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慶男
⊙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캐나다 토론토 거주.
⊙ 저서: 《부부의 십계명》 《노년학을 배웁시다》 《성지의 향기》
《The Fragrance of the Holy Land》.
⊙ 역서: 폴 트루니에의 《고독》 《꿈꾸는 어른》, 헨리 코레이의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 역술서: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윤치호 일기 제4권에 나타난 역사의 흐름》.
⊙ 現 국제펜클럽본부 회원, 한국번역가협회 회원, 좌옹 윤치호 문화사업회 이사.
⊙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캐나다 토론토 거주.
⊙ 저서: 《부부의 십계명》 《노년학을 배웁시다》 《성지의 향기》
《The Fragrance of the Holy Land》.
⊙ 역서: 폴 트루니에의 《고독》 《꿈꾸는 어른》, 헨리 코레이의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 역술서: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윤치호 일기 제4권에 나타난 역사의 흐름》.
⊙ 現 국제펜클럽본부 회원, 한국번역가협회 회원, 좌옹 윤치호 문화사업회 이사.
- 1913~1914년경 촬영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왕비 알렉산드라(가운데 줄 왼쪽), 그리고 그의 자녀들.
1부 민영환과 윤치호,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가다
1896년 6월 8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을 마친 조선사절단 일행은 모스크바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했다. 윤치호는 숙소에서 자정이 넘도록 황혼빛 감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白夜) 속에 레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탐독하며 감동에 젖는다. 그가 읽은 책은 1873년 영문 초판본이었다. 사절단이 러시아에 머무는 동안 조선의 《독립신문》 외국통신란(1896년 6월 18일)에는 ‘아라사 황제 즉위례 기사… 일본 특사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후작은 톨스토이 백작이 맞았고, 조선 특사 민영환은 친왕 배실칙코프가 맞더라’는 기사가 났다.
일본 특사를 영접한 사람이 혹 《전쟁과 평화》의 작가인 레오 톨스토이 백작인 줄 알았으나, 그 시각 톨스토이는 그의 고향 농장에서 새 작품 《하지 무라트》를 구상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그 당시 러시아에 두 사람의 톨스토이 백작이 있었던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조선 주둔 제1사령관을 지낸 야마가타 일본 대표를 영접한 또 한 명의 톨스토이는 이반 이바노비치 톨스토이 백작(Ivan Ivanovich Tolstoy·1858~1916)이었다. 정치가이자 고고학자이며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인 그는 1893~1905년 비테(Witte) 내각의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그 시기에 니콜라이 2세 대관식 행사가 열렸고, 그는 일본 전권공사 야마가타를 영접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레오 톨스토이 백작의 《전쟁과 평화》에서 ‘초토화 작전’으로 나폴레옹과 싸운 미하일 쿠투조프(Mikhail Kutuzov) 장군의 증손자였다는 사실이었다. 《전쟁과 평화》를 읽고 있던 윤치호가 그 소설의 등장인물인 쿠투조프 장군의 후손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것은 운명의 아이러니 같다.
6월 12일 재무대신 비테는 비공식적으로 윤치호에게 러시아 주재 공사를 제안했으나 윤치호는 사양한다. 7월 4일에는 총리 담당관 포스드니프(Posdnyff)가 찾아와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에서 조선어 강의를 맡아달라고 했고, 7월 17일에는 정식 초청장과 연봉 1000루블을 제안한다. 윤치호는 생각 끝에 문부대신 돌로코프(Dolokoff) 백작에게 조선어 강의를 사양한다는 답신을 보낸다(8월 6일자 일기). 이듬해, 김병옥(金秉玉)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왕립대학교 동양어학부의 첫 번째 조선어 교수로 부임한다.
사절단 일행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蕩子)〉가 걸려 있고, 엘 그레코의 그림, 안토니오 카노바의 대리석 조각 작품 〈에로스와 프시케(Eros and Psyche)〉의 원작이 있는 에르미타쉬(Hermitage) 미술관을 구경한다(8월 1일). 에르미타쉬 미술관은 로마노프 왕조의 예카테리나 2세(1729~1796, 재위 1762~1796)가 지은 왕궁이다.
유럽에 불어닥친 계몽사상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예카테리나 여제는 예술 작품에 대한 열광적인 후원자로서 많은 회화(繪畵)를 수집하여 세계적인 에르미타쉬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러시아 전역에 건물을 건립해 학술기관(아카데미), 저널 출판, 도서관으로 사용하게 하였으며, 서유럽의 많은 건축가를 초청하여 건축 붐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신고전주의(Neo-classicism)가 들어온다. 에르미타쉬 박물관은 파리의 루브르, 런던의 대영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며, 이곳에 소장된 유물만도 270만여 점에 달한다. 에르미타쉬는 그 이름처럼 우리 영혼의 휴식공간이며 은둔처가 되리라.
한편, 민영환 공은 날이 갈수록 세상 짐을 다 짊어진 어린양 예수처럼 고통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타인 부인의 집을 숙소로 정한 다음, 스타인의 제안서 작성 건으로 언쟁이 벌어진다. 이튿날은 사절단 파견의 목적인 임금의 친서(親書)를 로바노프 대신을 통해 니콜라이 황제에게 전달하고 요청한 제안에 대해 답을 듣는다(6월 5일, 6일자). 며칠 후 로바노프 대신에게 5개 제안서에 대한 추가 회답을 받는다(6월 30일).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이 제안서에서 가장 핵심적인 300만 엔의 차관 요청과 궁궐을 지킬 병사 요청에 대해 러시아는 모두 기각하였다. 민 공은 낙심하면서도 집요하게 로바노프 대신에게 경비병과 고문관을 요청하였고, 이에 대해 로바노프는 “조선의 왕이 자신을 지킬 만큼 충분한 의지가 없는데, 어떻게 다른 나라 군인이 그분을 지켜줄 수 있습니까”(6월 7일)라는 말로 답한다. 이에 수치심을 느낀 민 공은 주위 사람들만 괴롭힌다.
조선사절단이 제안한 300만 엔의 차관을 받았더라면, 조선은 아마도 지금껏 러시아의 속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당시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열차(TSR) 공사로 인해 조선에 거금을 빌려줄 여력도 없었고, 로마노프 왕조는 그 영향으로 혁명의 불길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신임장에 대한 답을 기다리는 동안, 6월 9일 러시아와 일본 양국은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라는 양국 간 조약을 조선이 감쪽같이 모르게 체결한다.
특명전권공사 민영환도 대관식 참가 기행문으로 《해천추범(海天秋帆)》을 남겼다. 두 사람의 기록을 대조해 보면, 날짜별로 수행한 일이 서로 어긋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보는 관점과 관심사는 전혀 달라 흥미를 자아낸다. 《해천추범》이 정사(正史)로서 격식을 의식한 기록이라면, 윤치호 일기는 자유분방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도 전자가 드러내지 않은 주요 외교 협상의 속사정을 놓치지 않고 적고 있다. 이태진(李泰鎭)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전권공사가 러시아 외무대신 로바노프에게 제안한 다섯 가지 요구사항은 《해천추범》에는 보이지 않는데, 《윤치호 일기》에는 이를 둘러싼 두 사람 간의 의견 교환이 자세히 적혀 있다”고 했다.
민영환은 조선소 시찰이나 해군박물관, 우주박물관이나 첨단 기계를 설비한 천문대 등엔 관심이 없었다. 교화소와 병원을 포함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공공 기관들보다는 농기계에 관심을 가졌고, 이러한 ‘도착하기 전에 녹이 슬어 못 쓰게 될’ 기구들을 비싸게 사들인다.
민 공이 가장 당황했던 장면은 황제 별궁에서 황제를 마지막으로 알현하던 때다. 민 공은 김도일(金道逸)만 데리고 들어가며, 윤치호와 김득련(金得鍊)은 문밖에서 기다리게 한다. 그 사정을 몰랐던 러시아 의전관은 윤치호도 입장을 시킨다. 윤치호가 서울을 떠나기 전 이미 임금에게 명례궁(明禮宮·덕수궁의 옛 이름)으로 가시도록 권한 사실을 민영환 공은 마치 일급비밀이나 되는 듯 니콜라이 황제에게 이야기하고 만다. 그 순간, 민영환은 윤치호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윤치호 일기에는 민영환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눈앞에 펼쳐지듯 선명하게 그려진다(7월 14일). 민영환은 임금의 거처를 윤치호에게조차 비밀로 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고매한 두 선비는 마음을 열고 장기를 두었으며, 윤치호는 멋진 한시를 지어 동양문화에 어두운 인물이 아님을 보여주어 일행을 깜짝 놀라게 하는 한편, 화해주를 나누기도 한다(8월 13일).
윤치호는 여전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미는 좋은 조건들과 현실적인 처지 사이에서 갈등한다. ‘천국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염세주의 사고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결국은 프랑스에서 불어 공부를 더 할 생각으로 모두 뿌리친다. 그동안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민영환과 일행을 떠나 혼자서 파리를 향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다. 민 공은 윤치호에게 전별금으로 100루블을 주고, 전별주로 샴페인 한 잔을 함께 마신다. 《해천추범; 민영환의 세계일주》에는 1병을 사주었다고 하지만 윤치호는 한 잔만 대접받았다고 일기에 적고 있다.
제2사절단원 민경식(閔景植), 주석면(朱錫冕)이 7월 1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윤치호를 완전히 배제한 채 모종의 임무를 띠고 온 듯했다. 민영환 공은 친러파인 이들이 공식사절단과는 별도로 협상할 것을 예상하고 특사직을 맡지 않겠다고 한 듯하다. 실제로 이들은 공식사절단이 떠난 후에도 수개월 더 체류하며 러시아에 각종 이권을 넘겨주는 협약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6월 5일, 금요일.
아름다운 날씨. 소낙비 오다. 모스크바
오후 2시에 민영환 공과 나는 외무대신 로바노프 왕자를 만나러 갔다. 다음은 우리가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다.
민영환: 친서를 제출하기 위해 황제를 알현할 수 있을까요?
로바노프: 민 공의 요청을 황제께 아뢰었습니다. 황제께서 그 조건을 수락하실지 여부는 내가 답변해 드릴 수 없습니다. 황제 폐하의 지침을 받는 대로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민영환: 조선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감안하셔서 제가 귀하에게 내놓는 다섯 가지 제안을 러시아 정부가 받아들여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1. 조선 군대가 믿을 만한 수준으로 양성될 때까지 러시아 군대가 국왕의 경호를 지원해 줄 것.
2. 군대와 경찰의 훈련을 위해 다수의 군사교관을 파견해 줄 것.
3. 궁내부와 내각과 광산과 철도 분야를 지도할 고문관을 파견해 줄 것.
4. 조선과 러시아 사이의 직통 전신을 가설할 것.
