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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취

아들이 말하는 山岳사진 선구자 김근원

스스로 ‘작가’라 부르지 않았던 진정한 山빛 예술가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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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적 시각’ 찾으러 이 산 저 산 수도자처럼 헤매
⊙ 누구도 시도 못 한 장엄한 산악미를 黑白 색조로 표현
  고(故) 김근원(金槿原·1922~2000년)은 산(山)만을 주제로 산을 평생 반려로 여기며 살아온 산악사진가다.
 
  생전 산악인 사이에선 산사람으로 통하고, 사진작가들에겐 ‘선생님’으로 불렸다. 혹자는 산과 사진에 미친 사람이라고 불렀다. 자신을 결코 ‘작가’로 부르지 않았던 진정한 작가였다.
 
  1년의 절반 이상을 산에서 보내고, 산에 오르지 않을 때엔 암실(暗室)에서 지냈다. 고향은 경남 진주. 어려서 지리산을 보며 자랐고 여남은 살부터 사냥을 즐기던 집안 어른을 따라 산에 올랐다.
 
  13세 때던가? 일본을 다녀온 삼촌으로부터 사진기 1대를 선물 받았다. 그걸 가지고 산에 갈 때마다 ‘장난’을 좀 친 것이 평생의 업(業)이 되었다.
 

  지난 1986년 1월 25일 자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예술을 한다는 생각은 전혀 가져본 적이 없어요. 그저 ‘야!’ 하고 감탄사 한번 나오면 그게 하나의 예술의 경지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있는 그대로를 찍는 것이 산 사진입니다. 다른 걸 만들 수도 없고 또 인위적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어요.”
 
  2022년은 그가 산의 자취를 남긴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구랍 11월과 12월 〈산과 기억〉전(展)이 열렸다. 2대째 사진을 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장남 김상훈(金尙勳) 산악자료연구소 대표를 만났다.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배웠다. 그러니까 김 대표가 14세 때인 1966년부터 사진을 찍었다. 중앙대 사진학과 72학번.
 
  《월간 세대》의 사진기자를 거쳐 《사람과 산》이 창간될 당시에는 사진부장을 맡았다. 중앙대 산업교육원의 전임교수로 재직했고 아버지와 공저로 《산악사진-이론과 실제》(1995), 《한국의 산》(上下)(1987) 등, 편저로 《김근원 산악포커스; 한국 산악운동의 발자취》(2003), 《한국 스키의 발자취》(2003) 등 다수를 펴냈다. 개인전으로 〈세계의 국립공원〉(1994), 〈노래하는 한국의 바위〉(2004) 등이 있다.
 
산악사진가 김근원은…
 
  김근원(金槿原)은 부친 김주경과 모친 김경애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장남이자 형인 김여원(金如原·작고)과 누님인 김계련(작고), 아래로 김서원(96·LA 거주)이 있다.
 
  김근원은 최귀남과 결혼해 장녀 은영(71·LA 거주), 장남 상훈(69), 차남 경훈(67·LA 거주), 차녀 수영(64), 삼남 정훈(63)을 두었다.
 
  김근원은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우여곡절을 겪다가 형님(김여원·《서울신문》 사장 역임)과 함께 상경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많은 남자가 피할 수 없었던 징병의 문제를 겪게 됐는데 마침 전우(戰友) 한 사람이 일본어를 잘해 그로부터 일본어를 배운 것이 배움의 전부였다.
 
  덕분에 일본어로 된 사진과 산악에 관한 도서를 구입해서 읽게 된 것이 사진 창작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54년 북한산 등반, 1955년 지리산 등반을 계기로 사진 작업에 몰입, 1956년부터 한국산악회와 함께하면서 본격적인 산악사진을 시작했다.
 
