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뉴스의 이면(裏面)

‘안기부 암호명 신일구’ 수지 김 전 남편의 31년 만의 고백

윤태식 “나는 영원한 죄인, 수지 김과 그 가족들에게 죽어서도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20대 초반 비디오 판권 사업으로 큰돈 벌었지만, 유흥비로 탕진
⊙ 홍콩에서 수지 김과 만난 지 한 달 만에 혼인신고… 석 달도 안 돼 끝난 수지 김과의 결혼 생활
⊙ “죽일 의도 없었는데 사망해 당황… 잔머리 굴린 대가가 이렇게 클 줄 몰라”
⊙ “1987년 1월 9일, 귀국 후 ‘사건 진상’ 고백하자 안기부 요원들이 군복 입히고 무차별 집단 구타”
⊙ “‘박종철 사망 사건’ 후 안기부의 대우 달라져… ‘함구’ 협박받고 풀려나”
⊙ “수지 김 가족 만나려다 다시 안기부로 끌려가 죽기 직전까지 맞아”
⊙ 한 차례 실패 후 사업계획서 하나만으로 패스 21 투자금 200억원 끌어 모으는 수완 발휘
⊙ “패스 21의 ‘지문 인식 기술’은 연구진 영입 후 개발… 동업자 기술·인력 빼 온 적 없다”
⊙ 2001년 7월, 세계 지문 센서용 반도체 시장 점유율 70%였던 미국 베리디컴 인수할 정도로 승승장구
⊙ “‘윤태식 게이트’ 당시 내가 뇌물 줬다는 정치인·고위관료는 모두 무죄 받아”
⊙ 출소 후 ‘휴대폰 실시간 공유보안 관리시스템’으로 국내외 특허 획득… ‘전자화폐’와 연동해 사업 추진 중
  〈1987〉이란 영화가 인기다. ‘6월 항쟁’ 30주년을 기념하는 성격이 짙은 시대물로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1987년 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다뤘다. 1987년에 접어들면서 직선제 개헌으로, 대통령을 직접 뽑자는 민주화 열망이 커졌다. 1월 14일 경찰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씨가 사망한 사건은 이후 ‘87년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박 군이 사망하기 5일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수지 김 여간첩 조작사건’의 주역 윤태식씨가 한국으로 들어왔다. 수지 김 사건은 87년 1월 초 수지 김의 남편 윤태식씨가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에 뛰어들어 “내 아내가 북한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해외담당 부국장이던 장모씨를 현지로 급파해 사건을 조사했다. 안기부는 며칠 뒤인 1월 8일 태국 방콕에서 윤씨의 기자회견을 주선했다. 윤씨는 수지 김을 간첩으로 몰면서 본인이 납북당할 뻔했다고 발표했다. 윤씨는 다음날인 9일 귀국해서도 같은 내용의 기자회견을 가졌다.
 
  당시 민주화 요구에 시달리던 5공화국 정부는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1월 26일 수지 김이 윤씨와 동거하던 홍콩 주룽(九龍) 지역의 아파트 침대 밑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안기부는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지만, ‘시국상황이 복잡하다’ ‘남북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 뒤로 남편 윤씨는 국내에서 벤처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가 세운 지문 인식 시스템 벤처회사 ‘패스 21’은 급성장했다. 1990년대 말 벤처 기업인으로 승승장구하던 윤씨는 2000년 3월 수지 김 유족들의 고소로 2001년 구속기소돼 대법원에서 징역 15년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2017년 4월 26일 만기출소한 윤씨와 만나게 된 것은 2017년 11월 즈음이었다. 만나기 전 검색한 관련 기사 속의 그는 ‘희대의 살인자’이자 ‘사기꾼’이었다. 몇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윤씨가 막강한 권력기관의 조작극에 끌려다닌 가련한 조연이었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서 인터뷰를 제안했다.
 
  한 치의 거짓이 있다면 당장 중단한다는 전제와 함께. 윤씨는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믿지 않는 분들은 믿지 않겠지만 인터뷰 때 0.001%라도 거짓을 말한다면 우리 부모님은 개보다 못한 존재”라고 했다. 조작된 억울한 죽음으로 인한 혹독한 시련을 겪은 수지 김의 유족들은 윤씨의 인터뷰를 못마땅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론의 기회는 있어야 한다.
 
  2018년 1월 9일 경기도 부천에 있는 ‘YOONAM’에서 그와 만났다. 윤씨는 ‘YOONAM’은 자신의 성(YOON)과 AM(오전)을 합친 것으로 ‘윤태식의 아침’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1958년 충남 예산 출생
 
  ― 관련 기사를 보니까 나이, 학력이 제각각이더군요.
 
  “1958년생입니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고요. 학력은 중학교 1학년 중퇴입니다.”
 
  ― 왜죠.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어요. 당시 살던 집이 행당동(서울 성동구)이었는데, 어머니가 마장동에서 선지를 떼 와서 팔았죠. 차비가 없어서 어머니가 마장동에서 행당동까지 선지 담은 통을 머리에 이고 걸어오셨어요. 기성회비를 낼 형편도 안 됐죠. 회비를 안 낼 때마다 선생님들이 때리고, 벌을 줬는데 그게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때려치우고 신문 배달, 아이스케키 장사를 했죠. 번 돈으로 동생들(남동생 3명) 기성회비 내 줬습니다.”
 
  윤씨는 ‘수지 김 사건’으로 복역 중일때 교도소에서 중·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를 봐 합격했다. 현재 독학사 취득도 거의 마무리 단계다. 독학학위제는 검정고시와 같이 시험을 통해 4년제 대학교 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 국가제도다.
 
