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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탄신 142주년·서거 52주기 특집

이인수 박사 부부가 말하는 건국대통령 이승만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정신 회복해야 대한민국이 산다”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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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은 건국 70주년 맞이하는 해 … 건국대통령 폄훼하는 세태 안타까워”
⊙ 마오쩌둥 주석은 ‘공칠과삼(功七過三)’, 이승만 대통령은 민주공화국 초석 놓아 ‘공구과일(功九過一)’
⊙ 4·19 때 희생된 학생들에 대해, “내가 맞을 총알을 그 아이들이 대신 맞았다”
⊙ 프란체스카 여사 업적 재평가해야 … “성경과 태극기를 같이 관에 넣어 달라” 유언
⊙ 이승만 대통령 유언,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1번지 이화장(梨花莊)은 대대적인 공사로 분주했다. 이화장은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李承晩·1875~1965)의 사저로 2009년 4월 서울특별시기념물(제6호)에서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497호)가 됐다. 이화장의 총 면적은 약 5950m²(1800평)이다.
 
  이승만이 생전에 살았던 본채(기념관), 조각당(組閣堂), 생활관, 동상, 잔디와 수목 등으로 이뤄져 있다. 본채 앞에는 조각당의 기와와 썩은 목재들이 쌓여 있었다. 동행한 남정옥(南廷屋) 우남이승만연구회 이사는 “목재들은 상당수 재활용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조각당의 빼어난 옛 모습을 다시금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문 안쪽 관리실을 통과해 생활관에 들어서니 이승만의 양자(養子) 이인수(李仁秀·86·전 명지대 교수) 박사와 부인 조혜자(曺惠子·75) 여사가 반갑게 맞았다. 이인수 박사는 “아버님 내외가 거처하시던 본채는 습도 관리가 안 되고 수장고도 없어 2011년 물난리가 난 이후 유품 대부분을 대통령기록관으로 보냈다”고 했다.
 
  “본채를 생활공간으로 썼는데 목재가 썩어 벌레가 생기고 추워 어머님이 밤에 주무시지를 못할 정도였어요. 1985년 지금의 생활관을 지었어요, 돈이 없어 정일권(丁一權) 전 총리에게 부탁해 건축업자들에게 철근·시멘트 등 자재들을 기증해 달라고 했어요. 주거를 생활관으로 옮기고 나서 1988년 3월 26일 아버님 생신날에 맞춰 기념관을 열었습니다. 생활관 덕분에 어머님(프란체스카)이 말년을 편하게 보내시다 가셨지요.”
 
  이인수 박사는 “내 교수 퇴직금과 독립운동 유가족 연금(매달 140만원)으로 꾸려 왔기에 충분히 관리를 못했다”며 “2009년 이화장이 국가문화재로 승격되면서 관리를 본격적으로 하게 돼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했다. 이 박사는 “1992년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대통령 유족연금과 운전기사, 차량유지비가 나왔지만 지금은 다 끊겼다”며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에서 아버님의 저작물을 책으로 펴내는 《이승만전집》 발간사업을 추진하는데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고 했다.
 
 
  이우공의 차남 양자 입적을 막은 박 마리아
 
이승만 대통령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인수 박사와 조혜자 여사.
  이인수 박사는 이 전 대통령의 하와이 체류 시절 양자로 입적됐다. 1960년 11월 전주이씨(李氏) 문중의 결정이었다. 대통령의 연세(당시 86세)가 많으니 대학 졸업자에 프란체스카를 생각해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하고, 미혼이며 가정교육이 바른 집안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
 
  — 이 대통령은 후사(後嗣)에 대한 미련이 강하셨던가 봅니다.
 
  “아버님은 이강석(李康石)을 양자로 들이시기 전인 1956년 무렵, 마포경찰서장을 지낸 윤우경(尹宇景)씨의 소개로 의친왕의 차남 이우공(李鍝公)과 박영효 대감의 손녀 박찬주(朴贊珠) 여사 사이에 출생한 둘째아들 이종(李淙, 1960년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을 양자로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이 양자 입적 이야기를 박 마리아에게 하자 박 마리아가 자기 아들로 트는 바람에 1957년 효령대군의 자손인 이강석을 양자로 삼으셨던 겁니다. 아버님은 독립운동을 함께 한 이순용(李淳鎔, 내무부장관 역임)씨에게 부탁해 ‘이씨 종중(宗中)에서 양자를 천거하라’고 했습니다. 종중에서 찾다가 양녕대군의 16대손인 이 대통령과 계대(系代)가 맞는 17대손인 나를 지목했던 겁니다.”
 
