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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현대사

황성혁 대표의 造船業 개척기

“나이지리아 차관은 파리가 쌓인 육포를 집어 먹으라 했다”

글 : 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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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英 철강’ 고집하는 船主에 “제국주의 냄새 난다” 一喝
⊙ “北 외무상이 ‘韓, 곧 전쟁 난다’며 선박 계약 훼방 놓기도”
⊙ “선박 수요 맞춰 조선소 내 비대화된 인력·장비 조정해야”

黃成赫
1939년 출생. 서울대 공과대학 조선과 졸업 / 한국기계(현 대우중공업), 현대건설 조선사업부(현 현대중공업), 前 현대중공업 뉴욕·런던 지점 개설 요원, 런던 지점장, 선박 판매 담당 전무이사 역임. 現 황화상사 대표 / 저서 《사랑 인생 길에서 익다》 《넘지 못할 벽은 없다》(영문판 ‘LET THERE BE A YARD’)
黃成赫 황화상사 대표는 조선업에 종사, 해외 판로를 개척하는 ‘선박 세일즈맨’으로 일했다. 사진=신승민
  “조선소를 시작한다는 것이 막막한 황무지에 바벨탑을 지어 올리는 작업 같았다. 모두가 어려운 것들이어서 무엇이 어려운지조차 몰랐다. … 조선소의 용접사는 세계 최고가 되었고, 설계사는 최신의 기술을 선도해 갔고, 세계 시장은 조선소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재현은 그때 선박 영업 책임자였다. 1년에 200일 이상을 집 밖으로 떠돌아 다녔다.” (소설 〈축복〉 중)
 
  황성혁(黃成赫·80) 황화상사 대표는 일평생 조선업(造船業)에 종사한 사람이다. 정확히는 해외 판로를 개척, 외국 선주(船主)와 선박 거래 계약을 성사시키는 ‘세일즈맨’이었다. 황 대표는 경남 마산중·고를 나와 서울대 공과대학 조선과(造船科)를 졸업, 1965년 한국기계(현 대우중공업)에서 기계부품을 설계했다. 1972년 현대중공업으로 이직, 기술자로 있다가 당시 정주영(鄭周永) 회장에게 선박 판매 사원으로 발탁됐다.
 
  ‘선박 세일즈맨’이 된 황 대표는 영국·인도·그리스·노르웨이·나이지리아 등 세계 각국을 누비며 총 400여 척의 대형 선박을 팔았다. 대형 프로젝트가 있어 정 회장과 동행할 때는 통역을 맡기도 했다. 무역업 증진에 노력한 공로가 인정돼 2011년 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자신이 경험한 ‘선박 판매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한국 조선사(造船史)’를 기술한 자서전 《넘지 못할 벽은 없다》(이앤비플러스·2010)를 펴내기도 했다. 1989년 선박 판매 담당 전무를 끝으로 현대중공업을 퇴사한 그는, 이듬해 세운 ‘황화상사’의 대표가 돼 지금까지 선박 중개업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 3권짜리 장편소설을 쓰는 데 열중하고 있다. 배경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중국의 경기 부양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한국의 조선소 현장이다. 제목은 ‘축복’이다. 황 대표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 경쟁사들의 방해 공작, 선주들의 가격 후려치기 등 여러 난관을 뚫고 선박을 파는 일이 쉽진 않았다”면서도 “그래도 역경을 이겨내고 성취를 거둔 지난날의 순간들은 축복이었다”고 자평했다. 2018년 말 초겨울, 경기도 분당시에 위치한 ‘황화상사’ 사무실에서 황 대표에게 직접 들은 ‘현대사 비화’와 ‘조선업 개척기’는 그의 소설만큼 극적이었다.
 
 
  美軍 병원 쓰레기통 뒤져 讀書
 
1986년 당시 현대 측이 외국 해운사 ‘World wide’와 선박 계약을 체결하는 모습.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주영 회장, 네 번째가 황 대표다. 당시 황 대표는 해외 계약이 있을 때마다 정 회장의 통역을 맡았다. 사진=황화상사 제공
  “마산역에 폭격도 오고 빨치산까지 들락거렸어요. 그때 마산 바다에 미군 함정들이 새카맣게 들어왔어요. 북한군이 마산에 들어오면 ‘피아(彼我) 가리지 않고 함포 사격한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우리는 삼촌 방 밑에 파 놓은 땅굴로 전부 들어가서 쥐죽은 듯 있었죠. … 병사 시체를 싣고 지나가는 트럭부터, 죽은 사람은 수도 없이 봤어요.”
 
