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군 장교 출신이 억울한 누명 쓰고 脫北… 1차 북송됐지만 재탈북해 입국
⊙ 대북 방송 시작 후 김정일, “당을 배반한 것도 모자라 이런 못된 방송까지 하는 데 용납할 수 없다”
⊙ 정부 돈 안 받고 후원금만으로 방송 운영
⊙ 식칼·죽은 쥐·칼 꽂은 인형도 그의 ‘자유 전파’ 의지 막지 못해
⊙ 북한군 대위 시절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북한 노동당 간부들에게〉 들으며 북한 체제에 회의
⊙ “8년간 아버지처럼 모신 황장엽 선생은 너무나 고독했다”
金聖珉
1962년 자강도 희천 출생. 평양 경상유치원, 대동문인민학교, 련광중학교, 김형직사범대 졸업 / 태탄군 주둔 28사 경보병 대대, 보병대대 박격포부대, 4군단 선전대, 620 훈련소 예술선전대 대위 출신으로 1995년 탈북. 現 자유북한방송 대표이사 / 국경 없는 기자회 ‘자유언론 상’, 아시아 민주 인권상,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 대북 방송 시작 후 김정일, “당을 배반한 것도 모자라 이런 못된 방송까지 하는 데 용납할 수 없다”
⊙ 정부 돈 안 받고 후원금만으로 방송 운영
⊙ 식칼·죽은 쥐·칼 꽂은 인형도 그의 ‘자유 전파’ 의지 막지 못해
⊙ 북한군 대위 시절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북한 노동당 간부들에게〉 들으며 북한 체제에 회의
⊙ “8년간 아버지처럼 모신 황장엽 선생은 너무나 고독했다”
金聖珉
1962년 자강도 희천 출생. 평양 경상유치원, 대동문인민학교, 련광중학교, 김형직사범대 졸업 / 태탄군 주둔 28사 경보병 대대, 보병대대 박격포부대, 4군단 선전대, 620 훈련소 예술선전대 대위 출신으로 1995년 탈북. 現 자유북한방송 대표이사 / 국경 없는 기자회 ‘자유언론 상’, 아시아 민주 인권상,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1995년 9월 30일 북한 양강도 혜산시
북한 620 훈련소 예술선전대 대위 김진은 멍하니 앉아 눈앞에 펼쳐진 압록강을 바라봤다. 부대를 탈출한 지 꼭 8일째 되던 날이었다. 압록강변을 순찰하던 군인 세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군복을 입고 있던 그가 소속과 성명을 밝히자, 조장인 듯한 군인이 이름을 안다며 친근감을 표시했고 보초교대를 마치고 금방 돌아오겠으니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들이 떠나자 김진은 압록강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몸이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갈 즈음에야 인근에서 빨래하던 여인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2004년 4월 20일 서울시 양천구 목동
김성민(金聖珉) 자유북한방송 대표가 방송 부스에 앉았다. 두 달 전인 2월 16일과 4월 15일에 시험방송을 마쳤고, 오늘부터 본방송을 시작기로 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는 남북(南北) 장성급 군사회담 결과에 따라 2004년 6월부터 대북(對北) 방송을 중단키로 합의했다.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탈북인들이 북한 동포를 위한 민간 방송을 하기로 결정했다. 김성민 대표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북녘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보내는 자유북한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민간 對北 방송 시작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다. 삶이란 예측할 수 없어서 오히려 의미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신(神)은 그에게 너무 가혹했다.
북한 체제에 그다지 불만이 없던 북한군 대위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더는 그곳에서 살기 어렵다고 판단해 탈북(脫北)했다. 중국 지린성 창바이, 지린성 옌지, 랴오닝성 다롄을 거쳐 남(南)으로 오던 그는 중국 톈진에서 공안에게 붙잡혀 북한 보위부에 넘겨졌다. 한반도 최북단인 온성에서 1차 조사를 받고 2차 조사를 위해 평양으로 이동하던 중 80km로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린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옌지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결혼하여 딸을 낳고, 중국인 신분으로 살던 그는 남한의 친척을 만나려다 서울 김포공항에서 체포되었다.
탈북자들이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온 것을 두고 흔히 ‘1만 킬로미터의 여정’이라고 하는데, 그에게 있어 이러한 표현은 사치스럽기만 하다. 대한민국 국민이 되자 그는 북한인권운동에 투신했고 북한 주민들에게 자본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자유북한방송을 만 20년째 하고 있다. 북한군 대위 김진이라는 이름은 그사이에 김성민으로 바뀌었다. 2024년 11월 30일과 12월 7일에 인천시 강화군에서 요양 중인 김성민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는 2017년에 폐암 4기, 뇌종양으로 수술, 항암 치료를 받고 호전됐다가 최근 병세가 심해졌다. 이번에는 암이 간으로 전이됐고 의사로부터 ‘6개월 남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그는 요즘도 ‘할 일은 한다’며 탈북민 행사, 일본 출장길에 오른다.
― 우리나라에 와서 북한인권운동을 했는데, 그래도 많은 이가 기억하는 것은 자유북한방송의 김성민이겠죠?
“아무래도 그럴 겁니다. 대북 방송을 의도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인들과 식사 중이었는데 TV에서 정상회담 소식이 나오고 남북이 상호비방 금지 차원에서 대북, 대남(對南) 방송을 중단한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함께 있던 선배들이 ‘우리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뜻을 모았습니다. 당시 저는 KTV의 〈서울말 평양말〉, KBS의 〈남북의 창〉, 라디오 〈출발 동서남북〉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소위 방송인이다 보니 나더러 하라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 출연과 운영은 엄연히 다를 텐데요.
“당시 친하게 지내던 ‘연합뉴스’의 조계창 기자가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돈 있고, 전파만 임차하면 된다’고 용기를 북돋워줬습니다. 처음에는 인터넷 방송(www.freenk.net)으로 시작했는데 목표는 단파 방송 송출이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친북 단체들, 방송국 앞에서 시위
― 방송 시작하고 북한에서 반응이 있었는지요.
“두 달쯤 지나니까 북한에서 반응을 하더군요. 김정일이 ‘당을 배반한 것도 모자라 나가서 반북(反北) 방송까지 하는 자들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못된 방송까지 하는 데 용납할 수 없다’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세계일보》의 한 기자가 관련 문건을 입수해 전해줬는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한데 친북(親北) 단체들이 거의 매일 방송국 앞에 와서 ‘방송을 중단하라’며 시위하고, 전대협 통일선봉대라는 사람들 200여 명이 와서 집회를 했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 때여서 아무래도 정부가 북한에 우호적이었죠.
“정부를 대신해서 방송을 하는 건데 신변 보호를 한다던 경찰관들은 오히려 저의 활동을 제한했습니다. 친북 단체는 연일 방송국 앞에서 반대 기자회견을 하는데 정작 저는 사무실 안에서 꼼짝달싹을 못하다 보니 화가 나고 ‘이건 아니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가 보다 적극적으로 방송에 임해야겠다고 결정한 이유는 그의 앞으로 쏟아져 오는 각종 협박 때문이었다. 황장엽(黃長燁) 선생의 얼굴에 붉은 페인트칠을 하고 과도를 넣은 소포, 죽은 쥐, 칼을 꽂은 인형 등이 수시로 배달됐다. 친북 단체 혹은 북한 추종 세력이 보냈음이 자명한데, 이 때문에 한동안 그는 어떠한 소포도 맘대로 열지 못했다. 그럴수록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이렇게 북한을 찬양하는 자들이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을 보니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구나!”
김성민 대표는 이렇게 생각했다.
“한국 정부에 손 내민 적 한 번도 없어”
자유북한방송 홈페이지에 게재된 설립 목적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소식과 진실을 전한다.
2.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전파한다.
3. 김정은 독재 정권 추종 세력을 비판·경고한다.
4. 북한의 인권 참상을 대한민국과 국제사회에 알린다.
5. 한반도의 통일과 세계 민주화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한다.
6. 탈북인들의 교류와 소통, 입장 표명 기회를 제공한다.〉
― 그렇게 지낸 세월이 벌써 20년이네요.
“제가 자부하는 것은 자유북한방송은 대북 방송을 시작한 이후로 매일 2시간씩, 365일, 20년 동안 단 한 번 중단하지 않고 방송을 했다는 겁니다. 정권이 바뀌거나 국제사회가 요동치거나, 코로나19 여파가 있었을 때도요. 단 하루도 방송을 내보내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끌고 온 것에 긍지감을 갖고 있습니다.”
―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바람을 탈 수 있었을 텐데요.