  —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 책임이 너무 중해 보여, 나보다는 좀 더 나은 사람을 택하라고 했어요. 이순용씨가 ‘전주이씨 종중에서 그동안 잘 모셨더라면 어른의 말년이 이렇게 비참하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으로 같은 혈손들이 도와드릴 의무가 있다. 자유를 존중하는 분이니 아들 노릇을 잘하라’고 해, 결국 설득당했습니다. 양주군 초대 교육감이었던 친부(親父, 李承用)는 ‘정말 어려운 자리라 네 삶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라고만 했습니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던 그는 독일 유학을 접고 그 운명적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권력도 없고 어려운 때, 그분들의 양자로 간다는 사실이 책임감을 느끼게 했다”며 “갈 때는 재떨이며 교포들과 미국인들에게 선물이 될 만한 물건들을 사 가지고 갔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그날부터 양자 인수가 오기를 학수고대했다. 수속상 시간이 걸리게 되자 “그놈이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면 더 서둘러 빨리 와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이 일로 대통령은 생활에 새 활력을 느끼고 프란체스카 여사에게도 곧잘 농담을 걸었다고 한다. 종종 거울까지 들여다보며, “그 녀석도 내가 저를 좋아하듯 나를 좋아하겠지” 하고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묻기도 했다.
 
 
  내 구두도 국산이야
 
1961년 12월 13일 하와이 집 테라스에서 아들 인수(가운데)를 맞아 기뻐하는 이승만 박사 내외.
  이인수 박사는 양자로 선택된 후 모두 세 차례 하와이를 찾아 아버지를 모셨다. 1961년 12월 13일부터 이듬해 3월 17일, 1964년 1월 28일부터 4월 2일, 다시 1965년 7월 4일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으로 가서 7월 19일 임종(臨終)을 지켰다. 1961년 12월 13일 첫 상봉의 느낌을 그는 이렇게 전했다.
 
  “운명이라는 게 있는지 우리는 몇십 년 함께 살아온 부자지간(父子之間) 같았습니다. 아버님은 제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아버님은 ‘코끼리는 아무리 코가 길어도 자기 코를 짐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부모는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자기 자식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말이 오갔나요.
 
  “내가 큰절을 올리니 ‘잘 왔다’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습니다. 그때는 5·16으로 이미 민주당 정권이 무너진 뒤였으나 아버님은 군사정권의 성격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어떻게 돼 가지?’라는 첫 물음에 ‘젊은 사람들이 나와서 반공(反共)을 한다고 하니 잘될 거라고들 합니다’라 답하니, ‘남이 잘되어 간다는 말을 믿지 마라. 내가 그런 말 믿다가 결딴이 나지 않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인수 박사는 “‘네가 입고 있는 옷과 신발은 어디서 만들었어?’라고 물으시길래, ‘국산’이라고 하니 ‘내 구두도 국산이야’라며 좋아하셨다”며 “‘한인은 재주가 많아.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어야 해’라고 하셨다”고 했다. 이 박사는 “아버님은 ‘국어는 우리 민족의 숨소리야, 국어를 잘해야 영어를 잘할 수 있어’라고 하셨다”며 “아버님은 귀국해 직업을 적으실 때도 ‘교육자’라고 적으셨고 80이 넘은 연세에도 새로운 영어단어를 손바닥에 써 가지고 다니며 외우셨다”고도 했다.
 
 
  중정의 협박
 
1957년 경북 영주 부석사를 방문한 이 대통령 부부가 손을 맞잡고 기둥을 껴안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한학과 붓글씨에 뛰어났던 이 대통령은 부석사와 문수사를 비롯해 전국 사찰의 편액도 많이 썼다.
  이 대통령은 하와이에서는 교포인 윌버트 최가 마련해 준 집에서 살았다. 침실이 두 개인 작은 목조 주택이었다. 교포들이 중고 가구들을 갖다 줬으나 텔레비전은 없었다. 이인수 박사는 “이화장 기념관 안에 첫날 아버님과 함께 식사했던 작은 식탁을 갖고 와 전시해 놓았다”며 “그 집에서 일 년쯤 살다가 귀국이 좌절된 뒤 요양원으로 들어가셨다. 하와이에서 체류할 때는 어머님의 친정에서도 매달 200달러씩 생활비를 부쳐 왔다”고 했다.
 
