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민-최우석의 유쾌한 직설 ⑬ YS의 37년 그림자 金基洙前 수행실장 : 월간조선

2015년 11월 22일 새벽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이 파란만장한 생애를 뒤로하고 서거(逝去)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큰길을 연 김 전 대통령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이날 오전 8시50분쯤 휠체어를 탄 인물이 빈소에 들어섰다. 김 전 대통령 영정 앞에 국화 한 송이를 올린 뒤, 휠체어에 앉은 채 양손 깍지를 끼고 고개 숙여 묵념했다. ‘3김(金) 시대’의 한 축이었던 김종필(金鍾泌·JP) 전 자민련 총재였다. 고인의 명복을 빈 JP는 “충신(忠臣)은 어디에 있느냐”며 누군가를 찾았다. 상주(喪主)를 자처하고 있던 김무성(金武星) 새누리당 대표는 묵묵히 손님을 맞이하는 한 인사에게 다가가 말했다.

“선배님, 총리께서 찾으십니다.” 김 대표의 이야기를 들은 인사는 JP에게 달려갔다. 그는 휠체어에 탄 JP와 눈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JP는 “만고의 충신이 왔구먼”이라며 그의 손을 잡았다. JP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러면서 말했다.

“YS가 둘도 없는 충신(김 실장)에게 말한 게 있지. ‘강물에 빠져 죽으라’고.(YS는 가까운 사람이 실수하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잘 모셨다. 긴 세월을 일편단심으로 잘 모셨다.”

JP의 이야기에 이 인사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JP가 만고(萬古)의 충신이라며 찾은 이는 김기수(金基洙) 비서관(1급)이었다. 그는 지난 1979년 YS가 운영하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한 것을 계기로 대통령비서실 수행실장 등으로 37년간 YS의 그림자역을 했던 인물이다. YS가 하루에 가장 많이 했던 말이 “기수야 어딨노”였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40년 가까이 지근거리에서 YS를 보필해 온 김 실장은 어떤 인물일까. “비서는 귀만 있다”며 인터뷰를 거절한 김 실장을 오랜 설득 끝에 2015년 12월 8일 만났다. 인터뷰는 서울 동작구 상도동 YS 사저와 연결해 지은 경호동에서 이뤄졌다.

김 실장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는데 거실 한쪽에 이동식 의료침대가 보였다. 궁금해하자, 김 실장은 “각하가 생전에 사용하던 것”이라며 “저 침대만 보면 아직도 가슴속에서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김 실장은 YS를 여전히 각하(閣下)로 호칭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요. 아직도 뒤숭숭해요. 당장에라도 각하께서 ‘기수야’라고 저를 찾으실 것 같아요. 정말 건강하던 분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운명하실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제 마음속에서는 빗물이 흐르고 있어요.”

―차남 현철(賢哲)씨가 YS 문상에 대한 답례 인사를 다니고 있는데 함께하시나요.

“그럼요. 어제도 MB(이명박 전 대통령)를 만나고 왔는걸요. 내일(9일)은 권영숙 여사 만나러 봉하마을에 갑니다. 권 여사에게 감사 전화를 드리니까 반가워하면서 한번 들르라고 하시더라고요. (인터뷰 이후 현철씨와 김 실장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를 방문했다.) JP까지 뵙고 인사드리면 (답례 인사가) 거의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인터뷰 이후 현철씨와 김 실장은 JP를 찾아 사례했다.)”

―JP가 실장님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네. 언젠가 저한테 술을 사주신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잘해주세요. 뭔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제가 청와대에 있을 때 JP가 저 때문에 한 시간을 기다린 적이 있었어요. 너무 죄송했는데 ‘대통령 모시면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해 주시는 거예요. 너무 감격했지요. 예전 분들은 그런 운치가 있었는데 요즘은 참….”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 모두 YS가 발탁해서 정계에 입문한 분들이네요.

“네. 각하께서는 사람을 잘 쓸 줄 아는 분이었습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상도동계라는 거대한 계파를 이뤘을 뿐 아니라 인재를 발굴해 정계에 입문시켰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산 지역에서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1988년 4월 당시 제1야당이던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YS에 의해 영입돼 부산 동구 국회의원이 됐다. 그러나 YS는 1988년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이 제2야당으로 밀려나자 1990년 당시 여당이던 민주정의당, 김종필 총재가 이끌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단행했고, 노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에 거세게 반발하면서 YS와 결별, 김대중(金大中·DJ)과 노선을 같이했다.

