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삶은 오직 북한 인권을 위해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 “2030세대, 통일에는 관심 덜하지만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그 어떤 세대보다 관심 많아”
⊙ “정치인들은 ‘말로만 진보’… 진정으로 인권 중시한다면 北인권 관심 가져야”
⊙ “부모님은 ‘우리 딸이 북한 인권을 위해 힘쓰고 있다’고 자랑”
⊙ 美 트럼프의 보조금 집행 중단으로 북한인권단체들 존립 위기
요안나 호사냑(Joanna Zenona Hosaniak)
1974년생. 폴란드 바르샤바대 한국어문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국제학 박사 / 前 외환은행, 주 폴란드 한국 대사관, 헬싱키인권재단 등 근무. 現 북한인권시민연합 부국장 겸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 “2030세대, 통일에는 관심 덜하지만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그 어떤 세대보다 관심 많아”
⊙ “정치인들은 ‘말로만 진보’… 진정으로 인권 중시한다면 北인권 관심 가져야”
⊙ “부모님은 ‘우리 딸이 북한 인권을 위해 힘쓰고 있다’고 자랑”
⊙ 美 트럼프의 보조금 집행 중단으로 북한인권단체들 존립 위기
요안나 호사냑(Joanna Zenona Hosaniak)
1974년생. 폴란드 바르샤바대 한국어문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국제학 박사 / 前 외환은행, 주 폴란드 한국 대사관, 헬싱키인권재단 등 근무. 現 북한인권시민연합 부국장 겸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 사진=조준우
“이번이 제 마지막 인터뷰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후회 없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서울 서대문구 북한인권시민연합(NKHR) 사무실에서 만난 요안나 호사냑(Joanna Zenona Hosaniak·51) 부국장은 밝은 미소로 기자를 맞이했지만,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폴란드 출신인 푸른 눈의 이방인으로 지난 22년간 북한인권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워 온 그는 이제 그 여정을 마무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서있었다.
배우를 꿈꿨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호사냑 부국장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지난 시간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국제회의장 안팎을 누비며 북한 인권 문제를 알렸던 활동가,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달려온 시간들. 하지만 지금 그는 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기로에 섰다는 것일까?
지난 3월 5일, 북한 인권을 위해 청춘을 바친 한 활동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뜻밖에도 유창한 한국어로 기자를 반갑게 맞아 준 그는, 마치 오래 품어 온 이야기들을 이제야 꺼내는 듯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호사냑 부국장은 고향인 폴란드의 바르샤바 대학을 졸업했다. 그가 전공한 학과는 원래 ‘북한어문학과’였지만, 1989년 폴란드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한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한국어문학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나간 날에 후회 없어”
졸업 후 그는 주 폴란드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했지만 외교관이 아닌 인권 활동가의 길을 선택했다. 폴란드 내 헬싱키인권재단에서 일하던 2003년, 북한 인권 문제에 눈을 뜬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한국행을 택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과 함께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 어느덧 22년째. 타국에서의 긴 세월이 외롭지는 않았을까?
— 한국에 온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폴란드가 그립거나 고향을 떠나온 것이 후회되진 않았나요?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폴란드가 남아 있습니다. 친구들, 가족, 특히 여동생이 그리울 때도 많죠. 하지만 제 삶은 이제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20년 넘게 북한 인권 문제에 집중하며 살아왔으니까요. 만약 갑자기 이곳을 떠나게 된다면 오히려 한국을 더 그리워하게 될 것 같습니다.”
— 저는 2001년생인데, 선생님께서 한국에서 생활하신 시간이 제 나이와 비슷하군요.
“참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죠. 지나간 날에 대한 후회는 없습니다.”
— 한국어를 전공했다고 들었는데, 남북한 언어의 차이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로 북한이탈주민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때때로 생소한 북한어 표현이 등장합니다. 오랜 경험을 가진 팀원들도 처음 듣는 단어들이 나올 때가 있어요. 특히 북한에서 사용되는 기관명이나 직책 같은 단어들은 남한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들에게 직접 원래 표현을 확인해야 하는 경우도 있죠.”
— 예를 들면?
“예를 들어 피해자가 ‘전거리교화소’에서 생활했다고 했는데, 처음에는 그 표현이 생소했습니다. 알고 보니 함경북도 회령시 전거리(全巨里)에 있는 ‘12호교화소’ 이름이었어요. 반대 사례로, 북한에서는 주로 동구권의 외래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양의 아파트 건설부대에서 일했다는 한 탈북자가 ‘타츠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시멘트를 섞는 기계를 뜻하는 폴란드어라서 나는 얼른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도 폴란드어에서 유래한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죠.”
