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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증언

한국 음악 여명기를 살찌운 羅運榮 1세기

악상 떠오르면 몽당연필로 적으신 아버지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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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나운영 탄생 100주년 기념 음악회 열려
⊙ 유치원 동요에서 교향곡까지… 작곡 범위가 상상을 초월
⊙ ‘先 토착화 後 현대화’로 서구 현대음악 들여와 민족음악 새롭게 수립
⊙ 총 10권에 이르는 《음악이론총서》 발간… ‘한국 화성’ 집필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1953년 5월, 불과 3분 만에 완성… LSD 함정 내 해군본부 교회에서 초연

羅運榮
1922년생. 중앙중학교, 도쿄 제국고등음악학교 졸업, 미국 포틀랜드대 명예인문학 박사 / 서울대·이화여대·덕성여대·세종대·연세대·목원대 교수, 연세대 음악대학 학장 역임 / 금관문화훈장(1993)
나운영 선생.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거목이 쓰러지자 음악계는 그를 ‘한국 음악의 여명기를 살찌운 작곡가’로 추모했다. 나운영(羅運榮·1922~1993년). 서구 현대음악을 누구보다 먼저 배웠으나 전통음악과 민요를 소중히 여긴 가장 한국적인 음악가였다.
 
  6·25 피란 시절 작곡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지금도 가장 사랑하는 찬송가다. 놀랍게도 1105곡의 찬송가를 만들었다. “‘내 손의 피가 마를 때까지’ 성가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교향곡 13곡을 포함해 협주곡, 관현악곡 등 20곡이나 작곡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소월(素月)의 시에 곡을 붙인 ‘접동새’를 비롯해 ‘가려나’ 등 다수의 가곡과 오페라 ‘에밀레종’, 동요 ‘금강산’ ‘구두 발자국’ 등을 작곡했다. ‘흥부 놀부’와 ‘쾌지나 칭칭’은 민요풍 동요의 첫 시도였다.
 
  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의 ‘금강산’은 너무나 익숙한 동요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 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전란을 거치며 폐허가 된 사회 전 영역에,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노래가 없었다면 누가 믿을까. 탄생 100주년을 맞아 거목을 재조명하며, 한국인이 그에게 갚아야 할 대금이 얼마일까 생각해보았다. 단언컨대 금전으로 갚기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음악이, 그가 작곡한 노래가 한국인의 영혼을 얼마나 살찌웠는지 상상할 수 없다.
 
  기자는 나운영 선생의 장녀 나효선(羅孝璇·74) 동덕여대 명예교수와 장남 나건(羅鍵·67) 나운영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난 8월 24일 서울 예술의전당 앞에서 만나, 아직도 높이 서 있는 나무의 연대기를 손차양을 하고 돌아보았다.
 
 
  “작곡가 나운영이지, 교수가 아니다!”
 
나운영 선생의 장녀 나효선 동덕여대 명예교수와 나건 나운영기념사업회 이사장.
  ― 옛 《조선일보》 기사를 읽으니 나운영 선생을 ‘한국 음악 여명기를 살찌운 작곡가’라고 표현하더군요.
 
  나효선 “그렇죠? 저는 교수로만 국한되는 게 싫었어요. 비록 42년 이상을 대학 강단에서 작곡과 음악 이론을 가르치셨지만…. 제 딸(미 위튼대 박소현 교수)도 펄쩍 뛰는 거예요. ‘작곡가 나운영이지, 교수가 아니다!’”
 
  ― 작곡 범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나건 “‘가려나’ ‘달밤’같이 우리에게 친숙한 가곡 작곡가, ‘금강산’ ‘구두 발자국’과 같은 동요 작곡가, 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와 같은 성(聖)가곡 작곡가로 알려져 있어요.
 
  넓은 범위에서 현대음악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전도사와 같은 역할을 한 작곡가이십니다.”
 
  거목의 작곡 리스트를 더듬어보면 교향곡 13곡, 협주곡 6곡, 관현악곡 1곡, 오페라 1곡, 실내악 및 피아노곡 14곡, 예술가곡 18곡, 서정가곡 27곡, 동요 200여 곡, 성가독창곡 15곡, 칸타타 4곡 및 한국찬송가 1105곡, 이 밖에 군가, 교가, 사가(社歌), 기념가 등 다수에 이른다.
 
  대표적인 대학 교가 중에는 건국대, 덕성여대, 중앙대, 한국항공대 교가 등이 있고 사가 중에는 교보문고, 포항제철, 효성중공업 사가 등이 있다. 너무 많아 모두 열거할 수 없다.
 
  ― 예술가곡과 서정가곡의 차이가 뭔가요.
 
  나건 “아무래도 예술성이 있다고 생각하셔서 만드신 곡이 예술가곡입니다. 좀 쉽고 편안한 곡을 서정가곡 범주에 넣으셨지요.”
 
  ― 나운영은 어떤 음악을 꿈꾸었을까요.
 
  나건 “아버지 음악 인생의 지론이 ‘선(先) 토착화 후(後) 현대화’예요. 결국은 서구 현대음악을 들여와 민족음악을 새롭게 수립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계셨는데, 그 계획을 하나하나 이루어나가셨어요. 무엇보다 1950년대에 ‘국민개창운동’을 열렬히 하셨었어요.”
 