  황 대표는 6·25 전쟁 당시 초등(국민)학생이었다. 다니던 학교가 집 뒤에 있었는데 미군 부상자를 치료하는 병원이 됐다. 당시 마산금융조합 이사장 아들이었던 네 살 위의 학교 선배와 그 병원을 자주 갔다. 선배는 어디서 구했는지 출입증을 가지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두 아이는 쓰레기통을 뒤졌다. 만화·사진첩부터 자연과학 서적에 이르기까지 한 무더기의 책이 쓰레기통에 쌓여 있었다. 황 대표는 영어로 된 만화책을 즐겨 읽었다. 그가 훗날 ‘해외 선박 시장’을 누빌 수 있게 된 어학능력의 기초가 됐다.
 
  유년 시절 황 대표는 문청(文靑)이었다. 전란을 피해 중앙 문단이 부산·마산으로 내려오던 때였다. ‘밀다원’ 다방에 모여들던 당대 문학계 거목들을 보고 자랐다. 마산고를 다닐 적엔 학보도 편집하고 문학 동인(同人) ‘백치’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다. 김춘수·김남조 시인에게 문학을 배웠다. 그때부터 언어와 문장에 재능이 있었지만, 집안 형편은 6남매 중 장남이 가난한 문인으로 사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형제들이 학교를 다니기 힘들 정도로 곤궁한 처지였다.
 
  황 대표는 문인의 길보다는 산업 역군의 길을 택했다. 공과대학 진학을 결심한 것이다. 문과보다 취직도 더 잘될뿐더러, 글에 대한 감각이 있는 자신이 공대에서 더 돋보일 거라 생각했다.
 
  “마산이 항구거든. 나는 바다가 좋고 배가 좋았어요. 뭐랄까, 낭만적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선장을 하겠다기보다는 ‘배를 한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더 컸어요. 배를 만들려면 ‘리베팅’(riveting·못접, 금속 재료를 땜질이 아닌 못질로 접합하는 방법)이라는 걸 합니다. 철판과 철판을 겹쳐서 구멍을 뚫고 못을 박았어요. 그렇게 접합을 하니까 물도 새고 소음도 심했지. 철판끼리 용접해서 붙여야 (품질이) 좋아지는데, 그때가 (조선업 선진국이었던) 영국도 못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그걸 일본이 하더라고요. 전 세계 배가 일본으로 모여들었지. 일본에서 경영 제일 못하는 조선소도 1200% 보너스를 준다는 소문까지 들릴 정도였어요. 우리는 항상 그랬거든. ‘일본이 한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고. 그래서 대학을 조선과로 가기로 마음먹었던 거죠.”
 
 
  製圖용 T자 들고 4·19 동참
 
4·19 혁명 당시 청년 시위대의 모습. 서울대 조선과에 다니던 황 대표는 제도용 티(T) 자를 들고 학생 시위대 선봉에 섰다. 사진=조선DB
  서울대 조선과에 입학한 뒤부터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과외를 시작했다. 과외 학생 집에서 방 한 칸을 얻어 학교를 다녔다. 취업 공부를 병행하기 위해 조용한 기숙사로 거처를 옮겼다. 무일푼이었지만 배포는 컸다.
 
  “그때 관리인이 나랑 같은 황가(黃哥)였어요. 내가 ‘취직하면 첫 월급 딱 줄 테니까 잔소리 말고 밥 좀 주라’고 했지. 그래서 마지막 1년은 기숙사에서 지낼 수 있었죠.”
 
  대학 시절 4·19와 5·16을 겪었다. 4·19 때는 학생 시위대 선봉에 서기도 했다. 황 대표와 같은 백치 동인이자 서울대 국문과 출신이었던 김만옥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에 그가 “제도용 티(T) 자를 멘 채 데모대 앞에 있어서 눈에 금방 띠었다”고 묘사했다.
 