— 폐쇄적인 북한에서도 외래어가 쓰이는군요.
“네, 공산품 같은 게 들어오면서 외국어 이름이 그대로 정착한 겁니다. 또 북한의 감옥에서는 수감자들끼리만 통하는 독특한 은어(隱語)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화장실을 마음대로 갈 수 없기 때문에 손가락 다섯 개를 펴면 ‘화장실 가고 싶다’는 뜻인 식이죠. 그들만의 생존 방식이자 비밀스러운 언어 체계입니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던 북한 교수
폴란드는 1952년부터 1989년까지 사회주의 국가였다. 호사냑 부국장은 공산 폴란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초등학생 시절, 북한처럼 배급을 받기 위해 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섰던 기억이 난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또 “1942년생인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을 직접 겪은 분”이라며 “전쟁이 한창이던 때, 할아버지와 함께 숲속에 숨어 지냈다고 들었다. 그런 아버지는 내가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처음에는 원치 않았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K-팝과 한류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딸이 한국어문학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자연히 걱정 어린 시선으로 호사냑씨를 바라봤다.
“사실 폴란드 사람들은 한국보다 북한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알려지지 않은 북한이라는 나라에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생겼어요. 원래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대학 진학을 고려할 무렵 폴란드가 민주주의 사회로 변화하기 시작했죠. 친구들은 변화하는 사회에 맞춰 경제학이나 법학을 선택했어요.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일본을 다녀온 후 ‘경제가 발전하는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처음엔 일본어학과에 지원할까도 했지만 결국 한국어문학과를 선택하게 됐어요.”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자 예상치 못한 현실이 펼쳐졌다. 교수진 대부분이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당시 학생들에게 존경받던, 북한에서 온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나는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종종 말씀하셨죠. 하지만 북한에 가족이 있었기에 결국 귀국했는데, 며칠 후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 화가 나서 대학을 방문했습니다. 그 교수님이 망명을 했다는 헛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에요. 그 일이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북한 인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죠.”
이후 그는 외환은행과 주 폴란드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지만,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북한 인권은 단순한 정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폴란드가 민주화를 거쳐 변화를 맞이한 것처럼 언젠가 북한에도 자유와 변화의 바람이 불기를 바랍니다.”
어머니, “열정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북한 인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호사냑씨는 헬싱키인권재단에서 근무하며 인생의 전환점이 된 인물을 만났다. 바로 북한 인권 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린 인권운동가 고(故) 윤현(尹玄) 북한인권시민연합 명예이사장이다. 2004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에 진행기획자로 참여한 호사냑씨는 행사를 마칠 때쯤, 주최 단체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의 윤 이사장이 “한국에 와서 일해 보겠느냐”고 물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윤 이사장의 제안을 들은 호사냑씨는 집에 돌아가 그날로 짐을 싸고, 한 달간의 비자 발급 절차를 마치자마자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 윤현 이사장과의 인연이 각별하다고 들었습니다.
“윤 이사장님은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1960년대부터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해 온 1세대 인권운동가입니다. 나는 헬싱키인권재단에서 근무할 때 처음 윤 이사장님을 만났어요. 북한 인권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내 뜻을 부모님도 존중해 주셨고, 한국행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셨죠. 특히 어머니는 ‘열정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내 선택을 응원하셨어요. 이제는 부모님도 주변 분들에게 ‘우리 딸이 북한 인권을 위해 힘쓰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답니다.”
— 헬싱키인권재단은 어떤 단체인가요?
“폴란드가 공산주의 체제였을 당시 지하에서 활동하던 민주화운동가들이 체제 전환 후 공식적으로 설립한 단체입니다. 단순히 인권운동가뿐만 아니라 의사, 간호사, 법조인 등을 대상으로 민주주의 교육을 진행하고 주요 정보를 전파하는 역할을 해왔어요. 핵심적인 교육 내용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법’이었습니다. 권리를 지키지 않는 인권운동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北체제 붕괴 후 ‘과도기 正義’, 한국에서 미리 대비해야”
호사냑씨는 학문적으로도 깊은 연구를 이어 왔다. 고려 청자 문양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2016년에는 동유럽 구(舊) 공산권 국가들의 ‘과도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일명 전환기 정의)’ 제도를 비교한 논문으로 서강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로도 과도기 정의에 관한 연구를 심도 있게 진행해 왔다.
