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기문 총장은 검증 공세보다 ‘시대적 요구’와 코드 달라 좌초할 수도
⊙ 지금 새누리당의 주도세력은 전사戰士처럼 싸우려고만 해
⊙ 새누리는 복원력-확장력 상실에 현실도 제대로 인식 못하는 삼각파도 맞고 있다
⊙ 인공지능 시대는 제2의 산업혁명, 기초교육부터 다 개혁해야
⊙ 우리 재벌은 글로벌화됐지만 책임만 물으면 구멍가게 행세해
⊙ 지금 새누리당의 주도세력은 전사戰士처럼 싸우려고만 해
⊙ 새누리는 복원력-확장력 상실에 현실도 제대로 인식 못하는 삼각파도 맞고 있다
⊙ 인공지능 시대는 제2의 산업혁명, 기초교육부터 다 개혁해야
⊙ 우리 재벌은 글로벌화됐지만 책임만 물으면 구멍가게 행세해
- 원희룡 지사는 차기 대선 출마 여부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느낌으로는 대안이 없을 경우 출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가 제주공항 상공을 10분 이상 선회했다. 착륙하려는 항공기가 너무 많다는 이유였다. ‘창공에서의 교통체증’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석 달에 한 번 정도 제주도를 찾을 때마다 이 섬의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뭔가 바뀌고 있었다. 발전하는 도시에서는 확실히 특유한 밝은 공기 냄새가 난다.
제주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약하는 곳이다. 그 중심에 원희룡(元喜龍·52) 제주지사가 있다. 그에게 활력의 원천을 물었다. 전국 대입수학능력시험 수석답게 정돈된 답이 돌아왔다. “첫 번째는 자연환경을 보전하려 합니다. 두 번째는 투자 유치 못지않게 그 질(質)도 관리하려고 하지요. 세 번째는 성공 인프라 구축입니다.”
완전 연소하려 했으나 비 내리고 장작 젖는 경우도 있다
7월 1일로 임기의 반환점을 맞는 그에게 “목표에서 얼마나 연소(燃燒)했느냐”고 물었다. 머리 좋은 사람과 얘기하는 것은 즐겁다. 그는 자기 저서 《완전연소》를 빗댄 질문이란 걸 금세 알아차렸다. “기존 정책방향을 전환시킨 부분, 즉 기초를 까는 것은 완성단계입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고 장작이 젖는 경우도 있습니다.”
‘비가 내리고 장작이 젖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는 서귀포시 인근에 추진 중인 제2공항 이야기를 꺼냈다. 서귀포시 부근에서 본 무수히 많은 반대 플래카드가 떠올랐다. “도민 대다수가 찬성한 사안입니다. 그런데도 일부에서 반대하면 도(道)가 알아서 해결하랍니다. 충분한 참여와 협력이 아쉽습니다.”
원 지사는 잠시 주춤하다 이 얘기마저 꺼내야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의회와 1년간 예산전쟁을 치렀습니다. 야당이나 정치적으로 견해가 다른 민간단체가 개혁을 요구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도지사의 생각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협치(協治)라는 게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원 지사를 만나기로 한 것은 6월 4일 아침 9시반이었다. 예상보다 한 시간쯤 일찍 도청 지사실에 도착했다. 토요일이어서 거리는 조용히 잠들어 있는데 지사실에는 웬 외국여성이 통역자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보다 30분 앞선 오전 9시에 약속이 된 것 같았다. “파리에 홍수가 졌다”는 말을 듣고 프랑스인이라 짐작했다.
원 지사에게 ‘요즘은 어느 나라에서 투자를 제일 많이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기본적으로는 중국이고 동남아, 일본은 주춤한 상황”이라며 “제가 주목하는 것은 중동과 유럽”이라고 했다. “유럽의 콘텐츠와 중국의 자본을 합치거나 중동의 자본에 우리 콘텐츠를 합치는 하이브리드형 투자유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사우디의 알 왈리드 왕자를 김포공항에서 만난 일도 떠올랐다. “(왕자의) 포시즌호텔 리조트를 유치하려 했어요. 그 호텔 체인이 있는 곳은 일류 휴양지로서의 상징성이 있지요. 포시즌과 연결되면 CNN 같은 방송을 통해 자연스럽게 홍보도 되거든요. 신라호텔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로컬 브랜드라….”
중동의 부호(富豪)가 세계적으로 명성 있는 호텔을 제주도에 세우면 명사(名士)들을 끌어들이는 데 유리하다는 계산인 것 같은데 그는 “중문단지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거긴 다 개발돼 포화상태 아니냐’고 했더니 “골프장 부지가 있다”고 했다. 이렇게 도정(道政)을 개괄하는 것으로 나는 그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원 지사와의 인터뷰가 있기 전 에피소드가 있었다. 관련 공무원들이 끈덕지게 ‘예상 질문지’를 요구한 것이었다. 나는 거절하며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이 만일 기자면 무슨 질문을 하겠느냐. 뻔하지 않으냐.” 그 말에 담당 공무원도 웃었다는 이야길 하자 원 지사도 웃었다. 그도 내가 제주도에 온 이유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참패했습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지요, 대한민국 보수 자체의 운명이. 국민들이 보수에 기대하는 것엔 이유가 있습니다. 도덕성, 기득권에 대한 집착, 변화에 소극적이긴 하지만 안정감, 안보, 경제성장을 이룰 세력은 보수밖에 없다는 것 때문이지요. 주변에서 아무리 불평을 해도 안정되고 책임감 있는 게 보수인데 이젠 보수의 미래를 불신하는 거 같아요.”
