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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세상

도장 장인, 만년필 탐심가, 골동 덕후 이야기

아날로그 취향이 보석이 되는 순간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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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장장이 예인 김광동… 돌, 나무, 금속 재질을 쓰다듬고 두드리고 어루만지다
⊙ 40년 만년필 연구가 박종진… 인문이 녹아든 만년필로 세상 읽기
⊙ 30대 골동 덕후 박영빈… 고려청자 다완에 차를 따라 마시고 ‘골동멍’ 때리는 MZ 세대
예인(藝人)을 꿈꾸는 도장 장인 김광동 선생.
  한국인장박물관(관장 이재인)의 소개로 옛길 김광동(金光東·66) 선생을 만났다. 그는 서각과 전각 작가다.
 
  기자는 경기도 시흥의 한 작업실에서 차가운 돌덩이에 짙은 자국을 남기는 칼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한겨울 소복하게 쌓인 함박눈을 밟을 때 나는 뽀드득뽀드득 소리처럼 들렸다. 김 선생은 “도장을 새길 때 들리는 소리가 제 생(生)에 상쾌한 여운을 주었”고 “그 소리에 매료돼 밤을 지새웠다”며 울림 있는 말로 대화를 이어갔다.
 
  “서각이란 나무 판재에 글씨를 새기는 작업 또는 그 결과물인 작품을 말합니다. 때로는 그림을 새기기도 하죠. 전각은 도장의 개념으로서 돌, 나무, 금속 등 모든 재질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로 돌을 많이 사용하죠.”
 
 
  전각과의 만남은…
 
김광동 선생은 “도장을 새길 때 들리는 소리가 제 생(生)에 상쾌한 여운을 준다”고 말한다.
  “돌(전각)을 쓰다듬고 두드리고 어루만지고 ‘빠알간 연지’(인주)를 바르면 가슴이 설렌다”고 말한다.
 
  전각과의 만남은 정해진 운명의 수순일지 모른다. 대학 전공의 길(한양대 경영학과)은 조직 속에 들어감을 전제로 한 과정이었고, 조직의 경직성에 적응하지 못한 그는 다른 길을 찾아야만 했다. 부친이 오래전에 발을 들였던 이 업(業)을 어깨너머로 배워가며 도장을 새기기 시작했다. 햇수로 30년 가까이 한길을 걸어왔다. 현재 그는 한국캘리그라피창작협회 자문위원이자 대한민국서예대전 초대작가, 한국인장협회 이사(기술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아 활동 중이다.
 
  “아버지는 100수를 바라보시는 연세임에도 지금도 2평 남짓한 좁은 도장포에서 작업을 하십니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매일 복(福)을 나누어 주시는 아버지를 보며 도장 파는 일에 보람을 느끼지요.”
 
  요즘은 대개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도장을 판다. 디지털 물결이 인장 업계를 넘볼 무렵, 그는 시대를 역행하여 오히려 아날로그의 길을 택했다. 그 길은 짚신과 행전 끈을 바싹 동여매고 길을 나서 해넘이 뒤에도 꾹꾹 눈두덩을 눌러야 하는 고된 장인의 여정이었다.
 
  “오랫동안 인장협회에서 여러 명장에게 각종 기예를 배웠고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서예 과정, 전각 과정도 습득했죠. 학문적 깊이가 있어야 하기에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 부친께서는 처음부터 도장 파는 일을 하셨나요?
 
  “아뇨. 아버지는 수십 가지 직업을 옮기며 일하셨어요. 이사 다닌 것만 해도 헤아릴 수 없고, 방황을 많이 하셨죠. 서적을 파는 외판원도 하셨는데, 버스 안, 혹은 남의 집이나 사무실을 기웃거리며….
 
  끝내 팔지 못하고 남은 단행본과 전집류가 단칸방 한쪽을 빼곡히 차지했죠.”
 
 
  “예술의 기본은 조화와 화합”
 
김광동 선생의 서각과 전각 작품들.
  ― 여러 가르침을 통해 배운 인장의 세계란 어떤 것일지 궁금합니다.
 
  “예술은 단순함에서 나오지만, 그 기본은 조화와 화합에 있다고 믿습니다. 변화에 집착하다 보면 통일은 나중에 되어버리고, 조화가 먼저 이뤄진 연후에 변화와 기교가 따라야 해요.
 
