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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정희 前 대통령 치과주치의 유양석 원장

“박정희 대통령, 내가 해드린 금니를 저세상까지…”

글 : 박지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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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과의사 면허번호 38번… 93세의 현직 최고령 치과의사
⊙ 미국 유학길에 박정희 대령과 처음 만나… 8년간 박정희 전 대통령 치과주치의 지내
⊙ 백선엽 장군도 최근까지 진료받아… 환자는 모두 30~40년 ‘단골’
⊙ 건강 비결은 과식·과음·과로 안 하고 과욕 안 부리는 ‘4不’

柳陽錫
1927년 용인 출생. 서울대 치대 졸업, 미국 육군군의학교 초등군사반, 미국 월터리드육군병원 치과고등군사반 수료 / 수도육군병원 치과과장, 대통령치과주치의(1960~1968), 고려병원 치과 과장. 現 유양석치과의원 원장
사진=조현호
  간판도, 승강기도 없다. 서울 종로구 통의동의 낡은 건물 3층. 그곳엔 ‘아는 사람만 가는’ 치과가 있다. 치료의자도 딱 한 대, 의사도 단 한 명이다. 작고 아늑한 이곳은 치과병원이라기보다 치의학 현대사가 박제(剝製)된 아담한 박물관에 가까웠다. 불투명한 여닫이문을 열자 백발의 노신사가 나왔다. 주인장 유양석(柳陽錫·93) 원장이다.
 
  “요즘은 많으면 하루 두세 분 정도 오십니다. 여긴 그냥 작은 동네 치과예요. 대형마트가 아니라 구멍가게인 셈이죠, 허허.”
 
  그렇다고 허투루 보면 안 된다. 이래 봬도 모두 30~40년 인연을 이어온 ‘단골’이다. 환자들은 가끔 손주까지 데리고 온다.
 
  “최근까지 백선엽 장군도 꾸준히 와서 진료를 받았어요. 40년 전에 해드린 의치를 아직도 하고 있는 최고참 환자지요. 옛날에는 무서워서 그분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데, 지금은 인자하기가 꼭 학교 은사님 같아요.”
 
 
  70년간 치과의사 활동
 
치과의사 면허번호 38번인 유양석 원장은 현역 최고령 치과의사다.
  유양석치과의원은 1979년에 개원했다. 올해로 만 40년을 맞았다. 유 원장의 치과의사 경력은 이보다 한참 길다. 무려 70년이다. 면허번호는 38번. 한국 땅에서 서른여덟 번째로 치과의사 면허증을 받았다는 뜻이다.
 
  “지금은 (면허번호가) 3만 번쯤 될 겁니다. 일제(日帝)강점기, 6·25, 5·16, 10월 유신, 12·12, 6월 항쟁, IMF, 남북정상회담, 광우병, 그리고 대통령 탄핵까지. 지난 70년간 수많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치과의사로 살고 있는 셈이지요. 이쯤 되면 천직(天職)이 맞는 거지요?”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라곤 믿기 힘들었다. 발음은 분명했고, 낮고 안정된 어조는 듣기 편했다. 질문을 되묻는 법도 없었다. 자택인 잠실에서 통의동까지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한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 건물 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한다. 지팡이도 최근에야 비로소 마련했다. 건강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는 “4불(不)을 지킨 덕이 아닌가 싶다”면서 “과식(過食)·과음(過飮)·과로(過勞)하지 않고, 과욕(過慾) 부리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 굉장히 외람되지만, 그 연세에 진료를 보는 게 가능할까 싶었습니다.
 
  “진료는 아주 가벼운 것만 합니다. 어려운 치료는 후배들을 소개시켜주고요. 아직까지 시력도 괜찮고, 손떨림도 없으니까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물러나야지요.”
 
