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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의 어제오늘내일

元老 언론인 柳根一

“‘자유가 삭제된 민주주의’의 妄靈이 한반도를 떠돌고 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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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민주주의를 내건 광장과 군중의 결합, 주로 광장의 군중을 백(back)으로 삼은 특정 이념 그룹의 획일화 기도가 진행 중”
⊙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1948년 8월 15일 세워진 대한민국이 망하리라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지금은 ‘대한민국을 지워버리려 한다’는 생각 들어”
⊙ “양식이 있다면 좌파 지식인도 ‘집단주의의 횡포로부터 어떻게 개인을 지키느냐’ 하는 문제에 관심 가져야”
⊙ “개인이 독립해 본 적이 없다 보니, 민주에 대한 인식은 강했어도, 자유에 대한 인식은 희박”
⊙ “지금은 단절적 혁명 상황… 지금 말하는 ‘남북평화’라는 것은 혁명 과정의 일부가 아닌가 싶어”
⊙ “일제 36년에 대해서는 치를 떨면서도 중화제국주의 2000년에 대해서는 치를 떠는 사람이 없는 건 이해할 수 없어”

柳根一
1938년 출생.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중앙일보》 논설위원, 《조선일보》 논설위원·주필,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 역임 / 저서: 《이성의 한국인 김규식》 《지성(知性)과 반지성(反知性)》(공저) 외 다수 / 수상: 제4회 관훈언론상(1987), 삼성언론상 특별상(2010), 제2회 서재필 언론문화상(2012)
사진=조현호
  ‘최순실 사태’가 발생한 지 2년이 됐다. ‘촛불’의 격랑에 밀려 탄핵을 당한 박근혜(朴槿惠) 전 대통령은 권좌에서 내려왔고, 문재인(文在寅) 정권이 들어섰다.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5월 10일 취임사에서 “지금 제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라면서 “저는 감히 약속드립니다. 2017년 5월 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통합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낙연(李洛淵) 국무총리는 5월 31일 취임사에서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의 산물”이라며 “촛불혁명은 문재인 정부의 출범으로 끝난 것이 아니며 촛불혁명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후 1년 5개월 동안 대한민국에 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했던 ‘공존과 통합’의 훈풍은 불지 않았다. 대신 이낙연 국무총리가 주장했던 ‘촛불혁명’의 칼바람이 몰아쳤다.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은 물론 그들을 모시던 비서실장・국가정보원장・수석비서관・비서관・행정관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갔다. 작년 대선(大選) 과정에서 ‘보수궤멸론’을 주장했던 이해찬(李海瓚)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앞으로 민주당이 대통령 열 분은 더 당선시켜야 한다”고 호언(豪言)하더니, 10월 5일에는 평양에서 북한 측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 정권을 안 빼앗기게 단단히 마음먹고 있다”고 다짐했다. 국가정보원・국방부・경찰청・KBS・MBC 등에는 ‘적폐청산위원회’가 설치됐다. KBS와 MBC에서는 ‘적폐’로 몰린 이사・기자・아나운서들이 쫓겨났다. 사법부도 ‘적폐청산’의 회오리바람에 말려들었다.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압수수색의 대상이 되고 있고, 그들을 사법처리하라는 아우성이 들린다. ‘촛불혁명’은 현재진행형이다.
 
  전 정권과 야당에 대해서는 이렇게 모질게 굴면서도 문재인 대통령은 금년 한 해에만 3차례나 김정은과 만나 “민족자주와 민족자결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남북관계를 민족적 화해와 협력, 확고한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해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로” 합의했다. 연초만 해도 당장 북한을 폭격할 것 같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월 싱가포르에서 김정은을 만나더니 “나는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많은 국민은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망하는 것 아니냐?”는 극단적인 걱정까지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말했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는 70년 전 건국한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이상한 나라’가 아닌가 하는 불길한 우려가 많은 국민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원로 언론인인 류근일(柳根一 ·80) 전 《조선일보》 주필을 만나 대한민국의 오늘에 대한 진단을 들어보았다.
 
 
  “우리 세대 전체가 집단우울증에 걸려 있는 것 같아”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친구들을 만났더니 어느 친구가 ‘우리 세대 전체가 집단우울증에 걸려 있는 것 같다’고 그러더라고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일종의 비관론, 우울감, 무력감(無力感)…. 솔직히 그런 것을 마음 한구석에 느낍니다.”
 
