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전복시키려고 획책하는 일이 민주주의 운동·인권으로 포장되면 안 돼”
⊙ 軍法師로 군 복무… 종교자유정책연구원 활동하며 종교차별금지법 등 기획
⊙ 기독교 비판 위해 종교개혁사 공부하다가, 종교개혁이 자유·법치주의에 끼친 영향 깨달아
⊙ 문재인 정권 출범 후 ‘동성애 정치 투쟁’의 위험성 경고하면서 이름 알리기 시작
⊙ “대한민국이 혼란에 빠진 건 자유 소홀히 여기고 위축시키려는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등장했기 때문”
⊙ “主思派 출신들은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대한민국을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봐”
李正勳
1974년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박사(법철학전공, Ph.D.),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 일반신학석사 / 울산대학교 법학과 교수 역임. 現 성경적세계관교육 PLI 대표, 유튜브 채널 ‘이정훈 교수’ 운영, 빛의자녀교회 공동담임 / 저서 《이정훈 교수의 성경적 세계관》 《교회 해체와 젠더 이데올로기》 《기독교와 선거》
⊙ 軍法師로 군 복무… 종교자유정책연구원 활동하며 종교차별금지법 등 기획
⊙ 기독교 비판 위해 종교개혁사 공부하다가, 종교개혁이 자유·법치주의에 끼친 영향 깨달아
⊙ 문재인 정권 출범 후 ‘동성애 정치 투쟁’의 위험성 경고하면서 이름 알리기 시작
⊙ “대한민국이 혼란에 빠진 건 자유 소홀히 여기고 위축시키려는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등장했기 때문”
⊙ “主思派 출신들은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대한민국을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봐”
李正勳
1974년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박사(법철학전공, Ph.D.),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 일반신학석사 / 울산대학교 법학과 교수 역임. 現 성경적세계관교육 PLI 대표, 유튜브 채널 ‘이정훈 교수’ 운영, 빛의자녀교회 공동담임 / 저서 《이정훈 교수의 성경적 세계관》 《교회 해체와 젠더 이데올로기》 《기독교와 선거》
‘조계종 원각 스님, 울산대학교 법학과 교수, 빛의자녀교회 공동 담임목사.’
한 가지도 이루기 쉽지 않은 길을 차례차례 걸으며 구독자 15만5000명의 유튜브 채널 운영에 저술과 강연까지, 바쁘게 달리는 이정훈 교수는 “스님에서 목사까지 제가 계획해서 된 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정훈 교수가 원각 스님이 된 데는 불교 집안이라는 분위기가 바탕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불교 기초교리》 같은 책을 밑줄 그어가며 읽었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교보문고에 데려갔을 때 송원 스님이 쓴 《알기 쉬운 반야심경》을 골랐어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집안이 매우 가난했는데 그래서인지 자라면서 ‘나는 왜 살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동대부고에 다닐 때 출가(出家)하려고 조계종을 찾아갔을 정도로 불심(佛心)이 깊었다. 졸업하고 오라는 말에 돌아왔고, 동국대 불교학과 2학년 여름방학 때 출가하여 조계종에서 원각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군종(軍宗)장교 후보생 시험에 합격하면서 군법사(軍法師·군승)로 3년간 군 복무를 했다.
2002년 전역(轉役)한 후 절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에 진학해 법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어느 날 모 인사로부터 “종교자유정책연구원(종자연)에서 종교 연구를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2004년 10월 ‘추첨을 통해 들어간 고등학교에서 예배 참여를 강요하는 건 부당하다’며 반기를 든 ‘대광고 강의석 사건’으로 시끄러울 때였다.
“평소 타락한 기독교, 대형 교회의 문제점, 기독교 우파(右派)들의 맹목적 신앙과 친미(親美) 수준을 넘어선 숭미(崇美)가 대단히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부패한 자들의 집단이 더러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했죠.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이 크기 때문에 시민운동 차원에서 종교 연구를 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승려 생활하며 종교개혁사 연구
종자연에 참여하면서 강의석 사건을 이슈화하여 기독교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미국에서 복음주의 기독교를 공격한 예를 참고하여 소송전과 함께 여론전을 펴기로 작전을 세웠다. 종자연 관계자들에게 “대광고와 관리 책임이 있는 서울시교육청을 대상으로 소송을 하겠다”는 전략을 밝히고 준비에 들어갔다.
“스님 시절부터 성경을 읽었어요. 서구(西歐) 사회가 어떻게 해서 강력해졌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죠. 서구 발전의 바탕에 기독교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에 대한 반발로 ‘모더니티의 끝에 불교적인 것이 오히려 서구 사회를 강타한다’고 주장하며 기독교의 부정적인 면만 바라봤었죠.”
법학도로서 종교개혁사와 한국교회사에 특히 관심이 갔다고 한다. 종교개혁을 다각도로 분석하는 가운데 종교개혁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혁신적으로 개혁하는 데 기여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가 누리는 헌법의 기본권이 종교개혁과 관련 있어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았다면 체계화한 사람은 칼뱅입니다. 칼뱅 이후 흐름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헌법과 법치주의(法治主義)가 윤곽을 드러내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죠. 가톨릭에서는 세상과 격리되어 청빈하게 사는 수도원적인 삶으로 부패를 개혁하려고 했어요. 마태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시잖아요. 제가 출가해봤기 때문에 속세(俗世)를 떠나서 사는 삶보다 칼뱅이 체계화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삶’에 관심이 갔어요.”
종교개혁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교회 정치와 제도에 대한 사상이 세속 정치와 법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선교를 하려면 여행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교회를 세우려면 법인(法人) 설립의 자유,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 등 기본권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자유의 제도화, 즉 기본권으로서의 자유권이 헌법에 탑재되는 출발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종교 박해로 인해 스위스, 독일, 영국으로 망명한 프랑스 위그노들이 선한 영향력을 끼친 사실과 네덜란드가 위그노를 포용하여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강한 나라가 된 과정을 죽 살펴보게 되었다.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 성경과 칼뱅의 서적, 종교개혁사를 살펴볼 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궁금했다.
“제가 법학자여서 종교개혁에서 자유와 법의 기초가 만들어진 과정에 흥미가 많았어요. 역사·사회학적 접근을 좋아하고 뭐든 제대로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보니 성경 말씀과 선교사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열심히 파고들었습니다. 그런데 비판하려고 보는데 자꾸 감동이 오는 겁니다.”
종교차별금지법 기획
큰스님의 상좌로 있을 때 마음에 균열이 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세계적인 불교 행사를 한국에서 열기로 하여 네팔의 고위층 인사가 내한(來韓)했을 때였다.