  — 귀국을 누가 막은 겁니까.
 
  “사과 성명까지 했으니 당연히 들어갈 줄 알았고 우린 (1962년) 3월 17일 귀국하는 걸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담당 의사도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했었죠. 비행기 표까지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새벽 이화장 재산관리인 황규면(黃圭冕)씨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하와이에 전화해 이화장에 불을 지를 거니까 오시지 말라고 해라’고 협박을 한 거예요. 그 전화를 받고 1962년 3월 17일 김세원(金世源) 호놀룰루 총영사가 집으로 와 ‘귀국을 포스트폰(연기)해 달라는 지시가 왔다’고 전했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아버님은 어느덧 눈이 충혈돼 갔습니다. ‘누가 우리나라를 이끌든 간에 정말 나라를 위해 잘해 주길 바라오’라는 말이 대답의 전부였죠. 그런 뒤 휠체어에 몸을 기댄 후 다시는 혼자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결국 나 혼자 돌파구를 마련해 보자며 귀국을 결심하자, 어머님이 ‘조심하렴, 너는 용기가 있다(Be careful, You’re courageous)’라고 하셨어요.”
 
  — 두 번째로 하와이에 간 것은 무슨 일 때문이었나요.
 
  “1964년 어머니로부터 ‘아버님이 곧 돌아가실 것 같은데 당신의 뼈를 한국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미국서 화장을 할 테니 네가 유골을 안고 종친회 선영에 묻어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내가 하와이로 가서 ‘정부가 아버님을 버렸지 국민이 버린 게 아니다. 국립묘지에 묻히도록 하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국립묘지 안장을 위해 어머님이 박정희 정부에 탄원서를 냈습니다. 한동안 답이 없다가 미국 측의 ‘메시지’를 받고서야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이 박사는 이 전 대통령이 생전에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굳게 서서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내용이다.
 
  “아버님은 식사 전 늘 기도를 하셨어요.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는 심신이 허약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우리 민족을 맡겨 드리오니 축복해 주소서’라고요.”
 
 
  땅속에 묻혀 있는 ‘건국대통령’ 묘비
 
6·25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왼쪽)이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과 낚시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밴플리트 장군은 이 대통령을 아버지처럼 존경했고, 이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서거하자 군용기 편에 동승해 국립묘지 안장과정을 지켜보고 돌아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최후는 처절했다. 이 대통령은 “나를 앞으로 20년간 여기다 붙잡아 둘 작정이냐”고 역정을 내면서 “괘씸한 놈! 내가 걸어서라도 떠날 테야” 하며 신발을 찾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결국 이 대통령은 1965년 7월 19일 밤 하와이의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서거했고, 그해 7월 23일 그 유해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8군사령관을 지낸 밴플리트 장군이 하와이부터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모시면서 장례절차를 완료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한때 그를 몰아낸 시민들도 시청앞 거리로 몰려나와 울음바다를 이뤘다.
 
  — 박정희 정권은 ‘국장’보다 격이 낮은 ‘국민장’으로 하겠다고 했을 때, 유족들이 ‘가족장’을 선택한 까닭은 뭡니까.
 
  “당시 이승만 대통령 ‘서거(逝去)’라고 쓴 신문이 없었고, ‘운명(殞命)’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정부 입장이었고요. 정부가 국민장으로 축소해 4·19학생들의 반발을 무마하려 했던 것이지요. 나라를 만든 건국대통령으로 대접받지 못하면서 욕먹을 이유가 없다 싶어 가족장을 고집했습니다. ‘이 결정으로 인해 만약 국립묘지에 못 들어갈 경우 어떻게 할까’ 하고 어머님께 물으니 ‘그러면 유해를 한강물에 띄운다고 해’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나는 더욱 박정희 정부의 눈밖에 났어요.“
 