  ―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전에는 사이클이 좀 밑으로 내려가도 이러지 않았는데, 나이 탓인 모양이다 싶기도 해요. ‘우리가 이 나이가 되어 이런 꼴을 보아야 하느냐’ 하는 생각도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꼭 나이 탓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해요. 이런 상황을 극복할 ‘적정 수준의 대항력(對抗力)’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나이가 되어 이런 꼴을 보아야 하느냐’ 하는 생각도 들고…”라는 말에 가슴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류 전 주필과 비슷한 연세인 기자의 아버지도 세상사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에는 언뜻언뜻 그런 정서를 내비치곤 했기 때문이다.
 
  ― ‘대항력’이라는 건 무슨 의미인지요.
 
  “사실 남이 해주기에 앞서서 내가 먼저 대항력이 되면 되거든요. 그런데 내가 대항력이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젊은 사람들은 열정이 가득하고 시대적 고민을 많이 하리라고 믿습니다만,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고…. 그러다 보니 회색빛 정서가 가끔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 마지막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럴수록 서로 ‘희망 만들기’를 권장하고 격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단절적 혁명 상황”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적폐청산’을 내세우는 ‘촛불혁명’은 계속되고 있다. 사진은 2017년 10월 23일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관계자들의 촛불 1주년 선포 기자회견 모습. 사진=조선DB
  ― 지금 이 상황을 한마디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단절적 혁명 상황이라고 봅니다.”
 
  ― 무슨 의미입니까.
 
  “집권세력 스스로가 ‘촛불혁명의 산물’이라고 자임하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혁명정권이라는 얘기예요. 아닌 게 아니라 혁명적 방식이 눈에 많이 띕니다. 예를 들어서 특정한 공공 회사에 위원회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그 위원회가 징계권을 행사해요. 그거는 혁명권력 양상이거든요.”
 
  ― 그들이 추구하는 혁명은 어떤 혁명일까요.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가 삭제된 민주주의’, 대의(代議)민주주의에서 직접민주주의로 넘어가는 혁명이지요. ‘직접민주주의’라고는 해도, 본연의 직접민주주의는 아닙니다.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운 특정 이념 그룹의 주관적 노선으로 우리 사회 전체를 송두리째 끌고 가려는 것이죠.”
 
  ― 그 혁명의 끝에는 어떤 체제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다양성이 보장되고, 견제와 균형, 권력분산이 제도화되어 있는 체제가 아니라, 그걸 초월하는 권력의 통합, 획일화, 전체화된 체제겠지요.”
 
  ― 저도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 권위주의 체제와는 질적으로 아주 다른, 우리가 아직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전체주의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아직 전체주의화라고 단정하지는 맙시다. ‘직접민주주의를 내건 광장과 군중의 결합, 주로 광장의 군중을 백(back)으로 삼은 특정 이념 그룹의 획일화 기도, 그 기도를 현실화시키기 위한 선동정치가 진행 중이다’라는 정도로만 해두죠. 문제는 대중이 억지로 끌려가는 게 아니라 일부 대중은 거기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더 무서운 현상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자체를 지우려고 하는 것 아니냐’ 싶어”
 
  ―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했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그때는 하도 법으로, 군사재판으로, 계엄령으로 때리고, 형사와 기관원이 따라붙고 하니까 질식할 것 같았지만, 1948년 8월 15일에 세워진 대한민국이 망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어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과도기적으로 상당 기간 유보(留保)는 됐을망정, 당시 집권자들이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어요.”
 
  ― 정말 유신 시절에도 정권이 자유민주주의를 원천 부정하는 게 아니라 자유를 유보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까.
 
  “했죠. 다만 자유가 유보되는 기간이 너무 길고, 탄압이 너무 심하다 싶어서 암담하기는 했지만, 우리 체제가 사회주의나 히틀러식 전체주의로 가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야, 이거 1948년 8월 15일에 세운 대한민국 자체를 지우려고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1919년에 대한민국을 세웠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렇고….”
 
  ― 유신정권이나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그래도 야당·언론·지식인·재야 시민사회의 저항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 정권은 유신정권이나 전두환 정권보다도 힘이 세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 문화 분야나 학계 내부의 일부 세력이 1948년의 대한민국을 지우고,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삭제하는 일에 자진해서 앞장서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더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게 됩니다.”
 
 
  자유와 민주
 
  ―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 빼도 다 통하는 것 아니냐’ 하는 소리를 태연하게 하고…. 자유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무지하고 무관심하게 됐을까요.
 
