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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취

‘마지막 3金’ 金鍾泌 지다

그림, 골프, 악기, 문학, 그리고 斗酒不辭까지… 못하는 게 없었던 ‘풍류남아’

글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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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음악을 동경하는 건 정치에서 이룩해 보려는 理想이 그곳에 있기 때문인지도…”

⊙ “나에게 그림은 인생 여정과 같다”
⊙ “그날의 골프는 나의 신체가 온존함을 증명하는 격렬한 儀式 같았다”
⊙ 중정부장 시절 ‘예그린 악단’ 창단… 만돌린, 피아노, 아코디언 연주 솜씨도 수준급
⊙ 청년 시절 ‘一夜一卷 讀破主義’로 엄청난 독서량 과시
⊙ ‘자의반 타의반’ ‘몽니’ ‘줄탁동시’ ‘정치는 虛業’이란 숱한 명언 남겨
⊙ ‘두주불사 JP’ “둘이 앉아 4홉들이 소주 두세 병을 소금 안주 해서 마셨어”
  지난 6월 23일 92세로 별세한 고 김종필(金鍾泌·JP) 전 국무총리는 다재다능한 풍류남아(風流男兒)였다. JP는 그림, 골프, 악기, 문학 등 다방면에 재주를 갖고 있었다. 술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장기였다. 삭막함과 대결이 난무하는 정치판에 낭만과 풍류, 그리고 멋을 보여준 JP. 그런 JP를 가리켜 어떤 이는 ‘르네상스적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畵心…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天心’
 
왼쪽 작품은 JP가 1977년 그린 〈한라산과 초가(草家)〉. JP의 그림 실력은 웬만한 전문가 수준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오른쪽 사진은 1968년 9월 21일 서울 신문회관에서 열린 《한재민 구호 김종필 개인전》 도록(圖錄). 사진=운정재단 홈페이지
  그림은 정치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탈출구 중 하나였다. JP는 자신의 회고록 《소이부답(笑而不答)》에서 “나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아마추어적 유유자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눈에 비치는 사물의 상(像)을 그저 재현해 보기 위한 것도 아니다. 나에게 그림은 인생 여정과 같다. 내 그림 곳곳에 지나온 세월의 격정과 고뇌가 녹아 있다”며 그림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JP가 화폭에 주로 담는 소재는 자연이었다. 그는 자신이 심혈을 다해 가꾼 제주도 감귤농장과 충남 서산의 삼화목장 등에서 화상(畵想)을 얻었다. 그가 1977년에 그린 〈한라산과 초가〉란 작품을 보면, 눈 덮인 한라산이 캔버스 위쪽에, 그 아래에는 새끼줄 친 초가집과 유채꽃 핀 돌담이 자리 잡고 있다. 그에게 그림을 지도해준 박광진(朴光眞) 서울교대 명예교수는 JP에게 “한라산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며 후한 점수를 줬다고 한다. 이 그림은 이듬해 ‘한일 합동 미술 전시회’에 출품되기도 했다.
 
  JP가 그림과 관련해 겪은 에피소드도 꽤 재밌다. 1968년 여름, 화가 몇 사람과 동해안 강릉 해변에서 파도를 그리고 있을 때 현장에 찾아온 모 일간지 기자가 “개인전을 열어 호남 가뭄 피해 지역에 의연금으로 기증하면…”이란 뜻을 넌지시 내비쳤다고 한다. JP는 “내 그림을 도대체 누가 사 주겠소” 하고 웃어넘겼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개인전이 기정사실로 보도돼 있는 것을 알고 대경실색했다고 한다.
 
  결국 9월 하순 신문회관에서 ‘한재민(旱災民) 구호 자선 유화전’이란 제목으로 전시회를 열었고, 이 전시회에서 16점의 그림이 팔려 500만원을 모금했다. 행사비를 충당하고 남은 450만원 전액을 피해가 가장 심했던 전남 나주군 동강면 진천리 부락에 전달했다. 2001년 JP는 자신이 그려온 그림으로 탁상용 달력을 만들어 정계 인사와 지인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40여 점의 그림 중 이른 봄의 제주, 여름의 가야산, 가을과 겨울의 설악산 등 각 계절에 맞는 풍경화 12점을 선정해 제작한 것이다. JP는 달력 표지에 ‘畵心…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天心’이라고 썼다.
 
