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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家를 찾아서

근대를 빛낸 팔방미인 안석주(安碩柱) 후손들

‘저녁 그림자(夕影)’ 같은 예술혼이 4남 5녀를 물들이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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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기자이자 화가·시인·소설가·극작가·배우·영화감독 등 전방위 예술가
⊙ 안석주의 장인(金一善)은 개성출신의 거부 … 처남의 사업실패로 생활고 겪어
⊙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해방 후 두 번째 맞는 3·1절 노래극으로 만들어져
⊙ 장남 병원은 작곡가와 지휘자, 차녀 희숙은 피아니스트, 3녀 희복은 성악가로 성장
오른쪽부터 석영 안석주의 차녀 안희숙 연세대 명예교수와 3녀 안희복 한세대 명예교수. 안희복 교수의 남편인 박인수 서울대 명예교수.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1901~50)는 스물여덟 살 때 《조선일보》에 입사해 학예부장이 됐다. 요즘 언론사로 치면 문화부장이다. 약관의 나이에 당대 문화예술인을 쥐락펴락했던 그는 식민지 조선의 팔방미인이었다. 신문기사를 쓰면서 독특한 삽화(일본에서 유행하던 漫文漫畵로 시사나 풍자적 소재를 바탕으로 한 만화를 일컫는다)를 그렸고, 현진건·나도향·박종화·이상화와 함께 《백조》 동인으로 시와 소설을 발표했으며 자신의 소설을 영화 시나리오로 각색했다. 한때 한국 신극운동의 뿌리였던 ‘토월회’ 멤버이자 연극 〈부활〉에서 남자 주인공 네플류도프 공작 역을 맡아 장안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그였다.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영화감독의 길로 나아가 1935년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 〈심청〉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심청〉은 1938년 11월 26일 국내 최초로 열린 조선일보영화제에서 일반 관객 투표 5031표를 얻어 발성영화 부문 1위를 차지했다. 당시 무성영화 부문 1위는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으로 내선일체를 합리화하는 영화 〈지원병〉을 감독해 그의 필모그래프에 오점을 남겼다.
 
  광복 후 영화인들이 좌우이념으로 나뉘었을 때 대한영화협의회 이사장으로 활동했고 당시 문교부 내에 설치된 예술위원회 영화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우익 영화계를 대표하며 활동하다가 폐렴과 늑막염으로 1950년 2월 24일 사망했다. 쉰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화려하고 다채롭던 그의 흔적을 최근 학계가 재조명하고 있다.
 
  한 가지 더. 안석주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노랫말을 지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곤란하다. 장남 병원(安丙元·작고)이 작곡해 널리 알려진 이 노래의 원제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 1947년 3월 1일, KBS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의 어린이 시간인 오후 5시30분에 전국으로 전파를 탔다.
 
  1926년 출생으로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안병원은 ‘송알송알 싸리 잎에 은구슬 ~’로 시작되는 〈구슬비〉를 비롯해 〈가을 바람〉, 〈학교 앞 문구점〉 등 수많은 동요를 작곡한 인물로, 작년 캐나다에서 사망했다.
 
  안석주는 1921년 아내 김흥봉(金興奉·작고)과 결혼해 4남 6녀를 낳았다. 장녀 희원(熙元)은 일찍 사망해 4남 5녀만이 장성(長成)했다. 현재 대부분의 후손이 캐나다로 이주한 상태다. 국내에는 차녀 희숙(安熙淑·86)과 3녀 희복(安熙福·77)이 있다.
 
  연세대 음대 명예교수인 안희숙은 1960~70년대 활발한 연주활동과 많은 제자를 길러낸 원로 피아니스트다. 제자들이 희연회(스승의 이름 ‘희’와 모교인 연세대의 ‘연’을 따서 만들었다)를 결성, 사제간 만남을 이어 가고 있다고 한다. 안 교수는 기자에게 “언젠가 이화여대에서 피아노를 가르치셨던 신재덕 선생님의 피아노를 우리집에 빌려 온 일이 있었다. 귀가하신 아버지가 피아노를 기가 막히게 치셔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안석주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다는 얘기다.
 
