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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家를 찾아서

‘한국 근대 춤의 아버지’ 한성준의 후손들

“최승희·조택원에게 우리 신명 가르친 명인(名人)”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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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락한 양반이자 세습무 집안 … 젊은 시절, 굿중패·남사당 떠도는 유랑 신세
⊙ 지난날의 궁기(宮妓)들이 추던 궁중무용과 민간의 승무·학무 등을 집대성
⊙ 한성준 무용의 후계자 손녀 한영숙 …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에서 살풀이춤
⊙ 한성준의 외증손녀가 1990년대 ‘댄싱 퀸’ 가수 김완선
⊙ 4대손 거치며 방계 후손 ‘임상규·정희·정하’ 등이 국악인으로 활약
근대 한국 전통무악의 거장 한성준(가운데). 학춤 복장을 입고 있다. 왼쪽이 무용가 조택원이다.
  20세기 초 최승희(崔承喜)·조택원(趙澤元)이 일본인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1886~1962)에게 배운 서양 춤을 미몽의 한국에 처음 전파했다면, 한성준(韓成俊·1875~1941)은 왕실과 민간·권번에서 행해지던 전통 춤을 체계화시킨 장본인이다. 태평무, 승무, 학무, 단가무, 검무, 한량무, 살풀이춤 등이 그의 손을 빌려 한국 춤으로 변신했다.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한국 춤은 이론과 체계 없이 광대·기생·무녀의 옷깃에 전승되다 이름 없이 사라졌을지 모른다. 그래서 한성준은 ‘한국 근대 춤의 아버지’라 불린다.
 
  일본에서 배운 서양 춤밖에 모르던 최승희·조택원도 우리 춤을 배우러 한성준 선생을 찾았다. 다만 그 기간이 짧고 열성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일제 때 발간된 월간지 《춘추(春秋)》 1941년 3월호에 한성준은 명창 이동백(李東白)에게 이런 속내를 비쳤다.
 
  “최승희는 서울서도 배웠으려니와 동경까지 가서 주야(晝夜)로 열나흘 동안을 가르쳤고, 조택원이는 20일 동안 가르쳤지요. 그런데 조선사람은 선생을 선생으로 알아주는 일이 퍽 적은 것 같습디다. 최씨나 조씨로 말하더라도 조선 춤이라는 건 전부를 내한테서 해득(解得)했지만 도무지 그런 기색을 안 보이려고 애를 쓰는가 봐. 이런 걸 보면 서양 사람이나 일본 사람은 엉뚱히 다르거든.”(〈가무(歌舞)의 제(諸)문제-한성준·이동백 대담〉 중에서)
 
한성준의 증손자 한명동씨(오른쪽). 예인의 가족답게 색소폰을 늦게 배웠으나 50여곡을 연주할 수 있다고 한다. 왼쪽은 한씨의 조카인 안산시립국악단 상임지휘자 임상규씨.
  선생은 생전 여러 제자들에게 춤을 가르쳤으나 피붙이인 손녀 한영숙(韓英淑·1920~1989)을 유일한 무용 후계자로 지목했다. 1941년의 일이다. 한성준은 그해 세상을 떠났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40호 학무의 기·예능보유자인 한영숙은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 공연에서 살풀이춤을 춰 찬사를 받았다.
 
  한영숙은 할아버지 한성준에게 배운 전통무(舞)를 이애주·정재만·김매자·정승희·김숙자 등에게 전수, 한국을 대표하는 춤꾼으로 키웠다. ‘춤의 사군자(四君子)’라고 불리는 학무(매), 태평무(난), 살풀이(국), 승무(죽) 등을 계승 발전시켜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0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한영숙은 국내 1세대 아코디언 연주자로 알려진 황병열과 결혼했으나 후사가 없었다. 한성준-한영숙으로 이어진 혈연적 춤의 계승은 일단 중단됐다. 한영숙은 1989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구한말 고종·대원군 앞에서 춤을 춰 ‘참봉직’ 교지 받아”
 
구한말 한성준이 왕실로부터 받은 참봉직 교지.
이름이 한춘석(韓春錫)으로 적혀 있다.
  한성준의 본명은 춘석(春錫)이다. 그의 후손이 공개한 구한말 참봉 교지에는 ‘한춘석’으로 적혀 있다. 청주한씨(淸州韓氏) 문중에선 ‘진(鎭)’ 자 항렬을 따라 성진(成鎭)으로 불렀다.
 
