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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이어령, 故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에 답하다 (1)

“神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無知의 知), 이 말이 정답”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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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 회장, 죽음 앞에 富나 名譽도 다 사라진다는 생각에 죽음 상당히 준비”
⊙ “인간은 神 앞에 누구나 평등해. 누구나 죽기 때문”
⊙ “神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신이) 죽었다고 해. 神이 살아 있으니 죽었다는 것”
⊙ “세상의 논리·힘으로 안 되는 것이 있다고 느끼는 순간, 종교적 물음 생겨”

이어령
1933년생. 서울대 국문학과·同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문화부 장관 역임
이어령 前 문화부 장관. 촬영 이동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성(知性)인 이어령(李御寧·87)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평생을 화제의 중심에서 살아온 분석과 통찰의 거인(巨人)이다. 1956년 5월 6일 《한국일보》에 평론 〈우상과 파괴〉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지 반세기를 훨씬 지난 지금도 그는 ‘지(知)의 최전선’에서 문제적 화두를 세상에 던지고 있다.
 
  이 명예교수 스스로 “나는 우물을 파는 사람이지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문학이든 신앙이든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가지고 우물을 파듯이 판다. 물이 나오면 다시 새로운 우물을 파기 위해 다른 땅을 찾아 떠난다.”
 
  기자는 지난 4월부터 이 교수를 괴롭혔다. 1987년 10월 초 삼성 창업주 고(故) 이병철(李秉喆·1909~1987) 회장이 천주교 정의채(鄭義采) 몬시뇰에게 전한 24가지 신(神)과 죽음에 관한 질문에 답해줄 것을 요청했다. 허락은 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여러 차례 미뤄졌다. 인터뷰 날짜를 하루 앞두고 무산된 적도 있었다.
 
  기자는 가끔 죽음을 앞둔 이 회장이 목말라했던 영혼의 갈증을 떠올려보았다. 이 교수가 언젠가는 조물주의 현현(顯現)하심을 밀교의 형식이 아닌 약초의 언어로 우물을 파주리라 믿었다. 결국 지난 7월 10일 서울 평창동 그의 자택에서 만남이 이뤄졌다. 그는 암 투병 중이다. 그러나 쉬지 않고 새로운 문명의 키워드를 찾고 패러다임을 예언하기 위해 지금도 마르지 않는 창조의 우물을 파고 있다. 그 깊이를 범인(凡人)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 뵙고 싶었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대해 지혜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노인이 할 수 있는 말이 어디 죽음 외에 딴것이 있겄소(있겠소)?”
 
  이 말이 이 교수의 입에서 나온 첫 운(韻)이었다.
 
  “이병철 회장께서 천주교를 대표할만한 분에게 묻고 명망 높으신 정 몬시뇰께서 답변을 맡기신 일인데 어찌 내가 감히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있나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지. 그러나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입을 여는 건데, 그건 아인슈타인에게 ‘죽음이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더 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는 거죠. 질문한 기자는 E=mc2과 같은 어마어마한 죽음의 공식을 기대했겠죠. 하지만 막상 돌아온 답은 물리학자가 아닌 모차르트의 한 애호가, 음악을 듣고 감동할 줄 아는 영혼을 지니고 늙어가는 한 인간의 말이었던 거죠. 이병철 회장의 죽음이나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도 똑같다고 할 수 있어요. 어마어마한 신전이 아니라 빈자의 제단을 밝히는 작은 촛불 앞에 기도하는 농부와 같은 존재로서 무엇인가 하나님과 죽음 이야기를 하라고 한다면 기꺼이 무릎을 맞대고 생각을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빈자의 제단에서 나누고픈 이야기
 
말년의 이병철 회장(앞). 이 회장은 세상을 떠나기 전 神과 영혼에 대한 24가지 질문을 던졌다. 사진=삼성그룹 제공
  바로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찾아온 것인데 기자의 속마음을 미리 넘겨짚은 것일까. 묻기도 전에 질문자보다 한발 앞서 노 교수는 말을 이어갔다.
 
  “이병철 회장님이 세상을 떠나신 게 서울올림픽 직전이었으니까 햇수로 치면 불과 30여 년 전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시대 구분과 그 특성으로 보면 20세기와 21세기의 큰 차이가 있어요. 알기 쉽게 말하면 당시 유행하던 삼대 거짓말을 떠올려보면 알아요. ‘처녀가 시집 안 간다’ ‘노인이 빨리 죽어야 한다’ 그리고 ‘장사하는 사람이 밑지고 판다’는 말이지. 그런데 그 거짓말이 요즘 시대로 들어와서 모두가 참말로 바뀌었다는 거죠. 처녀는 정말 시집을 안 가고 저출산 시대를 맞게 되고 노인들은 생명연장을 거부하고 빨리 죽기를 희망해서 존엄사법이 제정됐지요. 법이 시행된 지 일 년도 안 되어 신청자 수가 11만 명을 넘었다고 해요. 고령화 사회의 문제를 들어낸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이 회장이 몰랐던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증후군이 가시화하게 됩니다. 여기에 ‘밑지고 판다’는 말까지 진짜가 되어버린 바겐세일 바람이 불어옵니다. 크리스 앤더슨이 예언한 디지털 경제의 ‘무료 시대’(free price)와 만나게 됐다는 겁니다.”
 