5. 일본에서 빌린 국채를 갚기 위해 300만 엔을 차관해 달라 등입니다.
로바노프: 내가 제안서의 요구사항들을 가타부타 지금 답변할 수 없습니다. 각료들과 의논해 심사숙고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황제께서 그 문제에 대해 기꺼이 응답해 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제안서의 요구 조건들을 내게 써주십시오.
민영환: 저는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조선에 가능한 대로 빨리 돌아가 러시아 정부가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지를 조정에 보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로바노프: 우리도 가능한 한 빨리 민 공사에게 회답을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민영환: 부디 그 다섯 가지 조항이 채택되기를 빕니다.
6월 6일, 토요일.
모스크바
오후 3시 니콜라이 황제를 알현하고 조선의 요구사항이 적힌 친서를 직접 전달했다. 나는 통역을 위해 민영환 공과 함께 들어갔다. 민 공은 로바노프 대신에게 건넨 내용을 황제에게 확실하게 아뢰었다. 황제는 정중하게 귀를 기울여 들었다(중략).
내가 “조선의 어떤 배신자가…”라고 말을 했을 때, 황제는 “대원군 말인가” 하고 되짚어 물었다. 나는 이어 이렇게 말했다.
“조선이 현재 원하는 것은 안정된 정부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자기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지키는 일을 걱정하지 않고 지낸 조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제 조선은 러시아의 힘을 의지하여 굳건한 정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의 동맹은 조선의 관리들 사이에 당혹감을 낳게 할 뿐입니다. 그러한 계약 아래에서 조선은 전쟁을 하든지 평화를 유지하든지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그런 중재에 동의하지 않으실 줄 압니다.”
니콜라이 황제는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안 되지, 안 돼!” 그러면서 러시아와 일본의 동맹이 주는 영향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민영환 공은 다섯 가지 제안을 한 번 더 되풀이하여 말했다. 황제 폐하는 이렇게 대답했다. “짐에게 말한 모든 이야기를 로바노프 대신과 재무대신에게 말씀하십시오. 두 사람이 그 사안을 준비할 것입니다. 민 공은 러시아가 조선을 도와줄 거라고 기대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때 민영환 공이 조선 국왕의 친서를 전달했다. 그것은 웨베르 공사와 스페이어 후임 공사의 헌신적인 협력에 감사하는 내용이었다(두 사람이 동양에 더 오래 체류하도록 윤허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에 대해 황제 폐하는 “말씀해 주셔서 기쁘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6월 7일, 일요일.
더운 날씨. 모스크바
오전 10시30분 재무대신 세르게이 비테(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는 러시아 제국의 첫 번째 총리로, 철도사업국장, 교통부 장관, 재무부 장관, 총리 등을 역임했다-옮긴이)를 방문했다. 비테는 영어를 못하므로 스타인이 나의 영어통역을 재통역을 해야만 했다. 재무대신이 말한 요지는 이러하다.
“조선이 요청한 제안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1. 군사 교관은 파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2. 고문관 문제는, 서울에 있는 우리 공사관 직원을 늘릴 수 있습니다. 제위께 도움이 될 것입니다.
3. 조선의 재정 상황을 조사하기 전에는 차관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조선의 재정은 관세 수입이 대부분이므로, 러시아가 관세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야 차관에 대한 보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국왕 경호 문제는 조선의 왕이 자신을 지킬 만큼 충분한 의지가 없는데, 어떻게 다른 나라가 그분을 (외국의 적으로부터) 지켜줄 수가 있습니까? (옳소, 옳소!) 내가 그분의 입장이라면 대원군부터 시작해서 나의 적들을 모두 척결할 것입니다.”
오후 2시경 숙소로 돌아왔다. 스타인이 내게 말하기를, 비테가 자기에게 살짝 알려주는바, 조선 국왕이 자기 정적들을 자기 손으로 처단할 힘조차 없는데 어떻게 다른 나라 사람이 그를 보호해 주겠느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맞다, 맞아!) 비테의 말은 매정하고 굴욕적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정말로 그렇다.
저녁 10시. 오늘은 모스크바의 홈스키 씨 저택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다. 트루프니코프스키 레인의 파바르스카야로 42번지(현재 정부기념물 표시건물 15호. 1896년 조선사절단이 처음 머물렀던 임시공관이며, 지금은 아프가니스탄 공사관임-옮긴이)에서 19일 동안을 지낸 것이다. 우리는 참 행복하게 지냈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그 집에 있는 27명의 하인에게 메달과 사례금을 나누어 주었다. 많게는 150루블에서 적게는 15루블까지. 모두 1140루블이 들었다.
6월 8일, 월요일.
사절단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다
아침 6시에 일어났다. 8시30분, 일반 열차칸에 달린 특별차가 우리 일행을 태우고 떠났다(중략). 모스크바 시각으로 밤 12시45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전혀 날이 저물 기색이 없었다.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황혼(黃昏)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알고 왔더라면 아무도 이곳에서 여름밤을 자면서 지낼 수 없었으리라. 12시30분인데도 어둠이 내리지 않는 백야의 감동은 내게 신선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곧장 스타인 부인(스타인의 어머니) 집으로 갔다. 그 집은 우리가 매달 150루블 내고 빌린 집이다. 매우 아름다운 집으로 방이 많지 않았다. 두 명의 김씨, 김득련과 김도일을 데리고 자게 생겼다.
6월 12일, 금요일.
맑은 날씨. 어제보다는 덥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난 며칠 동안 우리가 찾아간 곳은 동물원과 식물원이다. 민영환 공은 좀 괴팍하고 예민해서 아주 마땅찮은 모습을 할 때가 있다. 그는 스타인과 내가 자기에게 불만스러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오늘 아침만 해도, 내가 로바노프 왕자에게 보낼 다섯 가지 제안이 담긴 제안서를 영어로 쓰자고 했더니, 민영환 공은 스타인이 이미 외무성에 제출한 바 있는 메모에다 다섯 가지 조항을 더 넣은 사본을 만들어 로바노프 왕자에게도 보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스타인이 즉석에서 이의를 제기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타인이 쓴 문서는 카프니스트 백작과 외무대신에게 보내는 개인 메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타인은 민영환 공에게 이런 대안을 제시했다. 만일 민 공이 다섯 가지 제안을 한문으로 써 그 문서에다 ‘사절단 인장’을 찍어서 공식 문서로 만든다면, 그는(스타인) 그 내용을 러시아어로 번역할 것이며, 그러면 아무도 자신을 억측하거나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중략).
마지막 결론은, 의심할 여지없이 내가 통역을 잘못했거나 잘못 전달해서 악운(惡運)의 근원이 되었다는 고마운 말씀도 넌지시 비쳤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손희영(孫喜永)에게 화를 내지 않고 일을 시키고 믿어주기까지 하면서, 유머러스하게 대해준 것밖엔 없다. 확실히 민 공은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를 즐겁게 해주려면 의지나 감각을 접어놓고 대해야 할 것이다.
나는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언짢은 일들이 생기는 것을 피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모든 일을 양보했다. “좋습니다. 존경하는 전권공사님, 저도 공사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김도일이 통역하게 하십시오. 난 내 할 바를 다했으니 잔디밭에 가서 낮잠이나 자겠습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다가도, 이건 못난 짓이라 생각하고 만다. 사절단 안에서 내 역할을 대신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스타인의 동생, 손희영과 점심식사를 같이한 다음, 유명한 세인트 아이작 성당에 들어갔다. 성당은 알렉산드리아 공원과 마주 바라보는 해군성 왼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입구에서 관리인에게 1루블을 내고, 우리는 500계단을 밟고 올라가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330피트 높이에서 펼쳐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의 경관은 정말로 대단했다.
스타인이 어느 날 내게 재무대신 비테 씨는 외교협상에 수완이 있는 조선 관리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내가 원한다면 그 관직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맙소사, 안 됩니다. 스타인 씨! 상감 같은 상전 밑에서 지원에 대한 확신도 없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재하는 관리가 된다면, 굶주림을 면할 사람이 없을 테고－나 또한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1년 정도 러시아에 더 머물면서 러시아어나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싶습니다.
6월 13일, 토요일.
오전에 맑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민영환 공은 파스콤 장군, 플랑콘 씨, 스타인에게 줄 선물을 사는데 거의 1000루블을 썼다. 나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후 1시30분에 민 공과 나는 로바노프 외무대신을 만나러 갔다. 오후 늦게는 날씨가 아주 서늘했다. 자러 들어가기 전에 스타인과 나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스타인: 모든 문제는 김도일이 저지른 것 때문에 일어났어요. 그가 비밀문서에서 영어를 복사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에 본 적이 없는 영어 문자가 전보 내용에 들어 있더군요. 그걸 못 보셨소?
윤치호: 전혀 본 적이 없는데요. 사절단과 서울 간의 의사 전달은 내게는 비밀이라오.
스타인: 웃기는 얘기군요. 사절단의 중요한 간부인 당신이 그 일에서 제외되다니! 몹시 속상하시겠어요. 내가 보기에는 침착하게 참아내고 있지만 말입니다.
윤치호: 맞아요.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참아야지요. 이런 일은 조선에선 보통 있는 일이지요. 확 공개할 것이냐, 비밀로 덮어둘 것이냐 하는 문제는 늘 생긴다오.
6월 14일, 일요일.
매우 추운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오늘 아침 민영환 공이 한자와 아라비아 숫자로 된 전보문을 스타인에게 번역해 달라고 한다. 왜 그럴까? 내가 스타인보다는 한자를 더 잘 알고 아라비아 숫자도 스타인만큼은 아는데, 내가 알아서는 안 될 내용인 모양이다(중략).
일행은 예카테리나 2세가 여름에 지내던 궁전을 방문했다. 방들은 각기 다른 색깔로 장식하여 이름을 붙였는데, ‘초록빛 기둥의 방’ 또는 ‘초록색 기둥의 침실’이라고 부른다. 중국실에는 중국화를 그린 벽지로 도배해 놓았다. 가장 고풍스런 방은 앰버룸(Amber room)이다. 식탁과 벽마다 호박(琥珀)으로 장식해 놓았다. 비할 데 없이 아름답고 값비싼 장식이 수도 없이 많다(중략).
짜르빌은 황제 가족들이 여름에 와서 지내는 여름별장 마을이다. 12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고 한다. 넓고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와 전등 불빛, 헤아릴 수 없이 늘어서 있는 가로수 그늘이 있는 여름별장이다. 플랑콘 씨 댁에서 멋진 만찬을 들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다른 마을에서 본 경찰관들은 허리에 칼을 차고 때로는 권총도 지니고 다닌다.
《상류사회의 귀부인》을 마저 읽었다. 내가 즐겁게 읽는 정통 역사 소설이다(윤치호는 사회진화론의 창시자인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 정학(Social Statics)》 《심리학 원리》 등의 저서에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옮긴이).