  ― 군대는 다녀왔나요.
 
  “방위산업체에서 대체복무를 했습니다.”
 
  ― ‘초졸’이 방위산업체에서 대체복무를 하다니요.
 
  “제가 75~6년 즈음에 한국기능훈련원(한국직업훈련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임)에 시험을 봐서 들어갔습니다. 여기 2년 코스를 마치면 방위산업체 대체복무가 가능했습니다.”
 
  ― 어디서 대체복무를 하셨죠.
 
  “지금 현대로템인데 당시는 현대차량(1977년 설립)이었습니다.”
 
  ― 어떤 일을 했죠.
 
  “현대차량에서 전차(M-48, M-60)를 만들었는데, 저는 조립할 때 쓰는 중장비를 다뤘습니다.”
 
  ― 비디오테이프 사업은 언제 시작한 겁니까.
 
  “78년인가, 79년인가 현대차량 동료 집에 놀러 갔는데 일본산 VTR이 있었습니다. 그걸로 사무라이 영화를 봤는데, 보는 순간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1년 정도 뒤에 홍콩으로 떠났죠.”
 
  ― 왜 홍콩으로 갔나요.
 
  “동료 집에서 비디오를 보면서, ‘우리나라도 곧 VTR을 생산할 텐데 그렇게 되면 비디오테이프가 상당히 인기를 끌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인기있는 검술 영화는 거의 홍콩에서 만들었죠.”
 
  ― 가자마자 뭘 했습니까.
 
  “홍콩 영화사에 가서 비디오 판권을 산다고 했습니다. 당시는 극장, TV 판권은 있었지만, 비디오 판권은 없었습니다.”
 
  ― 영화사 입장에서는 ‘웬 떡이냐’ 했겠네요.
 
  “그렇죠. 자기들이 보기엔 돈이 전혀 안 될 거 같은데, 제가 산다고 하니까요.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몇백 편의 비디오 판권을 샀죠.”
 
  ― 이후 우리도 VTR을 생산했죠.
 
  “제 생각대로 금성, 대우, 삼성이 VTR를 만들기 시작했죠. 대기업 사이 경쟁이 붙으면서 VTR를 살 때 어느 기업이 재미있는 ‘비디오테이프’를 주느냐가 승부를 결정짓는 요인이 됐어요. 인기 많은 홍콩 영화 비디오 판권을 제가 다 가지고 있으니 어땠겠습니까. 돈을 쓸어 담았죠.”
 
  ― 얼마나 벌었나요.
 
  “제가 홍콩 영화사로부터 비디오 판권 하나를 100만원에 샀습니다. 이걸 대기업한테 하나에 5000만원에 팔았죠. 제가 산 판권이 몇백 개니 얼추 계산해도 50억 이상은 번 것 같습니다.”
 
  ― 어린 나이에 무서울 게 없었겠네요.
 
  “제가 정말 후회되는 게 어린 나이에 엄청난 돈을 버니까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 했어요. 전부 술값으로 탕진했죠. 하루에 룸살롱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5000만원을 쓴 적도 있었습니다.”
 
  ― 집이 가난했다면서 부모님 좀 드리지 그랬습니까.
 
  “드렸죠. 술값으로 훨씬 많이 쓴 게 문제였지만요.”
 
 
  수지 김과의 첫 만남
 
2001년 11월 13일 수지 김 살인 혐의 등으로 검찰에 구속된 윤태식씨. 사진=조선DB
  ― 수지 김은 언제 만난 겁니까.
 
  “2~3년 돈을 엄청나게 벌었는데, 갑자기 수익이 떨어지더군요. 원인을 분석해 봤더니 홍콩 영화사도 돈 냄새를 맡고 판권 가격을 올린 데다가 제 통역도 중간에서 돈을 많이 해먹었더라고요. 내가 직접 언어를 배워야겠다 싶어 1986년도에 홍콩 중문대학교 어학원 코스에 등록했죠. 그때 제가 머물 집을 계약했는데, 그 집이 수지 김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그때 처음 만난 거죠.”
 
  ― 첫눈에 사랑에 빠진 건가요.
 
  “원래 수지 김이 1986년 9월에 일본으로 가면 제가 그 집에 들어가 살기로 했는데 수지 김이 갑자기 일본에 가는 게 연기됐다는 겁니다. 그럼 어떡하느냐고 물으니 자기가 일본으로 갈 동안만 같이 지내자고 하더군요. 방 하나와 거실이 있었는데, 저보고 거실에서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알았다고 했습니다.”
 
  ― 한 번 본 사람과 동거를 시작한 거네요.
 
  “곧 일본으로 떠난다고 했으니까요. 조금만 참자는 생각으로 집으로 들어간 거죠. 어차피 수지 김이 나가면 제가 살 집이기도 했고요.”
 
  ― 어떻게 결혼까지 하게 된 겁니까.
 
  “처음엔 활동 시간이 달라 마주칠 새도 없었습니다. 수지 김은 제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가서 제가 자는 시간에 들어왔거든요. 그 집에서 같이 지낸 지 한 열흘쯤 지났을 겁니다. 새벽에 저를 깨우는 거예요. 술에 잔뜩 취해서요.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술 한잔하자고 하더군요. 거절하기도 뭐 해서 한잔하다보니 마음을 터 놓는 사이가 됐고,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죠.”
 
  ― 언론 보도를 보니, 만난 지 한 달 만에 혼인신고를 했더군요.
 
  “요즘과 다르게 당시는 굉장히 보수적이었잖아요.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동거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어차피 같이 살 거 결혼을 하기로 한 것이죠. 혼인신고를 먼저 하고 결혼식은 나중에 하자고 했습니다. 1986년 10월에 서울에 와서 부모님께 인사 올리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갔죠.”
 