 
  민족음악을 일깨워야겠다는 소신
 
  ― 개창(皆唱)운동요?
 
  나건 “‘다 함께 노래 부르기’ 운동요. 일제 강점기나 군사 정권 시절 때의 동원된 ‘국민가요’가 연상되지만 아버지가 하셨던 음악운동은 그런 의미가 아니셨죠.”
 
  나효선 “일제 치하와 전란(戰亂)을 거치며 피폐해진 우리 국민에게 밝고 건전한 노래를 부르게 하고 싶어 하셨어요. 그런 활동은 순수 작곡과 별개의 활동이었기에 소개가 잘 안 됐어요. 계몽적인 요소가 강하다고 할 수 있어요.”
 
  대표적인 곡으로 ‘건국의 노래’(작사 김태오·1946), ‘통일행진곡’(김광섭·1952), ‘상이병사의 노래’(채미석·1952), ‘건설의 새 일꾼’(이은상·1958), ‘전우’(박목월·1973) 등이 있다.
 

  ― 말씀을 들어보니 동족상잔의 비극에 한국인의 마음이 어두울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나건 “일제가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일본식 유행가를 퍼뜨렸는데, 이에 물들어 우리 민족정신이 몰락하는 것을 걱정하셨어요. 전란 이후 부서진 건물만큼이나 쇠락해진 민족정신을 밝고 힘찬 국민가요, 또는 신(新)민요로 회복해나가기를 원했던 겁니다.”
 
  나운영은 6·25 직후인 1954년 ‘국민개창운동추진회’(회장 배민수)를 발족해 건전한 국민가요를 전국적으로 공모하여 제정하였다. 제1회 공모 당선작으로 ‘추석의 노래’(명제익)를 비롯해 ‘젊은이의 노래’(김광수), ‘나라 위해 이 내 몸 바치리’(김광섭), ‘고개를 넘어가자’(이은상), ‘건설의 새 일군’(이은상), ‘나라 사랑’(최현배), ‘추구월풍년’(고희준) 등이 있다.
 
  이 활동은 대략 1960년까지 지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이한 것은 우리 고유의 장단을 사용한 신민요 보급에 애썼다는 점이다.
 
  나건 “민요풍의 동요나 가곡을 그때 많이 쓰셨어요. 요즘에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돼 있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으로 비쳤죠. 물론 아버지의 전 생애를 펼쳐놓으면 (서구 음악의) 토착화에 기반을 둔 다소 난해한 현대적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말이죠. 의외로 너무도 대중적이고 친근한, 우리 민족적 색채가 강하게 깃들어 있는 곡이 상당수 있는 것은 음악 대중화 운동을 통해 민족음악을 일깨워야겠다는 소신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洋樂 이론의 한국적 섭취
 
  예컨대 나운영은 1958년 발간한 《화성학》 머리말에 자신의 음악 지론을 드러냈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민족음악 수립은 양악(洋樂) 이론의 한국적 섭취와 국악에 있어서의 민족적 요소의 발견, 그리고 음악 대중화 운동 전개에 있다.’
 
  나건 이사장은 “사람들이 처음엔 민요나 국악풍의 노래를 낯설어했다”고 말했다.
 
  나효선 교수가 풀어서 다시 설명했다.
 
  “지금껏 듣지 못했던 곡이니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이죠. 노래에 우리 창(唱), 타령이 나오고…. 예를 들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하는 판소리 비슷한 노래가 나오니까, 사람들이 ‘뭐 이런 걸 하느냐’는 식으로 노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객석을 떠났어요.”
 
  나건 “지금은 그런 걸 안 하면 이상하다고 여길 정도로 바뀌었죠. 하하하.”
 
  나효선 “아버지는 또 합창을 강조하셨어요. 작곡 발표회 때 청중과 다 함께 노래를 불렀어요.”
 
 
 
‘내가 목발을 짚고서라도…’

 
  ― 그러니까 공연 시작 전 악보를 다 나눠주고요?
 
  나효선 “그렇죠. 다 같이 불렀습니다. 팬데믹 상황을 감안하면 꿈같은 일일지 모르겠어요. 과거 아버지가 작곡한 노래 중엔 요즘엔 안 쓰는 ‘동무’나 ‘인민’이라는 단어도 나옵니다.”
 
  나건 “아버지가 만드신 곡들을 정리하면서 ‘이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진 나라인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 작품 ‘상이병사의 노래’를 들어보면 ‘내가 목발을 짚고서라도 백두산까지 가겠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나효선 “여자 애들이 고무줄 할 때 부르던 노래 아세요?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 그 시절에 이 노래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나건 “‘압박과 설움’, 그 노래가 어디서 쓰였냐 하면, 데모할 때도 불렀어요. 민중가요로….”
 
  김광섭 작사, 나운영 작곡의 ‘통일행진곡’(1951)은 이렇게 시작한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 공산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공산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자유의 인민들 피를 흘린다// 동포여 일어나라 나라를 위해/ 손잡고 백두산에 태극기 날리자.〉
 
  나운영은 양악 이론의 한국적 섭취를 위해 서양 음악 이론을 정리해 총 10권에 이르는 《음악이론총서》를 발간했다. 특히 제10권에서는 ‘한국 화성’을 집필했다.
 
