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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김종세 한국 카메라 박물관장

“박물관 없애가면서 집 짓는다는 나라가 어디 또 있을지 모르겠다”

글 : 장원재  배나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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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 7000여 점, 렌즈 7000여 점 등 2만5000여 점 수집
⊙ 1936년 베를린올림픽 당시 손기정 선수 촬영한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카메라 등 희귀 카메라 다수 소장
⊙ 18억원 들여 박물관 짓고 20년간 50억원 들여 운영… 공공주택 건설 이유로 강제 수용
⊙ 문체부, “국내 유일의 카메라 박물관, 사진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아주 중요한 유물을 다 소장”… 존치 요청했으나 국토부, LH공사, 과천시 묵살
⊙ “제가 좋아서 카메라를 모았고, 이 땅에 태어났으면 뭔가 하나는 이뤄놓고 가자고 생각”
⊙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개인이 해보자’는 결심으로 한 일인데 법으로 밀어붙이니 기가 막힐 따름”
한국카메라박물관 김종세 관장. 사진=전형찬 기자
  박물관(博物館)은 현대문명(現代文明)의 성감대(性感帶)다. 인류(人類)라는 종(種)이 지구 위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증명하는 물적 증거의 현현(顯現). 그래서 그 나라가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박물관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문명화의 척도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경기도 과천에는 한국 카메라 박물관이 있다. 사립 박물관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카메라를 보유하고 있는 놀라운 시설이다. 카메라의 원조인 카메라 옵스큐라, 카메라 루시다부터 최초의 은판 사진술 카메라인 1839년 모델, 최신 디지털카메라에 이르기까지 없는 물품이 없다. 박물관이 소장한 2만5000여 점의 수집품을 두고 라이카나 니콘, 펜탁스 등 세계 유수의 카메라 제조사가 ‘우리 회사에도 없는 초기 모델이 여기 다 있다’고 했을 정도다. 김종세(金鐘世·72) 관장의 40년 집념이 이룩한 결과다.
 
  왜 카메라인가. 카메라가 근대와 현대로 진입하는 입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본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기억은 편집이다. 그래서 주관적이다. 유사 이래, 인류는 ‘눈에 보이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 치열하게 분투했다. 동굴 벽화부터 조각, 회화에 이르기까지, 시각적 기록물의 수요는 끊이지 않았다. 주술(呪術)과 제의(祭儀) 이외의 용도도 있었다. 르네상스 이후 ‘비주얼 기록’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귀족들은 여행을 떠날 때 화가를 동반했다. 특정 장소에 이르러, ‘지금 여기’를 기록으로 남기자는 뜻이었다.
 
한국카메라박물관에는 7000여 점의 카메라가 전시되어 있다.
  1826년 무렵 카메라가 세상에 나왔다. ‘내가 본 것’을 종이에 담아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의 눈에 똑같이 보이는 풍경과 인물이다! 이것은 인류의 시공간(視空間) 개념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바꾸는 혁명이었다. 객관적 세계가 실존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문명사(文明史)의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라는 도구를 통해 사진이 보여준 ‘객관적 세계’는 과학의 시대, 근현대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물이었다.
 
  인화(印畫) 물질을 바른 유리 원판에(초창기 사진의 필름) 몇 시간 동안 빛을 모아 겨우 한 장의 사진을 완성하던 인류는, 건식 유리판을 거쳐 플라스틱 롤 필름을 발명하며 사진기의 소형화·경량화·정밀화 시대를 열었다. 디지털카메라는 이런 의미에서 또 다른 혁명이다. 카메라에서 아예 필름을 없앤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컴퓨터와 IT라는 주변 환경의 진화에 병진(竝進)하며, 시대가 바뀌었음을 웅변하는 기기다.
 
  카메라는 광학(光學)기기다. 빛을 향해 꿈을 건 사람들이 만든 기계라는 뜻이다.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과천 카메라 박물관에는 이러한 인류의 분투사(奮鬪史)의 증거가 모두 모여 있다. 김종세 관장은 그래서 인류의 꿈이 담긴 기계를 혼(魂)을 걸고 모은 ‘문명사의 지킴이’다. 그는 언제, 어떻게 카메라와 운명적으로 만난 것일까.
 
