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肉筆의 미학

백시종 전(前) 한국소설가협회장

“김동리 선생 본명(本名) 물려받아 작가로… 살아 있는 날까지 글 쓰는 게 스승에 대한 보은(報恩)”

글 : 신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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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신춘문예 가작 2번과 현대문학 초회 추천… 1967년 신춘문예 3관왕 등단
⊙ 운명의 스승 김동리가 지어준 필명 ‘백시종’ … 동리 선생의 본명이 ‘김시종’
⊙ 집필 반세기에도 아직까지 육필(肉筆) 고집 “글씨와 교감하기 위한 나만의 방식”
⊙ “70년 근대사의 빗속을 뚫고 스스로 겪어올 수 있었다는 건 작가로서의 축복”
⊙ “가능하면 ‘중간자적 입장’으로 시대의 갈등구조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
⊙ 80년대 현대그룹 종합기획실에서 기업홍보 매진… “학벌·전공도 없이 경쟁에서 살아남았다”
⊙ “한글을 활용해 창작하는 작가들은 인정받아야… 소액의 원고료 정도는 정부가 지원”
⊙ “한국소설 부흥 위해서는 실력 있는 작가들이 오래 읽힐 만한 장편소설 많이 써야”
⊙ 동리문학상 제정, 김동리 문학전집 발간… 앞으로도 김동리 추모사업 적극 추진할 것
⊙ “작가로서 ‘매년 한 계단씩 올라간다’는 독자 평가 받을 수 있다면 더 큰 꿈은 없어”

백시종
- 1944년 경남 남해군 출생
- 1966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가작, 《현대문학》 단편소설 초회 추천
- 1967년 《대한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 대표작 《돈황제》 《대물》 《강치》 《오주팔이 간다》 《팽》 《물 위의 나무》 등
- 한국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채만식문학상, 중앙대학문학상, 서포김만중문학상 등 수상
- 前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회장, 동아일보문학회장, 한국소설가협회장 등
- 現 김동리기념사업회장, 통일문학포럼회장, 맑은물사랑실천협의회 이사장 등
2008년 10월 30일 경기도 양평 강화면 자택에서 포즈를 취하는 백시종 소설가의 모습.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날까지 글을 쓰는 게 스승 김동리 소설가에 대한 보은이라고 했다. 사진=조선DB
  박경리·이병주·이문구·박상륭·한승원… 대한민국 문단에는 소설가 고(故) 김동리(1913~1995) 문하(門下)의 출신 작가들이 많다. 2012년 동리문학상을 수상한 이문열 작가 등 그분의 작품세계와 문학의식을 사숙(私淑)하며 문인의 길로 나선 이도 여럿이다.
 
  유명작가로 거듭난 제자들 못지않게 김동리의 극찬을 받았던 또 한 명의 사람이 있다. 3년째 김동리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백시종(白始宗·73) 전(前) 한국소설가협회장이다. 일찌감치 그의 문재(文才)를 간파한 김동리는 약관의 나이인 그에게 《현대문학》 초회 추천이라는 기회를 내려준다. 당시 김동리는 추천사를 통해 제자의 재능과 필력을 칭찬했다. 그의 선견지명은 이후 가작을 포함 ‘신춘문예 5관왕’이라는 제자의 화려한 데뷔로 증명됐다.
 
  어느덧 종심(從心)에 이르러 백발의 원로가 된 제자는 아직까지도 스승의 은혜를 새기며 매일 육필(肉筆)로 글을 쓴다. 살아 있는 동안까지, 매년 완성도를 높여 좋은 작품을 출간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이제는 작고한 지도 20여 년이 됐지만, 살아생전 스승 김동리가 자신에게 베풀어준 사랑과 배려에 보은하기 위함이다. 제자는 50년 전 스승의 각별한 애정을 마음의 빚으로 각인하며 살아왔다.
 
  등단 반세기 동안 오직 육필만을 고집했던 그의 속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스승 김동리와의 인연, 영욕(榮辱)의 길을 걸었던 대기업 시절, 원로작가로서의 삶과 철학 등이 궁금했다. 서울 종로의 한 오피스텔 사무실에서 백시종 소설가를 만났다.
 
  ― 등단(登壇)한 지 올해로 몇 년째인가요.
 
  “제가 정식으로 문단 데뷔한 게 1967년이니까 올해가 2017년, 정확히 만 50년이 됐죠.”
 