“동국대에서 그분의 조카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공부시키기로 결정했어요. 그런데 그분이 ‘서울에 있는 대학을 한 군데 더 보여달라’고 요청했어요. 제가 통역을 맡아 수행했는데 별생각 없이 연세대로 데려갔죠. 그분이 연세대를 둘러보면서 ‘국가에서 이 학교를 세웠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제가 한국교회사를 좀 알고 있어 기독교에서 지었다는 설명과 함께 언더우드 박사가 한국에 오게 된 배경을 죽 얘기했죠. 그러자 ‘내 조카를 연세대에 입학시킬 수 있느냐’고 하는 겁니다. 그건 안 된다고 했죠. 세브란스병원을 둘러볼 때 애비슨 박사의 헌신과 세브란스를 비롯한 여러 미국인이 도와주어 병원을 세웠다고 하니 그분이 ‘카트만두에도 이런 병원을 지어줄 수 있느냐’고 하는 겁니다. 당황해서 ‘그건 교회 쪽에 얘기해야 하는데’라며 말을 흐렸어요. 그날 저녁 절로 돌아왔는데 마음이 흔들리는 겁니다. 한국교회사를 통해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이 떠올랐기 때문이죠.”
그럴수록 기독교의 힘을 약화(弱化)시켜야겠다는 마음이 강해졌다고 한다.
종자연 활동 당시 그는 고려은단이 경부고속도로 서초구와 충북 청원군 관할구역에 설치한 ‘JESUS LOVES YOU’ 옥외광고 철거 방법 찾기에 나섰다.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앞두고 한시법(限時法)으로 옥외광고물관리법이 시행되던 시점이었다. 한시법 기한이 끝나갈 즈음이었는데 행정자치부에 ‘대법원의 1998년 특정 종교의 선교를 위한 강제적 전도(傳道) 행위는 위헌(違憲)이라고 판시한 것에 위배된다’며 위헌소원(違憲訴願)을 제기했다. 특별법 기한 종료로 2007년부터 야립 광고물을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고려은단 광고판은 철거됐다.
대광고 소송 건도 착실히 진행했다. 대광고 문제에 대해 서울시교육청의 관리 책임도 동시에 묻기로 했다. 이명박 정부 때 기독교 편향 발언들이 잇따라 나오면서 연일 시끄러운 것도 도움이 되었다. 이정훈 교수는 아예 ‘국가공무원들이 전도를 못 하게 하는 종교차별금지법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공무원들이 부하 직원에게 ‘교회에 가자’는 말을 못 하게 하려는 의도였어요. 공무원에게는 정치적 중립의 의무가 있는데 그 조항에 ‘종교 중립 의무’를 넣어 처벌할 수 있게 디자인했죠. 종교차별금지법안이지만 실상은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이었어요. 개정안을 만들어 여러 사람이 백방으로 다니면서 알렸어요. 당시 여당의 의석수가 많아 압박만 제대로 넣는다면 바로 통과될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종교차별금지법’뿐만 아니라 대광고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안’과 지방정부의 종교 편향을 처벌하게 만드는 ‘지방자치법 개정안’까지 3대 입법 과제에 대한 보고서를 썼다.
기독교로 개종
기획을 끝내고 2007년 4월경 박사 논문도 마무리하고 휴양도 할 겸해서 강원도에 있는 절에 들어갔다. 절에서 지내다 잠시 집에 왔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기독교를 연구할 목적으로 틈틈이 기독교방송을 봤어요. 그날도 집에서 기독교방송을 보는데 중앙성결교회 한기채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 거예요.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님들의 설교 레벨을 죽 매겼죠. 한 목사님이 차분한 목소리로 죄에 대한 설교를 했어요. 평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쇼하네’라고 조롱하곤 했어요. 그날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듣는데 갑자기 혀가 굳고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강력한 전류가 흘러내려 소파에서 바닥으로 고꾸라졌어요. 그 자리에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 순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신학 서적에서 봤던 ‘전적 부패’가 뭔지 깨달아졌다고 한다.
“나는 의롭다고 자만했던 죄성(罪性)이 낱낱이 보이면서 순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님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극적 변화를 겪은 이후 길을 가다가 십자가만 바라봐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고 한다.
2007년 강력한 힘에 의해 회심(回心)하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개종(改宗)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서울대 대학원 졸업을 한 달 앞둔 2008년 1월, 울산대 전임교수로 임용되어 울산으로 가게 되었다.
“울산에 가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제가 기획한 법안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는 걸 알고 있으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 법들이 어떤 의도로 기획되었는지 제가 제일 잘 아니까 죽을 것 같더라고요. 답답한 마음에 연구실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전화가 오는 거예요. 휴대폰 외에는 잘 안 받는데 그날 얼떨결에 연구실 전화를 받았어요. 모(某) 단체에서 ‘당신이 시작했으니 당신이 마무리 지으라’면서 ‘그 법이 왜 필요한지 발표를 해달라’는 겁니다. 당연히 제가 개종한 것을 모르고 연락한 거죠. 가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고 바로 원고를 작성했어요.”
‘종교는 평화다’
종교의 자유 보장과 관련한 독일 판례의 과잉금지 원칙을 적용해 왜 위헌인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과 불교계의 종교차별금지입법 요구의 위헌성〉이라는 논문을 부랴부랴 썼다. 학술대회 자료집 수록을 위해 원고를 미리 보냈는데 학술대회 하루 전날 《불교신문》에 이정훈 교수의 논문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제가 디자인해놓고 제가 위헌이라고 하니 난리가 났죠. 발표자니까 안 갈 수도 없고 해서 그 자리에 갔어요. 제가 ‘그 법이 통과되면 기독교만 피해가 가는 게 아니라 불교도 피해를 본다. 과잉 법률이다. 종교는 평화다’라고 주장했어요. 그런 설득을 하는데 한 교수님이 ‘이정훈 교수 말이 맞다’고 해 분위기가 반전(反轉)되면서 무사히 마무리됐죠.”
2008년 11월 24일 자 《불교신문》과 《미디어붓다》 기사 가운데 일부 내용이다.
〈울산대 법학과 이정훈 교수는 ‘법리학적으로 볼 때 국회에서 논의되는 종교차별금지법안은 해석상 문제점이 많으며 불교계가 종교차별 사례라고 주장하는 것들도 법적으로는 다소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종교 중립법의 위헌 소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불교계 내부에서 이 같은 주장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이날 발표에서 이 교수는 종교차별금지법의 입법 자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종교차별에 대한 법률적 규제가 현 불교가 안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지만, 이 법률이 결코 불교에 유리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종교를 자극해 더 큰 종교 갈등과 분쟁을 야기시킬 수 있음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차별금지법은 ‘공무원은 종교에 대해 중립을 지키라’는 점만 명시하고 처벌 조항은 빼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드러내지 않고 교수로 살려 했다”
이날 이후 이정훈 교수는 조용히 교회에 다니면서 울산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만 매진했다.