  요즘 작품들은 기법과 기교에 현혹되어 너무 쉽게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어요. 정직함과 소박함이 없음은 근본이 상실되는 것과 같아요.”
 
  그가 던지는 말에서 어쩐지 내공이 느껴졌다. 다음 말 또한 그렇다.
 
  “졸박함(거친 듯 보이지만 소박한 맛)이 한계에 이르러 더 갈 곳이 없으면 형상에 기대어 강약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대소에 착안해야 하죠. 무엇보다 가장 자신 있는 소질을 부각시켜 세상에 드러내려고 합니다.”
 
  ― 도장을 새길 때 어떤 서체를 사용합니까.
 
  “글자가 한자인 경우는 전서체(篆書體), 한글의 경우는 훈민정음체를 사용해요. 둘 다 전통 서예의 기본 서체입니다. 따라서 먼저 글자의 형상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글자의 배치와 획의 굵기, 여백의 조정 등이 중요합니다. 이를 장법(章法)이라 하는데 그림의 스케치 또는 디자인이라 보면 됩니다.
 
  따라서 그 기본은 서예술(書藝術)에 있습니다. 새김질은 서예의 느낌을 돌에 조각하여 표현해 내야 합니다. 또한 그 재료가 돌이므로 돌의 투박하고 질박한 느낌도 살아 있도록 새김질하는 것이 중요하죠.”
 
  그는 동양화나 수묵화를 볼 때 낙관을 눈여겨본다. 그림의 귀퉁이에 찍힌 붉은 도장이 그에게는 그림의 전부처럼 느껴진다. “아니, 크기가 작아서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없으면 허전해서 못 견딜 것 같은….”
 
 
  장이, 匠人, 예술가의 차이
 
  ― 도장 같은 삶을 꿈꾸시는군요.
 
  “작품의 일부를 구성하며 균형을 맞추어주고 작품 품격을 높여주는 완성자의 역할을 도장이 합니다. 저는 그 도장과 같은 존재를 꿈꿉니다. 동시에 그 도장을 만드는 사람… 이것은 제 숙명입니다.”
 
  ― 기능을 넘어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보십니까.
 
  “저도 아직 예술의 경지에 이르려면 까마득합니다.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옛사람들의 작품을 충실히 재현해 보고 습득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창작이 없으면 옛것의 답습이고 모방이며, 그렇게 만든 결과물은 작품이 아닌 상품일 뿐이지요.”
 
  ― 장이, 장인(匠人)과 예술가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장이는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다소 비하하는 느낌을 내포합니다. 도장장이, 양복장이, 옹기장이, 칠장이 등으로 표현되지요. 장인은 그 분야에서 오랜 기간 종사함에 따라 손기술이 숙련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술인은 이것을 뛰어넘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 변형시키고 새로운 것을 창작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입니까.
 
  “제 고향이 충북 제천입니다. 제천 지적(地籍)박물관의 독도 관련 자료들을 전각 작품화하는 작업을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독도를 주제로 한 노래 500여 곡 중 일부를 선정해 돌에 새기고 이를 종이 위에 찍어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여느 고향 또한 그렇지만 제천… 이름이 참 정겨워요. 한글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지명을 돌에 새기고 싶어요.
 
  또 제천은 의병(義兵)의 도시입니다. 의병에 관한 자료를 한칼 한칼 새김질하여 작품화하고 싶어요.”
 
  역사의 진실을 발굴해 새기고 찍어내 세상에 활짝 펼쳐 보이고 싶다는 꿈을 말하는 그의 말 끝에 ‘아름다운 예술가 옛길’이라고 새겨진 선명한 도장을 ‘쾅’ 찍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가을 햇살 적당히 시원한 오후에, 그의 도장(道場)에서 나왔다.
 
 
  서랍 속의 보물, 만년필
 
만년필 탐심가 박종진. 사진=박종진
  우리나라 유일의 만년필연구소 소장을 만나기 위해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를 찾았다. 한 건물 2층 출입문을 여니 그가 등을 곧게 펴고 서 있었다. 사무실이 늦가을 어스름만큼이나 어두웠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점점 눈과 귀가 밝아졌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듯한 만년필 이야기를 들었다. 이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만년필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즐기는 주인공이 몹시 궁금해졌다.
 
