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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의 품격

千의 얼굴 ‘天生배우’ 서갑숙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 이후 성공과 실패가 뭉뚱그려진 모습이 바로 ‘나’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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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MBC 〈베스트셀러극장〉으로 데뷔… ‘베스트셀러극장 전문배우’로 이름 알려
⊙ 서갑숙 연기는 ‘감정파’라기보다는 ‘이지파’에 가까워… 머릿속으로 감정을 계산
⊙ 학창 시절, 심장병 앓아… “짧은 기간에 많은 인생을 경험하고 죽자, 인생은 연극이니까…”
⊙ “연기는 작가나 연출자의 지시와 복종으로 표현되는 게 아냐”
  인터뷰를 준비하며 배우 서갑숙(徐甲淑·58)의 작품을 연달아 봤다. 그녀의 데뷔작이나 다름없는 MBC 〈베스트셀러극장〉의 〈초록빛 모자〉(1983년 작)와 최근작인 이승원 감독의 〈해피뻐스데이〉(2016), 그리고 전수일 감독의 〈핑크〉(2011년)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서갑숙의 연기는 어느 역이든 진지하고 표현력이 풍부하다. 그만의 색깔이 있는데 그게 꼭 ‘서갑숙다운’ 색깔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예술과 배우’를 떼어놓고 말할 수 없게 만든다. 1999년 출간되어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가 떠오르지만 이후 여전히 TV와 영화, 연극에서 서갑숙을 만날 수 있다. 상업영화는 아닐지라도 작년에만 4편의 예술영화에 비중 있는 배역으로 출연했다. ‘서갑숙다운’ 연기라는, 정형화된 공식은 없지만 기자의 눈에 〈초록빛 모자〉의 ‘기정’도 서갑숙 같고, 〈해피뻐스데이〉의 ‘엄마’도 서갑숙 같았으며, 〈핑크〉의 ‘옥련’도 진짜 같았다. 천의 얼굴이라고 해야겠으나 ‘기정·엄마·옥련’을 관통하는 ‘서갑숙다운’ 무언가가 있다. 서갑숙이 지닌 에고(Ego)가 강렬해서일까.
 
  ‘서투른 여배우는 자신의 마음을 역(役) 속에 넣지만 뛰어난 여배우는 머리에 넣는다’는 말이 있다. 서갑숙의 연기는 ‘감정파’라기보다는 ‘이지파’에 가깝다. 감정에 의지하지도,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머릿속으로 감정을 계산하며 얼굴과 몸의 변화를 끄집어낸다. 예컨대 영화 〈해피뻐스데이〉에서 ‘엄마’로 분(扮)한 서갑숙은 ‘괴물’과 다름없던 장남이 죽자 통곡을 한다. 그런데 그녀의 통곡은 우리가 알던 통곡이 아니었다. 슬프거나 괴로워 우는 울음이 아닌 가짜 울음이었다. 계산된 울음, 절제를 뒤집는 표현이었다.
 
  서갑숙은 몇 해 전 제주에 정착했다. 두 딸과 함께 서울에서 제주로 이사를 간 것이다. 벌써 4년째다. 작업이 없을 때는 제주에 머물며 자신만의 연기술을 들여다보고 있다. 지난 5월 3일 상경한 그녀를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서 만났다. 만나기 전 “인터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묻기에 “1시간 정도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고 막걸리에다 커피까지 한잔했더니 밤 10시가 훨씬 지났다. 진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초록빛 모자〉의 시인 ‘기정’과 서갑숙
 
1983년 12월 방영된 MBC 〈베스트셀러극장〉의 〈초록빛 모자〉의 한 장면.
  서갑숙의 데뷔작이랄 수 있는 MBC 〈베스트셀러극장〉의 〈초록빛 모자〉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1983년 12월에 방영됐다. 〈베스트셀러극장〉은 KBS의 〈TV문학관〉처럼 매주 작품성 있는 단막극을 소개하는 인기 프로였다.
 
  “제가 1982년 가을에 MBC 15기 공채로 들어갔어요. 1년 동안 월급을 받으며 주로 극중 단역으로 출연했는데 그걸 데뷔라고 할 수는 없죠. 제대로 된 데뷔가 〈초록빛 모자〉였어요.
 