—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는 말인가요.
“성과가 안 좋아도, 기대치에 미흡해도, ‘그래도 그 정도면 노력은 했다’는 점수를 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노력 자체에 대해 평가를 안 한 겁니다. 그게 총선 결과가 말하는 거지요.”
인사정책 실패한 데다 포용도 못한 게 총선 참패 원인
—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인사정책에서 실패했고 포용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서민층에 대한 성의가 부족했어요. 성과나 노력뿐 아니라 국민들이 바라는 것과 핀트 자체가 안 맞은 겁니다.”
— 꼭 누구를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건 아니고요, 그렇게 지고도 아직 당내에서 배신자니, 남탓만 하는 것처럼 비치잖아요.”
— 친박이 정신 못 차린 건 국민들이 다 압니다.
“무한책임이라는 게 있어요. 잘 걸러서 표현하자면 책임감이지요. 국정주도 세력은 쿨하고 의연한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전사(戰士)들만 있어요. 이번 선거에서 여당을 안 찍은 분들이 나중에(대선 때) 돌아와야 하는데 지금은 삼각파도를 맞고 있는 형국입니다.”
— 삼각파도라니요.
“첫째가 앞서 말한 것처럼 이번에 표를 안 찍은 분들을 돌아오게 만드는 복원력인데 그게 상실됐습니다. 두 번째가 대선에서 이기려면 전통적인 보수층뿐 아니라 중도적인 국민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오는 확장력인데 그게 보이지 않으니 정권 재창출이 위기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세 번째가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인데 그건 이번 총선 결과를 정확히 인식하는 데서 나오지요. 그런데 핵심이 뭔지 인식부터 달라요.”
— 새누리당이 이렇게 망하고도 아직 계파싸움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계파통합도 안 되면서 국민통합을 말할 수 있습니까? 사실 계파통합이라는 게 말은 쉽지만 공상(空想)에 가까운 겁니다. 정치인들끼리 친소관계가 있고 살아온 내력이 있는데 그걸 무조건 없애자는 게 말이 안 됩니다. 다만 위기상황이라면 주류라는 사람들이 결단해야 하는 부분은 있습니다. 비주류를 전면에 내세우고 권한을 주는 겁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공천(公薦)이 제대로 이뤄졌습니까?”
새누리에 公薦은 없고 私薦-派薦만 판쳐
— 엉망이었죠.
“공천은 말 그대로 공적으로 천거하는 것인데 실제론 개인의 입맛에 맞는 사천(私薦), 파벌에 의한 파천(派薦)이 이뤄졌잖아요. 자질과 능력은 뒷전이고 나와 다른 사람은 불편하다고 내가 꽂고 싶은 사람을 꽂은 겁니다. 한마디로 국민을 무시한 거지요. 주류가 7을 가지면 비주류에겐 3 정도를 줘야 해요. 그래도 모든 일을 할 수 있는데 주류세력은 그런 걸 모르는 거 같습니다.”
— 최근 출범한 새누리당 혁신비상대책위원회도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많습니다.
“계파 간 지분 나누기로 일관하니까 그렇지요. 문제를 근원적으로 풀지 않고 봉합하려고만 하니 계파를 초월한 과감한 수술을 바라는 국민들의 바람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진영을 재편하고 보수 자체가 확 변하는구나 하는 확신을 국민들에게 줘야 승부가 될 텐데….”
— 공교롭게도 어제(6월 3일) 서울에서 정진석 원내대표, 김희옥 혁신비대위원장과 원희룡 제주지사, 남경필 경기지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회동했습니다.
“거기서 한 말들은 모두 함구하자고 참석자들이 합의했습니다. 다만 할 말은 다 했습니다.”
— 내년 12월 대선에서 정권이 넘어갈 확률이 얼마라고 봅니까.
“60% 정도 아닐까요?”
— 전 80%가 넘을 거 같은데.
“하하. 저도 사실은 그렇게 보고 있어요.”
—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유력 대권 후보군들이 전멸했습니다. 김무성 전 대표부터 오세훈 전 서울시장까지. 그러다 보니 반기문 유엔총장 영입 움직임이 있지요.
“반기문 총장은 생각이 상당히 앞서 있고 좋은 후보인 것은 분명합니다. 국민의 지지도 높고 무엇보다 초등학생들이 존경한다는 게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반기문 총장, 잔혹한 현실정치에 견딜지 의문
— 일각에선 검증 공세를 견디지 못할 거라고 보는데요.