 
  “홀인원 세 번 하면 꼭 죽어요”
 
1989년 10월 2일 안양컨트리클럽(현 안양베네스트GC)에서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골프 회동을 갖던 중, 김영삼 총재가 스윙을 하다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있다. 뒤에서 웃는 JP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진=뉴시스
  JP는 골프를 매우 좋아했고, 잘 쳤다. 골프와 관련해 유명한 사진이 하나 있다. 1989년 신민주공화당 총재이던 JP가 3당 합당을 앞두고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와 골프 회동을 가졌을 때 촬영된 것이다. YS가 스윙을 하다가 ‘엉덩방아’를 찧자, 이를 본 JP와 필드에 주저앉은 YS 두 사람이 파안대소하는 장면이다. 골프를 잘 못 치는 YS가 훗날 대통령이 된 후 공직자들에게 골프 금지령을 내리자, ‘골프 애호가’인 JP는 내심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그만큼 JP를 이야기할 때 골프는 빼놓을 수 없는 소재다.
 
  JP는 5·16혁명 직후 골프를 처음 접했다고 한다. 극작가 한운사(韓雲史·1923~2009)씨가 펴낸 《한운사 골프 만유기》에 JP의 골프 입문기가 실려 있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5·16 직후 한 혁명 주체세력이 골프를 치는 사람들을 가리켜 ‘저 사람들은 밥 먹고 할 일도 없나. 트럭에 실어다가 공사장에 투입해야겠군’이라고 일갈하자, JP는 “아냐. 그들을 욕할 일이 아니지. 무슨 곡절이 있을 거야. 골프라는 것 좀 잘 알아봐”라고 지시했단다.
 
  그때부터 골프를 차근차근 배운 JP의 실력은 탁월했다. 한창 때는 핸디캡 10을 자랑했을 정도다. 윤은기 전 중앙공무원교육원장이 2006년 모 일간지에 JP의 골프 실력에 대해 기고한 글 중 일부다.
 
  〈첫 번째 놀라움은 김 총재의 체력이다. 80세를 넘어선 나이에도 드라이버 비(飛)거리가 180~200야드 나간다. 스윙 자세는 전형적인 8자 스윙에 가까웠는데 임팩트 때 상당한 파워가 실린다. 김 총재는 이것을 ‘검도 타법’이라고 했다. 검도 유단자 실력을 살려 칼로 목표물을 베듯 기를 실어서 친다. 특이한 것은 세컨드 샷을 페어웨이에 티를 꽂고 드라이버로 친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번을 치고 나서 아이언으로 그린에 공을 올리고 정교한 퍼팅으로 파를 잡아낸다.〉
 
  JP는 윤씨에게 “골프는 누굴 이기려고 하는 운동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스스로 관리하면서 자연과 인생을 배우는 운동”이라며 “골프를 해 보면 그 사람의 인생관이나 성격이 드러나게 돼 있다”고 말했다. JP가 단순히 운동으로서 골프를 쳤던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윤씨가 “새해에는 ‘홀인원을 하시라’는 덕담을 했더니 JP는 “나 홀인원 안 할 겁니다. 홀인원 세 번 하면 꼭 죽어요. 그동안 내가 본 사람들은 모두 그랬다니까”라고 했단다. 이처럼 JP는 ‘골프관(觀)’까지도 매우 독특했다.
 
JP는 운동 중에서 특히 골프를 잘 쳤다. 그는 “홀인원 세 번하면 죽는다”는 우스개도 했다고 한다. 사진은 1999년 6월 12일 주한 외교사절 부부들을 초청해 골프를 치는 JP. 출처=운정재단 홈페이지
  골프 관련 책을 쓰기도 한 안문석(KBS 기자 출신)씨는 2001년 4월 경기도 용인 아시아컨트리클럽에서 JP를 비롯해 김중권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표와 권노갑 민주당 고문, 고 김윤환 민주국민당 대표 등이 골프를 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75세였던 JP는 원기가 왕성해 18홀로 모자라 27홀까지 치는 체력을 보여줬다고 한다. 자세, 비거리는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공을 정확히 맞혔다고 안씨는 기억했다. 어프로치 샷도 클럽을 미는 듯 어색하게 쳤지만 비교적 잘 들어맞았다고 한다. 특히 3번 우드로 치는 세컨드 샷이 일품이었다고 했다.
 
