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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장진호전투 참전했던 학도병 손담

“동쪽에서는 피리 소리, 서쪽에서는 꽹과리 소리,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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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진호 초입 수동에서 중공군과 接戰, “소나무가 포탄에 쓰러지는데, ‘엄마, 나 이제 죽어요!’ 비명”
⊙ 15세 때 나이를 18세로 속이고 학도병으로 자원입대
⊙ 3사단 26연대 통신병으로 포항탈환전투, 38선 돌파, 원산전투, 장진호(수동)전투 등 치르며 혜산진까지 北進
⊙ “한 군데도 다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목욕재계한 후 정화수 떠 놓고서 빌었던 어머니 덕분일 것”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고구려 역사를 침탈했던 중국이 영화를 통해 6·25전쟁도 자기들 입맛대로 장난질치고 있다. 6·25전쟁을 이르는 중국식 표현을 빌리면 ‘항미원조전쟁공정(抗美援朝戰爭工程)’이라고 할까. 지난 9월에는 영화 〈장진호(長津湖)〉를 개봉하더니, 그 속편인 〈장진호: 수문교〉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압록강을 건너다〉라는 영화도 곧 개봉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것은 ‘기억전쟁’이다. 중국 공산정권은 미중(美中) 갈등의 와중에 ‘항미(抗美)’의 기억을 끊임없이 소환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71년 전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毛澤東)이 공모(共謀)해서 일으켰던 6·25전쟁의 기억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어느 속없는 업자가 돈 좀 벌어보겠다고 1953년 7월 금성전투 당시 중공군의 활약상(?)을 다룬 〈금강천〉이라는 영화를 수입하려 했던 것은 그 증거다.
 
  그러던 차에 김경환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사무총장으로부터 “6·25 당시 장진호전투에 참전했던 분이 진해에 생존해 계시다”는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장진호전투 당시 미 해병1사단의 분전(奮戰)을 다룬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아웃》을 읽은 이래 기자는 장진호전투에 대한 관심을 이어왔다. 2012년에는 미 해병1사단에 배속되어 전투를 치렀던 이종연(李鍾淵) 변호사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때문에 장진호전투의 생존자가 계시다는 얘기는 무척이나 반가웠다. 다만 ‘당시 군인으로 참전했던 분이라면 연세가 최소한 90세는 넘었을 텐데, 체계적인 증언이 가능할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기우(杞憂)였다. 올해 86세인 손담(孫淡)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진해지회 회장은 70대 중반으로 보일 정도로 정정했다. 기억력도 생생했다. 손 회장은 “전쟁 중에도 틈틈이 그날그날 있었던 일들을 수첩에 메모해놓았는데, 나중에 전사(戰史)에 나와 있는 내용과 비교해보니 ‘연대봉(煙臺峯)’을 ‘연좌봉’으로 잘못 적는 식의 잘못은 있었지만 큰 잘못은 없더라”고 말했다.
 
  손 회장은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진해공립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15세이던 그는 18세라고 나이를 속이고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이후 그는 육군 제3사단 26연대(현재 26연대는 수도사단 소속) 통신병으로 포항탈환전투를 치른 후 38선 돌파와 흥남·원산 탈환의 감격을 맛보았다. 이후 장진호로 향하는 개마고원 초입(初入)인 수동(水洞)에서 중공군을 만나 죽다 살아났다. 이것이 장진호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수동전투였다. 여기서 미 해병1사단과 교대한 후 압록강 변의 혜산진까지 올라갔다가 북청을 거쳐 흥남에서 철수했다. 그 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향로봉전투, 금화지구전투, 호남 일대 공비토벌작전 등을 치렀다. 일등중사(현 하사)로 제대한 후 1959년 해군 군무원이 되어 1996년 군무부이사관으로 퇴직했다. 입대에서부터 흥남철수 때까지의 일들을 중심으로 해서 손담 회장(이하 손담)의 전쟁 경험을 재구성해본다.
 
 
  “가야 합니다!”
 
