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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전북 완주가 품에 안은 故 DJ 김광한의 목소리

“‘디스크자키(DJ) 대통령’ 김광한이 돌아오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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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주 삼례책박물관에서 DJ 김광한 특별전… 1960~90년대 음반 8000여 장, CD 1만여 장 등 2만여 점 전시
⊙ “팝송에 얽힌 추억을 선사한 이가 DJ 김광한… 우리는 그에게 삶의 빚을 지고 있어”
⊙ “DJ 김광한展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되찾고 마음의 평안 얻기를”
전북 완주 삼례책마을에서 전설의 DJ 김광한을 기리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기자의 어린 시절 꿈은 라디오 DJ였다. 우리 시대 최고의 DJ 김광한(金光漢·1946~2015년)은 그래서 우상이었다. 그의 이름을 초록색 볼펜으로만 쓰던 때가 있었다.
 
  스리슬쩍 그의 흉내를 내봤지만 도무지 따라 할 수 없었다. 모퉁이 외등 아래서도 혼자 반짝반짝 빛날 것 같은 김광한의 낭랑한 음성은 팝송 팬들의 값비싼 헌사(獻辭)조차 값싸게 만들었다. 비유하자면 수많은 진열대 창 바로 앞에 놓인 명품과 같았다. 어쩌면 서양 음악보다 김광한의 목소리에 더 열광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은 사실 고백에 가깝다.
 
  김광한. 2015년 7월 6일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입원했고 사흘 뒤 세상을 떠났다. 그는 방송 MC이자 DJ, 팝 칼럼니스트, 국내 쇼 비디오자키 1호였다. 그의 비밀 아지트와 유품들이 처음으로 《월간조선》 2018년 3월호를 통해 공개된 적이 있다.
 
  그러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최근 전북 완주의 삼례책마을에서 DJ 김광한이 남긴 유품들이 특별 전시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후 9년 만에 다시 김광한을 떠올리니 심장이 두 방망이질 쳤다. 기자는 그곳으로 얼른 차를 몰았다. ‘디스크자키(DJ) 대통령’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기뻤다. 7월 9일은 김광한의 9주기(周忌)였다.
 
 
  KBS에 김광한이 있다면 MBC에는 김기덕이
 
  완주 삼례에 도착하자마자 보라색 천으로 〈전설의 DJ 김광한 POP SONG 전(展)〉이란 세로 현수막이 보였다. 헤드폰을 쓰고 마이크 앞에서 LP판을 살짝 든 반가운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김광한 특별전〉은 내년 4월 14일까지 이어진다고 적혀 있었다.
 
  생전 그는 다양한 팝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군 제대 후 음악다방 DJ를 하다가 1980년 TBC FM 〈탑튠쇼〉를 통해 방송에 처음 얼굴을 비쳤다.
 

  그리고 1987~1991년 KBS 2TV 〈쇼 비디오 자키〉를 진행했다. 1982~1994년 KBS 2FM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 및 〈김광한의 팝스 투나잇〉 〈김광한의 골든 팝스〉를 통해 우리 삶에 팝송 멜로디를 선사했고, 그 밖에 KBS 2TV 〈가요 TOP 10〉, TBS 교통방송 〈밤과 음악 사이〉, TBN 인천교통방송 〈낭만이 있는 곳에〉, CBS 표준FM 〈김광한의 라디오 스타〉와 같은 프로그램을 이끌었다. 아무래도 KBS와 인연이 제일 두터웠는데 KBS에 김광한이 있다면 MBC에는 김기덕이 있었다. 두 사람이 쌍두마차로 달리던 시절, 팝팬들이 가장 행복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전성기 마이클 잭슨이나 라이오넬 리치, 스콜피온스도 두 DJ가 있어서 한국에서 빛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커다란 걸개그림이 보이고 ‘김광한이 사랑한 골든 팝스35’라는 글자와 함께 1960~90년대 사이 국내에서 인기를 끌던 팝송 곡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여러 번 세어 봐도 35곡이 아니라 36곡이었다. 김광한이 한 곡을 더 추가한 것인지, 전시회 측에서 한 곡을 잘못 계산한 것인지 확실치는 않다. 곡이 몇 개인지 일일이 세며 각각의 곡을 한 번씩 다시 한 번 떠올리면서 더 진한 향수를 느껴보라는 깊은 의도일까. 모두 좋은 곡들이었다. 이런 곡들 앞에선 돌멩이들까지도 수다쟁이처럼 “난 이 곡이 좋아” “아니, 난 저 곡이 더 좋아”라고 한판 입씨름을 할 것만 같았다.
 