 
  중학교 때부터 사진에 관심
 
  ― 고향은 어디입니까.
 
  “경북 안동(安東)에서 태어났습니다. 불행하게도 저는 중학교밖에 못 나왔어요. 부친하고 모친께서 사이가 좀 안 좋았어요. 제가 서자로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친하고는 같이 살지 못했습니다.”
 
  ― 중학교 졸업 이후엔 어떤 일을 했습니까.
 
  “1966년에 졸업하고 바로 취직해서 기술을 배웠습니다. 당시는 미술사(美術社)라고, 지금으로 치면 광고사지요. 3년 정도 다니다가, 1971년에 조그마한 가게를 차렸습니다. 1972년에 군에 입대, 36사단에서 차트 그리는 작전병으로 3년 복무하고 제대 후 친구가 하던 가게를 인수했어요. 그 친구가 입대하면서 임무 교대 한 겁니다.”
 

  ― 어떤 가게였습니까.
 
  “광고사죠. 전단, 현수막 만들고 옥외 간판도 제작했습니다. 상미사(商美社)라고, 상업 미술사의 줄임말인데, 안동 지역에서는 꽤 이름이 났습니다.”
 
  제대 후 돈을 벌어서 처음 산 물건은 ‘남자의 로망’이었다. 첫 번째가 오토바이였고 두 번째가 카메라였다. 수집품 목록 대장엔 ‘첫 카메라, 1976년 구입, 모델명 아사히 펜탁스 K2’가 선명하다. 혹시 카메라 박물관이 오토바이 박물관이 될 가능성은 없었을까?
 
  “없죠. 카메라에 대한 관심은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중학교 때 소풍을 가면, 집 옆 사진관에서 카메라를 빌려서 친구들 사진을 찍어줬습니다. 사진관이 집 가까이 있다 보니까, 자주 놀러 갔어요. 흑백사진 인화 과정을 볼 수 있었죠. 군 생활을 할 때도 사진병이 같은 고향 친구여서 여러 가지를 묻고 배웠습니다.”
 
 
  카메라와 별도로 렌즈도 수집
 
  김종세는 부대 바깥 사진관에서도 카메라를 빌렸다. 휴일에 동료 장병들 사진을 찍고 외출 때는 부대 밖 풍경도 렌즈에 담았다. 그만큼 카메라와 사진이 좋았다.
 
  “당시만 해도 맑은 날에 조리개 얼마, 셔터 속도 얼마, 그걸 정확하게 대입해야 좋은 사진이 나왔는데, 저는 어림짐작으로 계산해서 촬영했거든요. 그런데 사진이 아주 잘 나왔어요. 사진과는 어려서부터 인연이 깊었던 셈이지요. 사회생활과도 인연이 깊죠. 광고와 사진은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가(高價)의 카메라를 일찍 산 겁니다.”
 
  대도시나 외국에 나갈 때도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사진을 찍었다. 1979년 안동 사진동호회에 들어간 후에는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고 배웠다.
 
  ― 사업이 꽤 잘되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미술 전공자는 아니지만, 디자인 감각이 좀 있었고 또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밤새 스케치를 해놓는다든지…. 고향에 광고사가 여러 곳 있었는데, 주변에서 일감을 많이 주셔서 저 혼자 전체 광고 물량의 절반 정도를 작업할 정도였어요.”
 
  지금도 있는 ‘안동 성광칼라’를 잊지 못한다. 김종세를 신뢰해 30~40년 전에 간판 하나를 1000만원에 제작한 고객이다. 지역에서 신뢰가 쌓여 30대 중반에 로터리클럽의 회원으로 가입했다.
 
  ― 카메라하고는 언제 사랑에 빠진 겁니까? 사진을 찍는 것과 카메라를 수집하는 것은 조금 결이 다른 이야기인데.
 