  손담은 1935년에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일제(日帝) 때에는 ‘국어상용(國語常用)’이라 하여 학교에서는 우리말을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카드를 열 장씩 나누어주곤 무심코 조선말을 사용하면 “너, 카드 내놔!”라며 카드를 빼앗았다. 카드를 잃으면 그만큼 국어 점수가 깎였다. 학교에는 신사(神社)도 있어서 등교할 때마다 예(禮)를 표해야 했다. 어린 마음에도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는 농산물을 공출(供出)해가고 대신 만주에서 들여온 콩으로 콩기름을 짠 후에 남는 콩깻묵을 배급해주었다.
 
  아마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자라서인지 그의 마음속에는 어느 사이엔가 애국심이 자리 잡았다. 6·25전쟁이 일어날 당시 학교에는 학도호국단이 조직되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학생들은 학교에서 합숙을 하면서 목총(木銃)이나 모의 수류탄을 갖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읍사무소 게시판에는 매일 마산방어전투 관련 전황(戰況)이 나붙었다.
 
  8월 초 어느 날 어깨에 기관단총을 멘 김인조 대위가 학교에 나타났다. 그는 진해 출신으로 통신병을 모집하러 온 것이었다. 학도호국단의 선배들은 국가관이 몸에 배어 있어서 너도나도 지원했다. 15세이던 손담은 나이를 18세라고 속이고 자원했다. 당시 키가 160cm가 넘었기 때문에 입대가 가능했다.
 
  입대 전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내일 입대합니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아버지는 기가 막혀서 한숨을 푹 내쉬셨다. 아버지가 물으셨다.
 
  “어린 나이에… 나이도 어린 네가… 네가 군대에 간다고? 네가 가야 하느냐?”
 
  “네! 가야 합니다!”
 
  “정말, 네가… 꼭 가야 하느냐?”
 
  “네! 꼭 가야 합니다!”
 
  아버지는 거듭 물으셨다. 다른 말을 더 했다가는 빌미가 잡혀 입대를 못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손담은 아버지가 물으실 때마다 “가야 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포항탈환전투
 
낙동강 전선의 학도의용군. 많은 학도의용군이 군번도 없이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8월 30일 부산 동신초등학교에 있던 육군통신학교에 입교했다. 다음 날 유선반(有線班)과 무선반(無線班)으로 분류되었는데, 유선반은 2주, 무선반은 4개월 과정이었다. 당시 많은 학도병이 군번(軍番)도 없이 전선(戰線)에 투입되었지만, 이들은 전문 병종(兵種)이어서 ‘0353’으로 시작되는 군번과 함께 하사 계급을 부여받았다. 군번에 따라 유선반과 무선반으로 나누어졌는데, 손담은 유선반이었다. 유선줄 연결이나 전봇대에 올라가 전선(電線)을 가설하고 손보는 방법을 훈련받았다.
 
  9월 12일 교육을 수료하고 난 후, 다음 날 경주에 있는 군수(軍需)지원부대에서 그리스(윤활유) 범벅이 된 카빈 소총을 지급받았다. 기름을 닦아내고 실탄을 받은 후 트럭을 타고 포항으로 이동, 제3사단 26연대 3대대 본부중대로 배치되었다. 당시 3사단장은 나중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종찬(李鍾贊) 대령이었다. 26연대는 당시에는 3사단 소속이었는데, 나중에 수도사단 소속으로 바뀌었다. 진해중학교 동기 가운데 손담까지 세 명이 통신병으로 입대했는데, 다른 두 명은 각각 1대대와 2대대로 갔다. 그 가운데 손담만 아직까지 살아 있다.
 
  부대는 지금은 포철(포스코) 공장이 있는 형산강 강변에 있었다. 여기서 SCR-300 무전기를 지급받았다. 배터리까지 포함하면 무게가 30kg에 달했다. 4km까지 교신(交信)이 가능했다. 3시간 동안 무전기 조작법을 교육받았다.
 