  JP는 2008년 12월 뉴코리아 컨트리클럽에서 골프를 쳤다. 이곳에서 동향인들과 골프를 치고 술자리를 가졌다. 그 직후 JP는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그로부터 7년 후인 2015년 그가 남긴 회고다.
 
  〈경기도 고양의 뉴코리아CC는 7년 전 내가 마지막으로 골프를 쳤던 곳이다. 나는 골퍼들이 다 지나간 늦은 오후 1번 홀에서 골프 여정을 다시 이어갔다. 특수 카트에 몸을 의지한 뒤 혼자서 한 홀을 돌면서 자연과 호흡했다. 왼손만으로 클럽을 쥐는 하프 스윙 탓에 나의 드라이브샷 거리는 길어야 50야드였고 페어웨이에서 타수마다 30여 번 클럽을 휘둘렀다. 티 박스에서 그린에 올라가기까지 1시간10분쯤 걸렸다. 나도 모르게 “자~ 됐다”고 내뱉었다.〉
 
  JP는 “그날의 골프는 나의 신체가 온존함을 증명하는 격렬한 의식(儀式) 같은 것이었다”며 “짙은 풀냄새를 맡으며 폐부 깊숙한 곳에 스며드는 신선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 자연은 내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었다”고 했다.
 
 
  “콘체르토가 좋다”는 JP, 피아노·만돌린·아코디언 연주도 수준급
 
젊은 시절 바이올린을 켜는 JP. 이 밖에도 JP는 만돌린, 풍금에도 능했다. 사진=운정재단 홈페이지
  JP는 음악에 대한 조예도 깊었다. 1966년 8월 13일 자 《조선일보》엔 JP와 음악평론가 박용구(朴容九·1914~2016·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역임)씨와의 대담 기사가 실렸다. 여기서 JP는 자신의 음악적 소양은 물론, 음악을 통한 인간의 성찰을 촉구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박씨와의 문답 중 일부다.
 
  〈(김종필) “저번 외유 때의 일이지요. 마침 탱글우드(미국 매사추세츠주 소재)에서 저 유명한 유진 올만디(Eugene Ormandy)가 보스턴 심포니를 지휘해서 연주를 한다지 않아요. 그래서 350km를 달려가 들었지요. 그 레퍼토리 가운데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요.”
 
  (박용구) “쇼팽의 제1번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김종필) “나는 솔로보다는 콘체르토를 좋아해요. 피아노에선 쇼팽의 제1번, 바이올린은 멘델스존의 콘체르토이지요.”
 
  (박용구) “솔로는 역시 개인플레이에 그치는 것이고 콘체르토는 솔로 악기와 오케스트라의 대화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김종필)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 사회가 염원하는 건 그런 대화지요. 그 대화 속에서 하모니가 빚어지면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음악을 동경하는 건 어쩌면 정치에서 이룩해 보고자 하는 이상이 그곳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박용구) “음악이 흐르는 정치, 참 좋은 이야기입니다.”
 
  (김종필) “스웨덴에서 목격한 일입니다. 국왕이 소년 오케스트라에 끼여서 클라리넷을 불고 있더란 말입니다. 우리 정치인들은 메말라 있어요. 낡은 권위의식에 사로잡혀서 민중과 어울려 하모니를 만들 생각을 안 하니까 메마를 수밖에 없지요. 음악도 우리나라에선 전문가가 되면 그렇지 않습니까?”
 