“방송에 대한 책임감이 컸고 수전 숄티(Suzanne Scholte) 여사가 컨트롤해 준 덕이 컸습니다. 저는 좌파 정권은 물론이고 우파 정권이 들어섰을 때에도 한국 정부에 한 번도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수전도 ‘미국도 그렇지만 한국에서 정부에 손 내밀었다가 낭패 보는 일이 너무 많을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방송은 전파가 기본이고, 전파는 모두 돈입니다. 이것을 정부 지원으로 했다가 끊기면 안 되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자생적으로 운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초기부터 이런 생각을 했다니 놀랍네요.
“주위에서 많이들 도와줬어요. 어떻게든 방송을 시작해야 한다며 탈북 선배 20여 명이 100만원씩 모아주고, 삼촌이 초창기 운영자금 2억8000만원 정도를 대줬습니다. 제가 정착금,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쏟아부었고요. 고(故) 안응모 전(前) 내무부 장관, 이북오도청 황해도·평북도·평남도 도민회 등에서 도왔습니다. ‘이대목동병원 정문에서 만나자’는 분이 있어서 나가보니 점잖아 보이는 분들이 봉투를 주고 가는데, 성우회(한국의 예비역 및 퇴역 장성 단체)분들이더군요. 알게 모르게 도와주는 분들이 많았고 우리 나름대로 3년 치 예산을 확보하고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 그래도 세월이 20년인데 힘든 일이 부지기수였겠지요.
“라디오 방송 스튜디오를 여러 번 옮기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방송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 때문에 장안동의 북한 연구소에서 양천구 신정동으로, 대령연합회가 있던 강남과 다시 양천구 목동으로 옮겨다녀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스튜디오를 다시 꾸리고 예산을 다시 편성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 ‘얼만큼 버틸 수 있을까’ 하던 사람들 보란 듯이 매일 두 시간씩 방송을 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 우리 방송은 미국의 자유북한방송 후원회를 비롯해 10달러, 100달러, 1만원짜리 100% 후원만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자유북한방송은 본방송을 개시한 지 1년 반이 지난 2005년 12월 8일부터 단파 방송을 시작했다. 주파수는 7530kHz(오전 4~6시), 12155kHz(오후 8~9시), 7600kHz(오후 10시~자정)를 사용한다. 단파 방송은 말 그대로 단파(短波)를 이용한 방송으로 특성상 먼 곳까지 도달하며 장거리 방송용으로 활용된다. 단파 방송을 들을 수 있는 수신기를 통상 단파라디오라고 부른다. FM 방송은 주파수 변조를 이용하는 방송인데 단파 방송보다 적은 지역을 커버하지만 기상과 환경의 영향을 적게 받아 고(高)음질 청취가 가능하다. 김성민 대표의 자유북한방송 청취 리포트를 보면 저 멀리 유럽의 노르웨이, 스위스에서 방송을 들었다는 사람들도 꽤 있다.
‘허공에 뿌리는 메아리’
― 단파 방송의 위력을 알고 있었습니까.
“외국인들이 청취 보고서를 보내주고 있지만, 저희 방송은 허공에 뿌리는 메아리입니다. 북한 동포들이 이 방송을 들었는지를 실시간으로 알 수도 없고 피드백도 빨리 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끝까지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제가 북한에서 들어봤기 때문입니다.”
― 탈북하기 전에 대북 방송 청취자였군요.
“북한군에 있을 때 ‘적지물자(敵地物資)’라고 해서 양말, 트레이닝복, 불티나 라이터, 담배, 라디오 등이 하늘에서 종종 떨어졌습니다. 사병 때는 엄두를 못 냈고 장교가 된 다음에 라디오를 하나 구해 선전대 창작실에서 들었습니다. 창작실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거든요. 저희 자유북한방송의 제1 목적이 ‘북한 주민에게 외부 소식과 진실을 전파한다’ 아닙니까. 북한의 가장 큰 특징은 외부와의 정보 차단입니다. 자체적으로 뉴스를 생산해 《로동신문》을 비롯한 중앙기관지를 통해 뿌리고 교과서를 만들고, 우상화 교육을 하고 역사를 왜곡합니다. 저도 이런 식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는데 막상 라디오를 들어보니까 전혀 다른 얘기를 하더군요.”
― 구체적으로 라디오에서 어떤 얘기를 들으셨는데요.
“강인덕 선생(전 통일부 장관, 그는 1980년 1월부터 1988년 2월까지 KBS에서 심리전 프로그램 〈북한 노동당 간부들에게〉를 진행했다) 방송을 들었는데 신기한 얘기가 많았습니다. 북에서는 김정일의 고향이 백두산이라고 했는데 방송을 들어보니 러시아 하바롭스크라는 겁니다. 구체적인 사람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계속 듣다 보니 ‘내가 아는 장군님이 아닌가? 교과서가 잘못된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당시 북에서 황순희라는 여성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는데 방송을 들어보니 그 사람이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의 친구이자 실질적으로 김정일을 키운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얘기를 듣다 보니 왜 황순희가 북에서 잘나가고 있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 조금 의심이 들거나 흩어져 있던 정보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 같은 거였을까요?
“처음에는 ‘희한하네’ 정도였고 자꾸 듣다 보니 의심도 들었죠. 하지만 저는 북한 체제에 워낙 충실한 대위였기 때문에 남조선에서 괜한 얘기를 지어내는 것이라고 애써 외면했습니다.”
“북한 주민 누구나 바깥세상 궁금해해”
― 북한은 통제 국가인데 그래도 바깥세상을 궁금해하기는 하나 보죠?
“그럼요. 라디오가 없어서 듣지 못할 뿐입니다. 당시엔 한국어를 통해 외부 소식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가 대북 방송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방송을 ‘남산 안기부에서 북한 사회를 흔들기 위해 만드는 모략 방송’이라고 선전(宣傳)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호기심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원천 봉쇄하는 것이 될 리가 없죠.”
― 이런 경험 때문에 자유북한방송이 허공에 뿌리는 메아리지만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군요.
“듣는 사람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간혹 자유북한방송이 북한 체제 비판을 너무 세게 할 때는 북한 인접 지역에서 ‘너무한 것이 아니냐’는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습니다. 일상적인 라디오 방송처럼 실시간으로 피드백이 오지 않지만, 북한 동포들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것은 확실했습니다. 실제로 제 방송을 들었다며 찾아오는 탈북자들을 만날 때 마음이 뭉클합니다. 처음부터 남한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탈북자가 알음알음으로 돈 모아서 매일 방송하는 일이 어디 쉬운가요? 어쩌면 운영 자금 모으느라 고민해서 암(癌)이 생겼을지도 몰라요(웃음). 그래도 방송을 20년이나 지속했으니… 뿌듯합니다.”
― 아까 수전 숄티 여사의 컨트롤 덕분이라고 감사의 표시를 했는데 두 분은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된 겁니까.
“2003년에 미국 하원의원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수전은 1990년대 초부터 탈북자 지원과 북한 인권 운동을 했는데 당시 탈북난민구출 운동을 하던 김상철 변호사에게 ‘미국 청문회에서 탈북자 3명의 증언이 필요한데 추천해 달라’고 했습니다. 김상철 변호사가 저를 소개해서 김정일의 경호원이었던 이용국, 수용소에 있던 이신옥과 함께 워싱턴에 가게 됐습니다. 이듬해에 수전이 서울에 왔는데 저를 못 알아보더라고요. 동양인들이 비슷하게 생겨서 그랬나 봐요. 왜 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따져 물으며 친해져서 이후에 서로에게 각인됐습니다. 수전이 자유북한방송 운영 자금을 미국에서 모금해 주고, 북한자유주간 행사도 같이하고 있습니다.”
― 정신적 동지네요.
“네, 맞습니다.”
남한에 온 뒤 소령으로 입대 준비
김성민 대표가 남한에 정착한 것은 1999년 12월이었다. 그의 전직(前職)이 북한군 대위였기에 남한에서는 당연히 그가 군(軍) 생활을 이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북한에서 장교 출신이 탈북하면 한 계급 진급시켜 현역으로 입대시켜 주는 제도가 있었다. 김성민 대표는 신체검사, 국방부 장관 면담 등을 모두 마치고, 입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촌이 ‘북에서 군대 생활만 한 사람이 또 하느냐.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니까 회사 생활을 해보라’고 해서 삼촌 회사로 출근을 시작했다. 이 같은 결정을 하고 국방부 장관에게 ‘회사원으로 지내겠다’고 했더니 뜻밖에 ‘알았다’는 답변이 왔다. 하지만 회사 생활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그는 주변의 탈북민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다. 자연스럽게 2001년에 자생적 탈북 단체인 ‘백두한라회’가 만들어졌다.
