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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이순자 여사가 말하는 ‘나와 全斗煥 대통령’ 〈상〉 군인 全斗煥

“사단장 시절 중대장 이름 줄줄 외우고, 부하들과 육개장 파티하며 행복해한 그분”

글 :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군사전문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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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들었던 일을 기억 못 하는 일이 자주 생기자 ‘여보, 내가 당신이 누군지 알아볼 때까지만 당신이 수고해요’”
⊙ “혈액암 말기 선고받고 연명치료 거부… 죽음 초연하게 받아들였다”
⊙ “33년 전 백담사로 떠나던 날 홀연히 떠나… 그분은 나의 영원한 동지”
⊙ “全 前 대통령, 5·18특별법으로 28일간 단식하면서 해마 손상당해 2013년 무렵부터 알츠하이머 앓기 시작”
⊙ 초급 장교 경제적 어려움 알아 이화여대 의대 진학… 얼마 전 재입학 통지 와
⊙ 12·12 한 달 후 한국외대 편입시험 치러… 연대광장에서 남편 화형식 목격
사진=주민욱 씨영상미디어 기자
  2022년 9월 29일 청명한 가을날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고(故) 전두환(全斗煥) 전(前) 대통령의 자택 앞 골목은 적막했다. 12·12와 5·18 관련해 검찰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95년 12월 2일 소위 ‘골목성명’을 발표한 그 역사의 현장…. 지난해 11월 23일 전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작고한 뒤 5·18 관련 단체의 확성기 시위도 사라졌고, 문재인 정부 들어서면서 경비초소마저 철수시켜 썰렁한 풍광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李順子·83) 여사가 전 전 대통령 사망 1년 만에 인터뷰에 응했다. 접견실 맞은편에 걸린 《반야심경(般若心經)》 216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07년 이순자 여사가 수술의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큰 수술을 받게 되자 치유를 기원하는 심정으로 쓴 것이라고 했다. 기자가 “‘이순자 할멈’이라 쓴 것이 흥미롭다”고 하자, “그이와 아들 셋 목소리가 똑같아 남자들 중 한 사람이 ‘여보’라고 부르면 여자 네 사람이 자기 여보인 줄 알고 뛴다”며 “그이가 ‘당신은 할멈이라고 할 때만 뛰라’며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고 했다.
 
연희동 자택 접견실에서 인터뷰하는 이순자 여사. 왼편에 전두환 대통령의 영정사진과 유골함, 무궁화대훈장이 보인다. 이 여사 뒤편에 보이는 대형 병풍은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사를 서예로 쓴 것이다. 사진=주민욱
  인터뷰가 진행된 접견실은 5공화국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이순자 여사의 뒤편 벽면 전체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취임사를 담은 대형 액자가 압류딱지 흔적을 남긴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반대쪽 벽에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부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1988년 2월 24일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날 때, 청와대 직원들이 남긴 ‘전두환 대통령의 치적(治績)’ 액자가 기자에게 5공화국 재조명의 시대적 요구를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접견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영정 사진과 신위(神位), 그리고 유골함, 그의 회고록이 자리한 빈소(殯所)로 용도가 바뀌어 있었다. 감청색 투피스 정장 차림에 알이 굵은 진주 목걸이를 하고 나온 이 여사는 추징금 압류 후폭풍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1997년 대법원에서 추징금 확정판결을 받으면서 25년이 넘도록 압류와 공매에 불복해 이의신청과 소송을 하면서 정신까지 피폐해졌다”면서도 4시간이 넘는 인터뷰 동안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전두환 대통령이 생전 앉았던 그 의자에서 그간의 쌓인 응어리를 털어놓았다.
 
 
  “화장하면 사리로 나올 텐데…”
 
연희동 자택 응접실 입구에 걸려 있는 《반야심경》. 전두환 대통령이 이순자 여사의 쾌유를 위해 기도하는 심정으로 썼다고 한다. 사진=오동룡
  — 최근 암 수술을 받으셨다고 들었다. 현재 몸 상태는 어떠신가.
 
  “유방암 판정을 받고 수술받게 된 날은 남편의 49재를 마친 바로 다음 날인 1월 11일이었다. 왼쪽 가슴을 완전 절제하는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까지 받았다.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다시 건강한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각하 사면·복권되고 난 다음, 안면 신경섬유종 수술도 받았는데, 하얀 이빨처럼 생긴 섬유종을 떼어낸 걸 보시더니 ‘화장(火葬)하면 사리로 나올 텐데 아깝다’고 해서 웃었다. 평소에 농담도 그렇게 잘하셨다.”
 
  — 응접실 입구에 걸려 있는 《반야심경》을 전 대통령이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쓰신 것을 보면 여사님의 건강에 무척 신경을 쓰신 것 같다.
 
  “평생 고락을 같이해온 마누라를 잃을 수도 있겠다 싶어 정신없이 반야심경을 세필로 썼다고 하더라. 2007년 3월의 일이다. 하마터면 그때 그이를 홀로 남겨두고 이 세상을 하직할 뻔했다. 침실 바로 옆 화장실까지 가는 일도 힘들게 느껴졌으니까. 두 다리가 아파 병원을 찾았는데, 대동맥이 막혀 코어텍스 성분으로 된 인공혈관으로 갈아 끼워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릴 들었다. 3월 29일 1차 시술을 받고, 이튿날 2시간30분에 걸친 대수술을 받은 후 무균실에서 열흘을 보낸 후 겨우 퇴원했다.”
 
  — 지난해 11월 23일 서거한 전 대통령을 유골함에 담아 현재 10개월째 자택에 모시고 있다.
 