  힘겹게 ‘자유당 독재’를 몰아냈지만 뒤이어 집권한 ‘장면 내각’은 실망스러웠다. 정치권은 이전투구에 바빠 국가 경영에 대한 목표의식이 없었다. 황 대표는 “그때는 나라가 아니었다. 시위대가 아무데나 가서 데모하는 일이 다반사였다”며 “조선과 학생들이 국방부에 몰려가서 ‘우리는 조선과니까 해군으로 치고 군대 면제하라’는 식으로 말도 안 되는 데모를 할 때였다. 데모대가 각 부처 장관실 앞에 진을 쳐서 장관들이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다 5·16이 터졌다. 황 대표는 그해 전방 부대로 입대했다. 그는 “(장면 내각이 형편없어서) 당시 민심도 군사정변에 대한 반감이 크지 않았다. 군심(軍心)도 동요하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오히려 군인에 대한 처우가 나아질 때였다. 황 대표는 일찍 제대한 친구들 사이에서 콩나물 몇 뿌리 들어간 ‘도레미탕’, 멀건 고깃국물이 전부인 ‘황우도강(黃牛渡江)탕’ 얘기만 듣다가 생각과 달리 부식 보급 상태가 괜찮아 놀랐다고 했다.
 
  나라는 자리를 잡아 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으로 ‘조국 근대화’의 기반을 만들 때였다. 황 대표는 “나라가 제대로 돼 간다는 걸 실감했다. 내가 할 일도 아주 많아졌다”고 했다. 1965년 한국기계에 입사한 그는 이듬해 결혼했다. 방 한 칸짜리 집에 신혼살림을 차려 놓고 저녁 6시에 들어와 밤 12시까지 ‘부업’을 했다. 남편이 씻는 동안 부인은 부엌을 치워 제도판을 놓고 연필을 깎았다.
 
 
  내가 본 鄭周永
 
1987년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勞社 대표들이 서울 계동 현대그룹 본사 지하강당에서 분규 협상을 타결하고 축배를 들고 있다. 20년 가까이 해외에 나갈 때마다 정 회장을 보좌한 황 대표는 그가 누구보다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 섬세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사진=조선DB
  “외부에 있는 기계 회사들이 한국기계에 발주를 주면 설계료가 굉장히 비싸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 아르바이트를 맡긴 거죠. 그때 한국기계 봉급이 너무 적었어요. 그러니까 본사에서도 간단한 기계 정도는 직원들이 부업으로 (설계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거죠. 월급이 7000~8000원 이랬는데, 두 달 정도 걸려서 외부 기계 설계해서 주면 20만원을 받았어요. 그때 집안 형편이 확 좋아졌어요.”
 
  황 대표는 1972년 현대건설 조선사업부에 입사한다. 전 직장에서도 기계 설계를 맡았던 만큼, 현대에서도 선박 설계사로 일할 것이라 예상했다. 현실은 달랐다. 정주영 회장이 그를 영업 사원으로 발탁한 것이다. 황 대표는 “조선 계열은 다른 직종과 달리 영업을 하려 해도 선박에 대한 전문지식이 필요하다. 부품이 수십만 개에다 구조도 엄청 복잡하다”면서 “정주영 회장을 모시고 미국·영국·인도부터 이란·이라크·쿠웨이트·아르헨티나·나이지리아까지 해운이 있는 나라는 다 돌아다녔다. 하다 보니까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내 적성에 맞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황 대표는 20년 가까이 정주영 회장을 보좌하며 외국 선주들과 협상을 벌였다. 그가 본 정주영은 ‘배짱만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 섬세한 사람’이었다. 홍콩에서의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언젠가 황 대표와 정 회장은 홍콩 제1의 부호와 선박 거래를 하게 됐다. 협상은 만만치 않았다. 정 회장과 홍콩 부호는 테이블에만 앉으면 겸손한 체하면서도 ‘뼈가 있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신경전을 벌였다. 계약 당일, 오찬 자리에서도 신경전은 계속됐다. 통역을 맡은 황 대표가 음식 한 점을 못 먹을 정도로 ‘말폭탄’을 주고받았다.
 
  “계약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도 서로가 찌뿌둥한 기분이었죠. 저녁에 호텔방으로 모셔다 드리고 저도 그 옆방에서 그냥 잤죠. 보통 아침 5시 정도면 이분이 깨요. 제가 6시에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까 이분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는데. 세상에 글쎄…. 그 골치 아픈 날에 김남조 시인의 수필집을 밤새 읽고 아침에 독후감을 쓰고 있더라고요. 그런 분이었어요.”
 
  1988년 계약을 맺은 한 외국 선주가 무리한 소송을 걸어 온 적이 있었다. 황 대표가 담당한 런던 지점에 압류가 들어왔다. 정 회장이 골치를 앓고 있는데 황 대표가 이렇게 제안을 했다.
 
