 자신의 업적을 홍보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사진=한철용
  김달삼은 4·3폭동을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1948년 8월 열린 남로당 대표자대회에서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국회의원 해당)이 되려는 야심을 가진 김달삼은 8월에 월북해 다시는 제주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도 남로당 대표자대회에서 자신의 업적을 홍보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었다. 중앙 진출의 꿈이 있었기 때문에 제주 인민유격대 지휘를 내팽개치고 야반도주한 것이다.
 
일신상업학교 재학시절의 이덕구 제2대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1948년 8월 21일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러 간 뒤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 직책을 이어받았다. 1949년 6월 한라산에서 경찰과 교전하다 사살됐다. 사진=위키피디아
  — 인민유격대 제2대 사령관 이덕구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제2대 인민유격대장이 된 이덕구는 관동군 소위 출신입니다. 체육 교사로 작고 야무진 키에 일본 시절에 기모노를 입고 6촌짜리 단도(短刀)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덕구가 사령관이 된 후에 대한민국에 선전포고하는 등 강력한 군사활동을 전개했으나, 군경의 토벌작전이 강화되자 무장대의 활동이 위축되기 시작합니다. 1949년 6월 7일 화북경찰지서장 문창송 경위(《한라산은 알고 있다》의 저자)의 지휘로 이덕구 사살과 일당 체포에 성공했는데, 그의 부관의 배낭에서 김달삼이 작성한 ‘투쟁보고서’가 발견됩니다.
 
  경찰은 이덕구의 시신을 제주 옛 관아인 관덕정(觀德亭) 앞 경찰서 정문에 십자가 나무에 묶어 전시했어요. 내 베트남 전우인 제주제일고 출신 (고두승)이 당시 엄마 등에 업혀 보았다는데, 머리는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왼쪽 윗주머니에 숟가락 하나가 꽂혀 있었다고 해요. 현기영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도 이덕구가 위생 관념이 철저해 군복 왼쪽 가슴에 숟가락을 늘 꽂고 다녔다고 합니다.”
 
  — 이덕구의 가족은?
 
  “1948년 12월 26일 이덕구의 가족과 친인척 20여 명이 화북에 있는 별도봉에서 무더기로 처형됐습니다. 처형 대상에는 이덕구의 7살 된 어린 아들도 포함돼 있었지요. 그 아들은 신구범(愼久範) 전 제주지사(작고)와 초등학교 동창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교실에서 보이지 않았다고 해요.”
 
 
  제주 젊은이들이 해병대 자원입대한 까닭은
 
1951년 6월 19일 무렵, 강원도 양구와 인제 사이에 있는 도솔산(해발 1148m) 전적지를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 이 대통령은 제주 출신 해병 1연대에 ‘무적해병(無敵海兵)’이란 휘호를 하사했다. 맨 오른쪽은 손원일 해군총참모장. 사진=연합뉴스
  육지에서 6·25전쟁이 발발하고 동시에 제주도에서 인민유격대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군경은 제주 젊은이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제주도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해병 3, 4기생으로 자원 입대했다.
 
  한철용 장군은 “김녕리에서는 무려 60명의 청년이 지원했으나 신체검사에서 탈락하고 17명밖에 선발되지 못할 정도로 신체검사가 까다로웠다”면서 “1950년 9월 1일 해병 3, 4기 3000명이 제주읍 산지항에서 상륙함 LST에 분승해 출항했다”고 했다.
 
  해병 3, 4기 3000여 명은 해병 제1연대로 편성됐다. 초대 해병 상륙제1연대장은 김대식(金大植) 해병대령(해병대사령관 역임)이다. 제주 출신으로만 편성된 해병 제1연대는 훗날 ‘대한민국 무적(無敵)해병 제1사단’의 모체가 된다. 그렇게 선발된 제주 출신 해병대 인원들은 도솔산 전투, 인천상륙작전, 수도 서울 탈환작전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 제주도 출신 해병대원들의 사기와 전투력은 어땠습니까?
 
  “1951년 6월 해병 제1연대는 강원도 양구와 인제 사이에 있는 도솔산(1148m) 전투에 투입돼 북한군 12사단과 격전을 벌입니다. 도솔산 전투 승리로 해병 제1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이때 특이하게도 통신중대장 이판개 대위가 동성무공훈장을 받습니다. 원래 통신병과는 전투부대가 아니어서 훈장을 받는 게 매우 이례적이에요. 이판개 대위가 동성무공훈장을 받은 것은, 통신을 ‘제주어(語)’로 해서 완벽한 통신 보안을 달성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사투리 통신’이죠. 결국 제주어가 받은 훈장인 셈이죠.”
 

  — 제주4·3 희생자 숫자가 2만5000~3만 명이라는 설이 있는데, 정확한 희생자 수는 얼마나 되나요?
 