  손담이 처음 치른 전투는 9월 15일 벌어진 포항탈환전투였다.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던 날이었지만, 그건 알지 못했다. 지금은 형산강에 다리가 3개 있지만, 당시에는 콘크리트 다리가 하나뿐이었다. 이 다리를 건너 포항 시내로 진입해야 했지만 적은 다리 양쪽에 중기관총을 배치해놓고 완강하게 저항했다. 9월 15일, 16일 이틀 동안 전투를 치렀지만 전사자와 부상자만 늘었다. 대대장 은석표 대위가 손담에게 지시했다.
 
  “연대 불러!”
 
  연대장 이치업 대령이 나왔다. 은 대위가 말했다.
 
  “현 상황. 중기관총이 다리 양쪽에 배치되어 병력만 손실. 목표 시간 내 목표 지점 점령 어려운 상황. 공중지원 요망!”
 
  잠시 후 흔히 ‘쌕쌕이’라고 부르던 F-80전투기 1개 편대(4대)가 나타났다. 1·2·3번기가 다리를 향해 로켓포 공격을 가한 후, 4번기가 캘리버50 기관총을 쏘아대 적 진지를 무력화(無力化)시켰다. 10중대가 돌격, 다리를 돌파했다.
 
  9월 18일 저녁, 비가 내렸다. 참호 속에서 판초 우의를 뒤집어쓰고 누웠는데,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났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아버지는 그 무렵 진해에서 부산까지 120리 길을 걸어 영도 동신초등학교까지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흘 전에 이미 전선으로 배치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셨다고 하더군요.”
 
 
  北進
 
육군 제3사단이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은 국군의 날이 되었다.
  9월 19일, 손담의 대대는 탑산이라는 73m 고지를 점령했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대대 통신병 손담은 30kg짜리 무전기를 짊어지고 달렸다.
 
  “대대장이 달리면 나도 따라서 뛰고, 고참병이 엎드리면 따라서 엎드렸어요. 우리가 점령한 고지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이것이 전쟁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북진(北進)이 시작됐다. 3사단은 하루에 24km씩 걸으며 북으로, 북으로 진격했다. 강원도 죽변에서 LST(Landing Ship Tank·상륙함)를 타고 주문진 앞바다에 도착, 배에서 1박을 한 후 9월 30일 상륙했다. 10월 1일 3사단 23연대가 38선을 돌파했다. 이날을 기념하여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이 된 것이다.
 
  26연대는 이후 양양, 속초, 간성, 고성을 거쳐 10월 8일경 강원도 안변(원래는 함경남도였으나 1946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원도에 편입) 비운령에 이르렀다. 대대장 은석표 대위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수색대를 편성해서 적정(敵情)을 살피도록 했다. 수색대에는 통신병이 필요했다. 은 대위는 하사 손담에게 수색대에 참가하라고 지시했다. 이 무렵 손담은 이미 소년병, 학도병이 아니라 그런 임무를 맡겨도 될 고참병이 되어 있었다. 손담은 휴대가 간편한 SCR-536 무전기를 지급받았다. 수색대는 지휘관인 소위 한 명을 포함해 모두 12명이었다. 수색대는 봉우리에 걸린 커다란 백기(白旗)를 발견했다. 뭔가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적의 기만전술이었다. 치열한 교전 끝에 적군을 생포, 적의 주력(主力)은 이미 안변천을 건너 후퇴했다는 진술을 얻어냈다.
 
  10월 10일 3사단 23연대는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을 무찌르고 원산 시내에 진입했다. 같은 날 수도사단은 해안 쪽에서 원산 시내로 진입했다. 3사단과 수도사단 중 어느 쪽이 먼저 원산을 점령했느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는데, 결국 함께 점령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원산의 여왕산(333m) 근처 옥수수밭을 지날 때였다. 옥수수 더미에서 짐승이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아군 병사가 M-1 소총을 쏜 후 “나와라!”라고 소리쳤다. 적병 7명이 손을 들고 나왔다.
 
  원산에 이어 고원, 영흥을 거쳐 10월 17일 함흥을 점령했다.
 
  “함흥형무소 뒤에 방공호(防空壕)가 있었는데 300명 정도가 학살되어 있었습니다. 참혹하더군요.”
 