“회심한 지 얼마 안 되어 저랑 같이 불교계에서 활동했던 형님한테 ‘내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자 충격을 받더라고요. 저한테 ‘간증은 하지 마라’고 신신당부하더군요. 알겠다고 했는데 사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울산 대영교회에서 간증도 했어요.”
가끔 알음알음으로 요청이 오면 소수 인원 앞에서 비공개 강의를 했을 뿐 앞에 나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고 한다.
“울산대 교수로 있을 때 부산 해운대에 살면서 부전교회에 다녔어요. 현재 총신대 총장이신 박성규 목사님이 당시 담임이었는데 제가 군법사일 때 박성규 목사님이 군목(軍牧)이었어요. 목욕하며 서로 등을 밀어주는 사이였는데, 박 목사님은 저한테 ‘당신이 내 후배면 얼마나 좋을까’ 저는 박 목사님한테 ‘내 선배면 얼마나 좋을까’라 하고는 했죠. 제가 부전교회 나갔을 때 둘이 붙잡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기독교인이 된 이후 가능한 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일부 교단의 몇몇 목사가 종자연 일에 협력했어요. 종자연이 여러 종교를 연구하니까 목사들이 참여하는 게 문제 될 건 없다지만, 그 목사들이 교회를 공격하는 일에 동참한 게 문제죠. 그 모습을 본 제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곤란해지잖아요. 제가 기독교에 지은 죄도 많고 해서 드러내지 않고 교수로, 순수 법철학자로 학술 활동만 하려고 했어요.”
이정훈 교수가 전면에 나선 것은 개종하고 10년이 지난 2017년부터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2017년에 정권이 바뀌었잖아요. 제가 그쪽을 잘 아니까 세상이 어떻게 될지 예측되면서 걱정이 시작된 거죠. 이미 좌파 교육감들이 전국의 여러 교육청을 장악한 상태였어요. ‘68혁명 정신’이 교육계에 퍼질 게 뻔해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정훈 교수의 성경적 세계관》은 “68이 무서운 것은 혁명의 방식을 바꾸기 때문이다. 체제를 전복(顚覆)시키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체제 안으로 파고들어 가서 국가의 법이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법치와 법에 대한 존경이 강한 기독교 사회에서 체제를 바꿀 필요 없이 법에 침투해서 법의 속성을 바꿔버리니까 기독교 윤리와 세계관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축소된다”라고 68혁명의 속성을 설명한다.
또한 21세기 급진좌파들의 사상적 근간인 68혁명은 ‘일본의 급진적 학생운동과 중남미의 혁명 등을 포함하여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과 함께 변화의 핵심은 ‘서구가 자랑하던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으로 형성된 서구적 근대성의 해체’라고 지목했다.
‘무신론(無神論)과 유물론(唯物論)을 기초로 창조 질서를 부정하는 동성애(同性愛) 정치 투쟁을 가장 중요한 인권 담론으로 만드는 전략을 구사하니까 어떻게 되었어요?’라는 질문에 ‘기독교 세계관이 약화되고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국가의 성격도 바뀝니다’라고 답하는 내용도 있다.
학생인권조례 비판에 나서
그러던 차에 울산에서 민주당의 모 시의원 주도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즈음 한 기독교 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저의 예전 활동을 잘 아는 분이었어요. ‘동성애 문제로 전 세계가 떠들썩한데 왜 이게 인권 문제고 헌법을 위협할 정도의 중요한 주제인지 알아보려고 하는데 전문가가 없다’며 ‘당신이 신좌파 철학의 전문가니까 동성애 배후 정치사상과 정치투쟁에 대해 정리를 해달라’고 요청하셨어요. 그래서 정리를 해드린 적이 있어요. 이분은 과거 국가를 위해 중요한 공직을 수행하셨던 장로님이신데 활동가들과 함께 오셔서 학생인권조례를 막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당시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펴낸 《교회 해체와 젠더 이데올로기》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장로님이 저를 만난 후 울산 지역 교계 인사들에게 ‘울산대 이정훈 교수를 왜 활용하지 않느냐’고 하셨답니다. 제가 전면에 나서지 않아 모르는 분이 많았죠. 곧바로 저한테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2017년 울산 서현교회에 모인 초교파(超敎派) 목회자 700여 명 앞에서 비공개로 50분 동안 ‘동성애 정치 투쟁의 배후사상과 학생인권조례’에 관한 강의를 했는데, 이날 영상이 기독교방송과 유튜브를 통해 곧바로 퍼져나갔고, 이날 이후로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이 밀려들었다.
“영국과 독일에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내용을 정확히 짚고 있다. 우리한테 와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기왕에 드러난 데다 거절을 못 하니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강의하러 다니고 기독교방송에 나가 간증도 했지요.”
엘정책연구원 개설
이정훈 교수가 강연을 하고 유튜브에 영상이 쏟아지자 예상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예전에 종자연에서 활동할 때 협력했던 기독교 인사들, 저와 이념이 다른 사람들이 저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이정훈 교수가 거짓말을 한다’고 퍼트렸어요. ‘이정훈이 음모론을 퍼트린다’는 기사도 여러 차례 나왔어요.”
이정훈 교수가 자신의 말에 대한 학술적 근거를 제시하며 반론하는 과정에서 음모론을 제기한 자들의 의도와 정체가 드러나면서 오히려 사태가 역전되었다. 이정훈 교수의 이전 활동에 불신을 보냈던 세력들은 《불교신문》 2008년 11월 24일 자 〈이정훈 교수는 종교자유정책연구원에서 제안한 종교차별금지법의 기초를 마련한 법학자〉라는 기사 앞에서 무력(無力)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정훈 교수는 2017년에 ‘시민의 자유권을 증진시키는 정책과 법제’를 연구하는 엘정책연구원(ELPI)을 개설했다. 엘정책연구원의 주력 사업은 성경적 세계관을 교육하는 PLI(Practical Leadership Institute)다.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교회를 위협하는 법안들이 나올 때 전략적으로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책연구원으로 출발을 했는데 이러한 대안을 시민들에게 전하기 위해 PLI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PLI는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KAICAM) 소속 교육선교단체로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 각 영역에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성경적 세계관을 교육합니다.”