6월 16일, 화요일.
덥지만 상쾌한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오후 2시에 민 공과 나는 아시아국장 카파니스트 백작을 만나러 외무성으로 갔다(중략). 민영환 공은 우리의 요구 제안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답변을 문서로 써달라고 요청했다. 민 공은 기분이 매우 침울해 구경을 하러 갈 마음도 내키지 않은 듯했다. 그의 한숨소리만 온 집안에 흘렀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흔쾌히 성사되지 못한 것이 무능한 탓이라고 자책하기 시작했다. 그건 잘하는 일이다. 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전혀 심각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는 그가 선호하는 유교적인 겸손을 맘껏 표현하는 것뿐이다. 단지 내가 바라는 건, 잘못된 오명을 내게 뒤집어씌우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입으로만 하는 협상처럼.
6월 25일, 목요일.
아름다운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이것저것 그리고 전부 다 적는다. 나의 경우,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온 후에 괴로운 것은 사생활에 방해를 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내 방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이래 나는 이 괴로움을 잘 견뎌야만 한다. 스타인의 조그만 방에 가끔 찾아갈 때 외에는 이곳에서 내 사생활이 보장된다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중략).
민 공은 러시아의 드넓은 숲과 그렇게 좋지도 않은 대로(大路)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참 좋은 현상이다. 그가 숲의 중요성과 좋은 길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기쁘다. 그런데 그는 숲과 가로와 넓은 길을 개량할 수 있는 책에 대해 너무 깊이 몰두해 있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숲과 도로에 관련된 책들을 구해달라고 끈질기게 졸라댄다. 나는 그에게 러시아에서 나온 책들은 조선의 여건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러시아에서 출간한 이 책을 조선어로 번역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산림 개발계획은 우선 조정이 안정되고 분야별 전문가들이 계약한 교범에 따라 추진하는 것이지, 단지 몇 권의 책을 읽은 것만으로는 도로포장이나 나무 한 그루도 자라게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책들을 구해야만 했다.
6월 30일, 화요일.
더운 날씨에 소낙비 오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민영환 공에게는 건의하거나 조언하기가 어렵다. 그는 잘되는 일이든지 까다로운 일에 대해 끝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준 적이 없다. 누군가 조언을 하면, 그는 한숨부터 들이쉬고 내쉬면서 조언한 사람을 비난하고 투덜거린다. 한순간도 그 일의 배경이나 건의한 사람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뜻을 헤아려보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일찍이 굉장한 감각과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이를 믿고 있다고 말했다면, 민 공은 내 이론을 두들겨서 산산조각낼 사람이다. 외무대신 로바노프가 민 공에게 5개 조항의 친서에 대한 대답을 보내왔다. 그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상감은 원하는 기간만큼 러시아 공사관에 체류할 수 있다.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관에 경비병을 한 명 배치한다.
2. 군사 교관에 관해, 러시아 정부는 경험 있는 고위 관리를 서울에 보내 그 문제에 관해 조선 정부와 협의하도록 한다.
3. 서울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 산하에 두 명의 신뢰할 만한 관리를 고문관으로 파견한다.
4. 차관 문제는 조선의 재정 조건과 요구사항을 충분히 파악한 후에 고려해 볼 것이다.
5. 러시아는 조선의 지상 통신선을 연결하는 사안에 동의하며,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가능한 한 조력할 것이다.
7월 4일, 토요일.
추운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침 9시30분 포스드니프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공사관 사무국의 관리이다. 그의 동생은 몽골 언어교육대학의 학장이다. 내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더 머물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그 대학에서 조선어를 가르칠 수 있는지 내게 제안했다. 연봉 1000루블을 지급할 것이며, 동시에 그 연구소 안에 내 개인의 학습 편의도 제공하겠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1. 나는 수업료를 내더라도 불어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오랫동안 머물고 싶다.
2. 나 자신이 대학에서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3. 나는 아직 사절단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랬더니 그가 러시아 문부성에서 조선 정부에 보내는 초청장을 써줄 터이니 귀국했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올 만한 여건을 찾아보면 어떠냐는 것이었다.
7월 5일, 일요일.
비 오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늦게 기상. 오후 2시에 민 공이 로바노프 외무대신을 만나러 갔다. 내게는 알리지 않았다. 면담 날짜는 이미 며칠 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으나, 민 공이 나와 동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았다. 오늘 예상대로 김도일이 민 공을 모시고 갔다. 잘된 일이다. 민 공은 자기를 위해 통역할 사람을 선택할 전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옹졸하다. 다시 말해 한 인간을 이렇게 비신사적으로 다루다니 말이다. 내 종교적 신념과 내가 받은 교육 이념은 앙갚음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서울을 떠나기 전부터 내내 최선을 다해 민 공을 보필하며 협조해 오고 있다. 그런데도 나를 반신반의하고 있으니 전적으로 믿지 않는 것만도 못한 옹졸한 처사이다.
가장 치밀한 계획이 민 공의 행동에 이미 나타나 있었다. 그는 하루 이틀 전에 받은 전보문에 전하의 밀서에 따라 중요한 협상 시에는 김도일에게 통역시키라는 훈령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민 공은 내게 그 내용을 말해주어야 했다. 우정으로서가 아니라 예의상으로라도 말이다. 민 공은 우리 상감님의 특성을 많이 닮은 것 같다(당시 조정 대신들과 러시아 공사관의 김홍륙이 윤치호의 역할을 철저히 견제했다-옮긴이).
7월 7일, 화요일.
시원한 소나기가 자주 내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민 공과 스타인 사이에 재미있는 대화가 오갔다.
스타인: 내가 사흘 동안 부지런히 다니면서 민 공이 여러 공장을 방문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민 공께서는 재무대신에게 공장들을 방문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내셨더군요. 민 공이 대신들에게 편지를 보내실 수 있다는 것은 나도 알지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민 공이 재무대신에게 거절 편지를 보내셨으면 내게도 알려주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민영환: 나는 스타인 씨에게 두 가지 일을 불평해야겠소. 첫째는, 몇 주 전에 나는 화초와 나무의 종자를 구하려고 애쓰고 다녔지요. 스타인 씨는 내게 식물원을 알려주면서도 나와 함께 가지 않았지요. 김도일 군이 통역했습니다만, 그가 조선말이 서툴러서 그 종자를 어디 가서 구해야 하는지를 내게 확실하게 말해주지 못했소.
그 뒤로 나는 농림대신으로부터 당신이 내게 알려주지 않았던 임업학교와 미술관이 어디 있는지를 알았소. 당신은 내게 이 도시 안에서 관심 있게 볼 만한 데를 한 군데도 보여주지 않았소. 그래서 내가 며칠 전에 재무, 내무, 교통대신들에게 정부 산하에 있는 가볼 만한 연구기관들을 보여달라고 부탁한 것이오.
둘째로, 당신은 내 감정을 상하게 했소. 내가 로바노프 대신에게 쓴 다섯 가지 요청 제안서를 적은 것에 사절단 도장을 찍어야 한다고 권했을 때요. 당신이 외교부에 보내는 메모를 적었을 때는 내게 사절단 도장을 찍으라는 말을 하지 않더군요. 내가 로바노프 대신에게 조선에 영향을 주는 러일조약의 대책 없는 조약에 대해 짧은 메모를 보낼 때도 직인을 찍으라는 말을 안 했고요.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내가 로바노프 대신에게 우리가 제안한 다섯 가지 조항문을 적었을 경우에만 사절단 직인을 찍으라고 했소?
스타인: 민 공이 내게 무얼 요청하셨든지 간에 나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일이 가능해지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내가 민 공이 가고 싶은 곳에 함께 가지 않았다면, 그것은 나의 외교부 안에서의 직분이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화초 씨만 해도 그렇습니다. 민 공은 내게 그 종자를 사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런 씨앗은 아무 데서라도 구할 수 있지요. 그러나 민 공께서 원하는 만큼 구해드리지 못한 것은 죄송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외교부에 보내는 문서에 사절단 직인을 찍게 한 건에 관하여는 내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카파니스트 백작에게 쓴 쪽지는 전적으로 저의 개인적인 메모였으며, 그 내용은 민 공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만한 것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내 개인 문서에 민 공의 직인을 찍을 수 없습니다. 민 공께서 외교부에 보낸 쪽지 －아마도 러일조약 내용이겠지요－ 그것은 엄밀하게 민 공의 사신(私信)입니다. 그 내용이 민 공의 개인 의견에 불과한데, 사절단 직인을 찍음으로써 외교적으로 분규나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렇지만 외교부가 민 공의 사신 문서를 소홀하게 다루지 않도록 단단히 부탁했습니다.
민 공은 몸에 밴 완고한 태도로, 이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민 공은 내게 “스타인이 관인을 찍지 말라고 한 것이 잘못 아닌가”라고 물었다. 나는 민 공 전하에게, “그 건에 있어서는 스타인이 추호도 잘못된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내 대답에 역정이 난 민 공은 조롱이 섞인 자기 비하의 말을 한숨을 섞으며 말했다. “그렇군, 나 혼자만 잘못했다는 말이로군.” 그러고는 언제나 그랬듯이 같은 결론에 이르는 대화를 하고, 서로 통하는 고백을 하고, 화해를 했다. 스타인은 정중하고 당당하게 소신대로 말했지만, 민 공의 말에 마음이 상한 듯했다.
7월 11일, 토요일.
맑고 상쾌한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민 공은 애초부터 김도일을 그의 전속 통역관으로 선임했어야 했다. 그나마 민 공이 미국에서 내게 친절하게 말해준 것은, 전하로부터 모든 중요한 협상 시에 김도일을 통역관으로 쓰라는 훈령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처음부터 사절단에서 제외되었다 해도 나는 불평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민 공은 김도일이 조선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재치도 없으니 그를 위해 통역을 해달라고 간청했다. 내가 완곡하게 사양했음은 물론이다. 그랬더니 갑자기 한마디 양해도 없이 나를 사절단 직무에서 완전히 걷어차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부터 무엇을 하면 좋을까?
1. 어떤 특정 사건을 지적하면서 이번 일에 대한 해명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방법이 싫다.
2. 아니면 내가 조용히 사절단을 떠나서 나 자신만의 길을 가는 일이다. 내게 대학에서 조선어 강의를 해달라고 초청한 일을 수락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상해에 있는 내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다.
3. 이 모든 일을 괴롭더라도 인내로 전력을 다해 이겨내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이 여정이 막을 내리는 일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으면서 저녁나절을 즐겁게 보냈다. 새벽 1시에 취침했다.
7월 14일, 화요일.