  특히 아들 상훈(산악자료연구소 대표)에게 사진을 가르치면서 그것이 자신에 대한 가르침이었던지 자신의 사진기록을 다시 들춰보며 필름을 정리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진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슈타인만클럽, 에코클럽 같은 산악모임, 이화여대 사대산악부 및 등산부 등반, 대한스키협회 개최 스키대회, 한국산악회 주최 등행대회, 산악훈련 등에 참가해 1950~80년대 한국 산악사 및 스키 역사의 소중한 기록들을 남겼다.
 
  그 결과물로 〈울릉도·독도 보고전〉(1956)을 비롯해 총 6회의 산악 관련 기록 보고전을 주도했고, 개인전으로 〈북한산〉(1976), 〈설악산 천불동〉(1977), 〈지리산〉(1980), 〈소백산〉(1985), 〈태백산맥〉(1989), 〈The Alps〉(1987) 등 총 16회의 사진전을 열었다. 일본 산악사진협회의 해외사진가상(1967)과 서울시장 표창(1986) 등을 수상했다.
 
  산악사진 입문 시절(1954~56년)
 
김상훈 산악자료연구소 대표
  《김근원 산악포커스》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초창기 산을 누빌 때 접한 놀라운 경험담이 실려 있다.
 
  〈… 1958년 10월에 백담골을 거쳐 대청봉을 올랐다. 그해 1월에는 이른바 외설악인 신흥사에서 출발, 천불동을 거쳐 대청봉을 올랐지만 내설악에서 오르기는 처음이었다. 봉정암을 지나 중청봉 조금 못 미친 곳의 너덜지대에 이르렀을 때 수십 구의 유골들을 발견했다.
 
  그 옆에는 녹슨 탄피와 여러 잔해들이 함께 널려 있어 6·25의 동족상잔으로 남겨진 흔적임에 분명했다. 가슴이 섬뜩하고 발이 저린 듯했지만 뭐라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중략) 우리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유골들을 수습하여 한자리에 모으고 돌무덤을 만들어주었다.…〉
 
  또 용대리에서는 반달곰을 만났다. 1959년 10월이다. 마을 사람들이 어슬렁거리는 새끼곰을 잡아 먹이를 주며 키웠다고 한다. 김 대표의 말이다.
 
  “(선친에 따르면) 귀엽고 깜찍한 새끼곰이 눈을 멀뚱거리며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다가 과자라도 주면 몸을 일으켜 받아먹었다고 해요. 당시 등반객도 이런 즐거움에 더욱 용대를 찾게 됐다고 합니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 아닌 반달곰 과자 받아먹던 동화 같은 시절도 우리네 산에서는 흔하게 있었죠.”
 
이끼 낀 바위 틈의 해골. 6·25의 흔적은 휴전 후 5년이 지났는데도 곳곳에 상흔이 남았다. 1958년 1월 촬영했다.
  ― 김근원 선생은 초기 산악사진을 어떻게 구현했을까요.
 
  김상훈 대표는 “처음부터 산악사진의 예술성이나 가치를 깨닫고 접근한 것이 아니다. 현실도피의 하나로 등산과 사진을 시작했다고 해야 아마도 적절한 표현이 되겠다”고 했다.
 
  “6·25로 인해 살던 집이 모두 불타고 가재도구마저 사라진 현실 앞에서 그냥 주저앉을 수 없었기에 무심코 배낭에 카메라를 넣고 산에 오르신 것이 계기가 되셨던 것이죠. 아버지는 어떤 목적의식도 없이 집을 나섰던 것이고, 사진의 가치는 더더욱 모르던 시절이셨어요. 단순히 현실의 허탈감을 달래려 산을 택하셨다고 할까요?”
 
  이때의 나이가 32세(1954년)였으니, 당연히 가정이 있고 자식을 둘이나 둔 상태에서 늦게 시작한 등산이었다. 취미의 일환이었지 생업을 위함이 아니었다. 산을 찍을 만한 안목도 없었다.
 