  나건 “우리나라 음악가 중에 음악이론서 10권을 쓴 이는 없습니다. 더 의미가 있는 것은 마지막 10권에 ‘한국 화성’을 집필하셨어요. 대위법이니 작곡법이니 하는 서양 이론을 우리 음악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자신의 이론을 세우셨던 겁니다.”
 
 
  제주도 민요를 채집하다
 
1966년 12월 6일 국립국장에서 나운영 선생이 자신이 작곡한 제6번 교향곡 ‘탐라’를 지휘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제주도 민요 녹음 수집 여행을 갔을 때의 인상을 그린 것으로서 음악기행문에 해당되는 곡이다.
  나효선 교수의 말이다.
 
  “아버지는 1954년 덕성여대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악과를 창설하셨어요. 1959년에 《민속악보 제1집》을 발행하셨으며….”
 
  나건 이사장이 말을 받았다.
 
  “1955년 기독교방송에서 12차에 걸친 국악감상 해설을 하셨어요. 그 해설서가 아직 남아 있는데 지금 국악 하는 분들이 보시고 깜짝 놀랍니다. 지금껏 우상으로 여기는 분들이 나와 연주를 하니까요. 아버지는 곡 해설을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죠. ‘자, 들어보시겠습니다.’
 
  진짜 고수들, 장인들이 직접 연주를 했는데 불행히도 녹음테이프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해설 원고만 남아 있어요.”
 
  나운영은 1966년부터 70년까지 3차에 걸쳐 제주도 민요 400곡 이상을 수집한 일도 있다. 나 이사장의 말이다.
 
  “당시 제주도 민요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게 아니에요. 있었는데 1960년대 국문학 쪽에서 구비문학 차원에서 연구한 거예요.”
 
  ― 어떻게 제주 민요를 채록하신 겁니까.
 
  “일본인 연구자들이 제주도 민요를 들려달라고 하는데 없었던 거죠. 그래서 시작하신 겁니다. 한편으론 일본 사람들이 자기화하려는 시도가 있었기에 ‘큰일 났다’ 싶어 채집하러 다니셨죠.”
 
  이렇게 해서 제주도에서 채집한 민요가 400곡 이상이었다고 한다. 소위 창, 민요는 거의 없고 대개 노동요였다. 악기 반주도 없이 여럿이 함께 순전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특색이었는데 곡이 처량하고 애처로웠다. 제주의 슬픈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
 
  나운영 후손들은 선친의 모든 음악 자료를 작년 11월 아르코예술기록원(서울 예술의전당 소재)에 기증했다. 각종 자필 원보(原譜)는 물론, 한국 근대음악 희귀 도서 및 악보, 한국 음악가 자필 이력서 및 제주도 민요 채집 자료 등이 총망라돼 있다.
 
父子 나원정과 나운영
  숨어 ‘제례악’ ‘영산회상’을 듣다

 
  - 나운영 음악을 정의하면?
 
  나건 “민족음악을 위해선 우선 전통음악은 전통음악대로 유지, 보존해야 하는 거고, 국악이나 민속음악에 대한 요소를 진짜 현대화된 곡으로 새롭게 창작해야겠다는 소신을 가졌다. 아버지는 분명 전통음악을 하신 분이 아니시다. 서양 음악을 하신 분이다.”
 
  나효선 “무엇보다 조부께서 궁중악을 하셨다.”
 
  나운영의 아버지 나원정(羅元鼎·1888~1929년)은 일본 도쿄 제국대학 농과를 졸업한 생물학자로서 세브란스의전 강사를 역임했다. 경신(儆新)학교 학감,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1891~1955년)가 교장으로 있던 중앙학교의 교무주임으로 재직했다.
 
  나운영 후손에 따르면, 나원정은 ‘아마추어 국악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국악에 조예가 깊었다. 거문고, 아쟁, 가야금, 양금, 대금, 퉁소, 단소 등 많은 국악기를 사랑방에 모아놓았고 한 달에 두어 번씩 친구들을 불러 함께 연주를 하곤 하였다.
 
  재미 삼아 연주하는 민요가 아니라 ‘제례악(祭禮樂)’이나 ‘영산회상(靈山會上)’과 같이 수준 높은 곡을 연주했다. 나 이사장의 말이다.
 
  “어린 시절 나운영이 사랑방에 몰래 숨어 들어가 연주를 듣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을 부르셨다고 한다. 무슨 일일까 걱정하다가 사랑방에 들어가 꿇어앉아 있었더니 할아버지께서 나무상자를 꺼내놓으셨다. 그 나무상자가 바로 양금(洋琴)이었는데, 아버지는 이때부터 양금 교습을 받았다. 훗날 ‘영산회상’을 연주할 정도의 실력을 쌓으셨다고 한다.”
 
 
나운영이 남긴 5t 트럭 두 대분

 
《조선일보》 1991년 1월 23일 자 17면에 나운영이 제1회 애서가상을 수상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 어마어마하네요.
 