— 과도기 정의가 무엇인가요?
“과도기 정의란,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진 후 과거 인권 침해를 바로잡기 위해 특별한 법과 기관을 설립하는 과정입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기록을 확인하고, 잘못된 정보를 정정하고,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죠. 또한 인권 침해 가해자의 정치·공적 활동을 제한하는 조치도 포함됩니다.”
— 폴란드의 과도기 정의 과정을, 비슷한 과도기를 겪은 독일이나 체코와 비교하면?
“독일과 체코는 비교적 신속하게 청산을 진행해 사회적 혼란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폴란드는 이들 나라들에 비해 과거 청산 과정에서 갈등이 더 심했고 정치적 논란이 지속됐습니다.”
— 북한의 경우, 과도기 정의를 강조하면 기득권층이 민주화와 자유화를 더욱 거부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인권 침해 피해자가 많고 그 정도도 극심했기 때문에,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에는 정의 구현 요구가 강하게 분출될 겁니다.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며, 북한 내 피해자 단체와 협력해 정의 구현을 위한 법과 기관을 설립해야 합니다. 만약 과거 청산이 지연되면 사회적 분열이 장기화될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발빠른 대처가 필요하겠네요. 지금 당장 준비해도 늦은 것 아닐까요?
“맞습니다. 그러나 북한 내부에서는 준비가 어렵기 때문에 한국에서 미리 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재 북한인권시민연합을 비롯한 몇몇 단체들이 이 문제를 위해 협력하고 있습니다.”
“숱한 어려움과 협박에 시달려”
호사냑씨는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연구와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 오고 있다. 2024년,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발간한 〈메이드 인 차이나: 글로벌 공급망이 어떻게 북한 교화소의 노예제를 부추기는가〉 보고서는 북한의 참혹한 인권 실태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그는 특히 이 보고서를 통해 중국에서 북송된 여성 탈북민들이 집중 수용된 함경북도 ‘전거리12호교화소’의 강제노동 실태를 구체적으로 폭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거리교화소는 연간 약 1000명의 여성 수감자를 수용하며, 약 10개의 생산작업반을 운영한다. 북한 국영 무역회사들은 중국 기업과 합작투자·하청생산 계약을 맺고 이곳에서 가발, 인조 속눈썹, 갈대 가방, 의류 등을 제작해 수출한다. 이는 정교한 수작업이 요구되는 노동으로, 사실상 여성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한 ‘노예노동’에 해당한다.
— 전거리교화소의 노동 실태는 특히 여성들에게 가혹하다고 들었습니다.
“네, 기자님 또래의 젊은 여성들이 주로 배치됩니다. 좁은 공간에서 세밀한 작업이 요구되기 때문이죠.”
이 말에 기자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북한 정권이 여성 인력을 착취해 외화를 벌어들이는 현실이 너무도 냉혹하게 느껴졌다.
호사냑씨는 북한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전거리교화소 수감 경험이 있는 탈북민뿐만 아니라 전직 북한 검사, 경찰관, 국가보위성 요원, 세관 감독관 등 약 30명의 목격자를 직접 만나 증언을 수집했다.
— 북한 인권 문제를 다루면서 방해나 위협을 받은 적은 없나요?
“당연히 많았습니다. 북한 인권 보고서를 작성하려면 북한과 얽힌 중국 사업도 조사해야 하고, 북한 내부의 깊숙한 곳까지 자료를 추적해야 하죠. 숱한 어려움과 협박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고, 북한인권시민연합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2030세대에 희망 걸어”
2001년생 기자와 2004년부터 한국에서 북한 인권을 위해 활동해 온 요안나 호사냑씨. 그가 어쩌면 기자보다 북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그는 기자를 바라보며 “내가 희망을 놓지 않는 이유는 기자님과 같은 한국의 2030세대가 북한 인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오히려 2030세대가 북한 인권 문제에 무관심한 게 아니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2030세대가 ‘통일’에 관심이 덜한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그 어떤 세대보다 관심이 많아요. 저는 연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학생들이 북한 인권 문제에 굉장히 적극적인 관심을 보입니다. ‘더 배우고 싶다’며 북한인권시민연합 사무실을 찾아오거나 인턴 활동을 자원하기도 하죠. 오히려 4050세대가 북한 인권 문제에 더 무관심합니다.”
