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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홍 신부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짙은 눈썹, 당당한 체구, 不義 못 참던 巨人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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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정의구현사제단 일원으로 ‘의식 있는 사제상’을 보여준 뚝심파
⊙ 38선을 떠올리고 ‘수치의 벽’임을 절감…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벽
⊙ “김대중씨가 공산주의자임을 인정해라” “할 수 없다”
⊙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1991년 焚身정국 당시)
⊙ 5개월 전부터 건강 악화… “마지막 모습은 편안하셨어요”
故 박홍 신부. 1996년 3월 《월간조선》과 인터뷰할 때 모습이다.
  지난 11월 9일 선종한 고(故) 박홍(朴弘·1941~2019) 전 서강대 총장 신부의 영결미사가 11월 11일 서울 마포구 예수회센터 성당에서 유족과 성직자, 신자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고인은 현 프란치스코 교황을 배출한 예수회 회원이었다.
 
  성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가 엄숙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목마른 사람은 내게 오라. 무거운 짐 진 자 멍에 벗겨주고 영원한 생명을 네게 주리.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기쁨이 넘치는 아버지 집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리라.”
 
  느린 위령(慰靈)의 오르간이 떠나보내는 이의 마음을 따스하게 그리고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신학교 동기라고 소개한 정한채 신부는 강론에서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 박홍 신부와 제가 살던 판잣집이 있었다”며 “그분은 강인했고, 힘이 있었다. 학교를 많이 사랑하셨고 이 과정에 공도 있지만, 과실도 있다”고 말했다.
 
  “(투병이라는) 시련 속에도 그리스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오랫동안 시련 속에 놔두시고 드디어 불러 가셨어요. 신부님도 하느님 심판을 받고, 우리 모두도 하느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신부님께 평화와 안식을 허락하시고, 신부님을 당신 품 안에 받아주시길 기도드립니다.”
 
  고인은 용인 천주교묘지 내 예수회 묘역으로 옮겨져 77년간의 희로애락을 뒤로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대학노트 4쪽 분량의 회개문과 司祭의 길
 
지난 11월 9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박홍 신부의 빈소 모습이다. 후배 신부가 장례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박홍 신부는 1980년 정의구현사제단 일원으로 활동한 ‘의식 있는 사제상’을 보여준 뚝심파였다. 하루 세 갑의 담배도 부족하다는 체인스모커, 때로 쌍욕도 내뱉는 저돌·의리형, 그러면서도 칼날 같은 논리로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사람이었다. 짙은 눈썹, 왕방울 눈, 목이 짧은 당당한 체구, 큰 제스처는 뒷골목 보스 같았다.
 
  1941년 2월 27일생. 본적은 대구 중구 대명동 1구 1630-9. 경북 경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5학년 때 영천으로 전학을 갔다. 영천초등학교와 영천중, 서울 성신고교를 나왔다. 1957년 성신고교 동기생이 함세웅 신부였다.
 
  어린 시절 꿈은 의사. 중학생 때는 급우들 싸움판에서 시시비비를 가려주다 대리싸움도 숱하게 했다. 역기 들기, 칼 던지기, 기차에서 뛰어내리기 등을 하는 악동이었다. 집안에선 돌연변이로 취급했다. 형제들 모두 공부 잘하고 얌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느낀 바 있어 성당에 나가 대학노트 4쪽 분량의 회개문을 써서 신부에게 바쳤다. 고백성사를 한 것이었다. 고백성사 내용에 대해 《영천시민신문》 인터뷰(2013년 1월2일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규율부 하면서 배구선수였는데 만날 부자 애들 도시락 반찬을 빼앗아 먹고 주먹을 조금 휘둘렀어요. 포항에서 오는 트럭에 올라 오징어도 몇 축이나 빼 먹고 나는 재미로 생각해 죄라고 생각도 않았는데 모두 다 죄인 거였어요.”
 
  이후 얌전한 학생이 돼갔다. 고교 입시를 앞두고 신부가 되기 위해 서울의 성신고교에 가기로 작정, 신부를 찾았다. 신부님 반응은 미지근했다.
 
  “글쎄, 네 형들 같으면 모르겠는데….”
 
  악동이란 이미지 탓이었다. 오기가 나 성당에서 밤새워 기도하며 속죄했다. 그의 뜻을 부친에게 전하자 “우리 집안에서 하나라도 성직자가 있으면 했는데 반갑다. 그러나 그 험한 길을…. 너 성격대로라면 입학한다 해도 두서너 달 만에 쫓겨날 것”이라는 반응이었다.
 