  박종진(朴鍾振·54) 소장에게 만년필은 서랍 속 보물이다. 스마트폰이 우리 시대의 변화를 이야기해 주는 물건이라면 100년 전에는 만년필이 이런 물건이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클립(만년필 따위에 달린, 웃옷 주머니 윗단에 끼울 수 있게 하는 쇠)의 모양이나 펜촉 형태에 따라, 그리고 만년필의 생긴 모양에 따라 펜이 살아온 나이를 짐작할 수 있다.
 
  ― 만년필의 생산 시기를 알려면 무엇을 살펴야 하나요.
 
  “만년필, 볼펜, 연필은 서로 비슷하게 보이지만 나름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요. 연필은 육각기둥이나 원통 모양이고 볼펜은 연필과 비슷하지만 대개 클립이 있지요. 이런 모양이 된 것은 세월이 지나며 군더더기를 깎고 다듬어 꼭 필요한 부분만 남겼기 때문이죠. 만년필도 이런 과정을 거쳤어요.”
 
  1883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실용적인 만년필은 펜촉을 보호하기 위한 뚜껑의 유무만 다를 뿐 연필과 비슷했다. 하지만 손잡이 부분에 턱이 있어 잡기 불편했고, 좀 더 큰 펜촉을 사용하려면 그만큼 길고 큰 뚜껑이 필요했다.
 
  1905년경에는 좀 더 편리한 휴대를 위한 클립이 뚜껑에 부착되기 시작했고, 1907년에는 잉크가 밖으로 새지 않는 세이프티(safety) 만년필이 등장해 히트를 쳤다. 1910년대에는 뚜껑에 클립이 부착됨은 물론, 뚜껑을 돌려 열고 잠그는 스크루 캡 방식이 등장했다. 이게 대세가 되면서 만년필은 연필과는 차별화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면 현대의 만년필은 어떤 모양이 대세일까?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만년필 형상은 가운데가 통통하고 양 끝으로 갈수록 좁아지고 끝이 둥근 모양일 것입니다. 시가(cigar) 담배 혹은 어뢰와 닮은 유선형 모양이죠. 요즘 대표적인 모델이 모두 유선형이에요.”
 
  불세출의 명작(名作) 파커51(1941년 출시), 몽블랑149(1952년 출시)도 모두 유선형이다. 실은, 이 모델들이 성공하자 그 모양과 특징을 따라 한 만년필들이 계속 나오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만년필의 특징은 클립이 거의 뚜껑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짧다는 점이죠. 흙이 들어가지 않도록 디자인된 군복 상의 주머니 덮개 때문인데, 이 짧은 클립을 밀리터리 클립이라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일본과 독일에선 전쟁의 영향으로 펜촉에 금(金) 사용을 금지했다. 대신 크롬, 니켈 등으로 펜촉을 만들었는데, 당시 펜촉을 ‘전시 펜촉(wartime nibs)’이라 불렀다고 한다. 기자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만년필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메릴 스트립의 손동작
 
  그는 요즘 다시 배우 메릴 스트립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무언가에 빠지면 완벽하게 알 때까지 파고든다.
 
  “그녀의 작품 중에 만년필과 관련한 장면이 담긴 영화가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입니다.
 
  만년필도 도구를 넘어 사람 이야기를 담고 있는 물건이잖아요. 인간을 가장 많이 닮은 필기구라는 것도 이런 이유고요. 극 중 메릴 스트립이 로버트 레드포드에게 펜을 건네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펜을 잡는 손동작에 반해버렸어요.
 
  저는 평생 만년필을 쥐어봤잖아요. 저보다 더 아름답게 쥐더군요.”
 
  ― 세상에… 저도 그 장면을 찾아봐야겠네요.
 
  “그 장면을 보면 메릴 스트립이 얼마나 만년필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어요. 완벽해요. 그건 만년필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연기죠.”
 
  기자는 문득 이런 날카로운 관찰 자체가 만년필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만년필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종진 소장은 마음에 드는 만년필을 쥐고 자는 버릇이 있다. 아주 오래된 버릇인데, 이럼에도 그간 단 한 번도 망가트린 적이 없다. 숟가락을 쥐고 밥을 먹는 것보다 더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돌 지나서부터 막대기를 손에 쥐고 놓지 않았다고 해요. 숟가락 쥐는 것보다 먼저 손에 무언가를 잡고 살았다는 겁니다.”
 