  -Beat It 마이클 잭슨
  -Step By Step 뉴 키즈 온 더 블럭
  -We Built This City 스타십
  -Manic Monday 뱅글스
  -True Colors 신디 로퍼
  -I Like Chopin (Single Edit) 가제보
  -Don’t Stop Believin’ 저니
  -Keep on Loving You REO 스피드웨건
  -Club Tropicana 웸
  -Whenever You Need Somebody 릭 애슬리
  -You Should Hear How She Talks About You 멜리사 맨체스터
  -Dust In The Wind 캔사스
  -Kiss And Say Goodbye 맨해튼스
  -Kodachrome 폴 사이먼
  -The End Of The World 스키터 데이비스
  -The Last In Love JD 사우더
  -We’re All Alone 보즈 스캑스
  -All By Myself (Remastered) 에릭 카멘
  -I Will Always Love You 휘트니 휴스턴
  -How Am I Supposed To Live Without You 마이클 볼턴
  -For The First Time 케니 로긴스
  -Crazy (Album Ver.)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She’s Not There 산타나
  -Smooth Operator 샤데이
  -Leader Of The Band 댄 포겔버그
  -Total Eclipse Of The Heart 보니 타일러
  -A Man Without Love 잉글버트 험퍼딩크
  -Love Me Tender 엘비스 프레슬리
  -You Mean Everything To Me 닐 세다카
  -Diana 폴 앵카
  -For The Peace Of All Mankind 앨버트 해먼드
  -Stand by Your Man 태미 와이넷
  -I Only Want to Be with You 베이 시티 롤러스
  -Turn! Turn! Turn! (To Everything There is a Season) 더 버즈
  -I Love You More Than You’ll Ever know 블러드, 스웨트 & 티어스
  -Time 더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DJ 김광한에게 진 우리의 빚
 
완주 삼례책박물관 박대헌 관장.
  전시 공간 곁 카페에서는 차갑고 뜨거운 다양한 음료를 팔고 있었다. 전시장이 전시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광한의 윤기 나는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전시장 주변을 풍요롭게 채우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으면 어느 화창한 해변의 오후, 파도에 실린 부드러운 미풍과 백사장이 있을 것만 같았다.
 
  김광한은 이미 방송 데뷔 전부터 스타였다. 1980년대 초에 디스코 클럽이 무수히 생겨났다. 그때 김광한은 신라호텔의 ‘유니버스’ 디스코 클럽을 비롯해 밤무대를 파트타임으로 다섯 군데나 뛰었다고 전한다.
 
  밤무대에는 으레 뛰어난 미모에 세련된 옷차림의 돈 많은 여자들이 나타나곤 했고 ‘못생긴 DJ’ 김광한이 사냥감이 되었다. 김광한은 가까운 지인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고 한다.
 
  “‘결혼도 필요 없고 김광한의 아기를 낳아 키울 수 있게만 해달라’는 여인에게 코웃음을 던지는 나를 냉혈한이라 비웃을지도 모른다.”
 