  “사상사적 측면에서 볼 때, 민주주의는 고대(古代) 아테네에서 시작된 거예요. 반면에 자유, 자유주의의 개념은 근대 이후 서유럽에서 ‘개인(個人)’을 발견하면서 생긴 거예요. 집단주의에서 개인을 독립시킨 게 자유의 인식이거든요. 그런데 한국을 비롯해 동양에서는 개인이 독립해 본 적이 없어요. 왕조시대・일제(日帝)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다 보니 민주에 대한 인식은 강했는데, 자유에 대한 인식은 희박했어요.”
 
  ― 민주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강했던 이유는 뭘까요.
 
  “조선왕조・일제시대는 물론 자유당・박정희・신군부 때에도, 너무 엘리트 중심으로 나가다 보니, ‘이제 우리도 좀 참여해 보자’ 하는 의식이 강해졌기 때문이죠. 문제는 개인과 자유의 발견 없이 민주주의만을 추구하다 보니, 집단주의가 너무 강해졌다는 점입니다. 민족이니, 계급을 내세우는 집단주의.”
 
  ― 요즘 ‘촛불혁명’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꼭 중국 문화대혁명 때를 보는 것 같습니다.
 
  “‘대중과 다수(多數), 민주의 이름만 내세우면 무슨 짓이든지 다 해도 된다’는 생각이 극단적으로 가면 무정부주의, 홍위병(紅衛兵) 사태가 되는 거예요. 제왕(帝王)에게는 신하들이 ‘아니 되옵니다’라고 할 수라도 있지만, 분노한 군중을 업고 나가는 사람들은 말릴 재간이 없어요. 그러면 공포정치가 되는 겁니다. 부르짖던 민주도 없어지고, 음모자들과 선동가들의 세상이 되는 거예요.”
 
  ― 대중이 흥분해서 날뛰어도, 지식인·언론·사법부가 거기에 대한 브레이크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습니다. 언론인들이 대중과 장단을 같이 맞추기 시작한 거는 꽤 오래됐고….
 
  “플레이어(player)야! 선봉대, 뱅가드(vanguard)야!”
 
 
  “‘타락한 대중민주주의’ 위험성 경고하는 게 자유주의”
 
  ― 민주주의가 그런 식으로 폭주하는 걸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자유주의가 필요한 겁니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그런 위험성,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타락한 대중민주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했거든요. 아무리 다수의 뜻이라고 해도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게 자유주의 아닙니까.”
 
  ― 그런데도 자유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부족하기만 하니, 답답합니다.
 
  “‘집단주의의 횡포로부터 어떻게 개인을 지키느냐’ ‘국가의 횡포로부터 어떻게 시민사회를 지키느냐’ 하는 것은 좌우(左右)의 문제가 아닙니다. 집단주의 정권은 좌익에도, 우익에도 있어요. 양식이 있다면 좌파 지식인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 지난 9월 박정자 상명여대 명예교수가, 정규재 전 《한국경제신문》 주필이 운영하는 ‘펜앤드마이크’에 “한국인에게 개인은 있는가”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그 후 40~60대 초의 자유주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개인주의연구회’를 만들어보자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아!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 우리나라의 좌파는 NL(민족해방), 주사파(主思派)는 물론이고, 정의당 수준의 좌파도 전체주의의 위험을 경고하기는커녕, 전체주의의 동반자 노릇을 하는 것 같습니다. 왜 우리나라에는 전체주의를 고발하는 데 일생을 바쳤던 조지 오웰 같은 양심적 좌파가 없는 것일까요.
 
  “1980년대의 치열한 이념적 양극화(兩極化) 과정을 거치면서, 극좌(極左)의 기습적 전략에 의해서 운동권 전체가 NL로 넘어가 버렸어요. 지식인, 특히 젊은이라면 마땅히 그런 추세에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젊은이들일수록 더 교조주의적이고, 신흥종교에 휩쓸리듯이 영혼을 빼앗겨 버리더군요. 그리고 거기서 깨어나질 못하더라고….”
 
  ― 소련·동구 공산주의가 진작에 붕괴했고, 북한도 저 지경인데, 그들은 왜 미망(迷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386세대는) 어영부영하다가 오십 줄이 되어버린 거예요.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공부를 다시 하겠어요, 젊어질 수 있겠어요? 이미 감수성은 잃어버린 세대가 됐고, 게다가 이제는 권력자가 되어버렸으니…. 갱신(更新)과 혁신의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개인 레벨에서는 드문드문 보입니다.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라든가, 만난 적은 전혀 없지만,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이라든가….”
 