  이병철 회장의 시대에 몰랐던 저출산, 고령화 사회와 이 교수의 지론인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의 새로운 비즈니스 환경이 도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히 생사(生死)관이나 신에 대한 담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어느새 이야기는 기대한 대로 출생과 사망의 문제로 들어간다.
 
  “인간은 장례식을 올리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하지요. 네안데르탈인이 원숭이가 아니라 인류 편에 속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무덤에서 꽃가루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지요. 어느 원숭이가 매장을 하고 꽃으로 장례를 올리겠어요.
 
  또 한편 인간은 혼자서는 애를 낳지 못하는 유일한 동물이라고도 합니다. 기원전인데 이미 소크라테스의 어머니가 산파였고 구약 성경에도 산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몇천 년 전부터 내려온 인간만의 출산문화와 장례문화가 몇십 년 사이에 붕괴하고 있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애를 낳는 것과 장례를 지내는 일이 모두 집 안이 아닌 병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제 우리의 일생은 병원에서 시작하여 병원에서 끝나는, 그러니까 분만실에서 영안실로 직행하는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도 더는, 기업인은 고사하고 지식인들도 이 빅퀘스천(big question)에 침묵하고 있는 것 같아요.”
 
 
  성당이 아니라 대학강단으로 옮겨진 죽음의 담론
 
젊은 시절 이어령. 그는 교수이자 칼럼리스트,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지 모를 정도로 ‘知의 최전선’에서 창조의 우물을 긷고 있다.
  우리 삶에서 이병철 회장의 24개 질문이 왜 중요한지, 구체적인 생각과 느낌을 이 교수께 물어보았다.
 
  “생각과 느낌이 아니라 확신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군요. 24개의 질문에 답하려면 역시 성당으로 향하기 전에 대학강단이나 실험실로 옮겨가야 되겠구나 하는 작은 믿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확신 말입니다. 당시만 해도 당연히 죽음에 관한 질문은 성직자의 몫이었잖아요. 지금도 장례식은 모든 종교계에서 관장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회장이 세상을 떠날 무렵에 죽음학(thanatology)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새 학문이 생겨나서 대학 강의실을 젊은이들로 가득 채웁니다. 연구실이나 실험실에서도 죽음학이 열을 올리고 있어요. 왜 셸리 케이건(Shelly Kagan) 교수 있잖아요. 예일대학에서 20여 년 동안 ‘죽음’에 대한 연속 강의로 화제가 된 철학자 말이에요. 그 강의가 책으로 나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까 아마 이병철 회장이 지금 살아 계시다면 틀림없이 그 책을 읽으셨거나 TED에서 강연한 영상을 보셨을 겁니다.
 
  그러면 24개 질문의 태반은 풀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시한부 생을 살고 있던 젊은이가 케이건 교수에게 달려가 그 수업을 들으며 죽어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어요.”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자 어쩌면 이 통찰의 거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무의식중에 답변을 준비해왔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배추흰나비 날개의 빛깔처럼 티끌이 없어 보였다. 착각인지 몰라도….
 
  “그런데 서양의 죽음학은 죽음에 대하여 신부님보다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는 있어도 죽음과 직면한 사람에게 그 공포와 불안을 풀어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죽음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퀴블러 로스(Kubler Ross)는 200명의 임종 시의 환자 인터뷰를 통해 ‘부정’ ‘노여움’ ‘거래(협상)’ ‘우울’ ‘수용’의 5단계로 죽음의 과정을 정리했어요. 그리고 그들이 죽기 전에 무엇을 소원하는지도 알아냅니다. 죽기 전에 어머니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어봤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그걸 주는 병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자신의 죽음은 결코 행복한 죽음으로 마친 것이 아니었다는 슬픈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죽음은 어떤 경우에도 보편화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옛날 제왕(帝王)들이 몇천, 몇만 명과 순장을 한들 자기 죽음과 무슨 관련이 있어요? 제왕의 무덤에다 말(馬)이나 사람, 부장품을 넣어봐야 후대에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었을 뿐 사자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않았던 것이지요. 피라미드가 그렇고 우리의 신라 천마총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자궁(womb)’에서 ‘무덤(tomb)’까지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 전시된 이어령 교수의 열 손가락 도자기. 손이 작고 마디가 두꺼워 보인다.
  ― 죽음학도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인가요.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바람에 성급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러자 이 교수가 놀라운 논리의 반전을 보여준다.)
 
