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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비화

빨치산 토벌 대장 차일혁은 영화 〈암살〉과 〈밀정〉의 실제 모델이었다

“아들에게 마지막 수영 시범 보여준 아버지는 금강 곰나루 밑에 가라앉은 인민군 탱크를 끌어안고 있었다”

글 : 문갑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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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기 암 이겨낸 ‘전쟁 영웅’ 차일혁 경무관의 아들 차길진, 처음으로 ‘아버지의 독립운동사’를 밝히다
⊙ 조선인 교사 두들겨 패던 일본 형사 구타한 뒤 금강산 신계사로 갔다가 중국으로 망명
⊙ 중국 상해에서 독립투사 지강 김성수 선생 만난 뒤 일본 밀정 암살
⊙ 광복 후에는 미 군정이 기용하던 일본 악질 형사들 권총으로 처단
⊙ 6·25 터지자 의용대 결성… 전투경찰로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 참여
⊙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사살한 뒤 섬진강에서 화장시켜 줘
⊙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삶을 생이 다할 때까지 추적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의 故차일혁 경무관(왼쪽)과 독립투사 김성수 선생.
  《월간조선》 6월호에 ‘한국인 연대기’ 첫 회 ‘동학농민군 정읍 접주 차치구 4대’라는 기사가 보도됐다. 당시 제목은 “동학 접주는 보천교주를 낳고 독립군을 도운 보천교주의 아들은 국보를 지킨 호국영웅이 되었으며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을 토벌한 장군의 아들은 영혼과 대화하는 법사(法師)가 되다”였다. 이 글이 나간 후 차길진(71) 법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울 대학로에 있는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런데 목소리가 이상했다. 한참 쉰 것 같기도 하고 억지로 말을 뱉는 것 같았다. 그가 진단서 한 장을 보여줬다. 암(癌)이 거의 말기까지 진행됐는데 수술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것이었다. 사자(死者)의 영혼과 대화하고 앞날을 훤히 들여다본다는 법사도 암을 피해가지 못한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기자들이 날 찾아온 적은 있지만 내가 먼저 기자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래서 보자고 한 이유가 뭔지 알려주길 기다렸는데 그는 하염없이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다는 영상(映像)만 틀어주는 것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과 탄핵을 예언했다는 단 한 편의 영상을 제외하면 모두가 선친 차일혁(車一赫) 경무관과 관련된 것이었다.
 
  차일혁, 호적상 이름은 차갑수이며 족보상 이름은 차용철인 그는 1920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나 1958년 8월 9일 사망할 때까지 그야말로 풍운아(風雲兒) 같은 삶을 살았다. 경찰로는 유일하게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된 그는 화랑무공훈장을 5번이나 수상했을 정도였다. 그 대표적인 수훈(殊勳) 가운데 하나가 남부군 빨치산 대장 이현상(李鉉相)을 사살한 것이다.
 
  전쟁에서의 공로뿐 아니라 그는 화엄사에 불을 질러 빨치산이 숨을 곳을 없애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문짝만 뜯어내는 기지를 발휘해 천년고찰 화엄사를 지킨 인물이다. 만일 그때 그가 윗사람들의 지시대로 화엄사에 불을 질렀다면 귀중한 문화재는 잿더미로 변했을 것이다. 그때 차일혁이 남긴 명언(名言)은 여러 차례 사람들에게 회자된 바 있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차일혁이 살린 절은 화엄사뿐이 아니다. 지리산 노고단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천은사(泉隱寺), 경상남도 하동의 쌍계사(雙磎寺), 전북 고창의 선운사(禪雲寺)도 그의 깊은 안목 덕분에 살아나 문화유산으로서는 물론 숱한 시인, 묵객(墨客)들의 영감을 자극했다.
 