— 4050세대라면 인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데.
“현재 정치권에는 과거에 인권변호사였거나 민주화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인권을 중시한다면, 북한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출신이지만 대북 전단을 금지하는 등 북한 인권과 관련해 오히려 부정적인 조치를 많이 취했어요. 그래서 저는 요즘 정치인들이 ‘말로만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의 외교관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면 그들도 ‘한국의 진보 정치인들이 왜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들 합니다. 진정한 진보라면 보편적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데, 한국의 진보는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2030세대에 희망을 겁니다. 지금의 4050세대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 젊은 세대가 북한 인권 문제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교육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북한 인권에 대한 교육을 진행해야 해요. 아니면 인권 자체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좋습니다. 인권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대부분 이를 실천에 옮깁니다. 그렇게 좋은 시너지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호사냑씨는 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세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되풀이해 강조했다. 2030세대가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는 깊은 신념이 담겨 있었다.
존폐 기로에 선 북한인권단체들
북한 인권 문제에 누구보다 깊은 관심을 두고 활동해 온 이방인, 요안나 호사냑 부국장. 한국인들도 무심하게 지나치는 북한 인권 문제에 헌신해 온 그를 인터뷰하고 싶었던 이유다. 그러나 인터뷰가 성사되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은 현재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다. 단체 운영이 어려워진 탓에 인터뷰를 약속하고서도 막상 날짜 잡기가 쉽지 않았고, 가까스로 3월 들어서야 호사냑 부국장은 어렵게 시간을 내 인터뷰에 응할 수 있었다.
이야기가 재정난에 미친 순간, 방금 전까지 내내 눈웃음으로 기자를 대하던 호사냑씨의 두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더 이상 밝은 표정을 유지하기 어려워 보였다.
“나는 한국의 통일은 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북한인권시민연합은 단순히 북한 주민들의 인권 보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통일 이후의 대비까지도 고민해 왔어요. 그런데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서 상황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보조금이 끊겼거든요.”
지난해 12월 2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당시 당선인)은 해외 원조를 위한 연방 보조금 지급을 일시 중단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어 일주일 뒤 27일, 백악관은 이튿날인 12월 28일 오후 5시부로 연방 차원의 보조금 및 대출금 집행을 잠정 중단한다고 각 정부 기관에 통보했다. 이에 따라 미국 민주주의진흥재단(NED)과 국무부 민주주의·인권·노동국(DRL)으로부터 지원을 받던 북한인권단체들은 즉각적으로 운영 위기에 처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도 그 직격탄을 맞았다. 월세조차 감당하기 어렵게 되어 3월 중으로 사무실을 이전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공과금은 물론 직원들의 급여 지급조차 불가능한 상태로, 6월에는 단체 존폐까지 논의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 재정난을 앞으로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까요?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한국 정부는 북한 인권 관련 프로그램 지원이나 임대료 지원을 전혀 하지 않아요. 문재인 전 대통령 시절에 많은 북한 인권 관련 지원사업이 사라졌습니다. 당시 끊긴 지원금은 이제 돌아올 가능성이 없습니다. 나는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오랜 기간 활동하며 북한 주민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헌신해 왔어요. 그런데 이제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니… 정말 허탈하고 슬픕니다.”
— 한국 정부가 지원해 줘야 정상일 텐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북한 인권 문제는 단순한 인권 문제가 아니라 안보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권 탄압, 반인도(反人道) 범죄는 북한의 경제·무역과도 연관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국제 사회의 관심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북한과 한 민족인 대한민국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도덕적 우주의 호(弧)는 길지만, 정의를 향해 구부러진다”
인터뷰 말미쯤 호사냑 부국장에게 질문 하나를 더 던졌다.