  “죽음학의 다나톨로지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의 죽음의 여신인 다나토스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학문의 이름부터 한계를 나타내는데, 생이 빠져 있어요. 한국식으로 말하면 사생학(死生學)이라고 해야 옳지요. 우리에게 죽음은 반드시 생과 짝을 이룹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고 ‘죽자 살자’고 한자로 해도 ‘사생결단’입니다. 생사가 붙어다닙니다.
 
  이 말은 곧 죽음학과 태생학(발생학)은 하나의 개념으로 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죽음을 이야기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알아봐야 합니다. 우리 모두 독방(자궁)에서 태어났잖아요. 쌍둥이는 예외지만 거기서 먹을 것 걱정해요, 입을 것 걱정해요. 10개월을 살다가 나올 때 이제부터 고생길이니까 울고 나오듯이, 출생과 함께 사망이 함께 온 것이잖아요. 안 태어났다면 죽음도 없어. 그래서 그리스에서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고 했거든. 서양인들은 인생을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라고 했는데 아니에요. 그래서 서양인들이 죽음이 뭔지 잘 모른다는 거예요. ‘태내(胎內) 자궁(womb)에서 무덤(tomb)까지’라고 해야지요. 우연히도 알파벳 W와 T의 한 글자 차이처럼 생명과 죽음이 손등과 손바닥처럼 하나로 붙어 있는 것이지요. 한국인은 태내에서 태어나 엄마의 유방이 자궁이 되는 거야. 탯줄이 끊어져도 젖줄은 남아 있는 거지.
 
  서양인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0살로 치지만 우리는 한 살로 치잖아. (서양의) 아무리 유명한 철학자나 신학자들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태내 10개월을 모릅니다.”
 
 
  36억 년의 세월을 태내 10개월 동안 되풀이
 
  ― 엄마 배 속에서 열 달을 채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태내는 지구의 생명체가 싹이 튼, 헤켈(Ernst Haeckel·독일의 생물학자·철학자)이 얘기했던 것처럼, 지구 생명체가 처음 출현한 36억 년의 세월을 10개월 동안 되풀이하는 공간이거든. 이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에요. 헤켈이 소위 말한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하니까.”
 
  이어령 교수는 헤켈이 그러했듯 한 생명이 수정란에서부터 태고적 조상(祖上)의 진화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 말이 어려우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생명체가 처음에는 바다밖에 더 있었겠어요? 육지에는 처음 어떤 생명체도 없었다는 사실은 직접 화석(化石)으로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해상동물이 뭍으로 올라와 육상동물이 된 것이니 인류 최초의 생명은 ‘피카이아’ 같은 척색 물고기의 선조들에서 온 것이겠죠. 생각해봐요. 엄마 배 속에서 폐로 호흡을 했을까요. 아니잖아요. 양수 속에서 물고기처럼 아가미 호흡을 한 거죠. 태어나자마자 비로소 폐로 호흡을 한 것입니다. 진화론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해상동물이 육상동물이 되는 것인데 우리는 그 극적인 순간을 어머니의 자궁에서 탄생 과정을 통해 재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태어나 죽는 그 시간보다 엄마 배 속에서 우리도 모르게 10개월 살았던 시간이 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긴 36억 년의 영원에 가까운 세월이었다고 말이지요. 배 속 탄생 이전의 그 세상을 모르면 신의 영역도 몰라. 태내 공간이야말로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이병철 회장은 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라고, 그리고 사후의 문제를 물으셨는데, 그 해답으로 태생학에서 그 답변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저승과 이승 사이에 태내의 ‘그승’이 있다고 합니다. 태어나기 전의 그 무(無)의 세상을 알면 죽고 나서의 그 무의 저승을 짐작하게 된다고요.”
 
 
  저승과 이승 사이에 ‘그승’
 
2001년 9월 7일 이어령 석좌교수가 이화여대 국제교육관 대회의장에서 고별 강연을 하고 있다.
  이어령 교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생명과 죽음의 문제를 종교적인 차원에 앞서 사망학과 태생학(발생학) 같은 세속적, 역사적 과학의 언어로부터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육과 영, 속과 성의 경계 허물기다.
 
  “이병철 회장의 24개의 질문을 보면 종교문제지만 오히려 고분자 생물학이나 양자컴퓨터, 그리고 인지과학 분야의 과학자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적합하고 유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알파고를 개발한 하사비스 팀에는 처음부터 신학자(목사)가 끼어있었고 구글에 회사를 넘길 때도 이 신학자에게 기술개발위원회 책임을 맡기는 것을 조건으로 추진했던 거니까. 이렇게 과학의 신기술이 개발될수록 생명윤리와 종교문제에 부닥치게 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알았던 신학과 과학이 점점 좁혀지고 급기야는 그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게 된다는 겁니다. 당연히 생(生)과 사(死)의 어두운 그 벽도 말이지요.”
 
  ― 오늘날 종교적, 과학적 담론이 비슷해졌어요. 과학이 종교를 증명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죠. 생명과 비(非)생명의 경계도 애매해지고 희박해졌어요. 아주 쉬운 것으로 바이러스(virus)를 보세요. 바이러스는 산 거요? 죽은 거요? 무생물과 똑같지만 그 안에 정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생체의 세포에 들어가 합성하면 그때부터 활성화하여 증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생명은 죽음과 움직이기 시작하잖아요. ‘정보(情報)’만 있는 놈이라고….”
 