  반골(反骨) 기질이 다분한 그는 공산당과 싸우는 데는 용맹을 떨쳤지만 아부와 아첨에 약해 충주경찰서장, 진해서장, 공주서장 등 한직(閑職)을 전전했는데 가는 곳마다 전쟁고아나 주민들을 위해 힘을 써 그가 거쳐 간 곳에는 대개 송덕비(頌德碑) 같은 것들이 세워졌다. 그런 그가 공주 금강에서 아들 차길진이 보는 앞에서 익사(溺死)한 지 올해로 60년이다.
 
  나는 차길진 법사를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그가 죽음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용한 능력을 갖게 된 것이 60년 전 참혹하고도 어처구니없는 현장을 목도(目睹)한 데 따른 정신적 충격이 그에게 특수한 능력을 준 게 아닌가 하고 막연하게 추측했었다. 차길진 법사는 “그동안 6·25 이후의 선친이 행한 일은 잘 알려졌는데 베일에 싸인 전사(前史)를 공개하고 싶다”고 했다.
 
 
  芝江 김성수 선생
 
  차일혁은 전북 김제군 금산면 성계리에서 태어나 1935년, 즉 16세 때에 홍성공업전수학교에 입학했다. 평탄하게 학업을 계속했으면 그는 기술을 익혀 식민지 치하에서 밥 벌어 먹고살 수 있었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 그의 운명(運命)을 틀어버렸다. 홍성공고 2학년 때 그는 조선인 선생을 구타한 일본인 형사를 두들겨 패버렸다. 큰일 날 짓을 한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창 극악했을 때, 일본인 형사를 구타했으니 더 이상 국내에서는 살 수 없었다. 차일혁은 결국 중국행을 택했는데 거기서 만난 사람이 지강(芝江) 김성수(金聖壽·1900~1969) 선생이다. 김성수는 경상남도 밀양 사람으로 원래는 평양이 본거지였다고 한다. 김성수의 일가는 평양 사람답게 독실한 기독교 장로회 신자들이었다.
 
  김성수의 일가가 설립한 학교가 계성고등학교다. 김성수 선생 역시 계성고를 졸업했는데 1919년 3·1운동 당시 김성수 선생의 둘째 누나의 남편인 김래봉 계성고 학교장, 김성수 선생의 아버지 김응삼, 삼촌인 김응진, 사촌 김영환 등이 3·13 밀양 만세운동과 4월 6일 2차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여기에 당시 스무 살이던 김성수도 거사(擧事)의 주역으로 참여했다.
 
  독립만세 선언서를 등사하고 비밀리에 학생들을 모아 태극기를 만드는 일을 맡은 것이다. 마침내 4월 6일 자정 600여 명의 농민들이 모여 만세 함성을 내지르자 아닌 밤중의 홍두깨처럼 놀란 일본은 헌병을 동원해 주동자들을 검거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인 형사를 두들긴 차일혁에 앞서 김성수 선생 역시 조선 땅에서는 발붙이고 살 형편이 안 돼 결국 중국행을 택하게 됐다.
 
  김성수는 중국 상해(上海)에서 약산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여기서 영화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조승우가 김원봉으로 연기한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가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라고 한 대사를 기억할 것이다. 즉 김성수와 김원봉은 동향(同鄕)이었던 것이다. 이후 김성수는 중국황포군관학교 보병과에 입학했다.
 
  황포군관학교를 마친 뒤에는 상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간하였으며 1930년에는 백야 김좌진 장군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했으며 1932년 상해사변이 벌어졌을 때는 중국 제19로군에 입대해 일본군과 싸웠다. 그해 7월 우당 이회영(李會榮·1867~1932) 선생이 일본 경찰에 잡히자 밀고자를 처단하기도 했다.
 
  우당 이회영 선생에 대해 짚어본다. 이회영 선생은 조선시대 명재상 백사 이항복 선생의 10대손으로, 조선이 망한 1910년 12월 형 이건영, 석영, 철영과 동생 시영, 호영 등과 함께 가솔 5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의 기틀을 세운 애국지사다. 광복 후 살아돌아온 이는 건국부통령 이시영(李始榮)뿐, 모두 일제의 고문에 숨졌다.
 