 
  본격적인 산악 활동 시절(1956~65년)
 
  ― 1956~65년 사이 10년 동안 김근원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아버지는 사진 촬영이 거듭되면서 ‘왜 내가 이런 사진을 찍었는가?’ ‘왜 이렇게밖에 사진을 찍어내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셨다고 합니다.
 
  마침 한국산악회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탐사(1956년)가 곧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탐사에 사진 담당으로 당신이 합류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죠.”
 
  이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산악 활동을 시작했다. 즉 산을 향한 무한한 발 디딤이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957년 1월 한국산악회가 주관한 겨울 한라산 등반에 이어 여름에도 한라산을 등반했다. 아울러 겨울 등산에는 스키가 필수임을 깨달은 후에는 스키를 익히려 대관령에 올랐다.
 
  “1958년 바로 스키를 이용한 겨울 설악산 등반에 참가하셨고, 여름에는 한라산을 등반하며 사진 촬영에 몰두하셨어요.”
 
  김근원은 우연히 일본의 산을 올라갈 기회(1965년)가 생겼다. 나름대로 한국의 산에서 연마한 등산 기술과 더불어 ‘겉으로는’ 꽤 사진을 잘 찍는다는 말도 조금씩 듣던 터에 생긴 기회였다.
 
  “우리나라 산에서, 즉 2000m급 산에서 보던 시각적 세계와 3000m급 산 세계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걸 알게 되셨어요. 3000m 산이 그야말로 시시각각 천차만별(千差萬別)의 변화를 거듭하며 시선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당신의 시야에 등장하는 산의 형태와 모양, 고도감의 변화를 찍어야 한다는 새로운 안목이 생기신 것이죠.”
 
 
  산악사진의 예술적 분수령 시절(1965~71년)
 
  이때부터 김근원은 이를 악물고 셔터를 눌렀다. 그야말로 기를 쓰고 산행을 하며 자신의 ‘사진적 시각’을 찾아내기 위해 이 산 저 산을 마치 방황하는 수도자처럼 헤맸다. 손에 잡을 수도 없는 이상향을 향해 하염없이 산을 쏘다니는 모습이었다.
 
  “이때의 상황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산에 관한 목적의식도 뚜렷하고, 목표 설정도 확실하게 구축된 시기로 볼 수 있어요. 분명한 자기의 의도와 세계가 확립되는 과정이지만, 현실적으로 뒷받침되는 사진적 이해가 새롭게 필요했던 시기였죠.”
 
  산악사진은 자연을 대상으로 한 사진 행위다. 단순히 도심에서 군중이 밀집한 길거리에서의 사진이 아니고, 광활하고 무한한 자연 속에서 깊고 높은 산의 웅자(雄姿)를 촬영의 대상으로 삼는다.
 
  거기에는 반드시 ‘빛’에 대한 원초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빛과 판단할 수 없는 빛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아버지는 이후 대상을 향해 비친 빛과 그 대상에서 반사되는 다양한 빛의 형태가 서로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셨어요. 그러니까 (빛이) 상황에 따라 필름에 감응하는 결과가 다름을 알게 되었어요. 빛의 다양함을 안 후론 빛의 성질에 대한 이해, 또 빛의 성질을 제어할 수 있는 사진적 이해가 또 뒤따라야 함을 발견하게 되셨어요.”
 
  김근원은 사진 연구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에 관한 책을 펼쳐 들고 그 내용과 더불어 테스트를 하면서, 아울러 암실에서 사용되는 사진약품에 대한 연구도 병행했다.
 
  “사진적 이해에 차츰 눈을 떴지만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어요. 산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아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죠. 산악사진을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난 의문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그 난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시간만을 보내고 있던 시기였어요.
 
  산에 대한 이해도만 높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되셨습니다.”
 