  그의 집안은 세습무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원래 당진에 살던 양반이었으나 역적으로 몰려 몰락했다”고 후손들은 전한다.
 
  한성준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첫째가 희종(韓喜宗·1903~1966), 둘째가 창선(韓昌先·1910~?)이다. 한희종은 아내 박추월(朴秋月)과 사이에 2남5녀를 뒀는데 장남이 영석(韓永錫·1917~1947), 장녀는 한성준의 무용 후계자인 영숙(韓英淑·본처 소생이 아닌 서자녀로 알려졌다)이다. 나머지 영섬·영금·영기·영월·영자 등의 자녀들 중 전통무용을 배웠거나 예술가로 성장한 이는 없다고 한다.
 
한성준의 호적등본.
  한성준의 손자 한영석은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 농업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그는 전화분(全花分)과 결혼해 1남3녀를 뒀다. 장남 명동(韓明東·80)은 현재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 살고 있다. 그는 예가의 길을 걷지 않고, 소형선박을 건조하는 일에 종사했다고 한다. 한명동씨의 말이다.
 
  “호적에는 이름이 ‘명동’으로 돼 있지만 집에선 명철(明哲)로 부릅니다. 젊어선 소형 배나 요트를 제작하는 일을 했어요. 사관학교(해사)에 납품도 했죠. 그 후로는 한강에서 요트를 몰았는데 아직도 파트타임으로 일 나가요. 해기사 면허, 조정 면허증이 있습니다.”
 
  그는 “6살 때 증조부(한성준)가 돌아가셨다. 그때 일이 또렷이 기억난다”고 했다.
 
  “증조부 생가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복당리에 있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어요. 유택지를 복원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와요. 증조부는 구한말 궁내부(宮內府)에서 참봉직의 교지를 받았습니다. ‘한성준’ 대신 ‘한춘석’이란 이름으로 (교지를) 받았어요.”
 
  — 어떤 일로 참봉직을 받으셨나요.
 
  “고종과 흥선 대원군 앞에서 춤을 춰 벼슬을 받았다고 해요. 옛날에 평민은 양반하고 어울리지 못했잖아요. 참봉 벼슬을 받고 궁중에 나가 춤을 추셨고, 그때 찍은 궁중무용 사진이 제법 많았는데 전쟁통에 피란을 가느라 잃어버렸고, 고모(한영숙)가 주변사람에게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해 지금은 아무런 사진이 없어요.”
 
 
  굿중패, 남사당패와 전국을 떠도는 유랑 신세
 
한국 근대춤의 아버지라 불리는 한성준(오른쪽). 조택원(왼쪽)이 한성준에게 한국 전통춤을 배웠다.
  한성준은 그가 태어난 홍성을 중심으로 황도·서산·태안·정읍·서울·평양 등에서 ‘처절한’ 학습과 예인 활동을 하며 전통예술의 근대화에 중심이 된 인물이다. 한국의 근대 공연예술사의 발전과정에서 그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증손자 한씨의 계속된 말이다.
 
  “증조부가 살아계실 때 부자셨어요. 제 친구 말이 ‘자기 선산에 가려면 한씨 집안 10리 길은 밟고 가야 한다’고 했을 정도예요. 소작하는 이들에게 (증조부가) 잘 대해 줬다는 일화가 많아요. 식구 많은 소작농에게는 쌀 몇 말을 더 주고 …. 한번은 안면도 뱃사람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조기를 잡아다 (돈 대신) 갚았대요. 마당에서 조기 말리던 광경이 기억나요.”
 