 
  생명이 정보, 정보가 생명
 
1975년 10월 6일 이어령 교수가 내한한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유전자 정보만 가지고 있으면 몇십만 년 전에 죽은 공룡을 재생할 수 있는 쥬라기공원 같은 세상(공룡의 피를 빤, 호박 속의 갇힌 모기에서 피를 뽑아 공룡의 DNA를 추출할 수 있다는 말이다-편집자 註)이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실제로 한국의 농진청에 가봐도 천 년 전 씨앗으로 연꽃을 피워낸 것이 있어요. 생명은 물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물질 위에 기록된 일종의 언어 기호(記號)의 의미에서 생겨난 것이란 말이지요. 제 말이 어려운가요? 아니죠. 벌써 물리학과 생물학이 그 경계를 넘어 고분자 생물학이 바로 우리 곁에 와 있잖아요. 우리 몸속의 유전자 지도도 사실은 책이라고 해야 옳아요. 허허, 내 몸이 문자로 쓰인 한 권의 책이라는 말입니다. 책이 불타 없어져도 그 재(물질)를 모아 다시 문자를 재생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다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곧 내 이야기(생명)가 되살아난다는 겁니다. 그 기호의 의미가 뭐겠습니까.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의 그 로고스입니다. 진화론이 오늘의 고분자 생물학의 발전으로 신학이 되는 순간이지요. 이게 바로 생명의 부활인 것이지요. 지금 마지막 책으로 쓰고 있지만요. 십자가의 그 기호(정보의 메시지)가 바로 그 부활의 텍스트라는 것입니다. 외람되지만 저는 한국에서 제일 처음 기호학회를 창설한 사람입니다. 기호가 그러니까, 그 정보가 생명이라는 것을 주장했던 셈이지요. 그래서 마르크스 이후 산업문명의 ‘물질 자본’이 이제 정보화시대에서 ‘생명의 자본’으로 이동하는 생명화 시대가 온다고 말해왔던 겁니다. 어렵지만 중요한 대목이니 조금만 인내심 있게 들어주세요.
 
  지금 일부 제조업이나 비즈니스 업계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인공지능과 같은 신기술은 옛날과 같은 산업계보다 정보 분야, 생명 분야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전문 용어로는 사이버 피지컬 시스템(Cyber Physical System), 바로 저 자신이 만들어 쓴 디지로그와 똑같은 용어입니다. 이병철 회장이 살았던 그 시대의 주류 기술이 ABC(Atomic, Biological, Chemical) 우리말로는 화생방(化-生-放)이었다면 지금은 GNR(Genetics, Nanotechnology, and Robotics) 시대입니다. 유전공학, 나노기술, 로봇공학의 3가지 기술혁명만 있으면 생명을 만들 수 있다고 하잖아요?”
 
  ― 그런데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었는데 그런 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죽음조차 차별화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신학이, 종교가 진짜 제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에는 어떤 정치제도나 사회구조, 그리고 발전한 경제, 어느 면에서도 성공을 못 했어요. 역설적으로 유일하게 ‘죽음’만이 그것을 성공시켰지요. 죽음 앞에서는 예외 없이 누구나 평등합니다. 제왕도 미천한 걸인도 죽기 때문이죠.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하지만 죽음의 세계만은 공평하고 엄격합니다.
 
  2200여 년 전 중국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아 영생을 꾀하려 했지만,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현대 과학기술의 힘을 빌려 ‘영생의 꿈이 가능하다고 믿는다’고 했잖아요. 60대 후반인 그는 오래전부터 스스로 영생을 위한 식단을 짰다고 해요. 그의 영생 계획은 3단계입니다. 1단계는 실천, 그리고 생명공학 기술이 유전체를 재설계할 수 있는 2단계, 분자 나노기술이 인체 장기와 조직을 재생할 수 있는 3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죠.
 
  그는 3단계 도달 시기를 20~25년 후로 보는데 그의 나이 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죠. 심지어 그는 하루 100알의 영양보충제를 먹는다고 해요. 알약을 복용하는 데 드는 비용은 하루에 수천 달러, 연간으로 셈하면 100만 달러(약 11억원)가 족히 넘지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그 죽음의 의미를 알려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 사람, 밥맛 없어’ 하는 사람과 결혼하잖아요”
 
  ―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을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 삶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물음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돌아가시기 직전 심오한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방금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어디로 돌아가셨나요. 벌써 한국말 속에 그 해답의 단서를 품고 있네요. 돌아가시기 전, 그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반도체를 일본에서 들여온 분이 아닌가요. 그걸 누구한테 물어보았겠어요? 반도체를 만드는 기술자나 기업인에게 물었겠지요. 그런데 죽음의 문제는 누구에게 묻지요. 신부, 목사, 스님과 같은 분들이겠지요. 이병철 회장이 죽음에 대해 질문하는 순간, 기업인이 어떻게 종교인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 자체가 해답이 되는 것이라고 봐요. 질문하는 순간, 이미 이 회장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고 이 달라지게 하는 것이 ‘죽음의 힘’이고 죽음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니까요.
 