“전 그분이 몇 가지 인신공격으로 무너지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다만 의문점은 있어요. 시대의 요구와 합치되지 않는다고 국민들이 판단할 경우 순식간에 관심권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분이 원하는 좌표와 반 총장이 맞는가, 시대의 요구와 합치되는가, 국민을 통합시킬 수 있는 지도자인가? 지금 그분의 인기는 높지만 한국 현실정치의 잔혹한 특성을 감안해 볼 때 또 다른 물음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 그래서 새누리당 일각에선 그분을 하루빨리 전면에 내세워 맷집을 테스트하려는 움직임이 있지요. 버틸 수 있느냐를 보고 안 된다 싶으면 대안을 모색하자는 주장입니다.
“당연히 플랜 A가 안 되면 플랜 B, C가 있어야지요. 그분이 낙마한다고 정권을 헌납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 그런데 정반대로 반총장 측에서도 새누리당이 지리멸렬하는 모습을 보고 쉽게 올라타지 않으려 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가 전국 조직망 구축에 이미 착수한 것도 새누리당에 잘못 올라타면 손해만 볼 수 있다는 계산이라는 거지요.
“대선은 기마전과 같아요. 차(車)를 멘 세력과 집단이 깃발뺏기하는 것과 같은데 지금처럼 새누리당이 배제의 정치, 마이너스 정치만 한다면 기수(騎手)가 그 말에 올라타겠어요?”
— 반 총장이 최근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만났는데 권력의지가 있어 보입니까.
“그분은 내년 1월 1일까지는 미국 뉴욕에 있지요. 종합적으로 관찰해 봤을 때 저 정도인데도 권력의지가 없다고 하는 것은 억지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새누리와 안철수 사이 차이점 아무리 찾아도 모르겠다
— 정치가 생물이라는 말이 있지요. 새누리당 주변에서는 반 총장이 낙마하면 안철수씨를 내세울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오더군요.
“하하. 사실 안철수 대표와 새누리당과의 차이점은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가 없어요.”
— 그런데 안철수 대표가 새누리당으로 갈아타는 순간 몰락할 거라는 예상도 많습니다.
“반기문도, 안철수도 안 된다면 어쩌겠습니까. 일각에서는 저를 포함한 소장파는 때가 이른 거 아니냐고 하지만 저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는 말도 잘못된 거지만 나이가 젊어서 안 된다는 말도 잘못된 거지요. 나이는 이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캐나다 총리 보세요.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마흔네 살입니다.”
— 그 말은 여차하면 대선에 나서겠다는 말이지요.
“(잠시 생각하더니) 만약의 상황을 가정해 보면서 앞서갈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아니 방금 전에는 반기문 총장 등이 낙마하고 유력 주자가 안 보이면 나설 것처럼 하시더니 왜 뒤로 뺍니까.
“제주도민들이 제게 바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발언을 의식적으로 자제할 때도 있고요. 원희룡이는 언젠가 중앙정치로 되돌아가는 거 아니냐고 보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지사로 있는 동안에는 지사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충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게 도리라고 봅니다.”
— 그런 고충은 알겠습니다. 그럼 ‘만일’이라는 단서를 달고 질문해 보겠습니다. 차기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 뭐라고 봅니까.
“제가 제주지사로 있는 동안 신경 쓴 것은 기후변화 정책,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대비, 경제성장, 복지 네 분야였습니다. 취임하기 전 제주도의 경제성장률이 5.3%였는데 6.2%로 올랐고 전국에서 땅값 상승률이 25%로 최고입니다.”
—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교육이란 게 뭡니까.
“저는 알파고로 대비되는 인공지능 시대를 2차 산업혁명이라고 봅니다. 1차 산업혁명이 기계가 육체를 대신하는 것이었다면 2차 산업혁명은 기계가 두뇌를 대체하는 시대를 말합니다. 전 이 2차 산업혁명이 대한민국엔 기회가 된다고 봅니다.”
— 어떻게요.
“우리가 앞서갈 수 있는 여건이 충분하거든요. 그래서 하기에 따라서는 찬스라고 보는 거지요. IT기술도 앞서 있으니 소프트웨어만 융합하면 순식간에 도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주도에서부터 어린이집・유치원부터 인공지능 시대에 대비하는 교육을 하려 합니다”
— 지금 그 말이 스카이(SKY)로 상징되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는 우리 교육풍토를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는 말과 동의어인 건 아시지요.
“인공지능 시대가 되면 매년 수백만 명이 직장을 잃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학원에 다니고 스펙 쌓기에만 몰두한다면 맥을 잘못 짚은 거지요. 한국판 두뇌혁명의 시대는 사실 보수가 주도해야 옳습니다. 진보는 평등성에 발목이 잡혀 있잖아요.”
— 원 지사를 정통보수 일각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저는 정통보수는 아닙니다. 개혁적 보수지요. 그러기에 정통보수와 충분히 같이 갈 수가 있어요.”
— 원 지사가 걸어온 길을 보면, 예를 들면 대학생 시절의 노동운동 경력들을 보면서 저는 김문수 전 경기지사를 생각했습니다. 그분한테 꽤 기대를 걸었는데 의외로 쉽게 무너지더군요.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중국 가서 북한 인권 얘기하고 미국 가서 친미발언 하는 등 조금 오버하신 측면이 많지요, 그분이. 제 확장력에 대해 질문들을 많이 하시는데 전 여기 가서 이 얘기 저기 가서 저 얘기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원희룡만의 컬러로 나가야지요. 그래서 비주류에 머문다고 해도 저는 오케이(OK)입니다.”