아름다운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정오 12시에 민 공과 두 김씨(김득련과 김도일-옮긴이), 그리고 스타인 형제와 나는 발틱 정거장에 급히 뛰어가 피터호프로 떠나는 12시40분 기차를 탔다. 특별 마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축하연을 주관하는 의전관이 우리를 맞아 정거장에서 피터호프로 경호하며 안내했다. 뉴 피터호프에 오후 1시30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마차에 탄 채 궁전 밖으로 나와서 대황궁을 향해 달렸다. 그러고는 지금 황제가 머물고 있는 소황궁으로 들어갔다.
오후 2시15분. 우리가 황제를 알현하려고 들어서기 직전, 민 공은 김도일만 데리고 들어가면서 나와 김득련은 문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의전관이 우리 모두를 안으로 들어가라고 안내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방이 황제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알현하는 황제의 개인 서재임을 알아차렸다. 민 공은 내가 그 서재에 들어선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는 주섬주섬 상감 전하로부터 온 메시지를 꺼냈다. 그 메시지는 황제 폐하에게 감사하는 내용이었다. 더 흥미 있는 것은 러시아가 조선의 복지(福祉)에 간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다음으로 더 재미있고 놀라운 것은 민 공이 한 말이다.
“제가 늘 로바노프 대신께 말씀드렸듯, 우리 전하께서 명례궁으로 환궁하시게 되어 기쁜 일입니다.” 그때 민 공이 뒤돌아 나를 보았다. 그때 그의 대경실색(大驚失色)하는 표정, 아이가 몰래 훔쳐 먹다가 들켰을 때 멋쩍어하는 듯, 참담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는 다시 ‘물고기 씨’와 내게 잠깐 나가 있으라고 한다. 그러지요, 그렇게 할 수밖에요. 나의 피가 분노로 끓어올랐다. 내 아버지가 상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지 않았던가(1882년 임오군란 때-옮긴이). 상감이 유폐되었을 때(1895년 춘생문 사건 때-옮긴이), 나는 상감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전하에게 명례궁으로 환궁하시도록 제일 먼저 진언한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니었나?
지금까지 나는 민 공에게 조선의 정치에 대한 나의 깊은 생각마저 말해오지 않았던가? 이제 김도일에게는 조정의 비밀을 털어놓으면서도 나를 완전히 따돌리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만일 민 공과 어지신 전하가 나를 불충한 사람으로 의심한다면, 그런 언어도단인 대우가 그들의 마음을 냉정하게 만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슬픔과 분노가 치민다. 반 시간쯤 지났을 때, 김득련과 나도 안으로 불려 들어갔다. 방안에 들어서자 나는 황제를 정면으로 마주 바라보게 되었다.
그때 아주 뜻밖에도 황제가 내게 친절한 눈길을 주면서 물었다. “그대도 민 공사와 함께 귀국합니까?” 황제가 묻기에, “예, 폐하” 내가 대답했다. “오데사(Odessa·우크라이나 서남부의 도시-옮긴이)를 경유하나요?” 황제가 물었다. “노선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르세유를 경유할 것 같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오, 그러면, 당신은 바닷길을 택했군요.” 황제가 캐묻듯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내가 대답했다. 황제가 이어 말했다. “중국엔 오래 머물 계획인가요?” “아닙니다, 폐하. 우리는 일주일 정도 머물다가 조선으로 가는 기선을 탑니다.” “노선이 상해, 제후, 그리고 제물포로 가는 거군요?” 폐하가 물었다. “대충은 그렇습니다, 폐하. 하지만 상해에서 직접 제물포로 가는 배도 있습니다.”
황제의 자상한 말씀은 공허한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상처받은 내 심경을 달래주려는 것이었다. 아마도 마지막 알현이 될 이 장면으로 인해, 러시아 황제의 너그럽고 자비로운 모습을 나는 길이 기억할 것이다. 하늘의 축복이 그분에게 임하소서!(중략)
10시22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기차를 탔다. 발틱 역에서 나는 메리 마아크 양과 악수를 하면서 서로 “오르브와(Aurevoir·또 만나요)”라고 인사했다. 희망이 없는 낱말이다! 언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김도일의 말에 따르면, 민 공이 사흘 전에 시베리아 철도 노선으로 귀국하기로 했단다. 내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결국 러시아와 상감과 민영환 공 사이에는 적어도 조선에 관련되는 한, 존중할 만한 비밀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비밀의 장막에서 따돌림당했어도 유감스럽다거나 괘념치 않기로 했다.
7월 15일, 수요일.
아름다운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오후에 아버님과 어머님의 하서를 받았다. 5월 21일에 쓰신 것이다. 편지를 읽으며 잠시 행복에 잠겼다. 민경식, 주석면이 오늘 아침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그들은 저녁 8시경에 우리 사절단 숙소로 찾아왔다. 그들은 4월 4일에 서울을 출발했다. 성기운은 뱃멀미가 심해서 상해에서 바로 귀국했다고 한다.
8월 1일, 토요일.
아주 덥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오후 1시에 국립 에르미타쉬 미술관과 겨울궁전을 관람했다. 두세 시간 안에 진귀하고 현란한 작품들을 훌쩍 지나가며 힐끗 감상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란다. 이 미술관에는 혼자서 다시 방문해야겠다.
8월 7일, 금요일.
춥고 소낙비 오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오늘 아침에 민 공의 방에서 모종의 비밀 회담이 문을 잠근 채 진행됐다. 민 공과 두 김씨와 이 모든 비밀 회담 내용을 알아둘 필요가 있는 사동이 참석한 것이다. 나 혼자 외톨이가 되었다. 마치 나를 조선을 염탐하는 첩자로 여기며 그들은 비밀 계획을 짜고 있다. 아침 내내 비통함에 잠겨 지냈다. 누구한테 나의 이 고뇌를 덜어달라고 해야 할까?
8월 13일, 목요일.
춥고 비 오는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처럼 추운 날씨가 상해의 겨울 같다. 민 공과 나 사이의 관계가 약간 개선되었다. 아마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내가 민 공 일행과 함께 가지 않고 뒤에 남겠다고 한 결심이 작용한 것이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두 사람이 불편하게 두 달씩이나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긴 여행을 함께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민 공과 조선 장기(將棋)를 두는 일이다. 장기판은 우리가 관계 개선을 다짐하려는 노력과 마음가짐으로 만나는 중간 마당 역할을 해준다.
오후 4시에 일본 공사관의 해군 무관인 야시로를 방문했다. 만나자마자 그가 입을 연 첫마디는 “굉장히 많은 러시아군 교관들이 조선으로 간다지요?”였다. 그래서 내가 대답해 주었다. “단지 한 사람만이 러시아 정부의 군사교관으로 갑니다.” 그러자 그 해군 장교 신사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귀국의 전권공사가 조선 정부에 ‘만사 잘 되어갑니다’라고 전보를 치셨다지요?” 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글쎄, 나는 민영환 공이 그런 전문을 보냈는지 몰랐는데요.” 그러자 야시로는 내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부인하는 말이 의심쩍다는 듯 다시 말했다. “아, 조선 내각은 어떤 비밀도 지키기 힘들 겁니다. 우리 일본은 조선 조정이 무얼 하고 있는지 훤히 알고 있으니까요.” 만사가 그들의 뜻대로 되어가는구나!
야시로는 유럽에서 교육을 받았을 텐데도, 일본인 특유의 경박한 국민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천박한 근성을. 그건 확실히 나쁜 버릇이다(중략).
나는 지난밤에 나의 감상적인 작별을 표현하는 한시를 4수 지었다. 운율을 맞춘다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알게 될 때까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시를 지었다. 민 공과 ‘물고기’ 씨가 내가 운을 잘 맞춰서 지었다며 오늘 아침에 칭찬해 주었다.
삼월 봄날 저녁에 서울을 떠났는데(三春欲暮離漢城)
어느덧 서늘한 가을바람 소리 이네(俄都凉風見秋聲)
무거운 서양배 타고 우의를 다짐하며(重洋同舟敦友誼)
남북 길 따라 깊은 정이 드네(南北殊路信愁情)
나의 학문 이 변방에서 싹틔워(我留語學開芽塞)
임금께 돌아가 애써 문명 알리세(君歸努力輔文明)
매화 필 때 만날 약속(梅花時節相逢約)
촛불 아래 잔 들어 해로하리(盃剪燭話平生).
민 공이 오늘 아침에 내게 보기 드물게 감동하는 태도를 보였을 때 감사하는 마음이 일었다. “불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보람이 있으리라 생각하오. 큰 성공을 거둘 재능을 타고났소. 윤 참판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소. 여러 해 동안 예술을 연마할 기회도 없었잖소! 불어 공부도 열심히 하시오.”
8월 14일, 금요일.
시원한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난밤에 잘 쉬지 못했다. 오늘 아침에 민 공에게 내가 프랑스로 가기로 결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나는 시베리아를 방문하게 될 아주 좋은 기회를 포기했다. 내 기호를 만족시켜 줄 만한 분위기가 있는 시베리아를. 무엇 때문인가? 정리해 보아야겠다. 기왕에 시작한 불어 공부를 마무리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도 돈도 내 재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렇다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마냥 눌러앉아 있을 여유도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가능하면 한두 달 안에 불어 공부를 마쳐야만 한다. 그러니까, 파리나 마르세유 두 군데 모두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것보다는 낫다.
사랑하는 아내 시엔숭에게서 5월 30일과 6월 15일에 쓴 편지를 받았다. 구구절절 사랑이 가득하다. 아내의 편지는 나를 기쁘게도 하고 서글프게도 한다. 내가 결혼했을 때, 나의 방랑생활은 끝나고, 가족들과 생활하며 정착하리라 생각했었지. 그런데 계속 이어진 이 격랑의 세월이라니!
8월 16일, 일요일.
비 오고, 시원한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저녁식사 후 민 공과 김득련과 나는 내게는 마지막이 될 아이슬란드를 드라이브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매우 춥고 비까지 몹시 내렸다. 가스등과 전등 불빛이 네바 강둑과 가로를 따라 아름답게 빛난다.
전기불빛 그을음에 잠 못 드는 거리(煤電爭光不夜城)
가을비에 멀리서 저녁 종소리(秋雨遠濕暮鐘聲)
파도 같은 내 반생 언제나 잠잠할까(半生風波何時靜)
한 줄기 눈물이 애간장에 서리네(一點淚傷九曲情).
8월 18일, 화요일.
해가 나고 맑은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오늘 아침에 민 공은 내게 100루블을 주는 등,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인다. 아주 적절한 시기에 내게 큰 후의를 베풀었다. 굉장한 적막감이 밀려온다.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은 절실한 마음도 나지 않을 정도로. 아무튼 불행한 느낌이다.