  ― 이후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1987년 1월 2일, 돈 문제로 수지 김과 싸웠습니다. 홍콩에 비디오 가게를 내려고 했는데 돈이 좀 부족했습니다. 수지 김이 1월 1일 일본에 가서 돈을 가져오겠다고 하더군요. 홍콩에도 신정 연휴가 있어서 연휴 끝나고 가라고 했죠. 처음에는 알았다고 하더니 갑자기 왜 못 가게 하냐고 화를 내서 다툼이 시작됐는데 그때 그 사람의 진짜 성격을 알게 됐어요. 할 말 못 할 말을 다 하더군요. 새벽 2시까지 싸웠는데, 갑자기 가야 되겠다며 벌떡 일어나서 나가는 겁니다. 어떡합니까. 잡았죠. 근데 제 팔을 물더라고요. 아프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너무 화가 나서 뿌리치면서 수지 김을 밀었죠.”
 
  윤씨는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밀린 수지 김의 머리가 벽 모서리에 부딪히고 뒤로 넘어지면서 침대 모서리에 또 부딪혔습니다. 깜짝 놀라서 막 흔들었는데 이미 죽었더군요. 순간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말도 안 통해서 해명도 못 하고 사형당하겠다는 생각이 저를 지배했습니다.”
 
  ― 노끈으로 목을 졸라 죽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
 
  “겁이 나니까 약은 꾀를 쓴 거죠. 수지 김이 스스로 자살한 것처럼 꾸미려 한 겁니다. 여행용 가방을 조이는 밴드를 목에 감고 창문에다 매달려고 했는데,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라서 포기하고 시체를 침대 밑에 감췄죠.”
 
 
  사형당할까 봐 잔머리 굴려
 
2001년 12월 11일 오전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수지 김 사건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에 출두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사건 직후 싱가포르에는 왜 간 겁니까.
 
  “1월 2일 아침, 한국대사관에 전화했습니다. 전화를 받기에 ‘수지 김이 저와 싸우다 죽었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제가 비자 유효기간이 막 지난 상태라 한국행 비행기를 탈 상황이 안 됐습니다. 다시 한국대사관에 전화했는데, 아무도 전화를 안 받는 겁니다. 여길 당장 벗어나고 싶은데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답답했죠. 계속 잔머리를 굴리다가 홍콩 이민국을 찾아갔습니다. 어떻게 하면 출국할 수 있느냐고 물었죠. 가장 이른 시간대의 출국 비행기표를 제시하라고 해서 싱가포르행 비행기표를 사서 간 겁니다.”
 
  ― 싱가포르로 갈 동안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잔머릴 굴렸죠. 싱가포르에 있는 북한대사관에 가서 ‘제 아내가 북한에 있다’고 말하면 날 북한으로 보내려 할 것이고, 북한행 비행기에 태우기 위해 이동할 때 탈출을 한 뒤 곧장 미국대사관에 가서 ‘북한이 나를 납치하려고 했다’고 하면 나를 한국으로 보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왜 북한을 끌고 들어간 겁니까.
 
  “확인을 못 할 거 아닙니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 북한대사관에 가면 억류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까.
 
  “했지만 제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상태였기 때문에….”
 
  ― 북한대사관에 가서 뭐라고 했습니까.
 
  “와이프가 사라진 상황에서 누군가 집으로 찾아와 ‘와이프를 만나려면 북한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 그 말을 믿던가요.
 
  “‘네가 표(북한행 항공권)를 사서 와라’고 하더군요. ‘알았다’ 하고 나오자마자 미국대사관으로 뛰어들어갔죠. 북한대사관에서 나를 납치하려고 하는데 도망쳐 나왔으니 한국대사관에 연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 연락해 주던가요.
 
  “연락해 줘서 한국대사관으로 갔죠.”
 
  ― 한국대사관에서 이상하게 보지 않았습니까.
 
  “북한대사관에 납치를 당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사진 몇 장을 보여주고, 누구를 봤느냐고 묻더군요. 한 사람을 찍으니 그때부터 여러 가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시나리오가 모두 거짓이다 보니 말이 자꾸 꼬이는 겁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며칠 뒤 안기부 사람이 와서 저를 태국으로 옮겼습니다. 태국이 안전하다면서요.”
 
  ― 태국에서 안기부 조사를 받았나요.
 
  “태국에서 서류를 한 장 주더군요. 기자들이 질문하면 이렇게 답하라고요. 일종의 답안지였죠. 저는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계속 버텼죠.”
 
  ― 왜 안 한다고 했습니까.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시나리오였으니까요.”
 
  ― 그럼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그랬습니까.
 
  “‘지금은 남북이 전쟁 중이다. 이건 국익을 위한 일이다. 너의 신변은 국가가 보장한다’면서 저를 설득했습니다. 제 큰아버지가 6·25 참전 용사이기도 했고, 어쨌든 ‘국익’이란 말에 흔들렸습니다. 제가 독자적으로 뭘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고…. 모두 제 잘못이죠. 죽어서도 후회할 겁니다.”
 
  당시 윤씨는 태국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밝혔다.
 
  〈― 지난 1월 5일 북한대사관에 억류돼 있을 때 어떤 지령을 받았나.
 
  “자신을 대리대사로 소개한 1등 서기관 이창용으로부터 유고슬라비아를 경유해 스위스로 가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치적 망명을 요구할 것을 지시받았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과거 유성환 의원과 문익환 목사에게 정치자금을 댄 것이 문제가 돼 한국에서의 영화사업이 망했으며 이 때문에 홍콩으로 사업 터전을 옮겼으나 남조선 당국으로부터 부당한 신변 위협을 받았다는 날조된 망명 이유를 내세울 것을 지시했다.”
 