YS가 발탁한 정치인

김영삼 대통령의 비서들 중 일부는 새벽조깅도 같이했다. 1996년 당시 김 대통령과 함께 뛴 김기수 수행실장, 정병국 제2부속실장, 박영환 공보비서관 등(왼쪽부터). 사진=조선일보

이명박 전 대통령은 1992년 3월 14대 총선에서 YS가 이끌던 민주자유당의 전국구 의원으로 발탁돼 국회에 입성했다.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이 전 대통령의 영입은 당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그해 말 치러진 대선(大選)에 도전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은 정 명예회장의 대선 출마를 만류하다가 실패하자 YS에게 갔는데, YS는 이 전 대통령이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자리를 두고 박근혜 대통령과 경쟁할 때 “대통령은 일 잘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 전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줬다.

―‘정치 9단’ YS의 용인술(用人術)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각하께서는 ‘좋은 사람 있습니다’ 하면 과감하게 발탁해 쓰셨어요. 주위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죠. 강원도에 농사를 짓던 분이 계셨어요. 박경수 전 의원(14대 국회의원 원주·횡성)이라고요. 그분이 성실하고 신망이 두텁다며 추천하는 분이 많았어요. 각하께서는 얼굴도 안 보고 공천을 줬습니다. 당시 상대 후보가 상이군경 출신으로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었는데 박 전 의원이 이겼어요. 박 의원은 아주 높은 언덕 위에 있는 가옥까지 찾아가 선거 운동을 했어요. 국회에 입성하고 나서 농촌 발전 위해 정말 헌신했어요. 의원실에서 먹고 자면서요.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 운동’도 박 전 의원 작품입니다.”

―성실함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셨나 봅니다.

“인품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40대 이후 얼굴은 본인 책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각하께서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까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인품을 대충 파악하셨어요. 눈매나 이런 것을 보면 인생이 담겨 있지 않습니까. 지금 국회의장 하고 있는 정의화 의원도 유명한 의사라고 공천을 준 것이 아닙니다. 각하께서 그분의 인품, 평판을 본 것이죠.”

―오늘날 정계 거물들 가운데 YS의 손을 거친 인사가 적지 않은데요.

“손학규 전 대표, 홍준표 지사, 김문수 전 지사 등 정말 많지요. 박근혜 정부 핵심도 사실상 각하가 발탁한 분이잖아요. 최경환 부총리요. 최 부총리가 우리 경제수석실에 있었어요. 김인호 경제수석(현 한국무역협회 회장) 수석 보좌관이었죠.”

YS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거물급 정치인들을 대거 등용, 수많은 인재가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열어줬다. 거론된 인물 외에 서청원, 김기춘, 김무성, 이병석, 이재오, 정병국 의원 등이 YS 손에 이끌려 정치권에 들어와 지금까지 이름을 떨치는 대표적 정치인이다.

―상도동계의 의리(義理)는 특별한 것 같습니다.

“각하가 어떤 분인 줄 아십니까. 정말 사람을 아끼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입니다. 그때 일만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지는데 사실 각하의 부친 김홍조 옹께서 별세(2008년 9월)하셨을 때 각하가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습니다. 전 재산을 기부했지 않습니까. 장례 치를 돈이 없어 걱정을 하시기에 ‘걱정하지 마시라’고 이야기한 뒤에 뛰어다녔죠. 다행히 많은 분이 후원해 주셨습니다. 조의금을 받지 않았는데도, 돈이 조금 남았지요. 각하가 굉장히 기뻐하시더니, ‘내가 자네들 보너스 좀 줘야겠어’라며 몇 푼 안 되는 돈을 우리 비서진에게 다 나눠주시더라고요. 왜 각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상주를 자처하고, 끝까지 빈소를 지켰는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발로 찼던 황용하씨를 집권 후 경찰청장에 임명”

―반대진영에 선 인물은 혹독하게 대하지 않습니까.

“전혀요. 각하는 반대진영 인사라도 능력이 있으면 발탁했습니다. 1979년 5·30 전당대회 이후 조일환, 윤완중, 유기준 세 사람이 총재단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서울민사지방법원에 제출했어요. 1979년 5월 30일 전당대회에서 과반수를 겨우 2표 넘겨 당선된 김영삼의 총재 선출은 무효라고 주장하였죠.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런데 이분 중에서도 각하의 공천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YH사건(1979년 8월 9~11일 회사 폐업조치에 항의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 시위를 벌이던 YH 무역 여성노동자 중 1인이 경찰의 강제 진압에 의해 사망한 사건) 때 경찰이 무력진압 했잖아요. 그때 마포경찰서 정보과장이었던 황용하씨도 있었어요. 각하께서 너무 화가 나서 황용하씨 조인트를 깠어요.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하면서요. 그런데 각하가 대통령 되고 나서 황용하씨를 경찰청장에 임명했어요. 옛날 일은 기억에서 지우고 서울대 법대 출신인 황용하씨의 능력만을 본 것이죠. 황씨가 임명장 수여 날 어찌나 좋아하던지 저한테도 ‘충성’이라고 외치며 경례를 하고 그랬다니까요. DJ 연금 때 동교동 관리했던 경찰서장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DJ 대통령 되고 나서 감옥 갔습니다. 정년퇴직하고 쉬는 노인네를 구속한 것이죠.”