  “선주와 그의 가족들을 이번 88올림픽 때 초청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정 회장은 벌컥 고함을 치며 화를 냈다. 황 대표로선 나름 회유책이었지만 정 회장의 불호령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정 회장으로서도 보복을 해도 시원찮을 사람에게 선물을 주라는 격이었으니 화가 안 날 수 없었다. 그날이 마침 토요일이라 황 대표가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정 회장의 연락이 왔다. 정 회장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신중하게 말했다.
 
  “이봐, 내가 지금 이천에 현대전자로 가는 중인데 말이야. 그 선주와 가족들을 다 88올림픽에 초청하라고. 편지를 쓰란 말이야. 아주 정중하게, 정중하게 편지를 쓰라고.”
 
  황 대표는 “마치 자신이 낸 아이디어처럼 말한 게 아직도 기억난다. 한편으론 참 웃긴 장면이었다”면서도 “정 회장은 그만큼 융통성이 있는 리더였다”고 했다.
 
 
  나이지리아 국영해운의 도발
 
  현대의 ‘선박 세일즈맨’이었던 황 대표가 가장 특별하게 기억하는 나라는 나이지리아였다. 그는 1976년 나이지리아 국영해운 NNSL과 선박 거래를 했다. 그 나라의 거래 총책임자는 교통부 차관이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로, 한국을 ‘미개지’ 수준으로 여기는 인사였다. 차관은 테이블에서 한참 황 대표를 내려다보더니 한마디를 던졌다.
 
  “미스터 황, 당신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한국에서 배를 짓겠다면, 차라리 우리가 여기서 짓겠다.”
 
  한국의 응찰(應札)을 받아줄 수 없다는 일종의 도발이었다. 당시 현대조선소가 포항제철소에서 철강을 받아 수십 척의 배를 만들 때였는데도 그랬다. 황 대표는 조용히 받아쳤다.
 
  “그 사람에게 뭐라고 할 수 있겠어요? ‘차관님, 당신 말씀 맞다. 나이지리아가 지으면 더 나을 수도 있지만, 이거는 국제거래 아니냐. 당신 나라도 어차피 영국·독일·일본과 협상해야 하는데, 그러면 당신은 칼날을 쥐고 협상하는 꼴이 된다. 그 나라들은 선진국이라는 어드밴티지를 갖고 덤비기 때문에 끌려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오면 당신들에게 가장 좋은 값과 납기(納期)를 주겠다. 당신은 칼의 손잡이를 쥐고 협상하게 되는 거다. 우리에게 발주 안 해도 좋다. 우리를 (협상 지렛대로) 딱 쥐고 그 나라들에게 써먹어라.’ 이렇게 설득을 한 거죠.”
 
  시장은 일단 뚫었지만 낙찰받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황 대표가 런던 지점장으로 나이지리아 판로를 개척하고 있을 때, 북한 외무상 일행이 현지에 왔다. 그들이 공항에 내리자 느닷없이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나이지리아 정부 측의 실수였다. 당시 한국과 달리 북한은 나이지리아와 수교를 맺은 상태였다. 망신을 당한 북한 외무상은 현지 대사관을 통해 “한국에는 곧 전쟁이 일어난다. 한국과 선박 계약을 하지 말라”고 NNSL 측을 현혹했다.
 
 
  ‘전원 철수’ 背水陣을 치다
 
  북의 방해 공작과 더불어 NNSL 측의 변덕도 계약에 차질을 빚게 했다. NNSL 측 사업자는 계약 직전 황 대표로부터 700쪽짜리 기술사용서(선박의 제원·구조 등을 상세히 적은 안내서)를 건네받고는 ‘타’(舵·rudder, 대형 선박의 키)의 원료 산지(産地) 교체를 요구했다. NNSL은 ‘영국산 철강’만을 고집했다. 현대중공업이 한국의 철, 즉 포항제철의 철로 ‘타’를 만들어선 안 된다며 사용서에 펜으로 사선을 긋기까지 했다. 황 대표는 ‘전원 철수’라는 배수진을 치고 테이블을 박차고 나갔다. 그는 우울한 동료들을 달래며 NNSL 측과 ‘고별 오찬’을 주선했다.
 