  한세대 음대 명예교수인 안희복은 서울시향 플루티스트로 활약하다 도미(渡美), 맨해튼음대 대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귀국 후 대학에서 성악을 가르치며 ‘안희복 오페라단’을 결성, 신진 오페라 가수들을 길러냈다. 안 교수는 “당신(안석주)께선 노래도 잘하셨다. 그런 아버지 재능을 자식들이 1/10도 못 따라갔다”고 회고했다. 안 교수의 남편은 서울대 명예교수인 테너 박인수. 그는 정지용(鄭芝溶)의 시에다 곡을 붙인 〈향수〉를 가수 이동원과 불러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성악가다.
 
 
  “유산은 없다. 다만 이름만 남겨 줄 뿐이다”
 
젊은 시절 안석주.
  평소 안석주는 4남 5녀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너희에게 아무런 유산도 남겨 주지 못한다. 다만 이름만 남겨 줄 뿐이다.”
 
  실제로 안석주는 기자·화가·영화감독·문인 등 다채로운 활동을 왕성히 했으나 아내에게 월급봉투를 건넨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도, 학비에 보태라고 10원 한 장 주신 적이 없어요. 오빠(안병원)는 늘 신문팔이를 하며 고학했지요. 오빠가 방송국에서 일하며 그 덕에 생계를 이을 수 있었어요.”(안희복)
 
  안석주는 광복 후 대한영화사 사장을 맡는 등 미군정 당시 여러 문화계의 직책을 가졌지만 돈 생기는 일에는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생전 처음 사과를 사 오셨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사과가 전부 썩어 있었어요. 어머니가 ‘왜 썩은 것만 골라 담았느냐’고 물으시니 아버지 말씀이 ‘행상이 너무 불쌍해 보여 일부러 썩은 것만 골랐다’고 하셨죠.”(안희숙)
 
  안석주의 장인인 김일선(金一善·?~1935)은 황해도 개성출신의 거부(巨富)였다고 한다. 한국 YMCA가 일제 치하에서 성장할 당시 윤치호·이상재 선생과 함께 김일선은 재정(財政)을 맡아 교육계몽과 선교 일에 헌신했다고 한다. 인창학교장, 흥동학교장, 삼흥학교부(副)교장과 경성보육원·양로원, 진명여자고보 등의 이사를 역임한 교육가이자 선각자였다고 안희숙·희복 교수는 전한다.
 
  “아버지가 외가 도움으로 그 많은 식솔을 부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행운이라면 행운이었을 겁니다. 외조부댁(서울 종로구 명륜동 3가 153번지)은 열두 대문이었어요. 어머니(김흥봉)는 그 집안의 1남 2녀의 장녀로 당시 배화여고를 졸업한 신여성이자 기독교인이셨어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셨죠. 내로라하는 기생들에게 예의범절을 갖춰 범접을 못했다고 해요. 그런 아버지를 사모한 어느 기생이 칼을 들고 명륜동 집에 찾아왔답니다. 그러나 열두 대문과 선녀같이 한복을 차려 입은 어머니 모습에 기가 질려 도망쳤다고 해요.”(안희숙)
 
유화로 그린 안석주의 20대 자화상.
  안석주의 처남인 김대연(金大淵)은 연희전문 상과를 졸업하고 1930~40년대 종로2가에서 금희악기점, 경성악기점 등을 운영했다. 당시 조선인이 경영하는 유일한 악기점이었다고 한다.
 
  “(안)병원 오빠의 회고에 따르면, 외삼촌(김대연)은 동인(同人) 음악출판사를 차려 한국가곡과 유행가 등을 출판했는데 신곡이 나오면 악기점 유리창에 가사를 붙여 놓고 하루 종일 레코드를 틀어 놓을 정도로 열성이었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그 노랫소리를 따라 부르며 배웠다고 하니, 노래 보급의 선구자였던 셈이죠.”(안희복)
 
  대가의 외아들답게 배포가 컸던 김대연은 친구와 함께 금광에 투자했다가 재산을 다 날렸다고 한다. 그 바람에 안석주 식솔들마저 집과 땅을 잃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신당동의 적산가옥으로 이사했고 이때부터 궁핍한 생활이 시작됐다.
 