  “우리 박물관에는 카메라 대수만큼 별도의 렌즈 수집품이 있습니다. 카메라 수집을 시작한 동기가 ‘렌즈’ 때문입니다. 렌즈마다 특성이 있거든요. 아사히 펜탁스 K2하고 독일제 자이스 이콘에서 생산한 콘타플렉스를 비교해보죠. 둘 다 렌치 셔터를 쓰는 중급 카메라인데, 똑같은 표준 렌즈를 가지고 테스트를 해보니까 차이가 많았어요. 사진 찍는 분들은 당장 아실 겁니다. 독일제 렌즈는 눈의 입자가 보이고, 암부(暗部) 디테일이 먹으로 떨어지지 않고 다 올라오고…. 고급 안경을 맞춘 기분이었습니다. 눈은 그대로인데, 안경 하나 바꾸니까 신세계가 열리는 느낌? 그래서 그때부터 카메라 렌즈를 모았습니다.”
 
 
  1993년부터 박물관 설립 마음먹어
 
  ‘전문성은 디테일에 깃든다’는 말이 있다. 일반인의 눈이 무심하게 지나치는 지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느끼는 사람이 진짜 전문가다. 예나 지금이나 전문가용 카메라는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경제 사정이 허락지 않아 좋은 카메라는 구입할 수 없었다. 돈이 생기면 저가형 카메라를 사서 렌즈 테스트를 하고,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으면 100달러 내외의 옛날 카메라를 사다가 열심히 찍었다. 그 과정에서 수집품이 늘어났다.
 
  “처음 외국에 나간 것이 1983년입니다. 광고협회에서 일본 초청으로 오사카와 도쿄를 다녀왔어요. 당시만 해도, 우리가 하는 작업과 비교하면 일본 광고회사가 해놓은 일들이 마무리가 깨끗하고 아주 정교했죠. 그래서 수많은 사진을 찍어 와서 그걸 보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저한테는 카메라가 취미생활이면서 영업적인 부분에도 정말 큰 도움을 준 도구인 셈입니다.”
 
  말하자면, 카메라는 김종세에게 현장학습과 복습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도구였다. 박물관에는 중저가 모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경매 시장에 내놓는다면, 대당 10억원을 호가할 물품만 여럿이다. 그렇다면 초고가(超高價) 컬렉터스 아이템(collector’s item)은 어떻게 습득한 걸까? 카메라 박물관 설립은 언제부터 꿈꾸던 프로젝트였을까?
 
  “사회생활하면서 조금씩 사정이 좋아져서 카메라 박물관까지 만들게 됐습니다. 어찌 보면 조금 바보스러운 면도 있는데, 제가 자립하거나 밥 먹고 살 만하게 되면 무언가 사회에 환원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1993년에 카메라 박물관을 만들 목표를 세우고 그때부터 장차 전시품이 될 만한 물건을 사 모았습니다.”
 
  서울신문사의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지원 사업 입찰에 참여, 경북 북부 버스 외부 광고 사업을 수주한 일이 ‘박물관’의 꿈을 키운 계기다. 경북 안동·예천·점촌·상주·봉화 등을 다니며 신나게 일했다. 여윳돈이 생기면 카메라를 모았다. 88올림픽으로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후, 외국에 가면 우리나라에 없는 카메라를 몇 대씩 사 왔다. 환금성(換金性) 좋은 카메라가 아니라, 카메라 발전사에 기여했거나 희소성이 있다든가 하는 것들을 택했다. 여유가 많지는 않았지만, 술 안 하고 잡기(雜技) 못하는 성정(性情)이 큰 도움이 됐다. 2002년 월드컵 때는 택시 외부 광고 서울사업본부 일을 맡았다. 몇 년 동안 상당한 수익이 발생했다. 좋은 카메라를 구입하는 비용이 버겁지 않을 정도였다. 사업이 번창하니 박물관 창립의 구체적인 그림이 떠올랐다.
 
  “일본에도 명품이 많았지만, 우리나라에서 다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생산한 물건은 1980년대만 해도 접근하기가 어려웠어요. 영연방(英聯邦) 국가에서 희소성이 있고 상태가 좋은 카메라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구(舊)소련이 붕괴한 직후에는 소련, 동구(東歐)의 길거리에서 명품들을 많이 샀어요. 돈 될 만한 물건을 집에서 몽땅 다 꺼내 와서 판매하던 시절입니다.”
 
