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 편에 줄 서기를 하고 그래야 공천을 받는 거, 3류 정치나 하는 짓”
⊙ “예술은 밥 먹여준다. 잘 만든 영화 한 편은 우리나라 기업체 매출과 맞먹는다”
⊙ 대구 위해 효용 다한 ‘일몰법’ 통과시키려 노력해… 훗날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 대회의 종잣돈 마련
⊙ “강 의원은 내가 알던 가장 진솔하고 가장 인간적인 사람”
⊙ 경북 영천시 ‘신성일 기념관’ 착공식 가져… 내년 준공
편집자 주
영원한 ‘맨발의 청춘’인 영화계의 큰 별 신성일(申星一·1937~2018년·본명 강신성일)을 기리는 기념관이 경북 영천에 건립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천시는 최근 괴정동에서 ‘신성일 기념관’ 기공식을 갖고 내년 준공을 목표로 공사에 들어갔다. 11월 4일이면 타계 6주기(周忌)다. 필자는 신성일이 국회의원 시절(제16대·2000~2004년) 선임비서관(5급 상당)으로 재직하면서 본 ‘정치인 강신성일’을 추억한다.
⊙ “예술은 밥 먹여준다. 잘 만든 영화 한 편은 우리나라 기업체 매출과 맞먹는다”
⊙ 대구 위해 효용 다한 ‘일몰법’ 통과시키려 노력해… 훗날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 대회의 종잣돈 마련
⊙ “강 의원은 내가 알던 가장 진솔하고 가장 인간적인 사람”
⊙ 경북 영천시 ‘신성일 기념관’ 착공식 가져… 내년 준공
편집자 주
영원한 ‘맨발의 청춘’인 영화계의 큰 별 신성일(申星一·1937~2018년·본명 강신성일)을 기리는 기념관이 경북 영천에 건립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천시는 최근 괴정동에서 ‘신성일 기념관’ 기공식을 갖고 내년 준공을 목표로 공사에 들어갔다. 11월 4일이면 타계 6주기(周忌)다. 필자는 신성일이 국회의원 시절(제16대·2000~2004년) 선임비서관(5급 상당)으로 재직하면서 본 ‘정치인 강신성일’을 추억한다.
2018년 11월 4일 새벽이었다. 요란한 휴대전화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강신성일 의원의 부고(訃告)였다. 순간적으로 세상이 멈춘 듯했다. 이명(耳鳴)처럼 계속 내 귓가에 울렸다. ‘한번 찾아봬야지, 봬야지’ 했는데, ‘아〜 늦었구나…’ 탄식이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2주 전만 해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하는 건강한 모습이 TV를 통해 보였었다. 폐암 3기라는 우려와는 달리 지팡이나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는 건장한 노(老)신사로 나왔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했지만, 아직 그와 함께할 시간이 많아 보였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지인의 장례식장이었다. 대구뮤지컬 페스티벌 이사장직을 퇴직한 뒤 경북 영천의 ‘성일가’에서 지낼 때였다. 그때도 약 10년 만에 만나는 자리였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 송구스럽다”라고 하니 “괜찮다”며 너털웃음을 짓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강 의원은 나의 인생에 있어 매우 특별한 분이다. 30대 초반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나를 선임비서관(5급 상당)으로 서울 국회로 입성시켜주신 분이 아닌가? 지역구 누군가가 양아들이라며 시샘할 정도로 편애했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에게 목숨을 바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런 심정으로 국회에서 죽어라 일만 했던 기억이 있다.
그의 부고를 듣고 급히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아산병원 빈소에 갈 때까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장례식장 입구에 무수히 떨어져 있는 낙엽을 보고 얼어붙고 말았다. 처연히 떨어진 낙엽과 스산한 바람을 통해 그제야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인식해버린 것일까? 뜨거운 눈물이 수도꼭지를 튼 거처럼 쏟아져 내렸다.