  ― 이창용은 남한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했는가.
 
  “김대중 선생님의 요즘 근황을 묻는가 하면 유성환 선생님과 문익환 선생님은 꺼지지 않는 민족의 횃불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평화의 댐 건설성금 모금에 대해서도 ‘돈 없는 정부의 인민 착취’라고 비방하는가 하면 최은희·신상옥씨가 그네로부터 탈출한 뒤 ‘남조선에 잡혀가 총살당했다’고 억지 주장을 늘어놓기도 했다.”
 
  ― 신변위협은.
 
  “지시대로 따를 경우 처와 재회함은 물론, 홍콩에서의 사업자금도 지원해 줄 것이지만 불응하면 국내 가족들을 살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윤씨는 같은 내용의 기자회견을 다음날인 9일 한국에서도 가졌다. 그는 “너무 무서워 말을 못하겠다. 이번 일로 반공은 바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꼈다”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다음날 안기부는 “북한이 미모의 조총련계 공작원 수지 김을 내세워 홍콩 주재 상사원 윤씨를 납북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라고 발표했다. 윤씨는 남산의 대공분실로 인계됐다.
 
 
  김종필도 군복 입고 3일을 못 버텼다
 
2001년 12월 19일 서울중앙지검에서 박영렬 외사부장(왼쪽)과 신태영 1차장검사가 ‘수지 김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대공분실에서 또 조사를 받았나요.
 
  “제 목적이 우선 한국에 오고 보자였습니다. 한국에 온 뒤 안기부 요원한테 솔직히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수지 김은 나랑 싸우다가 죽었다고요.”
 
  ― 안기부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요.
 
  “황당해하면서 위에 보고하더라고요. 다음날 옷 한 벌을 입으라고 가져왔는데, 보니 군복이었어요. 입으라니 입었죠. 군복을 입자마자 안기부 요원이 하는 말이 ‘중앙정보부 만든 김종필이도 이 옷을 입고 3일을 못 버텼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네가 기자회견에서 말했던 게 진실이고 그 외의 진술은 다 거짓’이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조사를 받기 시작했는데 첫 질문이 ‘왜 그런 내용으로 기자회견을 했어’였습니다. ‘안기부에서 시켰다’라고 답했죠. 답이 끝나자마자 마구잡이로 패더군요. 하도 맞아서 차라리 죽여라, 난 사람 죽인 죄도 있으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며칠을 죽기 직전까지 맞았는데, 갑자기 때리지 않더군요.”
 
  ― 이유가 뭘까요.
 
  “제가 날짜도 안 잊어버립니다. 1월 15일이었어요. 자기네끼리 ‘큰일 났다. 일 처리를 XX들이 잘못해서 난리가 났다’고 쑥덕거려서 무슨 일이 터졌구나 했는데, 알고 보니 전날(14일) 박종철씨가 고문을 받다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 겁니다.”
 
  ― 언제 안기부에서 나왔나요.
 
  “한 3개월 더 조사를 받았어요. 진술서를 써야 내보내 준다고 하면서 3가지 진술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하나가 원래 팩트, 나머지 두 개는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썼습니다. 그리고 4월 5~6일쯤에 나왔죠.”
 
  ― 허위 진술서를 쓰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진 않았나요.
 
  “제가 사실대로 말하면 사형시킬 거라고 했습니다.”
 
  ― 계획대로 자유의 몸이 되긴 했네요.
 
  “말만 자유의 몸이었습니다. (안기부의) 감시가 심했죠. 제 암호명이 신일구였습니다. 원래 싱가포르에서 1월 9일에 한국에 온 사람이라고 싱일구였는데, 발음이 어렵다며 신일구로 불렀죠. 매일 하루에 다섯 번 정도씩 안기부에 전화를 걸어 위치를 보고했습니다. 신일구입니다 하면 묻지도 않고 제 담당 부서로 연결해 줬죠.”
 
  ― 본인은 자유의 몸이 됐지만, 수지 김 가족은 조작된 사건 때문에 혹독한 시련을 겪었잖아요.
 
  “죽어서도 못 갚을 신세를 졌지요. 저도 너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안기부에서 나오자마자 수지 여동생 남편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윤씨는 수감생활 당시 동서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여줬다.) 만나기로 했죠. 사실을 털어놓고 사죄하려는데 통화내용이 도청돼서 만나러 가는 도중에 안기부 요원에게 잡힌 겁니다. 안가에 끌려가서 한마디로 박살이 났어요. 세종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심하게 맞았죠.”
 
  ― 이후 지금까지 수지 김의 가족을 만난 일이 없죠.
 
  “안기부에서 감시하니까 만날 수가 없었죠. 만나면 그분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 교도소에 있을 때 서신으로라도 사죄하셨나요.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나는 그 가족한테 ‘영원한 죄인’이에요.”
 
 
  패스 21 만들 당시 억대 연봉·아파트 등 파격 대우 제시하며 핵심 기술진 영입
 
  수지 김 사건 이후 사기죄로 2년 넘게 복역하는 등 몇 년간 부침을 겪던 윤씨는 ‘생체 정보 보안 사업’에 뛰어들었다. 출소 후, 사업 구상을 하던 차에 윤씨는 친구의 소개로 지문 인식 출입 잠금장치를 만든 브○○이란 회사를 알게 됐다. 당시 이 회사는 외환위기로 인해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수완’이 좋은 윤씨는 이 회사의 회장으로 일하면서 투자자 모집 등을 맡았지만, 해당 회사와의 관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윤씨에 따르면 회사 실적이 좋지 않아 투자자 모집을 할 수 없어 9개월 만에 ‘결별’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윤씨가 브○○의 핵심 인력과 기술을 빼갔다는 주장이 있다. 윤씨는 당시 브○○엔 영입할 기술진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부인했다.
 