  1938년 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7-1에 한반도 최초의 개인 박물관을 설립한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년)은 김종세의 우상이다. 일제 때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 등을 수집해 유출을 막았기 때문이다.
 
  “IMF 때 원화 가치가 폭락하니까 일본 사람들이 와서 좋은 카메라를 싹 다 걷어갔습니다. 그게 너무 억울해서, 일본으로 나가려는 카메라를 제가 다 샀어요. 간송 선생님 떠올리면서, 한 개라도 이 땅에서 못 나가게 한다고…. 물건 양이 많아서 나중에는 돈 빌려 가면서 구입을 했습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수집품
 
1800년대 후반 영국 귀족이 쓰던 목제 카메라와 당시 앨범 원본.
  ‘수집은 전쟁’이라는 말도 있지만,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베트남에서 한 점포에서 팔던 물건을 통으로 구입한 적도 있다.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였잖아요? 호찌민시에 옛날 카메라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이 있다고 하기에 소개받아서 찾아갔습니다. 풍요하지 않은 나라는 카메라가 마르고 닳도록 씁니다. 수리해서 쓰고 부품도 다른 회사 것을 쓰고…. 그러면 수집품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지죠. 그런데 그 가게엔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들여와서 사진관에서 사용하던 카메라들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여행(時間旅行)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다 사겠다’라고 했더니 주인 표정이 변하더군요.”
 
  아마도 피차간에 횡재(橫財)한 경우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 현재 한국 카메라 박물관이 소장한 물품은 총 몇 점이나 됩니까.
 
  “카메라만 한 7000여 점 됩니다. 그다음에 렌즈가 한 7000여 점 있고, 옛날 유리 원판 필름, 각종 부속품, 기자재 합치면 2만5000점이 훨씬 넘지요.”
 
  ― 가장 애착이 가는 수집품은 어떤 겁니까.
 
  “목재로 만든 1907년 모델입니다. 크리스티 경매에 물건이 나왔었는데 화상 전화로 경매 참가한 중동 부호에게 뺏겼어요. 나중에 똑같은 물건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샀는데 경매에 나왔던 물건보다 더 깨끗하고 상태가 좋았습니다. 영국제고, 주름상자는 빨간색, 거기에 렌즈 세 개가 같이 붙어 있습니다. 홀더, 필름집까지 같이 있어요. 아마 영국 귀족들이 썼던 물건일 겁니다. 도자기로 비유하자면 국보급 고려청자라고 할까요.”
 
  기록을 보니 당시 구입가가 470만원이라고 적혀 있다.
 
 
  손기정을 촬영한 카메라
 
1936년 베를린올림픽 동영상 촬영을 위해 단 4대만 제작한 카메라.
  수집품 중엔 우리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귀한 물품도 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동영상 촬영 때 쓰였던 카메라다.
 
  “20년 전쯤 독일 컬렉터에게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절대로 되팔지 않겠다’라는 각서를 쓰고 손에 넣은 물건입니다. 그때 지불한 금액이 2700만원입니다. 단 4대를 제작한 카메라로, 공식 기록에 의하면 한 대가 파손되었어요. 현재 지구상에 단 3대만 남아 있고, 일반에 공개하는 물품은 저희 박물관 소장품이 유일합니다.”
 
공식 기록집에 실린 손기정 선수 골인 장면.
  독일 영화 감독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이 촬영한 전설의 다큐멘터리 〈올림피아〉(1936)에는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孫基禎·1912~2002년)의 모습이 담겨 있다. 출발 장면, 중간 부분, 골인 장면을 합해 10분 남짓한 분량이다. 바로 그 영상을 촬영한 카메라 중 한 대가 이 카메라다. 2000년 초반 칠레 수도 산티아고 벼룩시장에서 베를린올림픽 공식 보고서를 우연히 손에 넣었다. 동·하계 올림픽 각 1권. 경기 장면이 인쇄가 아니라 인화한 사진으로 붙어 있는 한정판 도서였다. 책 중간에 이 카메라로 동영상을 촬영 중인 사진이 있어 카메라 옆에 함께 전시하고 있다.
 
