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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권운동가 연쇄 인터뷰

고국 떠난 中 반체제 인사들과 ‘천안문의 봄’

“북한 배후에 중국 공산당… 한국, 중국 민주화의 당사자”

글 : 김광주  월간조선 기자  kj96100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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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문 사태 실패한 건 ‘공산당 타도’ 구호 없었기 때문”(왕다이 민주중국연맹 부회장)
⊙ “연변에 한글 간판 사라져… 이대로 가면 30~50년 사이에 조선족 정체성 사라질 것”(지명광 자유아시아연대 대표)
⊙ “중국이 강력한 官權 국가가 된 건, 다른 나라들이 공산당에 유화 정책을 폈기 때문”
⊙ “한민족 사이 ‘갈라 치기’ 하는 움직임 있어”
  여권(旅券)을 대신해 재입국 허가서를 들고 다니는 중국인이 있다. 중국에서 나고 자라 하얼빈 소재 대학교까지 졸업했지만 정작 중국에서 그는 ‘존재한 적 없는 사람’이다. 왕다이(王戴·61) 민주중국연맹 부회장의 재입국 허가서엔 수많은 출입국 도장이 찍혀 있다. 1989년 천안문 사태(6·4 항쟁)를 계기로 고향 중국에서 내쫓기듯 떠났다. 젊은 시절 목도한 민주화의 좌절. 그는 지금도 세계 각국을 전전하며 못다 이룬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비슷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서울에 모였다. 중국 내 소수민족, 민주화 인사, 티베트 독립운동가, 위구르 수용소 수감자 등이다. 이들은 전 세계를 떠돌며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8월 19일엔 서울대학교에서 ‘2024 중국의 미래 국제컨퍼런스’가 열렸다. 이틀 뒤, 《월간조선》은 이번 행사에 참여한 이들을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먼저, 왕다이 민주중국연맹 부회장의 이야기다.
 
 
  “‘공산당 사랑하라’ 교육받았지만…”
 
1989년 중국에서 일어난 천안문 사태(6·4 항쟁) 당시 광장에 진입하는 탱크를 홀로 가로막았던 왕웨이린(王維林). 사진=로이터/뉴시스
  1964년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왕 부회장은 하얼빈이공대학 자동차 금형설계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80년대 중국의 민주화를 위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중국 전역에서 민주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중국 대학생들은 전화 등 전신(電信)을 통해 천안문의 학생운동 소식을 접했고, 동시 다발적인 전국 궐기로 이어졌다. 왕 부회장이 있던 하얼빈도 마찬가지였다. 하얼빈시청 앞은 도로가 마비될 정도로 집회 열기가 뜨거웠다. 그들 중 한 사람이었던 왕 부회장에게 이러한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당시 상황을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저희는 중국에서 ‘공산당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알고 있는 중국 공산당 관료들은 상당히 부패했고, 권력을 통해 각종 이윤을 챙기고 서로 결탁하는 등 부정부패가 만연했습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후야오방(胡耀邦·1915~1989년)이었는데, 그는 당시 실권자이던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년)으로부터 지명을 받은 후계자였습니다. 그런데 후야오방은 덩샤오핑과 같은 국가 원로가 일선에서 한 발 물러설 것을 제안하며 젊고 유능한 공산당원을 등용할 것을 주문했고, 덩샤오핑은 이를 자기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했습니다.”
 

  ― 천안문 사태 이후 비슷한 규모의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데 대해 어떻게 보시나요.
 
  “(1989년) 6월 4일 무력 진압이 발생한 이후, 저는 일본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희생자들 가운데엔 저의 동문도 있었고, 엄청난 슬픔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해 7월 15일 일본으로 가는 항공권을 구매했습니다. 일본에서 천안문 사태의 참상을 영상과 자료로 보니 그때 당시 학생운동이 실패한 이유와 부족했던 점이 보였습니다. 바로 ‘공산당을 타도하자, 공산당을 무너뜨리자’라는 구호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 그게 어때서요.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중국 공산당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라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젊은 학생들과 청년들로서는 당연히 공산당에 제안과 건의를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공산당이 이러한 목소리를 묵살하고 총과 탱크로 참혹하게 진압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상식이 붕괴되는 걸 느꼈습니다.”
 