  이회영 선생은 헤이그 밀사사건을 주도했으며 신민회 창립의 핵심 멤버였는데 이런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되자 미련 없이 만주로 가 고향에서 가지고 간 전 재산을 경학사,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등을 세우는 데 썼다. 독립을 위해 그야말로 전 가족 전 재산을 바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다. 그 손자가 전 국정원장 이종찬(李鍾贊), 이종걸 의원이다.
 
  이야기는 다시 김성수 선생에게로 돌아간다. 김 선생은 1933년 3월 백정기, 이강훈과 함께 주중(駐中) 일본공사 아리요시를 폭살하려던 육삼정(六三亭) 의거와 같은 해 5월 오면직, 안경근 등과 함께 일본 밀정 이종훈 처단에 관련돼 1937년 일경에 체포돼 징역 18년형을 언도받고 8·15 때 출옥했다. 백정기는 윤봉길, 이봉창과 함께 삼의사(三義士) 중 한 분이다.
 
 
  남화한인청년연맹
 
  이런 열혈 독립투사 김성수 선생을 차일혁이 만난 것이 1936년이다. 중국으로 가기 전 차일혁의 행각은 역시 일본인 형사를 참살한 백범 김구 선생의 행로(行路)와 비슷하다. 백범이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공주 마곡사에 숨어든 것처럼 차일혁은 전주 송광사, 대원사를 전전하다 금강산 신계사에 숨어들어 땔감나무를 하는 ‘불목하니’ 생활을 하다 인연을 만난다.
 
  아들의 신병치료차 절에 머물던 부인이 장마로 미끄러운 산길을 오르다 실족(失足)했는데 발이 날랜 차일혁이 구해준 것이다. 이 인연으로 차일혁은 헌병 소좌와 중추원 참의로 있던 고영균의 수양딸과 결혼하게 되고 이후 중국 상해로 떠난 것이다. 김성수 선생과 차일혁은 교유는 1년 남짓했지만 두 사람은 때로는 사제(師弟), 때로는 부자(父子)처럼 지냈다.
 
  차일혁과 만났을 때 김성수는 김원봉의 의열단원(義烈團員)이었는데 첫 만남은 상해의 어느 팥죽집이었다고 한다. 김성수는 팥죽을 먹고 있는 차일혁을 향해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들고 싶다고 했나? 내가 보기엔 군사학교에 갈 재목이군” 하고 물었다. 178cm의 훤칠한 키에, 다부진 몸매, 그리고 강인한 얼굴을 지닌 차일혁이 김성수는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차일혁은 김성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김성수는 말이 적었다. 차일혁이 일본인이 운영하는 홍구금융조합에서 일한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로부터 차일혁은 김성수를 사흘에 한 번꼴로 만났다. 주로 상해 저잣거리의 팥죽집이나 조선식 대폿집이었다. 당시 그 근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은 한인 밀집 거리였다.
 
  어느 날 김성수는 차일혁을 보고 “난 자네의 맑고 굳센 눈빛을 보는 순간 이봉창(李奉昌)의 눈빛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네”라고 말했다. 김성수는 쏘아보는 듯한 차일혁의 강한 눈초리를 예사롭지 않게 보고 있었다. 차일혁도 그런 것을 알기 때문에 일부러 도수 없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점점 의기투합(意氣投合)하게 됐다.
 
  차일혁은 스승이나 다름없는 김성수에게 자신의 지난날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들려줬다. 일본인 경찰을 때리고 도피한 일, 금강산에 피신했다가 곤경에 처한 귀부인을 구해준 일, 그 일이 인연이 돼 그 집 수양딸과 결혼한 일, 장인이 헌병 소좌를 지낸 중추원 참의였다는 사실, 그리고 장인의 힘을 빌려 중국에 오게 된 일들을 보따리를 풀어 제치듯 낱낱이 털어놨다.
 
