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배진영의 어제오늘내일

《한국진보세력연구》 펴낸 南時旭

“‘保守’가 어때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자는 게 保守 아닌가?”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진보-보수는 현상타파-유지를 기준으로 하는 것… ‘진보’라고 불러준다고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진보적’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 아니야”
⊙ 이승만, 조소앙의 사회당 창당대회에 비서 보내 “공산당과 싸우는 나라에서는 사회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축사
⊙ 조봉암의 진보당, 강령에서 6·25에 대한 소련-북한 책임 명시…, 분단과 전쟁의 책임을 미국에 돌린 민노당 강령과 대조적
⊙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중도좌파… 문재인 정권은?

南時旭
1938년 출생.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박사 / 《동아일보》 정치부장·편집국장·논설실장·상무이사,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 《문화일보》 사장, 대통령자문 통일고문, 고려대·세종대 석좌교수 역임. 현 동아일보사 부설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 이사장 / 수상: 동아대상, 위암장지연상, 중앙언론문화상, 서울시문화상, 임승준자유언론상, 인촌상, 서울대언론인대상 등 / 저서: 《항변의 계절》 《체험적 기자론》 《인터넷시대의 취재와 보도》 《한국보수세력연구》 《한국진보세력연구》 《6·25전쟁과 미국》
사진=조현호
  건국 이래 70년을 이어온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진보(進步)’를 자처하는 집권 세력이 ‘보수(保守) 세력 궤멸’과 20년, 30년 집권을 호언하고 있다.
 
남시욱 이사장의 《한국진보세력연구》.
  이럴 때에 《동아일보》 편집국장, 《문화일보》 사장 등을 지낸 남시욱(南時旭·80) 화정평화재단 이사장이 《한국진보세력연구》(청미디어) 개정증보판을 펴냈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 지 9년 만이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의 변화, 즉 이명박(李明博)-박근혜(朴槿惠) 정권 아래서의 이른바 진보 세력의 추이・활동, 2016~2017년 박근혜 탄핵사태와 문재인(文在寅) 정권의 집권・탄생 등을 추가했다. 전에는 없었던 자료사진들도 많이 집어넣었다. 남 이사장은 2005년에는 한국 보수 세력의 뿌리와 변화를 살펴본 《한국보수세력연구》를, 2011년에는 그 책의 증보판을 낸 바 있다. 60대 후반 이후 13년 동안을 한국의 보수・진보 세력을 탐구하는 데 보낸 셈이다.
 
  이념적 대치선이 뚜렷한 한국 현실에서,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고, ‘보수’와 ‘진보’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한국보수세력연구》 《한국진보세력연구》는 참 드라이(dry)하다. 길게는 구한말(舊韓末)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땅의 보수·진보 세력, 정당·사회단체들이 피력했던 주의(主義) 주장들을 담담하게 기술(記述)하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는 ‘천상 기자’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물론 행간(行間)에서는 ‘보수’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느껴진다. 거기에 더해 해방 이후 서구(西歐)와 같은 합리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진보 세력’으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친북(親北) 세력이 그 자리를 차지한 우리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짙게 느껴진다.
 
  남시욱 이사장을 만나 한국 진보 세력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보수 세력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舊韓末의 진보-보수 논쟁
 
  ― 우리나라의 이념적 지형을 이야기할 때, 보수와 진보로 나누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좌파와 우파, 혹은 자유민주 세력과 전체주의 세력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진보·보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편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진보다, 보수다 하는 것은 운동법칙, 즉 현상타파냐 현상유지냐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보수-진보 논쟁은 상당히 오랜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구한말에도 이미 이런 관점에서 보수와 진보 논쟁이 있었고 해방 직후에도 있었어요.”
 
  ― 아, 그렇습니까.
 
  “신채호(申采浩)의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중국 량치차오(梁啓超)의 영향을 받아 ‘진보를 위한 파괴’를 내세운 ‘파괴주의’를 주장합니다. 진보주의 내지 급진주의를 주장한 거지요. 이에 맞서 장지연(張志淵)의 《황성신문》에서는 ‘보수주의로 진보함이 가량(佳良)한 방침’이라는 논설을 통해 ‘개혁시대에는 부득불 파괴 방법을 맹렬히 실행해야 부패한 국가와 부패한 사회를 개량하리라 하나, 각국의 혁신사를 연구한 즉 실로 파괴주의는 완전히 이익이 없고, 보수주의로 진보함이 극히 좋은 방침이 되는 줄로 생각한다’고 주장합니다. 영국이나 일본은 보수주의를 해서 흥했지만, 프랑스나 터키는 혁명이나 급진개혁을 추구하다가 나라가 기울었다는 내용의 논설들도 다수 보입니다.”
 