  이인수 박사는 “장례식 때 6·25전쟁 참전국 대사들이 조의를 표한다고 하니까 박정희 정권은 어쩔 수 없이 정일권 총리가 장례식에 참석해 노산 이은상(李殷相)씨가 쓴 조사(弔辭)를 박 대통령 대신 읽었다”며 “당시 국무총리를 지낸 변영태(卞榮泰)씨는 ‘나라를 세운 이승만 대통령을 국장으로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대한민국에 국장을 받을 대통령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 현재 국립묘지 내 묘석에는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내외분의 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버님은 국립묘지에 묻혔지만 1970년까지 묘석이 없었습니다. 어머님이 ‘서양에서는 죄인의 묘 말고는 묘석이 없는 산소가 없다. 우리가 죄인이냐’고 분통을 터뜨리셨습니다. 그 얘기가 청와대에 들어갔는지, 이듬해 ‘우남 이승만 박사의 묘’라는 묘석이 세워졌어요. 1992년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합장(合葬)하면서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내외분의 묘’라고 묘석을 새겼더니, 1998년 건국 50주년을 맞은 그해, 김대중(金大中) 정권에서 그 비석을 치우고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내외분의 묘’라는 묘석을 세웠습니다. 미리 새겨 놓은 묘석은 아버님 묘 옆에 묻었어요. ‘건국대통령 묘비’는 땅속에 묻혀 언제 햇볕을 볼지 모릅니다.”
 
 
  “내가 맞을 총알을 그 아이들이 대신 맞았어”
 
마우나라니 요양원의 존슨 원장은 이 대통령을 무료로 입원시켜 프란체스카 여사가 간병하도록 했고, 독립운동가 민찬호 목사의 아들 토머스 민 박사가 주치의로서 봉사했다. 사진은 하와이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의 이승만 박사 내외.
  이승만은 아들 이인수 박사를 만나 한국의 근황을 물었다고 한다. 4·19 때 희생된 학생들에 대해서는 “학생들이 장하다”며 “내가 맞을 총알을 그 아이들이 대신 맞았어”라고도 했다.
 
  “3·15부정선거가 있고서 4월 12일 ‘각료 회의록’을 보면, ‘선거에 무슨 잘못이 있었던 것 아니냐’고 아버님이 물었어요. 홍진기(洪璡基) 내무장관 등 각료들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만일 선거가 잘못됐다면 내가 물러나야지’라고 말하는 게 나옵니다. 치안국장 이강학(李康學, 고려증권 회장으로 대연각호텔 인수로 큰 돈을 벎)이 부정선거를 총 지휘한 것이에요. 이 어른이 신문을 직접 챙겨 읽지 못하시니 … 집권 말년에 당신이 얼마나 속았는지를 뒤늦게 알았던 것이죠. 분명한 것은 세상의 독재자치고 ‘국민이 원하면 물러나겠다’며 제 발로 물러난 독재자는 없었습니다.”
 
  — 속음을 당했다 해도 그건 대통령의 책임 아닐까요. 이미 대통령직을 수행할 능력에 한계가 왔는데도, 왜 장기집권에 집착했을까요.
 
  “한일회담만은 당신이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일본과의 국교수립 협상에서 강경해 미국 측의 애를 태웠습니다. 선거 전에 자유당 당료들에게 ‘그것 하나는 내가 끝내고 그만두는 게 좋겠지?’라고 물었다고 해요.”
 
  — 2011년 수유리의 4·19 묘역을 참배하러 갔다가 백발(白髮) 노인으로 변한 4·19세대들의 저항을 받으신 일도 있었지요?
 
  “아버님은 쫓겨났음에도 ‘학생들이 정말 장해. 청년들의 의기가 없으면 나라가 망해’라고 했습니다. 아버님이 생전에 숨진 학생과 유족에 대해 안타까워하셨기 때문에 그런 뜻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승만이 하야한 뒤 시민들은 탑골공원에 있던 동상을 새끼에 묶어 끌고 다녔다. 남산공원의 동상은 중장비로 머리가 잘리는 수난을 당했다.
 
  — 이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국에 결정적 공적을 세운 것은 ‘팩트’ 아닌가요.
 
  “그분은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고 정부를 세웠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지었어요. 세계에서 가장 단기간에 이뤄 낸 우리의 성공 역사에 그가 주춧돌을 놓은 것입니다. 혼란한 해방 공간에서 그분의 존재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김씨 부자의 세습독재 치하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공구과일(功九過一)
 

  — 2012년 10월 3일 윌슨의 이름을 딴 프린스턴대 우드로윌슨스쿨(공공정책대학원) 내에 이승만홀이 명명됐습니다. 해외의 평가도 이러한데, 국내의 건국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혹독한 것 아닙니까.
 