  “일제 강점기와 6·25를 거치며 4남 5녀 대가족이 흩어지지 않았던 것은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었습니다. 당신은 자식들에게 ‘오늘은 뭘 먹이나’를 매일 기도하셨어요. 부자로 사시다가 빈손이 되셨으니 ….”(안희숙)
 
  “어머니는 가난한 이에게 당신이 드시던 죽도 떠 주신 분이셨죠. 겨울에 걸인이 찾아오면 자신의 솜바지를 벗어 입히실 정도로 정이 많으셨어요.”(안희복)
 
  안씨 집안에 따르면 아내 김흥봉은 역사에 조예가 깊었고 독서량이 대단했다고 전한다. 그녀는 밤새워 쓴 남편의 원고를 마지막에 검토한 후 신문사와 잡지사에 보냈다고 한다. 또 달리기를 곧잘 했던 장남 병원이 마감에 쫓기던 아버지의 원고를 전달하는 일을 도맡았다.
 
 
  여순반란사건을 ‘뉴스 영화’로 만들다 영면
 
1938년 무렵 서울 명륜동 집 앞에서. 뒤에서부터 희원, 희옥, 병원, 병옥, 희숙, 병철. 그외 병준은 돌을 지난 갓난 아이였고, 희복, 희정, 희상은 태어나지 않았을 때다.
  작가이자 화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벌였던 석영이 영화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소설 《상록수》의 심훈(沈熏·1901~36)이 감독한 영화 〈먼동이 틀 때〉(1927년작)의 미술감독을 맡으면서다. 또 신문연재 소설 〈춘풍〉이 박기채(朴基采·1906~?) 감독에 의해 영화화할 당시 안석주가 시나리오를 썼다. 안종화(安鍾和·1902~66) 감독의 영화 〈노래하는 시절〉(1930), 이규환(李圭煥·1904~82) 감독의 〈바다는 말하라〉(1935) 역시 석영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안희복 교수의 말이다.
 
  “아버지 영화가 국내엔 없는데 미국에 3편 정도가 있다고 해요. 아들(박상준 플루티스트)이 다 봤다고 해요.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아쉬워요. 그림, 삽화, 소설 등 많은 작품을 남기셨는데 거의 다 없어졌어요.”
 
  장남 안병원이 펴낸 회고록 《음악으로 겨레를 울리다》(삶과꿈 刊)를 보면, 안석주가 친일 영화 〈지원병〉을 만든 사연이 소개돼 있다.
 
  〈… 전쟁(태평양 전쟁-편집자)이 끝나가던 그즈음, 총독부 문화부에 있던 일본 사람이 매일 아침 아버지를 찾아오다시피 했다. 유망한 영화감독이자 영화사 부사장인 아버님을 그냥 둘 리 없었다. 조선 청년들을 일본군에 지원시키기 위한 선전 영화를 만들라는 공갈 협박이 거세졌다. 감옥살이를 하고 싶냐, 너희 가족이 크게 다친다 … 등등 별별 소리를 다 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가족을 사랑하시는 아버님은 그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영화 〈지원병〉의 감독을 맡으셨다. 9남매(큰누님은 일찍 돌아가셨다)의 어린 자식들을 위해 어쩔 수 없니 내린 결정이었다. 굴욕적인 영화를 만든 감독의 숨은 진심을 보여주듯, 영화 중에는 지원병을 환송하는 군중이 땅에 떨어진 일장기를 밟고 지나가는 장면이 삽입됐다고 한다. …〉(p.43)
 
진명여고 음악교사 시절의 안희숙과 오빠 안병원.
  이에 대해 안희숙 교수는 “아버지 이름이 (노무현 정권 때) 친일파 명단에 올랐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때(일제시대) 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고 했고, 안희복 교수는 “홍난파·김활란·이광수 같은 분들마저 죄다 친일파로 만들었으니 …”라고 속상해했다.
 