“초창기 생활 정착금을 다른 탈북자들보다 3배 정도 많이 받았습니다. 탈북자들 만나면 제가 술 사고, 밥 사고, 그렇게 어울려 지냈죠. ‘우리도 계 모임 같은 것을 만들자’고 해서 월 10만원씩 내는 28명이 생겼습니다. 대통령실 행정관을 했던 조 아무개도 있었고, 북한학을 전공한 최대석(崔大錫) 이화여대 교수가 저희를 가르쳤는데 ‘술만 먹는 모임은 안 된다. 이왕이면 의미 있는 모임을 하자’고 해서 친목 봉사를 했습니다. 봉천동 달동네 쪽방촌에 연탄 나르고 도배하고, 그러다 보니 우리 활동이 몇 번 뉴스에 나왔습니다. 최초의 자생적인 탈북자 단체라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 그때 황장엽 선생이 뉴스를 본 모양입니다. 그때 탈북자동지회는 황장엽 선생과 황 선생과 함께 탈북한 김덕홍(金德弘)씨로 지지가 갈리던 시절이거든요.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이 공석(空席)이 됐는데 황장엽 선생이 제 이름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자네 아버지와 내가 김일성대 동료 교수였네’
황장엽 선생은 김 대표에게 한 번 만나자고 했다. 하지만 김 대표는 거절했다. 딱히 만나야 할 이유가 없었단다. 황 선생의 두 번째 만남 요청, 그러나 또 거절, 세 번째 요청 때는 편지를 보냈다. ‘자네 아버지와 내가 김일성종합대학 동료 교수였네’라는 문구를 담은 편지였다.
“그 문구를 보는 순간 황장엽 선생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 선생은 대학 총장을 지냈고, 제 선친(先親)은 평교수였으니 하늘과 땅 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편지에서 ‘동료 교수’라고 쓴 것을 보고, 제가 더 이상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뵀고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을 맡게 됐습니다.”
― 외부에서는 김 대표를 ‘황장엽의 양아들’이라고 했죠.
“황 선생은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어요. 강연 다니면서 제 소개를 할 때 ‘내 아들 같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아버지처럼 모셨거든요. 제 눈에 비친 황 선생은 너무 고독했습니다. 국정원에서 꼭꼭 숨겨놓은, 외출조차 제대로 허락되지 않는 사람, 일반 탈북자들에게는 하늘처럼 높은 사람, 그런데 만날수록 아버지 같은 냄새가 너무 나는 사람이었습니다. 황 선생은 국가정보원 경호팀의 철통 보안 속에 토요일에 미리 허락된 곳만 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황 선생을 8년 정도 모셨는데 그렇게 마음이 짠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적적하실까 싶어 딸아이를 데려갔는데 ‘손녀 생각이 난다’고 해서 이후에는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과일이든, 과자든, 눈에 보이는 건 전부 아이 가져다주라며 통째로 주셨습니다.”
― 세상이 황 선생에 대해 너무 야박하게 평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중상모략이 너무 많습니다. 황장엽 선생이 안보전략연구소 이사장을 할 때 월급이 700만원 정도였습니다. 월급날 황 선생은 200만원, 100만원을 봉투에 넣어 다 나눠줬습니다. 황 선생이 정한 사람에게 직접 가져다주는 것은 제 임무였고요. 황 선생이 돌아가신 다음에 ‘구두쇠였다’ ‘돈 벌어서 여자한테 다 줬다’는 헛소문을 내는데 황 선생은 수중에 100만원도 없었습니다. 황 선생에게 돈을 받았던 이들이 침묵하는 것을 보면 열이 나요. 제가 돈을 전달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압니다.”
‘카드라는 거, 나도 한 번 써보고 싶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황장엽 선생이 ‘성민아, 카드라는 거 그거 나도 한 번 써보고 싶다’고 말을 했다. 김 대표가 부인에게 말해 직불카드를 만들고, 100만원을 입금했다. 황 선생은 천을 오리고 손바느질을 해 카드 주머니를 만들어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열 달이 넘도록 카드를 사용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김 대표의 부인 휴대전화로 ‘40만원’을 쓴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김 대표가 경호팀에 전화해 보니 황장엽 선생이 황씨 모임에서 식사 후에 긁으셨다고 했다.
“밤에 문자가 오니까 너무 궁금하잖아요. ‘아이고, 이 할부지가 어디에 쓰셨을까’ 해서 물어보니 황씨 모임에서 아주 폼나게 긁으셨대요. 얼마나 신이 나셨을까요. 황 선생의 휴대전화도, 하나뿐인 직불카드도 모두 저나 제 부인 명의였습니다.”
― 황 선생은 무엇을 꿈꿨습니까.
“인간 중심 철학이죠. 북에서 인간 중심 철학이 주체사상으로 변모되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황 선생의 철학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황 선생의 철학을 공부하는 A, B, C 팀이 있었는데, 저는 어디에도 소속하지 않았습니다. 황 선생한테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저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다들 어려워했거든요. 하지만 저는 황 선생의 철학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같고, 할아버지 같아서 그냥 선생을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 황 선생 돌아가시고 1년 만에 추모 모임을 만드셨죠.
“‘황장엽을 사랑하는 모임’은 제가 만든 게 아니에요. 탈북자동지회 홈페이지를 만드는 친구가 있는데 샤프하고 똘똘한 친구예요. 그 친구가 제안하고 제가 빨리 만들자고 해서 만든 겁니다. 지금도 황장엽 철학에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인간적으로 아버지 같고, 철학자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도 해마다 부인과 함께 대전 현충원에 두 번씩 갑니다. ‘할부지, 나 왔어요’라고 하고 한참 얘기합니다.”
중국 곳곳을 떠돌며 남한行 꿈꾸다 좌절
김성민이라고 개명(改名)한 것은 북에서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남한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삼촌이 ‘너의 사촌들은 돌림자로 성인 성(聖) 자를 쓴다’고 해서 바꿨다. 기자가 만난 김성민 대표는 담백한 사람이었다. 죽음을 앞뒀다고 해서 그의 행적을 과장하지도, 과시하지도 않았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은 명줄이 길다’는 말이 있다. 사선(死線)을 숱하게 넘은 그는 이대로라면 100세까지는 거뜬히 살아내야 할는지 모른다.
압록강을 건너니 중국 쪽은 45도의 가파른 제방이었다. 한 조선족 청년이 나무 막대기를 구해와 그를 끌어올려 줬다. 북한군 대위의 탈북 소식에 양강도 보위부에서는 다음 날 체포조를 창바이로 보냈다. 그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중국 창바이의 한 교회로 들어갔다. 교회의 여집사는 “북한군이 어제부터 당신을 찾고 있다. 이곳은 위험하다”며 그를 데리고 12시간을 달려 중국 옌지로 갔다.
1995년, 당시 중국 도로에는 검문이 없었다. 그가 탈북한 시점을 1996년으로 소개한 기사들이 많다. 정확하게는 1995년 9월이다. 그는 한동안 신분이 들통날 것을 우려해 1996년이라고 살짝 포장했다. 그는 옌지에서 조선족인 태중원 목사를 만났다. 목사는 그에게 교회에서 먹고 자도 좋다고 했고, 그는 6개월 동안, 정확히는 1996년 2월까지 중국 옌지에서 지냈다. 이즈음 김성민 대표는 ‘인민폐 500만원이 있으면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백두산 견학을 가는 목사 일행이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조선족 현지 선교사에게 부탁해 500만원을 구해다 줬다. 돈이 생기자 그는 중국 다롄으로 떠났다. 당시 그의 목표는 하루라도 빨리 남조선으로 가는 것이었다.
다롄에서 만난 김○○ 목사는 그에게 500만원을 건네받더니, 한쪽 구석에 있는 청년을 가리키며 ‘저 조선족 청년을 따라가면 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성민 대표는 그 청년과 함께 다롄항으로 갔다.
“어느 배를 타야 남조선으로 가느냐고 청년에게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더군요. 자기의 임무는 다롄항까지만 저를 데려다주는 것이었대요. 다롄항은 중국 보초병들이 즐비했고, 항구라서 그런지 새벽 2시가 되어도 사방이 환했습니다. 때마침 2월이어서 날씨는 얼음장처럼 추웠습니다. 그 청년에게 ‘내가 남조선 배를 찾아볼 테니, 혹시 못 찾을 경우를 대비해 기다려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중국 공안에 붙잡히다
― 어렵게 다롄항까지 갔는데, 이번에는 알아서 남한 배를 찾아야 한다니요.