— 과거의 요안나 호사냑씨가 지금의 자신에게 조언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
“답은 명확합니다. ‘앞으로도 북한 인권을 위해 일하라’는 말이죠. 내 삶은 오직 북한 인권을 위해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 북한인권운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한 문장으로 간추리면?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말을 인용하고 싶어요. ‘도덕적 우주의 호(弧)는 길지만, 정의를 향해 구부러진다(The arc of the moral universe is long, but it bends toward justice).’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세계는 결국 정의를 향해 나아간다고 믿고 있어요. 우리는 앞으로도 북한 인권의 어두운 면을 밝힐 수 있는 단체들이 더 많아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려 할 때 호사냑 부국장이 주저하는 듯하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이런 말 하기가 참 망설여지는데… 원래 이런 부탁 잘 하지 않아요. 하지만… 북한인권시민연합의 재정이 너무 어렵습니다. 저희 단체는 북한 청소년들과 인권 탄압 피해자들을 최전방에서 돕는 역할을 해왔어요. 그러나 지금처럼 지원이 끊기면 앞으로 이런 활동을 이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꼭 우리 단체가 아니더라도 괜찮아요. 북한 인권을 위해 일하는 단체들이 없어진다면, 북한 인권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질 겁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한국인 한 명이 한 달 커피값만 아껴서 북한인권단체에 후원해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나는 앞으로도 북한 인권을 위해 노력할 겁니다.”
북한 인권 문제에 청춘을 바친 한 외국인의 간절한 목소리가 기사를 쓰는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서울 서대문구 북한인권시민연합(NKHR) 사무실에서 만난 요안나 호사냑(Joanna Zenona Hosaniak·51) 부국장은 밝은 미소로 기자를 맞이했지만,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폴란드 출신인 푸른 눈의 이방인으로 지난 22년간 북한인권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워 온 그는 이제 그 여정을 마무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서있었다.
배우를 꿈꿨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호사냑 부국장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지난 시간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국제회의장 안팎을 누비며 북한 인권 문제를 알렸던 활동가,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달려온 시간들. 하지만 지금 그는 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기로에 섰다는 것일까?
지난 3월 5일, 북한 인권을 위해 청춘을 바친 한 활동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뜻밖에도 유창한 한국어로 기자를 반갑게 맞아 준 그는, 마치 오래 품어 온 이야기들을 이제야 꺼내는 듯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호사냑 부국장은 고향인 폴란드의 바르샤바 대학을 졸업했다. 그가 전공한 학과는 원래 ‘북한어문학과’였지만, 1989년 폴란드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한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한국어문학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나간 날에 후회 없어”
졸업 후 그는 주 폴란드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했지만 외교관이 아닌 인권 활동가의 길을 선택했다. 폴란드 내 헬싱키인권재단에서 일하던 2003년, 북한 인권 문제에 눈을 뜬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한국행을 택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과 함께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 어느덧 22년째. 타국에서의 긴 세월이 외롭지는 않았을까?
— 한국에 온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폴란드가 그립거나 고향을 떠나온 것이 후회되진 않았나요?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폴란드가 남아 있습니다. 친구들, 가족, 특히 여동생이 그리울 때도 많죠. 하지만 제 삶은 이제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20년 넘게 북한 인권 문제에 집중하며 살아왔으니까요. 만약 갑자기 이곳을 떠나게 된다면 오히려 한국을 더 그리워하게 될 것 같습니다.”
— 저는 2001년생인데, 선생님께서 한국에서 생활하신 시간이 제 나이와 비슷하군요.
“참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죠. 지나간 날에 대한 후회는 없습니다.”
— 한국어를 전공했다고 들었는데, 남북한 언어의 차이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로 북한이탈주민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때때로 생소한 북한어 표현이 등장합니다. 오랜 경험을 가진 팀원들도 처음 듣는 단어들이 나올 때가 있어요. 특히 북한에서 사용되는 기관명이나 직책 같은 단어들은 남한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들에게 직접 원래 표현을 확인해야 하는 경우도 있죠.”
— 예를 들면?
“예를 들어 피해자가 ‘전거리교화소’에서 생활했다고 했는데, 처음에는 그 표현이 생소했습니다. 알고 보니 함경북도 회령시 전거리(全巨里)에 있는 ‘12호교화소’ 이름이었어요. 반대 사례로, 북한에서는 주로 동구권의 외래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양의 아파트 건설부대에서 일했다는 한 탈북자가 ‘타츠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시멘트를 섞는 기계를 뜻하는 폴란드어라서 나는 얼른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도 폴란드어에서 유래한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죠.”
— 폐쇄적인 북한에서도 외래어가 쓰이는군요.