  안석주는 한국 최초의 근대 미술단체인 ‘서화협회’에서 만화를 배우고 휘문고보에서 도화강사(미술교사)로 근무했다. 1922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나도향의 소설 〈환희〉에 삽화를 그리며 신문에 데뷔했다. 그러나 생전 그가 남긴 유화작품은 거의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신문에 그린, 당대를 날카롭게 풍자한 삽화들은 빛바랜 지면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안희숙 교수의 말이다.
 
  “학창시절, 아버지의 작품인 〈여학생〉, 〈희망〉이 교과서에 실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겐 놀라운 일이었고 돌아가신 뒤 아버지 흔적을 그렇게 확인할 수 있었죠. 사실, 아버지가 남긴 작품들이 너무 많지만 찾을 수 없었는데 남편인 이대 불문과 최성민 교수(작고)가 《조선일보》 지하 자료실을 뒤져 두 권의 책으로 묶을 수 있었습니다. 복사기에 넣을 수조차 없게 삭아 버린 수십 년 전 낡은 신문조각들을 낱낱이 뒤져 어렵게 연재소설의 문맥을 되살릴 수 있었어요. 그 책이 오빠(안병원)의 이름으로 출간됐습니다.”
 
  안석주는 광복 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대한영화사 전무이사, 대한영화협회 이사장 등을 맡아 좌우로 갈린 영화계 재건에 힘썼다. 그러나 《조선문화30년사》를 집필하던 중 쓰러지게 되고 그 와중에 여순반란사건을 소재로 ‘뉴스 영화’를 제작하다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1950년 2월 24일 오전 5시. 50세의 일기로 서울 신당동 291-33번지 자택에서 영면했다. 서울 제2운동장(옛 동대문 운동장)에서 영결식이 거행됐다. 당시 사람들은 “저 집은 고아원 신세를 지겠구나”며 혀를 찼다고 한다. 안희숙 교수의 말이다.
 
  “돌아가셨을 때 상여 뒤를 따르던 만장(輓章)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어요. 아버지 장례식이 ‘뉴스 영화’에 나왔는데, 한 달 동안 상제(喪祭) 모습이 (극장에) 상영됐어요. ‘뉴스 영화’ 필름이 지금도 어딘가 있을 텐데 ….”
 
 
  4남 5녀 가족의 일생
 
안석주의 무덤 앞에서 부인 김흥봉 여사.
  안석주는 아내 김흥봉과의 사이에 4남 6녀를 두었다. 첫째 희원은 일찍 사망한 데다 밑의 동생들과 나이차가 많았다. 또 희원에 대한 살뜰한 추억을 취재과정에서 들을 수 없었다. 후손들은 둘째 희옥을 ‘첫째’라고 밝혀 편의상 ‘장녀’로 소개한다.
 
  장녀 희옥(安熙玉·1924~2014)은 이화여대 부속 유치원 원장을 지냈다. 일제시대 때 식산은행 간부였던 남편이 6·25 때 납치됐다고 한다. 슬하에 두 아들을 뒀는데 둘째가 뉴욕에서 활동 중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영태다. 미국에서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연주를 이어 가고 있다.
 
  장남 병원(1926~2016)은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경기여중·고, 경복중·고, 용산중·고 음악교사를 거쳐 숙명여대 음대 강사를 지냈다. 1945년 봉선화동요회를 창단, 창작 동요를 보급했으며 1954년에는 한국어린이 음악사절단 단장 겸 지휘자로 미국 48주를 돌며 순회공연을 가졌다. 1974년 캐나다로 이주해 토론토 YMCA 합창단, 천주교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했다. 후손들은 “오빠가 캐나다 교민사회에서 음악계의 대부로 통했다”고 말한다. 아내 노선영(盧璿寧)과 결혼해 2남1녀를 낳았다. 장남 승언(아내 전희경), 차남 승범(아내 Kimberley), 장녀 승혜(남편 Andrew)는 직업으로서 예술인의 길을 걷지 않았으나 모두 음악, 미술, 운동에 소질이 있고 문화예술에 대한 안목을 타고났다고 한다.
 