PLI 교육은 교재를 참고하여 온라인으로 강좌를 수강한 뒤 수강생들이 모여서 토론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토론이 제대로 되도록 하기 위해 교육받은 튜터(tutor)가 참관하여 코칭하면서 토론을 활성화시킨다.
“PLI는 삶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질문에 대해 성경적 세계관에 근거한 해답을 제시하는 스터디 클럽입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건국사를 공부할 때 한국교회사와 병행해서 배우는 식이죠.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기업인들에게 PLI 강의를 한 적이 있어요.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뒷돈을 주는 게 관행이었는데 성경적 근거를 대면서 왜 하면 안 되는지 조목조목 설명했죠. 이런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기업인들이 많이 회심했습니다.”
현재 6개월 과정인 PLI를 수료한 사람의 수는 2000명이 넘는다. 중간에 탈락한 사람까지 합치면 1만여 명이 강의를 들었다. 한 기수에 150~200여 명이 모이는데 더 많은 사람을 교육하지 못하는 이유는 튜터 부족 때문이다. 토론을 지도하는 튜터는 이정훈 교수가 직접 길러낸 제자들이다. 강의료는 무료였다가 코로나19를 계기로 온라인 수업을 개설하면서 가입비 1만원을 받고 있다. 가입비를 많이 내는 분도 있고 후원자들도 있어 PLI가 계속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이정훈 교수는 PLI 교육의 이점으로 ‘현실적인 문제에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해 확실한 지식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을 들었다.
‘의견을 말할 자유를 빼앗지 마라’
“자유민주주의가 뭔가, 다수결(多數決)은 결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런 걸 확고하게 배우게 되는 거죠. 대한민국이 혼란에 빠진 건 자유를 소홀히 여기고 자유를 위축시키려는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차별금지법도 결국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것입니다.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주의가 등장하면서 미국 좌파들도 결국 입을 막는 쪽으로 가잖아요. 영국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신학적 표현이 위법이 되면서 목사들이 박해를 받기 시작했어요. 혐오 표현을 금지한다는 게 PC잖아요. 선교나 표현의 자유, 종교 자유의 위축을 허용하면 우리가 누렸던 자유의 가치가 축소되면서 통제사회로 가는 거죠. 동성애 문제에 접근할 때 ‘신학적으로, 의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말할 자유를 빼앗지 마라’고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종교개혁의 역사를 통해 더 발전되어온 자유의 역사, 자유민주주의의 역사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체제 자체를 역사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대한민국을 전복시키겠다는 목적을 갖고 획책하는 일이 민주주의 운동으로 포장되거나 인권으로 포장되면 안 되는 거죠. 사상의 자유 시장에 나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PC는 이걸 억압해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겠다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서구가 했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추종할 이유는 없어요. 미국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탈북(脫北) 인권운동가 박연미씨가 ‘미국이 북한보다 못하다. 북한은 적어도 아빠를 아빠로 엄마를 엄마로 부를 수 있는데 미국의 명문대학에서는 아빠, 엄마를 부모 1, 2로 불러야 한다’고 지적했는데, 지금 이 지경까지 왔습니다.”
“기독교 내 좌파들은 속고 있는 것”
기독교 내 좌파 숫자가 적지 않다는 우려에 대해 이정훈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그 문제가 심각하죠. 하지만 그분들도 함께 가야 하는 분들입니다. 진영(陣營)논리로 접근하기보다 ‘당신들도 대한민국을 인정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주사파(主思派) 출신들은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대한민국을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봅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에서 누릴 건 다 누리고 있잖아요. 교회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미국 선교사들을 ‘제국주의 앞잡이’라고 말하는 걸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기독교 내 좌파들은 속고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 선한 영향력을 끼친 힘은 복음주의에서 나왔어요. 좌파와 연합해서 ‘대한민국은 없어져야 할 청산의 대상이다, 해체하자’고 외치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불교에서 기독교로 회심한 이정훈 교수를 공격하는 이들이 불교도가 아닌 기독교도라는 점도 아이러니다.
“제가 하는 말을 거짓말이라고 공격하다가 사실로 밝혀지니 ‘왜 목사가 아닌데 자꾸 교회 강단에 서나’ 이걸로 또 공격하는 거예요. 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에서 복음주의 6개 단체를 조사해달라고 할 때 제가 전문위원으로 들어가니까 ‘왜 신학 전공자가 아닌 이정훈 교수가 포함되느냐’는 공격이 있었어요. 이런 공격이 계속될 것 같아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죠.”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에 입학할 때만 해도 신학 공부가 10년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고 목사 안수를 받을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일주일에 적어도 3일은 수업을 받아야 하는데 첫 학기에 겨우 두 과목만 신청했어요. 정교수여서 학교 일 해야지, 강의해야지, 스케줄을 맞출 수 없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코로나19로 울산대 강의도 신학대학원 공부도 온라인으로 하게 되면서 빠르게 과정을 마쳐 2022년 10월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목사가 되다
목사가 된 이후에도 울산대 정교수로 재직하며 정년을 채울 생각이었으나 빛의자녀교회(구 대학연합교회) 김형민(金炯民) 목사를 만나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미국 유학과 사우디아라비아 선교를 마치고 돌아온 김형민 목사가 2001년 건국대 귀퉁이에서 시작한 컨테이너 교회는 현재 수천 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강사 섭외 1순위, 방송 진행 등으로 스타 목사 대열에 오른 김형민 목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이정훈 목사는 “내 양을 먹이라”는 음성이 들려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김형민 목사님이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하셨어요. ‘교수로 재직하면서 PLI 활동만 해도 바쁘다, 하던 일 계속 할 거다’라고 하니 ‘양을 먹여야 돼’라고 딱 한마디 하시는 거예요. 그 순간 번개 맞은 느낌이 들면서 무릎이 후들후들 떨렸어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안수기도를 받는데 눈물이 줄줄 나오더군요.
이날 이후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데 이상하게 의욕이 없고 잘 안 되는 거예요. 자꾸 많은 사람 앞에서 제가 설교하는 환상이 보이고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사람들을 보면 설교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홍대에서 목회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서울에 올 때마다 묵는 오피스텔이 있는데 홍대 부근이라 술 먹고 헤매는 젊은이들을 많이 봤거든요.”
평일에는 울산대에서 강의하고 주말마다 서울에 와서 목회할 생각에 장소까지 알아봤다고 한다.
