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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한글과 고대사 연구에 빠진 90세 ‘청년’ 김세환

건강 비결, 부지런히 걸어 다니며 공부하는 것!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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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도청 技監으로 퇴임 후 한글 공부… 한글 전문서적 펴내
⊙ 중국, 고조선 역사 답사 31차례 다녀와… 《고조선 역사 유적지 답사기》 등 펴내
⊙ “술안주는 밥 안주가 제일이요, 둘째는 물 안주”

金世煥
1930년생. 연세대 전기공학과, 국민대 경영대학원 졸업 / 철도청 전기기관차 과장, 디젤기관차 과장, 철도청 부산·서울 철도차량 정비창장 역임 / 표창장(혁명과업 완수, 전기철도 개통 유공 외), 홍조 근정훈장 등 다수
  1930년생인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인 90세 ‘청년’이다. 태어나서 모국어를 잃어버렸고 공산주의 범람을 겪었으며 39년 9개월간 철도 공무원으로 근대화의 길을 닦았다. 김세환(金世煥). 충북 제천이 고향이다. 보양초등학교를 나와 교통중고등학교 전기과를 졸업했을 때가 1952년. 6·25 때는 제2 예비역(철도 요원)으로 복무했다.
 
  1953년 철도청 위탁생으로 연세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했고 4년 뒤 졸업했다. 철도청으로 돌아가 전기기관차 과장, 디젤기관차 과장, 부산 철도차량 정비창장(副技監), 서울 철도차량 정비창장(技監) 등을 역임했다. 디젤 전기기관차의 국산화와 각종 철도차량의 국산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에도 참여했다.
 
  “일반 전기동차의 국산화, 전기기관차의 국산화, 디젤 전기 및 새마을호 디젤 열차 차량의 국산화를 완성시켰어요. 정년퇴임 전에 KTX 열차의 기술 사양을 확립해놓았다는 점도 자랑이지요.”
 
  김세환씨의 진짜 ‘자랑’은 철도청을 퇴임하면서부터다. 무슨 영문에선지 한글 연구에 뛰어들었다. 여러 권의 한글 관련 전문 책에다 영역판까지 펴냈고 ‘한글 확장연구회’라는 연구단체의 회장을 지냈다.
 
  그의 연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새로운 표기 문자를 개발했다. 새로운 한글을 창제한 것이다.
 
  “국제적으로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는 외국어 문자의 표기나 발음에 좀 더 편리하고 정확하게 사용될 수 있는 인류문자를 창안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인류문자’라는 표현에 기자의 입이 벌어졌다.
 
  지난 8월 21일 서울 영등포구 영신로에서 만난 그는 자신의 문자 개발을 이렇게 설명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께서 역학(易學)과 음운학과 성리학에 근거한 천문학과 음양오행 등에 바탕을 두고 창제하신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21세기에 맞게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증명을 하다 보니 불합리한 문자는 개선・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죠.”
 
  ― 어떤 식으로요.
 
  “지금은 사라진 4자(·, ㆆ, ㆁ, ㅿ)를 부활시키고 지금의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우리말 표기와 외국어 문자 표기에 필요한 문자를 만들었어요.”
 
  ― 신(新)한글?
 
  “네, 한글 문자의 활용을 풍부하게 하려는 일환이죠. 기존 문자의 개선과 사라진 문자의 부활, 필요한 새로운 문자의 제자는 ‘바른 소리글자’의 제자 공식에 맞춰 이뤄졌어요.”
 
  ― 어떻게 연구하게 되셨나요.
 
  “일제시대 때 배우지 못하다가 광복 후 한글을 처음 배웠으니 아쉬움이 많았어요. 1991년 정년퇴직 후 본격적으로 파고들었죠. 10년 만에 《기하학적으로 분석한 훈민정음》(학문사 刊)을 펴냈고, 계속 보완하여 2007년에 《훈민정음의 신비》를 내놓았어요.
 
  그런데도 불충분함을 자책하면서 계속하여 눈만 뜨면 컴퓨터를 열고 씨름을 하고, 외출을 하면 길에서나 차 안에서나 구상을 했어요. 잠자리에 들어서도 무엇인지 잡히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밤새우기가 몇 번인지 모릅니다.”
 