  “돌아가시기 5년 전 발간한 회고록에서 ‘만약 통일의 날을 맞이하기 전에 내 생이 끝난다면 북녘땅이 바라보이는 전방의 어느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조국이 통일되는 그날을 맞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전방 고지는 군(軍) 관할 지역이고 코로나19로 인해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고 있어 장지(葬地)는 시간을 갖고 찾기로 했다. 1년 안에 장지에 모실 수 있게 될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고인에게 낯익은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1주기 안에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아 애태우고 있다. 잠정적으로 집에 모시면서 유지(遺旨)를 잘 받드는 길을 모색해보기로 했다.”
 
 
  큰며느리에게 ‘우리 집에 시집와 고생했다’
 
  —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5·18 헬기사격을 증언한 조비오 신부를 비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재판을 받았다. 항소심 첫 공판이 열리던 2021년 8월 9일, 사람들은 연희동 대문을 열고 나오는 전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5·18특별법으로 28일간 단식하면서 해마 손상을 당해 2013년 무렵부터 알츠하이머를 앓으셨다. 그래도 평소 활기차고 강한 모습이셨는데, 재판받으러 갈 때 몸무게가 12kg이나 빠지고 병색이 짙은 모습으로 나타나자 대역(代役)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다. 1심 재판 때에도 급성 탈장(脫腸)에 걸려 당장 수술받지 않으면 큰일 날 수 있다는 담당 의사의 경고를 받았지만, 재판에 출석하고 다음 날 입원해 급히 수술을 받았다. 항소심 재판 때도 흉통과 가슴 답답함을 호소하면서도 끝까지 재판정에 앉아 버틴 연후에 병원에 입원했는데, 의사가 혈액암(일명 다발성 골수종)이라고 하더라.”
 

  — 치료가 불가능했나.
 
  “혈액암 말기였다. 생명 연장을 위한 항암치료나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남은 생을 그냥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다 하셨다. 항암제는 투여하지 않았고, 보험 적용이 되는 경구용약(먹는 약)만 드셨다.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고 나선 맨날 콧노래 부르시고 즐거워하셨다. 큰아들(전재국) 집에 가셔도 밖에 경호관 기다린다며 빨리 나오시던 분이 돌아가시기 전날엔 커피까지 드시고 큰며느리에게 ‘우리 집에 시집와 고생했다’고 하시더라.”
 
 
  “편안한 모습으로 내 품에 안겨 세상 떠나”
 
  — 전두환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을 들려달라.
 
  “방금 들었던 일을 기억 못 하는 일이 자주 생기자 ‘여보, 내가 당신이 누군지 알아볼 때까지만 당신이 수고해요’라며 멋쩍어하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든 것 다 잊어버려도 나만 잊지 마세요. 눈이 잘 안 보이면 안경을 쓰면 되고, 귀가 잘 안 들리면 보청기를 끼면 되듯, 기억이 잘 안 나시면 제가 대신 기억해드리면 되잖아요.’ 그러곤 이 세상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하루라도 남편보다 더 오래 살아 그분의 눈이 되고 귀가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결국 나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던 것 같다. 그분은 혈액암이라는 끔찍한 선고를 받았지만, 식사와 목욕도 혼자 하셨고, 오래 고통받는 일 없이 편안한 모습으로 내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나셨다. 청와대 들어갔다가 나와 격동의 삶을 살다 보니 국내 여행 한 번 제대로 못 했다며, 그동안 고생한 마누라와 우리나라 구석구석 다녀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 돌아가시기 전에 식사는 좀 하셨나.
 
  “입맛이 없어 음식에 손도 못 대셨다. 그때도 준비한 사람의 노고를 생각해 ‘준비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먹지 못해 미안하구만’이라면서 우유나 뉴케어(환자용 영양식) 몇 모금이라도 마셔보려 애쓰셨다. 먼저 가신 시어머님을 닮아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던 분, 정말 좋은 곳으로 가신 것만 같은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계시는데…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다시는 못 올 곳으로 영영 가셨다는 사실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징검다리를 손잡고 건너는 부부
 
2017년 출간한 이순자 여사의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자작나무숲)의 표지 사진. 이순자 여사는 촬영자는 알 수 없지만 전 대통령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라고 했다. 사진=이순자 여사
  — 언론들이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전두환, 33년 전 백담사로 떠나던 그날 돌아가셨다고 했다.
 
  “우리 가족에겐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날인 11월 23일, 그분은 이 세상과 작별하셨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묵묵히 참아내고 한마디 대꾸조차 하지 않고 살아내신 분. 하필이면 생각하기에도 서러운 그날 훌쩍 우리 곁을 떠나면서 남편은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평화적 정부 이양(移讓)을 성취시킨 사람의 의무였다’고 말이다. 다행히 나는 퇴임 후 그분과 함께 굴곡진 삶을 살아오면서 그분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의연함에 깊이 매료됐다. 그리고 특출할 만큼 뛰어난 그분의 기억력이 정치재판으로 인한 광풍(狂風)에 시달리면서 예전만 못해진 것을 지켜보면서 가슴 아파했었다.”
 
  — 2017년 출간한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 표지에 등장하는 징검다리를 손잡고 건너는 두 분 모습은 부부란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 같다. 자서전 제목을 이렇게 정한 까닭은.
 
  “그 사진을 처음 찾아냈을 때의 기쁨을 아직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언제 누가 찍은 사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사진이야말로 우리 내외가 함께해온 세월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위태롭게 놓인 징검다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조심스럽게 건너왔듯, 앞으로 우리에게 닥쳐올 고난도 함께 손잡고 헤쳐나가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하고 싶었다.”
 