  남 박사는 “이러한 대립이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잠복해 오다가 3·1운동 뒤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갈등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러시아와 상하이(上海)에서는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의 영향을 받아 공산당이 생기지만, 국내로 사회주의 사상을 들여온 이들은 도쿄 유학생들이었습니다. 하긴 그 시대를 살았던 분들 말씀을 들어보면 정말 똑똑했던 사람은 사회주의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1922년 1월 구한말의 대신으로 유림(儒林)의 거두였던 김윤식(金允植)의 사회장(社會葬) 논쟁을 계기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충돌합니다. 여기서 사회주의 세력이 승리, 김윤식의 사회장은 무산됩니다. 당시 국내파 공산주의 세력의 지도자 김한은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김윤식의 사회장 반대는) 귀족사회를 파괴하고 자본가 계급 타파와 사회 개량가의 매장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해방 후부터 좌파는 ‘진보’라고 자처”
 
여운형(오른쪽)과 박헌영.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좌익 3당 합당 등에서 계속 박헌영에게 이용당하고 주도권을 빼앗겼다.
  ― 일제(日帝)시대~해방 후에는 우익은 민족주의 세력, 좌익은 사회주의 세력이라고 칭했지요.
 
  “김윤식의 사회장 논쟁이 있던 1922년 말부터 ‘조선 민중이 취할 길이 사회주의에 있는가, 아니면 민족주의에 있는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시작됩니다. 이때부터 우익은 민족주의 세력, 좌익은 사회주의 세력으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이런 경향은 해방 이후까지 계속됩니다. 김일성(金日成)도 우익 세력을 ‘민족주의 세력’이라고 불렀으니까요.”
 
  ― 좌파 세력이 ‘진보 세력’을 자처하는 건 언제부터인가요.
 
  “해방 후 여운형(呂運亨)이 만든 건국준비위원회는 그 선언에서 ‘진보적 민주주의’와 ‘반동(反動) 세력’을 언급했습니다. 박헌영(朴憲永)은 ‘8월 테제’에서 당시의 정세에 대해 평가하면서 ‘파시즘의 완전한 패배로 인해 진보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승리가 세계 혁명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소련과 함께 미국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인식하고 있는 게 흥미롭습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이렇듯 좌파가 ‘진보’라고 자칭한 게 뿌리가 깊습니다.”
 
  ― 그렇다고 해서 좌파를 ‘진보’라고 불러줄 필요가 있을까요? ‘진보’라고 하면 그 자체로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보수’와 ‘진보’라고 하는 순간, ‘진보’를 자처하는 세력이 이기고 들어가기 때문에 그런 용어는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진보’라는 말 자체에 가치판단이 들어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동성애(同性愛)에 찬성하는 걸 가지고 언필칭 진보라고 하지만, 그걸 바람직한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잖아요? 우리가 흔히 부르는 ‘진보 정당’ ‘진보 세력’이라는 단어는 ‘진보주의 정당’ ‘진보주의 세력’의 약칭입니다. 이념과 슬로건상의 괴리(乖離)는 있게 마련입니다. 편의상 저들을 ‘진보’라고 불러준다고 해서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까지 진보적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 좌우로 나누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도 명확하지는 않아요. 예컨대 1951년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은 ‘반공적 복지주의’ ‘민주사회주의’를 내세우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발표합니다. 이 경우 전통적인 좌우 개념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동성결혼 이외에도 환경, 여성, 낙태, 안락사 등등 여러 문제는 좌우 기준으로 분류하기보다는 진보-보수 기준으로 분류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여운형의 黨은 사회민주주의 아닌 정통 사회주의 정당”
 
  ― 《한국진보세력연구》를 보면 해방 직후 수많은 중도좌파, 좌파 정당들이 명멸(明滅)했더군요. 그들 가운데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볼 만한 정당이 있었습니까? 예컨대 조선인민당·근로인민당 등을 만들었던 여운형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여운형은 제너럴리스트였습니다. 정치학자 이정식(李庭植) 교수의 지적처럼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 등의 용어에 끼워 맞출 수 없는 융통성을 지닌 인물이었죠. 여운형은 계급투쟁과 유물사관을 배격하고, 무조건적인 국유화(國有化)보다는 국공유(國公有)와 사유(私有)의 혼합소유 형태를 이상으로 생각했던 반(反)볼셰비키 사회주의자였습니다.”
 