  차남 병옥(安丙玉·1929~2012)은 부친을 빼닮았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많았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형을 따라 캐나다에 정착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특별한 사회활동 없이 은둔하며 지냈다고 한다.
 
  연세대 음대 명예교수인 차녀 희숙(1932~)은 국내 1.5세대 피아니스트로 주목받았다. 평생을 연세대 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연주활동을 병행했다. 남편은 이화여대 불문과 최성민(崔性珉) 교수. 슬하의 아들 최진호(崔眞豪)는 성악가(테너)다. 여러 차례 안희숙·최진호 ‘모자(母子)음악회’를 열었다. 최진호의 아내는 피아니스트 한희경(韓熙卿).
 
사제모임인 ‘희연회’는 매년 한 차례 정기연주회를 갖는다. 2011년 안희숙 연세대 명예교수(왼쪽에서 다섯번째)가 제자들과 피아노 연주를 끝내고 찍은 사진이다.
  동생 희복은 “어렸을 때 한방에서 10식구가 잠을 잤다. 희숙 언니가 밤새워 피아노를 쳤다. 자다가 깨 보면 (제가) 피아노 다리를 베고 있더라(웃음)”고 했다. 안희숙은 《조선일보》 주최 신인음악회에 출연한 후 《한국일보》 주최 독주회를 8차례나 가졌다고 한다. 현재 연세대 음대 졸업생 제자동문 모임인 ‘희연회’를 결성, 15년째 만남을 이어 가고 있고 매년 한 차례 정기연주회를 갖고 있다.
 
  삼남 병철(安丙哲·1934~2014)은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플루트, 색소폰 등 관악기에 능했다. 가족들은 “6·25 당시 대가족이 함께 피란가기 어려워 병옥·병철이 자원입대할 수밖에 없었고, 병철은 해병대에서 죽을 고생을 했다”고 기억했다. 형들을 따라 캐나다에 정착, 토론토에서 악기수리점을 운영했다. 동생 희복은 “병철 오빠의 영향으로 어깨너머로 플루트를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사남 병준(安丙俊·1937~2013)은 배제고와 연세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집안에서 수재로 기대가 컸다고 한다. 캐나다에 정착해 사업을 했으나 예술가의 길을 걷진 않았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삼녀 희복(1941~)은 한세대 음대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어린 시절, 오빠(안병원)가 이끌던 봉선화동요회, 한국어린이음악사절단 단원으로 미국 순회공연을 다녀오기도 했다. 일찌감치 제대로 된 음악수업을 받은 셈이다. 플루트를 전공, 서울시향 플루티스트로 활동하다 서울대 교수인 남편 박인수(테너)의 유학길에 따라나섰다. 플루트 연주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오페라 반주를 돕다가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만학으로 맨해튼음대 대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테너 박인수가(家)와 겹사돈
 
1980년 무렵 안희복 교수(가운데 검은 드레스)가 오페라 〈춘희〉의 주인공 비올레타 역으로 공연하고 있다.
  남편 박인수는 “군입대, 제대, 결혼, 대학졸업 등을 모두 마치고 시작한 미국 유학생활은 온통 고통 투성이였다. 아내 안희복은 플루트를 전공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음악적인 모든 면에서 나보다 뛰어났지만 나 때문에 고생하느라 자기의 길을 가지 못했다”고 미안해했다. 안희복은 “미국에서 문구점 점원, 아이돌보기, 식당 종업원 등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남편 뒷바라지를 했다. 우연한 기회에 플루트에서 소프라노로 전공을 바꿨는데 그게 인생을 변화시켰다. 귀국 후 한세대 음대에 성악 교수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운이 좋았다”고 했다. 언니 안희숙은 “동생(안희복)이 오빠(안병철)의 영향으로 플루트, 언니(안희숙) 영향으로 피아노, 남편(박인수) 영향으로 성악을 배웠다. 그러나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라 어깨너머로 배웠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고 했다.
 