  이후 차일혁은 김성수가 하는 일에 적극 참여했다. 차일혁은 김성수가 관여한 상해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했다. 앞서 말했듯 남화한인청년연맹은 백정기, 이강훈 등이 주중일본공사를 처단하려다 정보노출로 인해 실패한 육삼정 사건 등으로 다수가 잡혀가고, 박기성(朴基成)마저 중국중앙군관학교 11기생으로 입교해 활동이 중단됐다.
 
  그 무렵 차일혁은 중국중앙군관학교를 다니며 김철(金喆)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당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투사들은 대부분 가명을 썼다. 국내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자구(自救) 수단이었다. 일본 경찰에 잡혔을 때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려운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자신으로 인한 가족들의 피해를 막기 위한 배려였다.
 
  차일혁은 어머니의 ‘김’씨 성에다가 어렸을 때 이름이었던 ‘차용철’에서 ‘철’자를 따왔다. 이름만 보면 전혀 알 수 없는 이름이 됐다. 김성수나 박기성이 광복 후 차일혁을 보고 ‘철 동지’ 또는 ‘김철 선생’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런 연유였다. 그런 김성수가 1937년 1월 17일 일본경찰에게 체포됐다. 그때 차일혁은 김성수와 같이 있었다.
 
  다행히 몸이 빠른 차일혁은 그곳을 빠져나와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는데 이를 두고 차일혁이 김성수를 배신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런데 6·25전쟁 중 김성수를 만났던 《전북일보》 김만석(金萬錫) 기자가 그의 비망록에 이 부분을 기록해 둬 오해가 뒤에야 풀렸다. 김만석 기자는 당시 김성수가 자신에게 말했던 것을 그대로 기록해 뒀던 것이다.
 
  김만석의 비망록에 의하면 “철(喆, 차일혁의 가명) 동지는 내 아들도 되고 제자도 되지만, 한 번도 내 뜻을 거스린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잡힌 것이 차일혁 때문에 잡혔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에게 더 큰 임무를 주었다” 이로써 차일혁에게 씌워진 혐의는 당사자인 김성수가 광복 후 밝힘으로써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벗겨졌다.
 
 
  해방 후 악질 日帝경찰 처단
 
해방 후 일제 악질 경찰 사이가를 저격했던 동지들과 차일혁(왼쪽에서 네 번째) 경무관의 가족들이 1954년 남원 광한루에서 만났다. 오른쪽 끝이 김성수 선생.
  차일혁과 김성수가 재회한 것은 광복된 지 1개월이 지난 1945년 9월 중순이었다. 이때 차일혁은 제대로 먹지를 못해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차일혁이 뒤늦게 서대문형무소로 갔으나 김성수는 이미 출옥한 뒤였다. 그래서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출옥동지회’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곳 사무실을 찾아갔다. 천만다행으로 그곳에서 김성수를 만날 수 있었다.
 
  광복된 서울에서 차일혁은 김성수를 통해 독립투사와 애국자들을 많이 만났다. 이때 차일혁은 “사회혁명에 도움을 주는 이로운 사람이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차리혁(車利革)’으로 바꿨다. 차리혁으로 개명한 차일혁은 전국의 독립투사(아나키스트) 67명이 모여 만든 ‘자유사회건설자연맹’에 가입했다. 그때가 1945년 9월 29일이었다.
 
  여기에는 남화한인연맹 출신인 김성수를 비롯해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창, 노동자자치연맹 대표와 공주경찰서장을 역임한 조시원, 그리고 국내에 남아 있던 총독부 관리들을 처단하게 될 공형기 등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아나키스트(anarchist)는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로 알려졌으나, 엄밀히 따지면 그렇지 않았다.
 
  차일혁을 보더라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일혁은 1948년 정부 수립 후 국방부 산하의 호국군과 청년방위대에서 간부로서 활동을 했고, 전쟁 때에는 경찰에 투신하여 빨치산토벌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운 것을 보면, 무정부주의자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없지 않아 있었다.
 