  ― 놀랍네요.
 
  휘어진 것은 손대지 않고 꼭 곧은 것만 들고 다녔다고 한다. 잘 때도 쥐고 있고, 일어나자마자 막대를 찾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막대는 나중에 철사로 바뀌었다. 대신 어머니는 둥근 차돌을 갖고 다녀야 했다. 철사가 휘어지면 어머니가 철사를 두드려 그 자리에서 바로 펴주기 위한 용도였다.
 
 
  막대에서 연필, 만년필로
 
박종진 소장에게 만년필은 욕망의 대상이자 연구의 대상이다.
  나이가 들면서 철사는 젓가락으로 바뀌었고 젓가락은 연필로, 연필은 만년필로 바뀌었다.
 
  “만년필을 언제나 들고 다녔죠. 목욕탕이나 수영장에 가도 탈의 직전까지 함께했어요.”
 
  만년필은 실용성을 갖춘 지 130년이 넘어 수많은 모델이 있지만, 사실 손에 쥐고 잘 만한 후보는 몇 개 되지 않는다. 많아야 10개 종류 정도다. 이 안에서 개별적인 상태를 따지고 수집한다. 요즘 손에 쥐고 잠을 청하는 만년필은 ‘펠리칸100’이라는 모델이란다.
 
  만년필을 너무 사랑하다 보니 수리하는 법도 어느새 깨쳤다고 한다. 만년필 회사에 수리를 의뢰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지금 만년필을 수리하고 있는데 구부러진 펜촉을 두 달째 펴고 있어요.”
 
  ― 뭐라고요? 두 달째?
 
  “망치로 두드려 조금씩 펴고 있어요. 수리를 맡긴 사람도 재촉하지 않아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어요.”
 
  ― 한번에 펴면 안 되나요?
 
  “한번에 하면 얘가 힘들어하니까.”
 
  여기서 ‘얘’란 만년필을 말한다. 이미 그에게 만년필은 사물이 아닌 혼이 있는 생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피하게 교체하는 걸 제외하고 원래 상태로 복원하는 일을 즐깁니다.”
 
  ― 두 달씩이나 펜촉을 편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아직 두 달밖에 못 했어요.”
 
  그는 40년 넘는 세월 동안 틈만 나면 만년필을 찾아 벼룩시장을 헤매거나 취향에 맞는 잉크를 얻기 위해 직접 제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또한 골방에서 하루 종일 만년필을 써보고 분해한 경험을 담담히 써 내려간 만년필 여행기 《만년필 탐심(探心)》을 최근 펴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책 속에 있는 〈만년필 회사의 작가 사랑〉이란 부제의 글을 흥미롭게 읽었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도 만년필로 작업을 했을까? 그렇다면 어떤 만년필을 썼을까? 대개의 작가는 연필이나 볼펜, 만년필로 작품을 써 내려간다. 타자기, 노트북이 대신하는 시대지만 흰 종이 위로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대체불가능한 펜의 위력 때문이다.
 
 
  작가와 만년필, 헤밍웨이와 애거사 크리스티 에디션 이야기
 
  만년필 회사가 유명 작가를 내세워 마케팅을 시작한 역사는 120년이 넘는다. ‘폴 이 워트(Paul E. Wirt)’라는 만년필 회사는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을 모델로 내세워 만년필 역사상 최초로 100만 개 이상 판매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작가-만년필’ 조합이 재등장한 시기는 만년필이 부활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다. 파커는 《셜록 홈스》로 유명한 아서 코난 도일이 파커 ‘듀오 폴드’ 애용자였다고 광고했다.
 
  그러자 1992년 몽블랑은 작가 이름을 붙인 만년필 한정판을 출시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에디션은 1930년대 출시된 ‘몽블랑139’를 기본으로 몸통을 오렌지색으로 바꾸고 당대를 풍미했던 작가 헤밍웨이 이름을 넣었다.
 