  ― 문예지로 데뷔했나요? 신춘문예에 당선됐나요.
 
  “신춘문예로 나왔습니다. 맨 처음 1966년에 지금은 없어진 《대한일보》와 《동아일보》 두 군데에 단편소설을 각각 다른 작품으로 투고했습니다. 먼저 《대한일보》에서 가작(佳作) 통보가 왔더라고요. 비록 당선은 아니지만 어린 나이에 가작에 올랐으니 황송했죠. 또 그 다음날 《동아일보》에서도 가작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갑자기 《동아일보》에서 다시 연락이 와가지고 취소한다고 통보했어요. 그래서 제가 도대체 왜 취소하느냐고 그랬더니 신문사에서 ‘심사위원께서 강하게 말씀하셨다’고 했어요. 가작을 취소하되, 대신 자기를 찾아오라 했다더군요.”
 
 
  김동리 소설가의 본명 ‘시종’을 필명(筆名)으로 받다
 
2008년 10월 30일 경기도 양평 강화면 자택에서 백시종 소설가와 아내 정성애씨가 대화 중이다. 사진=조선DB
  ― 가작 수상을 만류한 심사위원이 누군가요.
 
  “심사위원을 찾아갔더니 알고 보니까 그분이 바로 김동리 선생이셨어요. 동리 선생이 제 작품을 가작으로 내렸다가 당신 생각에 좀 아까우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작품을 다시 《현대문학》에 추천을 해주겠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때는 《현대문학》으로 초회 추천을 받고 다시 2회 추천을 받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어요. 그런데 추천해 주신다니까 저는 뛸 듯이 기뻤죠.”
 
  ― 김동리 소설가와 사제(師弟) 간 첫 인연을 맺었군요.
 
  “그때 선생님께서 제게 이름을 지어주시더라고요. 원래 제 이름이 ‘백수남(白秀男)’이었는데 선생님께서 ‘이건 좀 이치에 안 맞다’고 하시면서 필명(筆名)을 두 개 써주셨어요. ‘이 중에 하나 골라라’ 그러시더라고. 그 두 개가 ‘백시종’하고 ‘백시명’이었어요. 근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당시에 백시명이라고 코미디언 한 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냥 ‘백시종으로 하겠습니다’ 했죠.”
 
  ― 그래서 ‘백시종’이라는 필명을 갖게 됐군요.
 
  “그런데 그 옆에 당시 아드님이 앉아 계셨는데, 아마 그분이 지금 김평우 변호사였던 것 같아요. 김평우 변호사가 옆에 있다가 ‘아버지. 아버지 쓰시는 이름을 주셔도 괜찮겠습니까’ 이러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선생의 원래 본명이 ‘김시종’이었어요. 물론 제게 주신 이름과 한자는 다르죠. 그러자 선생께서 ‘괜찮아. 한자가 다르니 뭐 상관있니’ 하시면서 이걸로 하자고 결정을 해주셨어요. 그때만 해도 저는 그분의 본명이 그것인 줄은 몰랐었죠. 그때 인연을 맺어서 《현대문학》에 1회 추천을 받았습니다.”
 
  ― 1년 뒤 정식 데뷔할 당시 신춘문예 당선을 동시에 3번 했다고 들었습니다.
 
  “1967년에 두 번째 추천을 받으려고 선생님께 작품 3편을 드렸는데 대답이 없으셨어요. 처음에는 글이 모자라서 안 되나 보다 했더니, 동리 선생이 말씀하시길 ‘너 집이 좀 어렵대매, 이거 추천해 봐야 원고료가 적으니 잘 다듬어서 신춘문예 투고를 해라. 만약에 잘 안 되면 내가 다시 추천해 주마’ 이렇게 배려를 해주셨어요. 그래서 3편을 더 준비해서 총 6편으로 이름도 달리하고 주소도 달리해서 6개 신문사에 냈더니 《동아일보》 《대한일보》 《한국일보》가 연달아 당선이 됐어요. 그런데 당시 발표가 늦었던 《한국일보》 쪽에서 제가 이미 두 군데나 동시에 당선된 걸 알고 자동으로 취소결정을 내리게 됐죠.”
 
  ― 스승 김동리 소설가를 떠올리며 작품을 쓰나요.
 