  사실 1983년 7월 심장수술을 받았어요. 가슴 위에서 배꼽까지 30cm를 절개한 대수술 후 소금이 들어간 음식을 먹지 못했어요. 상처가 아물기 전이고 몸이 약해진 상태였어요. 그때 소설가 김채원의 동명소설을 극화한 드라마에 캐스팅된 것이죠.”
 
  〈초록빛 모자〉에서 서갑숙이 맡은 역은 ‘기정’이다. 시인인 ‘기정’은 어렸을 때 사고로 손가락이 절단된 언니가 자살하자 괴로워한다. 어린 시절 ‘기정’은 빨간 모자를 쓰고 언니는 초록 모자를 자주 썼는데 어쩌다 언니의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 버린 장면이 잊히질 않는다.
 
〈초록빛 모자〉에서 남장여인으로 출연한 서갑숙과 배우 박영규.
  자신을 숨기기 위해 남장여인(男裝女人)으로 살아가는 ‘기정’은 어느 날 초록 모자를 쓴 남자(박영규 분)와 우연히 만나게 된다. ‘기정’은 점점 그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남장을 벗고 여성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이야기다.
 
  “극 중 ‘기정’은 시인인데 저 역시 고교 시절 문학소녀였어요. 그러다 고3 때 심장판막증을 앓게 됐어요. 그 병으로 허무주의에 빠져들었고 니체, 카뮈, 키르케고르 같은 책을 읽었어요. ‘난 금방 죽으니까 연극을 하면 많은 인생을 경험할 수 있대지? 짧은 기간에 많은 인생을 경험하고 죽자, 인생은 연극이니까’ 등등 뭐 이런 생각에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게 됐어요. 만약 그 무렵 아프지 않았다면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거예요.”
 
  대학 시절, 서갑숙은 ‘소주 잘 마시는 여자’로 통했다. 짧고 굵게 남은 인생을 살고 싶어 연영과에 진학했으니 육체의 병과 마음의 병을 잊고자 했다. 대학 선술집인 ‘왕개미집’에는 중대 문예창작과 학생들이 많았다. 늘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허무한 시선으로 바라봤기에 관념적이고 다소 극단적이기까지 한 문창과 학생들과 죽이 잘 맞았다고 한다.
 
  “연극과 함께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주변에 문학 하는 친구도 많았습니다. 황인숙, 김형경, 은희경 같은 이들과 어울려 술을 많이 마셨고 담배도 많이 피웠어요. 빨리 죽으려고요. 그런데 (심장)수술을 하게 돼 살아났지 뭐예요.”
 
  ― 지금은 어떠세요.
 
  “결혼하고 아기 낳고 해도 인공판막으로 안 갈았으니까 치유가 된 것이죠. 그런데 완전히 건강한 상태는 아니고… 이 방에서 이 방으로 피가 옮겨 가다가 꾸르르~ 하고 피가 새는 게, 과거엔 60 정도였다면 지금은 10, 20 정도? 일상생활은 괜찮아요. 그 덕에 평생 삶과 죽음에도 관심을 많이 갖게 됐죠.”
 
 
  인물창조論, 감독의 경우와 배우의 경우
 
  ― 〈초록빛 모자〉의 ‘기정’과 서갑숙은 어쩌면 매우 닮은 인물이네요.
 
  “극 중 ‘기정’의 정서가 저와 너무도 닮아서 연기하는데 흥이 났어요. 아니, 따로 연기를 할 필요도 없이 주인공 ‘기정’이 내 모습이었죠. 소외감과 상실감, 사랑받고 싶은 마음, 삶의 열정… 그런 ‘기정’의 삶을 잘 이해할 수 있었죠.”
 
  ― 30년도 더 된 작품이지만 지금 봐도 드라마가 가볍지 않더군요.
 
  “극 중 ‘기정’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가짜 콧수염까지 붙이며 남자처럼 행동합니다. 저는 ‘기정’이가 왜 남장을 하고 싶은지 이해가 됐어요. 자신의 정체성을 못 찾으니 여성으로서 자존감이 낮아지고 죽은 언니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더욱 삶이 왜곡된 것이죠. 이 세상에 나를 필요로 하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삶을 지탱할 힘이 생긴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기정’은 그런 대상을 못 찾았으니….”
 