  ‘전설의 DJ 김광한’ 특별전을 마련한 박대헌(朴大憲) 삼례책마을 관장은 “1980년대 팝 음악의 시대를 김광한을 통해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 시절 라디오는 마법 상자였지요. 우리가 즐겨 들었던 마이클잭슨, 마돈나, 조지 마이클, 신디 로퍼, 컬처 클럽의 노래들을 모두 라디오를 통해 즐겨 들었고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을 통해 향유했지요. 1980~90년대를 지나온 이들은 누구나 당시 팝송에 대한 흥미로운 추억 하나쯤은 모두들 가지고 있을 텐데, 그 추억을 선사한 이가 DJ 김광한이라면 우리 모두는 그에게 삶의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1980~90년대 당시 인기 라디오 음악 프로를 꼽자면 MBC FM은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별이 빛나는 밤에〉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KBS FM은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 〈전영혁의 음악세계〉 등을 들 수 있다. MBC FM은 청취자 사연 위주의 대중적인 팝송을 선호했다. 반면 KBS FM은 보다 전문적인 음악 방송을 지향했다. KBS DJ 중에서도 김광한은 대중성과 음악성을 고루 끌어안았다고 할까.
 
  김광한은 DJ에서 브라운관 MC로 영역을 넓혀 KBS 〈쇼 비디오 자키〉 〈가요 TOP 10〉의 진행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오로지 음악밖에 모르던 사람…’(최경순)
 
DJ 김광한의 아내 최경순 여사. 최 여사는 “DJ 김광한을 아는 세대뿐 아니라 20~30대 젊은 세대도 ‘K-POP의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는 데 남편이 일조했구나’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팝송 애호가인 이호백 재미마주 대표는 DJ 김광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김광한은 친절하고 자상한 느낌을 주는 특유의 목소리로 언제나 세상 밖 음악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주는 알찬 음악방송을 진행했었죠.
 
  그는 방송에서 청취자 신청곡 위주의 자주 듣던 인기곡 편성을 지양하고, 항상 새로운 팝송의 출현과 동향을 공부하여 청취자에게 알리는 보다 전문적인 음악 프로를 가꾸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김광한 팬들은 팝 아티스트들의 현재의 동향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음악을 즐기는 수준 높은 ‘팝 애호가’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기자는 부인 최경순(崔慶順·69) 여사에게 소감을 물었다. 남편이 생전에 온 정열을 쏟아부은 유품(음반, 서적, 오디오 등)을 세상에 공개하면서 생각이 많았으리라. 어쩌면 창밖으로 보이는 어제 풍경이 오늘은 특별히 꽉 차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 어떤 계기로 완주에 전시공간을 마련하셨습니까.
 
  “남편의 유품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 지자체도 여럿 있었지만 단체장이 바뀌면 관리가 소홀해지기 쉽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결정하지 못하다 보니 벌써 9년이 지났네요.
 
  삼례책마을 박대헌 관장이라면 DJ 김광한을 오래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저의 뜻을 잘 이어주리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 앞으로 김광한이 어떻게 기억됐으면 좋겠습니까.
 
  “DJ 김광한을 아는 세대뿐 아니라 20~30대 젊은 세대에게도 ‘과거에 이런 사람이 있어 K-POP의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구나’라고 인식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일에선 매우 깐깐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따뜻하고 늘 약자 편에 서기를 서슴지 않았던 사람, 오로지 음악밖에 모르던 사람, 의리 있고 아이 같은 마음을 지니고 산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록밴드 스콜피온스 멤버들과 함께한 DJ 김광한.
  ― 이번 전시공간을 준비하며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이었고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무엇이었나요.
 
  “남편이 떠난 후 9년이라는 긴 시간을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습니다. 남편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전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남편이 떠난 후 한 달도 안 되어 시작한 암 수술을 지난 9년 동안 열다섯 번 넘게 받았는데 ‘전시관이나 기념관이 생기기 전엔 절대 죽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버틴 것 같습니다.”
 
  ―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와 어떤 느낌을 가지면 좋겠습니까.
 
  “인공지능(AI) 시대에 살지만 아날로그 감성을 되찾고 그 가운데 마음의 평안을 얻기를 바랍니다.”
 