  박인수·안희복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플루티스트 박상준은 부모가 다녔던 맨해튼음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바로크 플루트’ 연주자로 활동 중이다. 이들 세 사람은 순회 가족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사녀 희정(安喜貞·1944~)은 홍익대 조소과를 나와 도예가로 활동 중이다. 현대미술가인 남편 권승현과 캐나다로 이주했다. 슬하에 낳은 딸이 바이올리니스트 권애리.
 
  오녀 희상(安喜祥·1949~)은 형부(박인수)의 막내동생인 박정수와 결혼했다. 안씨, 박씨 두 집안이 겹사돈을 맺은 셈이다. 당시 박정수는 마도로스였다고 한다.
 
  안희상은 한양대 음대에서 플루트를 전공했다. 슬하에 1남 1녀를 뒀는데 딸(박 조앤)이 토론토에서 판사로 재직 중이다. 박정수·안희상이 결혼한 사연에 대해 안희복은 “서울시향 플루티스트였을 때 1주일에 한 번씩 시댁엘 갔다. 가끔 동생(안희상)을 데리고 갔는데 시동생(박정수)과 눈이 맞았던 모양이다. 남편이 시아버지에게 ‘둘이 결혼시키면 어떨까요?’라고 농담처럼 말하니 시아버지께서 ‘안석영 집안이면 무조건 좋다’고 허락하셨다”고 했다.
 
  안석주의 4남 5녀들은 비록 음악적 재능을 모두 활짝 펼치진 못했지만 재능만큼은 뛰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취재과정에서 가족 내 남다른 훈육방식을 듣지 못했으나 전방위 예술가였던 안석주의 재능을 물려받은 유전과 곁에서 지켜본 간접경험, 작곡가인 장남 안병원이 광복 직후 어린이동요회를 결성해 활동한 것도 이들 집안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안희숙·희복 교수는 “아버지 재능을 형제들이 조금씩 다양하게 타고났다. 아버지의 호가 석영(夕影)이다. 저녁 그림자라는 뜻이다. 서녘하늘을 서서히 물들이는 황혼의 빛처럼 4남 5녀 모두에게 아버지의 재능이 스며들었다”고 말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탄생하기까지
 
  독립이여 어서 오라. 독립이여 오라 ~
 
  장남 안병원이 펴낸 회고록 《음악으로 겨레를 울리다》에는 동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1947년 1월 어느 날, 서울중앙방송국 어린이 프로 담당자가 안병원을 찾아왔다. “해방 후 두 번째 맞는 3·1절에 좀 색다른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 노래극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방송국 사정으로 원고료, 작사료, 작곡료를 지불할 수 없었다.
 
  안병원은 아버지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물론 원고료는 없었다. 안석주는 아들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독립의 날〉이라는 25분짜리 노래극이 완성됐다. 작곡은 안병원, 편곡(현악 4중주)은 당시 서울대 음대생인 권길상, 노래극 출연은 봉선화동요회가 맡았다.
 
  어린이 방송 프로그램에서 처음 시도했던 노래극에 쓰인 5곡 중 한 곡이 바로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노랫말을 토대로 1주일 이상 고민한 끝에 곡을 만들었다.
 
  〈꿈에도 소원은 독립/ 이 목숨 바쳐서 독립/ 독립이여 오라/ 이 겨레 살리는 독립/ 이 나라 찾는 데 독립/ 독립이여 어서 오라/ 독립이여 오라〉
 
  38선이 그어지고 남북이 분단되면서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바뀌어 초등학교 5학년 음악교과서에 수록됐다. 생전 안병원은 “지금도 이 노래를 접하면 가슴이 뭉클하고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진다. 아버님이 독립을 염원하며 써 주신 글, 오늘도 통일 염원을 부르짖는 7000만 민족의 이 노래를 아버님께 들려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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