  ― 초록 모자를 쓴 남자로 분한 게 배우 박영규씨죠.
 
  “네. 그분이 연극배우로 쭉 활동하시다 〈초록빛 모자〉로 브라운관에 첫 데뷔하셨어요. 저랑 TV 데뷔가 같은 셈이죠. 극중 박영규씨는 어느 순간 ‘기정’이 여자인 것을 알게 되지만 끝까지 말을 하지는 않죠. 마지막 장면은 ‘기정’이 여자로 돌아가 그를 찾아가는 장면입니다.”
 
  배우는 ‘자기’를 잘 알아야 한다. 자기의 몸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연기자가 자기 자신을 몰라서는 안 된다. 자기를 똑똑히 알아야만, 자기를 풍부하게 할수록 자기 자신이 충분히 역의 인물로 녹아들 수 있다. 극 중 인물과 배우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 극 중 ‘기정’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배우 서갑숙의 정체성을 ‘기정’으로 맞춰야 하는 것인가요?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죠.
 
  “제 안에 서갑숙이란 정체성에는 모든 속성이 다 들어 있잖아요. ‘기정’의 모습도 〈해피뻐스데이〉의 ‘엄마’, 〈핑크〉의 ‘옥련’의 모습도 있어요.
 
  하지만 (연기를 할 때는) 마치 그 사람인 것처럼 하죠. 극 중 그 삶을 들여다보고, 연구를 하다 보면 내가 그 사람인지, 그 사람이 나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어쩌면 우리 내면에 이 세상 모든 사람의 개성과 성품이 조금씩 녹아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저더러 ‘극 중 인물 속에 서갑숙이가 자꾸 보여’라고 해요. 저는 ‘어쩔 수 없지. 서갑숙이가 하는 것이니까…’라고 말해요. ‘자기 에고(Ego)가 너무 강해 그런 것 아냐? 확, 자기를 놓아 버릴 수 없어?’라고 물으면, 저는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게 과연 옳은 방식인지, 그른 방식인지 단정해 말할 수 없을 것 같아’라고 답합니다.
 
  극 중 인물이 연출자나 감독이 생각하는 인물의 창조겠지만, 배우 역시 자신의 연기를 통해 인물을 창조하잖아요. 이때 감독의 것과 다르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자기가 창조해 낸 인물이 있거든요.”
 
 
  송강호와 최민식의 연기론
 
  서갑숙은 이런 말도 했다.
 
  “연기는 작가나 연출자의 지시와 복종으로 표현되는 게 아니에요. 영화 작업은 함께 고민하고 토의하는 워크숍 형식으로 진행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떤 감독은 ‘그냥 하라는 대로 해!’라고 하는 분이 있거든요. 그럼, 감독 뜻에는 따르지만 ‘구시렁’이 남는 거죠.
 
  하지만 ‘감독이 왜 이런 인물을 영화에 담았을까’ ‘저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등 작가나 감독의 심정을 헤아려 보는 것이 연기 공부예요. ‘작가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이런 인물과 저런 사건을 배치해서 그런 식으로 표현하려고 했느냐’고 작가의 시각에서 봐야 하고요. 배우는 균형과 밸런스를 맞춰야 하는 직업이에요. 자신의 역할과 감정에만 충실해선 안 돼요.”
 
  서갑숙은 배우 최민식과 송강호의 예를 들었다. 송강호는 인물의 개성 표현에 치중하는 연기를 하지만 최민식은 작가나 감독 의도에 충실하다는 평을 받는다. 어느 것이 정답일 수는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배우의 연기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 흥미롭다.
 
  “송강호씨는 그때그때마다 변해요. 촬영할 때마다 매번 인물 표현이 달라요. 그래서 편집할 때 굉장히 애를 먹어요. 몇 개의 기발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툭툭 튀어나와 좋은 게 있지만 최민식씨는 달라요. 10번을 촬영해도 거의 비슷해요. 사실 연극이 그렇거든요. 몇 달간 연습을 하는 동안 모든 감정선을 철저히 계산해서 표현하거든요. ‘이런 속도로 몰아가야지 관객이 저런 호흡으로 따라온다’는 식으로 말이죠. 저 자신을 바라보면 송강호보다는 최민식 스타일에 가까워요.”
 