“네, 공산품 같은 게 들어오면서 외국어 이름이 그대로 정착한 겁니다. 또 북한의 감옥에서는 수감자들끼리만 통하는 독특한 은어(隱語)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화장실을 마음대로 갈 수 없기 때문에 손가락 다섯 개를 펴면 ‘화장실 가고 싶다’는 뜻인 식이죠. 그들만의 생존 방식이자 비밀스러운 언어 체계입니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던 북한 교수
폴란드는 1952년부터 1989년까지 사회주의 국가였다. 호사냑 부국장은 공산 폴란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초등학생 시절, 북한처럼 배급을 받기 위해 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섰던 기억이 난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또 “1942년생인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을 직접 겪은 분”이라며 “전쟁이 한창이던 때, 할아버지와 함께 숲속에 숨어 지냈다고 들었다. 그런 아버지는 내가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처음에는 원치 않았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K-팝과 한류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딸이 한국어문학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자연히 걱정 어린 시선으로 호사냑씨를 바라봤다.
“사실 폴란드 사람들은 한국보다 북한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알려지지 않은 북한이라는 나라에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생겼어요. 원래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대학 진학을 고려할 무렵 폴란드가 민주주의 사회로 변화하기 시작했죠. 친구들은 변화하는 사회에 맞춰 경제학이나 법학을 선택했어요.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일본을 다녀온 후 ‘경제가 발전하는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처음엔 일본어학과에 지원할까도 했지만 결국 한국어문학과를 선택하게 됐어요.”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자 예상치 못한 현실이 펼쳐졌다. 교수진 대부분이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당시 학생들에게 존경받던, 북한에서 온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나는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종종 말씀하셨죠. 하지만 북한에 가족이 있었기에 결국 귀국했는데, 며칠 후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 화가 나서 대학을 방문했습니다. 그 교수님이 망명을 했다는 헛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에요. 그 일이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북한 인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죠.”
이후 그는 외환은행과 주 폴란드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지만,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북한 인권은 단순한 정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폴란드가 민주화를 거쳐 변화를 맞이한 것처럼 언젠가 북한에도 자유와 변화의 바람이 불기를 바랍니다.”
어머니, “열정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북한 인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호사냑씨는 헬싱키인권재단에서 근무하며 인생의 전환점이 된 인물을 만났다. 바로 북한 인권 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린 인권운동가 고(故) 윤현(尹玄) 북한인권시민연합 명예이사장이다. 2004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에 진행기획자로 참여한 호사냑씨는 행사를 마칠 때쯤, 주최 단체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의 윤 이사장이 “한국에 와서 일해 보겠느냐”고 물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윤 이사장의 제안을 들은 호사냑씨는 집에 돌아가 그날로 짐을 싸고, 한 달간의 비자 발급 절차를 마치자마자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 윤현 이사장과의 인연이 각별하다고 들었습니다.
“윤 이사장님은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1960년대부터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해 온 1세대 인권운동가입니다. 나는 헬싱키인권재단에서 근무할 때 처음 윤 이사장님을 만났어요. 북한 인권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내 뜻을 부모님도 존중해 주셨고, 한국행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셨죠. 특히 어머니는 ‘열정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내 선택을 응원하셨어요. 이제는 부모님도 주변 분들에게 ‘우리 딸이 북한 인권을 위해 힘쓰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답니다.”
— 헬싱키인권재단은 어떤 단체인가요?
“폴란드가 공산주의 체제였을 당시 지하에서 활동하던 민주화운동가들이 체제 전환 후 공식적으로 설립한 단체입니다. 단순히 인권운동가뿐만 아니라 의사, 간호사, 법조인 등을 대상으로 민주주의 교육을 진행하고 주요 정보를 전파하는 역할을 해왔어요. 핵심적인 교육 내용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법’이었습니다. 권리를 지키지 않는 인권운동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北체제 붕괴 후 ‘과도기 正義’, 한국에서 미리 대비해야”
호사냑씨는 학문적으로도 깊은 연구를 이어 왔다. 고려 청자 문양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2016년에는 동유럽 구(舊) 공산권 국가들의 ‘과도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일명 전환기 정의)’ 제도를 비교한 논문으로 서강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로도 과도기 정의에 관한 연구를 심도 있게 진행해 왔다.
— 과도기 정의가 무엇인가요?
“과도기 정의란,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진 후 과거 인권 침해를 바로잡기 위해 특별한 법과 기관을 설립하는 과정입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기록을 확인하고, 잘못된 정보를 정정하고,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죠. 또한 인권 침해 가해자의 정치·공적 활동을 제한하는 조치도 포함됩니다.”
— 폴란드의 과도기 정의 과정을, 비슷한 과도기를 겪은 독일이나 체코와 비교하면?