사랑하는 아버님과 어머님께 상서했다. 김득련에게 편지를 맡겼다(중략). 오후 6시에 저녁식사를 했다. 오후 7시에 우리의 카비네스키 숙소를 떠났다. 민 공과 두 김씨와 스타인 동생도. 스타인이 바르샤바 정거장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민 공은 내게 샴페인 한 잔을 전별주로 사주었다. 이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다. 저녁 8시30분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여, 잘 있거라! 러시아 철도 2등칸은 아주 괜찮았다.
8월 19일, 수요일.
비 오고 시원한 날씨. 러시아 철도 기차
하루종일 생각에 잠겨 여행했다(중략). 그렇다. 나의 러시아 여행은 내 인생의 역사에서 쓰라린 사건의 한 장면이다. 하지만 그게 누구의 잘못이랴? 말할 것도 없이 나의 관료적인 우월감에서 오는 오만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것과 편견이 절대적인 원인이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그렇기를 바란다!⊙
1896년 6월 8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을 마친 조선사절단 일행은 모스크바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했다. 윤치호는 숙소에서 자정이 넘도록 황혼빛 감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白夜) 속에 레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탐독하며 감동에 젖는다. 그가 읽은 책은 1873년 영문 초판본이었다. 사절단이 러시아에 머무는 동안 조선의 《독립신문》 외국통신란(1896년 6월 18일)에는 ‘아라사 황제 즉위례 기사… 일본 특사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후작은 톨스토이 백작이 맞았고, 조선 특사 민영환은 친왕 배실칙코프가 맞더라’는 기사가 났다.
일본 특사를 영접한 사람이 혹 《전쟁과 평화》의 작가인 레오 톨스토이 백작인 줄 알았으나, 그 시각 톨스토이는 그의 고향 농장에서 새 작품 《하지 무라트》를 구상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그 당시 러시아에 두 사람의 톨스토이 백작이 있었던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조선 주둔 제1사령관을 지낸 야마가타 일본 대표를 영접한 또 한 명의 톨스토이는 이반 이바노비치 톨스토이 백작(Ivan Ivanovich Tolstoy·1858~1916)이었다. 정치가이자 고고학자이며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인 그는 1893~1905년 비테(Witte) 내각의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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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자신의 영지에서 러시아 최초의 컬러사진을 찍은 작가 레오 톨스토이 백작. 우) 일본대사 야마가타를 영접한 정치가 이반 톨스토이 백작. |
6월 12일 재무대신 비테는 비공식적으로 윤치호에게 러시아 주재 공사를 제안했으나 윤치호는 사양한다. 7월 4일에는 총리 담당관 포스드니프(Posdnyff)가 찾아와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에서 조선어 강의를 맡아달라고 했고, 7월 17일에는 정식 초청장과 연봉 1000루블을 제안한다. 윤치호는 생각 끝에 문부대신 돌로코프(Dolokoff) 백작에게 조선어 강의를 사양한다는 답신을 보낸다(8월 6일자 일기). 이듬해, 김병옥(金秉玉)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왕립대학교 동양어학부의 첫 번째 조선어 교수로 부임한다.
사절단 일행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蕩子)〉가 걸려 있고, 엘 그레코의 그림, 안토니오 카노바의 대리석 조각 작품 〈에로스와 프시케(Eros and Psyche)〉의 원작이 있는 에르미타쉬(Hermitage) 미술관을 구경한다(8월 1일). 에르미타쉬 미술관은 로마노프 왕조의 예카테리나 2세(1729~1796, 재위 1762~1796)가 지은 왕궁이다.
유럽에 불어닥친 계몽사상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예카테리나 여제는 예술 작품에 대한 열광적인 후원자로서 많은 회화(繪畵)를 수집하여 세계적인 에르미타쉬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러시아 전역에 건물을 건립해 학술기관(아카데미), 저널 출판, 도서관으로 사용하게 하였으며, 서유럽의 많은 건축가를 초청하여 건축 붐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신고전주의(Neo-classicism)가 들어온다. 에르미타쉬 박물관은 파리의 루브르, 런던의 대영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며, 이곳에 소장된 유물만도 270만여 점에 달한다. 에르미타쉬는 그 이름처럼 우리 영혼의 휴식공간이며 은둔처가 되리라.
한편, 민영환 공은 날이 갈수록 세상 짐을 다 짊어진 어린양 예수처럼 고통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타인 부인의 집을 숙소로 정한 다음, 스타인의 제안서 작성 건으로 언쟁이 벌어진다. 이튿날은 사절단 파견의 목적인 임금의 친서(親書)를 로바노프 대신을 통해 니콜라이 황제에게 전달하고 요청한 제안에 대해 답을 듣는다(6월 5일, 6일자). 며칠 후 로바노프 대신에게 5개 제안서에 대한 추가 회답을 받는다(6월 30일).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이 제안서에서 가장 핵심적인 300만 엔의 차관 요청과 궁궐을 지킬 병사 요청에 대해 러시아는 모두 기각하였다. 민 공은 낙심하면서도 집요하게 로바노프 대신에게 경비병과 고문관을 요청하였고, 이에 대해 로바노프는 “조선의 왕이 자신을 지킬 만큼 충분한 의지가 없는데, 어떻게 다른 나라 군인이 그분을 지켜줄 수 있습니까”(6월 7일)라는 말로 답한다. 이에 수치심을 느낀 민 공은 주위 사람들만 괴롭힌다.
조선사절단이 제안한 300만 엔의 차관을 받았더라면, 조선은 아마도 지금껏 러시아의 속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당시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열차(TSR) 공사로 인해 조선에 거금을 빌려줄 여력도 없었고, 로마노프 왕조는 그 영향으로 혁명의 불길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신임장에 대한 답을 기다리는 동안, 6월 9일 러시아와 일본 양국은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라는 양국 간 조약을 조선이 감쪽같이 모르게 체결한다.
특명전권공사 민영환도 대관식 참가 기행문으로 《해천추범(海天秋帆)》을 남겼다. 두 사람의 기록을 대조해 보면, 날짜별로 수행한 일이 서로 어긋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보는 관점과 관심사는 전혀 달라 흥미를 자아낸다. 《해천추범》이 정사(正史)로서 격식을 의식한 기록이라면, 윤치호 일기는 자유분방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도 전자가 드러내지 않은 주요 외교 협상의 속사정을 놓치지 않고 적고 있다. 이태진(李泰鎭)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전권공사가 러시아 외무대신 로바노프에게 제안한 다섯 가지 요구사항은 《해천추범》에는 보이지 않는데, 《윤치호 일기》에는 이를 둘러싼 두 사람 간의 의견 교환이 자세히 적혀 있다”고 했다.
민영환은 조선소 시찰이나 해군박물관, 우주박물관이나 첨단 기계를 설비한 천문대 등엔 관심이 없었다. 교화소와 병원을 포함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공공 기관들보다는 농기계에 관심을 가졌고, 이러한 ‘도착하기 전에 녹이 슬어 못 쓰게 될’ 기구들을 비싸게 사들인다.
민 공이 가장 당황했던 장면은 황제 별궁에서 황제를 마지막으로 알현하던 때다. 민 공은 김도일(金道逸)만 데리고 들어가며, 윤치호와 김득련(金得鍊)은 문밖에서 기다리게 한다. 그 사정을 몰랐던 러시아 의전관은 윤치호도 입장을 시킨다. 윤치호가 서울을 떠나기 전 이미 임금에게 명례궁(明禮宮·덕수궁의 옛 이름)으로 가시도록 권한 사실을 민영환 공은 마치 일급비밀이나 되는 듯 니콜라이 황제에게 이야기하고 만다. 그 순간, 민영환은 윤치호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윤치호 일기에는 민영환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눈앞에 펼쳐지듯 선명하게 그려진다(7월 14일). 민영환은 임금의 거처를 윤치호에게조차 비밀로 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고매한 두 선비는 마음을 열고 장기를 두었으며, 윤치호는 멋진 한시를 지어 동양문화에 어두운 인물이 아님을 보여주어 일행을 깜짝 놀라게 하는 한편, 화해주를 나누기도 한다(8월 13일).
윤치호는 여전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미는 좋은 조건들과 현실적인 처지 사이에서 갈등한다. ‘천국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염세주의 사고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결국은 프랑스에서 불어 공부를 더 할 생각으로 모두 뿌리친다. 그동안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민영환과 일행을 떠나 혼자서 파리를 향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다. 민 공은 윤치호에게 전별금으로 100루블을 주고, 전별주로 샴페인 한 잔을 함께 마신다. 《해천추범; 민영환의 세계일주》에는 1병을 사주었다고 하지만 윤치호는 한 잔만 대접받았다고 일기에 적고 있다.
제2사절단원 민경식(閔景植), 주석면(朱錫冕)이 7월 1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윤치호를 완전히 배제한 채 모종의 임무를 띠고 온 듯했다. 민영환 공은 친러파인 이들이 공식사절단과는 별도로 협상할 것을 예상하고 특사직을 맡지 않겠다고 한 듯하다. 실제로 이들은 공식사절단이 떠난 후에도 수개월 더 체류하며 러시아에 각종 이권을 넘겨주는 협약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 주요 등장인물 ● 웨베르: 1885년 초대 러시아 공사로 부임. 고종 임금이 가장 의지했던 외교관. ● 스페이어: 웨베르 후임으로 부임한 러시아 공사. ● 이범진: 법무대신. 주미공사와 러시아공사 역임. 이위종의 부친으로 아관파천을 주도. ● 김홍륙: 함경도 천민 출신. 러시아공사관 통역관. 간계로 외부협판 진출하려다 윤치호의 반대로 좌절. 임금과 세자를 독살하려다 발각돼 참수당함. ● 민영환: 대관식 특사. 민겸호의 아들이며 임금의 외사촌 동생. 을사조약을 비관해 자결. ● 비테: 러시아 재무대신. ● 스타인: 러시아공사관 영사. 사절단 보좌관으로 수행함. ● 파스콤: 조선사절단을 영접하는 러시아 장군. ● 플랑콘: 러시아 외무성 의전관. ● 로바노프: 황족. 외무대신. ● 사절단원: 특사 민영환(35세)/수원 윤치호(31세)/참서관 김득련(46세)/통역관 김도일(20세 전후)/ 개인비서 손희영(10대 소년). ● 제2사절단: 단장 성기운(49세)/수원 주석면/수원 민경식. 그들의 임무가 무엇이었는지 불분명함. |
6월 5일, 금요일.
아름다운 날씨. 소낙비 오다. 모스크바
오후 2시에 민영환 공과 나는 외무대신 로바노프 왕자를 만나러 갔다. 다음은 우리가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다.
민영환: 친서를 제출하기 위해 황제를 알현할 수 있을까요?