  “지도자의 과오는 그의 공적과 같이 공평하게 다뤄져야 해요. 집단농장화나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나라를 파탄 낸 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해 덩샤오핑(鄧小平)은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공이 7이라면 잘못은 3이라는. 명지대 강규형 교수는 ‘공구과일(功九過一)’이 아닐까라고 주장합니다.”
 
  이인수 박사는 “민주공화국의 초석을 놓은 그분의 공적은, 길고 고달팠던 독립운동 생활은 물론 산업화의 길을 트고 자유민주주의 노선을 선택했고 60만 국군을 양성했고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등 다 열거하기엔 지면이 모자랄 것”이라며 “아버님은 ‘일등국 미국과 사귀며 경쟁해야 산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했다.
 
  —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자기 성공의 제물’이었다고 봅니다. 그가 자신이 세운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통치를 했을 때 교육받은 국민은 용인할 수 없었던 거지요.
 
  “경제 발전으로 먹고살게 되고 시민으로 성장한 국민이 박정희의 권위주의를 더는 못 받아들였던 것과 같은 이치였죠. 그러나 이승만은 선각자였고 윌슨의 이상을 따라 대한민국의 방향타를 옳은 방향으로 잡고 공산주의와 대결한 지도자였습니다. 역사는 결국 윌슨·이승만 노선이 레닌·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노선보다 옳았음을 증명했습니다. 1923년 아버님은 《태평양주보》에서 공산주의의 발호와 멸망을 예견했고, 1941년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된 《재팬 인사이드 아웃(Japan Inside Out)》에서 일본의 미국 침략을 예언했습니다.”
 
  — 결국 ‘이승만 죽이기’ 교육은 ‘1948년 체제’를 부정하려는 노력의 일환 아닐까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을 갈라놓으려는 시도도 많았습니다. 3·1운동 정신으로 세워진 임시정부와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은 통합된 과정의 산물이었습니다. 1919년은 정신적 건국이자 대한민국이 수태된 날이었고 그 이후는 고통을 수반한 임신의 기간이었으며 1948년은 합법적이고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이란 갓난아이가 탄생한 실질적 건국의 해였습니다. 그 중심부에 보수와 진보를 초월한 우리 민족의 건전한 생존과 발전을 지향하는 이승만이 있었으니, 그래서 그는 임정과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이었던 것이고요.”
 
 
  김구,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
 
1948년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이승만 대통령.
  유엔한국위원회 중국대표인 류위완(劉馭萬) 공사는 1948년 7월 11일 오전 11시 김구(金九)를 자택으로 방문해 한 시간 넘게 대화했다. 류위완 대사가 정리한 대화록에 따르면, 김구는 5월 3일 평양을 방문했을 때, 소련군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의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북한 정당사회단체들과 함께 참여한 4·30 공동성명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인수 박사는 “북한과 좌파들이 백범 김구를 추앙하고 있는 것은 백범이 1948년 평양에서 북한 건국에 대해 찬성한 4·30 공동성명 때문”이라면서 “그것에 따라 그들은 분단의 책임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뒤집어씌우고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박사는 “현재 대한민국을 떠받치는 근간인 자유민주주의와 한·미 동맹은 이승만 대통령이 만든 것”이라며 “지금 우리가 ‘이승만 체제’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정당히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은 대한민국 건국 70주년이 되는 해”라며 “문재인 대통령은 국내외의 혼란기를 맞아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우리민족의 건전한 생존과 발전을 위한 자유민주주의)을 살려야만 성공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인수 박사는 “국민들이 이승만 대통령보다 ‘이박사’라는 호칭을 더 즐겨 쓰는 것은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며 “프린스턴대학에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논문 지도로 학위를 받은 대통령을 클라크, 리지웨이, 밴플리트, 렘니처, 테일러, 코울터 등 군 장성들, 그리고 대부분의 미국 대사들은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했다”고 했다.
 
 
  손자 탄생 소식 듣고 프란체스카 여사 귀국
 
1934년 10월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린 직후의 이승만 대통령 내외.
  올해는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탄신 142주년·서거 52주기’가 된다. 오는 7월 19일이 서거 52주기다. 예년처럼 기념사업회 인사들이 국립현충원에서 추모 예배를 드리는 게 전부다. 이인수 박사는 “단국대에서 경영학과 교수를 하고 있었는데 1972년 어느 날 대학 측에서 나를 불러 ‘그만두라’고 하는 바람에 혼자 미국으로 떠났다”며 “아내가 어머님을 모시고 이화장을 지켰고 나는 전공을 바꿔 뉴욕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하고 정권이 바뀐 1981년 돌아왔다”고 했다. ‘이화장의 안주인’ 조혜자 여사는 이화장의 삶을 “제게는 ‘대한민국의 종부(宗婦)’로 살아온 세월”이라고 했다.
 