  내가 세례를 받았다는 소문이 나자 많은 사람이 여러 질문을 해왔어요. 그중에는 ‘예수쟁이 된 기분이 어떻습니까’ 하고 야유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거꾸로 되물었어요. ‘욕쟁이 된 기분이 어떠냐’고요.
 
  당신이 신을 욕하는 순간 이미 신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고 있는 것이라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증거니까요. 그 사람은 모르면 몰라도 지금쯤 기독교인이나 혹은 다른 종교를 믿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뒤에 보면 대개 서로 아웅다웅 싸우고 ‘쟤, 밥맛 없어’라고 욕하던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神이 산 것을 알았으니, 죽었다고 하지”
 
니체가 겪은 토리노 광장에서의 에피소드를 영화화한 〈토리노의 말〉 포스터.
  ― 맞아요. 제가 그런 것 같습니다. (웃음)
 
  “19세기 때 신을 제일 잘 안 사람이 바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였다고 생각해요. 신이 살아 있는 것을 알았으니까 신이 죽었다고 하지, 안 그래요?”
 
  ― 맞아요.
 
  “신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신이) 죽었다고 부정할 수 있겠어요. 얼마나 치열하게 갈구했으면 ‘신이 죽었다’고 했겠어요. 니체의 글을 읽어보세요. 초인(超人)이 바로 예수죠.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이 바로 ‘예수’였기 때문이지요.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니체가 미치기 직전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봐요.”
 
  이 교수는 그 유명한 ‘토리노의 말’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가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지낼 때입니다. 어느 날 기숙하던 방에서 나와 편지를 부치려고 토리노의 광장을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던 것이지요. 그때 마부가 힘에 겨워 마차를 끌지 못하고 서 있는 말을 사정없이 채찍으로 내리치는 광경을 봅니다. 니체는 그 노쇠한 말에게 달려가 목을 껴안고 채찍을 막아서며 ‘때리지 말라’고 울며 소리친 겁니다. 결국 광장 한복판 사람들이 환시(環視)하는 자리에서 니체는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지요. 그 뒤 그는 미친 상태로 영영 다시는 성한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죽고 말았어요. 토리노의 광장에서 미쳐 더 이상 인간이기를 그만 둔 그 니체의 모습이 누구와 닮은 것 같은가요? 토리노의 광장을 골고다의 언덕으로 옮겨보세요. 말목을 끌어안고 대신 채찍을 맞으며 눈물을 흘렸던 그와 십자가에 매달려 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리던 한 사나이의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누가 보입니까. 다만 예수님은 죽음을 부활로 넘어섰지만 니체는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미쳐버린 겁니다.”
 
 
  토리노 광장과 골고다 언덕
 
  ― 니체는 죽음을 직면하지 못했지만, 죽음을 앞두고 이병철 회장은 삶과 영혼을 진지하게 탐색할 기회를 갖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종교와 관계없이 사람이면 누구나 죽음에 직면했을 때 착해집니다. 《논어》에 나오는 증자의 말처럼 ‘조지장사’(鳥之將死其鳴也悲 人之將死其言也善·새가 죽을 때 그 울음소리가 슬픈 것과 같이, 사람이 죽을 때 본성으로 돌아가 착해진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거꾸로 죽음이 찾아오면 더 집착하며 매달리는 사람도 있어요. 노추(老醜)야. 내 돈, 내 재산, 내 명예 같은 세속적 탐욕을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하고 매달리며 죽음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대개 신을 믿지 않다가도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까지 죽음이 생명과 다른 곳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아…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함께 가지고 있었던 거구나’ 하고 말이죠.
 
  역설적으로 생명이 뭔지 몰랐는데, 죽는 순간 생명이란 게 뭔가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지. 죽음의 발견이 곧 생명의 발견이었던 거야. 태어나서 빛만 본 사람은 어둠을 모르는 게 아니라, 빛도 모르는 거예요.”
 
  ― 죽는다고 하는 순간에 생명을 느낀다….
 
  “‘당신 암이야’ 라고 선고를 받는 순간 갑자기 공기 맛이 달라져요. 방금 전까지 숨 쉬던 그 공기가 아닌 게지. 어제 보던 세상의 빛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아무리 하찮은 것들이라 해도 저것들을 이제 더는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아주 다르게 보인다는 겁니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사형수가 집행장에 갈 때 한 번은 땅을, 한 번은 하늘을 본다고 하지 않아요. 진흙이 앞에 있으면 피해 가고요. 그런 점에서 한 번도 우리는 나쁜 사람을 처형한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죽음 앞에선 그는 이미 악인도 잔혹한 범죄자도 아닌 게지.”
 
