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미니어처 류승호 : 월간조선

“‘달동네’에서 살았죠.”

7월 말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아이(kid)가 되고 싶은 어른(adult)들을 위해 열린 ‘2016키덜트 페어’에서 만난 미니어처(miniature) 아티스트 류승호(43)는 향수병(鄕愁病)에 걸린 듯했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서울 사당동 달동네를 “골목과 골목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어 어디까지가 내 땅인지 모르던 곳”으로 기억했다. 이런 기억과 막연한 그리움은 1/6 축소 미니어처 〈달동네〉에 스며들어 있다. 그 시절 그 거리를 축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감정이 스며들어 가는 모형으로 만들었다.

현장을 그대로 베껴 놓은 모형은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모형에 빠져들어 갈 것 같은 정서적인 공감을 느끼게 만드는 작품은 드물다. 류 작가의 〈달동네〉는 언젠가 내가 살았을 것 같은 묘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미니어처에 감성을 심어 넣은 것이다.

작품은 작가가 영구아트무비에서 근무할 당시 준비했던 영화 〈추억의 붕어빵〉에 쓰일 소품이었다. 영화 배경을 위해 만들어졌기에 작품을 보고 있으면 무한한 상상을 하게 된다. 달동네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과거를 추억하고 1990년대에 태어나 과거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아버지가 살았던 공간을 상상하게 된다.

전시회에는 한창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배경으로 만든 작품도 있다. 파란 대문을 보면 90년대 드라마의 배경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조그만 공간을 통해, 시간여행을 떠나는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추억을 끄집어내는 방법

닭 뼈다귀 등을 이용해 만든 〈벌은 꽃을 위해〉.

보통의 미니어처 작업은 사진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작가는 기억 어디엔가 있는 추억을 끄집어내 작품을 만든다. 작품에서 감수성이 묻어나는 이유다. 옛날의 사진을 모방 혹은 재연하지 않고 자신의 느낌을 작품에 심어 넣으려 하는 것은 작가 특유의 반항정신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급격한 산업화가 시작된 1980~90년대에 대해 그는 “옆집 앞집 플라스틱 세숫대야가 모두 같은 플라스틱 대량생산 시대”라고 했다. 무한복제·무한생산이 미덕이었던 그 시절 류 작가는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산업 시대에 남들과 똑같은 바가지를 만들기 싫었다”며 대량생산 시대의 도도한 흐름에 역행하려고 발버둥 치기 시작한 것이다.

미대 진학을 원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건축을 전공하면서 자기만의 작업 스타일을 추구한다. 대표적 대량생산 장난감 프라모델(조립모형)을 비틀기 시작한 것이다. 설명서 그대로 똑같이 만드는 것이 목표인 조립모형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비틀고 분해하고 덧붙이는 작업을 시작했다. 학교에서 미술을 배우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도전적 시도를 계속했다.

영화사 영구아트에서 2008년 기획했던 영화 〈추억의 붕어빵〉을 위해 제작한 미니어처 작품.
2008년 제작한 것으로, 영구아트가 문을 닫고 나서 창고에 방치돼 있던 것을 류 작가가 사들여 복원, 보관하고 있다.

조립모형은 플라스틱으로 만든다. 플라스틱이 기본인 것이다. 류 작가는 플라스틱을 거부한다. 원칙을 파괴하려는 아웃사이더의 반항기가 그의 원동력이다.

요즈음 시장에서 구입하는 대부분의 공산품은 중국제품(made in China)이다. 흔하고 똑같은 느낌에 거부감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1980~90년대 전세계는 한국제품(made in Korea)이 휩쓸었다. 산업국가로 올라서던 시절이었으나 작가가 느끼는 세상은 달랐다.