  나건 “5t 트럭 2대분이 나갔으니까요. 9월쯤 (아르코에서) 공개한다고 하던데 아직 정리가 안 된 것 같아요.”
 
  ― 나운영 선생께서 생전 ‘운경음악도서관’을 열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나건 “하셨었죠. 하셨다가 책이 분실되고 찢어지고…. (책을) 찢어 가니까 놀라셔서 닫아버리셨어요.”
 
  나효선 “메모를 참 열심히 하시는 분이셨거든요. 아버지는 책을 너무 아끼셔서 책에다 줄을 치거나 하지 않으시고 다 원고지를 잘라 메모하시고 책에 끼워 보관하셨어요. 무척 깔끔하셨죠.”
 
  나건 “우리나라 양악 100년사 자료를 모으셨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근대 음악가들의 자필 이력서를 직접 받으셨어요. 얼마나 꼼꼼하셨던지 연락이 안 오면 편지를 보내고, 또 보내고…. 기존 자료와 일일이 대조하시며 확인 작업을 거치신 것이죠. 그 당시 연주자들의 프로그램(팸플릿)과 사진이 ‘이만큼’ 있었어요. 엄청난 근대음악 자료예요.”
 
  나효선 “근대음악 자료나 책, 악보 등은 정말 구하기 아주 힘든 것들이에요. 축음기나 SP판 같은…, 국내 한 장밖에 없는 음반들이 여러 장이 있었죠. 한 장에 몇백만원씩 하는 것을 다 기증했어요.”
 
  ― 잘사셨던 모양이에요.
 
  나건 “아뇨. 정말 검소하셨는데 책하고 레코드 수집에는 돈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나효선 “아버지가 택시를 안 타셨어요. 택시값이면 책을 살 수 있다고 하셨어요. 늘 걸어 다니시면서 정말 신들린 사람처럼 사셨어요. 제1회 애서가상(愛書家賞) 수상자십니다.”
 
  《조선일보》 1991년 1월 23일 자 17면에 나운영이 제1회 애서가상을 수상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기사에는 ‘음악 관련 도서 6만~7만 권과 음반 3만 장을 소장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곡 만들면 初演은 아내 유경손 여사가
 
나운영은 1948년부터 1980년까지 32년간 서울성남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며 성가곡(찬송가) 1105곡을 작곡했다.
  ― 그 많은 것을 다 기증했군요.
 
  나건 “저도 뭐가 돈이 되는지 아는데 욕심이 생길까 봐 싹 다~. 지금 남아 있는 게 일본 책입니다. 그것은 ‘아르코’에서 안 가져가더군요. 종이 책을 원하지 않는 시대인가 봅니다.
 
  악보도 원하지 않아요. 할 수 없이 제가 아카이브 작업을 다 해놨습니다. 당신이 남기신 책과 악보를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볼 수 있게 해놨어요. 그걸 보고 후학들이 논문 쓰는 데 참고하고 있어요.”
 
  인터넷사이트 ‘나운영의 생애와 작품’(http://www.launyung.co.kr), ‘운경의 발자취’(http://www.unkyung.co.kr/)에서 나운영의 모든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 찬송가 1105곡을 만드신 것도 놀랍지만 더 있을 것 같은데요.
 
  나운영은 1948년부터 80년까지 32년간 서울성남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며 성가곡(찬송가)을 꾸준히 작곡해왔다. 성가 독창곡은 거의 대부분 아내 유경손(柳慶孫·1921~2011년) 여사의 초연(初演)으로 발표되었다.
 
  나건 “더 있습니다만, 외부에 발표하셨을 때 공식화하신 게 1105곡입니다. 소천(召天)하시기 전 마지막 신작 찬송가 봉헌예배 때 1105곡으로 끝내셨기에 그렇게 정리했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初演 논란 종지부
 
  나운영의 대표적인 성가곡(찬송가) 중에 ‘주께 드리네’ ‘아흔아홉 양’은 6·25사변 전에 작곡한 곡이다. 또 부산 피란 시절에 ‘피난처 있으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등을 만들었다.
 
  특히 시편 23편에 곡을 붙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1953년 5월, 불과 3분 만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에서는 이 성가를 ‘야훼는 나의 목자’로 고쳐 부르고 있다. 지금도 교회에서든 성당에서든 울려 퍼지고 있다. 1절만 소개하면 이렇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나건 이사장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와 관련한 중요한 증언을 말했다.
 
  “아버지는 그 성가를 6·25 피란 시절 해군본부 교회에서 초연하셨다고 밝히신 적이 있으세요.
 
  어머니는 LSD 함정에서 초연했다고 하셨고요. 김진홍(金鎭洪) 목사님은 이승만(李承晩·1875~1965년) 대통령 앞에서 초연했다고 하셨죠. 이렇게 3가지 초연설이 있어 무엇이 정설인지 몰랐는데 며칠 전 알게 됐어요.”
 
  “어떻게 알았어?”라며 놀라서 나 교수가 재촉했다. 나 이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미 해군 LSD 함정 안에 해군본부 교회가 있었던 거예요. 믿기나요? 아버지가 호주 동포잡지 《크리스찬 리뷰》(1993년 2월호)와 한 인터뷰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다 맞는 것이지요.”
 