  ― 여운형이 만든 조선인민당 등이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글쎄요. 여운형이 만든 조선인민당 등은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의 전위(前衛) 정당인 조선공산당에 비해 개방적인 대중정당을 지향하는 온건 좌파 정당이었지만, 강령에서 계획경제제도의 확립을 내걸었어요. 이런 점에서 후일 조봉암(曺奉岩)의 진보당이나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정당과는 분명히 다른 정통 사회주의 정당이었습니다.”
 
  ― 조선공산당과는 색깔을 달리했던 조선인민당 등이 결국 조선공산당에 흡수되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통합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운형은 기본적으로는 좌편향이어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만들었을 때, 박헌영 등에 대해 독자적이고 일관된 원칙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백남운)의 좌익 3당 통합 때에는 소련과 김일성에 대해 지나치게 의존적이었습니다.
 
  여운형은 좌파 독립운동가로서 상징적 존재였지만, 정치지도자로서는 지지기반이 미약해 당시 압도적이던 공산당 조직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박헌영은 통일전선 결성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여운형의 명망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조선공산당은 보안·총무·선전 등의 요직을 차지해 건국준비위원회나 조선인민공화국을 장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근로인민당, 사회노동당 등에도 자기 세력을 심어 결정적인 순간에 공산당의 입장을 지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上京하자마자 소련영사관부터 찾아간 박헌영
 
  ― 서점에 가보면 박헌영 전집, 박헌영의 일대기를 다룬 만화책이 있더군요. 박헌영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박헌영은 평생 레닌과 스탈린에게 충실했던 볼셰비키였습니다. 해방 직후 광주(光州)에서 상경(上京)하자마자 서울 소련영사관을 찾아갈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후 거의 매일 소련 부영사 샤브신과 만나 당무(黨務)를 보고하고 남한 정세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그가 발표한 ‘8월 테제’도 코민테른이 1928년 ‘12월 테제’에서 밝힌 혁명노선을 충실하게 답습한 것이었습니다. 이후에도 박헌영은 신탁통치 반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립, 남한 내 좌익 3당 통합(남로당 건설), 남로당과 북로당의 통합 등 고비마다 소련의 지령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 그런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비운(悲運)의 혁명가’로 기려지고 있군요.
 
  “살아남은 남로당 계통 사람들이 그만큼 많은 것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1980년대 주사파(主思派)가 득세하면서 국내에서도 북한의 논리에 따라 박헌영을 비판하는 진보·좌파 지식인들이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을 비민주적으로 재건하고 파벌주의와 좌경모험주의로 흘러 남로당을 붕괴시키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죠. 심지어는 그가 미제(美帝)의 고용간첩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요.”
 
  ― 해방 후 우파 진영에서는 보수와 진보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까.
 
  “우파 정치지도자들도 진보 정당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9월, 송진우(宋鎭禹) 등 민족지도자들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군 환영을 명분으로 국민대회준비위원회라는 것을 만듭니다. 이 강령 제4항을 특히 기억할 필요가 있는데, ‘보수-진보 두 갈래의 정당을 만들어 민주주의 방식에 의한 정당정치를 실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승만, 조소앙의 사회당 창당에 비서 보내 축하
 
사회당을 창당한 조소앙.
  ― 건국 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긍정하는 바탕 위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진보 정당이 나올 여지는 없었을까요.
 
  “있었지요.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조소앙(趙素昻) 선생이 창당한 사회당이 바로 그런 정당이었습니다. 그해 4월 김구(金九) 선생과 함께 남북협상 참석차 평양에도 다녀왔던 조소앙 선생은 김일성에게 실망하고 노선을 바꿉니다. 10월 한국독립당을 탈당하면서는 ‘자신이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당(自黨)의 정책이 집행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주권과 영토가 완성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을 거부할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라는 성명을 발표, 김구를 비판합니다. 그리고 1948년 12월 11일 사회당 창당을 선언합니다.”
 
  ― 사회당은 어떤 정당이었습니까.
 