“대형 선박들이 정박한 항구 쪽으로 보초병의 눈을 피해 다가가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바닷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는데 아뿔싸, 저는 남조선 배에는 한글이 적혀 있을 줄 알았어요. 아니었습니다. 온통 영어로 적혀 있는 거예요.”
― 저런, 그 청년은 기다려주던가요?
“제가 불쌍했던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중국말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그 청년이 아니었다면 또 어찌 됐을지 알 수 없죠.”
그 청년은 김성민 대표에게 ‘아무래도 500만원을 건넨 목사에게 속은 것 같다’며 자신과 함께 톈진으로 가자고 했다. 톈진에 함께 가는 친구들을 통해 남조선 배를 찾아주겠다며 말이다. 그렇게 김성민 대표는 다시 톈진으로 향했다. 청년은 친구들에게 들었다며 ‘톈진항에 남조선 광석 운반선이 있다고 하니 그 배에 몰래 타라’고 했다.
김성민 대표는 밤에 항구에 몰래 들어가 선박에 접근했다. 배에 거의 다가갔을 때 공안 셋이 뛰어나왔다. 그는 “배 선원인데 잠시 외출을 나갔다 오는 길”이라고 둘러댔다. 중국 공안은 배 선장을 불렀다. 그는 중국 공안이 한국어를 못 하는 것을 감안해 선장에게 웃으며 사정 설명을 했다. 하지만 선장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노스 코리아 아미!”
중국 공안은 그를 체포했다. 그는 톈진 감옥에 수감돼 40여 일이나 있어야만 했다. 2월은 중국의 최대 명절인 춘절이 있는 때라서, 감옥에서의 업무도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나중에야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여자 통역사가 나타났지만 한국말로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김성민 대표는 “중국으로 정치 망명을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통역사는 이를 외면했고, 그는 1차 조사를 받고 투먼 변방수용소로 이송됐다. 투먼은 중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 위치한 도시다. 중국 영토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매우 많다.
조선족 공안인 줄 알았던 사람이 北 보위부원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공안이 그에게 “너는 북으로 가면 죽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북으로 보내지 않고 중국에 있는 로개농장(로동개조농장)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북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말에 그는 “김정일 체제가 싫어서 나왔다”고 했다.
며칠 뒤, 처음 보는 얼굴이 나타났다. 그 조사관은 김성민 대표에게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쁘냐”고 물었다. 어쩌면 북송(北送)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이런저런 것들을 모두 갖다 붙이며 북한 체제를 비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럿이 수용소에 오더니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봉고차에 밀어 넣었다. 함경북도 남양의 국경 다리를 건너자, 중국 공안은 그를 북한 보위부로 넘겼다.
중국 쪽에서 남양을 바라보면 국경다리 앞에 ‘영생탑’이 있다. 보위부원은 탑 주변을 돌라고 지시했다. 그 주위에 돌멩이가 있을 리가 없는데, 어느새 장사하던 아주머니들이 돌을 들고 와 그를 향해 던지며 ‘조국의 반역자’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북한군 대위가 겪기에는 너무나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보위부원들은 그를 온성 보위부로 끌고 갔다.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사용되던 때도 아니요, 신분증을 지니고 있지도 않고, 그는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김성민 대표는 본인이 원산악기농장 노동자라고 말했다.
“걸친 옷이 전부니까, 제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잖습니까. 처음에는 저기 먼 지역의 노동자인 것처럼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보위부가 확인해 보고, 사실이 아니자 때리더군요. 그러고 나서 또 제가 신분을 지어내 말을 했어요. 확인해 보고 사실이 아니자 또 때렸고요. 고문을 당한 것은 아니고, 그렇게 얼굴이 퉁퉁 부은 상태로 시간이 지났습니다.”
― 그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군요.
“온성 보위부에서 조사받은 지 며칠 지났을 때 그 희망이 모두 물거품이 됐습니다. 제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투먼 변방수용소에서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쁜지 털어놔 봐라’고 했던 이였습니다. 조선족 공안인 줄 알았던 사람이 실은 북한 보위부 직원이었던 거죠.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리는 열차 밖으로 몸을 던지다
다음 날, 그가 복무했던 부대와 인민무력부 소속 보위사령부 군관들이 왔다. 그들은 “평양 가서 조사를 받고, 다시 부대에 가서 조사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호송원들의 손에 이끌려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 탔다. 일반 객실이 아닌, 호송원과 승무원들이 타는 특별 객실이었다. 기차는 느릿느릿하게 평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북한군 대위 출신이 탈북하고, 북한 체제에 대한 온갖 비판을 했으니 그는 평양에 도착하는 순간 더 이상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도망쳐야 한다!”
김성민 대표의 머릿속에는 이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톈진 감옥에서 40일, 투먼 변방수용소에서 열흘 남짓 있었던 탓에 그의 수갑을 찬 팔목은 온통 짓이겨져 있었다. 벼룩과 이, 빈대에 뜯겨서 난 상처 때문이었다. 북한 보위부원들은 그의 처지가 도저히 수갑을 찰 수 없다고 생각해 솜옷 위에 수갑을 채운 터였다. 손을 살살 움직여보니, 한쪽 손을 빼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는 100m 간격으로 세워져 있는 열차 전봇대였다.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린다, 군에서 훈련한 대로 착지한다, 그런데 전봇대는 어찌 피할 것인가?’
그는 평양으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수없이 탈출 방안을 고민했다. 열차가 평양 인근에 인접했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화장실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시속 80km로 달리는 열차 밖으로 몸을 던졌다. 김성민 대표의 말이다.
“며칠 동안 그렇게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연습했는데 그게 다 통하지 않더만요. 몸을 던지는 순간 아무 생각이 안 들어요.”
― 그래도 좀 멋지게 표현해 보시지요,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을 하신 건데요.
“아니에요. 정말 그냥 본능적으로 열차에서 뛰어내린 겁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요. 정신 차려보니까 선로 옆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열차가 그냥 계속 운행할 줄 알았는데 저 멀리서 수십 개의 손전등이 반짝이더군요. 저를 잡으러 오는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반대 방향으로 뛰었습니다.”
“이 나라는 망했구나”

― 반대 방향에는 뭐가 있었나요.
“산자락이었는데 걷기가 힘들었습니다. 감옥, 수용소에 너무 오래 있어서 몸을 움직일 겨를이 없었고, 영양 상태도 좋지 못했고요. 어떻게든 숨어야 한다는 생각에 없는 힘을 쥐어짜 기어서 필사적으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산자락에 붙어 얼마 가지 않았을 때, 호송원들이 정신없이 앞으로만 달려 그의 주위를 지나쳐갔다. 손전등 불빛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보면서, 김성민 대표는 다시 산을 기어올라갔다.
산에서 하루를 은신한 뒤 주변 기차역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그의 수배 사진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는 다시 북으로 올라가는 화물열차 위에 올라타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1996년 3월, 밖은 여전히 쌀쌀했다. 열차를 숨어 타다 내리고, 산에 은신했다가 다시 열차를 타고 이동하다 보니 산나물을 캐러 올라오는 남루한 차림의 북한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김성민 대표를 보더라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먹을 것을 캐느라 정신이 없었다. 군대에서 복무했기에 이 같은 광경을 목격할 일이 없었던 김성민 대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나라는 망했구나. 내가 여태 이런 나라를 위해 찬양하는 글을 썼단 말인가.”
기차를 타고 몇 날이나 이동했을까. 오전 9시쯤 기차 옆으로 두만강이 보였다. 그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두만강을 향해 냅다 달렸다. 두만강의 3분의 1은 얼어 있었다. 여기가 북한 땅인지 중국 땅인지 알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할 때, 모퉁이 깃대에 적힌 중국 글씨를 보고서야 그는 비로소 안심했다. 그는 벌러덩 땅에 누워 이내 잠을 자기 시작했다.
“자유를 찾았다, 살았다 뭐 그런 느낌은 없었습니다. 사람의 생리 때문인지 중국 땅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냥 온힘을 다해 잠을 자고 싶었습니다.”
― 탈북한 지 6개월 만에 재탈북한 것 아닙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데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반년 전에 머물었던 중국 옌지교회로 다시 찾아갔습니다. 태중원 목사는 이미 제가 남조선으로 간 줄 알고 계시더군요.”
― 남조선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은 했나요.