 
  한글 사랑과 文字 창제
 
김세환 선생이 창안한 한글 문자. 현행 한글만으로는 표기할 수 없는 우리말과 외국어 문자 표기를 위해 고안했다.
  기자는 그가 만든 문자(‘바른 소리글자’라고 명명했다)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나 국어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해서인지 기사로 옮기기에 역부족이었다. 다만, 그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만든 과정을 소개하면 이렇다.
 
  “훈민정음에서 석연치 않은 ‘ㅇ’과 ‘ㅎ’에 관해 고민이 많았어요. 둘은 음가가 달라 발음 위치를 분리하여 ‘ㅇ’은 구강음(口腔音·입안소리)으로, ‘ㅎ’은 인후음(咽喉音·목구멍소리)으로 봤어요. 또 목구멍과 목젖을 상형으로 새로운 기본자인 ‘
 ’를 창안했어요.
 
  이 과정에서 ‘ㅇ’의 발음을 처음에는 구비음(口鼻音)으로 봤다가 나중에는 구개음(口蓋音·혀와 경구개 사이에서 나는 소리)이 타당할 것 같았어요. 그래도 마음에 썩 들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죠.
 
  친구들과 남쪽 해안의 암각화 등을 답사했는데 승용차 운전자석 뒤편에 앉게 되었죠. 백미러에 나의 얼굴이 비치기에 쭈그러진 입을 놀리며 ‘o’자 발음을 연습해보니 구비음과 구개음의 혼합일 것 같은 감이 들었어요. 집에 돌아와 고려대에서 출판한 《한국어 대사전》을 뒤져서 ‘구강음’을 찾아냈죠.
 
  이 구강음은 ‘입안에서 공기를 통하여 만들어지는 소리’잖아요. 구음(口音·입안을 통하여 몸 밖으로 나오는 소리)과 비음(鼻音·코 안을 울리면서 내는 ㄴ·ㅁ·ㅇ 소리)이 가미되는 것으로 설명이 되어 있더군요. ‘o’자의 발음은 바로 이거야!라고 무릎을 치며 기뻐했어요. 그래서 ‘o’자를 훈민정음의 후성(喉聲·목소리)에서 분리하여 구강음으로 하고, 후성으로 창안해놓은 ‘
 ’자는 구강음으로 돌리고, 후성은 인후음(咽喉音)으로 호칭을 바꾸고 ‘
 ’의 4자를 창안하여 정리했죠. 그때가 2016년 3월 21일이었어요.”
 
  한국어정보학회 회장인 대진대 정달영 교수는 김세환 선생의 ‘바른 소리글자’ 연구에 이런 평가를 내렸다.
 
  “아주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글도 세계 여러 나라 말소리를 현재 발음에 가깝게 정확히 표기하려면 현재의 24자만으로는 실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하면 한글도 종래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현행 외래어 표기법과 같은 불합리한 점이 있다면 과감하게 개선하여 현지 발음에 가깝도록 표기할 수 있는 문자 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김일제 묘를 찾은 씁쓸한 기억
 
1973년 6월 서울 청량리~충북 제천 간 155.2㎞ 중앙선 전철이 개통됐을 때 철도청 공무원 김세환 선생 모습이다. 중앙선 개통으로 운행시간이 2시간 단축됐다.
  김세환 선생은 한글 사랑에만 빠진 것이 아니다. 고대사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다. 고령에도 10여 년간 중국의 중원과 고조선 땅을 밟았다. 무려 31차례나 현지 고적을 직접 둘러보았다.
 
  2013년 출간한 《고조선 역사유적지 답사기》(도서출판 백암 刊)는 4×6배판 사이즈에 사진 컷만 4000컷에 이른다. 전체 800쪽. 2017년에는 추가 답사를 통해 《21세기 고조선 역사유적지 답사기》(도서출판 백암 刊)를 펴냈다. 또 일본, 베트남,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등지를 둘러보고 《동남아 역사유적지 답사기》도 썼다.
 