 
  ‘선출된 독재’의 시대
 
  ― 요즘 전향한 1980년대 운동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젊은이들에게 자유·전체주의·국제정세 등에 대해 가르치는 모임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1980년대식 의식화 교육을 반대 방향에서 다시 하는 셈인데, 그런 데서 희망을 봅니다. 그런 게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더 나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문제는 시간입니다. 이건 ‘시간과의 싸움’이에요! 옛날에는 ‘한 20년 준비하면서 투쟁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나도 했는데, 지금은 2년, 아니 두 달이 급해요. 이 정권 사람들이 ‘연말까지 되돌릴 수 없는 지점까지 가겠다’고 하고 있잖아요!”
 
  류근일 전 주필은 지난 10월 1일 《조선일보》에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 한반도”라는 칼럼을 썼다. 그는 이 칼럼에서 “한반도 전체가 ‘자유주의를 떼어버린 민주주의’로 가고 있다”면서 “자유주의를 배척하는 민주주의, 종족적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 포퓰리즘은 전(全) 세계적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 10월 1일 자 칼럼에서 폴란드·헝가리·터키·베네수엘라 등의 경우를 언급했는데,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들보다 나은 게 있나 싶습니다.
 
  “우리는 권위주의를 하긴 했지만 산업화에 성공했습니다. 이어서 탈(脫)권위주의도 했었고…. 그런 점에서는 우리가 훨씬 성공적이었죠.”
 
  ― 그런 나라들과 우리의 공통점은 어떤 게 있을까요.
 
  “‘선출된 권위주의’ ‘선출된 독재’라는 점이겠지요. 터키의 에르도안,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촛불혁명’ 이후의 문재인 정권 모두 ‘대중이 지지하는 선출된 권력’이라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류 전 주필은 “문제는 우리에게는 그런 나라들과 달리 북한 변수(變數)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보면 ‘공산주의라는 망령(妄靈)이 떠돌고 있다’고 했는데, 오늘의 한반도에는 남북을 막론하고 ‘자유를 삭제한 민주주의’의 망령이 떠돌고 있어요.”
 
  ― 문재인 정권이 ‘평화’를 내세우면서 남북관계를 잘 활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NLL 문제를 비롯해 군사안보 문제에서 일방적으로 너무 양보가 많았다고들 하더군요.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딱 결정해서 발표할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그야말로 ‘혁명적인 방식’인데, 그래서 더욱 우려하게 됩니다.”
 
 
  ‘궤멸론자’와 ‘총살론자’의 우정
 
지난 9월 20일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내외는 백두산에 함께 올랐다.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 종전(終戰)선언과 평화협정에 목을 매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걱정스럽습니다.
 
  “이렇게 이념적으로 상극(相剋)하는 체제와 마주하고 있을 때에는, ‘힘과 힘의 균형에 의한 평화’나 ‘자유체제의 월등한 힘에 바탕을 둔 평화’, 이 두 가지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이렇게 일시에 일방적으로 양보하다 보면 균형이 깨지거든요. 이거는 평화가 아니라 국가의 위기를 자초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앞세워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하고, 대북(對北) 전단 살포를 막는 등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류 전 주필의 언성이 확 높아졌다.
 
  “북한 인권 문제, 탈북민의 강제송환, 공개처형, 정치범 수용소 문제, 국군포로 문제, 이런 문제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는 평화라는 걸, 인간으로서, 양식 있는 인간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국군포로 문제 등에 대해 정부 입장에서 한마디 말은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판이 깨집니까? 깨지면 깨지는 거지! 안 되더라도 말은 해야 할 거 아니에요?”
 
  ―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평양에서 북측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가 정권을 뺏기면 (교류를) 못하기 때문에 제가 살아 있는 한 (정권을) 절대 안 뺏기게 단단히 마음먹고 있다”고 말했더군요.
 
  “지금 말하는 ‘남북평화’라는 것이 혁명 과정의 일부가 아닌가 싶어요. 남에서는 ‘보수세력 궤멸론’이 나오고 있는데 《로동신문》 등 북의 매체에서는 연일 ‘남한의 보수패당을 총살해 버려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좌우가 있더라도 우리끼리 친구가 되어야 하는데…. 보수세력을 고립시키는 ‘궤멸론자’와 ‘총살론자’의 우정관계라는 것이 있을 법한 일입니까? 그러니 ‘이게 혁명의 일환이 아니냐’고 묻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언론이 ‘촛불혁명’의 한 축이 돼”
 
2017년 9월 12일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조합원들은 명지대학교까지 찾아가 강규형 교수의 KBS이사직 사퇴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사진=MBC뉴스 캡처
  ― 최근 이낙연 총리는 ‘가짜 뉴스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정규재TV’ 같은 우파 인터넷 방송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주 작은 비판도 용납 못하는 전체주의의 본질이 여기서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낙연 총리가 ‘가짜 뉴스’ 얘기를 하는 것을 들으면서 유신정권 때 ‘유언비어 유포’라는 논리로 비판 언론을 봉쇄하고, 해외 언론과 접촉하면 ‘국가모독죄’로 잡아넣던 게 생각나더군요. 운동권이라는 게, 과거 자기들의 저항투쟁으로 먹고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들이 집권하면서 옛날에 권위주의 정권이 하던 짓을 하고 있어요. 그들은 이제 도덕적으로는 내세울 게 없어요! 적나라한 권력에 불과해요!”
 