 
  중공군 출현
 
중공군은 장진호 일대에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국군과 미군을 기다렸다.
  함흥에서 이틀을 보낸 후 서북쪽에 있는 낭림산맥을 타고 평남 영흥군 대흥면 사창리로 들어가 전투를 치르고 하룻밤을 잤다. 한데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게 아닌가 싶었다.
 
  무전기로 오로리에 있는 연대본부를 불렀지만,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중 갑자기 뭔가에 맞은 듯한 느낌과 함께 “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적탄이 무전기 배터리 케이스를 강타한 것이었다. 주둔 시에는 무전기에 10피트(1ft=30.48cm)짜리 긴 안테나를 장착하는데, 그 때문에 적의 표적이 된 것 같았다. 적은 중공군이었다.
 
  “배터리가 아니었으면, 그 총알은 내 몸에 박혔겠지요. 배터리 때문에 무전기 무게가 30kg이나 나가 늘 힘들었는데, 그 배터리가 내 목숨을 구한 것이지요.”
 
  대대장은 이동을 명령했다. 멀리서 중공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는 11중대 척후병이 쏘아대는 BAR(Browning Automatic Rifle·브라우닝 자동소총) 총성이 들려왔다. 연대에서는 더 이상 전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26연대는 일단 함흥으로 나왔다가 장진호 초입에 있는 마을인 수동으로 들어갔다. 손담은 이때가 10월 26일 아니면 27일경이었고, 그곳에서 3~4일 머물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척후병들이 진흥리, 고토리까지 나아갔지만, 별다른 적정은 보고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 쑹스룬(宋時輪)이 이끄는 중공군 9병단(兵團) 12만 명은 이미 장진호 일대에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국군과 미군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쑹스룬은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용명(勇名)을 떨친 군인으로, 특히 매복전(埋伏戰)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마오쩌둥은 그를 보내면서 “솜씨를 발휘해보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손담이 속해 있던 26연대 3대대도 이미 적의 포위망에 들어가 있었다.
 
 
  수동전투
 
  10월 28일 저녁 7시쯤이었다. 갑자기 적의 포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1분에 250발 정도의 포탄이 떨어졌는데, 다들 엎드리고 숨고 난리가 났습니다. 소나무가 포탄에 맞아 쓰러지는데, ‘엄마, 나 이제 죽어요!’라는 비명이 저절로 터지더군요. 방향감각을 잃고 정신없이 달렸는데, 앞에서 쌀라쌀라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중공군이 몰려오고 있더군요. 등을 돌리고 다시 뛰는데 무엇인가에 발이 걸리는 바람에 넘어졌어요. 낮에 가설해놓았던 W190 유선통신줄이었어요. ‘이 줄을 따라가면 부대로 돌아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 줄을 따라 20분 정도 뛰었더니 대대본부에 이르렀습니다. 심만철 소위가 통신병들을 모아놓고 있더군요.”
 

  이들이 무전기로 연대를 부르고 있는데, 북한군 T-34전차(戰車)가 나타났다.
 
  “서로 먼저 도망치려고 달리다가 넘어지고, 포개지고…. 대대장 서걸우 대위도 보이지 않았어요. 동쪽에서는 피리 소리가 나고, 서쪽에서는 꽹과리 소리가 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병사들은 혼이 나간 마냥 그 자리에 멈춰 더 이상 움직이질 못했는데, 심 소위가 권총을 뽑아 들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어요. 냇물을 건너야 하는데, 적은 60mm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아댔습니다. 기관총은 다섯 발에 한 발씩 예광탄이 섞여 있었는데, 그 불빛도 공포감을 더했어요. 박격포 포탄이 떨어지는 각도 등을 보면 적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데, 아주 지근거리에서 쏘아대고 있었습니다. 무작정 달아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공포 속에 2시간 정도를 내달렸을까,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탈진(脫盡)하는 병사가 속출하는 와중, 앞에서 한 무리의 병사가 나타나 수하(誰何)를 했습니다. 연대 수색대였습니다. ‘이제 살았다’ 싶더군요.”
 