“아니요. 사실 예전에 중국에 머물 때 베이징 한국대사관으로 찾아가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기다리라는 답만 들었거든요. 거기다 애써 톈진에서 한국 배를 찾았지만 선장이 이실직고하는 바람에 공안에게 잡혔죠. 사실 당시에는 한국으로 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들어오다
‘재탈북’한 김성민 대표는 1999년 2월까지 중국 옌지에서 머물렀다. 옌볜병원 의사였던 태중원 목사의 처제와 결혼했고, 딸도 얻었다. 그의 신분은 중국인, 마침 연락이 닿은 한국에 사는 삼촌이 그를 만나기 위해 옌지로 날아왔다. 성공한 사업가가 된 삼촌은 그를 보자 이내 눈물을 쏟았고, ‘한국에서 같이 살자’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삼촌이 건네준 몇만 달러로 김성민 대표는 한국식 당구장, 노래방을 차렸다. 그와 처지가 비슷했던 탈북 청년들 수십 명을 이곳에서 숨겨주고 재워줬다. 삼촌과 왕래를 이어간 덕분에, 중국 여권으로 두 번 서울을 찾았다가 1999년 2월에 김포공항에서 체포됐다. 수사기관은 그의 행동이 수상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김성민 대표는 체포 후 순순히 ‘북한 장교 출신’이라고 털어놓고 조사기관으로 이송돼 10개월 동안 조사를 받았다. 그러고 1999년 12월, 대한민국 국민으로 다시 태어났다.⊙
북한 620 훈련소 예술선전대 대위 김진은 멍하니 앉아 눈앞에 펼쳐진 압록강을 바라봤다. 부대를 탈출한 지 꼭 8일째 되던 날이었다. 압록강변을 순찰하던 군인 세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군복을 입고 있던 그가 소속과 성명을 밝히자, 조장인 듯한 군인이 이름을 안다며 친근감을 표시했고 보초교대를 마치고 금방 돌아오겠으니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들이 떠나자 김진은 압록강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몸이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갈 즈음에야 인근에서 빨래하던 여인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2004년 4월 20일 서울시 양천구 목동
김성민(金聖珉) 자유북한방송 대표가 방송 부스에 앉았다. 두 달 전인 2월 16일과 4월 15일에 시험방송을 마쳤고, 오늘부터 본방송을 시작기로 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는 남북(南北) 장성급 군사회담 결과에 따라 2004년 6월부터 대북(對北) 방송을 중단키로 합의했다.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탈북인들이 북한 동포를 위한 민간 방송을 하기로 결정했다. 김성민 대표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북녘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보내는 자유북한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민간 對北 방송 시작
![]() |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가 2024년 3월에 라디오 방송을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북한 체제에 그다지 불만이 없던 북한군 대위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더는 그곳에서 살기 어렵다고 판단해 탈북(脫北)했다. 중국 지린성 창바이, 지린성 옌지, 랴오닝성 다롄을 거쳐 남(南)으로 오던 그는 중국 톈진에서 공안에게 붙잡혀 북한 보위부에 넘겨졌다. 한반도 최북단인 온성에서 1차 조사를 받고 2차 조사를 위해 평양으로 이동하던 중 80km로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린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옌지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결혼하여 딸을 낳고, 중국인 신분으로 살던 그는 남한의 친척을 만나려다 서울 김포공항에서 체포되었다.
탈북자들이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온 것을 두고 흔히 ‘1만 킬로미터의 여정’이라고 하는데, 그에게 있어 이러한 표현은 사치스럽기만 하다. 대한민국 국민이 되자 그는 북한인권운동에 투신했고 북한 주민들에게 자본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자유북한방송을 만 20년째 하고 있다. 북한군 대위 김진이라는 이름은 그사이에 김성민으로 바뀌었다. 2024년 11월 30일과 12월 7일에 인천시 강화군에서 요양 중인 김성민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는 2017년에 폐암 4기, 뇌종양으로 수술, 항암 치료를 받고 호전됐다가 최근 병세가 심해졌다. 이번에는 암이 간으로 전이됐고 의사로부터 ‘6개월 남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그는 요즘도 ‘할 일은 한다’며 탈북민 행사, 일본 출장길에 오른다.
― 우리나라에 와서 북한인권운동을 했는데, 그래도 많은 이가 기억하는 것은 자유북한방송의 김성민이겠죠?
“아무래도 그럴 겁니다. 대북 방송을 의도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인들과 식사 중이었는데 TV에서 정상회담 소식이 나오고 남북이 상호비방 금지 차원에서 대북, 대남(對南) 방송을 중단한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함께 있던 선배들이 ‘우리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뜻을 모았습니다. 당시 저는 KTV의 〈서울말 평양말〉, KBS의 〈남북의 창〉, 라디오 〈출발 동서남북〉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소위 방송인이다 보니 나더러 하라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 출연과 운영은 엄연히 다를 텐데요.
“당시 친하게 지내던 ‘연합뉴스’의 조계창 기자가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돈 있고, 전파만 임차하면 된다’고 용기를 북돋워줬습니다. 처음에는 인터넷 방송(www.freenk.net)으로 시작했는데 목표는 단파 방송 송출이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친북 단체들, 방송국 앞에서 시위
― 방송 시작하고 북한에서 반응이 있었는지요.
“두 달쯤 지나니까 북한에서 반응을 하더군요. 김정일이 ‘당을 배반한 것도 모자라 나가서 반북(反北) 방송까지 하는 자들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못된 방송까지 하는 데 용납할 수 없다’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세계일보》의 한 기자가 관련 문건을 입수해 전해줬는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한데 친북(親北) 단체들이 거의 매일 방송국 앞에 와서 ‘방송을 중단하라’며 시위하고, 전대협 통일선봉대라는 사람들 200여 명이 와서 집회를 했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 때여서 아무래도 정부가 북한에 우호적이었죠.
“정부를 대신해서 방송을 하는 건데 신변 보호를 한다던 경찰관들은 오히려 저의 활동을 제한했습니다. 친북 단체는 연일 방송국 앞에서 반대 기자회견을 하는데 정작 저는 사무실 안에서 꼼짝달싹을 못하다 보니 화가 나고 ‘이건 아니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가 보다 적극적으로 방송에 임해야겠다고 결정한 이유는 그의 앞으로 쏟아져 오는 각종 협박 때문이었다. 황장엽(黃長燁) 선생의 얼굴에 붉은 페인트칠을 하고 과도를 넣은 소포, 죽은 쥐, 칼을 꽂은 인형 등이 수시로 배달됐다. 친북 단체 혹은 북한 추종 세력이 보냈음이 자명한데, 이 때문에 한동안 그는 어떠한 소포도 맘대로 열지 못했다. 그럴수록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이렇게 북한을 찬양하는 자들이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을 보니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구나!”
김성민 대표는 이렇게 생각했다.
“한국 정부에 손 내민 적 한 번도 없어”
자유북한방송 홈페이지에 게재된 설립 목적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소식과 진실을 전한다.
2.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전파한다.
3. 김정은 독재 정권 추종 세력을 비판·경고한다.
4. 북한의 인권 참상을 대한민국과 국제사회에 알린다.
5. 한반도의 통일과 세계 민주화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한다.
6. 탈북인들의 교류와 소통, 입장 표명 기회를 제공한다.〉
― 그렇게 지낸 세월이 벌써 20년이네요.
“제가 자부하는 것은 자유북한방송은 대북 방송을 시작한 이후로 매일 2시간씩, 365일, 20년 동안 단 한 번 중단하지 않고 방송을 했다는 겁니다. 정권이 바뀌거나 국제사회가 요동치거나, 코로나19 여파가 있었을 때도요. 단 하루도 방송을 내보내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끌고 온 것에 긍지감을 갖고 있습니다.”
―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바람을 탈 수 있었을 텐데요.
“방송에 대한 책임감이 컸고 수전 숄티(Suzanne Scholte) 여사가 컨트롤해 준 덕이 컸습니다. 저는 좌파 정권은 물론이고 우파 정권이 들어섰을 때에도 한국 정부에 한 번도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수전도 ‘미국도 그렇지만 한국에서 정부에 손 내밀었다가 낭패 보는 일이 너무 많을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방송은 전파가 기본이고, 전파는 모두 돈입니다. 이것을 정부 지원으로 했다가 끊기면 안 되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자생적으로 운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초기부터 이런 생각을 했다니 놀랍네요.