  ― 어느 정권 때 기사 쓰기가 가장 편했습니까.
 
  “언론에 대해 거의 놔둔 정권은 노태우(盧泰愚) 정권이었어요. 김영삼(金泳三) 정권 때는 심하지는 않았지만 노태우 정권보다는 좀 더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어요. 김대중(金大中) 정권은 세무사찰, 약점 털이를 해서 비판적 논조를 없애려고 꽤 애를 썼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어요.”
 
  ― 그때 김대중 정권이 류 주필님과 김대중 전 주필,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 등 세 분을 내보내면 봐주겠다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맞아요. 우리 사주(社主・방상훈 《조선일보》 사장)가 용감하게 말을 안 들었어요.”
 
  ― 평생 언론에 몸담으셨는데, 정권과 언론이 싸우면 결국 누가 이기던가요.
 
  “단기적으로는 권력이 자유 언론을 뭉개고 질식시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런 권력이 붕괴하면 자유 언론이 되살아났어요.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지금은 일부 언론이 ‘촛불혁명’의 한 축(軸)이 됐다는 점입니다. 좌파 언론뿐 아니라 일부 우파 언론도 그래요. 그 결과 좌우 언론이 모두 급진 ‘촛불혁명’에 길을 내준 결과가 됐습니다. 지금은 권력이 언론을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시대가 아니라, 언론 내부의 혁명적 권력이 언론 전체를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꼴입니다.”
 
  ― 요즘 KBS나 MBC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홍위병이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관영매체예요! 강규형 교수를 KBS 이사 자리에서 몰아낸 것이나, 앵커·기자들 쫓아내는 걸 보면, 이건 숙청이에요, 숙청!”
 
  ― 주류 언론들도 전반적으로 위축된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언론에서 정보산업·매체산업으로 가면서, 세상에 대해 광야의 목소리, 예언자적 증언을 한다는 언론 본연의 정신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지요. 너무 경영적 측면이 중시되다 보니 ‘기자(記者)’에서 ‘사원(社員)’으로, ‘자유로운 지적(知的) 전사(戰士)’에서 ‘월급쟁이’로 바뀐 거죠.
 
  미국이 언론의 산업화라는 점에서는 우리보다 더하지만, 그래도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가 트럼프에 대해 물고 늘어지는 것을 보면, 아직도 기자 정신이 왕성해요.
 
  우리나라에서는 정권이 바뀜에 따라 언론사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커서 휘둘리는 점이 있지 않은가 싶어요. 후배들을 보기에 안타깝고, 나무라기보다는 위로·격려해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공천을 잘못한 거예요!”
 
사진=조현호
  ― 우파 시민단체들이 많이 사라졌고, 남아 있더라도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우파, 자유민주시민이라고 하는 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예요. ‘나는 돈 벌어서 우리 가족 먹여 살리고 행복하게 살겠다,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생활 하겠다’, 이게 우파 본연의 행복추구권이에요. 그래서 우파에서는 전업(專業)운동가가 나오기 힘들어요. 우파에서는 시민사회는 보조적이고, 국가와 원내 보수정당이 선봉에 설 수밖에 없어요.”
 
  ― 과거에는 우파 정권에 사소한 잘못만 있어도 좌파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정권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지금은 정권이 잘못하고 있는 게 많은 데도 그러질 못하고 있습니다.
 
  “우파 시민사회는 힘은 세지 않지만 그래도 분노할 줄 압니다. 그런데 원내(院內)정당, 자유한국당에서 그걸 받아먹어야 할 거 아니에요? 우파 시민단체에서 정권을 비판하면, 그걸 받아서 성명서 내고, 원내 투쟁하고, 방송국에 항의해야 하는데, 그게 없는 거예요, 원내정당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우리, 그 얘기 좀 합시다!”
 
  ― 문재인 정권 지지율 80% 나오던 무렵에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자유한국당의 무능과 무기력함을 꼽더군요.
 