  ― 이 회장도 죽음을 목도하고 종교적 물음이 생겨났던 것이군요.
 
  “늘 그런 질문을 속으로 해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쁜 꿀벌은 슬픔을 모른다’는 속담처럼 죽음을 잊고 지내다가 불현듯 어느 한순간에 묵혀두었던 질문을 하게 된 것이라고 봐요. 아마 가장 가까운 (이 회장의) 형님이 돌아가신 것이 계기가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부하와 씨름을 하다가 넘어지자 통곡을 하며 울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부하가 민망해서 사죄하니까 대왕은 ‘야, 이 바보야. 내가 져서 우는 줄 아느냐’. 그러고는 자신이 ‘그 넓은 세상을 다 정복하고서도 죽으면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의 넓이 밖에는 필요치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서러워 운다’고 했답니다. 나는 그 얘기를 들은 뒤부터 땅에 대해 아무 욕심을 내지 않았죠. 그래서 지금까지 그 흔한 부동산 투자를 하지 않았나 봅니다.(웃음)”
 
 
  “죽음과 神은 부조리 속에 다가와”
 
삼성 창업주인 故 이병철 회장이 필경사를 통해 쓴 神과 영혼에 관한 24가지 질문.
  ― 이 회장의 24개 질문이 모두 절박한데, 그러나 그 질문이 다 적합한가요.
 
  “죽음이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그것을 증명해봐라, 그런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질문들은 이미 도마가 예수의 부활을 부정할 때 예수가,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인간의 불행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지요. 손바닥에 난 못자국의 흔적 말입니다. 이 흔적, 그 자국은 현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이 흔적이 우리에게 어떤 때 어떻게 나타나는가, 신이 우리에게 어떻게 현현하는가, 하는 것으로 고개를 돌려야 해요. 죽음이나 신은 what이 아니라 how와 when으로 또는 where로 파악하자는 것이죠. 알렉산더가 넘어져 땅에 누웠을 때 자신이 땅에 묻히는 형상이 떠오르고 그 순간에 죽음이 그 눈앞에 나타나요. 자신이 묻히는 땅의 넓이지요. 전쟁터에서 그렇게 무수한 죽음을 보았고 헤아릴 수 없이 지고 이기는 전쟁을 겪은 사람인데도 엉뚱하게도 씨름판에서 한가롭게 놀다가 죽음이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지요. 결국 무패의 장군이 하찮은 모기 한 마리에게 물려 죽게 된 것처럼, 그렇게 죽음과 신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 속에서 다가온다는 겁니다.”
 
  ― 교수님은 그 죽음이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나타나셨나요.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였겠지요.
 
  “맞아요. 그것은 지금까지 책에서 읽고 생각하던 죽음이 아니었어요. 아주 판이한 것이었지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나는 여섯 살 때의 죽음의 체험담까지 시로 써온 사람인데도 죽음은, 암은 내 글과도 다른 낯선 모습을 하고 있었지요. 물론 사극에 나오는 저승사자의 모습 같은 것은 더더구나 아니지요. 달나라 사진을 찍은 것 같은 MRI의 화상이고 나 자신의 몸이 빈 갯벌의 진흙바닥의 구멍에서 갑자기 게들이 기어 나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캔서(cancer)라는 말이 ‘게’를 뜻하는 라틴말에서 비롯된 것이라 그랬을 겁니다. 한자의 암(癌)과 같은 덩어리보다는 집게 발이 달린 게가 기어 다니는 것, 축축한 진흙탕 갯바닥을 구멍 속으로 들락날락하는 것 같은 움직임으로 다가온 것이지요.
 
  죽음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죽음은 그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게 구멍이나 게 발 같은 모양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것도 텅 빈 갯벌구멍에서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거죠. 종교도 하나님도 우리 앞에 아주 우연한 계기로 다가오는 것이지요. 바울(바오로)이 말에서 떨어지고, 루터가 광야에서 벼락을 만나고, 베드로가 고기를 잡던 어느 날 갑자기 말이지요.”
 
 
  “루터가 벼락을 만나고 베드로가 고기를 잡던 그날”
 
  ― 그런데 종교마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죽음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유불선(儒佛仙)에다 기독교가 있고, ‘전혀 믿지 않고 죽는 사람’까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죽음이 고통으로 나타나는 게 기독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각각 종교를 상징하는 인물로 우리는 석가, 공자, 노자, 그리고 예수, 마호메트 같은 인물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죽음의 고통을 우리 앞에 직접 나타내 보인 것은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피 흘리며 옆구리에도 선명한 창 자국이 있어요. 그리고 그 죽음의 과정과 디테일도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가복음 15:34)라고 외치는 장면과 마지막에는 고통과 그 죽음을 받아들이며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며 평온하게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최고 고통의 자리에서 지복의 새 생명(영생)이 거듭나는 부활의 기적을 말입니다.”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부활
 