  청주한씨 문중에 따르면, 한성준이 처음부터 부자는 아니었다고 한다. 굿중패(집집마다 꽹과리치며 시주를 청하는 승려 무리), 남사당의 놀이패, 당굿 등 여러 민속놀이판을 돌아다니는 떠돌이 유랑 신세였다. 아주 어려서 외조부(白雲採)에게 장구와 춤을 배운 것이 예인의 바탕이 됐다. 한성준의 외가 쪽이 무가 집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명동씨의 말이다.
 
  “한번은 충남 서산군 안면도에 들어가 당굿을 따라다니며 ‘왕꺼리’ 진세장단을 (북으로) 쳤다고 해요. 그때 무당이 ‘왕의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예술적 충동을 느껴 약 십년 동안 연구를 거듭해 춤으로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왕꺼리’, ‘왕의 춤’이 한성준 손에 의해 ‘태평무’로 체계화된다. 그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 이 산 저 산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고유의 민간 무용과 장단을 익힌 뒤 나이 서른다섯(1908년) 무렵, 드디어 수도 서울(경성)에 입성한다. 한씨의 계속된 설명이다.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저보고 무당의 자손이라 불렀어요. 제가 반박하기를, ‘한국무용을 추셨다. 쌀이나 몇 말 받고 동당거리는 무당과는 전적으로 번지수가 틀리다’고요. 그 친구들이 이제는 제 말에 순종해요. 나라가 인정하는 춤인데, 감히 무당이라면 (고종이나 대원군 앞에) 오르지도 못해.”
 
  당시 서울 서대문 안에 원각사가 세워졌다. 1908년 창설된 원각사는 한국 신극운동의 요람이자, 한국 최초의 서양식 사설극장이다. 협률사(協律社)·연흥사(延興社) 등의 단체에 참여하며 무대에 서게 됐는데 전속으로 월급 45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유랑 생활에 비해 엄청난 수입이었다.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고향에 논을 샀고 60간(間)이나 되는 집을 지었다.
 
  “증조부 덕에 잘살았지만 돌아가신 뒤 형편이 어려워졌어요. 어머니 말씀이, 증조부가 조부(韓喜宗)더러 ‘저놈은 내 뼈까지 팔아먹을 놈’이라고 하셨대요. 조부께서 술과 노름을 좋아하셨거든요. 그런데 그 말이 씨가 돼 할아버지가 노름판에서 증조부가 묻힌 산을 쌀 닷 말에 팔아먹었답니다. 어머니가 ‘증조부 예언하신 대로 됐다’셨어요.”
 
 
  무복(舞服)을 수의로 써 달라고 유언
 
한성준의 손녀 한영숙. 그녀는 학무와 승무의 기능 보유자로 많은 제자를 춤꾼으로 키웠다.
  한성준의 묘는 현재 이장한 상태다. 손녀딸 한영숙의 제자인 서울대 이애주 교수가 새 묏자리를 마련해 지금의 터(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산23-5)로 옮겼다.
 
  “남의 땅에 증조부 묘를 둘 수가 없어 이애주 교수가 나서서 이장을 했는데 후회가 돼요. 묏자리가 습해서 …. (증조부는) 돌아가실 때 태평무를 출 때 입던 옷을 수의 대신 입혀 달라고 하셨답니다. 무복(舞服)을 수의로 써 달라는 유언인 셈이죠. 태평무는 증조부가 즐겨 추던 춤 중의 하나였어요.”
 
  — 한성준의 장남 한희종은 어떤 분이셨나요.
 
  “조부(한희종)도 증조부 음악의 한 멤버로 활동하셨어요. 해금과 피리를 잘 부셨는데, 소리를 잘 나게 하는 데 송진이 필요하대서 (제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 산에서 구해 드린 기억이 납니다. 할아버지는 가수 심수봉의 할아버지 심정순(판소리와 가야금 병창으로 이름을 떨친 국악 명인), 저의 외고조부(전용성) 등과 어울렸어요. 1970년대 동양방송(TBC) ‘장수무대’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한 이정업(장구·해금·대금의 명인), 이충선(피리·단소·대금·해금·태평소·양금의 명인) 같은 분들과 한 무대에 서기도 하셨고요. 그런데 무대에 계속 섰더라면 말년에 고생 안 하셨을 텐데 고모님들이 노발대발이야.”
 