  집안의 대체적 분위기는 형들처럼 경북고에 진학하는 것이었지만 하여튼 서울에 있는 성신고교에 입학해 1960년에 무사히 졸업했다. 이어 가톨릭대와 대건신학대에 진학해 철학과 신학을 전공했다.
 
  여기서 잠깐. 군대 이야기가 흥미롭다. 1963년 입대했는데 파주 임진강변 어느 부대의 이등병 때 사제가 되리라 굳게 결심한 사건이 있었다. 1989년 《월간조선》(4월호) 인터뷰에서 고인이 한 말이다.
 
  “DMZ에서 간첩을 1명 잡았다고 해 부대 회식이 있었는데, 개똥철학인진 몰라도 도저히 잔치 분위기에 휩싸일 수 없었지요. 동족을 죽여놓고 잔치를 벌이는 모순 앞에 울어도 시원치 않은데 말입니다. 게다가 창자가 삐져나왔던 그 간첩의 시체가 눈에 밟혀 견디기 힘들었어요.”
 
 
  ‘X나게 까지고’ 막사로 돌아와 밤새 울어
 
故 박홍 신부의 학창시절 영천성당 앞에서 찍은 사진. 앞줄 가운데가 박홍, 왼쪽이 친구 이장화.
  이등병 박홍은 전 부대원의 회식 자리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동족끼리… 이렇게 잔치해도 되는 겁니까.”
 
  대위 계급의 어느 장교가 “뭐야. 개똥철학 말고, 일루 와, 술이나 퍼마셔”라고 말했다.
 
  “나라 잘리고… 마음까지 잘리면 됩니까. 우리 주체성을 가집시다.”
 
  이 대목에서 그는, 그의 말대로 ‘×나게 까지고’ 막사로 돌아와 밤새껏 울어야만 했다.
 
  “당시 얻어맞은 걸 은총으로 생각합니다. 사제가 되기로 결심을 굳힌 동기가 됐으니…. 그 뒤 베를린의 동·서 분단의 철책을 보면서 우리의 38선을 떠올리고 ‘수치의 벽’임을 절감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인간을 소외시키는 벽을 만든 겁니다.”
 
  신학대학을 무사히 졸업한 박홍은 유학을 떠났다. 미국 세인트루이스대학교에서 신학, 그리고 로마 교황청의 그레고리안대학교에서 영적 신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 서강대 전임 강사, 1979년 서강대 교수, 1984년 서강대 사목실장, 1989~97년까지 서강대 총장이 되었다. 총장은 동문회와 교수회의 후보 추천을 받아 선출되는 자리였다.
 
  부친은 고시파 세무공무원이었으나 뒤에 민주당 공천으로 대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낙선했다. 이후 영천에서 양조장을 하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됐다.
 
  6남4녀 중 박 신부는 4남. 형제 중 2명이 의사, 1명은 물리학 박사, 그리고 막내 여동생이 수녀다. 동생 수녀는 로마의 수녀원에 거주하고 있다.
 
  기자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서 ‘불알친구’ 이장화(李章和·77)씨를 만났다. 그가 기억하는 ‘친구 박홍’은 이랬다.
 
  “서울에 있는 신학교에 가기 전까지 영천에서 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당시 집은 영천 성내동인데, 초등학교 때는 박홍이 축구부 주장을 했고 체격이 커서 무슨 운동이든 잘했어요. 겨울에 금호강에서 썰매를 탔고, 여름이면 벌거벗고 수영을 하거나 종발(평평한 그릇)로 피라미를 잡았어요. 전쟁 직후여서 나무로 만든 칼과 총을 만들어 전쟁놀이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와 박홍이 나이는 같지만 학교는 제가 1년 빨랐어요. 영천성당엘 같이 다녔는데 일요일 미사를 마치면 박홍 집에 가서 국수를 삶아 먹고 그랬어요.
 
  사제가 되려 했을 때 친구 중에 만류하는 이는 없었죠. 친구 중에 수도원에 가서 수사가 된 이도 있었거든요. 저는 집안 3대가 가톨릭 집안이었고 박홍 역시 천주교 신자 집안이었어요. 부모님, 할머니, 형, 누나 등 다 신자였어요. 양조장 하던 아버지의 세례명은 야고보, 어머니는 모니카인 것으로 기억해요.
 