  브○○을 통해 ‘생체 정보 보안’에 눈을 뜬 윤씨는 독자적으로 사업하기 위해 억대 연봉과 30평대 아파트 한 채, 중형차 한 대씩을 제시하며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연구진을 영입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전자·정보통신 기술 개발을 목적으로 설립된 정부 출연 연구기관이다. 윤씨 역시 ‘지문 인식’ 등을 비롯한 ‘생체 정보 보안’에 대해 공부하면서 최첨단 기술을 보유한 ‘벤처 기업인’으로 ‘재탄생’했다. 다음은 ‘패스 21 창업’과 관련한 윤씨와의 문답이다.
 
  ― 생체 정보 보안 사업을 언제부터 구상했습니까.
 
  “감옥에 있을 때부터입니다.”
 
  ― 출소 후 바로 패스 21을 시작한 겁니까.
 
  “1996년에 나와서 패스 21을 시작한 거죠.”
 
  ― ‘지문 인식’이란 아이디어는 원래 다른 회사의 것이라던데요.
 
  “감옥에서 나와서 그 사업을 하려는데, 내 친구 회사 건물에 ‘지문 인식’ 회사가 있다고 해서 소개를 받았어요. 지문 인식 도어락을 만드는 회사인데, 내가 ‘지문 인식과 휴대폰을 결합해서 뭘 하겠다’고 하니까 그 회사 대표 김모가 ‘제 회사 회장을 맡아주십시오’라고 해서 거기서 시작했죠.”
 
  ― 왜 헤어졌습니까.
 
  “그 회사는 빚이 너무 많아서 그냥 직원도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만날 노동청에 고발당하고 검찰에 불려 다니고 집세도 못 내고 그런 상황이었어요. 어디서 투자를 받더라도 밑 빠진 독이었습니다. ‘야, 이건 도저히 안 된다. 내가 독립을 해야겠다’ 해서 차린 게 ‘패스 21’이에요.”
 
  ― 브○○에 직원이 한 명도 없었다고요.
 
  “아니, 무슨 인력이 있겠습니까.”
 
  ― 기술진만 싹 빼내 갔다면서요.
 
  “기술 인력은 그 회사에 하나도 없고…. 걔(대표)만 엔지니어고, 월급을 못 주니까 직원이 없었습니다. 그 회사를 가지고 어떻게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이 도저히 없었습니다.”
 
 
  사업계획서 하나만으로 투자금 200억원 끌어 모아
 
  ― 직원 한 명 없는 회사에 왜 회장으로 들어갔습니까.
 
  “내 아이디어로 투자를 받으면 살릴 수 있겠다고 본 건데, 부채가 너무 많았습니다. 투자를 받아봤자 이자도 못 내고, 도어락도 샘플 하나만 만들어진 상태였습니다.”
 
  ― 따로 나와 만든 회사가 처음부터 ‘패스 21’은 아니었죠.
 
  “처음에는 브○○○○당으로 했죠.”
 
  ― 브○○○○당이요?
 
  “○○경제신문 사장 부인이 ‘○○당’이라는 예식장을 했어요.”
 
  ― 왜 회사 이름을 브○○○○당으로 지었습니까.
 
  “내가 그 예식장 건물에 사무실을 얻어서 그렇게 했는데요, 너무 이상해서 나중에 법인명을 패스 21로 바꿨어요.”
 
  ― 패스 21의 자금줄이라던….
 
  “돈 1원짜리 하나 투자한 게 없어요. 이분도 나 때문에 부도 안 나고 버틴 거예요. 부채가 많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 ○○당이란 업체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한국민속촌에 ‘○○화장품’ 홍보과장이 있어요. 그 사람이 소개해 줘서 ○○당 사장을 알게 된 거예요. 만나서 얘기하니까 그 사람 남편이 ○○경제신문 사장이야. 나보고 호의적으로 얘기하더라고요. 나한테 가장 큰 혜택을 받은 데는 거기야. 나한테 주식을 15%나 받았어요. 그걸 팔면 수백억이었어요.”
 
  ― 그 주식을 얼마에 줬습니까.
 
  “돈 1원짜리 하나 안 받고 줬어요.”
 
  ― 왜 줬습니까.
 
  “거기 사무실 쓰게 하고, 내가 기반을 잡을 때까지 어음을 빌려줬어요. 초반엔 그걸로 유지를 했죠.”
 
  ― 얼마짜리 어음입니까.
 
  “처음에 끊은 게 7000만원짜리, 그다음엔 2억짜리, 이런 식으로 돌렸죠.”
 
  ― 운영비 조달도 어려웠던 패스 21이 갑자기 어떻게 성장한 겁니까.
 
  “회사를 처음 만들 때 이자를 준다고 하고 10억원을 하루만 빌렸어요. 그럼 법인 계좌에 10억원이 찍히잖아요. 법인 자본금 10억이 된 거예요. 실제 돈은 없어 하루만 빌려서 한 거니까. ‘깡통 회사’지만, 주식은 10억원어치가 있잖아요. 사업계획서를 보이면서 그걸 20배에 팔았죠.”
 
  ― 액면가가 얼마였습니까.
 
  “5000원짜리를 10만원에 팔아서 총 200억원이 들어왔어요.”
 