“주위에서 많이들 도와줬어요. 어떻게든 방송을 시작해야 한다며 탈북 선배 20여 명이 100만원씩 모아주고, 삼촌이 초창기 운영자금 2억8000만원 정도를 대줬습니다. 제가 정착금,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쏟아부었고요. 고(故) 안응모 전(前) 내무부 장관, 이북오도청 황해도·평북도·평남도 도민회 등에서 도왔습니다. ‘이대목동병원 정문에서 만나자’는 분이 있어서 나가보니 점잖아 보이는 분들이 봉투를 주고 가는데, 성우회(한국의 예비역 및 퇴역 장성 단체)분들이더군요. 알게 모르게 도와주는 분들이 많았고 우리 나름대로 3년 치 예산을 확보하고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 그래도 세월이 20년인데 힘든 일이 부지기수였겠지요.
“라디오 방송 스튜디오를 여러 번 옮기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방송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 때문에 장안동의 북한 연구소에서 양천구 신정동으로, 대령연합회가 있던 강남과 다시 양천구 목동으로 옮겨다녀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스튜디오를 다시 꾸리고 예산을 다시 편성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 ‘얼만큼 버틸 수 있을까’ 하던 사람들 보란 듯이 매일 두 시간씩 방송을 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 우리 방송은 미국의 자유북한방송 후원회를 비롯해 10달러, 100달러, 1만원짜리 100% 후원만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자유북한방송은 본방송을 개시한 지 1년 반이 지난 2005년 12월 8일부터 단파 방송을 시작했다. 주파수는 7530kHz(오전 4~6시), 12155kHz(오후 8~9시), 7600kHz(오후 10시~자정)를 사용한다. 단파 방송은 말 그대로 단파(短波)를 이용한 방송으로 특성상 먼 곳까지 도달하며 장거리 방송용으로 활용된다. 단파 방송을 들을 수 있는 수신기를 통상 단파라디오라고 부른다. FM 방송은 주파수 변조를 이용하는 방송인데 단파 방송보다 적은 지역을 커버하지만 기상과 환경의 영향을 적게 받아 고(高)음질 청취가 가능하다. 김성민 대표의 자유북한방송 청취 리포트를 보면 저 멀리 유럽의 노르웨이, 스위스에서 방송을 들었다는 사람들도 꽤 있다.
‘허공에 뿌리는 메아리’
― 단파 방송의 위력을 알고 있었습니까.
“외국인들이 청취 보고서를 보내주고 있지만, 저희 방송은 허공에 뿌리는 메아리입니다. 북한 동포들이 이 방송을 들었는지를 실시간으로 알 수도 없고 피드백도 빨리 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끝까지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제가 북한에서 들어봤기 때문입니다.”
― 탈북하기 전에 대북 방송 청취자였군요.
“북한군에 있을 때 ‘적지물자(敵地物資)’라고 해서 양말, 트레이닝복, 불티나 라이터, 담배, 라디오 등이 하늘에서 종종 떨어졌습니다. 사병 때는 엄두를 못 냈고 장교가 된 다음에 라디오를 하나 구해 선전대 창작실에서 들었습니다. 창작실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거든요. 저희 자유북한방송의 제1 목적이 ‘북한 주민에게 외부 소식과 진실을 전파한다’ 아닙니까. 북한의 가장 큰 특징은 외부와의 정보 차단입니다. 자체적으로 뉴스를 생산해 《로동신문》을 비롯한 중앙기관지를 통해 뿌리고 교과서를 만들고, 우상화 교육을 하고 역사를 왜곡합니다. 저도 이런 식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는데 막상 라디오를 들어보니까 전혀 다른 얘기를 하더군요.”
― 구체적으로 라디오에서 어떤 얘기를 들으셨는데요.
“강인덕 선생(전 통일부 장관, 그는 1980년 1월부터 1988년 2월까지 KBS에서 심리전 프로그램 〈북한 노동당 간부들에게〉를 진행했다) 방송을 들었는데 신기한 얘기가 많았습니다. 북에서는 김정일의 고향이 백두산이라고 했는데 방송을 들어보니 러시아 하바롭스크라는 겁니다. 구체적인 사람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계속 듣다 보니 ‘내가 아는 장군님이 아닌가? 교과서가 잘못된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당시 북에서 황순희라는 여성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는데 방송을 들어보니 그 사람이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의 친구이자 실질적으로 김정일을 키운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얘기를 듣다 보니 왜 황순희가 북에서 잘나가고 있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 조금 의심이 들거나 흩어져 있던 정보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 같은 거였을까요?
“처음에는 ‘희한하네’ 정도였고 자꾸 듣다 보니 의심도 들었죠. 하지만 저는 북한 체제에 워낙 충실한 대위였기 때문에 남조선에서 괜한 얘기를 지어내는 것이라고 애써 외면했습니다.”
“북한 주민 누구나 바깥세상 궁금해해”
![]() |
김성민 대표(왼쪽에서 두 번째)가 2003년 미국 하원의원 청문회에서 북한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모습. 가운데가 황장엽 선생이다. |
“그럼요. 라디오가 없어서 듣지 못할 뿐입니다. 당시엔 한국어를 통해 외부 소식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가 대북 방송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방송을 ‘남산 안기부에서 북한 사회를 흔들기 위해 만드는 모략 방송’이라고 선전(宣傳)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호기심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원천 봉쇄하는 것이 될 리가 없죠.”
― 이런 경험 때문에 자유북한방송이 허공에 뿌리는 메아리지만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군요.
“듣는 사람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간혹 자유북한방송이 북한 체제 비판을 너무 세게 할 때는 북한 인접 지역에서 ‘너무한 것이 아니냐’는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습니다. 일상적인 라디오 방송처럼 실시간으로 피드백이 오지 않지만, 북한 동포들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것은 확실했습니다. 실제로 제 방송을 들었다며 찾아오는 탈북자들을 만날 때 마음이 뭉클합니다. 처음부터 남한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탈북자가 알음알음으로 돈 모아서 매일 방송하는 일이 어디 쉬운가요? 어쩌면 운영 자금 모으느라 고민해서 암(癌)이 생겼을지도 몰라요(웃음). 그래도 방송을 20년이나 지속했으니… 뿌듯합니다.”
![]() |
그의 정신적 동지인 수전 숄티 여사가 지난 2008년 라디오 방송국을 방문했을 때 모습이다. |
“2003년에 미국 하원의원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수전은 1990년대 초부터 탈북자 지원과 북한 인권 운동을 했는데 당시 탈북난민구출 운동을 하던 김상철 변호사에게 ‘미국 청문회에서 탈북자 3명의 증언이 필요한데 추천해 달라’고 했습니다. 김상철 변호사가 저를 소개해서 김정일의 경호원이었던 이용국, 수용소에 있던 이신옥과 함께 워싱턴에 가게 됐습니다. 이듬해에 수전이 서울에 왔는데 저를 못 알아보더라고요. 동양인들이 비슷하게 생겨서 그랬나 봐요. 왜 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따져 물으며 친해져서 이후에 서로에게 각인됐습니다. 수전이 자유북한방송 운영 자금을 미국에서 모금해 주고, 북한자유주간 행사도 같이하고 있습니다.”
― 정신적 동지네요.
“네, 맞습니다.”
남한에 온 뒤 소령으로 입대 준비
김성민 대표가 남한에 정착한 것은 1999년 12월이었다. 그의 전직(前職)이 북한군 대위였기에 남한에서는 당연히 그가 군(軍) 생활을 이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북한에서 장교 출신이 탈북하면 한 계급 진급시켜 현역으로 입대시켜 주는 제도가 있었다. 김성민 대표는 신체검사, 국방부 장관 면담 등을 모두 마치고, 입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촌이 ‘북에서 군대 생활만 한 사람이 또 하느냐.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니까 회사 생활을 해보라’고 해서 삼촌 회사로 출근을 시작했다. 이 같은 결정을 하고 국방부 장관에게 ‘회사원으로 지내겠다’고 했더니 뜻밖에 ‘알았다’는 답변이 왔다. 하지만 회사 생활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그는 주변의 탈북민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다. 자연스럽게 2001년에 자생적 탈북 단체인 ‘백두한라회’가 만들어졌다.