 
  “외국인으로서 중국 민주화운동 하고 싶지 않아”
 
  “저는 민주화운동을 한 그 순간부터 중국 땅에 있을 수 없게 됐습니다.”
 
  왕다이 부회장은 예순을 넘긴 지금까지도 젊은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재학하던 하얼빈이공대로부터 졸업장도 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중국에서 그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말 그대로 무국적자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할 때도 여권 없이 입국했다. 일본 영주권만 있을 뿐, 외국에서 활동할 땐 관광 비자를 신청해 다닌다. 그에게 물었다.
 
  ―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할 생각은 안 했나요.
 
  “저는 일본 영주권이 있지만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인으로서 중국 민주화운동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외국인으로서 중국 민주화운동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 중국 국적이 없어졌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요.
 
  “주일본 중국 영사관에 가서 제 여권을 발급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중국에 저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여권을 발급해줄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제가 중국 민주화운동에 가담하고 중국을 떠난 이후 중국 정부는 제 호적을 말소하고 중국에 있던 제 신분증도 회수해 갔습니다.”
 
  ― 이해가 되지 않는데,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살았던 기록이 없는 사람이 된 겁니다.”
 
  ― 불안정한 신분이네요.
 
  “맞습니다.”
 
  ― 한족입니까.
 
  “저는 회족(回族)입니다.”
 
  ― 그럼 무슬림입니까.
 
  “회족이지만 종교는 없습니다.”
 
  ―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1996년 일본에서 결혼했습니다.”
 
  ― 아내는 일본인입니까.
 
  “중국인입니다.”
 
  ― 아내를 비롯해 처가 식구들이 중국에서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저는 중국에 갈 수 없지만 제 처(妻)는 중국에 갈 수 있는데, 그때마다 공안(경찰)이 ‘차 한 잔 하자’고 해서 만난답니다. 말은 차 한 잔 하자는 것이지만 그 속엔 위협이 담겨 있습니다.”
 
 
  “韓日, 중국 공산당에 숨통 틔워줬다”
 
중국 공안이 베이징 천안문 광장 인근에서 근무를 서고 있다. 사진=뉴시스
  왕다이 민주중국연맹 부회장은 서울대에서 열린 ‘2024 중국의 미래 국제컨퍼런스’에서 ‘자유가 없는 나라 차이나’라는 주제로 발표를 맡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중국을 개변(改變·발전적인 방향으로 고치다)하고 싶지만 중국 국내에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저희는 해외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왕 부회장이 속한 민주중국연맹은 1989년 6월 4일 천안문 사태를 계기로 같은 해 9월 프랑스 파리에서 총회를 설립, 그해 잇따라 전 세계 여러 자유주의 국가에 지부를 만들었다. 왕 부회장에게 그가 속한 단체의 규모와 활동 내용을 물었다.
 
  ― 어느 나라에서 활동했습니까.
 
  “미국, 대만, 네덜란드 등입니다.”
 
  ― 민주중국연맹 이외에 다른 단체에서 활동한 바 있습니까.
 
  “중국공화당, 그리고 일본에 있는 중국 민주화 단체에 소속돼 있습니다.”
 
  ― 중국 밖에서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해외에 있는 중국 대사관에 가서 천안문 사태에 대한 공산당의 책임을 묻는 집회를 했습니다.”
 
  ― 이번에 한국에 와서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전직 총리를 만났습니다. 그분께 ‘한국도 미국처럼 NED(미국 민주주의기금)와 같은 단체를 설립할 필요가 있지 않으냐’고 제안했습니다.”
 
  ― 중국 공산당의 견고한 체제를 무너뜨리긴 쉽지 않을 텐데요.
 