  ― 배우가 인물을 창조한다는 말은 작가나 연출가의 의도와 같은 것인가요? 다른 것인가요.
 
  “배우 혼자 인물을 창조할 순 없어요. 모든 극은, 엄밀히 말해, 작가나 연출이 주가 되는 창작품이에요. 거기에 연기자는 도구로서 한 몫을 하는 것이죠. 저는 대본을 읽을 때 극 중 제 역할보다 작가나 연출가의 심정으로 대본을 읽습니다. 연출이 원하는 것이 뭔지 파악하려고 노력한 다음, 제 생각과 미묘하게 조율하는 것이죠.”
 
 
  〈해피뻐스데이〉의 ‘엄마’와 서갑숙
 
막장 가족 이야기를 담은 영화 〈해피뻐스데이〉에 ‘엄마’ 역으로 출연한 서갑숙.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해 창작지원상을, 홍콩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FIPRESCI)상을 수상한 〈해피뻐스데이〉는 가족 막장 드라마다. 이 영화의 뼈대는 이렇다. 전신마비인 장남의 대소변을 번갈아 받아내던 가족이 장남의 생일을 맞아 상을 차린다. 그런데 준비한 음식에 독약을 넣어 장남을 죽이기로 모의한다.
 
  살인에 가담하는 가족은 ‘엄마’(서갑숙 분)를 중심으로 모두 비정상이다. ‘엄마’는 장남의 성적 욕구를 손으로 풀어주고 직업여성까지 부를 정도로 윤리와 도덕이 일그러졌다. 급기야 그런 장남을 가족 모두가 합심해 죽이도록 만드는 데 ‘엄마’는 앞장선다.
 
  둘째 아들 ‘기태’(이재인 분)는 동네 건달과 ‘엄마’ 사이에 낳은 자식이고, 셋째 아들 ‘성일’(이주원 분)은 틱 장애가 있어 우스꽝스럽다. ‘기태’의 아내 ‘선영’(김선영)은 한때 ‘성일’과 동거관계였으나 ‘기태’가 약을 탄 술을 ‘선영’에게 먹이고 성폭행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기태’의 아내가 된다.
 
  넷째 아들인 ‘상훈’(박지홍 분)과 막내딸인 ‘아현’(김애진 분)은 남매인지 자매인지 아리송하다. ‘상훈’이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데 ‘엄마’는 그런 ‘상훈’을 딸로 인정하는 것이다.
 
  경계가 허물어진 위태로운 가족을 그나마 버티게 하는 끈이 ‘엄마’다. 장남을 죽이겠다는 ‘엄마’의 결단도 가족애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불가피한 현실적 판단인 셈이다.
 
  서갑숙식(式) ‘엄마’는 시종 줄담배다. 말투가 거칠다. 앉을 때는, ‘푸세식’ 화장실 자세다. 퍼질러 앉을 때도 한쪽 발을 모로 세워 앉는다. 불안하고 불편한 심리를 앉은 자세로 드러낸다. 다음은 영화 속 ‘엄마’와 가족 간의 대화다. 장남에게 독약을 먹인 뒤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리며 술을 마시는 장면이다. 서로가 서로를 저주한다.
 
  〈…엄마(서갑숙) : 야, 내가 니 눈을 보잖아? 그러면은 그 쓰레기 같은 니 애비 눈빛이 딱 나와. 내가 그 눈깔을 이 젓가락으로 후벼 파먹어도 속이 시원치 않아, 이놈아! 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놈아.
 
  둘째 아들(이재인) : 어휴, 그랬었어야지요. 저는 그냥 쓰레기같이 저주받아서 태어났죠. 왜? 엄마가 동네 건달에게 당해서 나온 게 바로 나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남편한테 나온 큰아들은 왜 그렇게 약을 매겨가지고 죽이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엄마 : 내가 안 죽이면… 내가 안 죽이면, 어차피 니들이 죽일 거잖아. 내가 나이 먹고 돈도 없고 힘도 없고 그러면 잔인하게 갖다 내 버릴 거잖아. 이 지옥불에 던져져 타죽을 놈들아.
 
  둘째 아들 : 어떻게 아셨어요. 그거 비밀인데, 우리 어머니 잘 아신다. 허허허.
 
  며느리(김선영) : 여보 그만해요.
 