  “나중에 세계 경매 시장에 나온 같은 책을 200만원 주고 또 구입했어요. 손기정 기념관에 기증할 생각에서였습니다. 책을 보면 경기 장면 사진 이외에, 손기정 옹이 신었던 신발까지 나와 있거든요.”
 
제2차 세계대전 공중전 연습용 기관총 카메라. 방아쇠를 당기면 사진이 찍혀 적중 및 격추 여부 판정에 쓰였다.
  한국 카메라 박물관에선 가끔 특별전도 한다. 라이카 특별전 때는 독일 라이카 본사에서 ‘우리 회사의 역사를 이렇게까지 보존해줘서 고맙다’라는 감사 편지를 보내왔다. 군용(軍用) 카메라 특별전 때는 기관총 카메라 등 희귀품이 세상에 나와 마니아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기관총같이 생겼지만 실제 총은 아니고, 방아쇠를 당기면 사진이 찍히는 겁니다. 전투기 타고 공중전(空中戰) 훈련할 때 아군기끼리 총을 쏠 수는 없잖아요. 기관총 카메라로 총 쏘듯 촬영하면, 나중에 사진으로 누가 언제 어떻게 명중시켰는지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저희 박물관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이 쓰던 모델, 일본군이 사용하던 모델 등 총 2점의 실물이 있습니다.”
 
  김종세 관장이 수집품 구입에 쓴 돈은 얼마나 될까? 김 관장은 “여행경비는 제외하고, 수집품을 사는 데 쓴 돈만 60억~70억원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공주택 용지로 강제 수용
 
  과천 한국 카메라 박물관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명소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근일 내에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 공공주택특별법에 따라 박물관 전체 토지가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김종세 관장은 2000년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주상복합건물에 한국 카메라 박물관을 연 후, 2002년 문화체육관광부에 박물관을 등록했다. 2007년 현 위치에 건물을 신축해 이전, 개관했다.
 
  2018년 3기 신도시 개발 계획 입안 전후 ‘이견이 있는 사람들은 의견을 제출하라’라고 하기에 ‘그대로 운영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카메라 박물관 옆 국립과학관은 유지 결정, 카메라 박물관은 수용 결정이라는 통지가 나왔다. 같은 사립 박물관이지만, 전통 어린이 박물관은 존치 결정이 났다.
 
  과천 막계동의 카메라 박물관 대지는 135평, 건평은 280평 정도다. 3억원을 주고 사두었던 땅에 15억원을 들여 신축한 건물이다. 처음부터 박물관으로 쓰려고, 외관도 1935년 독일 라이츠사가 생산한 135mm 헥토르 3군 4매 렌즈의 단면으로 디자인했다. 건물 상부는 조리개 모양과 후드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서민 주택 환경을 개선한다는 명분이야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막계동에서 수용한 땅이 3만4000평 정도 됩니다. 그중에 우리 박물관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은 120평이에요. 게다가 저희 박물관이 자리한 지역은 수용지의 한가운데도 아니고 그야말로 끝자락입니다. 가장자리 끝자락 120평이 모자라서 하고 싶은 개발을 못 한다?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보상비로는 박물관 신축 불가능
 
한국카메라박물관은 카메라 렌즈 단면을 본떠서 지었다.
  문제는 지급되는 보상비로는 어디 가서도 박물관을 열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지급하는 보상금은 어림잡아 23억원. 돈을 받으면 30%의 세금을 내야 한다. 남는 금액으로는 수용지의 토지 40평 정도를 살 수 있을 뿐이다. 박물관 신축은 꿈도 꿀 수 없다.
 