  — 1988년 11월 23일 백담사에 들어가시면서 기록하기 시작한 여사님의 자서전은 마치 일기장을 읽는 듯 생생한 묘사가 일품이다. 전두환 대통령 회고록은 5공화국의 《삼국사기》에 가깝고, 여사님의 자서전은 《삼국유사》에 가까운 것 같다.
 
  “내 자서전의 초판 1쇄본 발행일이 2017년 3월 27일이고, 그분의 회고록 초판 1쇄본 발행은 4월 3일이니까 거의 동시에 출판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때 나는 사람들이 어떤 책을 더 선호하나 궁금증이 일어 경호관들에게 각하 회고록과 내 자서전을 선물한 후 물어보았다. 그분들은 각하 책 1, 2권이 더 재미있었다고 했다. 작가 입장에선 약간 섭섭했는데, 오 기자님이 내 자서전이 더 재미있다고 말씀해주시니까 기분이 좋다(웃음).”
 
 
  남편에 대한 존경심과 측은지심
 
  — 전두환 대통령은 자서전을 보고 뭐라고 하셨나.
 
  “‘당신, 기억력 참 좋구먼~’이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들이라 백담사 시절부터 1995년까지 그분의 구술을 받아 녹취를 풀어 기록했으니까 그런 말을 들을 만하다. 백담사 2년 생활을 《조선일보》에 게재하고 자신을 얻어 자서전을 쓴 거다. 나의 인생을 통해 격동기의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분이나마 간접적으로 경험해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처음엔 대학노트에 쓰다가 컴퓨터까지 배워가며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 어떤 계기로 자서전을 쓰시게 됐나.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 일제강점기인 1939년 3월 24일 만주에서 태어나 8세 되던 해 귀국해 84세 될 때까지 이 나라에서 살아온 여인네다. 그것도 42세 되던 해 남편이 뜻하지 않게 대통령이라는 어마어마한 자리를 맡는 바람에 대통령 부인의 역할을 맡게 돼 남들이 겪어볼 수 없는 경험을 했다. 또 남편이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평화적 정부 이양을 하는 바람에 권력에서 멀어진 사람이 어떠한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도 몸소 체험했다. 내가 보고 느낀 일들을 일기장에 기록하듯, 일상생활을 영상으로 남기듯, 될 수 있는 한 세밀하게 적어보려 노력했다.”
 
  — 자서전 발문에 ‘나의 애인이었고 신랑이었고 남편인 그분. 자식들의 아버지이고 손자 손녀들의 할아버지인 그분. 대한민국 제11대, 제12대 대통령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한 그분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고 적으셨다. 영부인에게 남편인 전 대통령은 사랑하는 사람 이상의 존재로 느껴진다.
 
  “장문의 글을 써본 적이 없던 내가 2만 장이 넘는 원고를 쓰게 되고, 자서전을 손수 집필하게 되면서 참으로 많은 기록을 접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남편에 대한 존경심과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많이 느끼게 됐던 것 같다. 퇴임 후 끊임없이 가해지는 박해를 함께 헤쳐나가면서 동지애(同志愛)도 느끼게 됐던 것 같다. 책 한 권 달랑 드리면서 그이에게 여러 말을 한 걸 보면, 내가 가진 것이 책밖에 없어 여러 가지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해 선물해 드리고 싶었는가 보다.”
 
 
  전두환 생도와의 첫 만남
 
1958년 경기여고 졸업장을 들고 동기들과 함께한 이순자 여사. 사진=이순자 여사
  —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시는지.
 
  “첫 외출을 나왔지만 딱히 갈 곳도, 점심 사 먹을 돈도 없었던 육군사관학교 2학년 생도들이 물어물어 찾아온 곳이 참모장 댁이었다. 바깥에서 ‘참모장님 계십니까’라는 소리에 쪼르르 나가서 문을 열어드린 진해여중 2학년생 소녀와 사관생도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유난히 자세가 단정하고 화통한 것이 돋보였던 그이에게 당시 육사 참모장이셨던 아버지(이규동 전 육군본부 경리감)는 무척 끌리셨던 것 같다. 뒷마당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들 외엔 별 반찬이 없었는데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는 젊은이들에게 ‘자네들 형편에 어디 마땅히 갈 데가 있겠나. 주말엔 언제든 부담 갖지 말고 점심 먹으러 오게나’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고,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라며 전 생도는 몹시 기뻐했다. 그날 이후 주말이면 친구들과 함께 찾아오는 우리 집안의 반가운 손님이 되어주었다. 일요일날 오지 않으면 왜 안 오나 궁금증이 더해갔다.”
 
  — 자서전을 보면, 두 분 사이의 사랑이 ‘솜에 물 배듯’ 쌓여갔다며 시적(詩的)으로 표현하셨다. 전 대통령의 어떤 점이 끌리셨나.
 
  “휴전이 되자 육사가 피란지 진해에서 태릉으로 옮겨가고, 나 역시 서울 경기여중에 복교하면서 그분과의 낭만은 계속되지 못했다. 3년 전 치른 여중 입시 국가고시에서 고득점을 얻었던 내가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광주, 논산, 진해 등 많은 학교를 전전하는 사이에 엄청난 실력 격차가 생겨 이른 시간 내에 만회하지 않으면 고교 입학도 장담할 수 없는 형편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공부에 목숨 걸다시피 하고 있던 내가 언제부터 그이를 연인으로 느끼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건 그이가 서울로 옮겨온 후에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는 사실이고, 우리 형제에게는 여전히 아저씨 같은, 또 내겐 친척 오빠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역시 유별한 것이 남녀 사이였는지, 오랫동안 가족 같은 정을 나누면서 헤어지기 싫은 사이로 변해갔던 것 같다.”
 