  “자유당 때 민주당이 얼마나 잘 싸웠습니까? 그리고 김영삼・김대중 두 분과 그들의 정당이 얼마나 잘 싸웠어요? 거기서 우리가 마음에 위로를 받고, 민추협(民推協)을 만들면 시민들이 호응하고 박수 치지 않았습니까? 언론이 마음대로는 못했어도 음(陰)으로 밀어주고, 공감하고, 지원해 주고, 그 사람들이 집권하길 학수고대하고….
 
  그런데 지금의 원내정당은 그런 역할을 안 하는 거예요! 못한다기보다는 안 하는 거예요!”
 
  ― 그 이유가 뭘까요.
 
  “공천(公薦)을 잘못한 거예요! 박사・판사・변호사…. 이런 사람들만 공천하지, 투사를 공천하지 않아요! ‘선비 사(士)’나 ‘일 사(事)’자 붙은 직업을 가진 분들은 머리가 명석한데, 체질적으로 싸울 줄을 몰라요! 월급쟁이야, 고급 월급쟁이! 그런 사람들, 책상에서 연구해야 할 사람들이 일선 국회의원이 되니까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는 거예요!”
 
  ― 자유한국당이 최근 조강특위(조직강화특별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재야(在野)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면서 싸우는 40·50대 자유운동가들이 많잖아요? 이분들을 모두 원내로 불러들여야 해요! 다만 20명이라도 그런 사람들을 뽑아 올리라 이거예요! 그런데 절대로 안 하거든! 저희끼리, 양반 자제 같은 사람들이 다 해 먹는 거예요!”
 
  ― 2012년 총선 때 민주당 비례대표 공천을 보니 전태일 여동생으로 시작해서 임수경으로 끝나더군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용도가 분명하고 싸울 수 있는 투사들이었습니다.
 
  “좌파가 그런 전략적인 거를 잘해요. 보이지 않는 전략타워가 있는 것 같아. 또 좌파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을 갖다 놔도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생태계(生態系)가 형성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파는 전부 자기가 무대 위에 올라가서 탤런트 노릇 하려고 하지, 묵묵히 음지(陰地)에서 프로듀서 역할을 하려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런 틀을 만들고 봉사하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면 좋겠어요.”
 
 
  脫美入中
 
  ― 대한민국이 지난 70년 동안 자유와 번영을 누려온 것은 미국·일본 등 해양세력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거기에서 이탈해 북한-중국-러시아로 이어지는 대륙세력으로 회귀(回歸)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 정권이 출범하기 전후로 기억하는데, 어느 좌파 인사가 미국과의 관계를 걱정하는 지적에 대해 ‘그럼 중국하고 같이해서 먹고살면 된다’라고 했어요. 그런 식으로 해양세력과의 우호・동맹관계를 깨고, 오히려 대륙국가, 일종의 동방적 전제(專制)체제에 편입되는 것을 ‘민족주의’인 것으로 몰고 가는 분위기가 굉장히 강합니다.”
 
  ― 중국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제 36년에 대해서는 치를 떨면서도 중화제국주의 2000년에 대해서는 치를 떠는 사람이 없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일본제국주의가 잔인무도했지만, 중화제국주의가 2000년간 우리에게, 그리고 주변 소수(少數)민족에게 한 짓을 보면, 그건 ‘야만(野蠻)’이에요, 야만!
 
  일본은 19세기 말 탈아입구(脫亞入歐)를 했는데, 지금 우리는 거꾸로 탈미입중(脫美入中)을 하고 있어요. 이거는 정신 나간 짓이라고 봐요.”
 
  ― 미국·일본을 멀리하는 데 민족주의 정서를 이용하는 모습도 많이 보입니다.
 
  “왜 21세기에 머리가 글로벌하게 오픈되지 않고, 오히려 100년 전 위정척사(衛正斥邪), 동학혁명 때로 돌아가는지…. 대원군과 전봉준 장군의 공통점이 배외주의(排外主義)예요. 그때는 그게 어느 정도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아니잖아요? 국수주의(國粹主義)로 나간 북한은 굶어 죽게 됐고, 세계주의로 나간 우리는 발돋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19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은 당시보다도 30년 전의 사고(思考)에 갇혀 계속해서 세계화(世界化)를 제국주의로만 인식해서, 미국이나 유럽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윤리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확신하고 있어요. 이런 확증 편향이 있는 한, 이들은 우리를 퇴영적(退嬰的)인 방향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종족적 민족주의가 너무 신앙화되어 있어요.”
 