  나운영은 곡을 계속 고치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이 곡 ‘여호와는…’만큼은 단번에 써 내려갔다고 한다. “그야말로 영감의 소산”인 셈이다.
 
 
  모로이 사부로, 손기정, 홍난파
 
젊은 시절, 작곡을 하고 있는 나운영 선생. 그는 ‘선(先) 토착화 후(後) 현대화’를 통해 민족음악을 새롭게 수립하겠다는 꿈을 가졌다.
  1940년(19세) 4월 1일 나운영은 일본으로 건너가 처음에는 도쿄 제국고등음악학교 예과(예비과정)에 응시했는데 수석으로 합격하자 예과를 거치지 말고 직접 본과로 가라고 해서 본과 시험을 다시 보았다고 한다.
 
  본과에 입학해 작곡과에서 파리음악원 출신의 히라오 기시오(平尾貴四男·1907~1953년) 선생, 당시 일본 최고의 작곡가인 모로이 사부로(諸井三郞·1903~1977년) 선생에게 작곡학을 사사하였다.
 
  ― 나운영의 ‘선 토착화 후 현대화’에 영향을 준 이가 있을까요.
 
  나건 “1942년 10월 제국고등음악학교 연구과(요즘으로 치면 대학원) 작곡가에 입학하셨는데, 스승인 모로이 선생이 ‘어째서 서양음악을 모방하려고만 드느냐? 너희의 음악, 너희 나라의 민족음악을 만들어내라’는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세계성을 띤 한국적 현대음악을 창조해야겠다고 결심을 하셨어요.”
 
  즉 민족성과 시대성을 떠난 음악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국악, 특히 우리의 전통 궁중음악에 큰 관심을 가졌다. 한편으론 서양 현대음악을 힘써 듣기 시작하여 무소르그스키, 드뷔시, 팔랴, 버르토크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서양음악을 배우러 갔다가 우리 음악에 눈을 떴네요.
 
  나건 “아버지가 마라토너 손기정(孫基禎·1912~2002년)에게 굉장히 충격을 받으셨다고 해요. ‘나도 그처럼 우리 민족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셨다고 들었어요.
 
  또 홍난파(洪蘭坡·1897~1941년)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어요. 193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작곡 부문’이 들어 있었는데 그때 당신의 가곡 ‘가려나’로 당선되셨습니다. 심사를 홍난파 선생이 하셨어요. 아버지에게 ‘비록 나라는 없으나 작곡을 전공해서 민족의 이름을 빛내 달라’고 말씀해주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동기가 돼 작곡의 길을 걸으셨다고 하셨죠.”
 
일본 音階 사용을 경계한 나운영
 
  나운영은 일본 고유 음계, 즉 미야코부시(都節) 음계를 경계했다. 이 음계가 트로트(혹은 뽕짝)에 많이 쓰인다.
 
  일본의 미야코부시는 한국의 평조(솔라도레미솔)를 단조화(短調化)해 둘째 음(라)과 다섯째 음(미)을 반음 내린 형태다. 미파라시도의 5음이 가장 많이 사용된다.
 
  한국의 음계와는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일본 고유의 민족 음계다. 이 음계를 사용하면 어느 나라 사람이 작곡하더라도 모두 일본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우리 민요 ‘늴리리야’와 일본 민요 ‘사쿠라’를 비교해보면 된다.
 
  즉 ‘늴리리야’(라라라솔, 라도라솔, 미미미미레도, 레미레도라솔…)에 있어서 라와 미를 반음 내리면 미야코부시가 되어버린다. (파파파미, 파라파미, 도도도도시라, 시도시라파미…)
 
  나운영은 일본 전통악기를 연상케하는 미야코부시와 반박자 쉬고 나오는 리듬과 멜로디 같은 일본 유행가의 전형적인 창법에서 벗어나 한국적 민요풍의 건전하고 명랑한 대중가요가 많이 불리길 바랐다.
 
  아버지 나운영, 어머니 유경손의 만남
 
나운영 선생의 서재 모습이다. 한국 양악(洋樂) 100년사를 쓰기 위해 수많은 자료를 모았다. 책이 6만~7만 권에 달했고 제1회 애서가상을 수상했다.
  나건 “아버지는 약주를 좋아하셨는데 ‘클레멘타인’을 곧 잘 부르셨어요. 또 ‘한오백년’을 구성지게 부르셨어요.”
 
  나효선 “집에 녹음 시설이 없었는데, 당신이 작곡하신 곡을 직접 듣고 싶어 하셨어요. 집이 두 채였는데 한 채는 집 내부를 헐어서 기둥만 남겨두고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연습할 수 있게 하셨어요.
 
  대신 저희는 음악 공부를 제대로 못 했어요. 종일 음악을 듣고 자랐지만 배고픈 시절이어서 굶지 않고, 등록금 제때 내면 된다고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당신들이 음악에 너무 전념하셔서… 저희는 옆에서 잘 그냥 잘 자랐어요. 하하하.
 
  어머니(유경손)는 우리나라 유아음악을 개척하신 분이세요. 어머니가 작곡한 동요, 유치원 노래가 135곡이나 돼요.(《나운영 유경손 동요 135곡집》이 있다.)
 