  (박용구) “…”
 
  (김종필) “어머니가 극성스럽게 비싼 수업료를 내가면서 피아노를 가르치지만 그 피아노가 생활을 부드럽게 해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음악이 생활화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가 회사에서 피로에 지쳐 귀가하신 아버지를 위해서 피아노를 들려준다든가 하여 가정의 하모니에 음악이 참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아닙니까?”〉
 
JP가 창단을 주도한 예그린 악단 단원들이 연주하는 모습. 사진=운정재단 홈페이지
  JP가 1961년 중앙정보부장 시절 관현악단 40명과 합창단 35명으로 구성된 종합음악예술단체 ‘예그린 악단’을 창설한 것도 그의 이런 음악적 재능과 무관치 않다. ‘예그린 악단’은 1966년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로 평가 받는 ‘살짜기 옵서예’를 선보였다. 고전 ‘배비장전’이 원작인 ‘살짜기 옵서예’는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패티김이 주인공 ‘애랑’ 역을 맡았다. JP는 이때의 인연으로 같은 해 패티김과 작곡가 길옥윤의 결혼식 주례를 맡기도 했다. 이 밖에도 그는 1978년 세종문화회관에 당시 피아노 1700여 대 값과 맞먹는 6억1300만원이란 거금을 들여 파이프 오르간 설치를 주도했다.
 
  음악 이론뿐 아니라 악기 다루는 솜씨도 뛰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건반 악기, 현악기 등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룰 수 있었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사석에서 종종 피아노와 만돌린, 아코디언을 연주할 정도였고, 1997년 9월 방송된 SBS ‘대통령 후보와 함께’란 프로그램에서 JP는 노사연이 부르는 ‘만남’의 반주를 했다. 이는 동시간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명언 제조기’란 별명 뒤엔 엄청난 독서량이…
 
  JP는 ‘명언 제조기’였다. ‘자의반 타의반’ ‘핫바지’ ‘몽니’ ‘줄탁동시’ ‘정치는 허업(虛業)’ 등 그가 쏟아낸 명언들은 정치권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깊이 각인됐다. 그가 촌철살인의 명언을 내놓을 수 있던 배경엔 독서가 있었다. JP의 회고다.
 
  〈나는 어렸을 적 마을과 학교에서 개구쟁이였지만 책벌레로도 소문났다. 감명 깊은 책의 문장이나 시구를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부여공립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4~5학년 때부터 플루타르크 영웅전, 나폴레옹과 같은 위인들의 전기에 심취했다. 동서양 고전을 탐독하면서 거미줄같이 얽힌 운명적 조건과 활화산 같은 의지의 행동이 교직(交織)된 인간의 성취를 발견하곤 했다. 나의 독서벽(癖)은 난독(亂讀)에 속하지만 역사를 좋아했고 특히 인물의 전기(傳記)를 좋아했다. 역사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인물을 이해하는 게 역사를 잘 해명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했다.〉
 
  JP는 어린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그러했듯 나폴레옹을 좋아했다. 그는 “나폴레옹은 이미 그 기능을 잃은 혀끝을 움직여 ‘프랑스, 군의 선두에서, 사랑하는 조세핀이라고 절규했다’는 기록을 읽으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윈스턴 처칠도 좋아해 《처칠 회고록》 등 처칠이 쓴 책 30여 권을 빼놓지 않고 몽땅 다 읽었다고 한다.
 
  공주중학교 3~4학년 시절은 그의 독서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다. ‘일야일권 독파주의(一夜一卷 讀破主義)’란 말까지 만들어내며 밤새워 책을 읽었고, 그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수업도 빼먹고 기숙사에 드러누워 마저 읽는 집착을 보였다. 시(詩) 낭송도 빼놓을 수 없는 취미였다. JP의 회고 중 일부다.
 
  〈밤에 기숙사 복도를 지날 때면 일부러 다 들으라고 일본어로 된 독일 시인 카를 부세(Karl Busse)의 시 〈저 산 너머〉의 한 구절 “야마노 아나타노 소라토오쿠 / 사이와이 스무토 히토노유우…”(山のあなたの空遠く ‘幸’住むと 人のいふ: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를 좍 외웠다. 다음 시구(詩句)인 “아아 나 또한 남을 따라 찾아갔건만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다네”를 일본말로 큰 소리로 떠들면 다들 날 쳐다보면서 “쟤가 누구냐”고 수런거렸다. 그때 외운 시구들은 지금도 한 자 빼놓지 않고 입에 붙게 낭송할 수 있다.〉
 