  “헤밍웨이를 좋아하는 사람과 만년필을 좋아하는 사람 모두가 살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어요. 이 한정판 시리즈의 성공으로 만년필 세계의 주도권은 파커에서 몽블랑으로 넘어갑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파커가 1995년 한정판 만년필을 두 개(제2차 세계대전 기념 펜, 1920년대 모델을 현대적으로 복각한 노란색 펜)나 내놓으며 반격에 나섰지만 이미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은 몽블랑을 이길 수는 없었다.
 
  몽블랑은 1993년 한정판 작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애거사 크리스티 에디션을 내놓아 다시 인기를 끌었다.
 
  “그의 최고 걸작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 1926년에 출간된 것에 착안해 1920년대 만년필을 기본으로 삼았어요. 변한 것은 딱 두 가지인데 편리하게 잉크를 넣을 수 있게 필러를 바꿨고 당시에는 선택 사항이었던 클립을 끼웠죠. 그런데 바로 이 클립이 신의 한 수가 됐습니다.”
 
  뱀 한 마리가 만년필을 칭칭 감고 머리를 아래로 내리고 있는 모습을 클립으로 만들었다. 크리스티의 80여 편의 추리 소설 중 절반 이상이 독을 사용한 살인이라는 점에 착안한 모델이었다.
 
 
  “서울 펜쇼, 20~30대 여성이 50%”
 
박종진 소장의 애장 만년필. 왼쪽부터 파커51(1940년대), 파커75(1960년대), 몽블랑149(1950년대), 오노토 마그나(1930년대), 펠리칸100(1930년대)이다.
  “작가를 표현하는 데 뱀만 한 게 없었던 겁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에디션은 대성공을 거뒀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크리스티가 만년필을 즐겨 쓰지도 않았다는 점이죠.”
 
  1997년 파커는 몽블랑보다 더 화려한 파커 스네이크 한정판을 내놓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냥 뱀 문양이 있는 만년필에 불과했다.
 
  ― 만년필에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사람 사이에도 존재하나 봅니다. 디지털 세상이 될수록 사람들은 반대로 아날로그를 찾으려고 해요. 스마트폰, 노트북, 전자문서 시대에 만년필이 여전히 각광받는 이유입니다. 저희가 1년에 두 차례씩 ‘서울 펜쇼’라는 만년필 동호인 모임을 가져요. 대략 1000명 정도가 모이는데 20~30대 여성이 50%를 차지합니다. 놀랍지 않나요?”
 
  ― 만년필 초심자를 위해 한 말씀 한다면?
 
  “새 펜이 좋아요. 중고 만년필의 펜촉은 누군가의 손에 맞게 닳았잖아요. 값비싼 펜을 살 필요도 없어요. 3000원 정도 하는 중국산 펜도 쓸 만하거든요.
 
  만년필은 사람의 몸과 같아요. 피가 우리 몸을 순환하듯, 잉크가 만년필을 순환하거든요. 만년필을 안 쓸 때는 잉크를 빼놔야 합니다. 잉크가 굳어버릴 수 있으니까요.”
 
  만년필은 영어로 ‘fountain pen’이라고 불린다. 이는 펜촉에서 잉크가 흐르는 모습이 마치 분수에 물을 계속 공급하는 것과 유사해 보여 탄생한 단어다. ‘만년필’을 한자로 쓰면 ‘萬年筆’인데, ‘萬年’은 ‘오래 지속되는’의 의미를 담고 있다. 동양과 서양의 시각을 결합해 보면, 만년필이란 ‘끊임없이 내뿜는 분수처럼 영원한 펜’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박종진 소장의 만년필에 대한 열정 또한 매일 분수처럼 솟아나는 삶에 대한 열정 그 자체였다.
 
 
  프로 ‘골동 덕후’ 이야기
 
젊은 골동품 수집가인 박영빈. 사진=김정준
  〈젊은 수집가의 골동품 수집기〉라는 부제를 단 《골동골동한 나날》의 저자 박영빈(朴迎賓·31)씨는 바닷가에서 태어나 대학 공부를 위해 상경한 경상도 남자다. 스스로를 ‘골동 덕후’ ‘프로 골동러’라고 부를 정도로 어릴 때부터 옛것과 전통문화를 좋아해 박물관과 유적지를 들락거렸다. 그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이런 그의 ‘골동러’로서의 모습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커서는 불교학을 전공하며 언저리를 돌며 열정을 쏟던 골동이 어느덧 전공같이 돼버렸다. 이제는 상호보완적 영역이 되었다.
 