 
  “패스 21 운영 당시 1년 판공비 50억원”
 
윤태식씨가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고 하는 ‘지문 인식 휴대전화’와 그가 한빛은행 결제 인증용으로 만든 지문 인식 장치다.
  ― 주식을 전부 팔면 경영권은 어떻게 됩니까.
 
  “그 200억원으로 다시 자본금을 채워 넣고, 20억원은 증자하는 데 썼어요. 66%가 내 주식이고, 33%는 팔았죠. 이건 나중에 ‘상법 위반’이라고 해서 처벌을 받았는데, 어쨌든 종잣돈 170억원이 생긴 겁니다. 이걸로 엔지니어를 다 끌어들여서 만든 게 ‘패스 21’인데, 제품을 실제로 만들어내니까 주가가 뛰고 난리가 난 거죠.”
 
  ― 뭘 만들었습니까.
 
  “(은행 결제용 지문 인식 장치를 보이며) 한빛은행, 지금의 우리은행이죠. 이거 만들어서 공급했고. (지문 인식 장치가 부착된 구형 휴대전화를 들고) 이게 그 당시 2G 휴대폰이에요. 지문을 찍어서 인증하는…. 휴대폰에 ‘지문’을 넣은 건 세계 최초예요.”
 
  ― 그 휴대전화가 실용화됐나요.
 
  “아니, 실용화되기 전에 구속된 거죠. 이게 세계 최초의 지문 인식 폰이고, 세계 최초로 금융도 이걸로 하고, 카드를 갖고 다닐 필요가 없다 그거죠. 김대중 대통령 앞에서 시연도 다 했어요.”
 
  ― 지금 보면 너무 빨리 만들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까.
 
  “내가 너무 빨리 일어난 거야. 내가 너무 앞서 갔던 거예요. 그때는 인프라가 없으니까, 전부 내가 구축해야 돼. 지금은 뭐냐, 고속도로가 깔린 거죠.”
 
  ― 당시 유흥비로 얼마나 썼습니까.
 
  “예전에 비디오테이프 사업할 때는 하루에 5000만원도 썼어요. 노래 잘한다고 (팁) 주고, 얼굴 반반하다고 주고. 벤처 할 때 내 주식 팔아서 마련한 1년 판공비가 50억원이었는데, 술집 가서 다 썼죠.”
 
  ― 패스 21 직원은 몇 명이었습니까.
 
  “한 40~50명 됐던 거 같은데.”
 
  ― 그 사람들이 다 억대 연봉이었나요.
 
  “아니요, 핵심기술진만.”
 
  ― 패스 21은 얼마나 운영하셨습니까.
 
  “한 2~3년.”
 
 
  14년 만에 조작 사실 밝혀진 ‘수지 김 사건’과 ‘윤태식 게이트’
 
2002년 3월 8일 수지 김의 동생 김옥경(왼쪽), 김옥임씨가 ‘반인도적 국가범죄 공소시효 배제 입법 촉구 기자회견’ 도중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사진=조선DB
  윤태식씨는 패스 21 경영 당시 매일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실무진은 그의 아이디어를 기술적으로 현실화하느라 바빴다. 개발된 기술은 곧바로 특허 출원을 했다. 패스 21 설립 이후 출원 건은 총 8건(국내 1개, 국외 7개)이다. 2001년 7월엔 세계적인 지문 센서용 반도체칩 제조사인 베리디컴을 인수했다. 당시 세계 지문 센서 시장에서 베리디컴의 점유율은 70%였다. 세계적인 영업망과 기술력을 갖춘 실리콘밸리 회사를 국내 벤처기업이 인수한 건 사상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패스 21은 그 당시로부터 14년 전 윤태식씨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온갖 ‘범죄의 온상’처럼 알려졌다. ‘반공 투사’였던 윤씨가 사실은 수지 김을 죽였고, 안기부는 이를 은폐하고 사건을 조작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윤씨는 구속됐다. 구속 이후 검찰 수사 과정을 통해 윤씨가 관계와 언론계에 전방위 금품 로비를 벌였다는 소위 ‘윤태식 게이트’도 터졌다.
 
  이와 관련해 전직 국가정보원장, 정보통신부 장관, 부패방지위원장, 국정홍보처장 등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검찰이 주목한 건 한창 주가를 올리던 벤처기업의 대주주가 가진 ‘주식’이었다. 당시 검찰은 패스 21 주주 308명 중 주식을 과도하게 갖고 있거나 차명으로 보유한 사람들을 모두 불러 조사했다.
 
  ― ‘패스 21’로 촉망받던 ‘벤처 기업인’이었는데, ‘수지 김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구속됐죠.
 
  “2001년 10월 24일인가?”
 
  ― 구속 후 ‘윤태식 게이트’도 터졌죠.
 
  “아니에요. 제가 수지 김 사건을 조사받기 위해 외사부를 왔다 갔다 하는데, 갑자기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서 집과 회사를 압수수색한 거예요. 비서실이 뚫렸죠. 사람을 만나면 받은 명함을 비서실에 다 줄 거 아니에요? 거기 보니까 정치권 사람들도 있잖아.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갖고 쭉 해서 나를 소환한 거예요.”
 
  ― 정치권뿐 아니라 언론계 인사와도 관계가 깊었죠. 특히 아까 얘기했던 ○○경제신문 사장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기사를 내보내고, 주가도 올리고요.
 
  “솔직히 말해서 도움받았지만, 그건 자기들이 주식 팔아먹으려고 한 거죠. 그 사람들이 날 직접적으로 도와준 건 없어요.”
 
  ― 그 사람 부인인 ○○당 사장이 당시 패스 21 지분 15%를 갖고 있었죠.
 