  “창당선언서에서 사회당은 ‘일체 민족 진영과 보조를 같이하여 현실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남북통일을 완성하고 정치·경제·교육상 완전한 균등사회 건설에 일로 매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일반적 사회주의가 아닌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지향하면서 대한민국을 인정하고 민족 진영과의 협력을 다짐하고 있는 데서, 해방 직후 반(反)박헌영계 온건 좌익이나 중간 좌파 정당에 비해 훨씬 선명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사회당 창당대회 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직접 축사를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회당에 입당했던 김영기(金英基) 제헌의원에 의하면 그건 아니고, 비서관을 보내 축사를 했다고 합니다. ‘공산당과 싸우는 나라에서는 사회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익 정당 일색인 마당에 사회당이 생긴다니 반갑고, 더구나 조소앙 선생이 이 당을 한다니 반갑다’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를 보니,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가 축사를 대독(代讀)하는 동안 조소앙은 대통령에게 예(禮)를 갖추기 위해 참석자 전원에게 기립(起立)해서 듣도록 해서 화제가 되었다고 하네요.”
 
  조소앙 선생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됐지만, 6・25 때 납북(拉北)되어 1958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납북되지 않고 대한민국의 정치 공간에서 제대로 된 진보의 모습을 실천할 수 있었다면, 이 나라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진보당과 민노당
 
진보당 사건으로 재판정에 선 조봉암(왼쪽).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조봉암의 진보당은 어떻게 봅니까.
 
  “조봉암은 일제시대에는 박헌영 못지않은 공산주의자였지만, 해방 후 박헌영과 결별하고 난 후에는 공산주의와는 선을 분명하게 그었습니다. 진보당 강령을 보면, 특히 훗날 민주노동당 강령과 비교해 볼 때 반공주의적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서 《한국진보세력연구》에 인용된 진보당과 민노당의 강령에 나타난 역사인식을 비교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8・15 해방을 무한한 기쁨과 감격으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때에… 북한에서는 붉은 군대의 점령하에 크렘린의 충성한 앞잡이들인 러시아-한국인들을 중심으로 공산괴뢰 권력기관이 수립, 강화됨과 아울러… 남한에서는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수립 이후를 통하여… 낡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형식과 모방하에… 이 나라 민주정치는 건전한 발전을 할 수 없었으며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혼란은 나날이 우심하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탈린과 그의 일당은 드디어 북한 괴뢰들로 하여금 불의의 침략전쟁을 도발시켰다.〉 진보당 강령
 
  〈우리 민족은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숱한 고초를 겪어 왔다. 미국을 정점으로 한 외세는 한반도를 분할하고 남북 간에 전쟁을 부추겨 민족상잔의 참극을 야기시켰으며, 남북 모두에게 소모적인 군비경쟁을 유도함으로써 민중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민주와 자유를 빼앗아 갔다. 또 친일 매국노들은 해방 조국의 지배자로 만들고, 군사독재를 앞세워 민중의 거센 투쟁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의 희생을 강요해 왔다.〉 민노당 강령

 
  ― 진보당 사건은 직접 목격한 사건일 텐데, 조봉암에 대한 당대인들의 평가는 어땠습니까.
 
  “조봉암이 인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자유당은 그보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고령(高齡)에 대해 압박을 느꼈겠지요. 유죄의 근거는 양명산이라는 브로커의 증언과 쪽지 정도인데, 그걸로는 징역 몇 년 정도지 사형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사회주의
 
  ― 진보당이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했던 걸로 볼 수 있을까요.
 
  “선언이나 강령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명확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적 진보주의’ ‘모든 민중에게 자유와 평등과 사람다운 생활을 보장하여 줄 가장 진보적인 진정한 사회적 복지국가 건설’ 등의 표현이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배반하고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무시, 유린하는 소비에트 공산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민주주의와는 상용할 수 없다’ ‘우리 민중은 조직력과 계획성을 구비한 진정한 민주주의, 즉 새로운 사회적 민주주의에 입각함으로써만 자유발전의 대로를 힘차게 전진할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했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지요.”
 
  ― 반공적 입장을 피력했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또 있었습니까.
 
  “전진한(錢鎭漢) 초대 사회부 장관이 1955년 창당한 노농당(勞農黨)은 ‘대한민국 주권하의 남북통일 성취’ ‘공산독재주의와 관료독선주의의 배격과 자유협동사회 건설’을 명시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전진한이 1958년 다른 혁신계 인사들을 영입해 만들었던 민족주의민주사회당은 민주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 ‘종래와 같이 사회민주주의라고 하지 않고 민주사회주의라고 한 것은 공산주의를 배격함은 물론이고 유물주의를 신봉하면서 수단, 방법만을 달리하는 종래의 사회민주주의와 대립하는 까닭’이라고 했습니다.”
 