  최 여사는 끝으로 이렇게 말하며 활짝 웃었다.
 
  “이곳에 전시관이 생기고 나니 ‘아,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보람’이라고 해도 좋을까요?”
 
 
  수집광 김광한
 
완주 삼례책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DJ 김광한이 모은 1960~90년대 팝송 음반 8000여 장 모습.
  기자는 김광한이 모아두었던 LP판 앞에 서 보았다.
 
  모두 18칸의 책장 앞에 빼곡히 LP판이 꽂혀 있었다. 천장에 거의 닿을 정도였다. 몇 개인지 다 세려면 한나절이 다 갈 것 같은 음반의 위엄 앞에서, 이 세상에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음반 속 가사들이 서로 어우러져 세상에서 제일 긴 시가 김광한의 목소리로 낭송되는 듯한 느낌이 문득 들었다.
 
  방송국 DJ로 살았으니 마음만 먹으면 모든 음반을 듣고 즐길 수 있었을 테지만 그는 월급을 다 털어 직접 음반을 수집하고 관련 자료를 모았다. 김광한의 사후 발간된 유고집 《다시 듣는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2018)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이종환씨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박인희씨의 〈3시의 다이얼〉을 비롯한 모든 팝 프로그램을 청취했다. 내가 모르는 얘기가 나오면 메모를 했고 신문, 잡지, 서적 등에서 팝에 관한 내용은 모조리 스크랩해 열심히 외웠다. 깨어 있을 때면 일거수일투족이 팝송과 관계된 일이었고 모든 생각도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을 걸을 때도 어떤 팝송이 들려오면 ‘누가, 몇 년도에, 무슨 앨범을 통해 발표한 무슨 곡’이라는 해답이 머릿속에 떠올라야 직성이 풀렸다.〉
 
DJ 김광한이 수집한 각종 방송 장비들. 그는 팝송과 관련된 자료라면 무엇이든 모은 수집광이었다.
  전시관 한쪽에는 각종 방송 장비와 녹화 비디오테이프가 즐비했다. 자세히 보니 테이프마다 자신만이 아는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해독이 불가능한 ‘기호(記號)’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의미가 통하는 것도 적지 않았다. 굳이 적어보자면 ‘드림 시어터 LIVE’ ‘Eagles 공연’ ‘A-HA LIVE’ ‘비틀스 명곡 대전집(폴 매가트니) NHK-TV’ ‘메가데스 런던 공연’ ‘우드스탁 69’ ‘U2 LIVE’ 등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또 영화 〈자니 기타〉와 〈투 서 위드 러브(To Sir With Love)〉 테이프도 보였다. 연도를 알 수 없는 ‘가요 TOP 10 12/4’라고 적힌 테이프도 있었다. 아마도 12월 4일자 KBS2 〈가요 TOP 10〉 방송 녹화 테이프가 틀림없어 보였다. 이런 비디오테이프들이 전시장 한 벽을 가득 채우며 김광한의 열정을 가득 뿜어내고 있었다.
 
  이 가운데 ‘우드스탁(Woodstock Music and Art Fair) 69’는 1969년 8월 15일부터 3일간 뉴욕주 북부 베델 근처 화이트 레이크의 한 농장에서 열린 역사적인 록페스티벌을 말한다. 30만 명 이상이 ‘3일간의 음악, 평화, 사랑, 그리고 비와 약물의 제전’에 몰려들었다.
 