“미스터 정, 원고 잘 쓰네”
내가 강 의원을 만난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나는 필연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서울시의회 공보실에서 말단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서울시의회보》를 만들며 취재하고 편집하는 본연의 업무는 물론 시의회 의장과 사무처장의 연설문을 쓰는 부수적인 일도 했다. 업무도 힘든데 나보다 먼저 들어온 전문직 공무원이 사사건건 나를 견제하고 시기했다. 서서히 일에 지쳐갈 무렵 모(某) 서울시의원이 솔깃한 제안을 했다. 자기가 잘 아는 강신성일 후보가 ‘글 잘 쓰는 연설문 작성자를 구하고 있다’는 것. 마침 16대 국회의원 선거(2000년 4월 13일)가 임박했다.
강 후보는 대구 동구의 한나라당 공천자였기에 ‘따놓은 당상’이라는 생각에 덜컥 사직서를 냈다. 호기롭게 고향 대구에 있는 강신성일 후보 선거사무실로 찾아갔다. 강 후보에 대한 첫인상은 슈트핏이 완벽한 올백머리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였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모 의원의 소개로 왔다’라고 전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 후보는 “소개한 시의원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내가 유명인이니 사람들은 나를 한 번만 봐도 잘 안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황당해하는 나의 표정을 직시한 강 후보는 이력서를 주고 가라고 했다.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나는 인생의 기로(岐路)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포기하면 크게 인생에서 낙마할 것 같았다. 두려워서 대구 본가에조차 갈 수 없었다. 어머니가 서울시 공무원을 그만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크게 실망할 거 같았다. 나는 선거사무실과 가까운 곳에 하숙집을 얻었다. 그리고 요청하지 않았지만, 밤을 새우다시피 하여 만든 원고를 선거사무실에 주곤 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20분간 야외 합동유세가 몇 번 있어서 원고가 필요하긴 했다.
어느 날 선거사무실 한쪽 귀퉁이에 있을 때였다. 강 후보가 저 멀리서 “미스터 정, 원고 잘 쓰네” 하고 외쳤다. 처음으로 나를 인정해주는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 후 강 후보는 나에게 합동유세를 비롯하여 TV 연설문, 라디오 연설문, TV 토론문 등의 원고를 다 맡겼다. 그리고 나를 잊지 않고 국회로 불렀다.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
16대 국회에 입성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강 의원과 둘이서 국회 마당을 걸은 적이 있다. 따뜻한 봄기운을 품은 잔디는 더욱 파랬다. 국회 광장을 응시하던 강 의원은 “봐라 좋지? 이게 사내가 하는 일”이라며 웃으면서 말했다. ‘두 번을 떨어지고 삼수 만에 배지를 단 것이 얼마나 기쁠까?’ 하고 생각했다. “난 우리나라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일해볼 테니 너도 그쪽으로 공부해라”고 했다.
그분의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은 대정부질문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어느 날 “대정부질문을 할 테니 국회사무처에 신청하라”고 했다. 전체 국회의원이 지켜보는 대정부질문이라 날짜가 다가올수록 걱정됐는지 나를 몇 번이나 불러 자신의 소신을 얘기했다.
“예술은 밥 먹여준다”
“나는 일생을 문화예술 쪽에서 일을 했다. 보람과 긍지를 느낀다. 그러나 평소 소망해오던 국회 문광위에 들어와 숱한 회의를 했지만, 문화와 예술에 관해 가벼운 언급조차 하는 의원이 없다. 예술은 밥 먹여준다. 잘 만든 영화 한 편은 우리나라 기업체 매출과 맞먹는다. 문화관광부의 예산 중 관광을 뺀 문화에 대한 예산이 지금보다 증액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그의 질문의 요지였다.
그러나 이런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이 녹아 있는 내용보다 굉장한 논쟁거리가 된 건 따로 있었다. 영화 〈친구〉(2001)를 언급한 대목이다.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친구〉를 보고,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사회 심리학적 배경에 전율을 느낀다”는 발언 이후 사람마다 각자 다른 해석을 하면서 사회적으로 일파만파되었다. 《조선일보》 1면 보도는 물론 각종 매스컴이나 TV 토론회에서 강신성일 의원의 영화 〈친구〉에 대한 발언을 논란거리로 삼았다.