  “제가 견딜 수 없는 건, LH나 도시공사에서 땅장사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요즘 대장동 이야기가 이슈잖아요? 여기도 똑같습니다. 박물관 뒤편으로 농사짓는 분들 밭이 있습니다. 평당 400만원 정도 주고 수용해요. 돈으로 보상을 안 받고 토지로 받겠다, 대토(代土)해 달라고 한 사람한테는 LH나 도시공사가 나중에 평당 4000만원 전후에 사가라고 합니다. 토지 정비하고 뭐 그런 건 있겠지만, 원 소유자보고 10배를 더 주고 사가라는 것 아닙니까? 토지 수용 당하는 사람한테 파는 가격이 그 정도고, 일반 사람들에겐 더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겠죠. 박물관 인근 지식정보타운 수용지는 평당 200만~300만원에 수용해서 상업지구 기준 1평에 1억3200만원을 받고 팔았어요.”
 
  김종세 관장은 다른 건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박물관을 지금 자리에서 계속할 수 있게만 해달라고 했다. 만약 불가피하게 박물관을 수용해야 한다면, 다른 곳에 건물을 지어달라고 호소했다.
 
  “박물관 설립 운영이 그 자체로 특혜가 아니냐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닙니다. 연간 2억5000만원 정도 개인 돈을 써야만 박물관 운영이 가능합니다. 20년 동안 50억원 넘게 제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학예사 인건비도 정부 부담이 70%, 제 부담이 30%입니다. 입장 수입이 있다고는 하지만, 코로나19 전에도 연간 방문객은 1만 명 내외였습니다. 그 돈으로는 전기료, 우편료, 통신료를 내고 나면 끝이에요. 전시품 유지·보수 비용, 학예사 인건비, 도록 발간비 등은 다 제 부담입니다.”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
 
  ― 그런데 왜 박물관을 계속하십니까.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마음이 컸죠. 지금 생각하면,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 싶습니다. 나라에 충성하려고 시작한 일인데,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개인이 해보자라는 결심으로 한 일인데 이렇게 법으로 밀어붙이니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 공공주택특별법도 있지만 박물관미술관진흥법도 있지 않습니까.
 
  “있죠. 하지만 특별법이 우선이니까 진흥법은 소용이 없더라고요. 문체부에서 국토부로 몇 차례 공문을 보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담당 국장, 과장, 실무직원들이 여기 와서 세 시간 정도 박물관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갔어요. ‘국내 유일의 카메라 박물관이며 사진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아주 중요한 유물들을 다 소장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존치 재협조 요청을 한다.’ 이런 문서를 세 번이나 보냈어요. 그런데도 과천시와 국토부는 요지부동입니다.”
 
  ― 청와대나 관계 기관에 민원은 넣어보셨습니까.
 
  “2018년부터 지난 4년 동안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민원, 청원 해서 열 번 넘게 보냈습니다.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 대통령 비서실, 국민권익위원회에도 보내고 윤석열 대통령한테도 편지를 썼어요. 그런데 국토부에 보내면 LH로 보내고, LH는 다시 과천 도시공사로 보내고, 어디 어디로 이첩했다는 공문만 보내고 아무도 책임 있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담당 공무원이 선을 쭉 직선으로 그었다”
 
김종세 관장이 관계 기관에서 보내온 박물관 토지 수용 공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법적인 해결책은 없는 겁니까.
 
  “공공주택특별법에 따르면 무조건 수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조문은 27조 2항 동법 시행령입니다. ‘건축물의 존치’ 조항에 따르면, ‘다음 각호의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경우’라고 나와 있는데, 가: 건축 및 영업장들이 허가를 제대로 받았을 것, 나: 주택지구의 토지 이용 계획상 받아들일 수 있을 것.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판단하는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라고 하면 그만이라는 뜻입니다. 왜, 어떤 이유로 받아들일 수 없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이 말이죠.”
 
  ― 정부는 민간 박물관·미술관, 이런 시설이 활성화되도록 도와줘야 되는 것 아닙니까.
 
  “처음에 공공주택 특별법 얘기가 나와서, 저희 박물관은 제외시켜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담당 공무원이 선을 쭉 직선으로 그었습니다. 그다음에는 공무원들에게 운신의 폭이 없어요.”
 
  ― 왜 그렇습니까.
 