  이것이 10월 28일에서 29일 상황이다. 이들 앞에 나타났던 적 전차는 6·25 개전(開戰) 초기 서울을 점령했던 북한군 344전차연대의 마지막 남은 전차 4대 중 한 대였다.
 
 
  철수
 
  다급한 상황에 끼니조차 못 챙긴 채 26연대 병사들은 함흥으로 향해야 했다. 이때 ‘26R-No.1’이라는 번호판을 단 지프가 나타났다. 이치업 연대장이었다. 연대장이 물었다.
 
  “몇 대대야?”
 
  “26연대 3대대입니다.”
 
  “수고한다.”
 
  이치업 연대장은 지프에 싣고 있던 건빵들을 내려 병사들에게 나누어준 후, “연대봉으로 올라가라”고 지시했다. 10중대장 윤사섭 중위가 병사들을 모아 연대봉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26연대는 결국 장진호를 향해 진격하고 있던 미 해병1사단 7연대(연대장 호머 리첸버그 대령)를 만나 교대했다. 원래 두 연대의 교대 예정일은 11월 2일이었다. 이때의 상황은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아웃》에 이렇게 기술(記述)되어 있다.
 
  〈10월의 마지막 날, 7연대 B중대의 정찰대는 3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내륙(內陸) 쪽으로 48km를 이동, 수동에 주둔한 한국군 26연대를 방문했는데, 7연대는 이 부대와 11월 2일에 교대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윌콕스 대위는 무전으로 리첸버그 대령에게 한국군이 말끝마다 “많은 중공군, 많은 중공군”이라고 하면서 그 지역을 빨리 떠나고 싶어 한다고 보고했다. 한국군이 붙잡은 16명의 중공군 포로들은 4야전군 9병단 42군 124사단 370연대 탄약소대 소속이었고, 그 포로는 북한군 전차의 지원을 받는 42군의 나머지 부대가 북쪽의 산악지대에 주둔하여 장진호로 가는 도로를 차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손담은 미 해병1사단 7연대와 한국군 3사단 26연대가 교대한 지점을 함흥에서 연대봉을 향해 올라가는 도로상이었다고 회고했다.
 
 
  美 해병대의 장진호전투
 
장진호에서 공군의 지원 공격을 바라보는 미 해병대. 미 해병대는 장진호에서 1달여 동안 사투를 벌였다.
  이치업 연대장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26연대가 공격하지 못했던 연대봉은 도로 서쪽에 있는 해발 698m의 고지로 인근의 도로, 교량, 터널을 감시할 수 있는 요지였다. 존 얀시 중위가 이끄는 미 해병대 병력이 11월 2일 연대봉을 점령했다. 이어 미 해병은 26연대가 철수한 수동에서 중공군과 접전(接戰), 적을 격퇴했다. 11월 4일 미 해병은 진흥리로 진입했다. 이곳에서 미군은 북한군 T-34전차 4대를 격파했다. 서울을 점령했던 북한군 344전차연대는 이렇게 최후를 마쳤다.
 
  하지만 미 해병1사단의 장진호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개마고원 깊숙이 들어갔던 미 해병1사단은 그해 12월 11일까지 중공군 13병단과 혈전(血戰)을 벌였다.
 
  미국의 전사가(戰史家) 에드윈 P.호이트는 미국 해병대의 장진호전투를 두고 “군사상(軍史上) 가장 위대한 후퇴작전 가운데 하나”라고 평했다. 하지만 장진호전투에 참가했던 미 해병대원들은 ‘후퇴작전’이라는 표현을 거부한다.
 
  “그건 공격작전이었지 후퇴작전이 아니었습니다. 장진호전투 전체가 공격작전이었다는 말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북쪽으로 유담리까지 쳐올라갔고, 다음으로는 유담리에서 서쪽으로 1500m 지점까지 공격해갔으며, 그러고는 남쪽으로 유담리에서 황초령까지 공격했습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우리가 그러는 중에 후퇴한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우드로 윌슨 테일러)
 
  “우리는 수동에서 중공군과 처음 조우했을 때부터 그들을 무찔렀고, 나중에 답교를 건너면서도 그들을 무찔렀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항복했지, 그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후퇴라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조지프 오웬)
 
  당시 미 해병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상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은 후 “우리는 후방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으로 공격한다!”고 명령했다.
 