‘용기 있다. 최고로 잘나가는 영화를 비판하기 쉽지 않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선배로서 바른말을 했다’라는 측과 ‘영화는 영화로 봐야 한다.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는 발언이다. 선배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라는 취지로 찬반(贊反)이 나눠졌다. 사무실에도 그런 찬반 전화가 빗발쳐 한동안 직원들이 몸살을 앓았다.
영화에 대한 애정은 지역 발전에서도 드러났다. 대구에 부산국제영화제처럼 유명한 국제영화제를 유치하고 싶어 했다. 부산국제영화제 같은 규모의 영화제가 아니더라도 춘사국제영화제 같은 전문성을 갖춘 국제영화제를 대구에서 개최하고 이를 정례화시키고자 했다. 그 후 강 의원은 나를 데리고 대구 지역 기업체를 돌았다. 영화제 개최에 따른 후원과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강 의원의 열정적인 설득이 주효했는지, 그들은 우리에게 기대 이상을 약속했다.
이와 더불어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1995)를 만들었던 이민용 감독, 영화제 대관 장소인 대구 인터불고 호텔 측과 몇 차례 회의를 거쳤다. 그렇게 대구국제영화제의 결실을 볼 무렵, 어느 날 강 의원은 자신의 방으로 나를 불렀다. 옅은 미소를 띠면서 “영화제 추진하기로 한 거 접자”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왜 그렇게 됐나?’고 이유는 묻지 않았다. 자존심 강한 강 의원이 열정적으로 추진한 일인데, 더 마음이 안 좋은 건 본인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왜 접어야 했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제 추진하기로 한 거 접자”
강 의원은 문광위 위원이기도 하지만 대구에 지역구를 둔 국회의원이었다. 대구시는 2000년 7월에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유치했다.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처음 열리는 대회였고 올림픽,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함께 스포츠 빅4 이벤트였다. 대구시는 원활한 대회 개최를 위해 근거가 되는 법안이 필요했다. 대구 국회의원 중 문광위원은 강 의원이 유일했다.
대구시는 그를 찾아와 대회를 지원하고 운영할 수 있는 ‘하계유니버시아드 지원법’ 발의를 요청했다. 난 대구시 심경섭 사무관 등과 함께 법안 조문에 대해 논의하느라 밤을 새웠다. 강 의원은 “유니버시아드 대회는 국제 행사니 여야가 따로 없다”면서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여당에도 전화를 걸어 공동발의를 요청했다. 강 의원의 노력에 힘입어 2001년 3월 ‘제22회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지원법’은 순조롭게 통과됐다. 이 법안은 대구가 성공적인 국제대회를 치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지원법 연장
이후 문제가 발생했다.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잘 치러 한껏 고무된 대구시 김범일 부시장(제31·32대 대구시장)이 시 간부들을 데리고 또다시 우리 방을 찾아왔다. 일전에 통과된 지원 법안을 4년 더 연장하는 법안을 발의해달라는 것이었다. 대구시는 이미 김범일 부시장을 단장으로 여희광 기조실장, 우대윤 사무관 등으로 지원단을 구성해 총력전을 펼칠 기세였다. 이미 대회가 끝나 효용이 다한 일몰법(日沒法)을 연장해달라니…. 대구시도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법을 연장하면 대구시가 옥외광고 사업자 선정권을 계속 가질 수 있었다. 여기에 따라오는 재정 혜택은 어마어마했다. 무슨 시설 투자하는 것도 아니고 시비가 들어가는 매칭 사업도 아니었다. 국회에서 법안만 연장해주면, 대구시가 거저 얻는 수익이었다. 그러나 이 법안이 통과되려면 누군가의 집요한 노력이 있어야 했다. 바로 강신성일 의원의 땀이었다.