  — 왜요.
 
  “자식들이 (할아버지가) 예술 하는 걸 싫어했어요. 서울 못 가시게 만류하셨고요. 그래서 자식들에게도 (춤이나 북을) 안 가르치셨어요.”
 
  한성준은 1934년 조선성악연구회, 1937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전통춤을 집대성해 공연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당대 명창인 이동백, 정정렬, 박녹주 등 판소리 명창들과 가야금 병창 기악의 명인, 김석구, 김덕진, 김선, 장홍심 등 무용인이 모두 한성준의 연구회에 참여했다. 이 연구회 자리는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있었다. 구한말 세도가인 여흥 민씨 저택 일부를 매입해 이층집으로 개축했다고 한다. 당대 많은 예인이 몰려들었다.
 
  “증조부가 계시던 곳은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이 있던 자리였대요. 굉장히 집이 컸다고 합니다. 증조부가 돌아가시고 그 집을 둘째 아들(한창선)에게 넘기셨는데,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집을 팔아 버리셨대요.”
 
 
  가수 김완선은 한성준의 외증손녀
 
한성준의 외증손녀인 가수 김완선.
  여기서 잠깐. 한성준의 차남 한창선(韓昌先)의 후손을 더듬어 보자. 한창선은 슬하에 1남4녀를 뒀다. 아들 규동(韓奎東·작고)은 한국도로공사에 근무했다고 한다. 예인의 길을 걷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4녀 중 둘째 딸(한수자)이 낳은 딸이 가수 김완선이다. 다시 말해 한성준의 외증손이 김완선이다. 김완선은 노래보다 춤으로 유명한 1990년대 스타 연예인. 명인의 피가 김완선으로 이어진 셈이다.
 
  또 넷째 딸(한백희·작고)은 김완선과 가수 인순이의 매니저로 활동한 국내 첫 여성 매니저다. 한백희는 1970년대 미 8군 클럽무대에서 팝과 라틴음악으로 활동한 가수였다. 인순이는 한백희의 백댄서로 춤을 추다 픽업됐고 그 가능성을 인정받아 ‘희자매’라는 트리오로 데뷔했다.
 
  한성준의 차남 방계 후손에 김완선이 있다면 장남(韓喜宗) 방계에 국악인 3남매 임상규·정희·정하가 있다.
 
  한희종의 장남 한영석은 슬하에 1남3녀를 뒀다. 막내딸 한명희(韓明姬)는 중장비 건설업을 하던 임병철과 결혼해 1남2녀를 낳았다. 3남매 모두 국악인으로 맹활약 중이다. 촌수로 따져 한성준의 방계 4대손(玄孫)이다.
 
  첫째 임상규(林相圭·46)는 처음엔 피리를 불다 국악지휘자가 됐다.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원, 중앙국악관현악단 부지휘자를 거쳐 현재 안산시립국악단 상임지휘자로 활동 중이다. 한성준 음악무용연구소 이사장, 세계문화예술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둘째 임정희(林貞凞·41)는 세종대 무용학 박사로 (사)춤다솜무용단 대표, (사)우리춤협회 이사다. 무용을 위한 칸타타인 작품 〈겨울꽃〉의 연출과 안무를, 댄스 뮤지컬 〈키스더춘향〉에서 연출을 맡았었다.
 
  셋째 임정하(林貞河·36)는 아쟁 연주자로 중앙대 한국음악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전수자다. 안산시립국악단에서 아쟁(부수석)을 불고 있다.
 
한성준의 방계 4대손인 임상규·정희·정하씨(왼쪽부터).
  기자는 지휘자 임상규씨를 만나 집안 내력을 물어보았다.
 
  — 한성준의 후손이란 사실을 언제 아셨나요.
 
  “자세한 내력을 듣지 못했지만 전통무용을 하셨던 이모할머니 ‘한영숙’이란 이름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어요. 제가 고3 때 한영숙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한성준’이란 이름은 대학교에 가서 처음 알았습니다.”
 
  — 정말요?
 