 
  ‘나는 너를 남몰래 사랑해왔다’
 
진해 변두리에 위치한 이순자 여사의 경화동 집을 찾아왔을 당시의 전두환 생도. 사진=이순자 여사
  — 프러포즈는 누가 먼저 했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년쯤 지난 어느 날, 전방에서 외출 나온 그이가 나를 집 밖으로 불러냈다. 그러곤 ‘나는 너를 남몰래 사랑해왔다’면서 ‘내가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것을 프러포즈라 해도 될까(웃음).”
 
  — 혹시 이분이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거란 생각은 해보셨는지.
 
  “전두환 생도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은 편이라 늘 곁에는 친구가 많은 편이었다. 또한 구수한 입담으로 어렸을 적 고향에서 참외 서리하던 얘기, 황강가 모래밭에서 씨름하던 얘기를 들려줄 땐 정말 재미있었다. 자신이 어렸을 적, 물을 너무 많이 길어 키가 크지 못했다며 대구 변두리 달동네 생활을 얘기해줄 때는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다. 편찮으신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것이 안쓰러워 식구들이 사용할 물은 자신이 책임지고 아랫동네까지 내려가 길어다 드렸고, 젖은 나무 때는 어머니가 늘 눈물을 흘리신다며 뒷산에 가서 솔잎을 긁어다 놓고 숙제를 하거나 친구들과 공놀이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부모님께서도 전 생도가 엉덩이가 가볍고 싹싹해 보통 인물 됨됨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1958년 봄, 이화여대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 학교 교정에서 동기생들과 함께한 이순자 여사(오른쪽 두 번째). 사진=이순자 여사
  — 왜 의대를 지망하셨는지.
 
  “임관 후 힘든 군인의 길을 가기 시작한 그이를 떠올리자 젊은 장교의 생활고(生活苦)를 해결할 수 있는 전공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선택한 게 의과대학이었다. 막상 입학해 의학실습을 해보니 적성에도 잘 맞는 것 같았다.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의사가 된 친구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살고 있더라. 내가 그이와 헤어졌다면 나도 그중 한 명이 돼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이의 아내’라는 자리
 
1955년 9월 30일 전두환 생도의 육사졸업식에 참석한 이순자 여사의 어머니 이봉년 여사와 고모, 그리고 이순자 여사. 사진=이순자 여사
  — 전두환 중위와의 결혼을 위해 의대 2학년에 재학 중 자퇴했는데, 의사의 길을 걷지 못한 아쉬움은 없나.
 
  “물론 학업을 포기하고 자퇴하게 된 이유가 ‘결혼한 사람은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못 박아 놓은 이화여대의 잘못된 학칙 때문이었으므로 원망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활란(金活蘭) 총장님이 미혼이셔서 그랬나? (웃음) 결혼한 게 무슨 죄라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의사는 나 아닌 사람들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직업이지만, ‘그이의 아내’라는 자리는 나만이 해낼 수 있는 자리라고. 얼마 전 이화여대에서 학칙(學則)이 바뀌었다면서 재입학을 허가한다는 통지가 왔더라. 근데 80세 넘어 의과대학 가서 뭐 하나.”
 
  — 전두환 생도가 임관 직후, 두 분 사이에 이별의 위기가 있었다고 들었다.
 
  “육사를 졸업하기 전에는 자신들의 앞날에 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고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초급 장교가 임관 후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괴리가 큰 현실과 마주하게 되면서 절망감에 사로잡혀 나를 포기하기로 결심해버린 것이었다.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친자식처럼 대해준 여자친구 부모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자신을 사랑한 죄밖에 없는 어린 사람을 고생길로 끌어들여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는 거다.”
 
 
  全-李는 초등학교 선후배
 
1959년 1월 24일 대구 경북고 앞 제일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린 전두환·이순자 커플. 주례는 최영희 당시 2군사령관(국방부 장관 역임)이 섰다. 사진=이순자 여사
  — 전두환 대위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나.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전방부대로 사라졌다. 당시 그이의 결심이 얼마나 단호했던지 전방으로 수소문해 찾아가 설득도 해보고 울면서 읍소도 해보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난 결국 부모님께 SOS를 쳤고, 결혼식을 올려 더 이상 방황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간신히 마음을 돌려놓고 결혼식을 올리기 직전, 주말에 사랑하는 연인의 파경(破鏡)을 처절하게 그린 영화 〈지붕〉을 잘못 보는 바람에 또 한 차례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필이면 그런 영화를 골라 보다니…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우여곡절 끝에 1958년 1월 24일 대구 제일예식장에서 식을 올렸고, 학교를 자퇴한 21세짜리 신부가 탄생했다.”
 
  — 영부인께서 대단한 용기를 내신 것 같다.
 
  “사랑 하나만 믿고 한 남자에게 내 소중한 인생을 몽땅 걸었던 것이다. 물론 결혼 후 다른 학교로 전학해 공부를 계속한다는 전제하에 결정한 일이긴 하지만, 어렵게 공부해 들어간 학교를 자퇴한다는 건 당시 내겐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분과의 결혼을 택한 건,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불행을 기꺼이 택한, 그런 귀한 분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혼 후 그분이 내게 ‘당신의 살신성인적 용단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나도 없고 우리도 없다’며 행복한 결혼 생활의 공을 모두 내게 돌리곤 했지만, 나는 늘 그분과 나를 동여매 주고 있던 인연의 공도 컸다고 생각한다.”
 