  “희생자 2만5000~3만 명 설은 거짓입니다. 4·3 희생자는 공식적으로 최대 1만5000여 명입니다. 제주4·3위원회에서 희생자로 확정한 숫자는 총 1만4871명(2024년 8월 12일 현재)입니다. 세분하면 사망자 1만606명, 행방불명 3,708명, 후유장애 222명, 수형(受刑) 335명입니다. 이것은 2000년부터 23년 6개월 동안 제주도 당국이 심혈을 기울여 심층조사한 결과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8년 제70주년 4·3사건 희생자 추념식에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인 3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언급했는데, 일국의 대통령이 희생자 숫자를 거의 두 배로 부풀려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희생된 우익 인사는 몇 명이나 됩니까?
 
  “인민유격대의 공격으로 희생당한 우익 인사는 1885명입니다. 이 중 군경 희생자는 총 351명으로, 군인이 160명이고 경찰이 191명입니다. 4·3 희생자 총 1만4871명에서 우익 희생자 1885명을 뺀 1만2886명이 군경에 의한 희생자가 됩니다. 여기에 육지 형무소에 수용돼 있다가 6·25전쟁 때 북으로 넘어가거나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이 약 1000명으로 추산되고, 또 4·3사건 기간 동안 군경과 전투 중에 사살된 인민유격대가 약 1000명으로 추정되니, 이 인원을 빼면 군경에 의한 무고한 희생자는 약 1만1000명 정도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 제주4·3사건 이후로도 오랫동안 제주 젊은이들은 연좌제(連坐制)로 고통당했는데, 장군님은 연좌제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나요?
 
  “제주도의 연좌제는 단지 4·3사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일본 거주 교포 중 조총련에 관련된 사람과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으로 북송된 사람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연좌제의 피해는 상상 이상이었지요. 연좌제에 걸리면 농사 등 1차산업밖에 종사할 수 없고, 그 밖에는 일반 회사에 취직하거나 자영업을 하는 게 고작이었죠. 나도 1980년 연좌제가 폐지될 때까지 큰 고통을 겪었어요. 일본에 살던 이복형이 북송되는 바람에 1976년부터 소령 진급에서 두 번이나 누락돼, 1978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 가까스로 소령에 진급할 수 있었어요. 4·3사건으로 인한 연좌제는 제주도 젊은이들에게 청운(靑雲)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질곡(桎梏)이었습니다.”
 
 
  “희생자들은 대한민국 건국의 공로자”
 
한철용 장군은 “4·3사건은 미화해서도 안 되고, 더군다나 4·3의 역사를 날조해서도 안 된다”면서 “먼 훗날 4·3사건과 관련 없는 후손들이 객관적으로 4·3사건을 평가할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사진=오동룡
  — 4·3사건으로 인해 제주에서 육지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감정이 생기지는 않았나요?
 
  “제주는 역사적으로 1273년 삼별초(三別抄)의 난, 1374년 목호(牧胡)의 난 등 이미 관군(官軍)에 의해 희생을 많이 겪은 섬입니다. 제주4·3사건 때는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요인이 돼 애먼 제주 사람들이 많이 희생됐고요. 육지의 토벌군, 즉 서북청년단과 군경에 의해 제주도민이 많이 희생됐다는 점에서 삼별초의 난, 목호의 난과 판박이입니다. 이러한 피해의식이 배타적 정서로 바뀌어, 타지 사람을 ‘육지놈’이라 부르고 4·3을 미화하는 심리가 제주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 4·3의 앙금이 해소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김녕뿐만 아니라 제주도는 군경은 물론 민간인들끼리 고자질해서 죽인 경우도 많아, 서로 원수지간으로 얽힌 집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4·3평화공원을 조성하고 해마다 희생자 추모 행사를 거행하는 것은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을 애도하는 것이지, 사건 주모자인 인민유격대를 추모하는 것이 아닙니다. 4·3사건 그 자체를 추모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화해는 서로가 잘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할 때 성사되는 겁니다.”
 
 
  대한민국 건국의 공로
 
  — 제주4·3사건을 ‘민중항쟁’으로 부르는 것은 ‘무고한 수많은 희생자와 그 유족들을 모욕하는 처사’라고 했더군요.
 
  “공산주의자로 몰려 떼죽음을 당한 희생자들의 99%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제주4·3사건의 성격은 두 가지로 규정해야 합니다. 4·3은 ‘4·3 공산 폭동 양민학살’ 사건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의 무장 폭동이고, 다른 하나는 군경의 강경 진압으로 무고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참사입니다. 무고한 양민의 희생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희생으로 인해 인민유격대가 고립되어 마침내 군경이 유격대를 일망타진할 수 있었습니다. 어항의 물(희생자)이 없어지면서 고기(인민유격대)가 말라죽은 셈이죠. 그런 의미에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은 대한민국 건국의 공로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책 표지에 4·3 희생자를 상징하는 동백꽃을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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