  “혼자 놀기가 심심하여 시작한 소셜미디어(‘연근들깨무침’이라는 닉네임)에서의 골동 글과 사진들이 어느덧 책 한 권으로 묶였다는 사실에 성공한 덕후라고 자부합니다.”
 
  박씨는 골동의 매력에 빠져 골동품을 수집하게 된 이야기부터, 그렇게 모은 골동들과 그것들을 수집하면서 겪은 일들에 대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맺게 된 인연들과 느꼈던 감정들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책에 담았다.
 
  “최근 소셜미디어를 보다 보면 한복이나 은장도, 나전칠기, 매듭, 칠보공예 같은 것들을 좋아하거나 직접 만들어보는 분들이 많이 보입니다. 디지털 혁명 시대에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실사용할 수 없으면 들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작정 모으는 것은 아니다. 옛 물건들을 하나둘 자신의 곁으로 모아 오는 데 있어 한 가지 철칙이 있다. ‘생활 속에서 실사용할 수 없으면 들이지 않는다!’다.
 
  예를 들어 다완(茶碗)이라 불리는 대접이나 잔, 접시는 실제 식기로 사용하고 촛대나 향로, 화병과 같은 물건들도 모두 실생활에서 사용한다. 그의 주장이다.
 
  “한복을 자주 입고 다니다 보니 복식 관련 유물로 구입했던 것을 착용하기도 해요. 대표적으로 갓이나 장도, 애체(안경) 같은 것이 대표적이죠. 원칙이 있다 보니 종종 정말 멋지고 훌륭한 작품이 나와도 내가 생활 속에서 쓸 일이 없어 들이지 않는 경우도 많아요.
 
  솔직히 제 몸만 한 항아리나 제 허리께까지 오는 고가구 같은 경우 싸게 나와도 둘 곳도 없거니와 관리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반대로 당장 사용할 순 없어도 공부를 위해 자료용으로 소장하자고 들인 경우는 결국엔 어떻게든 활용하게 되더군요.”
 

  살짝 가족들 눈치가 보여 방 여기저기 구석구석 유물들을 쌓아두거나 옷장이나 침대 아래 깊숙이 보관해 놓곤 필요할 때마다 하나둘 꺼내서 쓰고 있단다.
 
  따로 수장고나 진열장이 있는 게 아니다 보니 눈 돌리는 곳마다 일단 뭔가가 있다. 박씨가 쓰는 책상 위 노트북 옆엔 중국 원나라 때의 백자 향로, 민국(중화민국) 시기의 대나무 필통, 조선 말기에 제기로 만들어진 나무 향합이 놓여 있다. 이들 모두 발견하기가 흔한 물건이 아닌데, 시공을 넘나드는 아이템들이 태연하게 한꺼번에 놓여 있다.
 
  “골동을 쓰려니 아까워서 빈티지를 사고, 빈티지를 쓰기엔 조금은 부족해 골동을 쓰다 보니 집 여기저기에 골동이 굴러다닙니다.
 
  그런데 소중히 보전해야 할 유물들을 실생활에서 쓰는 모습을 탐탁지 않게 보는 시선도 많아요. 하지만 쓰임을 위해 만들어진 공예품의 경우 비록 고미술이라도 실생활에서 사용될 때야말로 가치가 빛난다고 저는 믿습니다.”
 
‘프로 골동러’의 슬기로운 수집 생활
 
  1. 골동 덕후도 덕후다.
  2.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없으면 들이지 않는다.
  3. 찾는 게 없으면 만들면 된다.
  4. ‘내돈내산’ 해서 내가 쓰면 그게 다 내 것.
  5. 옛사람을 표절하면 평균은 간다.
  6. 덕질도 알아야 한다.
  7. 알면 더 사랑하게 된다.
  8. 모으다 보면 ‘감’이 생긴다.
  9.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
  10. 멋있으면 됐지.
  11. 여행 중에도 골동 찾기는 끝이 없다.
  12. 수리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물건의 역사는 사람의 손길이 닿아 工藝로 완성
 
조선 시대 민화에서 인기 있었던 주제인 책가도를 염두에 두고 정리한 다구들 모습이다. 사진=김정준
  생각해 보면 아름다움을 곁에 두는 삶은 꽤 어렸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국 무역선 선장까지 지내셨던 외할아버지와 역시 배를 타셨던 아버지는 세계 각국에서 모은 기념품이나 소품을 거실 또는 유리문이 달린 찬장에 진열해 두곤 하셨다.
 