  “중국이 이렇게 강력한 관권(官權) 국가가 된 건, 다른 나라들이 중국에 대해 유화 정책을 편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서방 국가들은 연합해서 중국에 대해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이러한 경제 제재를 가장 먼저 풀어줬고, 1992년 중국이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한국은 중국과 수교를 맺어 돌파구를 열어줬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 공산당은 숨통이 트였고,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 민주중국연맹의 현재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대략 1000명입니다. 일본 지부엔 200명 정도 있습니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층입니다. 특히 ‘백지 혁명(중국 정부의 코로나19 봉쇄 정책에 항의한 시위)’ 이후 젊은이들의 유입이 늘었습니다.”
 
  ― 반체제 중국인이 가입하다 보니, 비밀 유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희 조직에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신원을 확인합니다. 중국 정부에서 보낸 스파이(간첩)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런 스파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온라인에서만 외치는 건 공산당에 타격 없어”
 
왕다이 민주중국연맹 부회장이 일본 법무성으로부터 발급받은 재입국 허가서. 사진=월간조선
  ― 그런데 한국이 중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지금 한국에 가장 큰 위협을 가하는 나라는 북한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북한의 배후엔 중국 공산당이 있습니다. 북한과 엮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한국은 중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방관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정부와 국민들께서 우리 중국의 민주화를 지지해주시고 성원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중국의 젊은이들이 외국 유학을 가서 자국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정보의 차단과 검열이 이뤄지기 때문에 해외로 유학을 나온 중국인 유학생들의 경우, 중국에서 접한 정보와 실제 사실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또 해외로 유학을 가는 중국인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유학을 가기 때문에 중국의 독재 정권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온라인을 통해 공산당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남길 뿐, 실제로 중국의 자유 민주화를 위해선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건 사실상 무리겠죠.
 
  “온라인에서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분들은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로지 온라인에서만 외치는 건 중국 공산당에 아무런 타격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용기를 가지고 나서서 공산당 정권에 대한 ‘NO’를 표현해야만 항의의 목소리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편 8월 21일 만난 왕다이 부회장과 동석한 이도 ‘2024 중국의 미래 국제컨퍼런스’에서 발표를 맡았다. 만주 출신인 그는 2022년 12월 한국으로 귀화, 이듬해 3월 31일 주민등록증을 받았다. 그가 고향을 떠나 한국으로 온 계기도 자의(自意)는 아니었다.
 
 
  조선족, 중국의 ‘소수민족 지우기’에 맞서다
 
  3년 전,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동화 정책에 맞서 ‘한글 교과서 퇴출 반대’ 집회를 열었다가 공안으로부터 입국 금지 통보를 받은 한 중국 조선족의 사연이 KBS를 통해 보도된 바 있다. 사연의 주인공은 지명광(池明光·42) 자유아시아연대 대표다. 지 대표는 이번 행사에서 “중국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민족을 탄압하고 하나의 잣대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시종일관 반복해왔다”며 ‘소수민족’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선주(先住·먼저 살고 있던) 민족이라고 하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지 대표는 2017년 3월 한국에 입국해 직장 생활을 했다. 그는 “중국에선 언론의 자유가 없다 보니 많은 정보가 차단돼 있었는데, 한국에 와서 중국이 소수민족 언어 말살 정책을 시행한다는 보도를 접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21세기에 가능한 일인지 너무나 충격적인 뉴스였다”고 했다. 그는 직접 고향 만주에 있는 지인들을 통해 사실 확인에 나섰다. 그의 얘기다.
 
  “고향에 있는 학교, 그리고 지인들을 통해 이 보도가 사실인지 물었어요. 연변대학이나 연변과학기술대, 그리고 기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 확인을 해봤더니 이런 정책이 실제 진행되고 있으며 지역별로 순차적으로 시행될 거라 하더군요. 이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지금이 일제(日帝) 시대도 아닌데 이렇게 언어를 말살하고 한민족을 없애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한국에 있는 조선족 동포들과 ‘우리도 목소리를 내자’며 의기투합해서 2020년 9월 19일 주한 중국 대사관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중국 정부에 이 소식이 전해졌는지, 중국 출입국 관리소에서 이상한 전화가 왔어요. 어떤 사람이 상하이(上海) 푸둥 공항에서 제 여권을 불법으로 사용하다가 체포됐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에 대해 해명하라며 중국으로 귀국할 것을 권했어요. 그런데 저는 당시 한국에 있었고, 해외나 중국으로 간 적도 없었으며 불법 행위를 한 적도 없고 여권도 제가 직접 갖고 있었어요. 말이 안 된다고 반박을 했죠. 그래서 저는 중국에 돌아가면 신변의 위협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귀화를 하게 된 겁니다.”
 