  어머니가 직접 유치원을 개원하신 일도 있는데, 막내(나건)를 유치원에 보내려고 여러 유치원을 둘러보셨는데, 피아노 조율이 엉망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들이 ‘귀를 버릴까 봐’ 직접 운경유치원을 만드신 겁니다. 나운영의 ‘운’, 유경손의 ‘경’을 따서.”
 
  나효선 교수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1943년 일본 고등음악학교 본과 성악과를 졸업하셨죠. 1등으로 졸업하셔서 학교 대표로 노래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당시 반주를 임원식(林元植·1919~2002년) 선생이 하셨다고 합니다. 중앙대, 숭의여전, 숙명여대 등지에서 강사로 가르치셨고 서울YWCA 회장, 한국기독교유아교육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신 활발한 사회 사업가셨기도 하셨어요.”
 
나운영 선생과 유경손 여사는 1945년 6월 4일 명동성당에서 결혼했다.
  ― 부모님 두 분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셨겠네요.
 
  나건 “그렇지요. 아버지가 작곡하시면 초연자가 어머니셨어요. 어머니가 노래를 잘하셨기 때문에 결혼하신 거예요. 당신 노래를 잘 불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유경손은 도쿄 신주쿠에 있는 한국인 교회에서 알토 독창자로 활약할 즈음, 나운영과 처음 만났다. 1943년 둘 다 귀국한 후 유경손이 신인음악회에 출연했는데 연주 후 나운영이 무대 뒤로 찾아와 “잘했다”고 칭찬하며 “앞으로 자기 곡도 많이 불러달라”고 부탁을 했단다. 나 교수의 말이다.
 
  “어머니가 음정이 정확하시고 표현력이 좋으셨어요. 평생 내 노래를 불러줄 수 있겠다고 싶어서 결혼하신 거지요.”
 
  나 이사장의 말이다.
 
  “이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우리 한 집에서 형제처럼 일생 동안 음악 공부 하면서 살면 어때요? 남들이 이상하게 보니까 결혼이란 형식은 밟고…’라면서 프러포즈를 하고, 이를 흔쾌히 승낙하셨다고 해요.”
 
  두 사람의 결혼식은 1945년 6월 4일 명동성당에서 이뤄졌다.
 
 
  “맨날 100세까지 사신다고 하셨는데…”
 
  ― 나운영 선생은 평소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셨나요.
 
  나효선 “건강하셨고, 맨날 100세까지 사신다고 하셨어요. 너무 일찍 돌아가셨죠. 기가 막혀….”
 
  나건 “심장마비로…. 예고 없이 어느 날 아침에. 잔병은 전혀 없으셔서 건강이 점점 나빠지신지 모르셨던 거죠. 항상 걸어 다니시고….”
 
  나효선 “하루 한두 시간 걸으시는데 막 날아다니셨어요. 악상을 생각하시고 막 메모하시고….”
 
  ― 걸으면서 악상을 떠올리셨군요.
 
  나효선·나건 “조그마한 몽당연필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며 ‘도레미파솔’을 숫자 ‘12345’로 적으시는 거예요. 잊어버리실까 봐.
 
  작곡을 하시면 맨날 수정을 하세요. 고치시고 또 고치시고…. ‘어떤 게 제일 좋을까? 이게 맞을까 저게 맞을까?’ 아버지는 작곡집 출판을 앞두고 교정하시면서, 오탈자만 고치셔야 하는데, 또 수정을 하세요. 그렇게 되니 앞하고 뒤하고 또 달라지는 거예요.
 
  당신이 남기신 많은 작품을 정사(正寫)해 출판하면서 최종 작품을 결정하는 과정이 엄청나게 힘들었어요. 그럴 때마다 이렇게 기도했어요. ‘아버지! 어떤 게 맞아요?’라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유경손 여사는 1983년 정부로부터 교육유공자에게 수여하는 국민포장을 받았다.
  지난 8월 3일 〈나운영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가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렸다. 선생이 남긴 현악 4중주 제1번 ‘로맨틱’을 비롯해 피아노 트리오 제1번, 첼로 소나타 제1번 ‘클래식’, 그리고 예술가곡 ‘강 건너간 노래’(이육사 시), ‘초혼’(김소월 시) 등이 연주되었다. 많은 음악인이 관심을 가졌다.
 
  무엇보다 피아니스트 김연경과 나운영의 외손인 바이올리니스트 박소현이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산조’를 연주해 갈채를 받았다.
 
  이 음악회는 몇 년 전부터 준비를 했는데, 도중 큰 벽에 부딪혔다고 한다. 예술의전당을 빌리고 싶었으나 대관(貸館)을 할 수 없었다. 나 이사장의 말이다.
 
  “베토벤, 멘델스존 같은 서양음악가의 탄생 300주년, 400주년은 챙기는데 아버지 탄생 100년을 위해선 대관이 안 된다는 겁니다. 겨우 빌린 것이 한여름 무더위 때예요. 2년 전부터 신청을 했는데…. 잊힌 작곡가라서 그런지, 한국 작곡가라서 그런지….”
 
