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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2005년 강원 산불로 불탄 사찰 복원한 낙산사 주지 금곡 스님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이 불교의 힘”

글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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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시일반으로 복원한 관음 신앙의 성지
⊙ 누구에게도 책임과 허물 묻지 않고 복원에 전념
⊙ 화재에서 기적처럼 비켜 간 관세음보살
⊙ 무료 입장·국수 공양으로 얻은 人心으로 복원
⊙ 부처님은 바로 옆에 있는 ‘당신’이다
사진=조현호
  지난 4월 24일 오후 3시 천년고찰 낙산사에서는 상반기 문화재 재난대응훈련이 실시됐다. 산불 및 문화재 사고에 대비한 훈련이었다.
 
  이날 훈련은 7번 국도 인근에서 발생한 불이 낙산사로 번지는 상황에 가정했다. 이에 대한 초동 대응 및 추가 피해 방지, 초동 진화 및 확산 방지를 위한 양양소방서·산불진화대 출동이 있었고, 소방시설 점검 및 낙산사 상시 진입을 위한 소방 차량 등록 등의 훈련이 이뤄졌다.
 
  양양군・양양소방서 등 유관기관과 낙산사 스님·직원들이 합동으로 화재 재난 시 대응 방안을 실전처럼 연습했다. 스님들은 낙산사 곳곳에 설치된 소화전을 직접 작동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지난 4월 4일 강원도 고성·속초에서 대형 산불 사고가 있었기에 훈련에 참여하는 스님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스님들은 이구동성으로 “다시는 낙산사가 화(禍)를 당하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 중”이라고 이야기했다.
 
  공교롭게도 날짜까지 비슷한 2005년 4월 4일 양양읍 화일리 도로변 임야에서 산불이 발생했다. 산불은 강한 강풍으로 인해 급속도로 동쪽으로 확산되면서, 5일 오후 3시10분경 낙산사를 덮쳐 보물 제479호 낙산사 동종을 비롯한 홍예문, 원통보전, 근행당, 심검당 등 천년고찰 낙산사가 큰 화를 당했다.
 
문화재 재난대응 훈련에 참여 중인 낙산사 스님들.
  지난 5월 3일 서울 돈암동 흥천사에서 만난 낙산사 주지 금곡 정념 스님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2005년 4월 5일 아침, 총무원 숙소에 있다가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영동고속도로로 해서 대관령을 넘어 낙산사에 갔어요. 도착하니 오전 11시쯤 되었지요. 오전 10시에 산불이 종료되었다고 알려졌는데, 작은 불씨도 살아날 수 있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했죠.”
 
  당시 금곡 스님은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 급히 소화기를 준비하고, 근처에 물을 뿌리는 등 노력을 했으나 거친 바람을 타고 올라오는 불을 막지 못했다.
 
  금곡 정념 스님은 출가 후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오세암, 봉정암, 신흥사, 계조암 등을 거쳐 2003~2005년 봉정암 주지를 지냈다. 낙산사에는 2005년 4월 화재 보름 전에 주지 발령을 받았다. 법명 정념(正念)은 1982년 고암 종정이, 법호 금곡(金谷)은 ‘변하지 않는 설악산 계곡이 돼라’는 뜻으로 스승인 설악산 신흥사 조실 설악무산 스님이 지어주었다.
 
  낙산사 복원 불사를 마치고 2009년 주지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2017년 12월에 다시 낙산사 주지로 복귀했다.
 
 
  천년고찰 불태운 2005년 화재
 
2005년 4월 발생한 강원도 양양 산불로 종루를 비롯해 낙산사 건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사진=조선DB
  2005년 4월 발생한 양양 산불은 강현면과 양양읍 일대 250ha(250만m2)의 산림과 주택을 잿더미로 만들어 151가구 393명의 이재민이 속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천년고찰 낙산사도 이때 화마에 휩싸였다.
 
  참화(慘火) 이후 주지 금곡 스님은 이러한 호소문을 발표했다.
 
  〈참화의 업보는 제가 짊어져야 할 짐이기에 허물과 책임을 논하기보다 낙산사 복원을 기도하고 발원하겠습니다. 동참하여주십시오. 사부대중이 함께 기도하고 함께 복원하므로 잃어버린 영화의 꿈속에 있기보다는 100년을 바라보면서 복원하겠습니다.〉
 
 
  감동을 줘야 치유 가능
 
복원을 마친 천년고찰 양양 낙산사 전경. 사진=낙산사
  재난이 발생하면 보통 인재(人災)였다며, 책임을 따지게 된다.
 