“지하 클럽이 많이 비어 있었는데 저렴한 임대료로 빌려준다는 거예요. 밤새워 놀던 아이들을 전도해서 주일 아침에 예배드리자는 생각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죠. 한데 김형민 목사님이 갑자기 만나자고 하시더니 ‘앞으로 어떡할 거냐’고 또 물으셔서 ‘홍대에서 개척할 겁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러지 말고 그냥 우리 교회로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두 번째 만난 날 그런 말씀을 하신 거예요.”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된 기독교’
정교수 자리를 그만두는 게 쉽지 않아 처음에는 안 가려고 버텼다고 한다. 이후 서울에 특강 하러 가기 위해 KTX역으로 향할 때 10년 넘게 한 번도 막히지 않던 길이 주차장이 되어 움직이지 않는 등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생겼다고 한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분명한 확신이 들어 빛의자녀교회에 가기로 결정했다.
이정훈 목사는 교회 사역에 적응하기 위해 울산대를 퇴직하고 2023년 1년 동안 외부 일정을 모두 중단했다.
“교수 시절부터 신학적 목회의 실종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지난 1년간 철저한 성경 교육에 주력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는 건강한 자본주의에 그 토대를 제공했고,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선한 영향을 끼치며 인류 발전에 기여해왔습니다. 오늘날 성경과 멀어지면서 기독교가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규범과 판단의 기준은 성경이어야 한다는 게 제 목회의 방향입니다.”
이정훈 목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계획한 대로 된 게 하나도 없다며 앞으로도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공동 담임목사로 교회 사역을 충실히 하면서 PLI 교육을 확대해나가겠다는 생각 정도만 갖고 있습니다. 튜터들을 더 키워서 더 많은 분에게 성경적 세계관을 교육하고 싶은 게 또 다른 바람이죠.”
PLI 교육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성경적 세계관을 공부해야 정치관과 역사관이 확고해져 선동당하지 않고 교회와 대한민국을 수준 높게 지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한 가지도 이루기 쉽지 않은 길을 차례차례 걸으며 구독자 15만5000명의 유튜브 채널 운영에 저술과 강연까지, 바쁘게 달리는 이정훈 교수는 “스님에서 목사까지 제가 계획해서 된 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정훈 교수가 원각 스님이 된 데는 불교 집안이라는 분위기가 바탕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불교 기초교리》 같은 책을 밑줄 그어가며 읽었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교보문고에 데려갔을 때 송원 스님이 쓴 《알기 쉬운 반야심경》을 골랐어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집안이 매우 가난했는데 그래서인지 자라면서 ‘나는 왜 살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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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목사는 원래 ‘원각’이라는 법명의 승려였다. 불교학도들과 인도 성지순례도 다녀왔다. |
2002년 전역(轉役)한 후 절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에 진학해 법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어느 날 모 인사로부터 “종교자유정책연구원(종자연)에서 종교 연구를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2004년 10월 ‘추첨을 통해 들어간 고등학교에서 예배 참여를 강요하는 건 부당하다’며 반기를 든 ‘대광고 강의석 사건’으로 시끄러울 때였다.
“평소 타락한 기독교, 대형 교회의 문제점, 기독교 우파(右派)들의 맹목적 신앙과 친미(親美) 수준을 넘어선 숭미(崇美)가 대단히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부패한 자들의 집단이 더러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했죠.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이 크기 때문에 시민운동 차원에서 종교 연구를 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승려 생활하며 종교개혁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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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목사는 종교개혁을 공부하면서 종교개혁이 자유와 법치의 확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스님 시절부터 성경을 읽었어요. 서구(西歐) 사회가 어떻게 해서 강력해졌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죠. 서구 발전의 바탕에 기독교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에 대한 반발로 ‘모더니티의 끝에 불교적인 것이 오히려 서구 사회를 강타한다’고 주장하며 기독교의 부정적인 면만 바라봤었죠.”
법학도로서 종교개혁사와 한국교회사에 특히 관심이 갔다고 한다. 종교개혁을 다각도로 분석하는 가운데 종교개혁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혁신적으로 개혁하는 데 기여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가 누리는 헌법의 기본권이 종교개혁과 관련 있어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았다면 체계화한 사람은 칼뱅입니다. 칼뱅 이후 흐름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헌법과 법치주의(法治主義)가 윤곽을 드러내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죠. 가톨릭에서는 세상과 격리되어 청빈하게 사는 수도원적인 삶으로 부패를 개혁하려고 했어요. 마태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시잖아요. 제가 출가해봤기 때문에 속세(俗世)를 떠나서 사는 삶보다 칼뱅이 체계화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삶’에 관심이 갔어요.”
종교개혁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교회 정치와 제도에 대한 사상이 세속 정치와 법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선교를 하려면 여행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교회를 세우려면 법인(法人) 설립의 자유,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 등 기본권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자유의 제도화, 즉 기본권으로서의 자유권이 헌법에 탑재되는 출발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종교 박해로 인해 스위스, 독일, 영국으로 망명한 프랑스 위그노들이 선한 영향력을 끼친 사실과 네덜란드가 위그노를 포용하여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강한 나라가 된 과정을 죽 살펴보게 되었다.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 성경과 칼뱅의 서적, 종교개혁사를 살펴볼 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궁금했다.
“제가 법학자여서 종교개혁에서 자유와 법의 기초가 만들어진 과정에 흥미가 많았어요. 역사·사회학적 접근을 좋아하고 뭐든 제대로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보니 성경 말씀과 선교사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열심히 파고들었습니다. 그런데 비판하려고 보는데 자꾸 감동이 오는 겁니다.”
종교차별금지법 기획
큰스님의 상좌로 있을 때 마음에 균열이 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세계적인 불교 행사를 한국에서 열기로 하여 네팔의 고위층 인사가 내한(來韓)했을 때였다.
“동국대에서 그분의 조카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공부시키기로 결정했어요. 그런데 그분이 ‘서울에 있는 대학을 한 군데 더 보여달라’고 요청했어요. 제가 통역을 맡아 수행했는데 별생각 없이 연세대로 데려갔죠. 그분이 연세대를 둘러보면서 ‘국가에서 이 학교를 세웠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제가 한국교회사를 좀 알고 있어 기독교에서 지었다는 설명과 함께 언더우드 박사가 한국에 오게 된 배경을 죽 얘기했죠. 그러자 ‘내 조카를 연세대에 입학시킬 수 있느냐’고 하는 겁니다. 그건 안 된다고 했죠. 세브란스병원을 둘러볼 때 애비슨 박사의 헌신과 세브란스를 비롯한 여러 미국인이 도와주어 병원을 세웠다고 하니 그분이 ‘카트만두에도 이런 병원을 지어줄 수 있느냐’고 하는 겁니다. 당황해서 ‘그건 교회 쪽에 얘기해야 하는데’라며 말을 흐렸어요. 그날 저녁 절로 돌아왔는데 마음이 흔들리는 겁니다. 한국교회사를 통해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이 떠올랐기 때문이죠.”