당시 조해녕 시장을 비롯, 김범일 부시장의 집요한 요청이 있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고향 대구의 문화예술, 체육 발전을 위한 일이라, 강 의원은 법안을 발의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때부터 행안부에서 파견 나온 서기관, 사무관 등과 함께 법제실과 전문위원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한시법을 연장하는 사례는 없다는 이유로 일언지하(一言之下) 거절당했다. 결국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강 의원은 여야 상임위원 방을 일일이 돌며 연장법안을 만들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평소 읍소하거나 굽신거리는 건 모양 빠지는 일이라며 싫어했지만, 그때는 달랐다. 강 의원이 여야 두루 친하게 지낸 것이 이때 매우 큰 도움이 됐다.
스타 출신 의원의 읍소에 동했는지, 문광위 위원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여당 의원들도 그렇게 반대는 하지 않았다. 마침내 2003년 12월 ‘22회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지원법 중 개정법률안’은 수정 통과됐다. 이렇게 대구시는 다시 2년간 옥외광고 사업자 선정 권한을 누릴 수 있었다. 이후 나는 대구시 기조실에서 8년간 근무한 적이 있었다. 당시 시에서 만난 김형동 국장은 내가 강 의원 선임비서관 출신인 걸 알고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강 의원이 통과시킨 법 덕분에 생긴 재정으로 대구시는 문화·체육 부문을 진흥시킬 수 있었다. 또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종잣돈으로 잘 활용했다고 한다.
일몰법을 연장시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이건 순전히 여야를 잘 아울렀던 그의 개인 역량 덕분이었다. 법안 통과로 이득을 본 건 대구시뿐만 아니라 옥외광고 업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업체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2년간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정치부 기자와 연예부 기자
강신성일 의원은 정치부 기자들이 선호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과거 배우로서 정상의 인기를 누리 땐 연예부 기자들이 스스로 찾아와 취재했지만, 정치부 기자들은 처음 한두 번 찾아오고는 잘 찾아오지 않았다. 이런 중 강 의원이 유독 살갑게 대한 기자가 있었다. 지금은 서대문구을에서 3선의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그때는 《국민일보》 국회 출입기자였던 김영호 기자였다. 그와 친해지게 된 계기는 그의 아버지가 민주당 정치 거물이자 마당발인 6선의 후농(後農) 김상현 의원(金相賢·1935~2018년)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짙은 과거의 연이 있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1년에 60여 편의 영화를 찍던 강 의원은 야외 촬영도 밥 먹듯 했다. 그럴 때면 김상현 의원이 어디서 포장마차를 빌려와, 촬영에 지친 배우들에게 따뜻한 국수와 어묵을 제공했다. 이런 인연으로 둘은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지냈다. 나중에 김 의원의 손에 이끌려 야당인 신민당으로 입당할 뻔했으나, 엄앵란 여사와 주변의 완강한 만류에 부딪혀 뜻을 꺾었다고 한다.
아무튼 “김영호 기자에게 잘해주라”는 강 의원의 당부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 김영호 의원은 정치권에서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됐다.
그는 에둘러 좋게 표현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강 의원이 밥 먹자고 말하면 직원들은 스스로 약속이 있어도 만사 제쳐두고 빠짐없이 자리했다. 복어도 먹고, 낙지도 먹고, 워커힐호텔 뷔페도 먹었다. 때론 엄 여사가 있는 본집에 가서 식사할 때도 있었다. 늘 새로운 메뉴에 새로운 맛집에 가니 나부터 식사 시간이 즐거웠다. 어떤 때는 혼이 쏙 빠지도록 야단을 맞기도 했다. 처음에는 찬찬히 질책하다가 점점 격양되며 화를 내는 패턴이었다.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면, 엄 여사는 웃으면서 “나는 평생 그렇게 당하고 있는데,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래, 힘내라!” 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기도 했다.
이렇게 야단을 호되게 맞고 때론 상처가 됐는데도 난 아직도 그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럼 다른 직원의 마음도 나와 같을까? 채희덕 보좌관의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강 의원의 상반신 사진이 올라 있다. 강은태 비서의 대문 사진에는 강 의원의 사진이 여러 장 보였다. 조화정 비서는 비서 생활을 15년이나 했지만 강 의원과 함께할 때가 가장 좋았다고 예전에 말한 적이 있다. 신영일 보좌관은 말하면 뭐 하겠나? 영화배우 때부터 호형호제한 관계가 아닌가?