  그러나 저는 박홍이가 신학교에 가리라고 처음에는 생각을 못 했죠. 왜냐면 영천성당 신부님이 되게 무서운 분이셨는데 박홍이가 어릴 때부터 복사(미사 때 시중을 드는 이)를 했어요. 그 시절은 라틴어로 미사를 드릴 때였죠. 성격이 와일드해서 한번은 본당 신부님에게 찍혀서, 화가 난 신부님이 지게 작대기를 들고 뛰어가면 박홍은 도망치고… 그랬어요. 바른말 잘했고 수틀리면(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1970~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잡혀갈 때 가만히 있지를 않았던 거죠.
 
  서강대 총장 시절, 박홍 신부가 고생 많이 했어요. 제가 일요일마다 찾아갔죠. 나중에(1995년 3월 무렵) 서독 간첩(독일 유학생 출신 한병훈)이 독침을 19개나 갖고 와서 그를 죽이려고 했는데, 박홍에게 자수했잖아요. 박홍이 영세를 주었고, 그 아내까지 세례를 줬죠. 제가 알기로 김영삼 정부 때였는데 청와대에 전화를 걸어 ‘이 사람 구속시키지 말라’고 했어요. 한마디로 대통령한테 상소를 올렸던 겁니다.”
 
 
  1980년 합수부 연행과 심재철 의원과의 만남
 
  1980년 5월. 당시는 소위 ‘서울의 봄’을 지나 ‘안개 정국’을 맞고 있었다. 서강대 캠퍼스 내 신학원에 검은 세단 한 대가 들이닥쳤다. 인상이 곱달 수 없는 40대 초반의 한 사내가 신학원 박홍 원장신부를 찾아왔다.
 
  “웬일이십니까.”
 
  “잠시 조언을 구할 게 있는데… 같이 가실까요.”
 
  박 신부는 ‘조언’ ‘잠시’라는 말에 사내의 정체가 뭔지도 모른 채 세단에 올랐다고 한다. 마음을 풀어놓고 사는 오랜 성직자의 생활 때문이었으리라. 세단은 어느 건물 앞에 멈췄다. 이어 다방으로 안내됐다. 사내가 박 원장에게 대뜸 물었다.
 
  “시국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의 대답은 이랬다.
 
  “민주화가 돼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그 사내들은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이었고, 그곳은 다방이 아니라 서대문에 있는 합동수사본부의 한 사무실이었다. 2층 복도엔 2m쯤의 간격으로 젊은 사내들이 꿇어앉아 있어 뭔가 섬뜩한 감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들은 박 신부에게 당시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투신자살한 서강대생 김의기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라고 다그쳤다. 이후 3일간 “김대중씨가 공산주의자임을 인정해라” “할 수 없다”는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수사관들이 지쳤는지 “서로 괴로우니 우선 우리가 부르는 대로 자술서를 작성하고 뒤에 재판에서 정정하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절충안을 제시했다. 이들은 뜻대로 안 되자 “순순히 부는 게 이로울 게다. 함세웅 신부, 지학순 주교까지 담당했던 우리다. 김성곤(정치인, 쌍용그룹 창업자)이도 시멘트 바닥에 문질렀다. 신부라도 죽이고 자살했다고 보고하면 그만”이라며 위협했다.
 
  “여보, 그런 협박 마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짓이 고문입니다.”
 
  기자는 박홍 신부의 빈소에서 4선(選)의 자유한국당 심재철(沈在哲) 의원을 만났다. 심 의원은 1980년 당시 합수부에서 박홍 신부를 처음 만났다고 회고했다. 그는 박 신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조화(弔花)를 보낸 뒤 장례식장으로 달려왔다. 심 의원의 말이다.
 
  “1980년대 합수부 조사를 받을 때 신부님을 만났죠. 화장실에 가는데, 느닷없이 따라오셨어요. 체포된 사람을 서로 못 만나게 떼어놨었는데 공교롭게도 제가 화장실에 갔을 때 오셨어요. 박 신부님이 다짜고짜 ‘세례받을래?’ 하시기에 저도 모르게 ‘네’라는 답이 불쑥 튀어나왔죠.
 
  화장실에서 수돗물 틀어놓고 ‘비상세례’를 주신 거예요. 그리고 그때 서인석 신부님도 같이 잡혀 왔는데, 세례 증인이 돼주셨어요. 서 신부님이 당신의 묵주를 제게 주셨죠. 그렇게 천주교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됐죠.”
 