  “아버님에 대해 폄훼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고 속상하지요. 우리 국민은 ‘대한민국 여권’으로 해외여행을 하지만 그 ‘Republic of Korea’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몰라요. 3·1운동 직후 그해 6월 14일 아버님이 미국을 비롯한 각국 대통령에게 공문을 보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897년의 대한제국을 승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조 여사는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어머님은 오스트리아의 친정에 가 계시면서 ‘네가 손자를 보면 들어가겠다’고 약속하셨다”며 “1969년 첫아들을 출산해 귀국을 준비하시는데 때마침 전직대통령예우법이 생겨 대통령 월급의 70%까지 나오게 되자 겹경사가 생겼던 것”이라고 했다.
 
 
  외아들 봉수의 안타까운 죽음
 
이승만 박사가 1904년 11월 미국으로 떠나기 앞서 아버지 경선공을 모시고 찍은 가족사진. 오른쪽 끝이 이 박사의 첫 부인 박씨이고, 그 다음이 이 박사다. 이승만 옆 아이가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한 외아들 봉수이고, 그 옆엔 경선공이 앉아 있다. 왼쪽 맨끝 여인은 이 박사의 맏누님이며, 봉수의 뒤에 서 있는 남자 아이는 그녀의 아들(이 박사의 생질) 우종구다.
  조혜자 여사는 생전에 시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적이 없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서거 3년 뒤 중매로 이인수 박사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 자금을 댔던 전남 영광의 지주 조철현(曺喆鉉)의 손녀로, 그녀의 부친 조영선(曺泳善)은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의사였다. 그녀는 이화여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그 뒤 페스탈로치 재단의 장학금으로 스위스에서 연수하며 《중앙일보》 초대 스위스 통신원으로 있었다.
 
  — 두 내외분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친정아버지와 세브란스 동기인 차윤근(車潤根) 박사가 제네바 세계보건기구(WHO) 총회에 오셨을 때, 아버님의 독립운동을 돕던 한표욱(韓豹頊) 대사(오스트리아와 스위스 대사 겸임)와 식사를 하고 레만호반을 산책했죠. 그때 한 대사님이 ‘(호텔드리씨를 가리키며) 미스 조, 저 건물이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1933년 2월 21일) 만난 건물이야’라고 하셨어요. 2층 식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유리창 사이로 보였는데 내가 이화장으로 시집올 줄 알았으면 올라가 봤을 거예요(웃음). 한 대사님은 이인수 박사를 소개했고 우리는 1968년 결혼했습니다.”
 
  조혜자 여사는 “친정어머니는 이화장의 살림살이가 너무 어렵다는 걸 알고는 걱정했다”며 “결혼 결정을 하고 와 보니 정말 세간 집기가 하나도 없었고 아궁이는 연탄을 밀어 넣는 레일식이었다”고 했다.
 
  — 대통령 사저인 이화장 살림이 왜 그리 어려웠습니까.
 
  “아버님이 하와이로 떠난 뒤 민주당 정권이 이화장의 집기를 트럭으로 싹 싣고 가 버렸대요. 1969년에 돌려받았지만 썩고 망실된 게 많았어요. 토지세가 많이 나와 힘들었어요. 이화장 내 별채를 세 주기도 했어요. 어머님(프란체스카)이 만날 ‘아껴라’고 하니 겨울에 난방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요.”
 
  — 이승만 대통령의 연보를 보면 ‘1906년 2월 26일 첫째아들 봉수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객사(客死)’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재혼이셨던 셈이군요.
 
  “아버님은 1890년 15살 때 동갑내기인 음죽 박씨(朴承善)와 결혼해 외아들 봉수(鳳秀·태산이라고도 부름)를 두었습니다. 아버님이 1904년 12월 4일 미국으로 출발해 조지워싱턴대에 입학했고 곧이어 박씨 부인도 아버님과 합류할 요량으로 아버님의 옥중 동지인 박용만(朴容萬) 선생 편에 봉수를 보냈던 겁니다. 그러나 9살 난 봉수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나고, 아버님은 낙담했으나 그후 하버드와 프린스턴에서 학업을 마치고 1910년 대서양을 돌아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귀국하고 맙니다.”
 