내가 재수없어 보이는 건 튈 만한 시점에 마이크 오기 때문
— 정통보수 측에서는 조금 튀는 인물이라고도 합니다.
“하하하. 튀는 정도가 아니라 재수없다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 저도 이해할 수 없는 게 튈 만한 시점이 되면 저한테 마이크가 돌아오는 거예요. 튄다는 것은 바른소리를 잘한다는 말과 같지요. 한쪽 측면만 부각되는 부분이 있긴 해요.”
— 제가 차기 정권이 야당으로 넘어갈 것으로 보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최근 조선업을 중심으로 불황의 정도가 도를 넘었습니다. 1997년 IMF외환위기 때는 기아자동차가 문제였는데 지금의 현대중공업·대우조선·삼성중공업의 덩치는 당시의 기아차보다 훨씬 큽니다.
“울산·창원에서 진보당 출신들이 당선되는 것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봐요. 그 정당을 평소 지지해서가 아니라 구조조정을 피해 나가려면 자기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진보당이라는 거지요. 근로자들뿐이 아닙니다.”
— 또 누가 있습니까.
“공무원들 중에도 구조조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느끼는 분들이 많아요. 당장 내 직장이 유지되느냐 마느냐, 그래서 내 가족의 생계가 위협받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선 그들도 자구책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확실히 집권층을 비판하는 쪽으로 표가 갈 수밖에 없습니다.”
— 경제뿐 아니라 젊은이들의 상실감도 크지요, 흙수저론으로 대변되는.
“열심히 일하면 어느 정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보여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 청년들이 절망하는 겁니다. 노력하면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보여야 하는데 보이진 않지요. 인생은 살 만하다고 느껴야 하는데 그렇게 느끼지 못하면서 청춘들이 좌절하는 거지요. 반대로 재벌 3세들은 엉뚱한 짓들을 하고.”
우리 재벌은 동네 조기축구회처럼 굴어
— 최태원 SK회장은 감옥에서 풀어 줬더니 제일 먼저 한 게 이혼이고 다른 재벌들도 국민의 지탄을 받을 일들만 골라서 해 욕을 먹고 있습니다.
“우리 재벌은 이중성이 있어요. 사실 글로벌화한 재벌에게는 규제를 풀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박지성 선수한테 수업에 들어오라고 할 필요는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글로벌화한 재벌들이 책임을 질 때는 동네 구멍가게처럼 행동하지요. 마치 축구 국가대표팀이 동네 조기축구회처럼 구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내부자거래입니다. 자기들끼리 쉽게 돈을 벌려고 하니 지탄을 받는 거지요. 전 재벌 문제에 대해 정부가 강력한 고통분담을 요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전 삼성 같은 곳에선 이제 스펙을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삼성그룹 정도면 사실 스펙이 필요없지요.
“스펙에 집착하는 회사는 관(官)피아, 즉 정경유착에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겁니다. 제가 제일 안타깝게 생각하는 게 대관(對官) 업무라는 겁니다. 공무원들과의 관계를 통해 일을 처리하는 것인데 이런 게 아직도 남아 있으니 학벌이니 스펙이니에 집착하는 거거든요.”
— 젊은이들이 좌절하는 또 다른 이유가 부동산 가격의 폭등입니다.
“부동산은 더 이상 재산증식의 수단이 돼선 안 됩니다.”
— 전국에서 제주도 땅값이 제일 많이 올랐는데 그런 말씀을 ….
“그건 기획부동산들이 맨 마지막으로 제주도로 몰려와 올린 거고, 그나마 끝물이에요. 지금처럼 부동산 정책을 펴면 젊은층이 의욕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세대 간 불화가 생기고 미래 세대는 포기하게 되지요. 전 임차인 위주의 부동산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최소한 임대인과 비교해서도 중립적인 시장은 돼야지요. 우리처럼 임대인이 절대 우위에 서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찾기 힘듭니다.”
부동산 대책, 지금 있는 정책만으로도 풀 수 있어
— 그런데도 역대 정부는 경제성장률이 낮아지면 부동산 정책으로 경기를 부양하려 합니다.
“부동산 문제에 대해선 대통령과 정부의 의지만 있으면 새로운 정책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기존에 나와 있는 정책으로도 다 처방이 가능합니다. 전 경제성장에 필요한 항목에서 부동산은 빼버리려 합니다. 부동산 정책 개혁 역시 진보보다는 보수가 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 대권 도전에 나설지 말지는 얘기하지 않으면서 많은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 때 이야깁니다. DJ와 호남이라는 집권기반을 버리고 통치기반에 집착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전 집권기반을 확정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새누리당은 확정시켜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버릴 건 과감하게 버려야지요. 막힌 곳을 푸는 맥점을 정확히 짚어 낸다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1시간 정도로 예정됐던 대화가 점점 길어졌다. 첫 만남에서 ‘뿌리’까지 뽑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년 12월 전까지 그를 몇 번은 더 만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상황에 따라 그는 대권에 도전할 것이며 그때 분명히 완주(完走)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대선 후보 경선 때 끝까지 달려 3위를 한 것이 생각났다.