 
  징병 면하려 치대 입학
 
  유 원장은 1927년 용인군 내사면 양지리에서 태어났다. 선전관(宣傳官)이던 할아버지에게 산에서 무술과 한의학 상식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때 조상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소학교(초등학교) 시절 서울로 전학을 갔는데, 공부에 소질이 있어 경복공립중학교(현 경복중·고등학교)에 들어갔다. 1945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전문학교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가 유일했다. 입학정원은 100명이었는데, 한국인 학생은 30명만 뽑았다. 나머지 70명 자리에는 일본 각지에서 지원한 수천 명이 몰려 경쟁률이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그런 조건에 합격할 정도면 수재(秀才) 소리를 들었겠다’고 하니, 유 원장은 “징병을 면하고자 치대를 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공계가 아닐 경우 징병 대상이 되었습니다. 치과의학전문학교가 해방을 맞이하면서 치과대학이 됐습니다. 우리 손으로 일군 치과대학을 1949년도에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지요.”
 
  졸업의 기쁨도 잠시, 1년이 채 안 되어 6·25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어요. 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유난히 밖이 소란스러워 내다보니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난리가 난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돈암동에 최초로 포탄이 떨어졌어요.”
 
 
  “파괴와 건설이 공존하는 곳이 戰場”
 
  전쟁이 38선에서 대치상태에 있던 1952년. 기술자동원령에 따라 기술자는 무조건 입대해야 했다. 그래서 윤 원장은 군의관으로 복무를 시작했다.
 
  “학창 시절 구강외과 환자라고 해봐야, 약골 골절환자 한두 사례밖에 없는 상태에서 최전방 일선에서 야전근무를 서야 했습니다. 대량으로 발생하는 악안면(顎頜面) 총창환자(부상병)를 대하니 겁나고 무서워서 혼비백산할 지경이었죠.”
 
  사방은 온통 폐허고 환자는 속수무책으로 쏟아졌다. 처참한 ‘실전(實戰)’이었다.
 
  “다행히 미군사고문관의 악안면외과반과 합동근무를 했습니다. 거기서 대처법을 배울 수 있었어요. 치과 기술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의학 발전은 군대의학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그건 아무도 부인을 못 해요. 파괴와 건설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전장(戰場)입니다. 많은 전상환자가 생기고, 그 환자에 대처하기 위해 의학 기술도 함께 발전하기 때문이죠.”
 
  유 원장은 “학교 졸업 후 비로소 진정한 배움이 시작됐다”면서 “군대생활은 그야말로 배움의 기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당시 군에서 받을 수 있는 교육과정을 섭렵하다시피 했다.
 
  군복무 중 미국 연수도 세 차례나 다녀왔다. 치과 군의관으로는 최초였다. 미국육군군의학교 초등군사반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미국육군병원 구강외과 과정, 월터리드(Walter Reed)육군병원 치과 고등교육 과정도 수료했다.
 
  1954년 1월 27일, 처음 비행기에 올랐을 때 기분은 지금도 설명하기 힘들다고 했다.
 
  “대구 K-2비행장에서 야간비행으로 일본으로 가서, 다시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습니다. 탑승 2시간쯤 돼서 도쿄 상공에 도달해 아래를 내려다봤는데, 별천지였어요. 한국은 폐허가 돼 온통 잿빛인 데 반해 전깃불과 네온사인이 바다를 이루고 있더군요. 그 기분이 어떨지 상상할 수 있겠어요?”
 
  유 원장은 이날 비행기에 오르기 전 《조선일보》와 짧은 인터뷰를 했는데, 그 기사 원본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고 했다.
 
  당시 장교가 미국 연수를 가면 의무 복무기간이 5년씩 늘어났다. 연수를 세 번 갔으니, 15년이 늘어나 버렸다. 그래서 군대생활을 무려 17년 동안이나 하게 됐다. 3개월 연수와 복무기간 5년을 맞바꾼 셈인데, 이를 감수한 건 순전히 배움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그는 “청춘을 군에 다 바쳤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도 아주 잠깐이더라”고 말했다.
 
 
  朴正熙와의 인연
 
박정희 전 대통령 진료 후 기념촬영. 1964년 2월 7일.
  배우기 위한 열정은 뜻밖의 인연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군 생활을 통틀어, 아니 인생 전체를 따져도 단연 특별하다 할 수 있는 인연을 그때 만났다.
 
  “박정희(朴正熙) 당시 대령과의 첫 만남은 미육군군의학교 연수를 떠나는 프로펠러 비행기 안에서였습니다. 박 대령은 미국포병학교에 고등군사반 교육을 받으러 가던 길이었어요. 저는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탄 터라 매우 들뜬 상태였는데, 비행 내내 들뜬 기색 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박 대령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기내에서 잠깐 인사를 나눈 인연은 4년 뒤 다시 이어졌다. 유 원장이 부산 제5육군병원 치과부장으로 있던 때다.
 