YS와의 인연

김영삼 전 대통령이 2000년 2월 22일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 산행을 마치고 인근 마을로 내려오고 있다. 뒤따라오는 이가 김기수 수행실장이다.

김 실장은 한양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34세 때인 1979년 제 발로 상도동 진영을 찾아가 야인이나 다름없던 YS를 수행하기 시작해 37년간 그의 곁을 지켰다. 김 비서관은 왜 제 발로 YS를 찾아간 것일까. 김 비서관의 이야기다.

“1979년이었습니다. 당시 야당 내에서는 ‘사쿠라 대 선명 야당’ 논쟁이 있었어요. 돈줄을 중앙정보부가 쥐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야당이 어용 정당 같았습니다. 여당과 내통하는 간부도 있었고요. 야당의 신뢰가 거의 없는 시대였는데 각하께서 ‘야당성회복투쟁동지회’를 결성하고, 야당 내 거대 기득권 세력에 맞섰습니다. 5·30 전당대회 출마도 선언하셨지요. 그때 각하 주변에는 김동영, 최형우 선배밖에 없었습니다. ‘좌(左)동영, 우(右)형우’는 이때 나온 이야기입니다. 김재규 정보부장이 끈질기게 각하의 사퇴를 요구했지만 굴하지 않으셨죠. 당원들은 각하의 진심에 표를 던졌고, 결과는 예상 밖의 대역전승이었습니다. 정말 멋있는 분이다고 생각했죠. 경선이 끝나고 며칠 되지 않았을 때인데 최기선(전 인천시장) 선배가 차 한잔하자고 하더라고요. 나갔더니 민족문제연구소에 가자고 해서 갔습니다. 최 선배는 각하가 신민당 총재였을 때 외신 담당 공보비서였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상도동계의 핵심 조직으로 YS 대선 캠프의 모태가 됐다. 김 실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민족문제연구소에 갔더니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과 홍인길 선배(김영삼 정부 총무수석)가 떡하니 버티고 계시더군요. 홍 선배가 제가 어떤 생각을 가진 인물인지 알고 싶었나 봐요. 연구소에는 각하와 관련한 내부 서류도 있고 하니까요. 저한테 80년 서울의 봄에 대한 생각과 시국에 대해 써오라고 하더군요. 노트 반 권 분량의 글을 써 냈는데 통과했습니다. 각하를 돕는 교수들과 언론계 출신들이 돌려 보고 괜찮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때부터 바로 민족문제연구소로 출근했습니다.”

―홍인길(洪仁吉) 전 수석이 낸 문제에 대한 답을 어떻게 썼습니까.

“서울의 봄 시기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은 왔지만 봄 같지가 않다)이란 이야기가 파다했습니다. 서울의 봄을 신군부가 조장한다는 이야기도 나왔지요. 신군부가 각하를 연행하기 위한 명분을 세우기 위해 서울의 봄을 부추긴다는 의혹이었죠. 이런 내용을 쓴 것 같아요. 각하에 대한 홍보 전략도 적은 것 같고요.”

―YS의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DJ 전 대통령 진영에 합류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까.

“각하와 정서적으로 맞았습니다. 제 경복고등학교 선배인 DR(김덕룡 전 의원), 이원종 전 정무수석을 비롯, 저와 친한 분들 대부분이 각하를 도왔어요. 그리고 각하가 멋있게 생기셨잖아요. 연설도 정말 잘하시고요. 속 시원하게 직설화법으로 말 잘하시니까 젊은 층에 인기가 정말 많았어요. 요즘으로 따지면 엑소(EXO·정상급 인기를 얻고 있는 보이그룹)라고 이야기하면 될 거예요. 저는 지금도 확신하는 것이 각하는 다른 분들과 ‘급’이 다른 정치인이셨습니다.”

“근태와 친했다”

―동교동에는 친한 분들이 안 계셨나요.