  이승만의 부친 이경선(李敬善) 옹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가 허망하게 죽자 격노해 아들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이승만은 결국 1912년 박씨 부인과 이혼했다. 조혜자 여사는 “박씨 부인은 아버님을 옥바라지했을 뿐만 아니라 시아버지의 산소를 황해도 평산으로 이장했던 분”이라며 “그분은 선교사들과 교유하며 영어와 일어, 중국어, 러시아어까지 소통이 가능했던 인텔리 여장부였다고 들었다”고 했다.
 
 
  “난 호주댁 아니야”
 
1990년 6월 15일 프란체스카 여사 90회 생일을 맞아 이화장 뜰에 가족 모두가 모였다. 맨 뒷줄 오른쪽이 큰손자 병구, 왼쪽이 둘째손자 병조다.
  — 박씨 부인의 행방은 어떻게 됐습니까.
 
  “박씨 부인은 진남포에서 사업을 하다 해방 직후 인천으로 내려와 6·25 때 인민군에게 피살당하고 맙니다. 박씨 부인의 집에 들이닥친 인민군이 ‘이승만의 본처가 숨어 있다는데 누구냐’고 하자, 박씨 부인은 숨지도 않고 ‘내다, 어쩔테냐’고 당당하게 말하는 바람에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6·25가 끝나고 아버님이 경무대서(署) 남태우(南泰祐) 서장을 불러 ‘내가 먼저 처에 박씨라고 있는데 불쌍한 여자야. 그 여자 행방 좀 알아봐. 다른 뜻은 없고 내가 용(용돈)을 좀 주려고 해. 그 여자가 내게 아들을 낳아 주었어’라고 했어요. 그 소식을 들은 아버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1970년 어머님이 귀국하셔서 박씨 부인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어머님은 그 사진에 있는 여자가 누군지 모르고 간직하고 다니셨더라고요. 제가 ‘훠스트 와이퍼’라고 하자, ‘뷰티풀’이라고 하셨어요(웃음).”
 
  — 시어머님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해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를 겁니다.
 
  “그때도 어머님을 ‘호주댁(宅)’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면 난 ‘호주댁 아니야, 한국댁이야’라고 하셨어요.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 심한 시절이었지요. 아버님의 평생 조력자였지만 한국에서는 아버님을 위해 도움이 안 된다는 자책감을 표출하곤 했어요. 1934년 10월 25년 연상의 아버님과 33살 때 결혼해 평생 아버님과 함께 굶주려 가면서 독립운동을 한 분입니다. 그분의 공적을 재평가하고 동상을 세워서 예우해야 해요.”
 
  — 파란 눈의 시어머니를 모셔 보니 어떠했습니까.
 
  “두 분이 결혼할 때 아버님이 ‘여자는 눈에 띄기만 해야지 말이 많아서는 안 된다(Woman should be seen, not be heard)’고 했대요. ‘삼종지의 안빈낙업(三從之義 安貧樂業·어려서는 부모, 결혼해서는 남편, 늙어서는 자식을 따르고, 가난을 편히 여기고 본분을 즐겨라)’이라는 족자도 써 주셨답니다. 아버님은 구한말 분이고, 돈을 가져다 주시지 못했으니까요. 어머님은 그런 가부장적 삶에 맞춰 살았어요.”
 
  — 프란체스카 여사가 만만치 않은 시어머니였겠군요.
 
  “여느 한국 시어머니보다 더 한국적이었을 겁니다. 식탁에서 제 앞에 맛있는 음식이 놓이면 남편 앞으로 밀어 줬어요. 야속하지요. 어느 날 남편이 기침을 하니까 ‘남자는 발이 따뜻해야 하니 네 남편 구두를 방으로 들여놓으라고 했는데 이달 들어 17번이나 안 들여놓았다’고 야단쳤어요. 일일이 그걸 바를정(正) 자 식으로 벽에다 표시해 놓은 거예요. 그때 속이 상해 침대에 드러누워 시위를 했죠. 외출 나갔다 들어오면서 이인수 박사가 자기 구두를 어머님 몰래 들고 들어오는 걸 보고, ‘와~ 우리 남편 내 편이야’라고 환호했죠. 가만 생각해 보니 어머니가 불쌍하고 안됐더라고요.”
 