  2005년 낙산사 화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금곡 스님은 “허물과 책임을 논하지 말자”를 유독 강조했다.
 
  ― 일단 화재로 사찰이 피해를 입었으니, 책임 소재를 가려야 했지 않나요.
 
  “2005년 주지 부임 보름 만에 겪은 화재였습니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다음에 ‘모두 저의 잘못이다’라고 항상 이야기했어요. 천재지변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죠. 지방자치단체나 공무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그분들은 불을 끈 죄밖에 없었어요. 10년 걸려 낙산사를 복원해야 하는데, 책임을 묻는다며 이런저런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이 낙산사 복원을 도와줄 리가 없죠.”
 
  ― 피해 보상을 위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야 한다는 주장은 없었나요.
 
  “화재로 피해를 입은 분들이 비대위를 구성했어요. 이분들이 찾아와서, 천재지변이 아닌 인재라고 말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아니라고 말했어요. 불을 낸 범인이 없잖아요. 복원을 위해서는 책임자 처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감동을 줘야지, 원망과 미움으로는 치유가 되지 않아요.”
 
  화재 직후 여러 혼란과 어려움이 있었다. 지금은 지난 이야기지만, 당시 다양한 어려움을 금곡 스님은 이렇게 술회했다.
 
  “언론에서도 낙산사 화재 소식을 다루면서, 도움을 주려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러던 중 방송에서 ‘낙산사 전액 국고지원’이라고 헤드라인 뉴스가 나온 거예요. 타격이 컸어요. 불자들이 볼 때 전액 정부 지원으로 복원해줄 것 같잖아요. 하지만 당시 담당자는 피해금액을 30억원으로 정부에 보고했어요. 나중에 88억원으로 증액되었죠. 나머지 필요한 자금 100억원은 신도들의 시주로 부담했어요. 지금도 낙산사 복원이 모두 국고지원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설악무산 스님의 격려
 
  복원 과정에서 스승인 설악무산 스님의 도움이 컸다. 설악무산 스님은 1968년 《시조문학》에 등단한 이후 시집 《아득한 성자》 《비슬산 가는 길》 《적멸을 위하여》 《마음 하나》 등과 산문집 《죽는 법을 모르는데 사는 법을 어찌 알랴》 등을 출간해 불교사상을 기반한 한국을 대표하는 시조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설악무산 스님은 2018년 5월 입적했다. 그의 임종게(臨終偈·후세에 전하는 마지막 글)는 이렇다.
 
  〈‘천방지축(天方地軸) 기고만장(氣高萬丈)/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 보니/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억!’〉
 
  금곡 스님은 “화재 소식을 듣고 어른 스님이 급히 낙산사에 오셔서, ‘낙산사 불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그대들 마음에 삼독(三毒)의 불을 끄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고 말씀하셨다”고 기억했다. 삼독은 불교에서 말하는 세 가지 번뇌로, 탐욕(貪慾)·진에(瞋恚)·우치(愚癡)를 의미한다. 세 가지 번뇌가 중생을 해롭게 하는 것이 마치 독약과 같다고 하여 삼독이라고 한다.
 
  ― ‘삼독의 불을 끄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부처님이 상두산에 올라 저녁노을을 보며 ‘그대들 육근(六根·6가지 감각기관)에 탐진치(貪瞋癡·3가지 번뇌로 삼독을 의미)가 불타는 것 같다’는 명법문을 하신 것처럼 어른 스님도 낙산사 화재를 두고 마음의 불부터 끄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 낙산사 복원에 대한 당부는요.
 
  “‘걱정하지 말라. 낙산사는 관음도량이다. 중생들은 어렵고 힘들 때 불보살의 원력에 의지한다.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낙산사는 그동안 여러 차례 화마를 만났다. 그때마다 몇 번이고 다시 복원하고 중창을 했다. 원력(願力)을 모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죠.”
 
  ― 다른 말씀은 없었나요.
 