  이렇듯 10대에 성취한 감수성과 문학적 지식은 ‘낭만파 정치인’ JP를 빚어냈다. 20대인 6·25 전쟁 때 군인으로 복무할 수 있었던 용기, 30대에 일으킨 5·16혁명의 결단력과 상상력, 이후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숱한 지혜와 명언들도 결국은 꾸준한 독서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두주불사’ JP가 ‘발렌타인 17년’을 좋아한 이유
 
생전에 가장 즐겼다는 발렌타인 17년산. 왜 이 술을 고집하냐는 질문에 JP는 “술을 마시다 보면 17년산인지 30년산인지 구별이 안 된다. 그래서 17년산을 마신다”고 말했다고 한다.
  술과 관련된 일화도 눈에 띈다. 《조선일보》 기자로 1990년대 중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출입했던 최구식(崔球植)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1996년 《조선일보》 노보에 ‘JP는 못 말려’란 글을 기고했다. 얘기인즉슨 이렇다. 1995년 12월 자민련 총재였던 JP는 자민련 출입 기자들에게 “올해가 가기 전에 눈이 오면 술을 한잔 사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눈 올 때는 뜨뜻한 아랫목에 앉아 여인네 궁둥이나 두드리는 것이 역시 제격이지”라며 익살을 부리기도 했단다. 자민련 출입 기자들은 ‘평소에는 말을 잘 안 하다가 술자리에만 앉으면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내는’ JP와의 술자리를 기대했다.
 
  그해 12월 28일 때마침 서설(瑞雪)이 내렸고 JP는 약속을 지켰다. 장소는 서울 장충동의 ‘삼’ 자로 시작하는 요정 비슷한 곳이었다고 한다. 최구식 전 의원은 “술자리마다 모든 참석자들이 다 뻗을 때까지 나오는 ‘발렌타인 17년’의 맛도 맛이려니와 이번 주연의 자리로 약속된 ‘한반도 최후의 기생집’이라는 곳도 궁금했다”고 썼다. JP가 선호하는 주종(酒種), 주석(酒席)의 취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최 전 의원이 회고하는 JP의 술 실력이다.
 
  〈JP의 주량은 두주불사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세 차례쯤 가진 JP와의 술자리에서 잔을 마다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물론 지난 9월 보름간의 와병 끝에 일어난 뒤에는 술을 자제하는 기색이 강하게 보였지만 그래도 그 연배로는 엄청난 주량이다. 현재 자민련 내에서 술로 JP와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중략) 한 번은 한영수 원내총무가 “우리 총재가 술을 너무 마신다”고 맞대 놓고 말했다. JP는 “내가 상 밑에다가 큰 대접을 두고 양을 조절해서 마시는데 무슨 소리냐”고 발끈했다.〉
 
  최 전 의원은 “필자도 상 밑에 대접을 둔 것은 보았지만 (JP가) 몸 생각에 술잔 피하는 것은 아직 보지 못했다”고 썼다. 참고로 ‘발렌타인 17년’을 좋아한 이유에 대해 JP는 “술을 마시다 보면 17년산인지 30년산인지 구분이 안 간다. 그래서 17년산만 마신다”고 했단다. JP 사후(死後),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JP가 정진석 의원에게 고백한 ‘소싯적’ 술 실력에 관한 이야기다.
 
  〈술은 두주불사였습니다. ‘젊은 시절엔 주량이 대단하셨겠다’고 하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군 시절 뭐 먹을 게 있었나. 둘이 앉아서 4홉들이 소주 두세 병을 소금 안주 해서 마셨어. 삐루(맥주)를 가끔 먹을 때가 있지만 그거 마시고 기별이 오나. PX 가서 손바닥만 한 미제 위스키 한 병 사 뒷주머니에 넣고 가서, 삐루 먹기 전에 위스키 원샷했지.”〉
 
  JP는 정치적인 호불호(好不好)를 떠나 우리 헌정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특히 그가 남긴 숱한 낭만적 일화와 그 바탕이 된 재능은, 오늘의 정치인들에게 시사점을 던진다. 이제라도 무모한 대결과 정쟁(政爭)에서 벗어나 지혜와 관용, 그리고 JP가 보여준 넉넉한 ‘르네상스적’ 풍모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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