  광복된 조국에서 아나키스트인 김성수, 이규창, 공형기, 차일혁 등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것을 다짐했다. 당시 미군정은 조선총독부가 물러간 뒤의 행정상의 공백과 치안유지를 이유로 일본 총독부 관리들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었다. 김성수와 차일혁 등은 이러한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며, 일제강점기 때 독립투사를 탄압했던 일본 총독부 관리들을 처단하기로 했다.
 
  물론 미군정하에서 이것은 법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런 것에 구애받을 차일혁 일행이 아니었다. 이후 차일혁은 그들을 처단할 권총 3자루를 어렵게 구해 집에 숨겨두고 처단할 자를 물색했다. 드디어 처단할 자를 찾아냈다. 먼저 독립투사들을 괴롭혔던 서울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미와(三輪) 경부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원산을 거쳐 일본으로 도망가고 없었다. 다음으로 지목된 자가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이었던 사이가(齊賀)였다. 사이가는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미와 경부에 필적하는 대표적인 악질 경찰이었다. 사이가는 차일혁·김성수·이규창·공형기 등 4명에 의해 서울 원남동에서 사살됐다. 그때가 1945년 11월 2일 저녁 무렵이었다.
 
  차일혁 일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총독부 상해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을 무수히 잡아갔던 쓰보이(坪井岩松)를 권총으로 처단했다. 일설에 의하면 상해에서 잡힌 독립투사 중 쓰보이에게 조사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악명을 떨쳤던 악질 경찰이었다. 이로 인해 차일혁은 미군정의 수배를 받게 됐다.
 
 
  경찰 투신
 
차길진 법사는 영화 〈암살〉과 〈밀정〉은 차일혁 경무관과 김성수 선생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후 차일혁은 미군정의 눈을 피해 전북 전주로 내려와 공장에 다녔고, 이로부터 얼마 후 대동청년단, 호국군, 청년방위대에서 간부로 활동을 한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차일혁은 육군대위로 신태영 장군에 의해 특별 임관되어 유격대장으로 활동하다가 팔에 총상을 입고 전역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차일혁과 김성수는 몇 차례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 기억날 만한 일이 1954년 8월 21일경 일이다. 이때 차일혁은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 예하 제2연대장을 마치고 사령부의 수사사찰(搜査査察)과장으로 영전해 있을 때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김성수 선생을 비롯하여 광복 후 일본 형사들을 처단했던 동지들이 차일혁이 근무하는 사령부로 찾아왔다.
 
  꿈에도 잊지 못할 옛 동지들이었다. 차일혁은 관사로 그들 일행을 모시고 가서 오랜만에 술자리를 마련했다. 차일혁이 김성수 선생의 근황을 물었다. 그는 1954년 5월 20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 고향인 밀양에서 입후보 했으나, 공산주의자로 몰려 선거운동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낙선했다고 했다.
 
  1958년 8월 9일 차일혁은 아들 차길진과 함께 금강으로 물놀이를 갔다. 거기서 아버지는 조선의용대 시절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몇 차례 수영 시범을 보여준 뒤 물속으로 들어간 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19시간 뒤 시신이 발견됐는데 차일혁은 금강 곰나루 근처를 건너다 가라앉은 인민군 탱크를 끌어안고 있었다고 한다.
 
  아들 차길진은 이후 아버지의 활동상을 담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로 1989년 《월간중앙》 논픽션 부문에 당선했고 가극 〈눈물의 여왕〉, 연극 〈충주시대〉, 오페라 〈카르마〉를 제작하는가 하면 프로야구단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를 맡았고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세우는 데 일조했다. 그야말로 분야를 가리지 않는 질주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한 행동이었음을 이번에 차길진을 만나고서야 알게 됐다. 그는 1시간 반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며 끝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영화 〈암살〉과 〈밀정〉은 대개 제 선친과 지강 김성수 선생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저도 영화 제작자들에게 비화를 많이 알려줬고요. 그것을 국민들이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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