  “‘주지가 흔들리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신심과 원력으로 불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가장 무거운 책임을 느낀 것은 ‘나는 너를 믿는다’는 한마디입니다. 10년의 중창불사를 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어요. 어른 스님의 이 말이 낙산사 복원의 주춧돌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어른 스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부처님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을 물으니 “나는 너를 믿는다”는 신뢰였다. 직계상좌가 아닌데도 끊임없이 신뢰를 보내준 것이 종교인으로서의 삶의 동력이 된 듯하다.
 
  그 시작은 25년 전으로 올라간다. 1996년 봉정암에서 기도 중일 때 어른(설악무산) 스님의 전갈이 왔다. 백담사로 내려가서 “이제부터 네가 봉정암 책임을 맡아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갑작스러워 “기도 중입니다. 적임자가 아닙니다”고 사양했지만, “어른이 말하면 들어라. 토 달지 말고”라 하여 봉정암을 맡게 되었다.
 
  그를 믿고, 나아가 주지의 책임까지 맡긴 이유는 후에 전해 듣게 된다. 설악무산 스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정념이 가가 고암 노스님 열반하기 전까지 시봉을 아주 잘했어. 부모도 노망들었다고 버리는 세상인데, 어른을 모실 줄 알면 그걸로 됐다.”
 
  설악무산 스님은 제자들에게 믿음과 화합을 강조했다. 금곡 스님은 어른 스님이 열반 전에 만해마을로 불러 마지막으로 남긴 이야기를 소개했다.
 
  “무조건 화합해라. 시비하지 마라. 본사 주지 우송 스님이 잘하고 있으니 그를 도와 설악산에 말썽이 생기지 않도록, 전국에서도 모범이 되는 산문(山門·절)이 되도록 힘을 모아라.”
 
  ‘믿고 화합해야 된다’는 교훈은 낙산사 복원 불사의 기본이 되었다.
 
 
  화마 속에서 부처님은 모두 무사
 
원통보전에 봉안된 건칠관음보살좌상에 기도드리는 불자들.
  낙산사 화재는 시련이었지만, 종교적 신앙의 시작이었다. 당시 호소문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낙산사는 국민의 고향입니다. 아프고 지친 몸을 이끌고 혹은 슬픈 영혼을 머물러 관세음보살님의 미소 속에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고향입니다. 낙산사 모든 관세음보살님도, 홍련암 법당도 이 참화 속에서 모두 무사합니다. 형상으로 나를 보지 말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지만 저희에게 있어 이것은 기적입니다.〉
 
  낙산사는 신라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612~702)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동해에 면한 명산인 오봉산에 671년(문무왕 11년)에 창건한 사찰로, 낙산사라는 사찰명은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으로 알려진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에서 유래한다. 즉 관음 신앙의 중심지다.
 
  금곡 스님은 아직도 불상이 하나도 손상을 입지 않은 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기적에 관세음보살이 있다고 말한다.
 
  ― 다행히 관음상이 하나도 훼손되지 않았군요.
 
  “그것뿐이 아니죠. 원통보전에 봉안된 건칠관음보살좌상을 안전하게 모셨고, 홍련암과 관세음보살님 역시 기적적으로 무사했어요. 화재 속에서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나올 때 제가 기도를 했어요.
 
  ‘3대 관음도량 중 제일이 홍련암인데, 여기가 불에 타면 불심이 약해질까 두렵습니다. 관세음보살께 기도하면 불 속에서도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하는데 홍련암 관세음보살님을 화마로부터 막아주세요.’”
 
  ― 기도의 결과는 어떠했나요.
 
  “거짓말처럼 기적이 일어났어요. 갑자기 맞바람이 불어, 홍련암 법당이 타지 않았어요. 불을 피하고 나서 홍련암에 비닐하우스를 쳐서 2년 동안 기도를 했어요. (이러한 기적은) 불자들의 뜻을 모으는 데 큰 힘이 되었죠.”
 
 
  ‘십시일반’으로 복원
 
  낙산사 복원 과정은 ‘십시일반’으로 이뤄졌다. 복원 과정에 참여한 현고 스님(종단 불사 총도감)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 복원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주지 스님(금곡 스님)이 가장 먼저 화장실을 두 곳 지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이 필요하고 원하는지를 살핀 것이죠. 우선 급한 것은 사람들 살 곳이 아니라, 대소변 볼 곳 아니겠냐고 생각한 것 같아요.”
 