  “박정희 당시 군수기지사령관이 진료받으러 왔더군요. 내가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4년 전 미국으로 군사교육받으러 갈 때 저랑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기억하십니까’ 했더니, ‘아, 그렇군!’ 하며 반겨주셨습니다.”
 
  이후 유 박사는 1959년에 치과 고등교육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으로 또 떠났다. 무사히 교육을 마치고 귀국을 준비하던 어느 날 TV를 틀었는데, 한국에서 5·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미국 뉴스에서 처음에는 제너럴 장(장도영 장군)이라고 했다가, 다시 제너럴 박(박정희 장군)이라고 하는 등 상황 판단이 정확히 안 됐어요. 혼란스러웠죠.”
 
  몇몇 미국 친구는 귀국을 연기하고 한국 사태를 주시하라고 했다. 하지만 유 원장은 “가족과 환자가 기다리고 있다”면서 귀국했다. 그는 원대 복귀 후 국군수도통합병원에 배치됐다.
 
  “육군본부에서 박 사령관과의 관계를 알고 그리해준 걸로 알아요. 당시 수도통합병원은 웬만한 백으론 갈 수 없던 곳이지요. 백 없는 육군 소위들이 전방에서 ‘백! 백’ 하며 죽는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어요.”
 
 
  육영수, “대통령이 담배 끊게 해달라”
 
정일권 전 국무총리 진료를 마치고. 1965년 2월 27일.
  유 원장은 “그렇게 하늘(비행기)에서 맺은 인연으로 8년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치과주치의를 맡게 됐다”고 했다. 수도육군병원에서 치과과장으로 있던 1964년 2월. 박 대통령 취임 후 첫 진료의 기억이다.
 
  “대통령이 치료의자에 앉으셨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게 낡은 가죽 허리띠와 허름한 바지였어요. 대통령 눈을 직접 보는 게 어려워 시선을 입 아래로만 두다 보니, 자연히 입고 있는 바지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는데, 헌 바지에 짜깁기한 부분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 박 전 대통령의 치아 상태는 어땠습니까. 이를 통해 성향을 추측할 수도 있습니까.
 
  “얼굴이 둥그스름하면 성격이 원만하듯이 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박 대통령 치아는 다른 사람에 비해 굵고 통이 큰 편이었어요. 치아도 일정한 방향으로 차돌같이 마모되어 굳은 의지를 나타냈고, 강인한 성품을 엿볼 수 있었죠.”
 
  그는 “진료의자에 앉는 순간, 대통령의 직함을 내려놓고 순종적이면서도 무게 있게 진료를 받는 일등 환자의 자세를 보였다”고 했다.
 
  “언젠가 육영수 여사가 제게 부탁을 하나 하셨습니다. ‘박 대통령이 국정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한시도 담배를 손에서 떼지 못하신다. 담뱃진이 새까맣게 치아에 붙는 지경이다’라면서 ‘담배 좀 끊게 해달라’고요. 얼마 후 박 대통령에게 금연(禁煙)하고 6개월마다 치석을 제거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대로 따르셨고, 어렵게 금연도 하셨습니다.”
 
  대통령 주치의는 영광스럽지만, 그만큼 짊어져야 할 무게도 큰 자리였다. 보안관계상 예고 없이 경호원이 찾아와 “오셨다”고 하면, 바로 진료해야 했다. 그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도 없고 항상 긴장상태로 있어야 했다. 그렇잖아도 예리한 기구들이 많이 쓰여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데, 대통령 입속을 돌봐야 하니 긴장은 배가됐다. 아찔한 실수를 한 적도 있다.
 
  “불에 달군 조각도(彫刻刀)를 쓰는 작업이었어요. 원래는 손끝으로 조각도 온도를 확인해야 하는데, 긴장한 나머지 그냥 치아 쪽으로 가져간 거예요. ‘아차’ 싶어 얼른 빼내는 과정에서 박 대통령의 혀끝을 살짝 스쳤습니다. 굉장히 뜨거웠을 텐데 미동도 하지 않더군요. 눈을 한번 찡긋 할 뿐이었어요.”
 