  12만 명에 달했던 중공군 13병단은 2만5000명의 전사자, 1만2500명의 부상자를 내고, 무력화(無力化)되었다. 미 해병1사단에서는 700명 이상의 전사자, 200여 명의 실종자, 35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외에 6200여 명의 비(非)전투 사상자가 나왔는데, 이들 대부분은 동상(凍傷) 환자였다. 이들 중 3분의 2는 바로 임무에 복귀했다.
 
  미 해병1사단의 장진호전투를 다룬 《브레이크아웃》 한국어판 서문에는 장진호전투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나와 있다.
 
  〈장진호전투의 군사적 의의(意義)는 무엇보다 중공군 제13병단의 기습공세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간 서부전선의 유엔군-주로 미 육군과 국군 부대-에 비하여 제1해병사단이 악조건하에서도 부대 건제(建制)를 유지하면서 보름간에 걸친 탈출작전 동안 중공군 제9병단의 병력 대부분의 발을 묶어, 함경도 지방으로 진출한 다른 미군과 국군 부대들이 철수하거나 흥남으로 집결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나아가서 동(同)병단에게 전투력을 상실할 정도의 막대한 타격을 입혀, 중공군이 38선을 넘어 유엔군을 추격할 때 제9병단이 참가할 수 없게 만들어 유엔군과 국군이 재편성하여 반격을 개시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데 있다.
 
  만약 제1해병사단도 맥없이 무너져서 큰 손실을 입지 않은 9병단이 주공(主攻)인 13병단과 함께 남진(南進)해왔더라면, 그 압력을 못 견딘 유엔군은 한국에서 전면적으로 철수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됐을 경우 우리 대한민국이 이 땅에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이 가정(假定)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 13병단만의 남진에도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내주고 오산-제천-원주를 잇는 37도선까지 후퇴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혜산진까지 진격
 
  26연대는 이후 함흥 북방의 홍원으로 이동했고 사라졌던 대대장 서 대위 또한 합류했다. 홍원에서 5일간 묵은 후 26연대는 유개(有蓋)열차를 타고 단천, 길주를 거쳐 청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륙으로 진격, 11월 21일 압록강 상류의 혜산진에 도달했다. 이 때문에 26연대는 혜산진부대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국군 제6사단은 이미 10월 27일 초산에 도달,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보냈다.
 
  26연대는 두 주일 동안 혜산진에 머물렀다. 하지만 중공군의 공세가 강화되자 연대에 북청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개마고원을 질러 후퇴하는 길은 끔찍했다. 무엇보다도 추위가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방한모(防寒帽)에 방한복을 입었음에도, 동상 환자가 속출했다.
 
  “12월 8일경 북청에 도착했는데 사람 몰골이 아니었습니다. 박박 깎았던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났고 수염도 덥수룩했습니다. 북청 시내에 있는 이발관에서 이발을 하고 나니 멋진 청년의 모습이더군요. 우리가 북청 시내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중공군은 북청 외곽의 산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북청역에서 석탄 싣는 무개차(無蓋車)를 수리해서 20km 떨어진 신북청으로 철수했습니다. 12월 10일경 열차에 타니 중공군이 방망이 수류탄을 던지면서 공격해왔습니다. 중공군은 세 명에 한 명 정도만 소총을 갖고 있었고, 방망이 수류탄이 주된 무기였습니다. 윤사섭 중위가 3~4시간의 전투 끝에 중공군을 물리쳤습니다.”
 
  이 무렵 26연대는 3사단에서 수도사단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신북청에 도착한 후 유선통신을 가설하고 연대본부와 통화했더니 연대장은 “빨리 퇴조까지 철수하라”고 했다. 퇴조는 오늘날 북한 해군의 잠수함 기지가 있는 곳으로 1994년 9월 강릉으로 침투했던 무장공비들도 이곳에서 출항했었다.
 