  “처음부터 그렇게 준 건 아니고, 이렇게 저렇게 쪼개서 자꾸 가다 보니까 나중엔 15%가 된 거예요.”
 
  ― 그러니까 ○○경제신문 사장이 자기들이 가진 주식을 비싸게 팔려고 기사를 썼다는 겁니까.
 
  “그 주식 팔아서 예식장 부도날 거 막았잖아요.”
 
 
  “나는 ‘수지 김 가족’에겐 ‘영원한 죄인’… 사회에도 큰 빚 져”
 
  ― 그 당시에 패스 21 주식 거래가가 얼마였습니까.
 
  “최고 비쌀 때는 300만원까지 했는데, ○○당이 돈이 급하니까 싸게 파는 거예요. 80만원에도 팔고. 내가 주가를 왜 떨어뜨리냐고 따져서 다툰 적도 있어요. 나는 회사 운영비 마련하느라 주식 판 적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나한테 남은 건 하나도 없어요. 그때 돈 벌어서 산 잠원동 집도 겨우 1년 살고.”
 
  ― ‘수지 김 사건’으로 몇 년형을 받았습니까.
 
  “살인은 12년, 상법 위반 같은 걸로 3년6개월이요.”
 
  ― 과실치사가 아니라 살인으로 12년을 받았죠.
 
  “과실치사인데, 부검 기록을 보면 목에 줄이 감겨 있으니…. 관련 뉴스를 본 미국 법의학자가 내 변호사한테 연락을 했어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면서 부검 기록을 보내줄 수 있느냐고. 줬더니, 그 사람은 교살됐을 때 나타나는 법의학적 특징들이 없다면서 감정이 잘못됐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증인 요청을 했더니 기꺼이 와 줬어요. 항소심 판결문을 보면 1심 재판부가 인정한 교살 흔적은 증거 능력이 없다는 식의 얘기가 나와요.”
 
  ― 그 밖에 3년6개월은.
 
  “상법 위반, 횡령, 정치자금법 위반 여러 가지 죄명이죠.”
 
  ― 정치자금법 위반은.
 
  “제가 이상희 과학기술부 장관, 남궁석 정보통신부 장관에게 돈을 줬다는 거죠. 재판 과정에서 다 무죄를 받았어요.”
 
  ― 뇌물 공여도 있었죠.
 
  “그걸로 경찰관 2명이 처벌을 받았어요. 주식을 100주씩 받았는데, 한 사람은 제 친구였어요. 그게 뇌물 개념이 아니라, 부인이 심장병 환자라서 치료비에 보태 쓰라고 쌀 때 준 거죠. 그 사람하고 같이 온 사람도 똑같이 줬는데, 처벌을 받았어요.”
 
  ― ‘수지 김 사건’ 진상 관련 기사를 본 가족들이 뭐라고 안 했습니까.
 
  “한마디도 안 했어요.”
 
  ― 진상이 밝혀지기 전에 가족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자세한 내용은 몰랐죠.”
 
  ― 자식들도요?
 
  “네. 내용은 몰라요. 안기부에서 도청하고 감시하면서 ‘나가서 말하고 다니면 가족들을 싹쓸이한다’고 하니까 누구한테 얘기하겠어요. 내 아버지와도 얘기를 안 했어요. 내가 이 가슴속에 있는 말을 얘기하는 건 31년 만에 처음이에요.”
 
 
  휴대폰 실시간 공유보안 관리시스템으로 특허받아
 
  ― 이제 뭐 해서 먹고살 겁니까.
 
  “수지 김 가족들한테 참회하면서 15년을 보냈습니다. 저는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죄인이기에 그 빚을 갚으려면 능력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계속 공부하다가 전자화폐를 개발하게 됐습니다.”
 
  ― 전자화폐요?
 
  “교도소 수용자 중 재범자들은 거의 강도나 절도범이에요. 그걸 보면서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훔쳐도 실제 주인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화폐를 만들자는요. 사실 돈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고민을 해요. ‘누구라도 내 돈을 못 뺏어가게 할 수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하죠. 인명 피해, 범죄 피해를 막는 ‘전자화폐’를 만들려고 청주교도소에서 3년 동안 컴퓨터 응용 산업 기사 공부를 하면서 아주 많은 그림을 그렸어요. IT강국인 우리도 세계에 내놓을 전자화폐를 만들 때가 됐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통해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옥살이 중이지만 그럼에도 제가 범죄를 예방하는 화폐를 개발하겠다고 했을 때 선뜻 동의해 주고 격려해 주신 청주교도소(법무부제12공공직업훈련소) CAM 훈련교사님과 여러 교도관님이 하나같이 관심을 갖고 격려해 주시며 도와주셨기에 이 암호화폐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분들이 결국 교정・교화의 참뜻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게 한 주역이 아닐까요?”
 
  ― 훔쳐가지 못하는 전자화폐가 가능할까요.
 
  “가능하죠. 제가 휴대폰 실시간 공유보안 관리시스템으로 국내외에서 특허를 받았습니다.”
 
  ― 그러니까 휴대폰 실시간 공유보안 관리시스템과 연동한 화폐를 만들겠다는 것이죠.
 
  “그렇죠. 휴대폰 실시간 공유보안 관리시스템은 휴대폰을 분실해도 모든 정보를 보호할 수 있고 해커의 공격도 무력화시킬 수 있어서 시스템과 연결된 전자화폐는 분실, 도둑맞을 위험이 전혀 없죠.”
 
  ― 사람들이 화폐를 이용해야 할 텐데요.
 