  ― 세례명은 그때 무엇으로 정했나요.
 
  “베드로. 박홍 신부님이 권하셨죠.”
 
  ― 예수님의 제1 제자가 베드로죠.
 
  “그땐 그 뜻도 모르고 제자 중의 한 분 정도로 알았어요. 합수부 화장실에서 처음 뵈었고 한참 세월이 흘러 제 결혼주례를 서주셨어요. 서강대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후에도 자주 찾아뵈었어요. 작년 말인가 올해 초인가, 병원을 찾았을 때만 해도 ‘금방 나아서 활동하겠다’고 호탕하게 말씀하셨죠. 당신은 담배를 좋아하셔서 폐 때문에 돌아가셨나 했는데 오늘 유족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폐가 아니라 콩팥 때문에 몸이 망가지셨다고 그러네요.
 
  대한민국을 위해 큰일을 하셨고, 바른길을 제시하셨으며, 그때그때 큰 목소리 내셨는데 안타깝습니다. 요즘 같은 난세(亂世)에 건강이 좋으셨다면 ‘바른길이 이 길’이라며 큰 목소리를 내셨을 텐데….”
 
 
  동갑내기 시인 金芝河와의 오랜 인연
 
1989년 3월 서강대 총장이 된 직후 《월간조선》과 인터뷰 때 찍은 박홍 신부의 모습이다. 그의 나이 48세 때였다.
  1980~90년대 민주화 열기가 뜨겁던 시절, 박홍 서강대 총장은 주로 정부와 학생 사이에서 중재하는 입장이었다. 정부 측 검경, 법무부 쪽 인사들과 만나 폭탄주를 몇 순배 돌렸다. 그는 10잔을 마셔도 끄떡없었다.
 
  2018년 9월 기자와 만난 오태순 원로 신부는 이렇게 고인을 회상했다.
 
  “늦게까지 정부 측 법무장관이나 검찰총장을 만나 얘기하면서 ‘주(主)님’을 ‘주(酒)’님으로 모시면서 (설득)해야 되니까… 왜, 술을 마시면서 우로 우로, 좌로 좌로 하는 술 있잖습니까? 그걸 다섯 번(잔), 열 번(잔)씩 마셨기 때문에 건강을 해쳤다고 (제게) 고백을 했습니다.”
 
  박홍 하면 1991년이 가장 많이 떠오른다. 그해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진압 중이던 경찰에게 맞아 숨지고, 대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분신(焚身)정국’이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었다. 김지하(金芝河) 시인이 그해 《조선일보》 5월5일자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고 기고하자, 박홍 총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일갈했다.
 
  여기서 잠깐, 김지하 시인과의 인연을 소개한다. 2018년 8월 2일 김 시인이 박홍 신부를 찾아왔다. 1941년생 동갑인 두 사람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마음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그때 박홍 신부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꿈인 줄 알고 ‘네가 지하 맞나?’고 했지. 김 시인이 ‘맞습니다. 정신이 왔다 갔다 합니까?’라고 하기에 ‘가마이(가만히) 있어 봐라. 내(나)하고 같이 식사도 하자’고 했지.”
 
  둘의 인연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지하가 쓴 희곡 〈구리 이순신〉이 인연을 맺게 했다.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동상의 허구성과 박정희 독재를 풍자했다.
 
  당시 두 사람은 서울시내 어느 허름한 중국집에서 만나 자장면을 같이 들며 시국을 토론했다. 시인이 “예수가 뭐냐”고 물었다.
 
  “예수는 묵은 인간을 새롭게 하는 행동 양식이다. 예수는 생명을 주는 사람이다.”
 
  박 신부의 답이었다.
 
  김지하는 이 말이 계기가 됐는지 가톨릭 신자가 됐다. 박홍과 김지하가 “구조적 죄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드라마를 만들어보자”고 해서 탄생한 게 희곡 〈금관의 예수〉였다.
 
  희곡에서 사제가 금관을 쓴 예수에게 “예수님, 세상이 이 꼴인데 왜 예수님은 잠만 자십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인간인 너희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너희가 만든 제도가 나를 몰아내고 있다”고 답한다.
 
  〈금관의 예수〉는 시대적으로 왜곡된 예수를 통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들춰내려 했다. 이 희곡은 드라마화되면서 서울 장안에 대단한 화제가 됐고, 중앙정보부에서는 이 드라마 주관자들을 색출・구속하려고 했다. 김지하는 도망을 다니다 박 신부에게 왔고, 박 신부는 그에게 신부 옷을 입혀 서강대 내 ‘신부의 집’에 숨겨주기도 했다.
 