  이순자 여사는 “경기여중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맞춰 입은 교복을 자랑하고 싶어 모교 희도초등학교를 찾아갔을 때 멋진 제복의 육사 생도를 우연히 보았는데, 그가 1년 후 우리 집을 찾아온 전두환 생도였고, 초등학교 선배였다니 참 대단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며 “진해여중에 전학하자마자 화동(花童)으로 뽑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께서 임석하신 육사 입교식에 참석하게 됐는데, 전두환 생도를 비롯해 200명의 4년제 육사 생도들이 배출되는 역사적인 장면도 직접 목격했다”고 했다.
 
 
  장인 위해 전 재산 내놓은 사위
 
이순자 여사의 친정아버지 이규동 장군과 모친 이봉년 여사. 육군 경리감을 지낸 이규동 장군(예비역 준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사2기 동기다. 사진=이순자 여사
  — 1959년 결혼하셨는데, 그 당시 육군 장교 월급으로 살림살이가 가능했나.
 
  “결혼 적령기의 대위 봉급이 겨우 쌀 한 말을 살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이상을 실현하기는커녕,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한 번은 어느 장교가 만삭이 된 부인과 자식들이 굶주리는 걸 보다 못해 부대 취사장에서 막 끓고 있던 밥과 콩나물국을 퍼서 철조망 사이로 식구들에게 건네주는 걸 본 적도 있다고 한다.”
 
  — 지금도 내 집 마련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지금 연희동 집은 어떻게 마련한 것인가.
 
  “우리 부부는 대구에서 결혼한 후 시댁에서 4개월 정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고, 또 서울로 이사 온 후 친정에서 10년 가까이 살면서 다른 초급 장교들에 비해 고생은 덜한 편이다. 하지만 아이 셋이 태어나도록 친정에 얹혀사는 것이 부모님께 죄송스러워 하루라도 빨리 독립하려고 미용학원도 다니고 편물을 배워 부업도 하고, 안 해본 일이 없다. 버는 족족 친정 부모님에게 맡겨 관리했는데, 친정아버지가 10년 후 분가할 때 보광동과 효창동에 그분과 내 명의로 각각 집 한 채를 마련해주셨다. 대지 50평에 건평 17평 정도의 작은 집이었지만, 후에 우리 가족의 ‘드림 하우스’라 할 수 있는 연희동 집 마련에 기틀이 됐다.”
 
  — 전두환 대통령과 장인의 사이는 어땠나.
 
  “친정아버지(이규동)는 경북 성주에서 성장해 그곳에서 어머니(이봉년)를 만나 슬하에 1남 6녀를 두셨다. 난 차녀였으나 맏딸 역할을 했다. 봉천군관학교를 4기로 졸업하시고 만주에서 육군경리관으로 일하시다 해방 후 육사 2기로 졸업했다. 1959년 육군본부 경리감을 끝으로 이듬해 성주에서 민의원으로 출마하기 위해 육군 준장으로 전역하셨다. 하지만 정치에 문외한인 아버지는 차점으로 낙선하셨고, 우리 가족은 참혹한 선거 후유증에 시달렸다.
 
  남편이 포트베닝에서 귀국한 날, 침통한 심정으로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그이는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우리 부부가 정성을 다해 모은 저금통장 한 개와 자신이 유학하는 동안 식비마저 아껴가며 모은 미화 500달러, 전 재산을 장인 앞에 내놓았다. 부모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정말 아까울 것이 없었다. 가회동 집에 살 때, 욕실을 공동으로 부모님과 사용했는데, 아버지는 사위의 출근 준비에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고 새벽 일찍 일어나 냉수마찰을 하시고 욕실을 손수 청소까지 해놓으셨다. 8년이나 계속되는 생활에서 사위와 단 한 번도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특수전 전문가
 
1960년 7월 미국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미 육군 보병학교 레인저 과정 시절의 전두환 대위. 최세창, 강기오, 차지철 대위가 동기생이다. 사진=이순자 여사
  — 전두환 대통령은 현역 시절, “군인은 국가가 요구하면 언제라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신분이다. 남편과 언제까지나 함께 살 수 있고, 또 출근한 남편이 퇴근해 다시 집에 돌아올 거라는 안이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
 
  “남편은 군인 중에서도 특수전 전문가였다. 최근 채널A에서 방영된 〈강철부대〉라는 예능 프로처럼, 특수전 전문가들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고 임무를 수행해내야 했던 만큼, 각오도 남달랐던 것 같다. 그러니 군인의 딸로 태어나 군인의 아내가 된 나한테까지 그런 다짐을 그토록 자주 들려준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에서 공수 교육과정을 마친 남편은 결혼 5개월 후 미국 캘리포니아 포트 브랙(Fort Bragg)으로 가 심리전 전술을 익힌 데 이어, 이듬해에는 조지아주 포트 베닝(Fort Benning)에서 레인저 과정(유격전문가)과 패스파인더 과정(군사유격특수전)을 익히면서 명실상부한 특수전 전문가가 되었다.”
 
1971년 11월, 제1공수특전단장으로 진급한 전두환 장군은 사랑과 솔선수범을 슬로건으로, 낙하훈련 때는 1호기를 타고 가 가장 먼저 점프를 했다. 사진=이순자 여사
  — 전두환 대통령은 현역 시절 공수훈련을 받기 전에 반드시 책상 위에 신분증과 지갑을 가지런히 두고 갔다고 자서전에 쓰셨다.
 