로바노프: 민 공의 요청을 황제께 아뢰었습니다. 황제께서 그 조건을 수락하실지 여부는 내가 답변해 드릴 수 없습니다. 황제 폐하의 지침을 받는 대로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민영환: 조선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감안하셔서 제가 귀하에게 내놓는 다섯 가지 제안을 러시아 정부가 받아들여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1. 조선 군대가 믿을 만한 수준으로 양성될 때까지 러시아 군대가 국왕의 경호를 지원해 줄 것.
2. 군대와 경찰의 훈련을 위해 다수의 군사교관을 파견해 줄 것.
3. 궁내부와 내각과 광산과 철도 분야를 지도할 고문관을 파견해 줄 것.
4. 조선과 러시아 사이의 직통 전신을 가설할 것.
5. 일본에서 빌린 국채를 갚기 위해 300만 엔을 차관해 달라 등입니다.
로바노프: 내가 제안서의 요구사항들을 가타부타 지금 답변할 수 없습니다. 각료들과 의논해 심사숙고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황제께서 그 문제에 대해 기꺼이 응답해 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제안서의 요구 조건들을 내게 써주십시오.
민영환: 저는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조선에 가능한 대로 빨리 돌아가 러시아 정부가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지를 조정에 보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로바노프: 우리도 가능한 한 빨리 민 공사에게 회답을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민영환: 부디 그 다섯 가지 조항이 채택되기를 빕니다.
6월 6일, 토요일.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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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렘린궁 안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황제의 종(차르 벨). |
내가 “조선의 어떤 배신자가…”라고 말을 했을 때, 황제는 “대원군 말인가” 하고 되짚어 물었다. 나는 이어 이렇게 말했다.
“조선이 현재 원하는 것은 안정된 정부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자기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지키는 일을 걱정하지 않고 지낸 조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제 조선은 러시아의 힘을 의지하여 굳건한 정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의 동맹은 조선의 관리들 사이에 당혹감을 낳게 할 뿐입니다. 그러한 계약 아래에서 조선은 전쟁을 하든지 평화를 유지하든지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그런 중재에 동의하지 않으실 줄 압니다.”
니콜라이 황제는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안 되지, 안 돼!” 그러면서 러시아와 일본의 동맹이 주는 영향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민영환 공은 다섯 가지 제안을 한 번 더 되풀이하여 말했다. 황제 폐하는 이렇게 대답했다. “짐에게 말한 모든 이야기를 로바노프 대신과 재무대신에게 말씀하십시오. 두 사람이 그 사안을 준비할 것입니다. 민 공은 러시아가 조선을 도와줄 거라고 기대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때 민영환 공이 조선 국왕의 친서를 전달했다. 그것은 웨베르 공사와 스페이어 후임 공사의 헌신적인 협력에 감사하는 내용이었다(두 사람이 동양에 더 오래 체류하도록 윤허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에 대해 황제 폐하는 “말씀해 주셔서 기쁘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6월 7일, 일요일.
더운 날씨.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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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상 최고의 협상가로 손꼽히는 세르게이 비테(Sergei Witte, 1849~1915)는 러시아가 배출한 명재상으로도 기억된다. 그는 러일전쟁 직후 러시아 동정론을 조성, 일본의 전쟁배상금 12억 엔 지불을 거부했다. 사진=Russiapedia 홈페이지 |
“조선이 요청한 제안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1. 군사 교관은 파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2. 고문관 문제는, 서울에 있는 우리 공사관 직원을 늘릴 수 있습니다. 제위께 도움이 될 것입니다.
3. 조선의 재정 상황을 조사하기 전에는 차관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조선의 재정은 관세 수입이 대부분이므로, 러시아가 관세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야 차관에 대한 보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국왕 경호 문제는 조선의 왕이 자신을 지킬 만큼 충분한 의지가 없는데, 어떻게 다른 나라가 그분을 (외국의 적으로부터) 지켜줄 수가 있습니까? (옳소, 옳소!) 내가 그분의 입장이라면 대원군부터 시작해서 나의 적들을 모두 척결할 것입니다.”
오후 2시경 숙소로 돌아왔다. 스타인이 내게 말하기를, 비테가 자기에게 살짝 알려주는바, 조선 국왕이 자기 정적들을 자기 손으로 처단할 힘조차 없는데 어떻게 다른 나라 사람이 그를 보호해 주겠느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맞다, 맞아!) 비테의 말은 매정하고 굴욕적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정말로 그렇다.
저녁 10시. 오늘은 모스크바의 홈스키 씨 저택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다. 트루프니코프스키 레인의 파바르스카야로 42번지(현재 정부기념물 표시건물 15호. 1896년 조선사절단이 처음 머물렀던 임시공관이며, 지금은 아프가니스탄 공사관임-옮긴이)에서 19일 동안을 지낸 것이다. 우리는 참 행복하게 지냈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그 집에 있는 27명의 하인에게 메달과 사례금을 나누어 주었다. 많게는 150루블에서 적게는 15루블까지. 모두 1140루블이 들었다.
6월 8일, 월요일.
사절단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다
아침 6시에 일어났다. 8시30분, 일반 열차칸에 달린 특별차가 우리 일행을 태우고 떠났다(중략). 모스크바 시각으로 밤 12시45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전혀 날이 저물 기색이 없었다.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황혼(黃昏)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알고 왔더라면 아무도 이곳에서 여름밤을 자면서 지낼 수 없었으리라. 12시30분인데도 어둠이 내리지 않는 백야의 감동은 내게 신선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곧장 스타인 부인(스타인의 어머니) 집으로 갔다. 그 집은 우리가 매달 150루블 내고 빌린 집이다. 매우 아름다운 집으로 방이 많지 않았다. 두 명의 김씨, 김득련과 김도일을 데리고 자게 생겼다.
6월 12일, 금요일.
맑은 날씨. 어제보다는 덥다. 상트페테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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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인트 아이작 성당. |
스타인이 쓴 문서는 카프니스트 백작과 외무대신에게 보내는 개인 메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타인은 민영환 공에게 이런 대안을 제시했다. 만일 민 공이 다섯 가지 제안을 한문으로 써 그 문서에다 ‘사절단 인장’을 찍어서 공식 문서로 만든다면, 그는(스타인) 그 내용을 러시아어로 번역할 것이며, 그러면 아무도 자신을 억측하거나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중략).
마지막 결론은, 의심할 여지없이 내가 통역을 잘못했거나 잘못 전달해서 악운(惡運)의 근원이 되었다는 고마운 말씀도 넌지시 비쳤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손희영(孫喜永)에게 화를 내지 않고 일을 시키고 믿어주기까지 하면서, 유머러스하게 대해준 것밖엔 없다. 확실히 민 공은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를 즐겁게 해주려면 의지나 감각을 접어놓고 대해야 할 것이다.
나는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언짢은 일들이 생기는 것을 피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모든 일을 양보했다. “좋습니다. 존경하는 전권공사님, 저도 공사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김도일이 통역하게 하십시오. 난 내 할 바를 다했으니 잔디밭에 가서 낮잠이나 자겠습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다가도, 이건 못난 짓이라 생각하고 만다. 사절단 안에서 내 역할을 대신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스타인의 동생, 손희영과 점심식사를 같이한 다음, 유명한 세인트 아이작 성당에 들어갔다. 성당은 알렉산드리아 공원과 마주 바라보는 해군성 왼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입구에서 관리인에게 1루블을 내고, 우리는 500계단을 밟고 올라가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330피트 높이에서 펼쳐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의 경관은 정말로 대단했다.
스타인이 어느 날 내게 재무대신 비테 씨는 외교협상에 수완이 있는 조선 관리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내가 원한다면 그 관직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맙소사, 안 됩니다. 스타인 씨! 상감 같은 상전 밑에서 지원에 대한 확신도 없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재하는 관리가 된다면, 굶주림을 면할 사람이 없을 테고－나 또한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1년 정도 러시아에 더 머물면서 러시아어나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싶습니다.
6월 13일, 토요일.
오전에 맑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민영환 공은 파스콤 장군, 플랑콘 씨, 스타인에게 줄 선물을 사는데 거의 1000루블을 썼다. 나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후 1시30분에 민 공과 나는 로바노프 외무대신을 만나러 갔다. 오후 늦게는 날씨가 아주 서늘했다. 자러 들어가기 전에 스타인과 나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스타인: 모든 문제는 김도일이 저지른 것 때문에 일어났어요. 그가 비밀문서에서 영어를 복사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에 본 적이 없는 영어 문자가 전보 내용에 들어 있더군요. 그걸 못 보셨소?
윤치호: 전혀 본 적이 없는데요. 사절단과 서울 간의 의사 전달은 내게는 비밀이라오.
스타인: 웃기는 얘기군요. 사절단의 중요한 간부인 당신이 그 일에서 제외되다니! 몹시 속상하시겠어요. 내가 보기에는 침착하게 참아내고 있지만 말입니다.
윤치호: 맞아요.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참아야지요. 이런 일은 조선에선 보통 있는 일이지요. 확 공개할 것이냐, 비밀로 덮어둘 것이냐 하는 문제는 늘 생긴다오.
6월 14일, 일요일.
매우 추운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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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카테리나 궁전(위)과 호박방 내부(아래). 예카테리나 궁전은 표트르 대제가 그의 부인 예카테리나 1세에게 선물한 토지 위에 세워진 석조궁전이었다. 그 후 예카테리나 2세의 통치 기간 중 대궁전의 성당 등 내부의 예술성을 한층 보강했다. 앰버룸은 최상품 호박 7톤으로 사방 14미터, 높이 8미터의 방 전체를 장식, 세계에서 가장 호사스런 방이란 평을 받고 있다. |
일행은 예카테리나 2세가 여름에 지내던 궁전을 방문했다. 방들은 각기 다른 색깔로 장식하여 이름을 붙였는데, ‘초록빛 기둥의 방’ 또는 ‘초록색 기둥의 침실’이라고 부른다. 중국실에는 중국화를 그린 벽지로 도배해 놓았다. 가장 고풍스런 방은 앰버룸(Amber room)이다. 식탁과 벽마다 호박(琥珀)으로 장식해 놓았다. 비할 데 없이 아름답고 값비싼 장식이 수도 없이 많다(중략).
짜르빌은 황제 가족들이 여름에 와서 지내는 여름별장 마을이다. 12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고 한다. 넓고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와 전등 불빛, 헤아릴 수 없이 늘어서 있는 가로수 그늘이 있는 여름별장이다. 플랑콘 씨 댁에서 멋진 만찬을 들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다른 마을에서 본 경찰관들은 허리에 칼을 차고 때로는 권총도 지니고 다닌다.
《상류사회의 귀부인》을 마저 읽었다. 내가 즐겁게 읽는 정통 역사 소설이다(윤치호는 사회진화론의 창시자인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 정학(Social Statics)》 《심리학 원리》 등의 저서에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옮긴이).
6월 16일, 화요일.