 
  대중조작의 시대
 
  ― 정치체제뿐 아니라 시장경제체제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현 정권 사람들에게는 시장경제 자체에 대한 적대감이 있는 것 같아요. 시장경제 주체 일부의 갑질은 나도 싫어합니다. 황제경영, 기업범죄도 안 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그동안 걸어온 자본주의적 자본 축적 과정, 경제적인 면에서의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 과정은 성공작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아주 적대감과 증오심이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삼성전자에 대해 ‘야, 이 사람들이 성공했구나, 세계적 회사를 만들어서 국리민복(國利民福)에 기여했구나’ 하는 생각은 안 하고, 기업가들을 무슨 고전적 좌익 문예작품에 나오는 것 같은, 일종의 사악한 착취자로 몰아가는 것 같아요.”
 
  ― 일각에서는 경제가 급격하게 나빠지고 문재인 정권에 대한 인기가 떨어지면 보수(保守)세력에게 다시 기회가 오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그럴 것 같지는 않아요. 오늘날 선전선동 기술이 너무 발달해서, 서커스를 조금 벌여놓으면 아무리 자영업자들이 붕괴하는 숫자가 늘어난다 해도 텔레비전에서는 나라가 잘 되어가는 걸로 보일 거예요. 통일쇼, 집단체조, 남북정상들의 포옹, 김여정과 이설주의 탤런트화…. 경제가 좀 나빠져도 남북회담 한 번 하면 도로 복구되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대중이 그런 쇼를 원해요.”
 
  ― 정보혁명, 정보의 공개, 이런 것들이 선전선동에 대한 방파제가 되어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정보혁명에서 앞섰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대중조작이 쉬워졌다는 얘기입니다. 아, 우리 국민들이 여기에 대해 면역이 되어 있는지…. 어떤 때 보면 절망적이에요. 선전선동에 맞서려면 영롱한 개인적 지성(知性), 지적(知的) 정직성을 추구하면서 ‘아닌 건 아니다’라고 하는 정신이 어려서부터 축적되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개인주의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말로는 ‘개인의 추구’를 떠들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정보혁명에 놀아나는 집단주의가 판을 치고 있어요. 박사 학위가 있는 지식인까지도 그런 정보혁명의 집단주의에 매몰되고, 거기에 굴복하고 타협하고 있어요. 지금 이 나라에 지성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 그걸 극복할 방법이 없을까요.
 
  “추상적인 말이 될까 봐 걱정이 되는데, 희망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50% 이상, 60% 이상 내가 만들려고 노력하고, 만드는 데서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류근일 전 주필은 10월 1일 자 《조선일보》 칼럼에서 소개했던 제임스 웰던 존슨의 흑인 영가 ‘당신의 목소리를 최대로 올리라, 그리고 노래하라’를 다시 상기시켰다.
 
  “소리 높이 노래하자/ 하늘, 땅이 울리도록/ 어두운 시절이 가르쳐준/ 신앙의 노래를/ 자유와 더불어/ 승리의 그날까지.”
 
 
  ‘지식인의 투항’
 
  ―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결정 당시 헌법재판소가 변변한 법리(法理)를 제시하지 못한 것이나, 사법부마저 ‘적폐청산’한다고 난리를 치는 걸 보면 참담합니다.
 
  “그걸 보면서 프랑스혁명 당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합니다. 흔히 프랑스혁명이라고 하면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을 떠올리며 예찬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참 잔인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했던 귀족 부인의 시체를 끌어내 왕비에게 보게 하고, 혁명광장(현재의 콩코르드광장)에 설치한 기요틴(단두대)에서 사람들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낄낄거리고….”
 
  ― 그랬었죠.
 
  “이렇듯 혁명은 가면 갈수록 과격해지고 인간성을 타락시킵니다. 거기에 대해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거기에 몰입해서 같이 즐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지는 않더라도 침묵내지 굴복하는 것입니다. ‘지식인의 투항’이 벌어지는 거죠. 개인적인 지적 양심에 의해 ‘아니오’라고 말했다가는 자기가 단두대로 가야 하니까요. 광장에 한번 나갔다가 온 사람은 동물적 직관으로 아는 거예요, 그 공포를.
 
  투항하다 보면 ‘스톡홀름증후군’이 일어납니다. 인질이 자기를 납치한 범인의 심리적 포로가 돼서 납치범을 인정하고, 의존하고, 협조하게 되는 거죠.”
 