  “그렇죠. 사실 제가 회사 생활에 바쁘다 보니까 당시 작품을 써도 각광받는 문제작을 못 냈어요. 그래서 그때 문단에서 동리 선생님 가까이 있는 분들에게 소외를 많이 받았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칭찬해서 뽑아줬는데 글도 안 되고 아무것도 못하지 않느냐’는 소리도 들었어요. 그 뒤로는 마음속으로 각오를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그때 추천사를 써주신 게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반드시 작품으로 증명해 보이겠다고 말이죠.”
 
 
  “육필은 글씨와 교감(交感) 가능… 자판으로 치면 생각이 바람과 낙엽처럼 날아가”
 
2017년 10월 24일 백시종 소설가가 자신의 서울 종로 사무실에서 책을 넘겨보고 있다. 내년에 나올 그의 신작소설은 정치 소재를 다루고 있다. 사진=신승민
  백시종 소설가의 양평 자택과 서울 사무실에는 조그만 집필 공간이 마련돼 있다. 어지럽게 쌓인 서류뭉치들 속에서 그의 A4 용지로 된 육필 원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얼핏 갈겨쓴 문체처럼 보여도 수정·가필(加筆)이 정교하다. 그는 이미 책으로 묶여 출간된 원고도 보관해 두고 있었다.
 
  ― 육필(肉筆)을 쓰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가 육필을 고집하는 건 일종의 습관이에요. 예전에 한번 타자기와 컴퓨터를 사용해 봤는데 기분이 좀 이상하더라고요. 머리에서 구상한 내용이 다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아요. 펜과 연필을 잡아서 쓸 때만 손이랑 머리랑 연결이 되는 느낌이 들어요.”
 
  ― 컴퓨터 자판보다 종이에 펜으로 쓸 때 상상력이 더 잘 떠오른다는 뜻인가요.
 
  “생각이 직통(直通)으로 흘러나오는 것 같아요. 그런데 다섯 손가락으로 치다 보면 바람이나 낙엽처럼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에요. 물론 몇 번 시도를 했어요. 동료 작가들이 ‘펜으로 쓰다가 타자로 치니까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펜으로 한 편 쓸 시간에 타자로는 세 편 이상 써지더라’고 부추기기도 했죠. 나도 부러워서 해봤더니 연상도 안 되고 영 아니었어요. 종이에 펜으로 쓰는 건 나와 글씨가 교감(交感)이 되는 거 같아요. 그런데 자판은 바로 활자화(活字化)가 되니까 그게 아무리 편하더라도 나하고는 맞지 않았어요.”
 
  ― 육필은 보통 원고지에 쓰지 않나요.
 
  “저도 예전에 원고지를 썼어요. 근데 이 원고지를 쓰면 어차피 또 컴퓨터로 입력을 해야 하는데 좀 불편한 감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초고를 써가지고 한 번 더 A4 용지에다가 정서(正書)를 해요. 정서도 끝나면 입력만 하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출력물 교정을 봅니다.”
 
  ― 1년에 얼마나 쓰나요.
 
  “장편을 주로 씁니다. 7개월 정도면 한 권이 나옵니다. 2년에 세 권씩, 빠르면 1년에 두 권도 씁니다. 장편이 하나 완성되면 단편이 또 하나 나와요. 장편 소재에서 못 썼던 것들을 모아 속편 식으로 단편소설을 추가하죠. 여기에 또 원고 청탁이 오면 중단편 몇 편을 더 쓰는 정도입니다.”
 
  ― 내년에 출간될 신작은 어떤 이야기인가요.
 
  “이번 소설에서는 정치를 다뤘습니다. 작년부터 이어져 온 최순실 사태, 대통령 탄핵, 조기 대선 등 엄청난 역사의 강물을 마주하면서 영감이 떠올랐죠. 체험이 생생할 때 써보고 싶었습니다. 주제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찰입니다. 많은 작가가 해왔지만 이렇게 나이 든 작가의 눈으로도 한 번 더 깊게 살펴보려 합니다.”
 
  ― 원로작가가 읽는 작금의 정치현실은 좀 다를 것 같기도 합니다.
 