그에게 ‘세력’이 있느냐고 했다. 그는 ‘있다’고 했다. 내가 ‘지금 지사이기 때문에 공무원을 세력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지적하자 원 지사는 “생각이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제주도청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도 강하게 불고 있었다. 원희룡 지사가 말했던 ‘비도 오고 장작도 젖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제주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약하는 곳이다. 그 중심에 원희룡(元喜龍·52) 제주지사가 있다. 그에게 활력의 원천을 물었다. 전국 대입수학능력시험 수석답게 정돈된 답이 돌아왔다. “첫 번째는 자연환경을 보전하려 합니다. 두 번째는 투자 유치 못지않게 그 질(質)도 관리하려고 하지요. 세 번째는 성공 인프라 구축입니다.”
완전 연소하려 했으나 비 내리고 장작 젖는 경우도 있다
7월 1일로 임기의 반환점을 맞는 그에게 “목표에서 얼마나 연소(燃燒)했느냐”고 물었다. 머리 좋은 사람과 얘기하는 것은 즐겁다. 그는 자기 저서 《완전연소》를 빗댄 질문이란 걸 금세 알아차렸다. “기존 정책방향을 전환시킨 부분, 즉 기초를 까는 것은 완성단계입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고 장작이 젖는 경우도 있습니다.”
‘비가 내리고 장작이 젖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는 서귀포시 인근에 추진 중인 제2공항 이야기를 꺼냈다. 서귀포시 부근에서 본 무수히 많은 반대 플래카드가 떠올랐다. “도민 대다수가 찬성한 사안입니다. 그런데도 일부에서 반대하면 도(道)가 알아서 해결하랍니다. 충분한 참여와 협력이 아쉽습니다.”
원 지사는 잠시 주춤하다 이 얘기마저 꺼내야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의회와 1년간 예산전쟁을 치렀습니다. 야당이나 정치적으로 견해가 다른 민간단체가 개혁을 요구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도지사의 생각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협치(協治)라는 게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원 지사를 만나기로 한 것은 6월 4일 아침 9시반이었다. 예상보다 한 시간쯤 일찍 도청 지사실에 도착했다. 토요일이어서 거리는 조용히 잠들어 있는데 지사실에는 웬 외국여성이 통역자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보다 30분 앞선 오전 9시에 약속이 된 것 같았다. “파리에 홍수가 졌다”는 말을 듣고 프랑스인이라 짐작했다.
원 지사에게 ‘요즘은 어느 나라에서 투자를 제일 많이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기본적으로는 중국이고 동남아, 일본은 주춤한 상황”이라며 “제가 주목하는 것은 중동과 유럽”이라고 했다. “유럽의 콘텐츠와 중국의 자본을 합치거나 중동의 자본에 우리 콘텐츠를 합치는 하이브리드형 투자유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사우디의 알 왈리드 왕자를 김포공항에서 만난 일도 떠올랐다. “(왕자의) 포시즌호텔 리조트를 유치하려 했어요. 그 호텔 체인이 있는 곳은 일류 휴양지로서의 상징성이 있지요. 포시즌과 연결되면 CNN 같은 방송을 통해 자연스럽게 홍보도 되거든요. 신라호텔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로컬 브랜드라….”
중동의 부호(富豪)가 세계적으로 명성 있는 호텔을 제주도에 세우면 명사(名士)들을 끌어들이는 데 유리하다는 계산인 것 같은데 그는 “중문단지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거긴 다 개발돼 포화상태 아니냐’고 했더니 “골프장 부지가 있다”고 했다. 이렇게 도정(道政)을 개괄하는 것으로 나는 그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원 지사와의 인터뷰가 있기 전 에피소드가 있었다. 관련 공무원들이 끈덕지게 ‘예상 질문지’를 요구한 것이었다. 나는 거절하며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이 만일 기자면 무슨 질문을 하겠느냐. 뻔하지 않으냐.” 그 말에 담당 공무원도 웃었다는 이야길 하자 원 지사도 웃었다. 그도 내가 제주도에 온 이유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참패했습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지요, 대한민국 보수 자체의 운명이. 국민들이 보수에 기대하는 것엔 이유가 있습니다. 도덕성, 기득권에 대한 집착, 변화에 소극적이긴 하지만 안정감, 안보, 경제성장을 이룰 세력은 보수밖에 없다는 것 때문이지요. 주변에서 아무리 불평을 해도 안정되고 책임감 있는 게 보수인데 이젠 보수의 미래를 불신하는 거 같아요.”
—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는 말인가요.
“성과가 안 좋아도, 기대치에 미흡해도, ‘그래도 그 정도면 노력은 했다’는 점수를 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노력 자체에 대해 평가를 안 한 겁니다. 그게 총선 결과가 말하는 거지요.”