“초창기 생활 정착금을 다른 탈북자들보다 3배 정도 많이 받았습니다. 탈북자들 만나면 제가 술 사고, 밥 사고, 그렇게 어울려 지냈죠. ‘우리도 계 모임 같은 것을 만들자’고 해서 월 10만원씩 내는 28명이 생겼습니다. 대통령실 행정관을 했던 조 아무개도 있었고, 북한학을 전공한 최대석(崔大錫) 이화여대 교수가 저희를 가르쳤는데 ‘술만 먹는 모임은 안 된다. 이왕이면 의미 있는 모임을 하자’고 해서 친목 봉사를 했습니다. 봉천동 달동네 쪽방촌에 연탄 나르고 도배하고, 그러다 보니 우리 활동이 몇 번 뉴스에 나왔습니다. 최초의 자생적인 탈북자 단체라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 그때 황장엽 선생이 뉴스를 본 모양입니다. 그때 탈북자동지회는 황장엽 선생과 황 선생과 함께 탈북한 김덕홍(金德弘)씨로 지지가 갈리던 시절이거든요.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이 공석(空席)이 됐는데 황장엽 선생이 제 이름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자네 아버지와 내가 김일성대 동료 교수였네’
![]() |
황장엽 선생은 생전에 김성민 대표에게 편지를 자주 썼다. |
“그 문구를 보는 순간 황장엽 선생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 선생은 대학 총장을 지냈고, 제 선친(先親)은 평교수였으니 하늘과 땅 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편지에서 ‘동료 교수’라고 쓴 것을 보고, 제가 더 이상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뵀고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을 맡게 됐습니다.”
― 외부에서는 김 대표를 ‘황장엽의 양아들’이라고 했죠.
“황 선생은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어요. 강연 다니면서 제 소개를 할 때 ‘내 아들 같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아버지처럼 모셨거든요. 제 눈에 비친 황 선생은 너무 고독했습니다. 국정원에서 꼭꼭 숨겨놓은, 외출조차 제대로 허락되지 않는 사람, 일반 탈북자들에게는 하늘처럼 높은 사람, 그런데 만날수록 아버지 같은 냄새가 너무 나는 사람이었습니다. 황 선생은 국가정보원 경호팀의 철통 보안 속에 토요일에 미리 허락된 곳만 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황 선생을 8년 정도 모셨는데 그렇게 마음이 짠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적적하실까 싶어 딸아이를 데려갔는데 ‘손녀 생각이 난다’고 해서 이후에는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과일이든, 과자든, 눈에 보이는 건 전부 아이 가져다주라며 통째로 주셨습니다.”
― 세상이 황 선생에 대해 너무 야박하게 평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중상모략이 너무 많습니다. 황장엽 선생이 안보전략연구소 이사장을 할 때 월급이 700만원 정도였습니다. 월급날 황 선생은 200만원, 100만원을 봉투에 넣어 다 나눠줬습니다. 황 선생이 정한 사람에게 직접 가져다주는 것은 제 임무였고요. 황 선생이 돌아가신 다음에 ‘구두쇠였다’ ‘돈 벌어서 여자한테 다 줬다’는 헛소문을 내는데 황 선생은 수중에 100만원도 없었습니다. 황 선생에게 돈을 받았던 이들이 침묵하는 것을 보면 열이 나요. 제가 돈을 전달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압니다.”
‘카드라는 거, 나도 한 번 써보고 싶다’
![]() |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한 김성민 대표(왼쪽)와 황장엽 선생(오른쪽). |
“밤에 문자가 오니까 너무 궁금하잖아요. ‘아이고, 이 할부지가 어디에 쓰셨을까’ 해서 물어보니 황씨 모임에서 아주 폼나게 긁으셨대요. 얼마나 신이 나셨을까요. 황 선생의 휴대전화도, 하나뿐인 직불카드도 모두 저나 제 부인 명의였습니다.”
― 황 선생은 무엇을 꿈꿨습니까.
“인간 중심 철학이죠. 북에서 인간 중심 철학이 주체사상으로 변모되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황 선생의 철학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황 선생의 철학을 공부하는 A, B, C 팀이 있었는데, 저는 어디에도 소속하지 않았습니다. 황 선생한테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저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다들 어려워했거든요. 하지만 저는 황 선생의 철학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같고, 할아버지 같아서 그냥 선생을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 황 선생 돌아가시고 1년 만에 추모 모임을 만드셨죠.
“‘황장엽을 사랑하는 모임’은 제가 만든 게 아니에요. 탈북자동지회 홈페이지를 만드는 친구가 있는데 샤프하고 똘똘한 친구예요. 그 친구가 제안하고 제가 빨리 만들자고 해서 만든 겁니다. 지금도 황장엽 철학에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인간적으로 아버지 같고, 철학자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도 해마다 부인과 함께 대전 현충원에 두 번씩 갑니다. ‘할부지, 나 왔어요’라고 하고 한참 얘기합니다.”
중국 곳곳을 떠돌며 남한行 꿈꾸다 좌절
김성민이라고 개명(改名)한 것은 북에서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남한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삼촌이 ‘너의 사촌들은 돌림자로 성인 성(聖) 자를 쓴다’고 해서 바꿨다. 기자가 만난 김성민 대표는 담백한 사람이었다. 죽음을 앞뒀다고 해서 그의 행적을 과장하지도, 과시하지도 않았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은 명줄이 길다’는 말이 있다. 사선(死線)을 숱하게 넘은 그는 이대로라면 100세까지는 거뜬히 살아내야 할는지 모른다.
압록강을 건너니 중국 쪽은 45도의 가파른 제방이었다. 한 조선족 청년이 나무 막대기를 구해와 그를 끌어올려 줬다. 북한군 대위의 탈북 소식에 양강도 보위부에서는 다음 날 체포조를 창바이로 보냈다. 그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중국 창바이의 한 교회로 들어갔다. 교회의 여집사는 “북한군이 어제부터 당신을 찾고 있다. 이곳은 위험하다”며 그를 데리고 12시간을 달려 중국 옌지로 갔다.
1995년, 당시 중국 도로에는 검문이 없었다. 그가 탈북한 시점을 1996년으로 소개한 기사들이 많다. 정확하게는 1995년 9월이다. 그는 한동안 신분이 들통날 것을 우려해 1996년이라고 살짝 포장했다. 그는 옌지에서 조선족인 태중원 목사를 만났다. 목사는 그에게 교회에서 먹고 자도 좋다고 했고, 그는 6개월 동안, 정확히는 1996년 2월까지 중국 옌지에서 지냈다. 이즈음 김성민 대표는 ‘인민폐 500만원이 있으면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백두산 견학을 가는 목사 일행이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조선족 현지 선교사에게 부탁해 500만원을 구해다 줬다. 돈이 생기자 그는 중국 다롄으로 떠났다. 당시 그의 목표는 하루라도 빨리 남조선으로 가는 것이었다.
다롄에서 만난 김○○ 목사는 그에게 500만원을 건네받더니, 한쪽 구석에 있는 청년을 가리키며 ‘저 조선족 청년을 따라가면 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성민 대표는 그 청년과 함께 다롄항으로 갔다.
“어느 배를 타야 남조선으로 가느냐고 청년에게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더군요. 자기의 임무는 다롄항까지만 저를 데려다주는 것이었대요. 다롄항은 중국 보초병들이 즐비했고, 항구라서 그런지 새벽 2시가 되어도 사방이 환했습니다. 때마침 2월이어서 날씨는 얼음장처럼 추웠습니다. 그 청년에게 ‘내가 남조선 배를 찾아볼 테니, 혹시 못 찾을 경우를 대비해 기다려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중국 공안에 붙잡히다
― 어렵게 다롄항까지 갔는데, 이번에는 알아서 남한 배를 찾아야 한다니요.
“대형 선박들이 정박한 항구 쪽으로 보초병의 눈을 피해 다가가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바닷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는데 아뿔싸, 저는 남조선 배에는 한글이 적혀 있을 줄 알았어요. 아니었습니다. 온통 영어로 적혀 있는 거예요.”
― 저런, 그 청년은 기다려주던가요?
“제가 불쌍했던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중국말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그 청년이 아니었다면 또 어찌 됐을지 알 수 없죠.”
그 청년은 김성민 대표에게 ‘아무래도 500만원을 건넨 목사에게 속은 것 같다’며 자신과 함께 톈진으로 가자고 했다. 톈진에 함께 가는 친구들을 통해 남조선 배를 찾아주겠다며 말이다. 그렇게 김성민 대표는 다시 톈진으로 향했다. 청년은 친구들에게 들었다며 ‘톈진항에 남조선 광석 운반선이 있다고 하니 그 배에 몰래 타라’고 했다.
김성민 대표는 밤에 항구에 몰래 들어가 선박에 접근했다. 배에 거의 다가갔을 때 공안 셋이 뛰어나왔다. 그는 “배 선원인데 잠시 외출을 나갔다 오는 길”이라고 둘러댔다. 중국 공안은 배 선장을 불렀다. 그는 중국 공안이 한국어를 못 하는 것을 감안해 선장에게 웃으며 사정 설명을 했다. 하지만 선장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노스 코리아 아미!”