  ― 듣고 보니 화가 나네요. 서양음악가에겐 문턱을 낮추면서….
 
  “작고하신 국내 음악가들이 많은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가 없었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그나마 윤이상(尹伊桑·1917~1995년)과 나운영 정도인데 윤이상은 재단이 든든하게 있잖아요. 엄청난 재단이죠. 저희는 그렇지 않아요.”
 
  이번에는 나 교수의 말이다.
 
  “아버지의 제자 중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신 두 분이 스승님을 기리는 헌정 작품을 발표한다고 써내서 겨우 연주회를 하게 됐어요. 그렇지만 그것도 참 의미는 있었어요. 이 음악회로 인해 새로운 작품이 나왔으니까요.”
 
  나운영의 1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자 나인용(羅仁容·연세대 명예교수)이 지난 6월에 작곡하여 헌정한 곡이 ‘달밤 주제에 의한 로망스(Moon night Romance for piano)’다. 나운영의 예술가곡 ‘달밤’을 주제로 피아노 독주곡으로 작곡한 곡이다.
 
  나 교수의 계속된 말이다. “다행히 음악회에 왔던 분들이 ‘많은 것을 배웠고, 듣고 깨닫는 감동의 연주들이었고 우리나라 음악 역사를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또 ‘그 시절에 선구자적인 현대곡을 쓰셨다는 것이 놀라웠다’고 해주어 기뻤습니다.
 
  연주를 들으면서 내내 클래식의 불모지인 시대에 어쩌면 이런 선구자가 계셨을까 감탄하면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는 말을 실감하는 시간이었죠.”
 

  인터뷰 / 나운영의 외손녀 박소현 교수
 
  “내 민족의 소리, 나의 소리를 연주할 때…”
 
나운영 선생의 외손인 박소현 교수.
  나효선 교수의 딸이자 나운영의 외손인 바이올리니스트 박소현(朴素玄)은 지난 8월 3일 ‘나운영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나운영 곡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산조’를 연주해 눈길을 끌었다. 현재 미국 위튼 칼리지(Wheaton College) 음악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기자는 박 교수와 소셜미디어로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미(渡美), 피바디 음대의 예비학교를 거쳐 클리블랜드 음대에서 학사와 석·박사를 모두 마쳤다. 멤피스대에서 14년, 위스콘신-메디슨대에서 6년간 전임 교수로 재직했다.
 
  ― 기억 속 할아버지는 어떤 분인가요.
 
  “늘 서재에서 조용히 글 쓰시고 악보 그리시던 외할아버지의 한결같은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릴 적 날마다 듣던, 열성으로 피아노를 가르치시던 어머니의 음성이 지금도 저를 크게 자극해요.
 
  제가 음악 이론에 관심이 많은 것도 외할아버지와 어머니 영향일 겁니다.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란히 놓인 검은색 수성사인펜, 그릇에 소복이 쌓인 땅콩, 녹색 후레시민트 껌이 떠오르고, 외국 여행 다녀오실 때마다 커다란 트렁크에 책과 음반밖에 없어 어린 마음에 실망했던 기억도 납니다.”
 
  ― 할아버지 나운영의 곡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17년 독주회 프로그램을 고민하다가 문득 ‘아, 이제는 외할아버지의 곡을 배워볼 때가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1955년에 작곡하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산조’를 연주하기로 했지만, 막상 연습을 시작하니 제가 외할아버지 곡 스타일을 전혀 모른다는 현실을 직면하고 어쩔 줄 몰랐습니다. 스타일은커녕 산조가 어떤 음악인지도 모르니, 아무 확신 없이 연주한 것이 정말 죄송했습니다.
 
  되돌아보면, 나운영 산조가 가진 민속장단으로 짜인 흐름, 한국 음악의 진지한 정서를 담은 느린 템포, 가야금과 대금 산조의 시김새와 가락을 되새기는 멜로디 등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때까지 서양음악만 공부한 제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제 바이올린에서 국악적인 소리가…”
 
  박소현 교수는 위스콘신주립대의 지원으로 2019년부터 4차례에 걸쳐 방학기간 국내 체류하며 다양한 전통음악을 배웠다. 또 2021년부터는 위튼대와 외부 동양학 기관의 지원을 받아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김일구류 아쟁 산조’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게 된 계기는 하늘의 뜻이었다고 믿습니다. ‘김일구류 아쟁 산조’를 통해 우리 음악의 진지한 정서, 꾸밈없는 호소력, 또 서양음악에서 찾을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을 발휘하는 리듬놀이에 매료되었죠.
 
  전통 산조의 언어를 서양 악기로 제대로 구사한 예는 없다고 들었지만, 꼭 바이올린으로 몸소 경험해보겠노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지만 배우는 과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어려웠죠. 아무리 들어도 제 귀에 들리는 것이 무슨 음인지, 어떤 리듬인지조차도 알 수 없었고, 40년이 넘도록 서양음악을 통해 제 머릿속에 자리 잡았던 모든 체계가 무너졌습니다.
 
  이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외국어를 배우면서 전혀 알아듣지도, 따라 하지도 못하는 현상과 똑같았습니다. 원리를 분석해 터득하려는 습관과 방식을 다 버리고 그저 수백 번 반복해 듣고 소리를 모방하며 아주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어요.
 