  “이 화폐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상품을 싸게 구매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예를 들어 소고기, 돼지고기를 경매가에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우리는 다양한 IT기술을 접목시켜서 전자상거래에 익숙하지 않은 주부들도 간편하게 직거래할 수 있게 하겠다는 전략입니다. 유통혁명이죠. 가격경쟁력이 생겨서 축산가를 보호할 수 있고 소고기를 수입하는 외화도 크게 절감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구제역이 발병되면 대다수의 축산가는 거의 도산하게 되는데 이런 피해도 막아보고 싶습니다. 다른 공산품도 똑같은 전략을 세우고 있습니다.”
 
  ― 소셜커머스(Social commerce)에 전자화폐를 접목하겠다는 거네요.
 
  “네. 그렇죠.”
 
  ― 솔직히 한국에서는 이미지가 안 좋잖아요. 성공할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 저는 정말 나쁜 놈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죠. 저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이 사업을 진행할 겁니다. 솔직히 이 기사가 나가면 ‘저 개XX 또 사기 치네’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기자님들이 항의전화를 많이 받을 수도 있습니다.”
 
  ― 휴대폰 실시간 공유보안 관리시스템이 경쟁력이 있는 기술인가요.
 
  “기자님도 의심하시는 거죠. 이해합니다.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네요. 이를 주제로 광운대학교 C 교수와 논문을 함께 집필하기로 했었습니다. C 교수는 자신도 인증기술에 관해 지난 10년 동안 연구하다가 접었는데 제 기술을 보고 자신이 풀지 못했던 부분이 풀렸다고 흥분했죠. 그는 학회에 알아보니 제가 학위가 없어도 논문 제1저자가 가능하다고 해서 C 교수는 제2저자로 했었는데 며칠 후에 다시 학회에 알아보니 제가 학사학위가 없어서 제1저자가 될 수 없다고 해 C 교수가 제1저자, 제가 제2저자로 순서를 변경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면 집필이 가능하다고 말했던 분이 수시로 말을 바꾸더니 급기야 2017년 12월 2일에는 제가 제2저자도 될 수 없어서 자신의 이름으로만 논문을 발표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이 기술의 실체와 경쟁력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요.”
 
  윤씨와의 인터뷰는 10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윤씨는 죽어서도 수지 김과 그 가족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31년 전 그가 잔머리를 굴리지 않고, 사실대로 이야기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조회 : 80105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1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올독12    (2018-09-23)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저씨발럼을 왜기사화하냐?
  박혜연    (2018-07-31)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6
월간좇선 이 더러운 언론사야!!!!! 내가 이러려고 애국보수집안에서 태어났냐?
  이용당함    (2018-07-21)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한번속지두번속냐..기자새끼두 그렇구.. 함봐라
내말속에 뼈가 있을끼다.사람천성은 그리쉽게 못 변한다.
다들속지 말기만을 바랄뿐이다.아쉬울땐 사람 이용해먹구이용가치가 없으면 내치는xx댓글에 윤태식씩 힘내세요 하구 다는 멍충이들 니들이 멀안다구 그런말을 하는지..이해가 안간다옆에서 지켜본 사람은 따루 잇는데..!
  아리아    (2018-03-14)     수정   삭제 찬성 : 13   반대 : 9
윤태식씨 힘내세요. 옥중에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피나는 노력을 하셨군요. 대단합니다. 댓글을 보고 한심해서 몇자 적었습니다. 남을 탓하고 비난하는 세상이 빨리 바뀌길 바라면서....
  골든벨    (2018-02-27)     수정   삭제 찬성 : 7   반대 : 64
글을 읽어보니 유가족이 견뎌내야했을 힘든시간에 비할수없겠지만
윤태식씨역시 시대의 피해자로 억울한부분이 있었을것같네요
법의심판이 모두끝난 이시점에서 계획하고있는사업이 이 사회에도
윤태식씨 본인에게도 새로운 터닝포인트가 되길바랍니다.
여담이지만 참 지독한 대한민국이었네요 ㅠㅠ....
  무대뽀    (2018-02-22)     수정   삭제 찬성 : 21   반대 : 5
결국 모든 일이 안기부와 주변인들의 잘못이고 자기는 피해자라는 거네.. 그랬다면 징역은 왜 살았을까 반성은 안하고 모든걸 남의 탓으로 돌리네.. 새로운 사업은 정직하게 하시길....
  박혜연    (2018-02-03)     수정   삭제 찬성 : 2   반대 : 11
월간좇선 네가 언론사냐 김옥분의 유가족들이 이사실을 알면 월간좇선사에 쳐들어가 항의시위를 했을거다!!!! 나 역시 여기 월간좇선 사이트에 들어가 자주 댓글을 다는데 애국보수를 자처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나로서 격분할수밖에 없다!!!! 잘못하면 친종북세력들에게 얻어맞아 팽당할것이니 각오해랏!!!!
  박혜연    (2018-02-03)     수정   삭제 찬성 : 11   반대 : 52
윤태식!!!! 이놈새끼!!!! 감옥에 더 있지!!! 왜 나왔어!!!! 김옥분의 유족들이 가만안놔두었을게다!!! 니가 그러고도 무사할것 같냐
     (2018-02-03)     수정   삭제 찬성 : 4   반대 : 7
기자새끼도 웃기네
해킹이 불가능한 그런 화폐에 대해 이야기를 할거면 자세히 서술하던 해야지
일본 코인체크도 수천억 해킹당하고 그 코인이 어디로 간지 알면서도 못 돌려 받는데.
  ㅁㄴㅇㄹ    (2018-02-01)     수정   삭제 찬성 : 17   반대 : 0
마지막에 전자화폐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는군요
훔쳐가지 못하는 전자화폐라니..
어떤 방식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네요

201810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 조선뉴스프레스 선정 초청작가 특별기획전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