  ― 민주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다른 겁니까? 거기서 거기 아닌가요.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면서, 다만 폭력혁명 대신 의회민주주의적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민주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과 혁명적 목표를 궁극적으로 포기하고, 세계관적 노동자 정당에서 다원주의적 국민정당으로 전환하는 한편, 시장경제 체제를 수용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1951년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이 주도한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1959년 독일 사회민주당이 채택한 고데스베르크 강령 등이 바로 사회민주주의에서 민주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들입니다.”
 
 
  ‘혁신’이라는 용어의 등장
 
  ― 1950년대의 ‘진보정당’들이야말로 ‘진보’라는 말에 값하는 정당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런 정당들이 빛을 보지 못했을까요.
 
  “6・25를 겪고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많은 국민은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라고 하면 ‘초록은 동색(同色)’이라며 공산주의와 동일시했습니다. ‘사회주의’의 ‘사’자만 들어가도 표를 얻을 수 없었지요. 거기에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도 있었고…. 1980년대에는 전두환 정권이 대외(對外) 선전용으로 인위적으로 관제(官製)혁신정당을 밀어준 것이 오히려 혁신정당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지요.”
 
  ― 1950년대 이후에는 ‘진보’라는 용어보다는 ‘혁신’이라는 말이 많이 쓰였더군요.
 
  “1954년 사사오입 개헌 후 호헌동지회를 중심으로 민주당 창당이 논의됩니다. 이 과정에서 신당의 정치노선을 둘러싸고 신익희(申翼熙)・조병옥(趙炳玉)・곽상훈(郭尙勳) 등 민주국민당 내의 자유민주파(보수파)와 조봉암・서상일(徐相日)・장택상(張澤相)・신도성(愼道晟) 등 민주대동파(혁신파)가 대립합니다.
 
  결국 민주당에서 배제된 민주대동파는 1955년 9월 경기도 남양주 광릉에서 회합을 갖는데, 이것이 건국 후 최초의 범(汎)혁신계 합동모임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일제시대부터 활동해 온 장건상・김성숙・이동화・조봉암・윤길중・정화암 등이 참석했습니다. 이때 기존의 보수 정당에 반대하는 ‘범혁신정당’을 만들자는 논의가 나옵니다. ‘진보’라고 하면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연상하는 반공주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혁신’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게 되면서, 이후 1970년대까지 ‘혁신’이라는 말이 통용되게 됩니다.”
 
  ― 4・19 후 혁신정당과 단체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등장했습니다만, 5·16 후 된서리를 맞았습니다. 4·19 후의 혁신 세력이 정말 군부(軍部)가 체제 위기를 느낄 정도로 그렇게 대단했었습니까.
 
  “5・16 후에 군사정부가 혁신 세력을 탄압한 것은 박정희(朴正熙) 장군에 대한 의심을 해소하기 위한 측면이 강했습니다. 왜 북(北)에서 밀사(密使)가 왔다는 사건이 있었잖아요?”
 
  ― 황태성 사건 말씀이시군요.
 
  “그런 것 때문에 미국이 의심을 하고, 야당이 문제를 삼으니까, 반공적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더 강하게 나간 것이죠. 거기에다가 조봉암 같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도 사라지고 해서, 1960~1970년대 혁신 정당들은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식인들 사이에 월남식 통일에 대한 기대 있었다”
 
