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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취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영원히 잠들다

‘글로벌 LG’의 초석 놓은 개발연대의 巨人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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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8월 故 구본무 회장과 담소하고 있는 구자경 명예회장(왼쪽).
  2019년 12월 14일 타계한 구자경(具滋暻) LG그룹 명예회장은 LG그룹이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오늘날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럭키금성그룹이던 사명(社名)을 LG그룹으로 바꾼 직후 경영권을 장남 고(故) 구본무 회장에게 넘기고 1995년 그룹에서 물러났다. 그는 장남에게 대권(大權)을 물려준 이후로 경영에 개입하기는커녕 공식 행사에 일절 얼굴을 내민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경영자 시절에 강조했던 경영 철학과 원칙은 구본무 회장을 거쳐 오늘날까지 LG그룹의 기업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1925년 경남 진양군에서 태어나 진주고와 진주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했다. 스무 살 때 고향의 지수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지수보통학교는 구 명예회장의 부친이자 그룹 창업주인 연암(蓮庵) 구인회(具仁會) 창업회장과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창업주가 나온 학교다.
 
  그가 교편을 잡은 지 넉 달 만에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았다. 구인회 창업회장은 1947년 화장품 럭키크림을 만드는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설립해, LG그룹의 역사를 열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1950년 교사 생활을 접고 부친 회사로 들어갔다. 그의 이름 앞에 ‘2세 경영인’이라는 타이틀 대신 ‘1.5세대 경영인’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은 그가 굉장히 일찍 부친 사업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25년 동안 그룹 매출 1150배 늘어… 최초로 기업 연구소 설립
 
  구자경 명예회장은 LG그룹 창업 초기부터 45년 동안 기업 경영에 전념하며 그룹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끌고 명예롭게 은퇴한 ‘참 경영인’이었다. 1950년부터 부친과 함께 회사를 운영해온 그는, 1970년 제2대 그룹 회장직에 올라 25년 동안 그룹 경영권을 행사했다. 그 기간 그룹 매출은 연간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약 1150배 성장했다. 임직원 수는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늘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의 신념을 갖고 있었다. “국민생활 윤택하게 할 제품을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보자”며 최초의 기업 중앙연구소인 럭키중앙연구소(1979년)를 출범시켰다. 이어 1985년에는 금성정밀, 금성전기 등 7개사가 입주한 안양연구단지를 조성하는 등 회장 재임 기간 70여 개의 연구소를 만들었다. 같은 해에 우리나라 최초의 제품시험 연구소를 만들고 가혹 환경 시험실, 한냉·온난 시험실, 실용테스트실 등 국제적 수준의 16개 실험실을 갖춰 ‘금성사’(현 LG전자) 제품의 품질을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끔 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시대를 한 발 앞서 선진 기업 경영의 길을 개척하며 고객 중심 경영의 효시가 된 ‘혁신 전도사’였다. 그는 1970년 민간기업 최초로 ‘락희화학’ 기업공개를 통해 투명 경영을 활성화하는 데 앞장섰다. LG그룹에 따르면 당시만 해도 기업을 공개하는 것은 회사를 팔아넘기는 행위로 오해해 일부 임원은 기업 공개를 강력히 반대했다고 한다. 국내 기업사(史)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구자경 명예회장은 앞으로 기업 공개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확신했고, 락희화학은 1970년 2월에 민간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이후 금성사가 기업 공개를 하면서 LG그룹의 주력 기업이 모두 공개됐다.
 
 
  1995년 “내 소임 끝났다”며 명예롭게 퇴진
 
구자경 명예회장(가운데)은 1986년 고려대에서 명예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왼쪽이 구본무 회장, 오른쪽이 구자경 명예회장의 부인 故 하정임 여사이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평생을 인재 확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정성을 다해 인재를 육성했다. 그는 ‘인재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스스로 성장하고 변신하고 육성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가 만든 인재 양성기관인 ‘LG인화원’은 그룹의 영속적 발전을 위해 그 핵심인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1987년 2월에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후 민주화 진전에 따른 전환기에 재계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취임 후 전경련 산하에 ‘경제사회개발원’을 만들어 ‘국민 속의 기업인, 국민경제를 위한 기업’을 모토로 기업 이미지 개선 활동을 전개했다. 전경련과 기업들이 사회와 소통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LG그룹과 고락(苦樂)을 함께한 지 45년 만인 1995년 2월, 구자경 명예회장은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일흔으로 은퇴를 거론할 나이도 아니었고, 건강상의 이유도 아니었다.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 승계로 기록된 일이다. 그는 퇴임에 앞서 “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노력을 충실히 해왔고 그것으로 나의 소임은 다했으며, 이제부터는 젊은 세대가 그룹을 맡아서 이끌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퇴임 의사를 표명했다.
 
  구 명예회장이 물러날 때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젊은 경영인들이 소신 있게 경영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동반 퇴진을 해 재계에 큰 귀감이 됐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유년기에 조부 춘강(春崗) 구재서(具再書) 공에게 장남으로서 책임감과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그때 자리 잡은 가치관은 경영 활동에서 면면히 이어져 스스로 엄격함을 유지하게끔 했다. 실제로 구 명예회장은 회장으로 취임한 뒤, 외부 업무를 마친 후 단 10분이 남아도 꼭 회사로 돌아와 퇴근함을 원칙으로 삼고 이를 어기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을 때조차도 상대방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정을 바꾸지 않을 정도로 신뢰를 중시했다. 지방 공장을 방문하거나 외국 출장을 갈 때 불필요한 의전 절차를 싫어함은 물론이다.
 
 
  은퇴 후 농장에서 된장·버섯 연구
 
  구자경 명예회장은 25년간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대기업 회장이었지만 은퇴 후에는 일체의 허례허식 없이 간소한 삶을 즐기며 ‘자연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구인회 창업회장이 생전에 강조한 것이 ‘한 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는 말이었는데, 구자경 명예회장은 이 가르침을 철저히 지키며 후진의 영역을 확실히 지켜줬다.
 
  충남 천안시 성환에 위치한 연암대 농장에서 은퇴 후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주로 된장・청국장・버섯 등을 연구하며 하루하루 바쁘게 지냈다. 구 명예회장의 취미 생활은 교직 때부터 손을 댄 나무가꾸기로 시작해, 난(蘭)・버섯 연구 등 자연과 벗삼을 수 있는 것에 대한 호기심의 연속이었다. 무엇을 하나 시작해도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갖출 때까지 파고들었다.
 
  그는 정(情)이 많은 경영인이었다. 은퇴 후 모교인 지수초등학교 후배들의 서울 방문을 직접 챙기기도 했다. 어린 학생들이 장거리 여행에 지쳐 멀미할 것을 걱정해 직접 멀미약을 챙겨주기도 했다. 대한민국 경제 부흥의 견인차 역할을 한 그는 경영인일 때나 은퇴한 후나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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