  기자는 그의 순례기 중에서 김씨(金氏) 성의 시조로 알려진 김일제(金日磾·BC 134~BC 86)의 묘를 찾아갔을 때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김일제 묘는 시안(西安)에서 약 40km 떨어진 셴양시(咸陽市) 싱핑현(興平縣)에 있었다고 한다.
 
  그의 회고다.
 
  “김일제 묘는 무릉(茂陵·전한 7대 황제인 武帝의 능) 근처에 배총(陪塚·한 무덤의 옆에 딸린 조그마한 종속적 무덤)으로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았어요. 도중에 진짜 토굴 속에 사는 가정도 보았죠. 이 토굴이야말로 만년 무보수로 살 수 있는 주택이잖아요.
 
  무릉의 동쪽에 곽거병(霍去病)의 배총이 있고 그 동쪽에 김일제 묘가 있었어요. 묘 앞에 서니 고개가 숙어졌어요. 김씨의 시조이니 감회가 깊을 수밖에요.
 
  김일제는 자가 옹숙(翁叔)이죠. 그는 흉노(匈奴)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 흉노가 BC 121년에 한나라와 싸운 기련산 전투에서 곽거병에게 패하고 허시(河西)에서 항복했다고 합니다.
 
  김일제는 장안성(長安城)에 잡혀 와 내원(內苑)에서 말을 기르는 일을 하였는데 다른 사람보다 근신하고 부지런했다고 해요. 말을 장대하고 살찌게 키웠던 거지요. 그래서 한무제가 시중(侍中)으로 발탁하고 ‘김씨’를 사성(賜姓)했대요.
 
  김일제는 이후 부마도위로 승진하고, 이어 반도(叛徒)를 사살한 공으로 투후(秺候)로 봉해졌다고 합니다. 그가 죽자 한(漢)의 소제(昭帝)는 군례(軍禮)로 장안에서 무릉까지 호송하여 무릉에 배총했다고 기록돼 있어요. 신라 김씨와 김해 김씨가 휴도왕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지요.
 
  현지의 무릉박물관을 돌아보니 곽거병이 흉노국을 멸망시키고 김일제와 식솔들을 노예로 삼은 것이며, 흉노족을 말이 짓밟아 뭉개는 ‘마답흉노(馬踏匈奴) 석각상’ 등을 보니 울분이 터졌어요.”
 
  ― 흉노 태자이자 김씨 시조를 폄훼하고 있다는 얘기군요.
 
  “곽거병의 묘 정상에 있는 정자에 올라가려고 하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요. 그러나 어떤 짓을 해놓았는지 보기 위해 올라가 보니,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김일제의 묘가 더욱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치우천황도 中國 조상이라고?
 
  ― 30여 차례나 중국 내 고조선 흔적을 돌아본 이유가 무엇인가요.
 
  “사전지식 없이 현지에 가면 의문이 생겨 또 가야 합니다. 그래서 갔던 곳을 또 가게 되죠. 몇 년을 그렇게 다니다 보니 그동안의 변화를 감지하게 되고, 중국의 빠른 변화도 느끼게 되었죠. 무슨 ‘공정(工程)’이다, 하며 특히 역사를 왜곡하려고 하니 고통스러웠지요. 다만, 어떻게든 유물을 손상시키지 말고 잘 보존하여 줄 것을 바랄 뿐이죠.”
 
  “둥베이삼성(東北三省)과 만주(滿洲) 일대 등 중국 고조선 지역을 찾으니 고산준령에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농작물이 무성한 전답을 보며 욕심도 나고 비위도 상했다”고 한다. 지린성(吉林省)·랴오닝성(遼寧省)·헤이룽장성(黑龍江省) 및 내몽고자치구의 동부 지역을 여러 차례 찾아갔고 현지에서 관련 고서(古書)도 구입했다. ‘이곳이 우리 옛 조상들이 살던 땅이라는 생각을 하며 언제나 회복할 수 있을까’ 하는 환상에 빠지기도 했단다.
 
  ― 이른바 ‘동북공정’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나요.
 