중국 공안은 그를 체포했다. 그는 톈진 감옥에 수감돼 40여 일이나 있어야만 했다. 2월은 중국의 최대 명절인 춘절이 있는 때라서, 감옥에서의 업무도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나중에야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여자 통역사가 나타났지만 한국말로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김성민 대표는 “중국으로 정치 망명을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통역사는 이를 외면했고, 그는 1차 조사를 받고 투먼 변방수용소로 이송됐다. 투먼은 중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 위치한 도시다. 중국 영토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매우 많다.
조선족 공안인 줄 알았던 사람이 北 보위부원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공안이 그에게 “너는 북으로 가면 죽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북으로 보내지 않고 중국에 있는 로개농장(로동개조농장)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북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말에 그는 “김정일 체제가 싫어서 나왔다”고 했다.
며칠 뒤, 처음 보는 얼굴이 나타났다. 그 조사관은 김성민 대표에게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쁘냐”고 물었다. 어쩌면 북송(北送)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이런저런 것들을 모두 갖다 붙이며 북한 체제를 비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럿이 수용소에 오더니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봉고차에 밀어 넣었다. 함경북도 남양의 국경 다리를 건너자, 중국 공안은 그를 북한 보위부로 넘겼다.
중국 쪽에서 남양을 바라보면 국경다리 앞에 ‘영생탑’이 있다. 보위부원은 탑 주변을 돌라고 지시했다. 그 주위에 돌멩이가 있을 리가 없는데, 어느새 장사하던 아주머니들이 돌을 들고 와 그를 향해 던지며 ‘조국의 반역자’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북한군 대위가 겪기에는 너무나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보위부원들은 그를 온성 보위부로 끌고 갔다.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사용되던 때도 아니요, 신분증을 지니고 있지도 않고, 그는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김성민 대표는 본인이 원산악기농장 노동자라고 말했다.
“걸친 옷이 전부니까, 제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잖습니까. 처음에는 저기 먼 지역의 노동자인 것처럼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보위부가 확인해 보고, 사실이 아니자 때리더군요. 그러고 나서 또 제가 신분을 지어내 말을 했어요. 확인해 보고 사실이 아니자 또 때렸고요. 고문을 당한 것은 아니고, 그렇게 얼굴이 퉁퉁 부은 상태로 시간이 지났습니다.”
― 그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군요.
“온성 보위부에서 조사받은 지 며칠 지났을 때 그 희망이 모두 물거품이 됐습니다. 제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투먼 변방수용소에서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쁜지 털어놔 봐라’고 했던 이였습니다. 조선족 공안인 줄 알았던 사람이 실은 북한 보위부 직원이었던 거죠.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리는 열차 밖으로 몸을 던지다
다음 날, 그가 복무했던 부대와 인민무력부 소속 보위사령부 군관들이 왔다. 그들은 “평양 가서 조사를 받고, 다시 부대에 가서 조사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호송원들의 손에 이끌려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 탔다. 일반 객실이 아닌, 호송원과 승무원들이 타는 특별 객실이었다. 기차는 느릿느릿하게 평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북한군 대위 출신이 탈북하고, 북한 체제에 대한 온갖 비판을 했으니 그는 평양에 도착하는 순간 더 이상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도망쳐야 한다!”
김성민 대표의 머릿속에는 이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톈진 감옥에서 40일, 투먼 변방수용소에서 열흘 남짓 있었던 탓에 그의 수갑을 찬 팔목은 온통 짓이겨져 있었다. 벼룩과 이, 빈대에 뜯겨서 난 상처 때문이었다. 북한 보위부원들은 그의 처지가 도저히 수갑을 찰 수 없다고 생각해 솜옷 위에 수갑을 채운 터였다. 손을 살살 움직여보니, 한쪽 손을 빼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는 100m 간격으로 세워져 있는 열차 전봇대였다.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린다, 군에서 훈련한 대로 착지한다, 그런데 전봇대는 어찌 피할 것인가?’
그는 평양으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수없이 탈출 방안을 고민했다. 열차가 평양 인근에 인접했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화장실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시속 80km로 달리는 열차 밖으로 몸을 던졌다. 김성민 대표의 말이다.
“며칠 동안 그렇게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연습했는데 그게 다 통하지 않더만요. 몸을 던지는 순간 아무 생각이 안 들어요.”
― 그래도 좀 멋지게 표현해 보시지요,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을 하신 건데요.
“아니에요. 정말 그냥 본능적으로 열차에서 뛰어내린 겁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요. 정신 차려보니까 선로 옆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열차가 그냥 계속 운행할 줄 알았는데 저 멀리서 수십 개의 손전등이 반짝이더군요. 저를 잡으러 오는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반대 방향으로 뛰었습니다.”
“이 나라는 망했구나”

― 반대 방향에는 뭐가 있었나요.
“산자락이었는데 걷기가 힘들었습니다. 감옥, 수용소에 너무 오래 있어서 몸을 움직일 겨를이 없었고, 영양 상태도 좋지 못했고요. 어떻게든 숨어야 한다는 생각에 없는 힘을 쥐어짜 기어서 필사적으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산자락에 붙어 얼마 가지 않았을 때, 호송원들이 정신없이 앞으로만 달려 그의 주위를 지나쳐갔다. 손전등 불빛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보면서, 김성민 대표는 다시 산을 기어올라갔다.
산에서 하루를 은신한 뒤 주변 기차역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그의 수배 사진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는 다시 북으로 올라가는 화물열차 위에 올라타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1996년 3월, 밖은 여전히 쌀쌀했다. 열차를 숨어 타다 내리고, 산에 은신했다가 다시 열차를 타고 이동하다 보니 산나물을 캐러 올라오는 남루한 차림의 북한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김성민 대표를 보더라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먹을 것을 캐느라 정신이 없었다. 군대에서 복무했기에 이 같은 광경을 목격할 일이 없었던 김성민 대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나라는 망했구나. 내가 여태 이런 나라를 위해 찬양하는 글을 썼단 말인가.”
기차를 타고 몇 날이나 이동했을까. 오전 9시쯤 기차 옆으로 두만강이 보였다. 그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두만강을 향해 냅다 달렸다. 두만강의 3분의 1은 얼어 있었다. 여기가 북한 땅인지 중국 땅인지 알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할 때, 모퉁이 깃대에 적힌 중국 글씨를 보고서야 그는 비로소 안심했다. 그는 벌러덩 땅에 누워 이내 잠을 자기 시작했다.
“자유를 찾았다, 살았다 뭐 그런 느낌은 없었습니다. 사람의 생리 때문인지 중국 땅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냥 온힘을 다해 잠을 자고 싶었습니다.”
― 탈북한 지 6개월 만에 재탈북한 것 아닙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데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반년 전에 머물었던 중국 옌지교회로 다시 찾아갔습니다. 태중원 목사는 이미 제가 남조선으로 간 줄 알고 계시더군요.”
― 남조선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은 했나요.
“아니요. 사실 예전에 중국에 머물 때 베이징 한국대사관으로 찾아가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기다리라는 답만 들었거든요. 거기다 애써 톈진에서 한국 배를 찾았지만 선장이 이실직고하는 바람에 공안에게 잡혔죠. 사실 당시에는 한국으로 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들어오다
‘재탈북’한 김성민 대표는 1999년 2월까지 중국 옌지에서 머물렀다. 옌볜병원 의사였던 태중원 목사의 처제와 결혼했고, 딸도 얻었다. 그의 신분은 중국인, 마침 연락이 닿은 한국에 사는 삼촌이 그를 만나기 위해 옌지로 날아왔다. 성공한 사업가가 된 삼촌은 그를 보자 이내 눈물을 쏟았고, ‘한국에서 같이 살자’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삼촌이 건네준 몇만 달러로 김성민 대표는 한국식 당구장, 노래방을 차렸다. 그와 처지가 비슷했던 탈북 청년들 수십 명을 이곳에서 숨겨주고 재워줬다. 삼촌과 왕래를 이어간 덕분에, 중국 여권으로 두 번 서울을 찾았다가 1999년 2월에 김포공항에서 체포됐다. 수사기관은 그의 행동이 수상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김성민 대표는 체포 후 순순히 ‘북한 장교 출신’이라고 털어놓고 조사기관으로 이송돼 10개월 동안 조사를 받았다. 그러고 1999년 12월, 대한민국 국민으로 다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