  엄마 : 니들은 나도 갖다 버릴 거야. 더 이상 빨아먹을 게 없으면…. 나는 절대로 그렇게 당하지 않아. 에이, 악마 같은 놈들아.
 
  며느리 :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엄마 : (며느리에게) 네, 그러세요. 니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참 고맙습니다. 형제끼리 돌려 먹은 여자가 내 며느리라니…. 제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며느리 : 어휴… 어머니, 참 진짜 힘드네요.
 
  엄마 : 니들은 다 내 밑구녕으로 들어가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영화 속 ‘엄마’는 서로 저주하면서도 가족이 와해되지 않도록 버티게 만드는 이중적 존재다. 극 중 ‘엄마’를 서갑숙은 어떻게 표현하려 했을까.
 
  “살아오면서 내 안에 녹아 있던 (엄마의) 모델이 있어요. 거기에 제 생각을 집어넣은 것이죠. 영화는 병든 아들을 괴물로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가족 모두가 괴물 아닌가요? 우리 사회가 괴물이고, 그런 괴물이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이 있어요. 괴물 같은 사람이 살거나 괴물 같은 상황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죠. ‘엄마’는 이런 위태로운 상황을 유지시켜야 하죠. ‘엄마’가 장남을 죽인 뒤 가짜 울음을 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슬픔이란 속성 때문이죠. 너무 고통스러우면 슬퍼도 울지 못해요. 울면 자기가 무너지니까….”
 
  ― 흔들리지만 지켜내려 하는 ‘엄마’와 서갑숙이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요? 작품은 작품으로 봐야 하는데….
 
  이 대목에서 서갑숙은 1999년에 출간된 책(《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이야기를 꺼냈다.
 
  “책 출간 이전에는 건강(심장병) 때문에 감정적 고통을 겪었다면 출간 이후에는 짧은 시간에 굉장히 극단적인 감정을 사람들한테 느꼈어요. 그래서 저한테 방어기제가 많이 생겼어요.”
 
 
  책 출간 이전과 그 이후
 
성체험 고백수기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란 책으로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킨 탤런트 서갑숙이 1999년 10월 25일 오전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그 말씀은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뜻이지요.
 
  “그렇죠. ‘이건 상처가 아니야. 이건 생각하기 나름이야’ 하고 자신을 달랬어요. 저는 원래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에요. 그런데 생활방식은 많이 동굴 속에서, 자기 안에서 살았어요.”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는 당시 한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주로 이지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서갑숙의 솔직한 성체험을 두고 따가운 시선과 함께 찬반양론이 갈렸다. 책은 140만 부가량 경이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사람은 길 위에서 나와 길 위로 돌아간다’거나 ‘길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는 말이 있듯이 저는 길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당시 책을 낼 때 두 가지 작업 같이 했잖아요. 실크로드를 배경으로 한 누드에세이집도 펴냈어요.
 
  누드라는 게 관능의 누드가 아니라 아기 낳은 여자, 심장수술의 흉터가 있는 몸의 역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작업이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인간은 할머니의 몸도, 아기의 몸도 아름답다고…. 제 몸의 역사를 저는 길의 원형으로 표현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섹슈얼리티로 보니까 답답했어요.
 
  사람들은 ‘상업적 출간 의도는 없었는지, 그 책이 딸에게 상처를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하는 질문만 퍼부었어요. 모든 매체가 다 똑같았어요. 저는 달을 가리키는데 사람들은 손가락 끝만 본 것이죠. 이후 인터뷰를 닫았더니 이번에는 잠적했다고 하고….”
 
  ― 책을 통해 알려진 서갑숙과 연기자 서갑숙은 다른 사람인가요.
 
  “같은 사람입니다.”
 
  ― 당시 어떤 질문을 해주길 원했어요.
 
  “‘당신은 사랑을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사랑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너의 사랑은 무엇이냐’ ‘왜 사랑이 네 인생이 중요한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이 필요한지’ 등의 질문이면 좋았을 텐데….”
 
  ― 책이 나온 지가 20년 가까이 흘렀는데 지금 책을 냈다면 그때와 반응이 다를까요.
 