  “중국 이곳저곳을 다니는 동안에 자기네 화하족(華夏族) 역사가 잘못됐다며 시정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제 와서 중국 역사는 하우(夏禹)가 시조가 아니고 신농(神農) 염제(炎帝)와 헌원(軒轅) 황제(皇帝)의 자손이라고 선전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찾는 것과 같은 상황인 것이죠.
 
  웃기는 것은 허베이성(河北省) 줘루현(涿鹿縣)에 ‘삼조당(三祖堂)’이라는 거대한 사당을 지어놓고 염제와 황제, 그리고 화하족이 그간 원수로 여겨오던 치우제(蚩尤帝)까지 세 분의 소상(塑像)을 모셔놓고 화하족 조상이 ‘삼조(三祖)’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족(漢族)의 조상인 황제를 중심으로 우리 조상인 동이족(東夷族)의 시조 염제와 동이족이면서 묘족의 시조가 된 치우제 등을 합쳐 ‘중화(中華) 삼조’라고 부른다는 얘기였다. 염제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벼 이삭을 손에 쥔 모습으로 출현해 이 신이 동이족 민족들에게 숭배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치우제는 환웅의 14세(世) 치우천황을 말한다. 중국이 한(韓)민족의 뿌리까지 중국의 조상인 것처럼 만든다는 것이다. 계속된 그의 이야기다.
 
  “염제와 황제의 치적 중 치우를 정벌한 것을 제일의 자랑거리로 삼고 있었고, 치우는 가장 원수의 악한으로 중국 사서(史書)에서 치부해왔어요. 그러던 것이 이제는 삼조당을 지어놓고 ‘염, 황, 치’의 자손이라고 삼조를 칭송하니 참으로 그 진의를 알 수 없어요.”
 
  ― 동이족 비중이 중국 역사에서 크다는 의미겠지요.
 
  “아마 중화민족은 치우 후손, 즉 동이족의 형성 비중이 크다고 느꼈을 겁니다. 그래서 소수민족을 다민족 용해로(鎔解爐)에 흡수하여 같은 할아버지 자손으로 만들려는 것이겠지요. 우리도 고대사를 국가 차원에서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을 느꼈습니다.”
 
동북공정과 歸根苑
 
  三祖堂 정문인 歸根苑을 없애다!
 
중국 당국은 삼조당 정문에 써 있는 ‘歸根苑’(사진 위)을 없애고 간판 없는 문(사진 아래)으로 만들어버렸다.
  김세환 선생은 삼조당(허베이성 줘루현 소재)을 여러 차례 찾아갔다고 한다.
 
  “2006년 10월에 갈 때만 해도 건재했는데 2009년에 갔더니 삼조당 정문 명칭인 ‘歸根苑(귀근원)’을 없애버렸더군요. ‘귀근’은 뿌리로 돌아간다는 의미죠. 동이족 입장에서 보면 자연스럽지만, 화하족 입장에서 보면 ‘귀근’을 쓰기가 어쩌면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라 느꼈을지 몰라요. 내심 언젠가는 명칭을 바꿀 것으로 예상은 했는데, 얼마나 수치감을 느꼈으면 간판 없는 문으로 바꾸었을까요.”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소위 5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화하족이 지금에 와서 조상이 돌아오셨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中 동북 지역의 홀수 문화들
 
  김세환 선생은 몇 해 전 중국 동북 지역에 위치한 랴오허(遼河) 유역을 답사한 적이 있다. 그곳은 랴오닝성의 우하량(牛河梁) 홍산(紅山) 문화유적지라 불리는 곳으로 7000~8000년이 넘는 세월의 유적이 묻혀 있다고 한다. 바로 환인, 환웅을 거쳐 단군 시대로 이어지던 터전이다. 그의 말이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면 우리 민족(東夷系)이 숭앙하는 기수(奇數·홀수) 문화가 담겨 있어요. 즉 출토된 용기류는 반수 이상이 삼족(三族)이고, 석등 역시 삼족이 아닌 것을 보지 못했어요. 탑 역시 5층, 9층, 13층이 대부분이죠. 깃대 꽂은 수나 계단 수도 3, 5, 7, 9입니다. 기수 문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딱 정해져 있어요. 동이족이 거주한 치우 통치 지역과 동북아 만주 일원, 내몽고, 발해 지역인 연해주, 우리나라 지역 등이죠.
 