  ― 화재 후 무료 관람을 실시했습니다.
 
  “누구나 그런 상황이 오면 돈 한 푼이라도 아껴, 서까래 기둥이라도 세워서 하루빨리 복원하고 싶죠. 주지 스님은 그러지 않고 동네 잔치하러 다녔어요. 주변 가게의 임대료도 올리지 않았어요. 인심은 천심(天心)이죠. 잘 한 것 같아요. 시주받고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고 나중에 받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제가 광주에서 생활하는데 아는 목사님이 저에게 그러더라고요. 난생처음 절밥을 먹어봤다고요. 낙산사에서 무료 국수를 먹고 왔더라고요.”
 
  현고 스님은 낙산사 복원이 가능했던 것은 “경제력 있는 한 사람의 힘이 아닌, 대중의 정성이 십시일반 모였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금곡 스님은 큰 시주보다는 누구나 인연의 복을 짓도록 기와 한 장부터 시작했다”며 “‘십시일반’을 강조했다”고 기억한다.
 
  금곡 스님에게 당시 상황을 물었다.
 
  ― 경제적으로 넉넉한 신도들의 도움은 없었나요.
 
  “낙산사를 복원할 때 약속했습니다. ‘밖에 나가서 낙산사 어렵다고 이야기하지 않겠다. 도와달라고 하지 않겠다.’ 그렇게(일부 신도의 경제적 도움으로) 낙산사를 복원하면 오래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십시일반 정성으로 복원해야 제2의 화재도 막을 수 있는 것이죠.”
 
  ― 뜻은 좋지만, 힘들지는 않았나요.
 
  “어려워서 그렇지 다수 사람의 의견을 모아서 가면 잡음이 적어요. 관심과 애정이 자연히 생기게 되어서 더욱 튼튼해지는 것이죠. 다소 힘들어도 뜻을 모아가면 좋아요.”
 
  낙산사 복원에는 조선중기 화가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가 큰 도움이 되었다. 복원된 낙산사는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부분을 기본으로 하되, 단원 〈낙산사도〉에 나타난 가람 배치와 조화를 참고했다.
 
 
  낙산사 국수 공양
 
  낙산사 무료 국수 공양은 대중의 뜻을 모으는 방법으로 시작됐다. 낙산사는 화재 후 2011년까지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지금도 낙산사를 방문하면 무료 국수와 전통차를 대접받는다.
 
  ― 국수 공양을 추진한 이유는요.
 
  “돈 내라고 하면 좋아할 사람 없는 것이죠. 무료 입장에, 국수까지 대접하니 낙산사를 찾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죠. 내가 주인이 된 느낌을 받아요. 낙산사에서 대접받으면 어디 가서 낙산사 욕할 리가 없죠.”
 
  ― 반대는 없었나요.
 
  “무료 국수뿐이 아니라, 무료 커피자판기도 설치했었죠. 운영비가 문제가 아니라, 쓰레기통에 종이컵이 쌓이고 하니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화재 이후 어린아이들이 현장체험을 위해 낙산사를 찾았어요. 입장료까지 무료니 부담도 없었고요. 낙산사에서 무료로 대접받으면, 아이들의 마음이 자비로워진다고 생각했어요. 집에 돌아가서 낙산사에서 대접받은 이야기를 하면 불자 부모라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죠. 신세를 졌으니 갚을 수밖에 없어요.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이 기본이 되지 않으면 불교는 나아갈 수가 없어요.”
 
 
  지역 최대 행사 ‘어르신 큰잔치’
 
'어르신 큰잔치'에서 만발공양 봉사 중인 금곡 스님. 사진=무산복지재단
  지난 4월 27일에는 양양군 실내체육관에서 ‘어르신 큰잔치’가 열렸다. 불기 2563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양양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경로잔치다. 사회복지법인 무산복지재단(이사장 금곡 스님)이 양양군 내 65세 이상 어르신 2000여 명을 모시고 연 만발공양(萬鉢供養)에는 따끈한 점심공양과 선물이 넉넉히 준비됐다. 이날 실내체육관에 마련한 1500개의 공양자리는 일찌감치 만석을 이뤘고, 체육관 밖 예비로 마련해놓은 천막식탁 500석도 순식간에 어르신들로 가득 찼다.
 