인사정책 실패한 데다 포용도 못한 게 총선 참패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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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최근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원희룡 지사가 안내하는 모습이다. 원 지사는 반 총장의 대권 출마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
“인사정책에서 실패했고 포용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서민층에 대한 성의가 부족했어요. 성과나 노력뿐 아니라 국민들이 바라는 것과 핀트 자체가 안 맞은 겁니다.”
— 꼭 누구를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건 아니고요, 그렇게 지고도 아직 당내에서 배신자니, 남탓만 하는 것처럼 비치잖아요.”
— 친박이 정신 못 차린 건 국민들이 다 압니다.
“무한책임이라는 게 있어요. 잘 걸러서 표현하자면 책임감이지요. 국정주도 세력은 쿨하고 의연한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전사(戰士)들만 있어요. 이번 선거에서 여당을 안 찍은 분들이 나중에(대선 때) 돌아와야 하는데 지금은 삼각파도를 맞고 있는 형국입니다.”
— 삼각파도라니요.
“첫째가 앞서 말한 것처럼 이번에 표를 안 찍은 분들을 돌아오게 만드는 복원력인데 그게 상실됐습니다. 두 번째가 대선에서 이기려면 전통적인 보수층뿐 아니라 중도적인 국민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오는 확장력인데 그게 보이지 않으니 정권 재창출이 위기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세 번째가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인데 그건 이번 총선 결과를 정확히 인식하는 데서 나오지요. 그런데 핵심이 뭔지 인식부터 달라요.”
— 새누리당이 이렇게 망하고도 아직 계파싸움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계파통합도 안 되면서 국민통합을 말할 수 있습니까? 사실 계파통합이라는 게 말은 쉽지만 공상(空想)에 가까운 겁니다. 정치인들끼리 친소관계가 있고 살아온 내력이 있는데 그걸 무조건 없애자는 게 말이 안 됩니다. 다만 위기상황이라면 주류라는 사람들이 결단해야 하는 부분은 있습니다. 비주류를 전면에 내세우고 권한을 주는 겁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공천(公薦)이 제대로 이뤄졌습니까?”
새누리에 公薦은 없고 私薦-派薦만 판쳐
— 엉망이었죠.
“공천은 말 그대로 공적으로 천거하는 것인데 실제론 개인의 입맛에 맞는 사천(私薦), 파벌에 의한 파천(派薦)이 이뤄졌잖아요. 자질과 능력은 뒷전이고 나와 다른 사람은 불편하다고 내가 꽂고 싶은 사람을 꽂은 겁니다. 한마디로 국민을 무시한 거지요. 주류가 7을 가지면 비주류에겐 3 정도를 줘야 해요. 그래도 모든 일을 할 수 있는데 주류세력은 그런 걸 모르는 거 같습니다.”
— 최근 출범한 새누리당 혁신비상대책위원회도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많습니다.
“계파 간 지분 나누기로 일관하니까 그렇지요. 문제를 근원적으로 풀지 않고 봉합하려고만 하니 계파를 초월한 과감한 수술을 바라는 국민들의 바람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진영을 재편하고 보수 자체가 확 변하는구나 하는 확신을 국민들에게 줘야 승부가 될 텐데….”
— 공교롭게도 어제(6월 3일) 서울에서 정진석 원내대표, 김희옥 혁신비대위원장과 원희룡 제주지사, 남경필 경기지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회동했습니다.
“거기서 한 말들은 모두 함구하자고 참석자들이 합의했습니다. 다만 할 말은 다 했습니다.”
— 내년 12월 대선에서 정권이 넘어갈 확률이 얼마라고 봅니까.
“60% 정도 아닐까요?”
— 전 80%가 넘을 거 같은데.
“하하. 저도 사실은 그렇게 보고 있어요.”
—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유력 대권 후보군들이 전멸했습니다. 김무성 전 대표부터 오세훈 전 서울시장까지. 그러다 보니 반기문 유엔총장 영입 움직임이 있지요.
“반기문 총장은 생각이 상당히 앞서 있고 좋은 후보인 것은 분명합니다. 국민의 지지도 높고 무엇보다 초등학생들이 존경한다는 게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반기문 총장, 잔혹한 현실정치에 견딜지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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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포럼 당시의 반 총장과 원 지사 등 귀빈들이 포즈를 취한 장면이다. |
“전 그분이 몇 가지 인신공격으로 무너지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다만 의문점은 있어요. 시대의 요구와 합치되지 않는다고 국민들이 판단할 경우 순식간에 관심권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분이 원하는 좌표와 반 총장이 맞는가, 시대의 요구와 합치되는가, 국민을 통합시킬 수 있는 지도자인가? 지금 그분의 인기는 높지만 한국 현실정치의 잔혹한 특성을 감안해 볼 때 또 다른 물음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 그래서 새누리당 일각에선 그분을 하루빨리 전면에 내세워 맷집을 테스트하려는 움직임이 있지요. 버틸 수 있느냐를 보고 안 된다 싶으면 대안을 모색하자는 주장입니다.