그럴수록 기독교의 힘을 약화(弱化)시켜야겠다는 마음이 강해졌다고 한다.
종자연 활동 당시 그는 고려은단이 경부고속도로 서초구와 충북 청원군 관할구역에 설치한 ‘JESUS LOVES YOU’ 옥외광고 철거 방법 찾기에 나섰다.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앞두고 한시법(限時法)으로 옥외광고물관리법이 시행되던 시점이었다. 한시법 기한이 끝나갈 즈음이었는데 행정자치부에 ‘대법원의 1998년 특정 종교의 선교를 위한 강제적 전도(傳道) 행위는 위헌(違憲)이라고 판시한 것에 위배된다’며 위헌소원(違憲訴願)을 제기했다. 특별법 기한 종료로 2007년부터 야립 광고물을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고려은단 광고판은 철거됐다.
대광고 소송 건도 착실히 진행했다. 대광고 문제에 대해 서울시교육청의 관리 책임도 동시에 묻기로 했다. 이명박 정부 때 기독교 편향 발언들이 잇따라 나오면서 연일 시끄러운 것도 도움이 되었다. 이정훈 교수는 아예 ‘국가공무원들이 전도를 못 하게 하는 종교차별금지법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공무원들이 부하 직원에게 ‘교회에 가자’는 말을 못 하게 하려는 의도였어요. 공무원에게는 정치적 중립의 의무가 있는데 그 조항에 ‘종교 중립 의무’를 넣어 처벌할 수 있게 디자인했죠. 종교차별금지법안이지만 실상은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이었어요. 개정안을 만들어 여러 사람이 백방으로 다니면서 알렸어요. 당시 여당의 의석수가 많아 압박만 제대로 넣는다면 바로 통과될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종교차별금지법’뿐만 아니라 대광고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안’과 지방정부의 종교 편향을 처벌하게 만드는 ‘지방자치법 개정안’까지 3대 입법 과제에 대한 보고서를 썼다.
기독교로 개종
기획을 끝내고 2007년 4월경 박사 논문도 마무리하고 휴양도 할 겸해서 강원도에 있는 절에 들어갔다. 절에서 지내다 잠시 집에 왔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기독교를 연구할 목적으로 틈틈이 기독교방송을 봤어요. 그날도 집에서 기독교방송을 보는데 중앙성결교회 한기채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 거예요.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님들의 설교 레벨을 죽 매겼죠. 한 목사님이 차분한 목소리로 죄에 대한 설교를 했어요. 평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쇼하네’라고 조롱하곤 했어요. 그날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듣는데 갑자기 혀가 굳고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강력한 전류가 흘러내려 소파에서 바닥으로 고꾸라졌어요. 그 자리에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 순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신학 서적에서 봤던 ‘전적 부패’가 뭔지 깨달아졌다고 한다.
“나는 의롭다고 자만했던 죄성(罪性)이 낱낱이 보이면서 순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님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극적 변화를 겪은 이후 길을 가다가 십자가만 바라봐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고 한다.
2007년 강력한 힘에 의해 회심(回心)하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개종(改宗)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서울대 대학원 졸업을 한 달 앞둔 2008년 1월, 울산대 전임교수로 임용되어 울산으로 가게 되었다.
“울산에 가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제가 기획한 법안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는 걸 알고 있으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 법들이 어떤 의도로 기획되었는지 제가 제일 잘 아니까 죽을 것 같더라고요. 답답한 마음에 연구실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전화가 오는 거예요. 휴대폰 외에는 잘 안 받는데 그날 얼떨결에 연구실 전화를 받았어요. 모(某) 단체에서 ‘당신이 시작했으니 당신이 마무리 지으라’면서 ‘그 법이 왜 필요한지 발표를 해달라’는 겁니다. 당연히 제가 개종한 것을 모르고 연락한 거죠. 가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고 바로 원고를 작성했어요.”
‘종교는 평화다’
종교의 자유 보장과 관련한 독일 판례의 과잉금지 원칙을 적용해 왜 위헌인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과 불교계의 종교차별금지입법 요구의 위헌성〉이라는 논문을 부랴부랴 썼다. 학술대회 자료집 수록을 위해 원고를 미리 보냈는데 학술대회 하루 전날 《불교신문》에 이정훈 교수의 논문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제가 디자인해놓고 제가 위헌이라고 하니 난리가 났죠. 발표자니까 안 갈 수도 없고 해서 그 자리에 갔어요. 제가 ‘그 법이 통과되면 기독교만 피해가 가는 게 아니라 불교도 피해를 본다. 과잉 법률이다. 종교는 평화다’라고 주장했어요. 그런 설득을 하는데 한 교수님이 ‘이정훈 교수 말이 맞다’고 해 분위기가 반전(反轉)되면서 무사히 마무리됐죠.”
2008년 11월 24일 자 《불교신문》과 《미디어붓다》 기사 가운데 일부 내용이다.
〈울산대 법학과 이정훈 교수는 ‘법리학적으로 볼 때 국회에서 논의되는 종교차별금지법안은 해석상 문제점이 많으며 불교계가 종교차별 사례라고 주장하는 것들도 법적으로는 다소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종교 중립법의 위헌 소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불교계 내부에서 이 같은 주장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이날 발표에서 이 교수는 종교차별금지법의 입법 자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종교차별에 대한 법률적 규제가 현 불교가 안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지만, 이 법률이 결코 불교에 유리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종교를 자극해 더 큰 종교 갈등과 분쟁을 야기시킬 수 있음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차별금지법은 ‘공무원은 종교에 대해 중립을 지키라’는 점만 명시하고 처벌 조항은 빼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드러내지 않고 교수로 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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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목사가 출석했던 부산 부전교회에서 강의하는 모습. 부전교회 담임목사였던 박성규 목사는 이 목사가 군법사 시절 군목이었다. |
“회심한 지 얼마 안 되어 저랑 같이 불교계에서 활동했던 형님한테 ‘내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자 충격을 받더라고요. 저한테 ‘간증은 하지 마라’고 신신당부하더군요. 알겠다고 했는데 사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울산 대영교회에서 간증도 했어요.”
가끔 알음알음으로 요청이 오면 소수 인원 앞에서 비공개 강의를 했을 뿐 앞에 나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고 한다.