자신이 먹었던 치킨 뼈다귀를 재료로 활용한 〈벌은 꽃을 위해〉라는 작품은 이러한 노력을 말해 준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표현하고 싶어서” 만들어진 작품은 ‘벌이 꽃을 지키고 싶어서 인간과 사투를 벌인다’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벌컨포로 중무장한 곤충이 인간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기이한 상상을 하게 된 배경은 “양봉장에 아스팔트가 깔린 이후 민들레 꽃 위로 힘겹게 올라서려 발버둥치는 벌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자연파괴를 고발하기 위해 작품에 살아있는 벌을 집어넣었다”는 것이 작가의 말이다.

평면(2D)을 입체(3D)로

1.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파이프를 문 자화상〉을 입체화한 작품.
2.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을 미니어처로 만든 작품 〈덕선이네 집 앞〉.

사회의 부조리를 탐구하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사회 자체가 모순이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IMF 구제금융의 매서운 한파가 한국을 덮쳤던 1997년 겨울 작가는 대학 졸업반이었다.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정리해고되어 집에는 차마 말하지 못해, 양복 입고 북한산에 오르던 시절이었다. 취업을 못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건축과를 나왔으니 당연히 건축사무소에 입사해야 했지만 ‘가둬 놓는 것이 싫고 숫자가 싫어서’ 전혀 다른 직장을 잡았다. 한국 공상과학(SF) 영화 〈우뢰매〉 시리즈로 아직까지 40대 어른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심형래 감독의 영구아트무비에 입사한 것이다.

입시과정의 일화는 특이하다. ‘4B연필로 화성의 괴물을 그려라’는 입사 실기 시험에서, ‘그리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4B연필로 준비해 간 지점토를 이용해 모형을 만들었다. 평면적 2차원(2D)을 요구했더니 공간적 3차원(3D)으로 화답한 것이다. 특이한 개성을 인정받아 영구아트에 입사했다. 심형래 감독에 대한 추억도 영향을 미쳤다. 작가는 〈우뢰매〉를 자신이 살던 동내 근처에서 촬영했던 것을 기억했다.

류승호 작가가 영화사 영구아트 재직 시절(2008년)에 제작한 미니어처 〈새서울공업사〉.

2011년 7월 임금체불 등으로 영구아트가 문을 닫을 때까지 〈디워〉 등 주요 작품의 미술작업에 참여했다. 작품 수준은 제쳐 놓고 시도만으로 한국 SF영화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디워〉에 대해 작가는 “스태프들의 생각이 충분히 들어가지 않아 아쉽다”고 했다.

2차원을 3차원으로 변형하는 작업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2004년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3차원으로 입체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 2차원의 밤하늘이 마치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아가 평면이 아닌 3차원의 입체감이 느껴지는데, 이러한 입체감을 미니어처 기법을 이용해 3차원으로 구현해 낸 것이다.

‘축소’를 예술로

‘감성 미니어처’라고 이름 지어진 그의 작품세계는 세상을 축소(miniature)하고,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작업이다. 3D프린터가 보급되고 있다. 진짜를 똑같이 복사하는 것은 3D 프린터에 맡기면 될 것이다. 단순히 작게 만드는 것은 의미가 없고, 무엇인가 느낌을 집어넣어야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축소 모형을 통해 “나만의 생각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작가는 한 평 남짓한 공간에 세상을 축소해 집어넣으려 노력하고 있다.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작가의 60평 작업실에는 책상 하나 크기의 공간에 자신의 상상력을 응축해 넣은 작품들이 쌓여 있다. 영화에서 시간의 흐름을 공간으로 표현하는 에이징(aging) 작업을 했던 기술을 자신의 작품으로 끌고 들어온 점이 특이하다. 미니어처라는 취미를 직업으로 만들고, 일을 하면서 배운 기술을 자신의 작품에 스며들게 한 것이다.

요즈음 들어 1980~90년대의 추억이 문화상품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추세에 맞게 추억을 가져와 한 평의 공간에 축소해 집어넣는 ‘감성 미니어처’를 시도하는 작가가 류승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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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미니어처 류승호

‘달동네 추억’을 축소 모형에 담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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