  “제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도 나름대로 작품과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웃음) 저는 해방 전 해인 1944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때가 대동아 전쟁 시기였는데 당시 어머니가 저를 업고 막 뛰어다니셨다고 그래요. 어릴 적에는 ‘여순 반란사건’을 겪었고 6·25전쟁에 이어 4·19, 5·16, 5·18 등 이 나라 역사를 온몸으로 관통해 왔죠. 저는 그걸 축복으로 여깁니다. 작가로서 그 역사의 빗속을 뚫고 스스로 겪어올 수 있었다는 건 큰 경험이자 공부죠. 그 역사적 현장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나를 자각하게 만들고 현실문제에 더욱 실감 나게 접근할 수 있는 의욕을 줍니다.”
 
 
  “현대그룹 재직 시절 중동건설 현장답사와 사사(社史) 드라마 제작에도 참여”
 
2017년 10월 24일 백시종 소설가가 자신의 서울 종로 사무실에서 내년에 발간될 신작을 집필 중이다. 80년대 대기업에 근무했던 그는 당시 기업소설로 유명세를 탔다. 사진=신승민
  《대물》 《강치》 《오주팔이 간다》 《물 위의 나무》 등 백시종 소설가의 작품에는 사회고발의 성격과 자연친화적 감성이 깃들어 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그늘진 인간 군상을 적나라하게 묘파한다. 그들의 탐욕과 성공의지, 성적(性的) 도취와 속물성(俗物性)을 폭로한다. 시대와 운명에 대한 인간의 반항과 순응의 역사를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그럼에도 이념적으로 치우치거나 한쪽에 서서 바라보는 면이 없다. 해석의 기회는 독자들에게 열어주고 작가는 작품 속에 현실구조를 반영해 보여줄 따름이다.
 
  ― 기업소설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80년대 대기업에 재직한 경험이 집필의 동력인가요.
 
  “분초를 다투는 대기업 조직 생활을 경험했죠. 무서운 자본의 흐름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1980년대 현대그룹 종합기획실에서 홍보를 맡았었습니다.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지시를 받아서 홍보에 나섰죠. 그분의 뜻에 따라 그룹사들을 관장하고 그 속에 홍보를 연결하는 일을 했습니다. 앉아서 보면 돈이 어디로 가는지 보일 정도였어요. 당시 건설이 중앙, 본사(本社)였고 그 안에 종합기획실이 있었어요. 엔진, 자동차, 중공업 등이 계열사였는데 총 50여 개의 그룹이 있었어요. 그때는 회사 순위가 삼성보다 높아 1위에 오르기도 했죠.”
 
2017년 10월 24일 서울 종로 사무실 책상에 놓인 백시종 소설가의 육필원고. 그는 이미 책으로 발간된 작품들 원고도 계속 보관하고 있었다(위 사진). 2017년 10월 24일 백시종 소설가가 자신의 서울 종로 사무실에서 육필원고를 검토 중이다. 그는 원고지가 아닌 A4 용지에 볼펜으로 육필을 쓴다. 사진=신승민
  ― 대학에서 회화(繪畫)를 전공한 걸로 압니다. 당시 경영·경제 위주인 대기업 직무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힘든 점도 있었죠. 제가 사전지식이 없잖아요. 그림 전공에 작가 출신이라 다른 동료들처럼 경영학과나 경제학과를 나온 것도 아니었고. 동료들은 번듯한 전공이 다 있고 외국어도 능통했어요. 다들 대기업 맞춤교육을 받은 사람들인데 저는 그런 게 하나도 없었어요. 들판에 굴러다니는 돌 같다고나 할까. (웃음) 그래도 제가 전공이 없어서 오히려 다양하게 업무를 볼 수 있었어요. 기획실 내에서 재정문제, 홍보문제, 구매문제 등 업무 전반을 다뤘죠. 영상작업도 사람이 없으면 제가 대신 가서 맡으면서 회사 업무에 적응했어요. 제가 과장으로 들어갔는데 차장도 빨리 되고 경쟁해서 꾸준히 승진했죠. 승진 조건인 대학원도 졸업하지 않았고 또 저는 서라벌예술대학 출신인데 당시 현대그룹에 서라벌 출신이 아무도 없었어요. 죄다 서울대, 고대, 연대만 즐비했어요. 제게는 연줄조차 없었던 셈이죠. 그래도 그럭저럭 밀리지 않고 잘나갔습니다. (웃음)”
 
  ― 당시 맡았던 주요 업무들은 어떤 게 있었나요.
 