“울산대 교수로 있을 때 부산 해운대에 살면서 부전교회에 다녔어요. 현재 총신대 총장이신 박성규 목사님이 당시 담임이었는데 제가 군법사일 때 박성규 목사님이 군목(軍牧)이었어요. 목욕하며 서로 등을 밀어주는 사이였는데, 박 목사님은 저한테 ‘당신이 내 후배면 얼마나 좋을까’ 저는 박 목사님한테 ‘내 선배면 얼마나 좋을까’라 하고는 했죠. 제가 부전교회 나갔을 때 둘이 붙잡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기독교인이 된 이후 가능한 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일부 교단의 몇몇 목사가 종자연 일에 협력했어요. 종자연이 여러 종교를 연구하니까 목사들이 참여하는 게 문제 될 건 없다지만, 그 목사들이 교회를 공격하는 일에 동참한 게 문제죠. 그 모습을 본 제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곤란해지잖아요. 제가 기독교에 지은 죄도 많고 해서 드러내지 않고 교수로, 순수 법철학자로 학술 활동만 하려고 했어요.”
이정훈 교수가 전면에 나선 것은 개종하고 10년이 지난 2017년부터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2017년에 정권이 바뀌었잖아요. 제가 그쪽을 잘 아니까 세상이 어떻게 될지 예측되면서 걱정이 시작된 거죠. 이미 좌파 교육감들이 전국의 여러 교육청을 장악한 상태였어요. ‘68혁명 정신’이 교육계에 퍼질 게 뻔해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정훈 교수의 성경적 세계관》은 “68이 무서운 것은 혁명의 방식을 바꾸기 때문이다. 체제를 전복(顚覆)시키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체제 안으로 파고들어 가서 국가의 법이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법치와 법에 대한 존경이 강한 기독교 사회에서 체제를 바꿀 필요 없이 법에 침투해서 법의 속성을 바꿔버리니까 기독교 윤리와 세계관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축소된다”라고 68혁명의 속성을 설명한다.
또한 21세기 급진좌파들의 사상적 근간인 68혁명은 ‘일본의 급진적 학생운동과 중남미의 혁명 등을 포함하여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과 함께 변화의 핵심은 ‘서구가 자랑하던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으로 형성된 서구적 근대성의 해체’라고 지목했다.
‘무신론(無神論)과 유물론(唯物論)을 기초로 창조 질서를 부정하는 동성애(同性愛) 정치 투쟁을 가장 중요한 인권 담론으로 만드는 전략을 구사하니까 어떻게 되었어요?’라는 질문에 ‘기독교 세계관이 약화되고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국가의 성격도 바뀝니다’라고 답하는 내용도 있다.
학생인권조례 비판에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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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목사의 《이정훈 교수의 성경적 세계관》 《교회 해체와 젠더 이데올로기》 |
“저의 예전 활동을 잘 아는 분이었어요. ‘동성애 문제로 전 세계가 떠들썩한데 왜 이게 인권 문제고 헌법을 위협할 정도의 중요한 주제인지 알아보려고 하는데 전문가가 없다’며 ‘당신이 신좌파 철학의 전문가니까 동성애 배후 정치사상과 정치투쟁에 대해 정리를 해달라’고 요청하셨어요. 그래서 정리를 해드린 적이 있어요. 이분은 과거 국가를 위해 중요한 공직을 수행하셨던 장로님이신데 활동가들과 함께 오셔서 학생인권조례를 막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당시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펴낸 《교회 해체와 젠더 이데올로기》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장로님이 저를 만난 후 울산 지역 교계 인사들에게 ‘울산대 이정훈 교수를 왜 활용하지 않느냐’고 하셨답니다. 제가 전면에 나서지 않아 모르는 분이 많았죠. 곧바로 저한테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2017년 울산 서현교회에 모인 초교파(超敎派) 목회자 700여 명 앞에서 비공개로 50분 동안 ‘동성애 정치 투쟁의 배후사상과 학생인권조례’에 관한 강의를 했는데, 이날 영상이 기독교방송과 유튜브를 통해 곧바로 퍼져나갔고, 이날 이후로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이 밀려들었다.
“영국과 독일에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내용을 정확히 짚고 있다. 우리한테 와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기왕에 드러난 데다 거절을 못 하니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강의하러 다니고 기독교방송에 나가 간증도 했지요.”
엘정책연구원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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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I 온라인 강좌를 들은 학생들을 만나 토론 지도를 담당하는 튜터들. 앞으로 튜터 양성에 더 힘쓸 계획을 갖고 있다. |
“예전에 종자연에서 활동할 때 협력했던 기독교 인사들, 저와 이념이 다른 사람들이 저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이정훈 교수가 거짓말을 한다’고 퍼트렸어요. ‘이정훈이 음모론을 퍼트린다’는 기사도 여러 차례 나왔어요.”
이정훈 교수가 자신의 말에 대한 학술적 근거를 제시하며 반론하는 과정에서 음모론을 제기한 자들의 의도와 정체가 드러나면서 오히려 사태가 역전되었다. 이정훈 교수의 이전 활동에 불신을 보냈던 세력들은 《불교신문》 2008년 11월 24일 자 〈이정훈 교수는 종교자유정책연구원에서 제안한 종교차별금지법의 기초를 마련한 법학자〉라는 기사 앞에서 무력(無力)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정훈 교수는 2017년에 ‘시민의 자유권을 증진시키는 정책과 법제’를 연구하는 엘정책연구원(ELPI)을 개설했다. 엘정책연구원의 주력 사업은 성경적 세계관을 교육하는 PLI(Practical Leadership Institute)다.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교회를 위협하는 법안들이 나올 때 전략적으로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책연구원으로 출발을 했는데 이러한 대안을 시민들에게 전하기 위해 PLI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PLI는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KAICAM) 소속 교육선교단체로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 각 영역에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성경적 세계관을 교육합니다.”
PLI 교육은 교재를 참고하여 온라인으로 강좌를 수강한 뒤 수강생들이 모여서 토론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토론이 제대로 되도록 하기 위해 교육받은 튜터(tutor)가 참관하여 코칭하면서 토론을 활성화시킨다.
“PLI는 삶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질문에 대해 성경적 세계관에 근거한 해답을 제시하는 스터디 클럽입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건국사를 공부할 때 한국교회사와 병행해서 배우는 식이죠.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기업인들에게 PLI 강의를 한 적이 있어요.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뒷돈을 주는 게 관행이었는데 성경적 근거를 대면서 왜 하면 안 되는지 조목조목 설명했죠. 이런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기업인들이 많이 회심했습니다.”
현재 6개월 과정인 PLI를 수료한 사람의 수는 2000명이 넘는다. 중간에 탈락한 사람까지 합치면 1만여 명이 강의를 들었다. 한 기수에 150~200여 명이 모이는데 더 많은 사람을 교육하지 못하는 이유는 튜터 부족 때문이다. 토론을 지도하는 튜터는 이정훈 교수가 직접 길러낸 제자들이다. 강의료는 무료였다가 코로나19를 계기로 온라인 수업을 개설하면서 가입비 1만원을 받고 있다. 가입비를 많이 내는 분도 있고 후원자들도 있어 PLI가 계속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이정훈 교수는 PLI 교육의 이점으로 ‘현실적인 문제에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해 확실한 지식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을 들었다.