강 의원은 내가 알던 가장 진솔하고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다. 그 진솔한 내면을 알기에 앙금이 오래가지 않고, 이제는 그리움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
두려움 없던 상남자
한번은 의원 홈페이지 게시판에 네티즌들의 비난 소리가 왕창 달린 적이 있었다. 워낙 많이 달려 삭제를 하는 데 급급했다. 다음 주에도 수그러들지 않자, 고심 끝에 그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그런데 게시판을 읽은 뒤 껄껄거리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야, 맞다. 어떻게 알지? 컴컴한 곳에서 라면이나 먹고 댓글을 다는 놈들이, 어떻게 사생활을 이렇게 정확히 알지?” 하면서 삭제하지 말고 놔두라고 했다. 말대로 전혀 관심을 안 가졌더니 댓글은 점차 사라졌다.
강 의원의 지역구인 대구 동구는 갑을로 나누기 전이라 지역구 인구가 대구에서 가장 많았다. 그래서 전국에서 세 번째로 최다 득표를 해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대구 지역의 정치적 맹주는 고교 후배인 4선의 강재섭(姜在涉) 의원이었다. 강 의원의 입장에서는 그가 초선 의원이고, 지역구가 크든 작든 정치 신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대체로 초선 의원은 줄 서기를 잘해야 다음에 공천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문제로 강재섭 의원과 말다툼을 하다가 그의 멱살을 잡은 적이 있었다. 공천에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 따위는 개의치 않는 행동이었다. 보좌관과 나는 우려를 표했지만, 강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 편에 줄 서기를 하고 그래야 공천을 받는 거, 3류 정치나 하는 짓이다. 나는 행동을 후회 안 한다.”
강신성일 의원은 어떤 사람일까? 솔직하고 남자다운 사람, 고집은 있지만 소신이 뚜렷한 사람, 남에게 굽신거리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 고정된 틀을 싫어하고 자유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 다 맞는 얘기다.
그는 500편 넘게 주연을 하면서 우리나라 영화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이 많은 영화 중 그가 가장 사랑했던 영화는 〈만추〉(1966)다. 나뭇잎이 흐드러지게 떨어져 황량하지만 로맨틱한 늦가을이 배경이 된 영화다. 바바리 깃을 올리고 왠지 쓸쓸하게 보이는 ‘만추’의 이미지가 신성일, 강신성일이다. 스크린을 호령한 수많은 이미지 중 왜 이런 모습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다. 뭔가 빈 것 같지만 채울 수 없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늘 그립고 보고 싶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지인의 장례식장이었다. 대구뮤지컬 페스티벌 이사장직을 퇴직한 뒤 경북 영천의 ‘성일가’에서 지낼 때였다. 그때도 약 10년 만에 만나는 자리였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 송구스럽다”라고 하니 “괜찮다”며 너털웃음을 짓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강 의원은 나의 인생에 있어 매우 특별한 분이다. 30대 초반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나를 선임비서관(5급 상당)으로 서울 국회로 입성시켜주신 분이 아닌가? 지역구 누군가가 양아들이라며 시샘할 정도로 편애했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에게 목숨을 바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런 심정으로 국회에서 죽어라 일만 했던 기억이 있다.
그의 부고를 듣고 급히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아산병원 빈소에 갈 때까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장례식장 입구에 무수히 떨어져 있는 낙엽을 보고 얼어붙고 말았다. 처연히 떨어진 낙엽과 스산한 바람을 통해 그제야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인식해버린 것일까? 뜨거운 눈물이 수도꼭지를 튼 거처럼 쏟아져 내렸다.