  “선 안에 들어간 땅을 빼주면, 박물관이든 뭐든지 간에 그걸 존치하자고 하는 순간에 바로 특혜 시비가 나오니까요. 공무원들 입장에선 아무 조치를 안 하는 것이 편한 겁니다. 그냥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주택특별법 27조 2항 동법 시행령 ‘건축물의 존치’ 나항, 이 부분을 들어서 안 된다고 해요. 우리 박물관은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이 조항에 걸려서 존치를 못 한다는 겁니다.”
 
  ― ‘주택지구의 토지 이용 계획상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조항이 문제라면, 토지 이용을 계획하는 책임자가 ‘받아들일 수 있다’라고 결심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문체부에서 그러더군요. 자기들이 협조 공문을 보내고 박물관 존치를 위해 노력했는데 과천시장이 문제다. 과천시장이 ‘이건 중요한 문화시설이니까 꼭 존치해야겠다’라고 하면 존치가 가능한데 왜 안 그러는지 모르겠다고요.”
 
 
  “정말 억장이 무너진다”
 
  1980년대 초반, 삼성에서 카메라를 생산한 적이 있다. 일본 미놀타사와 제휴, 삼성미놀타 브랜드로 국산 카메라가 나왔다.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박물관을 만들려고 하다가 못 만들었다. 필자의 득문(得聞)으로는, IMF 직전까지 박물관 설립 플랜을 폐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뜻을 접었다. 이유가 있다. 자금력(資金力)만으로는 삼성의 이름값에 걸맞은 박물관을 꾸리기 어려웠던 탓이다.
 
  “제가 좋아서 카메라를 모았고, 이 땅에 태어났으면 뭔가 하나는 이뤄놓고 가자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거의 매년 특별전을 열었고 도록(圖錄)·사진집을 만들어서 국공사립 도서관 300여 곳에다가 책을 다 보내줬습니다. 우리나라엔 특히 카메라 메커니즘에 대한 자료들이 없어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책 간행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이 별난 짓을 사명감을 가지고 지금까지 계속해왔는데, 이렇게 당하고 나니까 정말 억장이 무너집니다. 서민들의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해 집을 지어주더라도 생존과 문화가, 말하자면 현재와 미래가 공존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박물관을 없애가면서 집 짓는다는 나라가 어디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박물관·미술관 등 문화시설은 국가가 지켜줘야 합니다. 이건 책무입니다. 법으로도 나와 있어요. ‘국가나 지자체 장이 지원 육성해야 한다’라고요.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입니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13조 2항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국가가 지켜줘야 할 시설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막무가내(莫無可奈)로 박물관을 없애겠다고 나오는데도 조치가 없어요. 제가 여기를 상업시설로 바꾸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박물관 계속하겠다는 건데 왜 그걸 헐어버린다는 겁니까?”
 
 
  박물관·사진 단체들, 존치 지지 서명
 
  박물관협회, 사립 박물관협회, 사진작가협회, 프로사진작가협회 등 단체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카메라 박물관의 존치를 염원한다. 연대 서명한 공문도 보냈다. 과천 한국 카메라 박물관은 대한민국의 보물일 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도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초유(初有)의 시설이라는 것이다.
 
  ‘카메라 셔터를 만들 수 있는 나라가 공업 선진국’이라고 했던가. 선진국 지표로는 ‘렌즈를 깎을 수 있는 나라’도 있다. 인류는 ‘우리가 본 것’을 기록하기 위해 보다 더 정밀하고 정교하며 정확한 기기 제작에 신명을 바쳤다. 보이는 것을 확실하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카메라가 있었기에, 우리는 기지(旣知)의 세계를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고, 미지(未知)의 세계로 나아가는 객관적·과학적 데이터를 얻었다. 현미경 카메라로 미세극세(微細極細)한 곤충의 생태를 감상하고, 천체카메라와 인공위성 장착 특수카메라를 통해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의 황홀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우리 몸속이나 뼈의 구조처럼, 볼 수 없는 것을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도 다 카메라 덕분이다. 이 모든 역사를 한곳에서 한눈에 볼 수 있는 세계적인 장소가 지금 사라지기 직전이다. 사라지는 건 순간이지만, 복구하는 건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다. 관계 당국의 선처를 기대한다. 좋은 박물관이 많은 나라가 진정한 문화강국(文化强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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