2013년 12월 15일 이어령 교수의 팔순 잔치 때 모습. 오른쪽이 아내 강인숙 여사다. 당시 그는 “나는 잘난 사람이 아니고 그저 그동안 즐거워서 열심히 산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의 말을 듣고 있자니, 예수처럼 세상의 고단한 순례를 극적으로 감내한 이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탱자나무 울타리의 초록 가시처럼 예수의 죽음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번뜩이며 인간의 죄와 구원을 증명하고 있다.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파이 이야기〉의 한 장면에는 힌두교를 믿던 파이가 십자가의 예수상을 보고 감동을 하고 그 뒤부터 기독교도 함께 믿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타 종교가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다만 기독교는 죽음의 문제를 가장 리얼하게 고통으로 나타내 보인다는 면에서 다른 종교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모든 종교와 통할 수 있는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암 투병 중이지만 아무리 암의 고통이 커도 산 채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는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지상의 어떤 사람도 그런 고통 속에서는 그렇게는 안 죽어요. ‘가장 길고 가장 어두운 깜깜한 굴을 지나야만 베토벤의 〈환희의 합창〉이 울려 퍼지는 초원이 나타난다’는 역설을 통하지 않고는 기독교를 몸으로 느낄 수 없어요.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말했지요. 헤어짐(죽음)은 산모가 애를 낳는 것 같은 크나큰 고통이지만 그것을 지나야만 새로운 생명과 만나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 그 점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다른 점이군요. 그래서 기독교인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기독교로 세례받은 이는 죽음의 고통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 하며 손을 내밉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타력(他力)종교지요. 기독교는 인간의 힘,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안 돼요. 누군가가 끌어줘야 해요. 죽음 앞에 절망한 사람들은 저편에서 내미는 손을 잡으려고 합니다.
 
  반면 불교는 철두철미하게 자력(自力)으로 업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죠. 그래서 불구덩 속으로 들어가 소신공양을 할 수 있습니다. 유교에서 공자는 ‘내가 사는 것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아느냐’(未知生 焉知死)고 했지요. 도교는 사람이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으로, 인간은 신선(神仙)이 되어 자연 속으로 융합하는 거지.(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타력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되는 것,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이 ‘에고 에이미’(Ego Eimi·스스로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과 상통한다고도 볼 수 있어요.
 
  제가 볼 때 이병철 회장은 살았을 때의 부(富)를 천당으로 가져가야지, 하는 생각에서 24개 질문을 던지진 않았어요. 죽음 앞에 부나 명예도 다 사라진다는 생각에 죽음을 상당기간 준비하셨던 겁니다. 그걸 느껴요.”
 
  이 교수와 만난 지 1시간여가 금방 지났다. 워밍업의 시간이 지나고 이병철 회장의 24개 질문 중 첫 질문을 던졌다. 기자는 절름발이 새끼염소의 마음으로, 큰 걸음을 걷는 이 교수의 뒤를 따라갔다.
 
 
  神이라는 말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어령 교수가 서울 평창동 자택 골목길을 걷고 있다.
  1. ‌神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워밍업을 끝내고 24개의 질문 중 첫 번째 질문을 던진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미 이 교수는 질문 형식을 바꾸라고 했다. “그것이 정답이라고, 신을 증명하려고 하지 마라. 그러한 시험에 들지 말라 하는 것이 기독교의 첫 번째 메시지”라는 풀이였다.
 
  어쩌면 평생 이 교수는 24개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하나 답변을 해온 셈이다.
 
  이 교수는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고 했다. 그는 “질문은 의문이다. 그러나 물음표에 느낌표가 따르지 않으면 빈 깡통이 된다. 그리스인들은 그 느낌표를 얻기 위해 철학을 했다. 그리스 말로 ‘타우마제인’(철학의 놀라움·Thaumazein)이라는 게다. 물음표는 지성이고 느낌표는 감성이요 영성이다. 나는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그 문지방 사이를 아직도 헤매고 다닌다”고 말한다.
 
  이 교수의 사유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현장에서 금방 건져 올린 생선처럼 싱싱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신학’에서 니은(ㄴ)을 빼면 시학(詩學)이 된다”고 한 말을 기억한다. 신의 존재를 시학으로 언어의 기호로 보여주려고 도전하고 모험한다.
 
  “보세요. 물질적 현실은 다 똑같아요. 각설탕은 모양도 맛도 똑같아요. 그런데 그 각설탕을 아이들에게 줘보세요. 어떤 애는 그걸 먹어버리지만 어떤 애는 그걸 가지고 놀아요. 바벨탑처럼 쌓거나 집을 짓기도 하고 레고처럼 임기응변해서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어내요. 구축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아이들마다 저마다 달라요. 먹는 것은 같아도, 가지고 노는 것은 신기하게도 다 달라요. 하나님도 신도 사각형의 흰 각설탕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구축하는 아이의 영혼, 마음속에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종교적 영역은 지성의 영역이 아니라 영성의 영역입니다. 영성이 뭔지 모르겠으면 (인간욕망의) 가장 밑에 있는 에로스(Eros·관능적 사랑)의 사랑을 생각해봐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정말 죽어도 좋아!’라고 목숨까지 걸잖아요. 가장 아래 단계에서 사다리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사다리에 걸려 있는 지붕 너머는 허공이야. 여기까진 발을 디딜 곳이 있는데 위에는 비어 있는 칸이죠. 그거(허공)를 밟고 올라가느냐 안 올라가느냐는 것은 믿음밖에 없는 거야. 디뎠는데 없으면 떨어져 죽는 것이고…. 디뎌서 올라갈 수 있다면 그때부터 상승하는 것이죠.”
 