‘의견을 말할 자유를 빼앗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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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마치고 수강생들과 기념촬영하는 이정훈 교수. 유튜브 강의와 오프라인 강의 모두 인기가 높다. |
역사적 흐름 속에서 종교개혁의 역사를 통해 더 발전되어온 자유의 역사, 자유민주주의의 역사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체제 자체를 역사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대한민국을 전복시키겠다는 목적을 갖고 획책하는 일이 민주주의 운동으로 포장되거나 인권으로 포장되면 안 되는 거죠. 사상의 자유 시장에 나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PC는 이걸 억압해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겠다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서구가 했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추종할 이유는 없어요. 미국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탈북(脫北) 인권운동가 박연미씨가 ‘미국이 북한보다 못하다. 북한은 적어도 아빠를 아빠로 엄마를 엄마로 부를 수 있는데 미국의 명문대학에서는 아빠, 엄마를 부모 1, 2로 불러야 한다’고 지적했는데, 지금 이 지경까지 왔습니다.”
“기독교 내 좌파들은 속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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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목사 안수를 받는 모습. 이정훈 교수는 전공하지 않고 기독교 강의를 한다는 비판에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
“그 문제가 심각하죠. 하지만 그분들도 함께 가야 하는 분들입니다. 진영(陣營)논리로 접근하기보다 ‘당신들도 대한민국을 인정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주사파(主思派) 출신들은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대한민국을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봅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에서 누릴 건 다 누리고 있잖아요. 교회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미국 선교사들을 ‘제국주의 앞잡이’라고 말하는 걸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기독교 내 좌파들은 속고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 선한 영향력을 끼친 힘은 복음주의에서 나왔어요. 좌파와 연합해서 ‘대한민국은 없어져야 할 청산의 대상이다, 해체하자’고 외치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불교에서 기독교로 회심한 이정훈 교수를 공격하는 이들이 불교도가 아닌 기독교도라는 점도 아이러니다.
“제가 하는 말을 거짓말이라고 공격하다가 사실로 밝혀지니 ‘왜 목사가 아닌데 자꾸 교회 강단에 서나’ 이걸로 또 공격하는 거예요. 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에서 복음주의 6개 단체를 조사해달라고 할 때 제가 전문위원으로 들어가니까 ‘왜 신학 전공자가 아닌 이정훈 교수가 포함되느냐’는 공격이 있었어요. 이런 공격이 계속될 것 같아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죠.”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에 입학할 때만 해도 신학 공부가 10년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고 목사 안수를 받을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일주일에 적어도 3일은 수업을 받아야 하는데 첫 학기에 겨우 두 과목만 신청했어요. 정교수여서 학교 일 해야지, 강의해야지, 스케줄을 맞출 수 없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코로나19로 울산대 강의도 신학대학원 공부도 온라인으로 하게 되면서 빠르게 과정을 마쳐 2022년 10월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목사가 되다
목사가 된 이후에도 울산대 정교수로 재직하며 정년을 채울 생각이었으나 빛의자녀교회(구 대학연합교회) 김형민(金炯民) 목사를 만나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미국 유학과 사우디아라비아 선교를 마치고 돌아온 김형민 목사가 2001년 건국대 귀퉁이에서 시작한 컨테이너 교회는 현재 수천 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강사 섭외 1순위, 방송 진행 등으로 스타 목사 대열에 오른 김형민 목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이정훈 목사는 “내 양을 먹이라”는 음성이 들려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김형민 목사님이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하셨어요. ‘교수로 재직하면서 PLI 활동만 해도 바쁘다, 하던 일 계속 할 거다’라고 하니 ‘양을 먹여야 돼’라고 딱 한마디 하시는 거예요. 그 순간 번개 맞은 느낌이 들면서 무릎이 후들후들 떨렸어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안수기도를 받는데 눈물이 줄줄 나오더군요.
이날 이후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데 이상하게 의욕이 없고 잘 안 되는 거예요. 자꾸 많은 사람 앞에서 제가 설교하는 환상이 보이고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사람들을 보면 설교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홍대에서 목회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서울에 올 때마다 묵는 오피스텔이 있는데 홍대 부근이라 술 먹고 헤매는 젊은이들을 많이 봤거든요.”
평일에는 울산대에서 강의하고 주말마다 서울에 와서 목회할 생각에 장소까지 알아봤다고 한다.
“지하 클럽이 많이 비어 있었는데 저렴한 임대료로 빌려준다는 거예요. 밤새워 놀던 아이들을 전도해서 주일 아침에 예배드리자는 생각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죠. 한데 김형민 목사님이 갑자기 만나자고 하시더니 ‘앞으로 어떡할 거냐’고 또 물으셔서 ‘홍대에서 개척할 겁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러지 말고 그냥 우리 교회로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두 번째 만난 날 그런 말씀을 하신 거예요.”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된 기독교’
정교수 자리를 그만두는 게 쉽지 않아 처음에는 안 가려고 버텼다고 한다. 이후 서울에 특강 하러 가기 위해 KTX역으로 향할 때 10년 넘게 한 번도 막히지 않던 길이 주차장이 되어 움직이지 않는 등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생겼다고 한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분명한 확신이 들어 빛의자녀교회에 가기로 결정했다.
이정훈 목사는 교회 사역에 적응하기 위해 울산대를 퇴직하고 2023년 1년 동안 외부 일정을 모두 중단했다.
“교수 시절부터 신학적 목회의 실종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지난 1년간 철저한 성경 교육에 주력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는 건강한 자본주의에 그 토대를 제공했고,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선한 영향을 끼치며 인류 발전에 기여해왔습니다. 오늘날 성경과 멀어지면서 기독교가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규범과 판단의 기준은 성경이어야 한다는 게 제 목회의 방향입니다.”
이정훈 목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계획한 대로 된 게 하나도 없다며 앞으로도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공동 담임목사로 교회 사역을 충실히 하면서 PLI 교육을 확대해나가겠다는 생각 정도만 갖고 있습니다. 튜터들을 더 키워서 더 많은 분에게 성경적 세계관을 교육하고 싶은 게 또 다른 바람이죠.”
PLI 교육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성경적 세계관을 공부해야 정치관과 역사관이 확고해져 선동당하지 않고 교회와 대한민국을 수준 높게 지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