  “청소하면서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그이의 소지품을 대할 때면 남편의 훈련에 임하는 비장한 각오가 느껴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낙하 현장이 보이는 한강 다리로 달려가 안전하게 착지하는 남편의 모습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대한민국 특수부대 요원의 체력은 이북 특수부대 요원의 체력보다 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이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그랬던지 제1공수특전단장이 된 후 천리행군이라는 것을 시행했는데, 천리행군만 할 수 있으면 어떤 미션을 부여받아도 완수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신념 때문에 장군이 된 뒤에도 낙하 훈련을 계속했고, 옮겨가는 부대마다 구보도 실시했는데, 항상 부대원들과 함께 뛰었다. 낙오하지 않기 위해 따로 연습하기도 했다. 그이는 내게도 군사훈련 내용을 자세히 요도(要圖)를 그려가며 설명해주었는데, 그럴 때면 ‘이분이 나도 부하로 생각하는 것 아닌가’ 헷갈릴 정도였다.”
 
 
  “박종규씨가 박정희 의장에게 데리고 갔다더라”
 
강원도 사창리 소재의 21사단 66연대 1중대 소대장 시절의 전두환 대통령. 사진=이순자 여사
  — 5·16혁명이 발발했을 때, 육사 생도들의 지지행진을 이끌었는데, 애초부터 정치적 성향이 강한 분이 아니었나.
 
  “남편은 장인의 육사 동기생인 박정희(朴正熙)란 인물에 대해 이미 장인을 통해 들었을 것이다. 그날 육군본부를 찾아갔을 때, 미국 특수전학교 출신으로 경호실장을 역임한 박종규(朴鍾圭)씨를 만나 아이디어를 이야기했고, 박종규씨가 박정희 의장에게 데리고 갔다더라. 육사 축구부 주장 출신에다 후배들이 많이 따랐다.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면서 그이를 최고회의 의장의 민원비서관으로 임명했다. 그이는 사관학교에 들어가던 때 일생 군인으로 살다 군인으로 죽겠다고 다짐했고, 그때까지도 초심(初心)을 잃지 않고 있었기에 박 의장의 정치 입문 권유는 사실상 ‘지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으로 나서지 않았다. 국가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고 자기 인생 목표에 대한 설계가 뚜렷해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고등군사반(OAC) 교육을 이수하기 위해 광주(光州)로 내려가 가족과 문간방 생활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박 대통령, 막내아들 출산 소식에 격려금 보내줘”
 
박쥐25호 작전을 위해 헬기로 출동하는 장병을 지켜보는 전두환 백마부대 29연대장. 박쥐부대로 통칭된 9사단 29연대는 칸호아성 닌호아에 주둔하면서 적진을 기습하는 임무를 띤 부대였다. 사진=이순자 여사
  — 전두환 대령은 백마부대(9사단) 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당시 육사 출신 연대장 중에는 유일했다.
 
  “그이가 연대장으로 발령받고 인사드리러 가자, 박 대통령께서 본인의 사진에다 친필 사인을 해주셨다. 그러곤 이세호(李世鎬) 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통해 편지도 보내주셨는데, 그분이 답장을 올리면서 내가 막내아들(재만)을 출산했다는 소식을 전해 올리자 내게도 격려금과 함께 편지를 보내주셨다. 아랫사람을 참으로 정성스럽게 대하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1967년 8월 17일 1·21사태를 진압한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를 격려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 전두환 중령은 그해 국군의날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여받았고 11월 대령으로 진급했다. 사진=이순자 여사
  — 참, 신기하게도 전 대통령이 가는 곳마다 역사적 사건들이 따라다녔다.
 
  “1961년 5·16 때는 육사 생도들의 혁명지지 선언을 이끌어냈고, 1968년 1·21사태 때는 제30경비대대장으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자하문 근처에 나타났을 때 이들의 격퇴에 앞장섰다. 또 1사단장 시절에는 제3땅굴을 발견함으로써 북한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수도인 서울에서 겨우 44km 떨어진 지점에 남침용 땅굴을 파놓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게 됐다.”
 
 
  육개장 파티
 
1958년 8월 30일, 결혼 직전 주말 외출을 나온 전두환 중위와 데이트를 즐기는 이순자 여사. 이 여사는 교통비, 책값, 커피값을 절약해 광교 인근의 ‘런던’이란 양복점에서 결혼양복을 맞춰주었고, 전두환 중위는 푼푼히 모은 돈으로 손목시계를 준비했다. 사진=이순자 여사
  — 전두환 대통령이 부하들을 장악하는 비결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남편의 일에 대한 접근방식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남편은 타고난 건강 체질인 데다 부지런하고 철저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분 곁을 떠난 후에는 일 잘 배웠다는 소리를 듣고 윗분들로부터도 칭찬을 많이 받게 되지만, 항상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어야 했다. 내게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도 늘 관심과 애정을 표시해줌으로써 불만을 토로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는데, 그분은 부대원들에게도 늘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며 서로 동지애를 느끼도록 했다.”
 
  — 부하들에게 어떤 식으로 관심을 보여주셨나.
 
  “남편은 부대에 부임하면 ‘100일 작전’이라며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1사단장 시절, 중대장들 이름까지 모조리 다 외웠다. 천둥번개 치고 폭설이 내리는 날이면 감시초소에서 근무하는 중대장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며 격려했다. 절대로 1중대장, 2중대장 하지 않았다. 칠흑 같은 밤 강풍이 몰아치면 내게 연락해 ‘따뜻한 커피를 가져오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또 내가 사단에 들어가는 날이면 사단장 관사는 늘 육개장 파티장으로 변했고, 그분은 부하들과 무척 행복해했다. 풍성한 식탁은 아니어도 땀 뻘뻘 흘리며 맛있게 잡수시던 대대장님들, 참모님들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만큼 철저했기에 갑작스레 맡겨진 대통령직을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내조하시느라 많이 힘드셨겠다.
 
  “당시 우리 내외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많이 편찮으셨다. 또 돌봐줘야 할 아이들도 넷이나 되는 데다, 큰아들은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시점이라 집에서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엄청 바빴는데 남편 부하들까지 챙기려니 힘들긴 했다.”
 