  식은땀이 흘러 오싹하기까지 했다. 치료가 끝나고 “아까 정말 죄송했다”고 했더니, 박 대통령은 “아니, 나는 괜찮아. 수고했네” 하며 조용히 진료실을 나갔다고 한다.
 
  ― 박 전 대통령을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서 본 분이 아닐까 싶은데, 그는 어떤 분이었나요.
 
  “체구는 작지만 위풍과 압도적인 위압감이 있었습니다. 눈매가 매섭고 예리한 느낌에, 감히 함부로 접근하기가 겁이 나는 분이었어요. 멀리서는 냉엄하고 냉철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분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인자하고 인정이 넘치고, 다정한 면도 있었습니다. 아주 드물게 파안대소로 웃기도 했는데, 그 미소가 눈에 선합니다.”
 
  ― 진료실이 아닌 곳에서 독대(獨對)한 적도 있는지요.
 
  “1967년 어느 날, 청와대 소접견실에서 친견(親見)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일하는 데 애로사항이 없느냐’고 물으시려고 불렀어요.
 
  그때 소접견실은 마치 군부대의 작전상황실을 연상케 했지요. 한쪽은 농사 시험실을 보는 듯했습니다.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여러 가지 벼 표본을 종류별로 진열해놓은 거예요. ‘이것은 전천후로 잘 자라는 벼이고, 저것은 수확이 많은 고품종 벼’라고 설명해주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벽에는 5만분의 1 지도를 붙여놓았는데, 그 위에 붉은 펜으로 경부고속도로 예정 선을 그어놨어요. 착공 준비 단계에서 부딪히고 있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장벽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대통령의 친서
 
1968년 12월 19일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친필 서찰을 받았다.
  ― 그래서 애로사항은 말씀드렸습니까. 어떻게 보면 일생일대의 기회였을 텐데요.
 
  “대통령과 독대하는 건 정말 소중한 자리죠. 접견실로 가기 전까지 말씀드릴 내용을 여러 번 연습까지 하고 들어갔지만, 막상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대통령이 국가를 위해 그리 여러 가지를 고심하고 있는데, 감히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던 거지요. 그저 ‘현직에 충실하겠습니다’라고 할 밖에요, 허허.”
 
  기회는 예기치 않게 다시 찾아왔다. 수도육군병원에서 군대생활 막바지 근무를 할 때다. 정일권(丁一權) 전 국무총리가 치료를 받으러 왔다.
 
  “병원 환경 개선에 고심이 많던 터라 정 총리에게 병원 앞 하천을 복개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청와대·총리공관 근처인데다 환자와 외국인이 자주 다니는 곳인데, 하천이 오염돼 파리·모기가 들끓고 냄새 나서 불결했거든요. 동시에 수도육군병원 증·개축도 요청했습니다.”
 
  그 계획안은 머잖아 수렴됐다. 유 원장은 청와대로 직접 설계도와 차트를 들고 들어가 박 전 대통령에게 설명했고, 예산을 얻어내 병원 담장공사와 보수공사 그리고 특별병실 등을 증·개축할 수 있었다.
 
  이 작업을 마무리하고 유 원장은1968년에 17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했다. 박 전 대통령은 그동안의 후의에 감사한다며 유 원장에게 친서를 내렸다. 유 원장은 “이 친서는 자자손손으로 전할 영광”이라고 했다.
 
  “지금은 멀리 떠나계시지만, 제가 해드린 금니를 저세상까지 가지고 가셨어요. 그 이후부터 ‘내 환자가 저세상까지 가지고 갈 작품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진료에 임했습니다.”
 
 
  “仁術이 商術 되면 안 돼”
 
박정희 전 대통령 진료 당시 본 뜬 그의 치아틀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전역 후 유 원장은 현재 강북삼성병원의 전신인 고려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치과과장으로 근무했다. 1978년 11월, 고려병원 개원 10주년에 병원장에게서 10년 근속상을 받았다. 그때 10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계획을 세워보자’ 싶어 1979년 통의동에 지금의 유양석치과의원을 열었다.
 