덥지만 상쾌한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오후 2시에 민 공과 나는 아시아국장 카파니스트 백작을 만나러 외무성으로 갔다(중략). 민영환 공은 우리의 요구 제안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답변을 문서로 써달라고 요청했다. 민 공은 기분이 매우 침울해 구경을 하러 갈 마음도 내키지 않은 듯했다. 그의 한숨소리만 온 집안에 흘렀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흔쾌히 성사되지 못한 것이 무능한 탓이라고 자책하기 시작했다. 그건 잘하는 일이다. 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전혀 심각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는 그가 선호하는 유교적인 겸손을 맘껏 표현하는 것뿐이다. 단지 내가 바라는 건, 잘못된 오명을 내게 뒤집어씌우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입으로만 하는 협상처럼.
6월 25일, 목요일.
아름다운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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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년 6월 26일자 윤치호 영문일기 원본. 사진=윤경남 |
민 공은 러시아의 드넓은 숲과 그렇게 좋지도 않은 대로(大路)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참 좋은 현상이다. 그가 숲의 중요성과 좋은 길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기쁘다. 그런데 그는 숲과 가로와 넓은 길을 개량할 수 있는 책에 대해 너무 깊이 몰두해 있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숲과 도로에 관련된 책들을 구해달라고 끈질기게 졸라댄다. 나는 그에게 러시아에서 나온 책들은 조선의 여건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러시아에서 출간한 이 책을 조선어로 번역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산림 개발계획은 우선 조정이 안정되고 분야별 전문가들이 계약한 교범에 따라 추진하는 것이지, 단지 몇 권의 책을 읽은 것만으로는 도로포장이나 나무 한 그루도 자라게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책들을 구해야만 했다.
6월 30일, 화요일.
더운 날씨에 소낙비 오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민영환 공에게는 건의하거나 조언하기가 어렵다. 그는 잘되는 일이든지 까다로운 일에 대해 끝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준 적이 없다. 누군가 조언을 하면, 그는 한숨부터 들이쉬고 내쉬면서 조언한 사람을 비난하고 투덜거린다. 한순간도 그 일의 배경이나 건의한 사람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뜻을 헤아려보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일찍이 굉장한 감각과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이를 믿고 있다고 말했다면, 민 공은 내 이론을 두들겨서 산산조각낼 사람이다. 외무대신 로바노프가 민 공에게 5개 조항의 친서에 대한 대답을 보내왔다. 그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상감은 원하는 기간만큼 러시아 공사관에 체류할 수 있다.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관에 경비병을 한 명 배치한다.
2. 군사 교관에 관해, 러시아 정부는 경험 있는 고위 관리를 서울에 보내 그 문제에 관해 조선 정부와 협의하도록 한다.
3. 서울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 산하에 두 명의 신뢰할 만한 관리를 고문관으로 파견한다.
4. 차관 문제는 조선의 재정 조건과 요구사항을 충분히 파악한 후에 고려해 볼 것이다.
5. 러시아는 조선의 지상 통신선을 연결하는 사안에 동의하며,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가능한 한 조력할 것이다.
7월 4일, 토요일.
추운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침 9시30분 포스드니프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공사관 사무국의 관리이다. 그의 동생은 몽골 언어교육대학의 학장이다. 내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더 머물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그 대학에서 조선어를 가르칠 수 있는지 내게 제안했다. 연봉 1000루블을 지급할 것이며, 동시에 그 연구소 안에 내 개인의 학습 편의도 제공하겠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1. 나는 수업료를 내더라도 불어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오랫동안 머물고 싶다.
2. 나 자신이 대학에서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3. 나는 아직 사절단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랬더니 그가 러시아 문부성에서 조선 정부에 보내는 초청장을 써줄 터이니 귀국했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올 만한 여건을 찾아보면 어떠냐는 것이었다.
7월 5일, 일요일.
비 오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늦게 기상. 오후 2시에 민 공이 로바노프 외무대신을 만나러 갔다. 내게는 알리지 않았다. 면담 날짜는 이미 며칠 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으나, 민 공이 나와 동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았다. 오늘 예상대로 김도일이 민 공을 모시고 갔다. 잘된 일이다. 민 공은 자기를 위해 통역할 사람을 선택할 전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옹졸하다. 다시 말해 한 인간을 이렇게 비신사적으로 다루다니 말이다. 내 종교적 신념과 내가 받은 교육 이념은 앙갚음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서울을 떠나기 전부터 내내 최선을 다해 민 공을 보필하며 협조해 오고 있다. 그런데도 나를 반신반의하고 있으니 전적으로 믿지 않는 것만도 못한 옹졸한 처사이다.
가장 치밀한 계획이 민 공의 행동에 이미 나타나 있었다. 그는 하루 이틀 전에 받은 전보문에 전하의 밀서에 따라 중요한 협상 시에는 김도일에게 통역시키라는 훈령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민 공은 내게 그 내용을 말해주어야 했다. 우정으로서가 아니라 예의상으로라도 말이다. 민 공은 우리 상감님의 특성을 많이 닮은 것 같다(당시 조정 대신들과 러시아 공사관의 김홍륙이 윤치호의 역할을 철저히 견제했다-옮긴이).
7월 7일, 화요일.
시원한 소나기가 자주 내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민 공과 스타인 사이에 재미있는 대화가 오갔다.
스타인: 내가 사흘 동안 부지런히 다니면서 민 공이 여러 공장을 방문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민 공께서는 재무대신에게 공장들을 방문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내셨더군요. 민 공이 대신들에게 편지를 보내실 수 있다는 것은 나도 알지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민 공이 재무대신에게 거절 편지를 보내셨으면 내게도 알려주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민영환: 나는 스타인 씨에게 두 가지 일을 불평해야겠소. 첫째는, 몇 주 전에 나는 화초와 나무의 종자를 구하려고 애쓰고 다녔지요. 스타인 씨는 내게 식물원을 알려주면서도 나와 함께 가지 않았지요. 김도일 군이 통역했습니다만, 그가 조선말이 서툴러서 그 종자를 어디 가서 구해야 하는지를 내게 확실하게 말해주지 못했소.
그 뒤로 나는 농림대신으로부터 당신이 내게 알려주지 않았던 임업학교와 미술관이 어디 있는지를 알았소. 당신은 내게 이 도시 안에서 관심 있게 볼 만한 데를 한 군데도 보여주지 않았소. 그래서 내가 며칠 전에 재무, 내무, 교통대신들에게 정부 산하에 있는 가볼 만한 연구기관들을 보여달라고 부탁한 것이오.
둘째로, 당신은 내 감정을 상하게 했소. 내가 로바노프 대신에게 쓴 다섯 가지 요청 제안서를 적은 것에 사절단 도장을 찍어야 한다고 권했을 때요. 당신이 외교부에 보내는 메모를 적었을 때는 내게 사절단 도장을 찍으라는 말을 하지 않더군요. 내가 로바노프 대신에게 조선에 영향을 주는 러일조약의 대책 없는 조약에 대해 짧은 메모를 보낼 때도 직인을 찍으라는 말을 안 했고요.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내가 로바노프 대신에게 우리가 제안한 다섯 가지 조항문을 적었을 경우에만 사절단 직인을 찍으라고 했소?
스타인: 민 공이 내게 무얼 요청하셨든지 간에 나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일이 가능해지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내가 민 공이 가고 싶은 곳에 함께 가지 않았다면, 그것은 나의 외교부 안에서의 직분이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화초 씨만 해도 그렇습니다. 민 공은 내게 그 종자를 사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런 씨앗은 아무 데서라도 구할 수 있지요. 그러나 민 공께서 원하는 만큼 구해드리지 못한 것은 죄송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외교부에 보내는 문서에 사절단 직인을 찍게 한 건에 관하여는 내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카파니스트 백작에게 쓴 쪽지는 전적으로 저의 개인적인 메모였으며, 그 내용은 민 공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만한 것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내 개인 문서에 민 공의 직인을 찍을 수 없습니다. 민 공께서 외교부에 보낸 쪽지 －아마도 러일조약 내용이겠지요－ 그것은 엄밀하게 민 공의 사신(私信)입니다. 그 내용이 민 공의 개인 의견에 불과한데, 사절단 직인을 찍음으로써 외교적으로 분규나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렇지만 외교부가 민 공의 사신 문서를 소홀하게 다루지 않도록 단단히 부탁했습니다.
민 공은 몸에 밴 완고한 태도로, 이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민 공은 내게 “스타인이 관인을 찍지 말라고 한 것이 잘못 아닌가”라고 물었다. 나는 민 공 전하에게, “그 건에 있어서는 스타인이 추호도 잘못된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내 대답에 역정이 난 민 공은 조롱이 섞인 자기 비하의 말을 한숨을 섞으며 말했다. “그렇군, 나 혼자만 잘못했다는 말이로군.” 그러고는 언제나 그랬듯이 같은 결론에 이르는 대화를 하고, 서로 통하는 고백을 하고, 화해를 했다. 스타인은 정중하고 당당하게 소신대로 말했지만, 민 공의 말에 마음이 상한 듯했다.
7월 11일, 토요일.
맑고 상쾌한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민 공은 애초부터 김도일을 그의 전속 통역관으로 선임했어야 했다. 그나마 민 공이 미국에서 내게 친절하게 말해준 것은, 전하로부터 모든 중요한 협상 시에 김도일을 통역관으로 쓰라는 훈령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처음부터 사절단에서 제외되었다 해도 나는 불평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민 공은 김도일이 조선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재치도 없으니 그를 위해 통역을 해달라고 간청했다. 내가 완곡하게 사양했음은 물론이다. 그랬더니 갑자기 한마디 양해도 없이 나를 사절단 직무에서 완전히 걷어차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부터 무엇을 하면 좋을까?
1. 어떤 특정 사건을 지적하면서 이번 일에 대한 해명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방법이 싫다.
2. 아니면 내가 조용히 사절단을 떠나서 나 자신만의 길을 가는 일이다. 내게 대학에서 조선어 강의를 해달라고 초청한 일을 수락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상해에 있는 내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다.
3. 이 모든 일을 괴롭더라도 인내로 전력을 다해 이겨내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이 여정이 막을 내리는 일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으면서 저녁나절을 즐겁게 보냈다. 새벽 1시에 취침했다.
7월 14일, 화요일.
아름다운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정오 12시에 민 공과 두 김씨(김득련과 김도일-옮긴이), 그리고 스타인 형제와 나는 발틱 정거장에 급히 뛰어가 피터호프로 떠나는 12시40분 기차를 탔다. 특별 마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축하연을 주관하는 의전관이 우리를 맞아 정거장에서 피터호프로 경호하며 안내했다. 뉴 피터호프에 오후 1시30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마차에 탄 채 궁전 밖으로 나와서 대황궁을 향해 달렸다. 그러고는 지금 황제가 머물고 있는 소황궁으로 들어갔다.