 
  10·26 후 불면증 시달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의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는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0·26 사건으로 계엄사 합수본부장을 맡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수사했다. 사진=국가기록원
  — 1979년 3월 1사단장(육군 소장)을 하다 보안사령관으로 전격 발탁됐다. 당시 파격 인사에 대해 주변에서 무슨 이야기는 없었나.
 
  “보통 사단장 임기는 2년이다. 임기를 1년 남겨놓은 시점에서 소장 신분으로 중장 보직인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되자 모두 파격 인사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로부터 7개월 후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에 의해 시해당하시고, 또 10개월 후 남편이 대통령이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박 대통령이라 해도 자신이 1979년 3월에 임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자신의 사후 뒤처리를 맡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 1979년 10월 26일 저녁,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서빙고 분실의 무전 연락을 받고 들어간 이후 일주일이 넘도록 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불안하지 않았나.
 
  “새벽 4시쯤 손삼수(孫衫秀) 부관이 전화로 ‘라디오를 틀어보시라’고 해서 박 대통령의 ‘유고(有故)’를 알았다. 근혜, 근영, 지만군은 엄마에 이어 아버지까지 이런 일을 당하니 어쩌나 하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온 나라를 단번에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이 비상계엄령을 불러오고, 계엄령이 선포됨과 동시에 계엄공고 제5호에 의해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고, 보안사령관이 그 책임자로 임명됐다는 사실은 내게도 중압감을 안겨주었다. 남편은 여전히 집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나는 남편이 맡게 된 책무의 막중함에 질려 염려와 불안으로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다.”
 
 
  “시동생 집으로 옮겨”
 
전두환 준장이 1973년 제1공수 여단장 시절 부인 이순자씨와 함께 행사를 참관하고 있다. 전두환과 차지철은 공수부대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였다. 사진=국가기록원
  —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수사 책임자로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과 정승화(鄭昇和)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했다. 당대의 최고 군부 실력자들을 체포하는 것은 본인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이다. 당시 남편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목숨을 걸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시해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金桂元) 대통령 비서실장, 차지철(車智澈) 대통령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모두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권력자들로 소장 계급의 보안사령관이 수사하기엔 버거웠다. 게다가 18년간 나라를 통치하던 대통령이 시해된 마당에 대통령을 죽인 사람이 심복인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배후 세력에 대한 흉흉한 소식이 난무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설상가상 시해범 김재규가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돼 이미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시해 장소에서 불과 50m 거리에 대기시켜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됐으니 얼마나 고민이 컸겠나. 무시하자니 직무유기가 될 것이고, 소신껏 수사하자니 너무 위험하고…. 그런 상황에서 남편처럼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일 없이 수사 책임자로서의 소임을 완수해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 10·26 사건 발생 열흘 만에 귀가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가족들 모두 당분간 동생인 전경환(全敬煥)씨의 팔판동 집에 가서 지내라”고 했다는데, 김재규의 시해 사건과 관련해 전두환 장군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의 신변 위협까지 느꼈던 것 아닌가.
 
  “11월 8일에 김재규가 사전 계획과 모의가 있었다고 자백하면서 수사가 훨씬 더 복잡하고 심각한 상황으로 바뀌었다면서 우리 거주지를 옮겨야 한다는 건의도 무시할 수 없게 됐다고 했다. 김재규 중정부장의 손을 빌려 박 대통령을 제거한 배후 세력이 있다면, 이 사건 수사책임자인 자신 하나쯤 제거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일 것이라고 남편은 말했다. 시동생(전경환-편집자 주) 집이 총리공관 옆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휴교령이 내려져 당시 다니던 연세어학당에 안 가도 돼 이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외대 영어과 편입시험 도전
 
  — 박 대통령 시해 사건에 연루된 정승화 총장 연행은 수사를 위한 합법적 연행이었고, 이 과정에서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은 전두환 측이 아니라 정승화와 김재규를 따르는 세력이었다는 주장 아닌가.
 
  “그렇다. 대통령 한 사람의 편향된 역사관이 이런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돌이켜보면 일명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은 집권야욕을 가진 남편이 12·12로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집권 구상인 ‘시국수습방안’을 만들어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5·17계엄확대조치를 취하도록 한 후, 의도적으로 광주사태를 부추겨 결국 정권 찬탈에 성공했다는 조작된 시나리오를 법(法)의 이름을 빌려 ‘사실화’시킨 ‘역사 왜곡의 끝판왕’ 같은 것이었다. 남편은 생전에 ‘맨날 나보고 쿠데타를 했다고 하는데, 차라리 그때 쿠데타를 했었어야 했다’며 ‘만약 쿠데타를 했더라면 12·12 이후 광주사태가 났을 때 책임자가 누구인지, 뭐가 죄인지 딱 부러지게 했을 거다’라고 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 영부인께서는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났던 그해에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편입시험도 보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엄청난 격변의 시기에 평화롭게 공부를 하신 거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간의 존재 아닌가. 10년 가까이 모시고 살았던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커 생활에 여유가 생기게 되자 결혼으로 인해 중단된 공부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났던 것 같다. 남편이 보안사령관직을 맡아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자마자 나는 곧바로 연세어학당에 등록해 공부하려 했으니까. 연세어학당에 9월이 되어서야 간신히 등록에 성공해 공부를 시작하게 됐는데, 이번에는 한 달 만에 남편이 10·26사태의 수사책임자가 되면서 두 번째 공부의 꿈도 중단돼버렸다. 느닷없는 10·26 사건으로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나는 왜 이렇게 공부 운이 없나’ 싶어 거의 울기 직전의 심정이었다. 실의에 빠진 나를 구원해준 건 남편이었다. 아예 외국어대 영어학과에 편입시험을 쳐 원 없이 공부에 몰두해보라고 하더라.”
 