  “외국 건설현장을 많이 다녔습니다. 당시에는 중동 건설 붐이 일었어요.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이란, 이라크, 리비아 등 안 가본 데가 없습니다. 그때는 건설현장 한 곳이 인원이나 매출 면에서 어지간한 계열사보다 더 컸어요. 현대가 아주 깃발을 날릴 때니까요. 가서 현장 소장들도 인터뷰하고, 노조관계에 문제 있는 사례들도 받아오고, 사기 진작 차원에서 직원들 상대로 문학 강의도 하고 그랬습니다. 영화, 드라마도 몇 편 찍었어요. 80년대 5부작 특집드라마였는데 그게 ‘불타는 바다’인가 그랬을 거예요. 당시 KBS랑 MBC에서 방영을 했어요. 그 드라마 각본과 각색을 제가 다 했습니다. 현대그룹의 역사를 조명한 드라마를 방송하니까 정주영 회장이랑 임원들이 엄청 좋아했어요.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죠. 처음 기획한 뒤 방송국에 가서 연결을 합니다. 계약이 체결되면 배우들을 데리고 외국 사막에서 로케이션 촬영까지 진행했어요.”
 
 
  “문예진흥 차원에서 작가들의 소액 원고료(原稿料)는 정부가 지원해 줘야”
 
현재 백시종 소설가가 거주 중인 경기도 양평 소재의 자택 전경. 그의 양평 자택과 서울 종로 사무실에는 조그마한 집필실이 마련돼 있다. 사진=신승민
  ― 꾸준히 승진하다가 갑작스레 회사를 나왔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제가 당시 홍보부장으로 승진을 했어요. 그 자리가 예산 등 권한이 강해서 상당히 지위가 높은 자리였어요. 중요사안이 있을 때마다 회장, 사장하고 늘 독대할 수 있는 자리였어요. 정식 발령이 나서 참 행복한 일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저를 시기한 사람도 많았나 봐요. 누가 음해를 했는지 갑자기 정주영 회장이 대노해서 그냥 하루아침에 승진을 취소하고 해고를 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아침에 출근해 보니까 내 책상이 없어졌어요. 어디로 갔나 했더니 회장님이 와서 치우라고 했다는 겁니다.”
 
  ― 인사발령만 취소하고 예전의 직급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 않나요.
 
  “회장으로 봐서는 제게 화가 많이 나는 그런 게 있었나 봐요. 대충 들어보니까 제가 아예 관련이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너무나 과장된 이야기였어요. 제가 당연히 항의를 했죠. 그런데 회사 총수가 화가 나서 결정한 일은 번복이 안 된다면서 주변에서 만류를 하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끝까지 싸우려고 신문광고에 투서(投書)도 했는데 잘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시 제가 겪었던 부당한 일이나 비화를 담은 소설들을 써서 투쟁에 나선 것이죠.”
 
고(故) 김동리 소설가. 김동리 소설가는 제자 백시종 소설가에게 자신의 본명을 필명(筆名)으로 내려줬다고 한다. 사진=대산문화재단 제공
  ― 아시다시피 지금 문화체육관광부 도종환 장관은 시인 출신입니다. 현 정부 문예진흥 정책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창작을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문자 발전에 기여하는 일입니다. 우리 문자, 즉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귀한 글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글을 활용해 문장(文章)을 만드는 시인, 수필가, 소설가 모두 반드시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자는 우리의 가장 큰 자산이고 작가들은 이를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책을 내놔도 시장에서는 안 팔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정부가 다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줘야 합니다. 예전에 정부가 지원하다가 끊어졌는데, 소액의 원고료 정도는 지급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 문예지의 작가 원고료 지급에는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는 말인가요.
 
  “게을러서 못하는 사람은 도와줄 수 없지만, 창작에 나선 사람은 잡지에 발표한 작품 원고료 정도는 지급해 줘야죠. 큰돈도 아닙니다. 시는 10만원, 소설과 평론은 30만원 정도 뽑아봐야 1년에 정부 예산이 그렇게 많이 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원고료 지원책이 어느 유명작가 개인이나 한 사람에게 집중되면 안 되고 대다수 작가에게 골고루 혜택이 가야 합니다. 문예지들 형편이 어려워서 작가들에게 원고료를 못 주면 정부가 나서서 비록 적은 돈이라도 땀 흘린 사람들에게 지원해야죠. 그러면 작가들도 정부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껴서 열심히 작품을 쓸 겁니다. 문예지도 경제적으로 살아나서 좋은 작품을 받으려고 할 테니까 선순환이죠.”
 