오후 2시15분. 우리가 황제를 알현하려고 들어서기 직전, 민 공은 김도일만 데리고 들어가면서 나와 김득련은 문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의전관이 우리 모두를 안으로 들어가라고 안내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방이 황제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알현하는 황제의 개인 서재임을 알아차렸다. 민 공은 내가 그 서재에 들어선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는 주섬주섬 상감 전하로부터 온 메시지를 꺼냈다. 그 메시지는 황제 폐하에게 감사하는 내용이었다. 더 흥미 있는 것은 러시아가 조선의 복지(福祉)에 간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다음으로 더 재미있고 놀라운 것은 민 공이 한 말이다.
“제가 늘 로바노프 대신께 말씀드렸듯, 우리 전하께서 명례궁으로 환궁하시게 되어 기쁜 일입니다.” 그때 민 공이 뒤돌아 나를 보았다. 그때 그의 대경실색(大驚失色)하는 표정, 아이가 몰래 훔쳐 먹다가 들켰을 때 멋쩍어하는 듯, 참담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는 다시 ‘물고기 씨’와 내게 잠깐 나가 있으라고 한다. 그러지요, 그렇게 할 수밖에요. 나의 피가 분노로 끓어올랐다. 내 아버지가 상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지 않았던가(1882년 임오군란 때-옮긴이). 상감이 유폐되었을 때(1895년 춘생문 사건 때-옮긴이), 나는 상감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전하에게 명례궁으로 환궁하시도록 제일 먼저 진언한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니었나?
지금까지 나는 민 공에게 조선의 정치에 대한 나의 깊은 생각마저 말해오지 않았던가? 이제 김도일에게는 조정의 비밀을 털어놓으면서도 나를 완전히 따돌리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만일 민 공과 어지신 전하가 나를 불충한 사람으로 의심한다면, 그런 언어도단인 대우가 그들의 마음을 냉정하게 만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슬픔과 분노가 치민다. 반 시간쯤 지났을 때, 김득련과 나도 안으로 불려 들어갔다. 방안에 들어서자 나는 황제를 정면으로 마주 바라보게 되었다.
그때 아주 뜻밖에도 황제가 내게 친절한 눈길을 주면서 물었다. “그대도 민 공사와 함께 귀국합니까?” 황제가 묻기에, “예, 폐하” 내가 대답했다. “오데사(Odessa·우크라이나 서남부의 도시-옮긴이)를 경유하나요?” 황제가 물었다. “노선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르세유를 경유할 것 같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오, 그러면, 당신은 바닷길을 택했군요.” 황제가 캐묻듯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내가 대답했다. 황제가 이어 말했다. “중국엔 오래 머물 계획인가요?” “아닙니다, 폐하. 우리는 일주일 정도 머물다가 조선으로 가는 기선을 탑니다.” “노선이 상해, 제후, 그리고 제물포로 가는 거군요?” 폐하가 물었다. “대충은 그렇습니다, 폐하. 하지만 상해에서 직접 제물포로 가는 배도 있습니다.”
황제의 자상한 말씀은 공허한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상처받은 내 심경을 달래주려는 것이었다. 아마도 마지막 알현이 될 이 장면으로 인해, 러시아 황제의 너그럽고 자비로운 모습을 나는 길이 기억할 것이다. 하늘의 축복이 그분에게 임하소서!(중략)
10시22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기차를 탔다. 발틱 역에서 나는 메리 마아크 양과 악수를 하면서 서로 “오르브와(Aurevoir·또 만나요)”라고 인사했다. 희망이 없는 낱말이다! 언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김도일의 말에 따르면, 민 공이 사흘 전에 시베리아 철도 노선으로 귀국하기로 했단다. 내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결국 러시아와 상감과 민영환 공 사이에는 적어도 조선에 관련되는 한, 존중할 만한 비밀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비밀의 장막에서 따돌림당했어도 유감스럽다거나 괘념치 않기로 했다.
7월 15일, 수요일.
아름다운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오후에 아버님과 어머님의 하서를 받았다. 5월 21일에 쓰신 것이다. 편지를 읽으며 잠시 행복에 잠겼다. 민경식, 주석면이 오늘 아침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그들은 저녁 8시경에 우리 사절단 숙소로 찾아왔다. 그들은 4월 4일에 서울을 출발했다. 성기운은 뱃멀미가 심해서 상해에서 바로 귀국했다고 한다.
8월 1일, 토요일.
아주 덥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오후 1시에 국립 에르미타쉬 미술관과 겨울궁전을 관람했다. 두세 시간 안에 진귀하고 현란한 작품들을 훌쩍 지나가며 힐끗 감상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란다. 이 미술관에는 혼자서 다시 방문해야겠다.
8월 7일, 금요일.
춥고 소낙비 오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오늘 아침에 민 공의 방에서 모종의 비밀 회담이 문을 잠근 채 진행됐다. 민 공과 두 김씨와 이 모든 비밀 회담 내용을 알아둘 필요가 있는 사동이 참석한 것이다. 나 혼자 외톨이가 되었다. 마치 나를 조선을 염탐하는 첩자로 여기며 그들은 비밀 계획을 짜고 있다. 아침 내내 비통함에 잠겨 지냈다. 누구한테 나의 이 고뇌를 덜어달라고 해야 할까?
8월 13일, 목요일.
춥고 비 오는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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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치호가 자주 산책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파블로브스키(Pavlovsky) 공원의 궁전과 슬라비안카 강. |
오후 4시에 일본 공사관의 해군 무관인 야시로를 방문했다. 만나자마자 그가 입을 연 첫마디는 “굉장히 많은 러시아군 교관들이 조선으로 간다지요?”였다. 그래서 내가 대답해 주었다. “단지 한 사람만이 러시아 정부의 군사교관으로 갑니다.” 그러자 그 해군 장교 신사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귀국의 전권공사가 조선 정부에 ‘만사 잘 되어갑니다’라고 전보를 치셨다지요?” 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글쎄, 나는 민영환 공이 그런 전문을 보냈는지 몰랐는데요.” 그러자 야시로는 내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부인하는 말이 의심쩍다는 듯 다시 말했다. “아, 조선 내각은 어떤 비밀도 지키기 힘들 겁니다. 우리 일본은 조선 조정이 무얼 하고 있는지 훤히 알고 있으니까요.” 만사가 그들의 뜻대로 되어가는구나!
야시로는 유럽에서 교육을 받았을 텐데도, 일본인 특유의 경박한 국민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천박한 근성을. 그건 확실히 나쁜 버릇이다(중략).
나는 지난밤에 나의 감상적인 작별을 표현하는 한시를 4수 지었다. 운율을 맞춘다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알게 될 때까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시를 지었다. 민 공과 ‘물고기’ 씨가 내가 운을 잘 맞춰서 지었다며 오늘 아침에 칭찬해 주었다.
삼월 봄날 저녁에 서울을 떠났는데(三春欲暮離漢城)
어느덧 서늘한 가을바람 소리 이네(俄都凉風見秋聲)
무거운 서양배 타고 우의를 다짐하며(重洋同舟敦友誼)
남북 길 따라 깊은 정이 드네(南北殊路信愁情)
나의 학문 이 변방에서 싹틔워(我留語學開芽塞)
임금께 돌아가 애써 문명 알리세(君歸努力輔文明)
매화 필 때 만날 약속(梅花時節相逢約)
촛불 아래 잔 들어 해로하리(盃剪燭話平生).
민 공이 오늘 아침에 내게 보기 드물게 감동하는 태도를 보였을 때 감사하는 마음이 일었다. “불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보람이 있으리라 생각하오. 큰 성공을 거둘 재능을 타고났소. 윤 참판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소. 여러 해 동안 예술을 연마할 기회도 없었잖소! 불어 공부도 열심히 하시오.”
8월 14일, 금요일.
시원한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난밤에 잘 쉬지 못했다. 오늘 아침에 민 공에게 내가 프랑스로 가기로 결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나는 시베리아를 방문하게 될 아주 좋은 기회를 포기했다. 내 기호를 만족시켜 줄 만한 분위기가 있는 시베리아를. 무엇 때문인가? 정리해 보아야겠다. 기왕에 시작한 불어 공부를 마무리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도 돈도 내 재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렇다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마냥 눌러앉아 있을 여유도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가능하면 한두 달 안에 불어 공부를 마쳐야만 한다. 그러니까, 파리나 마르세유 두 군데 모두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것보다는 낫다.
사랑하는 아내 시엔숭에게서 5월 30일과 6월 15일에 쓴 편지를 받았다. 구구절절 사랑이 가득하다. 아내의 편지는 나를 기쁘게도 하고 서글프게도 한다. 내가 결혼했을 때, 나의 방랑생활은 끝나고, 가족들과 생활하며 정착하리라 생각했었지. 그런데 계속 이어진 이 격랑의 세월이라니!
8월 16일, 일요일.
비 오고, 시원한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저녁식사 후 민 공과 김득련과 나는 내게는 마지막이 될 아이슬란드를 드라이브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매우 춥고 비까지 몹시 내렸다. 가스등과 전등 불빛이 네바 강둑과 가로를 따라 아름답게 빛난다.
전기불빛 그을음에 잠 못 드는 거리(煤電爭光不夜城)
가을비에 멀리서 저녁 종소리(秋雨遠濕暮鐘聲)
파도 같은 내 반생 언제나 잠잠할까(半生風波何時靜)
한 줄기 눈물이 애간장에 서리네(一點淚傷九曲情).
8월 18일, 화요일.
해가 나고 맑은 날씨. 상트페테르부르크
오늘 아침에 민 공은 내게 100루블을 주는 등,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인다. 아주 적절한 시기에 내게 큰 후의를 베풀었다. 굉장한 적막감이 밀려온다.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은 절실한 마음도 나지 않을 정도로. 아무튼 불행한 느낌이다.
사랑하는 아버님과 어머님께 상서했다. 김득련에게 편지를 맡겼다(중략). 오후 6시에 저녁식사를 했다. 오후 7시에 우리의 카비네스키 숙소를 떠났다. 민 공과 두 김씨와 스타인 동생도. 스타인이 바르샤바 정거장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민 공은 내게 샴페인 한 잔을 전별주로 사주었다. 이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다. 저녁 8시30분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여, 잘 있거라! 러시아 철도 2등칸은 아주 괜찮았다.
8월 19일, 수요일.
비 오고 시원한 날씨. 러시아 철도 기차
하루종일 생각에 잠겨 여행했다(중략). 그렇다. 나의 러시아 여행은 내 인생의 역사에서 쓰라린 사건의 한 장면이다. 하지만 그게 누구의 잘못이랴? 말할 것도 없이 나의 관료적인 우월감에서 오는 오만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것과 편견이 절대적인 원인이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그렇기를 바란다!⊙
조정태
(2016-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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