  “우리 사회가 겉모습은 개방적으로 보이지만 내면은 변하지 않으려는 저항이 강하다고 봅니다. 오히려 공감을 못하겠다고 외투를 더 껴입는 것 같아요. 물론 유연한 사고를 지닌 분도 있으나 그런 분들은 소수에 불과해요.”
 
  ― 그래도 우리 사회가 많이 변화된 점이 많지 않나요.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나마 달라진 면은, 과거엔 (제게) ‘용기 있다’고 말하는 이가 소수였고 나머지는 표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용기 있다’거나 ‘멋있다’고 말하는 이가 훨씬 많아졌어요. 사적 만남의 자리에서 표현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의견을 준다는 사실이 많이 변화된 것이죠.”
 
  ―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 논란을 보면서 여전히 영화판은 남성 중심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미투’를 섹슈얼리티로 봐선 안 돼요. 권력구조로 봐야 합니다. 사람들이 제게 페미니스트가 아니냐고 묻는데 전 휴머니스트라고 말합니다. 여자가 피해자, 남자는 가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서갑숙은 지금까지 다양한 배역으로 분했다. 시인, 엄마, 악녀, 선생님, 술집 작부, 직장 여성까지 다양하다. 어떤 인물이 실제 서갑숙과 닮았을까.
 
  “어떤 이는 서갑숙을 보고 ‘참 여성스럽다’ ‘천생여자네’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어떤 이는 ‘되게 세게 봤는데’라고 말하는 이가 있어요. 저의 이런 면이 세상 모든 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봐요. 다르지 않은데, 이 사람을 이런 느낌으로 바라봅니다.
 
  저는 원래 성격이 보수적이에요. 내면은 보수적인 면이 있는데 삶에 대한 애착, 열정이 많나 봐요. 그래서 저 사람이 저런 면은 다 이유가 있을 것 같고, 그래서 궁금하면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저는 어떤 역을 맡아 변신하는 과정을 즐겨요. 짜릿하게 느껴요.”
 
  ― 짜릿하다?
 
  “재미있다는 뜻이죠. 예를 들어 아들을 혼자 키우는 억척스런 생선장수 엄마를 표현한다면, 관절염을 앓는 다리를 표현하려 부목을 짚고 불편하게 걸어보는 겁니다. 치아가 나쁘다는 가정하에 입안에 솜을 물고 말해 보는 거예요. 상상만 해도 재밌잖아요. 그런 생선장수 엄마가 부지깽이를 들고 말썽쟁이 아들을 혼내려 절뚝절뚝 걸어가는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짜릿하지 않나요?”
 
  ― 그게 배우의 매력인가요.
 
  “네.”
 
 
  ‘베스트셀러 전문 배우’
 
2006년 방영된 SBS 사극 〈연개소문〉에서 미실 역을 맡은 서갑숙.(사진 제공=SBS)
  한때 서갑숙은 ‘베스트셀러 전문 배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MBC 〈베스트셀러극장〉에 자주 출연했다. 요즘 KBS 드라마 〈사랑과 전쟁〉 전문 배우가 있듯이.
 
  “지금도 〈베스트셀러극장〉에 향수를 가진 분들이 많아요. 주말 늦은 시각에 단편소설 한 편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극이었으니까요. 짧은 단편 안에 삶의 모습을 압축시켜 보여줘서인지 진지하고 무겁게 보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베스트셀러극장〉 ‘베스트 100’을 뽑았는데 제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작품이 10편이 넘었고, ‘베스트 10’ 안에도 제 작품이 몇 개 들어갔어요. 〈베스트셀러극장〉 전문 배우라는 말에 자부심을 느껴요.”
 
  ― 어리석은 질문인지는 모르지만, 배우로서 누군가의 자질을 딱 한 가지 얻을 수 있다면 어떤 자질을 택하겠습니까.
 
  “천부적인 배우 기질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천부적인 연기자를 닮고 싶어요. 배우 김혜수가 중학생일 때 ‘새 엄마’ 역할을 한 적이 있었어요.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 천부적인 어떤 면을 닮고 싶은가요.
 
  “그냥 쓱~ 지나가도 극중 인물을 이해하는…, 부목을 짚지 않아도, 입안에 솜을 안 넣어도 되는… 그런 연기자 말이죠.”
 