“당연히 플랜 A가 안 되면 플랜 B, C가 있어야지요. 그분이 낙마한다고 정권을 헌납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 그런데 정반대로 반총장 측에서도 새누리당이 지리멸렬하는 모습을 보고 쉽게 올라타지 않으려 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가 전국 조직망 구축에 이미 착수한 것도 새누리당에 잘못 올라타면 손해만 볼 수 있다는 계산이라는 거지요.
“대선은 기마전과 같아요. 차(車)를 멘 세력과 집단이 깃발뺏기하는 것과 같은데 지금처럼 새누리당이 배제의 정치, 마이너스 정치만 한다면 기수(騎手)가 그 말에 올라타겠어요?”
— 반 총장이 최근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만났는데 권력의지가 있어 보입니까.
“그분은 내년 1월 1일까지는 미국 뉴욕에 있지요. 종합적으로 관찰해 봤을 때 저 정도인데도 권력의지가 없다고 하는 것은 억지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새누리와 안철수 사이 차이점 아무리 찾아도 모르겠다
— 정치가 생물이라는 말이 있지요. 새누리당 주변에서는 반 총장이 낙마하면 안철수씨를 내세울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오더군요.
“하하. 사실 안철수 대표와 새누리당과의 차이점은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가 없어요.”
— 그런데 안철수 대표가 새누리당으로 갈아타는 순간 몰락할 거라는 예상도 많습니다.
“반기문도, 안철수도 안 된다면 어쩌겠습니까. 일각에서는 저를 포함한 소장파는 때가 이른 거 아니냐고 하지만 저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는 말도 잘못된 거지만 나이가 젊어서 안 된다는 말도 잘못된 거지요. 나이는 이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캐나다 총리 보세요.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마흔네 살입니다.”
— 그 말은 여차하면 대선에 나서겠다는 말이지요.
“(잠시 생각하더니) 만약의 상황을 가정해 보면서 앞서갈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아니 방금 전에는 반기문 총장 등이 낙마하고 유력 주자가 안 보이면 나설 것처럼 하시더니 왜 뒤로 뺍니까.
“제주도민들이 제게 바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발언을 의식적으로 자제할 때도 있고요. 원희룡이는 언젠가 중앙정치로 되돌아가는 거 아니냐고 보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지사로 있는 동안에는 지사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충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게 도리라고 봅니다.”
— 그런 고충은 알겠습니다. 그럼 ‘만일’이라는 단서를 달고 질문해 보겠습니다. 차기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 뭐라고 봅니까.
“제가 제주지사로 있는 동안 신경 쓴 것은 기후변화 정책,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대비, 경제성장, 복지 네 분야였습니다. 취임하기 전 제주도의 경제성장률이 5.3%였는데 6.2%로 올랐고 전국에서 땅값 상승률이 25%로 최고입니다.”
—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교육이란 게 뭡니까.
“저는 알파고로 대비되는 인공지능 시대를 2차 산업혁명이라고 봅니다. 1차 산업혁명이 기계가 육체를 대신하는 것이었다면 2차 산업혁명은 기계가 두뇌를 대체하는 시대를 말합니다. 전 이 2차 산업혁명이 대한민국엔 기회가 된다고 봅니다.”
— 어떻게요.
“우리가 앞서갈 수 있는 여건이 충분하거든요. 그래서 하기에 따라서는 찬스라고 보는 거지요. IT기술도 앞서 있으니 소프트웨어만 융합하면 순식간에 도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주도에서부터 어린이집・유치원부터 인공지능 시대에 대비하는 교육을 하려 합니다”
— 지금 그 말이 스카이(SKY)로 상징되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는 우리 교육풍토를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는 말과 동의어인 건 아시지요.
“인공지능 시대가 되면 매년 수백만 명이 직장을 잃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학원에 다니고 스펙 쌓기에만 몰두한다면 맥을 잘못 짚은 거지요. 한국판 두뇌혁명의 시대는 사실 보수가 주도해야 옳습니다. 진보는 평등성에 발목이 잡혀 있잖아요.”
— 원 지사를 정통보수 일각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저는 정통보수는 아닙니다. 개혁적 보수지요. 그러기에 정통보수와 충분히 같이 갈 수가 있어요.”
— 원 지사가 걸어온 길을 보면, 예를 들면 대학생 시절의 노동운동 경력들을 보면서 저는 김문수 전 경기지사를 생각했습니다. 그분한테 꽤 기대를 걸었는데 의외로 쉽게 무너지더군요.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중국 가서 북한 인권 얘기하고 미국 가서 친미발언 하는 등 조금 오버하신 측면이 많지요, 그분이. 제 확장력에 대해 질문들을 많이 하시는데 전 여기 가서 이 얘기 저기 가서 저 얘기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원희룡만의 컬러로 나가야지요. 그래서 비주류에 머문다고 해도 저는 오케이(OK)입니다.”
내가 재수없어 보이는 건 튈 만한 시점에 마이크 오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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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희룡 지사의 소신은 ‘완전 연소’다. 자신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정열이 넘쳐 보였다. |
“하하하. 튀는 정도가 아니라 재수없다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 저도 이해할 수 없는 게 튈 만한 시점이 되면 저한테 마이크가 돌아오는 거예요. 튄다는 것은 바른소리를 잘한다는 말과 같지요. 한쪽 측면만 부각되는 부분이 있긴 해요.”