 
  “역량 있는 작가들, 장편소설에 집중해야… 디지털문학관은 되살리고 싶어”
 
2017년 6월 14일 당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백시종 소설가는 정부 당국에 작가들의 원고료 지원을 당부했다. 사진=조선DB
  ― 한국소설가협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당시 어떤 사업을 추진했나요.
 
  “원고료 지원사업도 해봤고 디지털문학관 개설도 추진했습니다. 제가 취임할 당시 정부 예산을 받아서 업체를 선정하고 1년 동안 추진을 했는데 그게 중도에 멈춰버렸습니다. 차기(次期)를 맡은 사람이 생각이 달라서 아쉬웠어요. 디지털문학관이 만들어졌으면 우리나라 모든 소설을 초기부터 현재까지 다 담을 수 있었어요. 역대 모든 소설가가 다 자신의 개인 문학관을 하나씩 가지게 되는 셈이죠. 디지털 공간 속에 개인 문학관이 만들어졌다면 작가들도 신작 발표를 하면서 점점 활성화됐을 겁니다. 특히 우리나라 첫 소설부터 마지막 소설까지 영원하게 연결돼서 순수문학의 보존과 전승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죠. 사실 옛날 도서관 가면 소설은 물론 책 찾기가 어렵습니다. 복잡하고 불편해요. 디지털문학관을 만들면 모든 소설 자료가 그곳에 다 망라되기 때문에 검색과 활용에도 편리합니다. 제가 정말 살리고 싶은 정책 중 하나입니다.”
 
백시종 소설가의 근작(近作)들. 백시종 소설가는 지금까지 약 40여 권의 소설들을 오직 육필로만 집필했다. 사진=신승민
  ― 한국소설이 부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잘나가는 작가들이 장편소설을 더 썼으면 좋겠어요. 중단편집보다는 장편소설이 더 오래 읽히거든요. 우리나라 문학사에도 역량 있는 몇몇 작가가 장편을 별로 안 써서 아쉬운 면이 많아요. 사실 본격소설, 순수문학도 아니면서 별것도 아닌 작품으로 돈을 많이 받고 부를 누리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본격문학을 하는 실력 있는 작가들이 장편을 써서 더 각광을 받아야 합니다. 단편에만 골몰하지 말고 대담하게 장편으로 써야 합니다. 장편에 혼신을 기울여서 서점에서도 잘 팔리고 문학으로도 기억되는 작품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 지금 김동리기념사업회의 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기념사업, 추모사업을 추진할 계획입니까.
 
  “사실 선생님 돌아가실 때 회사일이 바빠 문안 한 번도 못 갔습니다. 돌아가신 다음에야 제가 자유롭게 됐고 그때 뒤돌아보니 선생님이 이미 가시고 없으셨어요. 뒤늦게나마 돌아가신 선생님께 뭔가 제자로서 도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 사랑을 많이 받고 작가가 됐으면서도 제가 아무것도 못한다는 게 너무 큰 아픔이고 스스로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원래는 동리 선생 추모사업을 고 이문구 선생이 하셨는데 그분도 가시고 나니까 아무도 일을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어느 공식 조직의 간부도 아니었지만 자발적으로 추모사업을 완전히 도맡았습니다. 모금액을 합쳐 2년 전 김동리 문학전집을 완간하기도 했습니다. 동리문학상을 만드는 데 제가 앞장서서 뛰었고 문예지 《동리목월》을 창간해 편집주간으로도 활동 중입니다. 최근에는 동리 선생의 생가인 서울 신당동에 문학비 건립을 진행 중입니다. 지금 교과서에도 선생님 작품이 들어갔다가 빠졌다가 하는데, 이 문제도 관심을 갖고 미래 세대들이 선생님 작품을 더 많이 읽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고자 합니다.”
 
  ― 작가로서의 꿈과 목표는 무엇입니까.
 
  “건강이 허락하는 한 1년에 꼭 한 편씩 장편을 써서 발표를 하는 게 제 꿈입니다.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지만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쓸 요량으로 있습니다. 책이 팔리든 안 팔리든 상업적 성공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완성도 높은 소설을 쓰는 작가로 불리고 싶습니다. ‘저 작가는 매년 한 계단씩 올라간다’는 그런 독자들의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그 이상 더 큰 꿈은 없습니다. 그것이 곧 동리 선생님에 대한 보은(報恩)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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