 
  “북한은 농구코트에서 권투시합을 고집하는 나라”
 
  1990년대 이후 학생들의 계속된 분신과 주사파 운동권의 과격시위가 이어졌다. 그는 운동권 학생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는데, 그 배경은 동구권 몰락과 소련의 해체 등 공산주의 사상의 붕괴와 관련이 있었다. 그는 1989년 베이징대학, 1990년 모스크바대학 등 당시 공산주의 본산인 곳을 찾아가 과감하게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강론을 한 일도 있다.
 
  무엇보다 1994년 7월 “대학 내 주사파 학생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있다”는 발언이 어마어마한 논란을 가져왔다. 운동권 학생들의 박 신부를 향한 “근거를 밝혀라”는 공격과 대자보 비난, 협박 전화를 연일 받아야 했다.
 
  이후 주체사상의 제창자요, 노동당 비서 겸 범민련의 대표 황장엽(黃長燁·1923~2010)의 망명은 박홍 신부에게 자신의 소신을 굳힌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황장엽 망명 소식을 처음 접한 박홍은 1997년 《월간조선》 5월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었지요. 북한뿐 아니라 이미 붕괴한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 이런 사건은 비일비재했으니까요. 황장엽도 그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다만 그가 망명 국가를 남한으로 택했다는 것이 특징이겠지요. 인간은 실패하면서 배우는 존재입니다. 전향하는 사람도 그런 점에서 보아야겠지요. 그들은 한결같이 자기 자신의 경험 속에서 파생한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황씨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된 고유한 사상 전향의 내용이 있을 겁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세상은 권투시합에서 농구시합으로 바뀌었는데 아직도 권투경기 방식을 고집하며 농구코트에서 뛰고 있는 나라가 북한이며 그런 나라에 응원을 보낸다는 게 답답합니다.”
 
 
  마지막을 지켰던 간병인의 증언
 
선종하기 전인 10월 28일 병상에서의 박홍 신부 모습이다.
  2009년 6월 충북 음성의 ‘꽃동네 마을’에서 열렸던 ‘가톨릭 세계지도자 성령대회’를 돕다가 박홍 신부는 대회를 일주일 앞두고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당시 세계성령대회 한국준비위원장이 바로 오태순 신부였다. 오 신부의 말이다.
 
  “그때 성령대회를 같이 준비하다가 박 신부가 쓰러져서 제가 하느님께 기도했더니 ‘내가 그를 쉬게 하였다’고 응답했어요.”
 
  박 신부는 이후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받았다. 10년 가까이 투병하며 80kg에 육박하던 체중은 50kg이 채 되지 않았다.
 
  기자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빈소에서 고인 곁에서 1년 가까이 수발을 든 간병인 최광용씨를 만났다. 그도 천주교 신자인데 자신을 ‘루치아노’라고 소개했다.
 
  “작년 10월부터 간병을 해왔습니다. 당시엔 회도 드시고, 삼계탕도 드시고…, 컨디션이 좋으셨어요. 최근 5개월부터 많이 안 좋아지셨죠. 일주일에 세번씩 투석하고 당뇨 합병증까지 오니, 나중에는 손가락・발가락, 엉덩이까지 괴사가 오고… 욕창도 심하고… 의식은 최근까지 있으셨어요. 선종하시기 이틀 전에도 의식이 있었으니까요.”
 
  ―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무엇인가요.
 
  “3개월 전부터 말씀을 거의 못 하셨어요. 또 당뇨 합병증으로 눈에 백태가 끼었다고 할까, 잘 보지 못하셨고요. 음식물을 삼키지 못하고 귀도 잘 안 들리셨죠. 제가 말씀을 드리려면 한쪽 귀에 대고 큰소리로 ‘신부님!’ 하고 외쳐야 했어요.
 
  전에는 좋아지셨을 때도 있었어요. 휠체어를 타며 재활도 하셨는데, 안타깝게도 잘 안 됐어요. 재활 의지가 꺾여서 더 낙담을 하셨던 것 같아요.”
 
  ― 임종은 누가 지켜봤나요.
 
  “조카가 아산병원 의사입니다. 그분과 제가 목도했어요.”
 
  ― 마지막 모습은….
 
  “편안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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