  반면 화하족의 근거 지역에서는 사족(四足) 용기와 8층, 12층 탑을 볼 수 있어요. 제일 흔한 것은 집에 달아놓은 농등(籠燈)의 수가 거의 우수(偶數·짝수)입니다. 중국인들은 또 2와 8이라는 숫자를 좋아해요.”
 
  ― 문화가 서로 다른데 동북공정으로 묶을 수 있을까요.
 
  “중국 정부가 랴오허 지역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하려고 하니 형이하학적으로 조건에 맞지 않아 고민하고 있다고 봐요. 공연히 자극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잘 지켜봐야 해요. 현지 발굴의 역사적인 유적을 확인해놓으면 됩니다. 혹시나 변조 우려는 있으나 유물은 불변이잖아요.”
 
  김세환 선생은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에는 상고사(上古史)가 없다. 우리나라가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색 인종인 이족(夷族)은 신생아에게 몽고점이 있잖아요. 이족 반점의 비율을 보면 우리 한민족이 97%, 중화민족이 86%, 일본 민족이 81%, 미주(美州) 인디언이 62%라는 통계가 있어요. 이는 동이족이 순도 높은 민족임을 입증하는 것이죠. 하여간 동이족 유적의 계승이나 혈통상의 정통성을 정립해야 합니다.”
 
 
  술과 건강 비결
 
1985년에 찍은 가족사진. 앞줄 왼쪽부터 딸 시정, 김세환 선생, 손녀딸 보은, 부인 전영숙, 4남 시홍. 뒷줄 왼쪽부터 황보은선(첫째 며느리), 장남 시민, 3남 시우, 2남 시만, 한희숙(둘째 며느리).
  선생은 슬하에 4남 1녀를 뒀다. 부인 전영숙(全英淑)씨는 2002년 작고했다. 내년쯤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제천으로 귀거래(歸去來)할 생각이다. 지금까지 모은 자료와 책들은 박물관에 기증할 생각도 있다.
 
  그는 젊은 시절에도 그랬지만 요즘도 매일 술을 마신다. 주로 막걸리. “술안주는 밥 안주가 제일이요, 둘째는 물 안주”라고 말한다. 이는 배(倍)의 술을 마실 수가 있고, 술의 농도를 희석하므로 덜 취한다는 의미다.
 
  “술 마시는 요령은 처음에는 알코올 도수가 낮은 맥주 등을 한 컵 마시면서 시작하죠. 소주인 경우는 한잔을 세 번에 나눠 마십니다. ‘지금 술이 들어간다’고 위장에 예고하는 절차죠.”
 
  또 그는 술을 마실 때 철저히 빈 병을 관리한다. 이유는 몇 병을 마셨다는 것을 동석자에게 인지시켜 술을 덜 마시게 만들기 위함이다.
 
  “술과 관련한 최후의 방편은 36계지요. 술 취해 자력으로 집에 못 가거나 실수할 것 같으면 도망을 갑니다. 평생 술로 단련된 체질이라 거의 매일 마시는데, 혼자서 마시는 법이 없어요. 심지어 해장국도 안 먹고 해장술도 안 마십니다.”
 
  그는 취해서 집으로 돌아가면 아내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이불을 잘 덮어 달라”고.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자면 땀을 흠뻑 흘리는데 이튿날 몸이 거뜬해져 다음 날 일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내가 사별해 지금은 이불을 덮어줄 사람이 없다. 그는 자신의 건강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하루 밥 세 끼 잘 먹고 적당량의 술을 마시고 친구들과 즐기고, 부지런히 걸어 다니며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리죠. 친구 따라 등산도 하고 역사 공부도 하고 사적 답사도 하고 지관 따라 산도 다니며 풍수도 배웁니다. 요즘엔 컴퓨터 배우기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육체적・정신적으로 신경을 쓰지 않고 즐겁게 지내는, 꽉 차 있는 하루의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분주하게 지내죠. 이것이 요즘 내 건강 지속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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