  무산복지재단이 마련하는 어르신 큰잔치는 이미 지역의 명물이다. 무산복지재단은 2006년부터 매년 설과 추석, 부처님오신날 등을 앞두고 한 해에 3~4차례 경로잔치를 열어 어르신들에게 점심공양을 올리고 사찰에서 준비한 선물세트를 나눠준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무산복지재단은 설악산 조실이신 설악무산 큰스님의 원력에 의해 불교의 자비보살 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된 사회복지법인이다. 2004년 노인전문요양원 설립으로 출발해 노인복지시설 설치운영, 아동 복지사업, 청소년 복지사업 및 장학사업, 지역사회 나눔사업 등 다양한 실천사업을 통해 지역복지 증진을 위해 노력 중이다.
 
  낙산사에서는 초·중학교 학생들을 위한 자유로운 학습과 여가 공간인 무산지역아동센터(의상공부방)도 운영 중이다. 정념 스님이 설립한 무산지역아동센터는 양양 지역에서 유일한 어린이 도서관을 포함하여 국내 최대 규모의 시설을 자랑한다. 이곳은 국내에서 가장 큰 초·중학교 공부방이기도 하며 유아와 어린이, 청소년들의 교육의 장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아동 포교의 장이다.
 
 
  주변의 ‘당신’에게서 부처님을 찾아야
 
무산지역아동센터의 어린이들.
  지역민들에게 물어보니 “금곡 스님은 평소 낙산사 복원은 국민의 도움으로 가능했다며, 나누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복지재단을 설립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평소에도 내 주변의 ‘당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복원 불사를 마치고 그간의 과정을 설명한 책의 제목은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이다.
 
  ― 책에서 말하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함께하는 사람이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이죠. 바로 그 사람이 부처님이죠.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찾고, 불상에서 부처님을 찾으려 하지 말고 바로 옆에서 부처님과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죠. 먼 곳에 있지 않아요.”
 
  ― 어린이 시설에 투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린 시절 물질적 혜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마음이죠. ‘나누는 마음’이 중요해요. 갈등과 반목보다는 나누고,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이런 공동체가 사회를 건강하게 한다고 생각해요. 과거 어린이들이 지식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식을 넘어 불교식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연 속에서 뛰어놀고, 책을 보고 글을 쓰는 것입니다. 강원도 양양은 교육시설이 부족해요. 조손(祖孫) 가정도 많아요. 아이들의 꿈과 희망도 작아지는 것이죠. 젊은 부부들은 교육이 걱정이에요. 그래서 속초로 나가는 것이죠. 복원을 하는 가운데 땅을 사서 강원도에서 가장 좋은 시설을 만들었어요. 유치원을 짓는 데 한 20억원 들어갔죠.”
 
  ― 좋은 시설보다, 규모를 키우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이윤을 목적으로 운영하면 안 돼요. 저는 숫자를 늘리지 못하게 해요. 다른 곳도 배려해야죠. 우리에게만 너무 몰리면 안 된다고 봐요. 종교가 이윤을 추구하면 안 돼요. 태어나면 유치원, 아동센터를 이용하고 나이가 들면 노인센터에서 보살핌을 받게 하고 싶어요. 요람에서 무덤까지 낙산사가 양양 지역민을 보살피고 돌보겠다는 것이죠.”
 
 
  대통령과 낙산사
 
  낙산사는 역대 대통령들과 인연이 있다. 금곡 스님은 고(故)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이 깊었다. 권양숙 여사가 봉정암을 자주 찾았기 때문이다. 노무현재단 발기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 고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권양숙 여사께서 봉정암에 기도를 오셨어요. 인연이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죠. 지도자로 훌륭한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불심도 있었습니다. 언젠가 ‘어머님이 매일 2시간씩 금강경 기도를 했다’고 이야기했어요. 인연은 있었으나,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에는 일부러라도 거리를 두었어요. 낙산사 화재 때도 일부러 방문하지 않았어요. 저도 충분히 이해가 됐어요. 오고 싶었지만, 부담될 것을 우려해 일부러 방문하지 않았어요.”
 
  ― 서거 소식을 듣고 어떠했나요.
 