  “점심시간에 식사 후 청와대 주변을 산책한 지도 벌써 40여 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바뀐 대통령만도 아홉이나 되지요. 한때는 청와대 정문 근무자들에게서 부동자세 거수경례를 받고, 경호를 받으며 대통령집무실까지 드나들었는데 말이에요. 요즈음은 저한테 ‘영감님, 어디 가십니까’라며 가끔 불심검문을 합니다. 담담한 심정으로 지난 세월을 곱씹게 되지요.”
 
  ―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대통령 주치의까지 했으면, 좀 더 욕심을 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집안 대대로 ‘벼슬길에 나서지 말라’는 유언이 내려오고 있어요. 윗대에서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으로 당파가 나뉘었는데, 우리는 소북파였어요. 선조들이 대북파에 의해 아주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해 전국팔도에 뿌려졌어요. 일족(一族)이 참화(慘禍)를 당할 때 딱 한 사람 남은 분이 선조대왕의 사위인 전창군(全昌君)입니다. 그래서 대(代)가 이어질 수 있었어요. 전창군이 돌아가시면서 ‘절대 벼슬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집안 대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절대 과욕을 부리지 않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 벼슬까지는 아니더라도요. 개원 후 줄곧 이 작은 치과에 계신 이유가 궁금해서 그럽니다.
 
  “왜 병원을 좀 더 키워서 돈을 벌지 않았느냐는 거죠? 돈벌려면 왜 굳이 치과의사를 했겠습니까. 더 수월한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요. 세대가 많이 바뀌어서 제 말이 통할는지 모르겠지만, 치과병원 본원을 점포처럼 광고하고, 의료시장이니 마케팅이니 하는 용어가 생겨났는데, 제게는 익숙지 않습니다. 인술(仁術)이 상술(商術)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치과의사는 봉사직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았어요. 진료에 만족하는 환자를 보면 저도 즐겁고요.”
 
 
  “혀는 천연칫솔”
 
  이날 인터뷰하던 탁자 위에는 바게트 샌드위치가 놓여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틈틈이 그는 딱딱한 빵을 거리낌없이 씹었다. 혹시 혼자만 아는 치아관리 비법이 있는지 물었다.
 
  “알려드릴까요? 우리 입안에는 천연칫솔이 있습니다. 혀예요. 식후(食後) 그 혀를 쓰는지, 안 쓰는지에 따라 차이가 커요. 혀는 모든 이에 다 닿습니다. 구석구석 훑어내는 거죠. 하루에 침이 페트병 1~1.5병 정도 생성되는데, 천연세제 역할을 해요. 이 사이사이로 침을 통과시키면서 혀로 한 번씩 훑어주세요. 어렵지 않잖아요. 충치와 치석 예방에도 좋습니다. 해부학에서는 혀의 기능을 세 가지만 얘기해요. 구음 작용과 미각 기능, 그리고 음식 넘기는 기능이죠. 저는 거기에 구강 내 청소 작용을 추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거 알려주는 치과의사 없지요?”
 
  ― 언젠가 이 치과가 문을 닫게 되면, 물려줄 자손은 있습니까.
 
  “자손들이 의학 쪽에는 흥미가 없었어요. 이곳은 요즘처럼 치과병원 하기에는 너무 작잖아요. 다른 용도로 쓰일 겁니다.”
 
  ― 없어지면 왠지 마음 한 곳이 허전해질 것 같습니다.
 
  “허허, 세월의 흐름이에요. 자연스러운 거지요.”
 
  유 원장은 최근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고 했다. 2017년부터 배우기 시작한 세라믹페인팅이다. 진료가 끝나면, 일주일에 두 번 서촌에 있는 작은 공방에 가서 그림을 그린다. 2년간 꾸준히 그렸더니 어느새 전시회 열 정도 실력이 됐다. ‘시작할 때 망설임은 없었느냐’고 했더니, “설렘밖에 없었다”고 한다. 방금 전,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던 그의 시계는 앞으로도 한동안 흐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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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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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hdqkd    (2019-04-01)     수정   삭제 찬성 : 19   반대 : 0
원장님 말씀 잘 듣고 봤습니다.
그리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dlskas    (2019-03-31)     수정   삭제 찬성 : 30   반대 : 1
감동했습니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20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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