  신북청에서 퇴조까지는 걸어서 내려왔다. 손담은 “죽거나 포로가 되지 않으려면, 필사적으로 걷는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 퇴조에서 사흘간 머물면서 식량을 마련한 26연대는 흥남으로 이동했다. 흥남부두는 12만 명의 피란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미군들은 수송선에 실었던 군수물자들을 버리고 대신 피란민들을 태웠다. 12월 23일 흥남을 출항한 메레디스 빅토리호는 사흘 후 거제에 도착했다.
 
  26연대는 12월 24일 미국 군함을 타고 흥남을 출발, 다음 날 오후 강원도 묵호항에 도착했다.
 
 
  어머니의 정화수
 
  여기서 일주일간 휴식 겸 부대를 정비한 후 26연대는 바로 강릉탈환전투에 투입됐다. 이어 대관령 유철리전투(1951년 1~2월), 오대산전투·설악산전투(1951년 5~8월) 등을 치렀다. 유철리전투 때에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협공을 받고 황급하게 탈출하는데 무전기 안테나가 버드나무 사이에 걸리는 바람에 죽을 뻔했다. 거창 출신의 전우가 그를 발로 걷어차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줄곧 26연대에서 같이 통신병으로 복무했던 진해중학교 시절의 친구는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3개월 만에 탈출해왔다.
 
  향로봉전투(1951년 8월) 때에는 동해에 있는 미국 전함에 무전을 날려서 함포사격 지원을 요청했다. 미 해군의 함포는 대체로 정확하게 적진을 때렸지만 낙오탄(落伍彈)이 아군 쪽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화기중대장 선우관성 중위가 즉사(卽死)했다.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이후 손담은 금화지구전투(1952년 7~10월),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 등을 치른 후 1955년 1월 일등중사(오늘날의 하사)로 제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3월 학도병들은 제대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군번을 받은 병사들, 특히 통신병이었던 손담처럼 전문 병종의 병사들은 그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군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래도 나는 한 군데도 다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어머니는 내가 군대에 있는 내내 추우나 더우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목욕재계한 후 정화수를 떠 놓고서 비셨다고 합니다. 내가 그 숱한 전투를 치르고서도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덕분일 겁니다.”
 
  제대한 후 손담은 진해중학교로 복학하려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복학을 받아주지 않았다.
 
  “‘왜 안 되느냐’고 따졌더니, 교무주임은 ‘문교부의 지침이 없다’고 하더군요. 화가 나서 ‘우리가 전선에서 싸우지 않았으면 이렇게 무사히 공부할 수 없었다’고 따졌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학교 안보 강연 거의 없어져”
 
  손담은 1959년 해군 보급창(현 해군군수사령부)의 군무원(당시에는 ‘군속’이라고 했음) 모집에 응시, 합격했다. 보급창 군무원에 지원한 것은, 군에 있을 때에 보급이 잘못되어 굶거나 고생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1996년 손담은 군무부이사관(2급)으로 정년퇴직했다. 2002년부터는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경남 창원시 진해지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다가 2020년부터 지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틈나는 대로 6·25 전적지(戰跡地)를 찾아 전사자들의 유품을 발굴하는가 하면, 각급 학교를 찾아 안보 강연을 해왔다.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장과 함께 《마산방어전 루트를 찾아서》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그는 “근래에는 학교에서 안보 강연을 요청해오는 일이 거의 없다”며 섭섭해했다.
 
  “우리 때에는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모두들 나가서 싸우려고 했을 정도로 애국심이 대단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걱정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6·25 때 수많은 젊은이와 미군, 유엔군이 목숨을 던진 덕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정신을 잊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서 6·25전쟁 100주년이 되는 2050년에는 대한민국이 G2의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순간 정수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6·25전쟁 100주년이 되는 2050년에 대한민국이 G2가 되는 꿈이라니! 갈수록 꿈이 작아지고 작아지는 시대에 86세의 참전용사는 참 큰 꿈을 꾸고 있었다. 우리 시대 누구보다도 큰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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