“미스터 정, 원고 잘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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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 13일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강신성일 당선자가 부인 엄앵란씨와 껴안고 기쁨을 나누고 있다. |
강 후보는 대구 동구의 한나라당 공천자였기에 ‘따놓은 당상’이라는 생각에 덜컥 사직서를 냈다. 호기롭게 고향 대구에 있는 강신성일 후보 선거사무실로 찾아갔다. 강 후보에 대한 첫인상은 슈트핏이 완벽한 올백머리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였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모 의원의 소개로 왔다’라고 전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 후보는 “소개한 시의원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내가 유명인이니 사람들은 나를 한 번만 봐도 잘 안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황당해하는 나의 표정을 직시한 강 후보는 이력서를 주고 가라고 했다.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나는 인생의 기로(岐路)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포기하면 크게 인생에서 낙마할 것 같았다. 두려워서 대구 본가에조차 갈 수 없었다. 어머니가 서울시 공무원을 그만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크게 실망할 거 같았다. 나는 선거사무실과 가까운 곳에 하숙집을 얻었다. 그리고 요청하지 않았지만, 밤을 새우다시피 하여 만든 원고를 선거사무실에 주곤 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20분간 야외 합동유세가 몇 번 있어서 원고가 필요하긴 했다.
어느 날 선거사무실 한쪽 귀퉁이에 있을 때였다. 강 후보가 저 멀리서 “미스터 정, 원고 잘 쓰네” 하고 외쳤다. 처음으로 나를 인정해주는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 후 강 후보는 나에게 합동유세를 비롯하여 TV 연설문, 라디오 연설문, TV 토론문 등의 원고를 다 맡겼다. 그리고 나를 잊지 않고 국회로 불렀다.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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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 실패를 딛고 국회 입성에 성공한 강신성일 당선자가 16대 총선 다음 날인 2000년 4월 14일 부인 엄앵란씨와 함께 대구 동구 일대를 돌며 당선 사례 인사를 하고 있다. |
그분의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은 대정부질문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어느 날 “대정부질문을 할 테니 국회사무처에 신청하라”고 했다. 전체 국회의원이 지켜보는 대정부질문이라 날짜가 다가올수록 걱정됐는지 나를 몇 번이나 불러 자신의 소신을 얘기했다.
“예술은 밥 먹여준다”
“나는 일생을 문화예술 쪽에서 일을 했다. 보람과 긍지를 느낀다. 그러나 평소 소망해오던 국회 문광위에 들어와 숱한 회의를 했지만, 문화와 예술에 관해 가벼운 언급조차 하는 의원이 없다. 예술은 밥 먹여준다. 잘 만든 영화 한 편은 우리나라 기업체 매출과 맞먹는다. 문화관광부의 예산 중 관광을 뺀 문화에 대한 예산이 지금보다 증액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그의 질문의 요지였다.
그러나 이런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이 녹아 있는 내용보다 굉장한 논쟁거리가 된 건 따로 있었다. 영화 〈친구〉(2001)를 언급한 대목이다.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친구〉를 보고,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사회 심리학적 배경에 전율을 느낀다”는 발언 이후 사람마다 각자 다른 해석을 하면서 사회적으로 일파만파되었다. 《조선일보》 1면 보도는 물론 각종 매스컴이나 TV 토론회에서 강신성일 의원의 영화 〈친구〉에 대한 발언을 논란거리로 삼았다.
‘용기 있다. 최고로 잘나가는 영화를 비판하기 쉽지 않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선배로서 바른말을 했다’라는 측과 ‘영화는 영화로 봐야 한다.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는 발언이다. 선배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라는 취지로 찬반(贊反)이 나눠졌다. 사무실에도 그런 찬반 전화가 빗발쳐 한동안 직원들이 몸살을 앓았다.
영화에 대한 애정은 지역 발전에서도 드러났다. 대구에 부산국제영화제처럼 유명한 국제영화제를 유치하고 싶어 했다. 부산국제영화제 같은 규모의 영화제가 아니더라도 춘사국제영화제 같은 전문성을 갖춘 국제영화제를 대구에서 개최하고 이를 정례화시키고자 했다. 그 후 강 의원은 나를 데리고 대구 지역 기업체를 돌았다. 영화제 개최에 따른 후원과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강 의원의 열정적인 설득이 주효했는지, 그들은 우리에게 기대 이상을 약속했다.