박현채 전 조선대 교수.
  ― 1960년대에는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 통일혁명당 사건 같은 자생적 혁명당 사건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나중에 가서는 조작 사건이다 해서 말이 많았는데, 그 시대를 살았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혁당 사건, 특히 1974년의 제2차 인혁당 사건 같은 경우 관계자들을 그렇게 처형해야 할 정도의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조작 사건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정창현 국민대 교수 같은 이는 ‘인혁당이 당의 수준으로까지 발전되지는 않았으나 4・19 전후 활동했던 혁신 세력들이 5・16 이후 합법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전국 규모의 비합법적 전위 정당을 준비하려다가 적발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 1・21사태,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 등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월남식 봉기와 공산통일이 가까워졌다고 환호하는 지식인들이 당시에 있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당시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월남식 공산통일을 지향하는 분위기가 지식인 사회 일각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나중에 민중당 대표를 지내고 간첩 사건으로 감옥살이도 했던 김낙중(金洛中)에 의하면, 월남전이 한창일 때 빨치산 출신 박현채(朴玄埰・전 조선대 교수)는 북한군이 전선을 밀고 내려오는 정규전 방식에 의한 해방투쟁이 미국의 간섭으로 한계에 부닥친 상황에서는 월남에서와 같은 유격투쟁에 의한 통일투쟁이 불가피하므로 미국을 상대로 하는 민족해방투쟁의 제2전선을 한반도에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합니다. 박현채는 1971년까지도 그런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 혹시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대학 동기 중에도 월북(越北)한 사람이 둘이 있어요.”
 
  ― 그 사람들 이름이 뭔가요.
 
  “유명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은 북한 입장에서도 이용가치가 없어서 별로 대접받지도 못해요.”
 
신영복 교수(왼쪽)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간 복역했다.
  ― 통일혁명당 사건의 신영복(申榮福) 교수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언젠가 ‘시청 앞 노숙자를 보고 잠을 못 이루었다’는 그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상당한 휴머니스트이고 문학가적 자질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사회과학을 했다는 데 있습니다. ‘미숙한 사회과학도’라고 할까요?”
 
  ― 1960~70년대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 특히 언론인 출신인 송건호(宋建鎬)·리영희(李泳禧) 같은 이들에게서 좌파적인 느낌 같은 걸 받은 적이 있습니까.
 
  “리영희 교수와는 그리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고…. 나중에 진보운동에 몸담거나 진보지식인으로 알려진 사람들 중에 알고 지낸 이들은 있지만, 그때는 민주화운동, 언론자유운동 하는 걸로 생각했지, 진보운동 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별로 안 했어요.”
 
 
  NL과 PD
 
  ― 1980년대 이후 학생・노동운동권과 진보 정당들은 그 이전의 좌파운동이나 혁신 정당과 얼마나 관계가 있을까요.
 
  “해방 이후 좌파의 이념적 흐름이 알게 모르게 이어졌다고는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1980년대 386세대는 과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구했던 남로당이나 사회민주주의/민주사회주의를 추구했던 혁신 정당의 전통을 잇기보다는 바로 북한 김일성 주체사상에 입각한 민족해방노선(NL)이나, 독자적인 레닌식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새로운 노선(PD)을 더 열심히 추구했다는 점에서 종전과는 구별된다고 봅니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 이후 나오는 여러 민중 정당도 종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는 절연(絶緣)하다시피 한 신세대 좌파들의 정당이었습니다.”
 
  ― 결국은 운동권 내에서 NL(민족해방)이 PD(민중해방)를 누르고 헤게모니를 잡은 이유는 어디 있다고 봅니까.
 
  “1989~1991년 소련・동구의 붕괴는 한국 좌파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공산주의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소련・동구의 붕괴를 보면서 그로기 상태에 빠졌지요. 그 틈을 타서 ‘우리식 사회주의’ ‘우리 민족끼리’ 등을 내세워 온 민족절대주의, 종족적 민족주의 성향의 NL이 득세할 수 있게 된 거지요. 물론 NL이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비롯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즉각적인 민중봉기 등을 주장했던 PD 계열과는 달리 ‘직선제 개헌’ 등 대중에게 호소력 있는 주장을 폈던 것도 주효했지요.”
 
 
  김대중과 노무현
 
  ― 현 집권 세력은 김대중(金大中) 정권을 ‘진보1기 정권’이라고 평가합니다. 김대중 정권을 어떻게 봅니까. 김대중 정권은 좌파 정권이었나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산하 목포인민위원회, 좌익계인 백남운의 남조선신민당 등에서 활동했던 이력 때문에 이념적으로 계속 의심을 받아온 것은 사실입니다. 김 전 대통령도 자신이 젊은 시절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건 시인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사회주의자였다고까지는 보지 않습니다. 집권기의 행적을 놓고 본다면, 영국의 앤서니 기든스가 주장했던 ‘제3의 길’ 정도를 추구했던 중도진보노선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앤서니 기든스도 2001년 7월 서울에서 강연을 하면서 김대중 정권을 ‘중도좌파 정권’이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 노무현(盧武鉉) 정권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본인은 ‘통합적 진보주의자’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는 인권변호사 시절에는 재벌해체, 재벌 소유 토지의 강제징발을 주장했었고, 초선 의원 시절부터 언젠가는 진보 정당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대통령 시절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는 자신을 비판하는 좌파 지식인들을 ‘교조적(敎條的) 진보’라고 비판하면서 ‘유연한 진보’를 강조했습니다. 더 나아가 ‘진보적 시민민주주의’ ‘진보적 시장주의’를 주장하고, 심지어는 ‘좌파자유주의’라는 말까지 했었죠.”
 