  ― 배우 김명곤 선생의 말씀이, ‘명인 명창 중에 타고난 소리꾼은 거의 없다’고 하셔요. ‘재주 많은 이는 끈기가 없다’고, ‘득음을 한 명창들은 타고났다기보다 갈고 닦은 분들’이라고 하셨어요.
 
  “저는 (연기를) 아주 오래하겠네요. 아직은 장인이라기보다 탐구자니까….”
 
  ― 무대나 카메라 앞에 서면 긴장을 하나요.
 
  “그럼요. 긴장하죠. 저는 연습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연극은 몇 달 동안 연습을 해서 무대에 올리니까 제일 편해요. 저는 이런 꿈을 많이 꿔요. 무대 위에서 대사가 생각 안 난다든지… 고교 시절로 돌아가 시험을 치는데 답을 모르는… 그런 꿈을 많이 꿔요.”
 
  ― 왜 그럴까요.
 
  “뭘까… 자기 원칙이 많은 사람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 연기는 나이에 비례하나요? 나이에 따라 연기폭도 깊어지고 넓어지나요.
 
  “젊었을 땐 이기적인 인간형에 가까웠거든요. 자기 세계, 자기가 속한 것만 바라보고, 자기중심으로 바라봤어요. 지금도 여전히 그런 면은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사람을 좀 더 들여다보는 면이 많이 생겼어요. 다 비슷한 감정선이지만 디테일하고 섬세하게 매만질 수 있어요.
 
  이전보다 더 많이 여행하고 더 많이 사람을 만나요. 과거엔 그러지 않았는데 2014년 제주로 이사하고 난 뒤로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무슨 재밌는 일이 있을까’ 생각합니다. 도시에 살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거든요.”
 
  ― 악역은 어떻게 연기하나요.
 
  “사람은 누구나 악하거나 파렴치한 모습이 있잖아요. 그럴 때를 잘 기억해 놓았다가 표현해 보는 것이죠. ‘어금니 아빠’로 알려진 이영학 같은 인간의 악마성도 연구해 봅니다. 악마는 저런 식으로 울면서 저런 표정을 지으면서 표현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죠. 그러면 부르르 몸서리치게 되는데 제게도 그런 잔인한, 잔혹한 본성이 있구나, 하고 깨닫게 돼요. 언젠가는 여자 야쿠자 같은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전 지나간 것에 대해 별로 미련이 없어요”
 
  ― 과거의 자신을 수정하고 싶다면 어디로 가고 싶은지요.
 
  “전 지나간 것에 대해 별로 미련이 없어요.”
 
  ― 인생에서 성공한 일과 실패한 일은 무엇인가요.
 
  “(1999년 책 출간) 이전에도 배우였고 이후에도 배우였지만 이전과 이후가 많이 달라졌어요. 개인의 삶이 달라졌고, 배우로서 삶도 달라졌어요. 어쩌면 (출간 이후) 성공과 실패가 같이 왔어요. 인생의 전환점이 됐는데 안타까운 점은 서갑숙이라는 인물에 책 속의 이미지가 덧씌워지게 된 것이죠. 책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이후 (배우로서) 역을 받기가 조금 힘들었어요.
 
  그럼에도 성공과 실패가 뭉뚱그려진 모습이 그대로의 ‘내’가 아닐까 생각해요. 감정적으로 힘든 경험을 하면서 스스로 건강해지려 노력을 많이 했고 결국은 그 시절을 잘 지내왔다고 봅니다. 왜냐? 여전히 저는 사람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고 사람을 좋아하니까요. 가끔 ‘갑숙아! 잘 지내왔어. 기특하다’고 다독일 수 있는… 그래도 힘든 시절이었어요.”
 
  ― 책 출간을 후회하세요.
 
  “후회는 없었어요. 후회하지 않았는데 어느 기사에 앞뒤 문맥 잘라서 ‘후회한다’고 보도가 됐어요. 가까운 지인들이 ‘왜 후회를 하냐’고 따져 묻더군요. 난 후회하지도 않았는데….”
 
  ― 앞으로 하고 싶은 역할이 뭔가요.
 
  “다양한 캐릭터와 만날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인물 창조의 재미와 짜릿함을 계속 느끼고 싶어요. 그럼 언젠가는 사람들이 저더러 ‘천생배우’라고 하지 않을까요? 배우로서 그런 희망을 제 안에서 느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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