  ― 어린 아들이 있는 거로 아는데, 지금 한국에서 같이 거주하고 있습니까.
 
  “지금 같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 주한 중국 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모였습니까.
 
  “중국 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진 동포들이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자발적으로 모였습니다.”
 
  ― 몇 명 정도 모였나요.
 
  “당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집회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0명이 참가해 한 명씩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형식으로 진행했죠.”
 
 
  조선족의 정체성
 
왕다이 민주중국연맹 부회장의 재입국 허가서엔 수많은 출입국 도장이 찍혀 있었다. 사진=월간조선
  ― 중국에서 살았을 땐,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습니까.
 
  “어렸을 때는 정체성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저희 집에서 살아온 대로 ‘우리는 조선 사람이다’라는 생각만 있었지, 조선족이라는 개념은 따로 없었어요. 왜냐하면 제 주변 친구들도 조선 사람과 중국 사람을 구분해서 표현했고, 제가 살았던 곳이 조선족 거주 지역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조선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조선족이라는 단어를 알게 됐습니다. 그때 소수민족이라고 하는 정의도 인식하게 됐죠. 그 이후부터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고, 북한이 있고, 또 우리는 조선족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심리적인 혼란을 겪었습니다.”
 
  ― 조선족은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인식하나요.
 
  “물론 중국에선 조선족을 중국의 공민으로서 중국인으로 인식하도록 국가 차원의 체계적인 교육을 했죠. 그러다 보니 조선족은 스스로를 중국인이자, 중국 조선족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한중(韓中) 수교(1992년) 이후 많은 조선족이 한국으로 오게 되면서 정체성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한국에서 조선족들의 정체성에 대한 교육 재정립과 같은 지원은 공식적으로 없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역사책이나 캠페인을 통해 비슷한 지원은 있었지만 정부 차원의 역사, 민족의식 교육은 없었어요. 그래서 이러한 부분이 크게 작용해 조선족들이 스스로를 중화주의 속 소수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요즘 소셜미디어(SNS) 등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가 오가기 때문에 조선족들이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나 시민단체 차원의 지원이나 노력이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이 깨어나 자신이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품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 한국에서 조선족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지만은 않죠.
 
  “그렇죠. 한국 언론이나 특히 온라인 공간에선 조선족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부각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미디어를 통한 모습과 현실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또 그 가운데엔 의도적으로 조선족을 비하해 한민족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세력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 세력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거기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건 아무래도 중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어 간판 바꿔라”
 
  ― 중국에서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정책이 시행되고 있나요.
 
  “네. 시진핑 정권 출범 이후 소수민족 지역에 대한 통제나 한족으로 동화시키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 실제 접한 사례들이 있나요.
 
  “네. 중국에 있는 조선족 지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연변에선 원래 한글 간판이 있고 그 옆에 중국어가 적혀 있었어요. 그런데 이젠 중국 정부에서 업주들에게 그것을 바꾸라고 경고한다고 합니다. ‘거리의 미화(美化)에 방해가 된다’면서 기간을 정해주고 그때까지 바꾸라고 하는 대화 내용을 직접 봤어요. 연변에 한족도 많이 들어와서 이젠 오히려 한국어를 쓸 때 눈치가 보일 정도로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 정체성이 많이 희석됐겠네요.
 
  “이대로라면 30~50년 뒤에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은 사라질 거라고 봅니다. 중국 정부에 의해 조선족 민족 학교에서도 한글을 공부할 수 없게 됐으니 의식과 지식, 풍습이 차차 사라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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