  ―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상적 좌표를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한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중도좌파 노선이라고 해야겠지요.”
 
 
  최초의 학생운동권 출신 대통령
 
2012년 8월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주자이던 문재인 현 대통령이 광주시의회 브리핑룸에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을 배경으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문재인 정권은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요.
 
  “문재인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초의 학생운동권 출신 대통령이면서도,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내세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진보 세력을 ‘민주화를 성취한 양심 세력’이라고 표현하는 정도지요. 하지만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에 압도되어 월남 패망을 보면서 희열을 느꼈다고, 신영복을 자신이 존경하는 사상가라고 공언하고, 공개적으로 전향 선언을 한 적이 없는 임종석(任鍾晳) 비서실장을 비롯해 전대협 운동권 출신들이 청와대에 포진하고 있는 걸 보면, 그의 이념적 좌표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를 제3기 민주정부라고 하더군요.
 
  “그건 1987년 민주화 이후 들어선 보수 정권은 모두 비민주적인 정권이라고 암시하는, 독선적이고 오만한 태도입니다. 스스로 민주정부라고 자처하려면 독재를 하지 않는 정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부여야 하겠지요. 헌법의 핵심 가치인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와 시장경제질서를 수호할 때, 비로소 민주정부의 자격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 ‘진보 정권 20년 집권론’ 같은 소리를 들으면, 이 정권 사람들은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진보 세력이라면 인간의 존엄성, 민주주의, 자유와 인권, 생명존중이라는 진보사상 본연의 이상(理想)을 저버려서는 안 되겠지요. 문재인 대통령은 2016년 11월 촛불집회에서 ‘오직 권력에 영합할 뿐, 아무런 이념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보수인 양 위장하고 있는 세력’을 ‘위장보수’라고 비판하면서 ‘경제를 망치고 안보를 망쳐온 가짜 보수 세력을 거대한 횃불로 모두 불태워 버리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맹목적인 북한 정권 감싸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친북(親北)·종북(從北) 세력이야말로 위장된 진보요, 가짜 진보 세력입니다. 이런 가짜 진보 세력과 결별해야 문재인 정권이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수, 자신감 가져야”
 
  ― 4·27 판문점 정상(頂上)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남북회담 때 나온 북한 사람들 얼굴을 보면, 마치 남한을 접수하기라도 한 듯한 의기양양한 표정이더군요. 얼마 전 KBS의 한 프로를 봤더니 ‘38선에서의 작은 충돌이 확대되어 6·25전쟁이 되었다’는 주장이 나오더군요. 1980년대 브루스 커밍스류의 주장인데, 그런 식으로 가면 6·25에 대한 책임이 흐려지고, 북한에 대한 경계심이 없어지게 됩니다. 공영방송인 KBS까지 그래서야…. 이건 북한에 대한 무장해제입니다. 이념적으로 북한과 싸울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 한반도 주변 정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종전(終戰) 선언 얘기가 나오는데, 그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원래 6·25 발발 후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유엔군을 파견한 것은 침략자를 격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작전 종결을 선언하면 그만입니다. 유엔군이 들어올 때 경찰행동(police action)이라고 했는데, 경찰과 도둑이 함께 종전 선언을 한다는 건 웃기는 일이지요.
 
  중국이 자꾸 거기에 끼어들려고 하는데, 중국은 자격이 없어요. 국가가 아니라 중국인민의용군 자격으로 참전해 놓고, 이제 와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중국이라는 국가 자격으로 평화협정에서 한 자리 차지하려고 드는 건 난센스입니다.”
 
  ―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보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먼저 자신감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보수’가 어때서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자는 게 보수 아닙니까? 대한민국을 이만큼 살게 만들었고, 민주화를 이룩한 게 한국의 보수 세력 아닙니까? ‘진보’라는 말에 위축되고, ‘보수’라고 자신 없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조회 : 9606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810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