  ― 법관들이 구속된 전임 대통령들에게 잔인할 정도로 중형을 선고하는 것이나, 전임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을 구속하라고 주장하는 것, 심지어 대법원장을 선거로 뽑자는 주장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지식인의 투항’ 이상의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젊은 법조인일수록 진보적인 비판법학(Critical Legal Studies·CLS)을 공부했을 거 아닙니까. 비판법학은 프랑크푸르트학파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바탕 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해체를 주장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법을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지 않고,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특정 이념세력과 동조하게 되는 거지요. 그러다 보면 사법부의 판별 기능이 없어지고 사법부의 운동화, 사법운동이 됩니다. 사법부뿐 아니라 다른 장르나 부문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지금의 좌파를 守舊세력으로 공격해야”
 
2017년 2월 서울대 탄핵 반대 대자보를 시작으로 60여 개 대학에 트루스 포럼이 만들어지고, 이들의 연합체인 트루스 얼라이언스도 결성됐다. 사진=조선DB
  ― 솔직히 쉬운 상황이 아닙니다. 희망을 갖자고 얘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엄혹한 상황을 견뎌내기 위한 마음의 준비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보내준 질문지를 보니 ‘20대 때 고생하면서 어떻게 견뎌냈느냐’고 물었던데, 결국은 ‘젊음’이었던 것 같아요. ‘내게는 살아갈 날들이 많다. 언젠가는 저 사람들은 늙어 죽고, 나는 올라가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들고…. 결국 그렇게 되더군요.”
 
  그러면서 류 전 주필은 “한 가닥 희망은 지금 20대가 30대, 40대와 다르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며칠 전에 광화문에서 각 대학 트루스 포럼(Truth Forum)들이 처음으로 태극기집회를 주도했던데, 그런 식으로 비록 소수라고 하더라도 젊은이들이 새로운 각성을 해서 씨앗을 뿌리기를 기대합니다.
 
  1980년대 운동권들은 지금 50대 중반이에요. 차기 정권 들어설 때면 그들은 60대에 육박합니다. 그럼 벌써 노인 세대가 되는 거예요. 각성한 젊은이들이 빨리 그 세대를 제쳐버리기를 바라는 거죠.”
 
  ― 그동안 보수주의나 자유주의 운동단체들에 고문으로 이름을 빌려주시면서, 우파 시민운동을 오랫동안 지켜보셨습니다. 우파운동에서 보완해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뭘 지키려는 수세적(守勢的)인 태도를 취할 게 아니라 새로운 시대정신을 선취(先取)해서 공세적으로 나가야 합니다. 지금의 좌파를 수구(守舊)세력, 기득권세력, 타락한 권력, 타락한 혁명세력으로 규정짓고, 그들보다 더 나은 대안(代案)을 가지고 그들을 쳐야 합니다. 지적 우세를 확보해서, 지식으로 이겨야 합니다.”
 
  ―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이게 시간과의 싸움이어서 걱정입니다.
 
  “시간과의 싸움인데, 거기에 결정적인 변수가 미국입니다. 그런데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하는 것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좌파든 우파든 대한민국의 엘리트를 버린 것 같아요.”
 
  ― 무슨 의미입니까.
 
  “대한민국을 경멸하다시피 하는 것 같아! 변수로 치지를 않아! ‘차라리 김정은이와 직접 얘기하는 게 낫지, 너희 남한 친구들은 저리 가’ 그러는 것 같아요.”
 
  ― 트럼프가 왜 그러는 것일까요.
 
  “트럼프가 사상이 이상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한국이 우방국으로서 너무 잘못하고 있으니까 그러는 거죠. 보수는 기대할 게 없고, 진보는 우방으로서의 기본 룰을 안 지키는 것 같고….
 
  그런데 김정은이가 핵을 가졌잖아요. 그러니 김정은이와 직접 대화를 하겠다는 거죠. 미국・북한이 1급이 되고, 한국은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2급이 되어버린 거예요. 트럼프와 그의 참모들, 미국의 지식인계가 한반도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너무 과소평가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나는 고전적 자유주의자”
 
  ― 본인의 정체성(正體性)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결국은 자유주의자더구먼. 고전적 자유주의자! 다만 자유주의 정치체제・헌법체제의 테두리 안에서라면, 그 안에서 진보적인 사회・노동정책은 받아들일 용의가 있어요. 불행히도 그런 온건 좌파가 맥을 못 추고 있으니까, 자유주의적 방어의식이 더 강해질 수밖에 없지만…. 조금 보탠다면, 조지 오웰이 말한 〈1984〉체제, 즉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입장이죠. 나는 그게 진정한 진보라고 봐요. 나는 방어만 하는 보수는 아닌 것 같아요. 비판적 성격이 강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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