  어린애들이 잘못 만지면 안 된다며 손이 안 닿는 높은 곳에 두거나 문을 잠가두시곤 했지만, 그 반짝거리고 예쁜 것들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기어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기어 올라가 끄집어내거나 찬장에서 꺼내 만지작거리며 노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재미난 놀이였다.
 
  “그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거나 물건들의 쓰임새를 생각하는 것도 즐거웠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래된 물건들을 많이 보거나 만지게 되었고 이것이 골동품 수집과 감상으로 이어졌어요.”
 
  사실 고미술품을 구입할 때 그 물건의 내력은 따지지 마라는 이야길 자주 듣곤 한다. 유명한 누군가가 소장했다거나 해외에서 돌아왔다거나 하는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 물건을 보는 판단력이나 안목이 흐려질 수 있다.
 
  “하지만 옛 물건을 집 안에 들이게 된 이상 그 내력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물건이 값지지 않고 조악한 것일지라도 그런 옛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그것이 더 살갑게 느껴지기도 해요.”
 
  그 물건이 그의 손길이 닿아 공예(工藝)로 완성된다고 생각하면 돌연 가슴이 웅장해지기도 한다.
 
  “전통이란 분명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예부터 이어오는 것들이죠.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만들고 향유하는 것도 전통의 새로운 물결이 될 수 있단 걸 생각해 보면, 예부터 ‘지켜온 전통’에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새로운 전통’을 추가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선 전통을 이어가는 새로운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요?”
 
  전통공예와 문화는 본래의 모습을 잘 지켜 후대에 넘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아 있는 하나의 문화와 라이프스타일로 전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새로운 시도와 모습이 함께 어우러지는 온고지신의 모습이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산신탱 환수의 추억
 
소셜미디어를 통해 환수한 전주 정혜사 산신탱.
  《골동골동한 나날》에는 도난당했다가 경매로 올라온 ‘산신탱’이 불교계가 아닌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일반인들이 모여 환수를 이룬 사연이 나온다. 작년 3월의 일이다. 불교미술로 자주 자문을 구하는 후배 스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모 고미술 경매에 산신탱이 한 점 나왔는데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도록과 홈페이지 프리뷰 사진을 보니 드물게 화기(畵期)가 훼손된 것이 남아 있었다. 비단 바탕에 금박으로 문양을 그린 것이 꽤 격이 높은 탱화였다. 수소문 끝에 이 작품이 전주 정혜사에서 도난당한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당시 경매 시작가는 300만원. 경매사 측은 낙찰가로 500만원 이상을 예상하고 있었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모금 활동으로 경매 입찰 비용을 모으기로 한 뒤 글을 올렸다. 환수 모금 글은 조회수 15만 회 이상, 리트윗 800회 이상으로 확산됐고 모금에는 초등학생부터 타 종교인까지 106명의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사용자들이 앞다투어 참여했다.
 
  “도난당한 성보(聖寶)가 불교계의 도움이나 홍보 없이 순수하게 개인들의 모금으로 환수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어요. 낙찰액은 750만원이었죠.”
 
  이렇게 산신탱은 몇 달 후 본래 자리인 정혜사로 돌아갔다.
 
  “실패를 예상하고 시작한 환수금 펀딩이었으나 무사히 이뤄졌다는 점에서, 지금도 스스로 감동과 보람을 느낍니다.”
 
 
  ‘심심할 새가 없다’
 
  박씨는 골동들 사이에서 지내다 보면 하루하루가 심심할 새가 없다고 말한다. 늘 새로움을 안겨주는 오래된 골동품, 언뜻 들으면 모순 같지만, 시간을 거스르는 골동품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온다. 자신이 수집한, 앞으로 수집할 골동품을 대하는 열정적인 청년 박씨의 눈에서도 빛이 반짝였다.
 
  도장, 만년필, 골동품… 초를 다투는 디지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늦가을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다가온 3인의 이야기가 바쁜 일상에서 잠시나마 적어도 ‘디지로그(digilog)’한 명상의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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