이와 더불어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1995)를 만들었던 이민용 감독, 영화제 대관 장소인 대구 인터불고 호텔 측과 몇 차례 회의를 거쳤다. 그렇게 대구국제영화제의 결실을 볼 무렵, 어느 날 강 의원은 자신의 방으로 나를 불렀다. 옅은 미소를 띠면서 “영화제 추진하기로 한 거 접자”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왜 그렇게 됐나?’고 이유는 묻지 않았다. 자존심 강한 강 의원이 열정적으로 추진한 일인데, 더 마음이 안 좋은 건 본인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왜 접어야 했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제 추진하기로 한 거 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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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시절 강신성일. 2000년 6월 27일 열린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에서 일본 문화 개방과 영화 수출에 대해 문화부 장관을 상대로 질의하고 있다. |
대구시는 그를 찾아와 대회를 지원하고 운영할 수 있는 ‘하계유니버시아드 지원법’ 발의를 요청했다. 난 대구시 심경섭 사무관 등과 함께 법안 조문에 대해 논의하느라 밤을 새웠다. 강 의원은 “유니버시아드 대회는 국제 행사니 여야가 따로 없다”면서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여당에도 전화를 걸어 공동발의를 요청했다. 강 의원의 노력에 힘입어 2001년 3월 ‘제22회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지원법’은 순조롭게 통과됐다. 이 법안은 대구가 성공적인 국제대회를 치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지원법 연장
이후 문제가 발생했다.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잘 치러 한껏 고무된 대구시 김범일 부시장(제31·32대 대구시장)이 시 간부들을 데리고 또다시 우리 방을 찾아왔다. 일전에 통과된 지원 법안을 4년 더 연장하는 법안을 발의해달라는 것이었다. 대구시는 이미 김범일 부시장을 단장으로 여희광 기조실장, 우대윤 사무관 등으로 지원단을 구성해 총력전을 펼칠 기세였다. 이미 대회가 끝나 효용이 다한 일몰법(日沒法)을 연장해달라니…. 대구시도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법을 연장하면 대구시가 옥외광고 사업자 선정권을 계속 가질 수 있었다. 여기에 따라오는 재정 혜택은 어마어마했다. 무슨 시설 투자하는 것도 아니고 시비가 들어가는 매칭 사업도 아니었다. 국회에서 법안만 연장해주면, 대구시가 거저 얻는 수익이었다. 그러나 이 법안이 통과되려면 누군가의 집요한 노력이 있어야 했다. 바로 강신성일 의원의 땀이었다.
당시 조해녕 시장을 비롯, 김범일 부시장의 집요한 요청이 있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고향 대구의 문화예술, 체육 발전을 위한 일이라, 강 의원은 법안을 발의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때부터 행안부에서 파견 나온 서기관, 사무관 등과 함께 법제실과 전문위원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한시법을 연장하는 사례는 없다는 이유로 일언지하(一言之下) 거절당했다. 결국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강 의원은 여야 상임위원 방을 일일이 돌며 연장법안을 만들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평소 읍소하거나 굽신거리는 건 모양 빠지는 일이라며 싫어했지만, 그때는 달랐다. 강 의원이 여야 두루 친하게 지낸 것이 이때 매우 큰 도움이 됐다.
스타 출신 의원의 읍소에 동했는지, 문광위 위원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여당 의원들도 그렇게 반대는 하지 않았다. 마침내 2003년 12월 ‘22회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지원법 중 개정법률안’은 수정 통과됐다. 이렇게 대구시는 다시 2년간 옥외광고 사업자 선정 권한을 누릴 수 있었다. 이후 나는 대구시 기조실에서 8년간 근무한 적이 있었다. 당시 시에서 만난 김형동 국장은 내가 강 의원 선임비서관 출신인 걸 알고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강 의원이 통과시킨 법 덕분에 생긴 재정으로 대구시는 문화·체육 부문을 진흥시킬 수 있었다. 또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종잣돈으로 잘 활용했다고 한다.