  방학 때는 한국에 가서 배웠고 학기 중에는 국악 선생님들께 영상통화로 지도받으며 1년쯤 지나고 나니, 그간 서양음악 소리만 내온 제 바이올린에서 국악적인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죠. 어렵게만 느껴지던 복잡한 리듬꼴이 자유로운 말소리같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전통 산조 공부를 시작한 지 만 3년이 되었다. 전주에 내려가 국가 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인 김일구(金一球·83) 선생에게 여러 차례 지도도 받았다. “어느 거장과 비교할 수 없는 선생님의 집념을 가슴 깊이 새겼다”고 한다.
 
  “아쟁 산조를 공부하면서 우리 음악의 언어를 알아듣게 되었고, 이는 할아버지의 산조를 연주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스타일에 대한 이해와 확신을 주었습니다.
 
  수십 년 전 들었던, ‘민속음악을 들을 때에 무릎 장단을 칠 줄 알아야 하고, 장단을 치면서 들어야 한다’는 말이 뭔지 이제는 깨달았습니다.”
 
 
  두 만남, 김일구와 로버트 프로바인
 
메릴랜드대 로버트 프로바인 명예교수와 박소현 교수.
  박 교수는 “우리 장단과 가락을 음미하고 감탄할 때마다 나운영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고 고백했다.
 
  “바이올린 소리로 한국 음악의 언어를 제대로 구사해 우리의 독창적인 음악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할아버지께서 작곡을 통해 갈구하신 ‘선 토착화 후 현대화’와 같은 곳에 뿌리를 두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산조’를 작곡하실 무렵에 국악계의 명인들과 자주 교통 하셨던 할아버지의 그 마음이 어떠하셨을지도 헤아려진다”며 “광대한 음악 세계에서 내 민족의 소리, 그래서 확실하게 나의 소리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음악을 연주할 때처럼 음악인으로 제 본분을 뚜렷하게 느껴본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나운영 산조를 배우려다가 ‘김일구류 아쟁 산조’를 만났고, ‘김일구류 산조’를 통해 한국 음악의 언어를 배워 나운영 산조를 더 잘 이해하게 되니, 이렇게 소중한 경험은 제가 감히 상상도 계획도 할 수 없었던 저의 운명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전통음악을 새롭게 배우며 메릴랜드대 로버트 프로바인(Robert C. Provine) 명예교수를 알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고 한다. 로버트 교수는 2007년 한국학중앙연구원 방문 교수로 내한해 한국의 궁중음악과 판소리, 창극, 사물놀이 등을 연구해 수많은 논문과 책을 썼으며 해외에 한국 전통음악을 알렸다. 서울대 음악대학장을 지낸 이혜구(李惠求·1909~2010년) 선생의 제자이기도 하다.
 
  “국악 이론 책들이 많이 있지만 저는 통역사가 필요했죠. 예를 들어 양악 연주자는 항상 모든 음의 정확한 음정을 알고 곡을 배우는데, 반면 우리 가락은 곡선으로 이루어져서 음높이가 흘러내리거나 위로 밀어 올라가는 경우가 자주 일어나요. 그러니 서양식으로 음 위치를 고정시키면 부자연스럽고 오히려 가락의 진행을 방해하는 일이 됩니다.
 
  2020년 초에 혼자 답답한 마음으로 온갖 고민을 하고 있던 무렵, 문득 책장에 꽂혀 있는 이혜구 박사의 《Korean Traditional Music》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 책의 영문 번역자가 로버트 프로바인 선생님이셨어요.”
 
 
  “나운영은 앞서가셔도 너무나 한참 앞서가셨던 분”
 
  그는 속으로 ‘이분은 내 고민을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솔직히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몇 시간 후에 프로바인 교수가 반갑게 답을 주었고, 지금까지 그의 공부를 돕는 버팀목이 되고 있단다.
 
  “한자를 잘 모르는 저를 위해 한문으로 된 자료를 풀어 설명해주시고, 구하기 어려운 음원이나 책은 직접 찾아주셨죠. 제가 국악에 관해 발표할 때마다 준비 과정에 큰 힘이 되어주시니 저는 연구를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프로바인 교수님도 저에게는 하늘이 주신 선물입니다.”
 
  박 교수는 지난 3월 시애틀에 있는 프로바인 교수의 집을 찾아가 서재에 가득한 음악 자료들을 보고 깊이 감동받았다. 또한 많은 명창·명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보며 프로바인 교수의 한국 사랑에 감사함을 느꼈다고 한다.
 
  ―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운영을 어떻게 기억했으면 좋겠습니까.
 
  “우리 민족이 우리 고유의 음악을 몹시 업신여기고 천대하던 시절부터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내내 한국의 현대음악은 민족음악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앞서가셔도 너무나 한참 앞서가셔서 오해도 많이 받으셨어요. 당신이 작곡하신 여러 예술 가곡과 동요들, 또 성가곡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우리의 민족음악을 얼마나 아끼셨는지, 국악의 본질을 모든 장르에서 어떻게 지켜내셨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잘 알고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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