“독일과 체코는 비교적 신속하게 청산을 진행해 사회적 혼란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폴란드는 이들 나라들에 비해 과거 청산 과정에서 갈등이 더 심했고 정치적 논란이 지속됐습니다.”
— 북한의 경우, 과도기 정의를 강조하면 기득권층이 민주화와 자유화를 더욱 거부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인권 침해 피해자가 많고 그 정도도 극심했기 때문에,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에는 정의 구현 요구가 강하게 분출될 겁니다.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며, 북한 내 피해자 단체와 협력해 정의 구현을 위한 법과 기관을 설립해야 합니다. 만약 과거 청산이 지연되면 사회적 분열이 장기화될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발빠른 대처가 필요하겠네요. 지금 당장 준비해도 늦은 것 아닐까요?
“맞습니다. 그러나 북한 내부에서는 준비가 어렵기 때문에 한국에서 미리 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재 북한인권시민연합을 비롯한 몇몇 단체들이 이 문제를 위해 협력하고 있습니다.”
“숱한 어려움과 협박에 시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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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나 호사냑 북한인권시민연합 부국장이 2024년 11월 2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조사보고서 〈메이드 인 차이나: 글로벌 공급망이 어떻게 북한 교화소의 노예제를 부추기는가〉 발간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 전거리12호교화소 수감자들이 겪는 북중 합작 노예무역 피해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보고서에 따르면 전거리교화소는 연간 약 1000명의 여성 수감자를 수용하며, 약 10개의 생산작업반을 운영한다. 북한 국영 무역회사들은 중국 기업과 합작투자·하청생산 계약을 맺고 이곳에서 가발, 인조 속눈썹, 갈대 가방, 의류 등을 제작해 수출한다. 이는 정교한 수작업이 요구되는 노동으로, 사실상 여성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한 ‘노예노동’에 해당한다.
— 전거리교화소의 노동 실태는 특히 여성들에게 가혹하다고 들었습니다.
“네, 기자님 또래의 젊은 여성들이 주로 배치됩니다. 좁은 공간에서 세밀한 작업이 요구되기 때문이죠.”
이 말에 기자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북한 정권이 여성 인력을 착취해 외화를 벌어들이는 현실이 너무도 냉혹하게 느껴졌다.
호사냑씨는 북한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전거리교화소 수감 경험이 있는 탈북민뿐만 아니라 전직 북한 검사, 경찰관, 국가보위성 요원, 세관 감독관 등 약 30명의 목격자를 직접 만나 증언을 수집했다.
— 북한 인권 문제를 다루면서 방해나 위협을 받은 적은 없나요?
“당연히 많았습니다. 북한 인권 보고서를 작성하려면 북한과 얽힌 중국 사업도 조사해야 하고, 북한 내부의 깊숙한 곳까지 자료를 추적해야 하죠. 숱한 어려움과 협박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고, 북한인권시민연합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2030세대에 희망 걸어”
2001년생 기자와 2004년부터 한국에서 북한 인권을 위해 활동해 온 요안나 호사냑씨. 그가 어쩌면 기자보다 북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그는 기자를 바라보며 “내가 희망을 놓지 않는 이유는 기자님과 같은 한국의 2030세대가 북한 인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오히려 2030세대가 북한 인권 문제에 무관심한 게 아니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2030세대가 ‘통일’에 관심이 덜한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그 어떤 세대보다 관심이 많아요. 저는 연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학생들이 북한 인권 문제에 굉장히 적극적인 관심을 보입니다. ‘더 배우고 싶다’며 북한인권시민연합 사무실을 찾아오거나 인턴 활동을 자원하기도 하죠. 오히려 4050세대가 북한 인권 문제에 더 무관심합니다.”
— 4050세대라면 인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데.
“현재 정치권에는 과거에 인권변호사였거나 민주화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인권을 중시한다면, 북한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출신이지만 대북 전단을 금지하는 등 북한 인권과 관련해 오히려 부정적인 조치를 많이 취했어요. 그래서 저는 요즘 정치인들이 ‘말로만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의 외교관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면 그들도 ‘한국의 진보 정치인들이 왜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들 합니다. 진정한 진보라면 보편적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데, 한국의 진보는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2030세대에 희망을 겁니다. 지금의 4050세대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 젊은 세대가 북한 인권 문제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교육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북한 인권에 대한 교육을 진행해야 해요. 아니면 인권 자체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좋습니다. 인권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대부분 이를 실천에 옮깁니다. 그렇게 좋은 시너지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호사냑씨는 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세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되풀이해 강조했다. 2030세대가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는 깊은 신념이 담겨 있었다.