  “우리 (직원) 친구들은 완전히 밥맛을 다 잃었지. 3년을 끌었는데 물거품이 됐으니까. … 내가 그쪽(NNSL)에 그랬어요. ‘나이지리아 와서 제국주의 냄새를 흠씬 마시고 간다’고. 그러니까 (상대방이) 얼굴이 붉어지면서 ‘제국주의가 우리에게 얼마나 피맺힌 이야긴 줄 아냐’고 막 화를 내더라고요. 제가 그랬죠. ‘너 한번 생각해 봐라. 그 부품들을 다 영국산 철로 하라고 했는데 제작비·수송비는 고려해 봤냐. (부품 값이 더 들더라도 영국산을 쓰겠다는) 그런 아이디어 자체가 바로 제국주의적 사고방식 아니냐.’ 그 사람이 1시간 동안 말을 안 하다가 갑자기 ‘젠틀맨, 우리 회의실로 돌아가자. 좀 더 이야기해 볼 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올라갔더니만 (부품) 전부를 ‘현대’ 걸로 받아들였어요. ‘충격요법’이 통한 거죠.”
 
  황 대표에게 영업은 ‘문화의 교류, 철학의 교류’였다. 강단 있게 협상하되, 진심을 다하지 않으면 계약이 목전에 와서도 수포로 돌아갔다. 나이지리아 차관과 친해졌을 무렵, 그는 언젠가 ‘대접할 음식이 있다’며 황 대표를 초대했다. 차관은 바깥에 둔 검은색 무언가를 가리켰다. 황 대표는 아리송했다. 차관은 가까이 가서 그것을 툭툭 털어서 건네줬다. 수십 마리의 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차관은 ‘내가 만든 육포인데 맛있다’고 했다. 황 대표는 차마 못 먹겠다는 말은 하지 못한 채, 눈을 질끈 감고 파리 더미에 있던 육포를 입속으로 가져갔다. 그는 “그걸 씹으니까 파리 알이 이 사이에서 와글와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헬조선’論에 대하여
 
2007년 7월 3일 선박 건조 작업이 한창인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내 독의 모습. 황 대표는 오늘날 선박에 대한 세계 수요가 과거에 비해 많이 줄어든 만큼, 국내 조선소들이 인원·장비 면에서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조선DB
  황 대표는 오늘날 선박에 대한 세계 수요가 과거에 비해 많이 줄어든 만큼, 국내 조선소들이 인원·장비 면에서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조선소들은 2002~2008년 중국 경기가 호황일 때 반짝 늘어났던 선박 수요에 맞춰 규모를 키웠다. 중국 거품이 꺼지고 미국발(發) 금융위기가 터지자 문을 닫는 곳이 늘어났다. 최근까지도 각 언론 매체들은 군산·울산·거제 등 조선업 불황으로 위기를 맞는 지역경제에 관한 보도를 내보낸 바 있다.
 
  황 대표는 “지금도 국제 수요가 있다지만,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전체 조선소 수와 딱 맞을 정도의 물량뿐”이라며 “현대만 해도 울산에 독이 10개씩이나 있지 않나. 위가 커지니까 음식을 많이 먹어도 배가 안 부르는 것과 같다”고 진단했다.
 
  “(2008년 이전에) 경기가 좋을 때도 업계 사람들이 다 ‘이게 폭탄 돌리기다’는 말들을 했어요. 걱정을 하는데도 막 (규모를 키워서 폭탄을) 돌린 거예요. 그러다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도화선이 돼서 터진 거죠. 은행들이 안전 자산이라고 (선박에 투자를) 막 집어넣었는데 줄줄이 도산을 맞은 거죠. 시장 수요에 맞춰서, 과잉된 규모를 줄이면 살아날 수 있어요. 대우는 벌써 흑자를 내기 시작했죠. 현대도 (지난) 4분기에 흑자가 났을 거예요. 삼성도 마찬가지고요. (규모) 조정이 필요합니다.”
 
  황 대표는 일제 강점기와 6·25 동란을 거쳐 4·19와 5·16을 지나, 산업화 시기 수출입국(輸出立國)의 기치 아래 ‘해외 비즈니스맨’으로 살았다. 오늘날 일각에서는 한국 현대사가 독재와 착취, 양극화로 얼룩진 ‘헬조선(한국이 지옥 같다는 뜻의 멸칭)의 역사’였다고 주장한다. 황 대표는 자신이 살아 내고 이끌어 온 ‘우리들의 현대사’를 어떻게 생각할까.
 
  “‘헬조선’이요? 제가 요즘 친구 아들딸들, 손주들 결혼식에 주례를 가끔 서는데요. 이렇게 주례사를 합니다. ‘여기저기서 헬조선, 헬조선 하는데, 헬조선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정말 지옥에서밖에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새로운 미래를 생각하고 앞을 보는 사람들은 천당에서 삽니다. 아이들 많이 낳아서 후손들에게 멋진 역사를 물려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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