 
  전두환, “내년엔 부디 대학편입의 願을 푸시오”
 
남편인 전두환 제1공수특전단장의 지도로 사격을 하고 있는 이순자 여사. 전 장군은 이 여사에게 지휘관의 아내라면 소총 사격술 정도는 익혀야 한다고 했다. 사진=이순자 여사
  — 12·12사태 때, 신군부와 구군부가 충돌하는 와중에 여사께서 외대 편입을 준비했다는 것은 전두환 장군이 당시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었다면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 한국외국어대학 편입시험 날짜가 1980년 1월 15일이었는데, 12·12사태 당시 나는 한 달 후 치러질 편입시험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 당시 여사님 연세가 42세였는데, 늦깎이 학생으로 한국외국어대학 영어 전공으로 편입시험을 보았다가 불합격했다. 당시 심정은 어떠했나.
 
  “반드시 대학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집념이 컸던 만큼, 낙방 후의 좌절감은 생각보다 깊었던 것 같다. 열심히 도와주고 응원해준 가족들에게도 괜히 미안하고 겸연쩍은 심정이 돼 결국 몸살을 앓으며 누워버렸다. 아이들은 그런 내 모습이 우스웠던지 ‘엄마가 대학시험에 떨어져 병이 나셨네’라며 빙글거렸다. 그날 나는 아이들 앞이라는 것도 잊고 그만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당황한 아이들이 각자 방으로 몰려가고 난 후, 남편이 가만히 내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여보,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이번에는 아무래도 너무 무리였지 않소? 시간도 너무 촉박했고…. 당분간 푹 쉬고 다시 시작하시오. 나도 힘껏 도와줄 테니 내년엔 부디 대학 편입의 원(願)을 푸시오.’ 그이의 따뜻한 위로로 지쳐 있던 심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나는 마음이 급해져 다시 책가방을 들고 연세대어학당으로 달려갔다. 3월 중순의 일이었다.”
 
 
  전두환 화형식 현장 목격
 
  — 편입시험에 실패하신 후에도 연세어학당을 계속 다니셨는데, 당시 계속된 비상계엄령 상황에서 학내도 시끄러웠을 텐데….
 
  “10·26으로 선포된 비상계엄령은 지속되고 있었지만 대학의 휴교령은 해제됐다. 4월이 되자 대학가의 모습은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평화스럽게 진행되던 시위 농성이 격렬한 투쟁으로 변하면서, 학생들의 구호도 비상계엄 해제와 이원집정부제 반대 등 정치적 쟁점으로 진화했다.
 
  하굣길에 연세대 루스채플(대학교회)을 지나 학생회관 앞을 막 통과할 때였다. 학생회관 건물에 길게 바닥까지 ‘유신 괴수 전두환’이라는 선혈 같은 붉은 페인트로 쓴 거대한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날 나는 중앙도서관 앞 광장에서 죽어도 잊을 수 없는, 끔찍한 의식을 목격했다. 짚으로 만든 남편의 허수아비가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아들 또래의 젊은 시위대들에 의해 활활 불태워지고 있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책가방을 떨어뜨린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장승처럼 서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 그날 상황을 남편 전두환 보안사령관께 말씀드렸나.
 
  “그날 밤 남편은 늦은 시각에 귀가했다. 그이와 마주 앉은 후에도 내 머릿속은 온통 낮에 본 장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이도 이미 대학가의 시위와 그 시위에 등장하고 있는 자신의 이름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왜 하필 이럴 때 중정부장을 맡으셨는지, 전 도무지 모르겠어요’라고 남편의 어두운 얼굴빛을 보면서 나는 말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워낙 믿고 따르는 남편이라 바깥일에 관해선 의문을 제기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날 낮에 보고 들은 것들은 도저히 침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그날 남편의 대답은 차분하고 명료했다. ‘내 가능한 한 빨리 정보부가 제자리를 찾도록 한 후 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할 테니 너무 걱정 마시오.’”
 
 
  드라마의 역사왜곡
 
1978년 7월 제3땅굴을 발견한 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전두환 제1사단장. 왼쪽이 이세호 육군참모총장이다. 사진=이순자 여사
  — MBC 드라마 〈5공화국〉을 보면, 신군부가 최규하 대통령을 권총으로 위협해 권력을 찬탈한 것으로 나온다.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 5공화국 인사들이 ‘사실이 터무니없이 왜곡되었다’며 항의하자,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다큐멘터리가 아니다’라고 했다더라. 설마 오 기자님도 그 내용을 그대로 믿는 건 아닐 거라고 본다. MBC는 〈5공화국〉이라는 드라마를 2005년 4월 23일부터 9월 11일까지 장장 41회에 걸쳐 방영했는데, 허화평(許和平), 장세동(張世東), 정호용(鄭鎬溶) 등 5공화국 인사 12명이 드라마 방영으로 관련 당사자들의 명예가 크게 훼손됨은 물론 역사까지 크게 왜곡되었다고 엄중히 경고함과 동시에 반론 보도를 요구했다고 한다. 나도 그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데, 킬러가 지붕에서 각하 차를 저격하려고 하고, 권총으로 최 대통령을 위협하고….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들을 실제 상황인 양 그럴듯하게 묘사하는 바람에 내가 보기에도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더라. 아무튼 드라마 〈5공화국〉이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을 조명하는 데 커다란 해악을 끼쳤다.”(다음 호 ‘대통령 전두환’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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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fori    (2022-11-13) 찬성 : 2   반대 : 2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이야기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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