일몰법을 연장시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이건 순전히 여야를 잘 아울렀던 그의 개인 역량 덕분이었다. 법안 통과로 이득을 본 건 대구시뿐만 아니라 옥외광고 업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업체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2년간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정치부 기자와 연예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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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 눈 오는 날, 국회의사당 앞에서 강신성일 의원과 보좌진. 왼쪽이 정두용 비서관(훗날 이회창 총재 보좌관), 오른쪽이 조화정 비서다. |
아무튼 “김영호 기자에게 잘해주라”는 강 의원의 당부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 김영호 의원은 정치권에서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됐다.
그는 에둘러 좋게 표현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강 의원이 밥 먹자고 말하면 직원들은 스스로 약속이 있어도 만사 제쳐두고 빠짐없이 자리했다. 복어도 먹고, 낙지도 먹고, 워커힐호텔 뷔페도 먹었다. 때론 엄 여사가 있는 본집에 가서 식사할 때도 있었다. 늘 새로운 메뉴에 새로운 맛집에 가니 나부터 식사 시간이 즐거웠다. 어떤 때는 혼이 쏙 빠지도록 야단을 맞기도 했다. 처음에는 찬찬히 질책하다가 점점 격양되며 화를 내는 패턴이었다.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면, 엄 여사는 웃으면서 “나는 평생 그렇게 당하고 있는데,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래, 힘내라!” 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기도 했다.
이렇게 야단을 호되게 맞고 때론 상처가 됐는데도 난 아직도 그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럼 다른 직원의 마음도 나와 같을까? 채희덕 보좌관의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강 의원의 상반신 사진이 올라 있다. 강은태 비서의 대문 사진에는 강 의원의 사진이 여러 장 보였다. 조화정 비서는 비서 생활을 15년이나 했지만 강 의원과 함께할 때가 가장 좋았다고 예전에 말한 적이 있다. 신영일 보좌관은 말하면 뭐 하겠나? 영화배우 때부터 호형호제한 관계가 아닌가?
강 의원은 내가 알던 가장 진솔하고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다. 그 진솔한 내면을 알기에 앙금이 오래가지 않고, 이제는 그리움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
두려움 없던 상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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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만추〉의 신성일. 사진=한국영상자료원 |
강 의원의 지역구인 대구 동구는 갑을로 나누기 전이라 지역구 인구가 대구에서 가장 많았다. 그래서 전국에서 세 번째로 최다 득표를 해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대구 지역의 정치적 맹주는 고교 후배인 4선의 강재섭(姜在涉) 의원이었다. 강 의원의 입장에서는 그가 초선 의원이고, 지역구가 크든 작든 정치 신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대체로 초선 의원은 줄 서기를 잘해야 다음에 공천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문제로 강재섭 의원과 말다툼을 하다가 그의 멱살을 잡은 적이 있었다. 공천에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 따위는 개의치 않는 행동이었다. 보좌관과 나는 우려를 표했지만, 강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 편에 줄 서기를 하고 그래야 공천을 받는 거, 3류 정치나 하는 짓이다. 나는 행동을 후회 안 한다.”
강신성일 의원은 어떤 사람일까? 솔직하고 남자다운 사람, 고집은 있지만 소신이 뚜렷한 사람, 남에게 굽신거리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 고정된 틀을 싫어하고 자유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 다 맞는 얘기다.
그는 500편 넘게 주연을 하면서 우리나라 영화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이 많은 영화 중 그가 가장 사랑했던 영화는 〈만추〉(1966)다. 나뭇잎이 흐드러지게 떨어져 황량하지만 로맨틱한 늦가을이 배경이 된 영화다. 바바리 깃을 올리고 왠지 쓸쓸하게 보이는 ‘만추’의 이미지가 신성일, 강신성일이다. 스크린을 호령한 수많은 이미지 중 왜 이런 모습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다. 뭔가 빈 것 같지만 채울 수 없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늘 그립고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