— 제가 차기 정권이 야당으로 넘어갈 것으로 보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최근 조선업을 중심으로 불황의 정도가 도를 넘었습니다. 1997년 IMF외환위기 때는 기아자동차가 문제였는데 지금의 현대중공업·대우조선·삼성중공업의 덩치는 당시의 기아차보다 훨씬 큽니다.
“울산·창원에서 진보당 출신들이 당선되는 것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봐요. 그 정당을 평소 지지해서가 아니라 구조조정을 피해 나가려면 자기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진보당이라는 거지요. 근로자들뿐이 아닙니다.”
— 또 누가 있습니까.
“공무원들 중에도 구조조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느끼는 분들이 많아요. 당장 내 직장이 유지되느냐 마느냐, 그래서 내 가족의 생계가 위협받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선 그들도 자구책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확실히 집권층을 비판하는 쪽으로 표가 갈 수밖에 없습니다.”
— 경제뿐 아니라 젊은이들의 상실감도 크지요, 흙수저론으로 대변되는.
“열심히 일하면 어느 정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보여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 청년들이 절망하는 겁니다. 노력하면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보여야 하는데 보이진 않지요. 인생은 살 만하다고 느껴야 하는데 그렇게 느끼지 못하면서 청춘들이 좌절하는 거지요. 반대로 재벌 3세들은 엉뚱한 짓들을 하고.”
우리 재벌은 동네 조기축구회처럼 굴어
— 최태원 SK회장은 감옥에서 풀어 줬더니 제일 먼저 한 게 이혼이고 다른 재벌들도 국민의 지탄을 받을 일들만 골라서 해 욕을 먹고 있습니다.
“우리 재벌은 이중성이 있어요. 사실 글로벌화한 재벌에게는 규제를 풀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박지성 선수한테 수업에 들어오라고 할 필요는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글로벌화한 재벌들이 책임을 질 때는 동네 구멍가게처럼 행동하지요. 마치 축구 국가대표팀이 동네 조기축구회처럼 구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내부자거래입니다. 자기들끼리 쉽게 돈을 벌려고 하니 지탄을 받는 거지요. 전 재벌 문제에 대해 정부가 강력한 고통분담을 요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전 삼성 같은 곳에선 이제 스펙을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삼성그룹 정도면 사실 스펙이 필요없지요.
“스펙에 집착하는 회사는 관(官)피아, 즉 정경유착에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겁니다. 제가 제일 안타깝게 생각하는 게 대관(對官) 업무라는 겁니다. 공무원들과의 관계를 통해 일을 처리하는 것인데 이런 게 아직도 남아 있으니 학벌이니 스펙이니에 집착하는 거거든요.”
— 젊은이들이 좌절하는 또 다른 이유가 부동산 가격의 폭등입니다.
“부동산은 더 이상 재산증식의 수단이 돼선 안 됩니다.”
— 전국에서 제주도 땅값이 제일 많이 올랐는데 그런 말씀을 ….
“그건 기획부동산들이 맨 마지막으로 제주도로 몰려와 올린 거고, 그나마 끝물이에요. 지금처럼 부동산 정책을 펴면 젊은층이 의욕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세대 간 불화가 생기고 미래 세대는 포기하게 되지요. 전 임차인 위주의 부동산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최소한 임대인과 비교해서도 중립적인 시장은 돼야지요. 우리처럼 임대인이 절대 우위에 서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찾기 힘듭니다.”
부동산 대책, 지금 있는 정책만으로도 풀 수 있어
— 그런데도 역대 정부는 경제성장률이 낮아지면 부동산 정책으로 경기를 부양하려 합니다.
“부동산 문제에 대해선 대통령과 정부의 의지만 있으면 새로운 정책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기존에 나와 있는 정책으로도 다 처방이 가능합니다. 전 경제성장에 필요한 항목에서 부동산은 빼버리려 합니다. 부동산 정책 개혁 역시 진보보다는 보수가 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 대권 도전에 나설지 말지는 얘기하지 않으면서 많은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 때 이야깁니다. DJ와 호남이라는 집권기반을 버리고 통치기반에 집착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전 집권기반을 확정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새누리당은 확정시켜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버릴 건 과감하게 버려야지요. 막힌 곳을 푸는 맥점을 정확히 짚어 낸다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1시간 정도로 예정됐던 대화가 점점 길어졌다. 첫 만남에서 ‘뿌리’까지 뽑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년 12월 전까지 그를 몇 번은 더 만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상황에 따라 그는 대권에 도전할 것이며 그때 분명히 완주(完走)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대선 후보 경선 때 끝까지 달려 3위를 한 것이 생각났다.
그에게 ‘세력’이 있느냐고 했다. 그는 ‘있다’고 했다. 내가 ‘지금 지사이기 때문에 공무원을 세력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지적하자 원 지사는 “생각이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제주도청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도 강하게 불고 있었다. 원희룡 지사가 말했던 ‘비도 오고 장작도 젖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