  — 프란체스카 여사는 바깥 활동이 거의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님 산소에 가시는 게 유일한 외출이셨어요. 집으로 인사차 찾아오는 외교 사절들은 만났지만 한 번도 인터뷰에는 응한 적이 없었어요. 해방 후 미국에서 귀국하실 때 어머님은 아버님의 외동아들 태산이의 묘비를 세우고 오느라 아버님보다 늦게 귀국했지요. 그때 아버님이 《재팬 인사이드 아웃》 인세를 받으신 것을 어머님께 타이핑 수고비조로 주셨는데, 그 돈으로 검정예복을 사셨대요. 돌아가시기 전에 옷을 제게 물려주셨어요.”
 
  —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이라는 책을 보면, 이 대통령 내외의 구수한 에피소드와 사랑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어머님이 구술하고 제가 받아 적은 거였지요. 독일 《디 차이퉁》지(紙) 기자가 찾아와 인터뷰를 사양하는 어머님께 ‘하나만 대답해 달라. 남편에 대해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 하고 묻자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엎드려 기도하는 남편의 모습’이라고 했어요. 아버님 탄신 100주년 때는 《한국일보》 장기영(張基榮) 사장이 이영희(李泳禧) 기자(한·일 고대사에 대한 《노래하는 역사》도 저술)를 대동하고 인터뷰하러 오셨어요. 역시 사양하자 ‘아내로서 언제 가장 기뻤나. 해방될 때인가?’ 하고 물었어요. 어머님은 ‘상상에 맡긴다’며 피했어요.”
 
 
  틀니를 끼워 달라
 
경무대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프란체스카 여사.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대통령은 물론 손자들 옷가지까지 일일이 꿰매 입혔다. 이승만 대통령 서거 후 빈으로 돌아갔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1970년 귀국하면서 ‘거들’에 달린 호주머니(이인수 박사 내외는 ‘우리 어머니의 스위스은행’이라고 부른다)에서 자신의 틀니를 해 달라며 꼬깃꼬깃 겹쳐진 달러 지폐를 내놓았다.
  — 대통령 됐을 때가 아닐까요.
 
  “장기영 사장이 돌아간 뒤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그러자 ‘절대로 남에게는 얘기하지 마라. 대통령 되고 나니 국고가 부족해 공무원 봉급을 다 줄 수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네 아버님이 우선 말단 공무원부터 주라고 했다. 그렇게 몇 달 지나 본인의 월급봉투를 처음 갖고 왔을 때가 가장 기뻤다’고 말했어요. 어머님 환갑 때 아버님이 아름다운 여인을 뜻하는 공곡유향(空谷幽香·빈 골짜기에 그윽한 향기)이라는 글씨를 부채에 써 주셨는데, 어머님은 그것을 최고의 찬사라며 좋아하셨어요.”
 
  — 프란체스카 여사는 어떤 분으로 기억에 남아 있나요.
 
  “어머님은 여성으로서 배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위인 옆에는 훌륭한 반려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만한 헬프 메이커가 없을 거예요. 첫째 철저하게 근검절약하는 모범을 보였고, 둘째 국제 영어통역관 자격증·속기와 타자가 특기인 유능한 개인비서였으며, 셋째 외교관이셨고, 넷째 이 대통령의 건강을 세심하게 관리하셨고, 다섯째 남편에 대한 사랑은 한국사랑으로 이어져 언제나 한국인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 프란체스카 여사님의 유언은요.
 
  “자신이 죽으면 성경과 태극기를 같이 관에 넣어 달라 하셨어요. 그리고 틀니를 꼭 끼워 달라고 하셨어요. 우리나라에서 만든 틀니였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호흡이 힘들어 빼 놓으셨는데, 틀니 없이 아버님을 만나기가 죽기보다 싫다는 거였어요.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모국어인 독일어가 막 튀어 나왔고 아버님도 말년에 실어증(失語症)이 겹쳐 어머니에게 영어 대신 우리말을 쓰셨답니다. 그리고 어머니 유품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사용하는 묵주가 발견됐는데 … 아버님도 어머님께서 주신 참빗을 지니고 있다 돌아가셨습니다. 하와이 병실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마음이 울적할 때면 향수를 달랬던 그 참빗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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