존폐 기로에 선 북한인권단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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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명령이 적힌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도널프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EPA |
북한인권시민연합은 현재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다. 단체 운영이 어려워진 탓에 인터뷰를 약속하고서도 막상 날짜 잡기가 쉽지 않았고, 가까스로 3월 들어서야 호사냑 부국장은 어렵게 시간을 내 인터뷰에 응할 수 있었다.
이야기가 재정난에 미친 순간, 방금 전까지 내내 눈웃음으로 기자를 대하던 호사냑씨의 두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더 이상 밝은 표정을 유지하기 어려워 보였다.
“나는 한국의 통일은 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북한인권시민연합은 단순히 북한 주민들의 인권 보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통일 이후의 대비까지도 고민해 왔어요. 그런데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서 상황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보조금이 끊겼거든요.”
지난해 12월 2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당시 당선인)은 해외 원조를 위한 연방 보조금 지급을 일시 중단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어 일주일 뒤 27일, 백악관은 이튿날인 12월 28일 오후 5시부로 연방 차원의 보조금 및 대출금 집행을 잠정 중단한다고 각 정부 기관에 통보했다. 이에 따라 미국 민주주의진흥재단(NED)과 국무부 민주주의·인권·노동국(DRL)으로부터 지원을 받던 북한인권단체들은 즉각적으로 운영 위기에 처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도 그 직격탄을 맞았다. 월세조차 감당하기 어렵게 되어 3월 중으로 사무실을 이전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공과금은 물론 직원들의 급여 지급조차 불가능한 상태로, 6월에는 단체 존폐까지 논의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 재정난을 앞으로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까요?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한국 정부는 북한 인권 관련 프로그램 지원이나 임대료 지원을 전혀 하지 않아요. 문재인 전 대통령 시절에 많은 북한 인권 관련 지원사업이 사라졌습니다. 당시 끊긴 지원금은 이제 돌아올 가능성이 없습니다. 나는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오랜 기간 활동하며 북한 주민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헌신해 왔어요. 그런데 이제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니… 정말 허탈하고 슬픕니다.”
— 한국 정부가 지원해 줘야 정상일 텐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북한 인권 문제는 단순한 인권 문제가 아니라 안보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권 탄압, 반인도(反人道) 범죄는 북한의 경제·무역과도 연관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국제 사회의 관심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북한과 한 민족인 대한민국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도덕적 우주의 호(弧)는 길지만, 정의를 향해 구부러진다”
인터뷰 말미쯤 호사냑 부국장에게 질문 하나를 더 던졌다.
— 과거의 요안나 호사냑씨가 지금의 자신에게 조언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
“답은 명확합니다. ‘앞으로도 북한 인권을 위해 일하라’는 말이죠. 내 삶은 오직 북한 인권을 위해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 북한인권운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한 문장으로 간추리면?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말을 인용하고 싶어요. ‘도덕적 우주의 호(弧)는 길지만, 정의를 향해 구부러진다(The arc of the moral universe is long, but it bends toward justice).’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세계는 결국 정의를 향해 나아간다고 믿고 있어요. 우리는 앞으로도 북한 인권의 어두운 면을 밝힐 수 있는 단체들이 더 많아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려 할 때 호사냑 부국장이 주저하는 듯하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이런 말 하기가 참 망설여지는데… 원래 이런 부탁 잘 하지 않아요. 하지만… 북한인권시민연합의 재정이 너무 어렵습니다. 저희 단체는 북한 청소년들과 인권 탄압 피해자들을 최전방에서 돕는 역할을 해왔어요. 그러나 지금처럼 지원이 끊기면 앞으로 이런 활동을 이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꼭 우리 단체가 아니더라도 괜찮아요. 북한 인권을 위해 일하는 단체들이 없어진다면, 북한 인권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질 겁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한국인 한 명이 한 달 커피값만 아껴서 북한인권단체에 후원해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나는 앞으로도 북한 인권을 위해 노력할 겁니다.”
북한 인권 문제에 청춘을 바친 한 외국인의 간절한 목소리가 기사를 쓰는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북한인권시민연합 - 전화 : 070-7725-4615 - 홈페이지 : nkhr.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