 
  늦여름 북한산에서 길을 찾다
 
  그런 방황 속에서 여전히 산을 헤매며 정열을 낭비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아주 늦은 여름 북한산을 찾았다. 능선을 거닐며 어떤 사진을 찍어야 참다운 면모를 찍을 수 있을까, 하며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저녁 해가 막 서쪽 지평선으로 떨어져 내리는 막바지 시각, 우연히 다리쉼을 쉬며 그 자리에서 몸을 뒤로 돌리는 순간, 눈앞에 전개된 북한산의 새로운 모습이 문득 시야를 가득 메웠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가냘픈 구름이 길게 띠를 이루며 백운대 정점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고, 노적봉과 만경대가 한데 어울려 칠흑의 어둠이 짙게 깔린 모습이었는데 그날따라 아버지의 눈에 북한산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그 먼 뒤로 북쪽 하늘은 실루엣 속으로 잠겨 들며 구름 속에서 몇 가닥의 마지막 빛을 토해내는 황혼의 순간이 장엄하다 못해 자못 김근원의 가슴을 흔들어댔다고 합니다.
 
  그 장면을 보자마자 당신은 순간적으로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죠.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또 몰랐던 흑백사진의 명확한 콘트라스트가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색감을 드디어 발견한 것입니다.”
 
  “늘 허공을 헤매며 초점을 잃은 듯한 작가의 ‘카메라 아이(eye)’가 ‘포토제닉(photogenic)한’ 시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무등산
 
북한산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창작적 촬영 시절(1971~91년)
 
  이 시기 김근원은 단순히 좋은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라졌다고 한다. 황혼의 북한산을 바로 본 이후, 머릿속에 저장된 이미지가 새로운 상상력으로 확대되어 눈앞에 전개되었다.
 
  김상훈 대표는 “어떤 산을 오르든지 그 대상을 보는 순간에 작가의 시야에 들어온 피사체를 분석하고 나름대로 판단하는 능력에 도달하셨다”고 했다.
 
  단지 왜 이 상황을 사진으로 찍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발생함과 동시에 찍어야 할 이유가 즉답으로 작가의 마음을 움직이며 반응했다고 한다.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을 김근원은 육감으로 느끼고 있었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서울의 집에 있으면서도 지금 설악산에 전개되는 상황을 꿈꿀 수 있었고, 그 꿈속에서 보았던 설악산으로 달려가면 현실로 전개되어 마치 보물을 가방에 집어넣듯이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내일에 있을 지리산 천왕봉이 오늘 밤에 보이고, 천왕봉에 오르면 반대편 반야봉도 보였다’고 하셨어요. 좋은 사진을 찍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며 이 산 저 산을 헤매던 시절에서 이제는 아무 산이라도 오르기만 하면 그저 산을 주워 담듯이 카메라 앵글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 김근원의 산악사진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장엄하고 숭고한 산악미를 흑과 백의 색조를 통해 과감하게 표현해내셨죠. 작품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셨음이 아쉬울 뿐입니다.”
 
  창작 단계에 접어들었을 무렵 이미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르렀으니 젊었을 때 종횡무진하던 힘이 쇠잔해졌다.
 
  “반면, 창작 의욕은 그때부터 들끓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육체는 점점 어그러지고 있었고 손이 약간씩 떨리셨죠. 20년에 불과한 작품 기간이 너무 짧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김근원의 산악사진은 감상자로 하여금 몰입의 경지에 빠지게 만드는 특유한 마력을 갖는다. 산을 미처 가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환상의 세계로, 그곳을 가본 사람에게는 현장감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경험을 안겨준다.
 
  “김근원의 사진은 마치 유럽의 알프스나 히말라야 같은 거대한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산악 풍광을, 한국의 산에서 수묵화와 추상화의 경지를 넘나들며 그 수려함을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한국의 산에서만 느껴지고 알 수 있는 고유한 아름다움으로, 거대함보다는 오묘함을, 높음보다는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영혼적 공통분모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산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지만, 김근원의 산은 또 다른 차원으로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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