  음악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재즈에서 라비 생커의 인도 음악, 존 바에즈의 전투적인 포크에서 펑키한 흑인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구성되었는데, 젊은이들은 그 짜릿함을 맛보기 위해 기꺼이 수백 km를 히치하이킹을 하며 공연장을 찾았다. 무명에 가까웠던 리치 하벤슨, 조 코커, 텐 이어즈 애프터 같은 무명의 가수와 밴드들이 단번에 슈퍼스타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 정도로 전설적인 공연이었다. 알랭 디스테르가 쓴 《록의 시대》(국내 출간 1996)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젊은이들은) 빗속에서 잠을 자고 거친 음식을 먹는 수고를 감수했으며, 저질 마리화나나 미지근한 맥주에 만족해야 했으며, 으르렁거리는 경찰견과 무뚝뚝한 경관의 통제를 받으며 몇 시간이고 무리 속에 끼어 기다리기도 했다.〉
 
 
  DJ 김광한을 만나러 완주 삼례에 가는 이유
 
DJ 김광한이 즐겨 읽었던 팝송 전문잡지 《월간팝송》.
  김광한은 당시의 역사적인 록페스티벌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로라하는 팝 마니아조차 ‘우드스탁 69’의 역사성을 알면서도 관련 영상은 전혀 접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발 빠르게 영상을 확보해 자신만의 음악성(城)을 쌓고 있었던 셈이었다.
 
  전시장에는 볼거리가 가득해 시종일관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각종 음악잡지가 기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기자가 학창 시절 애독하던 《월간팝송》은 아예 따로 전시공간을 차지하고 있었고, 1970~80년대 국내 팝송 잡지로 추정되는 《뉴히트송》 《팝송 비바》 《비바 팝스》 《영 팝송》 《팝송 채널》 《추억의 골든 팝송》 《최신 팝송》 《탑튠쇼》 《현대가요》 《팝스 팝스》 등 종류도 판형도 다양했다.
 
  국내 팝팬 수가 당시 얼마나 됐기에 이렇게 다양한 잡지들이 쏟아져 나왔을까.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낡고 색이 바랜 잡지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또 온갖 종류의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와 카세트테이프들도 있었다. 음악의 제단 앞에서 김광한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포터블 카세트와 CD 플레이어는 주로 소니(SONY) 제품이었다. ‘메이드 인 재팬’의 위상이 높던 시절, 김광한은 모든 종류의 ‘소니 워크맨’을 다 써봤던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80년대 젊은 문화의 상징이던 ‘소니 워크맨’은 외국어 학습용으로, 혹은 걸어 다니는 전축으로 각광을 받았다. 워크맨은 소니 창립자 이부카(井深大)의 “미국 출장 가는 비행기 속에서 음악을 듣고 싶다”는 한마디로 태어났다고 전한다.
 
  카세트테이프 중에는 ‘1997. 1. 15. 밤과 음악 사이 - 신중현 인터뷰’ ‘1997. 4. 11 밤과 음악 사이 -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밤과 음악 사이 - 김도향’ ‘5/2 한대수’ 등의 글이 적힌 테이프도 보였다. 김광한은 1990년대 후반 교통방송(TBS)에서 마이크를 잡던 시절 〈밤과 음악 사이〉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
 
 
  ‘옆집 아는 형님’
 
  김광한 하면 KBS가 떠오르지만 말년의 그는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팝팬들을 만났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는 경인방송 라디오(iFM)에서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을 진행하기도 했고, 2009년부터 2011년까지는 TBN 인천교통방송에서 〈낭만이 있는 곳에〉를, 2013~2014년에는 CBS 표준 FM에서 〈김광한의 라디오 스타〉를 진행했다.
 
  CBS 한용길 전 사장은 “김광한은 팝 음악을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해서 팝 음악 방송 DJ와 팝 평론가로 평생을 살면서도 권위의식 없이 마치 ‘옆집 아는 형님’처럼 편안하고 격식을 뛰어넘는 자유로움이 넘쳐났다”고 회고했다.
 
  김광한은 자신을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음악의 아름다움을 매 순간 빛나게 하는 매혹적인 목소리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었다. 완주 삼례에 가면 그의 윤기 나는 음성을 언제라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고, 감사하다. 라디오가 전성기던 아날로그 감성의 시대로 돌아가, 감미로운 음악의 환희와 향수(鄕愁)의 숨결 속에서 전설의 DJ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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