  “제일 먼저 봉화를 찾아 여사님을 만났어요. 위로했어요. 곧바로 당시 총무원장이신 지관 스님 사서실장에게 연락했어요. 당일 내려오셔야 된다고 건의 드렸어요. 전국 조계종 본사에 분향소도 설치했습니다. 전국 사찰에서 오셔서 대통령의 극락왕생을 기원했어요.”
 
  ― 이명박 전 대통령은 어떠했나요.
 
  “화재 당시 서울 시장이셨죠. 당시 찾으셔서 만났는데,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다’고 이야기하셨어요. 김윤옥 여사는 원통보전 회향법회(낙성식)에도 참석해주셨어요. 또 무산지역아동센터의 아이들을 위해 꾸준히 후원도 해주셨어요.”
 
  금곡 스님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해수관음상에 고 육영수 여사의 소중한 유품이 안치된 배경도 설명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05년 화재 당시 한나라당 대표로 낙산사를 찾았어요. 위로도 해주시고, 성금도 주셨죠. 사실 해수관음상에 육영수 여사의 유품이 있어요. 이후락씨가 불교신도회장이어서 육 여사 돌아가시고 나서 관음상을 조성할 당시 유품을 안치했어요. 화재 당시 낙산사를 찾았을 때 직접 물어보니, 본인(박 대통령)도 알고 있더라고요.”
 
  ―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생각은요.
 
  “적폐니 그런 것을 떠나서, 하루빨리 구치소에서 나와서 정상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부족하고 비판받을 일이 있었지만, 이미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오랜 시간 참회를 했어요. 재판이 종료되면 국민과 화합하는 마음으로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모시는 사람이 잘못한 것이죠. 열린 자세로 가면 좋겠어요.”
 
  금곡 스님은 흥천사 회주(會主)를 겸하고 있다. 흥천사는 조선 태조 임금이 신덕왕후를 정릉에 모시고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396년에 착공하여 1397년에 170여 칸이나 되는 대가람으로 창건된 절이다. 1794년(정조 18년)에 새롭게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돈암동)로 옮겨졌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6·25전쟁 때 피란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2013년 지치고 힘든 이들의 휴식처이자 치유처인 삼각선원을 지었다. 2015년 저소득 맞벌이가정 아이들의 보육을 위한 아동복지시설인 흥천어린이집을 건립·개원하였다.
 
  왕실사찰이라는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흥천사는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일제시대 비구스님 가족이 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여러 법적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 절 땅을 함부로 팔아버리는 스님들로 종단에서 몸살을 앓았다.
 
 
  설악무산 큰스님 가르침으로 운영
 
  흥천사는 지역 어린이집으로 유명하다. 2015년 5월 개원한 흥천어린이집은 서울시 최초의 한옥 어린이집이다. 흥천사 땅을 지자체에 제공해 만들어졌다. 한옥 어린이집 건축을 위해 추가로 필요한 예산은 흥천사가 부담했다. 느티나무어린이집은 연면적 591.86m2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다. 어린이 건강을 고려해 친환경 자재를 사용함은 물론 자연채광을 활용해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했다.
 
  금곡 스님은 “어린이집은 단순한 불교 시설이 아니라 지역 어린이들이 자라나는 공간이다”라고 했다. 특히 “설악무산 큰스님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라며 “큰스님은 아이들을 선재동자와 같이 보살피라고 가르치셨다”고 덧붙였다. 어린이집 이름을 ‘느티나무’라고 붙인 이유는 “수백 년을 사는 느티나무처럼 어린이집을 통한 흥천사와의 인연이 세세생생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흥천사는 비구대처 정화 와중에 대처 측이 오랫동안 점유해온 사찰이다. 대처 스님들이 입적하면서 절이 폐허 지경이 되었다. 대처 스님들이 살던 요사채(승려들이 거처하는 집)는 22가구 60명이 세입자로 살고 있었다. 도량정화를 하려면 이들을 내보내야 하는데 그 비용이 100억원에 이르렀다. 궁여지책으로 종단에서 사찰 소유 임야 1만4000평(4만6280m2) 중 4000평(1만3223m2)을 처분하기로 했다. 중앙종회에 보고되고 집행만 하면 될 상황에서, 설악무산 스님은 이렇게 만류했다.
 