  “네, 몰랐습니다. 한성준에 대한 한국무용 쪽 연구는 어느 정도 이뤄졌지만 국악에선 자료가 별로 없어요. (임상규는 피리를 전공했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한성준이란 존재를 알게 됐어요.”
 
  — 어머니의 형제분들이 국악을 하셨나요.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이모 두 분(韓明任·明溫)이나 어머니도 예능 쪽으로 활동한 일이 없고 국악 쪽에 관심을 두신 적도 없어요. 아버지는 건설 중장비업을 하셨으니 더 거리가 멀죠. 어린 시절, 리코더를 좀 불다가 서울국악예고를 가게 됐어요. 그때부터 국악기를 배웠는데 특별한 지식은 없었어요. 피는 어쩔 수 없나 봐요.”
 
  — 한성준을 알게 되면서 어떤 분이셨다고 생각하나요.
 
  “그분은 어린 시절 연희에 참여, 춤과 재주를 익히셨고 중년에 와서는 당대의 명 고수(鼓手)로 활약하셨어요. 판소리에서 고수의 역할이 커서 ‘1고수 2명창’이니 ‘수고수 암명창’이란 말이 있잖아요. 1930년대 경성방송국의 ‘최다 출연자’셨다는 기록도 있어요. 한 연구자(서울대 김유석)에 따르면 한성준이 방송에 출연한 횟수는 경성방송국 개국부터 돌아가신 해인 1941년까지 총 방송횟수의 58%에 달했다고 합니다. 지방의 명인을 서울로 불러 출연시키는 프로모션 작업도 하셨고요.”
 
 
  한성준은 1930년대 아이돌 스타
 
  — 아무래도 전통무용 쪽에서 큰 족적을 남기셨어요.
 
  “그분이 전국을 떠돌아다니실 때는 권번에서 무용을 가르쳤지만 서울에 정착해서는 한국무용을 계승하는 작업을 하셨죠. 태평무, 승무, 학무 같은 우리 춤을 무대화시키는 데 독보적인 활동을 하셨어요. 지난날의 궁기(宮妓)들이 추던 궁중무용을 정리·연구해 완전히 당신 것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정리와 연구는 차츰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한 양무적(洋舞的) 기교와 방식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임상규씨의 계속된 말이다.
 
  “한성준 할아버지가 1930년대 세우신 ‘조선성악연구회’는 당대 최고 명창들의 모임이었어요. 송만갑, 정정렬 등 내로라하는 분들이 참여하셨죠.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 스타’셨던 셈이죠. 이분들이 외출할 때는 말을 타고 다니셨다고 해요. (한성준은) 나중 연구회 이사장도 하셨지만 일본의 문화말살 정책으로 조직이 해산되고 일본인 입맛에 맞는 이들로 재결성됐다고 합니다. 그러자 기존의 국악 명인들이 다 떠나셨대요. 이분들을 대신해 (일제의) 지원을 받은 이들이 최승희·조택원 같은 분인데 나중 친일파라는 꼬리표가 붙게 됐다고 해요. 한성준은 우리나라 전통예술의 아버지라고 생각합니다. 연희, 국악, 무용을 다 섭렵하셨고 창극이나 공연에서도 주도적이셨죠. 그런데 제자들이 무용 쪽에 많다 보니 다른 쪽은 조명이 덜됐어요.”
 
  한성준이 춤 반주로 연주한 피리와 대금 가락은 민속음악인 관악 중심의 합주곡인 ‘대풍류’의 전승과 보급에 공헌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피리산조의 형성과정에서 그의 연주가 현재 전통음악계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동안 한성준 할아버지의 후손이란 사실을 굳이 드러내지 않았지만 앞으로 적극적으로 밝히고 그분의 업적을 계승하는 작업을 하려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한성준 음악무용연구소’를 몇 해 전 만들었어요. 한성준은 전통음악과 전통무용, 전통연희를 아우르는 공연예술 분야의 발전에 힘쓴 예술가예요. 한국 근대예술사의 발전과정에 새 지평을 여셨던 분이죠. 그분의 후손이란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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