  이 교수는 뉴턴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하면서 신의 존재를 풀어갔다.
 
  “여기 만유인력의 법칙이 있어요. 그 법칙은 과학이야. 떨어질 사과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어야 떨어져요. 올라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떨어져요? 그런데 뉴턴(Isaac Newton·영국의 물리학자·천문학자)이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고 중력을 알고 증명했다고 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중력을 거슬러 나뭇가지에 사과가 열려 있네!
 
  뉴턴처럼 머리 좋은 사람도 실은 모자라는 사람이지요. 자기는 사과가 떨어지는 낙하의 법칙으로 중력을 계산했다는데, 이 중력을 무슨 힘으로 거슬러 올라가 나무 꼭대기에 매달렸겠어요.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나무와 사과의 생, 그리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의 역류, 뉴턴은 낙하는 알아도 상승은 몰랐던 겁니다. 어쩌면 뉴턴은 진짜 생명이 뭔지, 종교가 뭔지, 사랑이 뭔지 몰랐던 것은 아닐까요? 사실이에요. 뉴턴은 평생 동안 여자와 사랑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하잖아요. 그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해요.”
 
 
  “하나님도 아이의 영혼 마음속에 나타나”
 
3년 전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 모습이다. 그는 ‘知의 최전선’에 선 사령관답게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말한다.
  ― 뉴턴은 천재잖아요.
 
  “뉴턴은 위대한 과학자이자 당대 하나님 다음가는 인물이었는지 몰라도 빨갛게 익은 사과가 하늘에 매달린 생명의 의미, 그걸 따먹는 어린아이의 행복한 미소 같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생명의 신비는 몰랐던 거지. 낙하의 법칙은 알았어도 작은 풀이라도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상승의 법칙은 몰랐던 거야. 그리고 중력(gravity·重力)은 알아도 부력(levity·浮力)이 뭔지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지.
 
  진화론은 신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이 36억 년 전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존재해 왔음을 증명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 생물학자들은 그 힘을 ‘섬싱 그레이트’(something great)라고 부르죠. 생명을 안다는 게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증명하는 겁니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 어제까지 없었던 생명이 생겨나고, 태내 열 달 동안 36억 년의 시간을 다 보내고, 달이 차면 지(자기)가 어떻게 알고 엄마 배 속에서 나오냐 그 말이에요.
 
  이런 모든 것…,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인간이 어떻게 알아요? (신을) 모른다가 정답이지 ‘있다, 없다’는 말은 거짓이에요. 신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신을 모르는 거지요. 미지(未知)의 존재니까 더 생각하는 것이에요.
 
  소크라테스가 한 말,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현자의 길이요, 믿는 자의 사다리’라고 마지막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슬프고 무섭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현장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겁니다. 불나방처럼 타죽는 것을 알면서 날 끌어당기는 기막힌 힘, 그것이 우리가 찾고 구하는 신의 모습이죠.”
 
  기자는 이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2011년에 펴낸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열림원 刊)에 실린 서시(序詩) ‘어떤 개인 날’이 떠올랐다.
 
  태양은 혼자의 힘으로 빛나는 것은 아니다
  비나 구름 그리고 어둠과 함께 있을 때
  빛은 비로소 빛이 된다
 
  사막의 모래알을 비출 때 태양은 저주지만
  풀잎 이슬 위로 쏟아지면 축복이다
  ‌태양이 이슬에 젖는 순간마다 태양빛은 새로워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밤을 주신 것이 아니라
  밤을 통해서 새벽의 빛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홍수를 주신 것이 아니라
  ‌홍수로 인해 아름다운 무지개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하여 아름다워지는 생명을 주신 것이다
  태양은 흑점의 어둠이 있어 빛나는 것이다
 
  -이어령 ‘어떤 개인 날’ 전문

 
  이 교수와 기자의 첫 항해는 일단 이 즈음에서 잠깐 멈추기로 했다. 생의 황혼녘에 이병철 회장이 던진 24개의 질문 중 겨우 1개의 답변만 정리한 상태다. 기자는 1개의 답변을 정리하기에도 벅찼다. 남은 23차례의 항해를 마칠 수 있을지, 앞으로 몇 달이 걸릴지 현재로선 예상할 수 없다. 이 교수와 함께 미지의 항해를 이어갈 수 있기를 신께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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