  “안 된다. 옛날 종단에서 강남 봉은사 땅을 처분하고 얼마나 후회했냐. 강북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소중한 사찰이지 않으냐.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매각하면 안 된다.”
 
  ― 흥천사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2011년 종단에서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풀지 못해 아예 토지를 처분하려고 했어요. 어른 스님(설악무산 스님)이 ‘땅은 처분하면 안 된다. 종단에서 기채(起債)확인서를 받아오면 설악산 신흥사에서 도와주겠다’고 하셔서 제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시작했어요. 왕실사찰이라고 하지만, 명맥만 남아 있었고 신도도 2명에 불과했어요.”
 
  ― 흥천사 중창에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요.
 
  “낙산사 복원과 같이 마음을 모으는 것이 어려웠어요. 거의 새롭게 시작하는 형편이라, 기와 한 장부터 새롭게 마련하는 어려움이 있었죠. 흥천사 일대가 재정비되면서 옛 왕실사찰의 위상이 조금씩 회복되는 데 보람을 느낍니다.”
 
 
  ‘정신의 절’을 짓는 일
 
  낙산사와 흥천사가 눈에 보이는 절이라면, 계간지 《유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절을 복원하는 과정이다. 《유심》 역시 설악무산 스님에 의해 맡겨졌다. 갑자기 불러 발행인을 맡긴 것이다.
 
  “낙산사 복원 불사만 해도 코가 석자인데, 잡지도 문학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잡지 발행인을 하라니 여간 난감하지 않았어요.”
 
  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유심》은 1918년 만해 한용운 스님이 창간해서 3회를 내고 폐간했다. 설악무산 스님은 2001년 《유심》을 시 전문잡지로 복간해서 발행했다.
 
  발행인을 맡기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낙산사를 복원하는 것은 유형의 절을 짓는 일이야. 그러나 잡지를 만들고 좋은 작품을 싣는 것은 정신의 절을 짓는 일이다. 좋은 시 한 편이 절 한 채 짓는 것 못지않아. 그러나 이 잡지를 통해 많은 시인묵객과 지식인이 불교와 친해질 수 있다면 그게 얼마나 큰 포교겠나.”
 
  유서 깊은 낙산사, 흥천사 모두 어려움을 극복하고 옛 모습을 회복했다. 누구 하나의 도움이 아닌 대중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복원이 마무리되고 2010년 복원을 기념하는 《신 낙산사》 축사 설악무산 스님의 글을 보면 이러한 뜻을 읽을 수 있다. 내용은 이러하다.
 
  〈낙산사는 널리 알려진 대로 신라의 의상대사가 관음성지를 가꾼 이래 오랫동안 관음 신앙의 영지가 되어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난 2005년(을유) 4월 봄에 동해에서 일어난 산불로 천년고찰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다행하게도 낙산사는 전 국민적 성원에 힘입어 다시 과거의 아름다움을 되찾게 되었다. 이는 관음 신앙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승(寺僧)과 불자들의 염원이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이다.〉⊙
 

  ■ 낙산사의 문화재
 
1. 원통보전과 칠층석탑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중심 법당이다. 모셔진 관음보살좌상은 드물게도 종이로 만든 불상, 즉 지불(紙佛)이다. 원통보전 앞 칠층석탑은 조선시대 석탑으로 보물 제499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세조 중창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2. 의상대
의상 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이곳에서 산세를 살핀 곳이다. 의상 스님의 좌선 수행처라고 전해진다.

3. 홍예문
원통보전을 나와 조계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나가다보면 일주문 못 미쳐서 무지개 모양의 석문인 홍예문이 있다. 누각이 2005년 화재로 불타, 2006년 전체 가람 복원 때 누각을 새로 만들었다.

4. 홍련암
낙산사의 산내암자인 홍련암은 의상대 북쪽 300m 지점에 있다.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하기에 앞서 관음보살의 전신을 친견한 장소이자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석굴 안에서 기도하던 곳이다. 낙산사의 모태다.

5. 해수관음상
1972년 착공돼, 1977년 11월 6일 점안되었다. 높이 16m, 둘레 3.3m, 최대 너비 6m이다.

6. 낙산사 동종
화재로 대부분 녹아 없어진 보물 제479호 낙산사 동종의 복원 모습. 예전 모습 그대로 낙산사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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