“근태(고 김근태 전 장관)랑, 문희상 선배가 있었어요. 제가 동갑내기인 근태랑 친했어요. 마지막도 제가 봤죠. 2011년 말 각하가 감기 증세로 잠시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때 부인인 인재근 여사가 왔다갔다하는 것을 봤어요. 근태가 입원해 있다고 해서 입원실에 들어가 ‘김 의장, 상도동 기수다’라고 인사했는데 못 알아보더라고요. 그러고는 얼마 안 돼서…. (김 전 의장은 2011년 12월 30일 새벽 별세했다.) 원래 근태가 일신제강에 다녔어요. 당시 주창균 회장이 서울 상대 나온 근태를 잘 봐서 뉴욕지사로 발령을 냈어요. 그런데 가려고 했는데 좌절됐죠. 연좌제에 걸려서요. 옷 벗고 나왔는데 재야에서는 서울대 출신 거목이라고 좋아했어요. 후에 근태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 자리에 앉았지요. 문희상 의원은 제 경복고 선배입니다. 기억나는 것이 의정부에 출마하려던 문 선배가 처음에는 상도동으로 왔어요. 김현규 선배(민추협 기획위원) 소개로요. 그런데 상도동에는 이미 김문헌(전 의정부 시장)씨가 있었어요. 문 선배가 의정부 지구당위원장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이틀인가 삼일 만에 동교동으로 가더라고요. 국회의원 할 수 있는 길을 택한 거죠.”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당시에는 소통이 뭐였느냐면 각계 인사들에게 편지나 연하장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각계 인사들 주소를 수집하는 것이 일이었죠. 그리고 전단 뿌리는 것을 담당했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 또는 외신 기사 내용을 적은 전단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살포했지요. 노량진에서 지하철이 출발할 때 그 안으로 던져넣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전철에 에어컨이 없어서 창문을 열어놓았거든요. 수위(경비)가 없는 아파트를 찾아 우편함에 넣기도 하고요.”

―과거 이원종(李源宗) 전 정무수석이 “박헌영 이후 가장 많이 경찰서를 드나든 건 김기수”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전단 뿌리다가 경찰서를 자주 가신 모양이지요.

“그렇죠. 엄청나게 갔지요. 그런데 형사들이 저를 미워하지 않았어요. 저는 잡히면 (전단을) 한 장만 가지고 있다고 말했거든요. 제가 만약 1000장을 뿌렸다고 하면 형사들은 그걸 다 회수해야 했어요. 제대로 회수 못 하면 보안사 사람들이 형사들을 닦달했죠. 그런 시기였습니다.”

―민주산악회 초창기 멤버이기도 한데요.

“각하의 1차 연금이 풀린 직후 김동영 전 의원이 찾아와 각하에게 등산을 권유했어요. 그렇게 해서 1981년 6월 각하와 함께 서울의 삼각산으로 등산을 갔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이날 민주산악회를 발족했지요. 민주산악회는 백두산조, 지리산조, 태백산조, 금강산조로 나뉘었는데, 각하와 홍인길 선배, 제가 백두산조였습니다. 고향이 거창인 김동영 전 장관이 지리산조를, 고향이 강릉인 김명륜 전 의원이 금강산조를, 최형우 전 의원은 태백산조를 맡았지요. 자신의 고향과 가까운 산 이름을 따서 조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민주산악회가) 전국의 산은 다 돌았는데 백두산은 아직 못 갔습니다. 각하와 꼭 같이 가기로 했는데….”

YS와의 추억이 떠올라서였을까. 김 실장은 꽤 오랜 시간 말을 잊지 못했다. 분위기를 바꾸려 다소 짓궂은 질문을 했다.

“基洙가 旗手가 됐다”

―과거 언론에 실린 민주산악회 등산 사진을 아무리 찾아봐도 김 실장은 보이지 않던데요. 정말 산 정상까지 올라가신 겁니까.

“하하하. 제가 항상 민주산악회 기를 들고 각하보다 10~20미터 앞장서서 가서 그렇습니다. 장준하 사건(등반 중 추락사)도 있고, 산길도 험하고 해서요. 제가 사명감을 갖고 척후병 역할을 한 것이죠.”

―앞장서서 가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깃발도 들었습니까.

“그때 많은 사람이 민주산악회 깃발을 드는 것을 꺼렸어요. 혹시 정부에 찍힐까 봐서요. 저는 각하를 모시는 게 마냥 좋았습니다. 깃발 드는 것도 개의치 않았죠. ‘기수(基洙)가 기수(旗手)가 됐다’는 우스갯소리도 이런 이유로 나왔습니다. 이때는 종일 굶어도 저녁에 소주 한잔하면 그게 에너지가 되어서 배가 고프지 않았어요. 아주 신나게 일할 때였죠. 저는 민주산악회 활동처럼 야생에서 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실전에 강한 타입인 것 같아요. 책상머리에 앉아서 하는 것보다 현장을 즐겼으니까요.”

“한강에 뛰어내리래이”

―YS가 비서들에게 엄격한 편이었습니까.

“야단칠 때도 있었지요. 그런데 한 명을 특정해서 꾸짖지는 않으셨어요. 그러니까 제가 잘못해도 ‘기수가 잘못했다’가 아니라 ‘비서들이 잘못했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죠. 잘못한 사람 자존심 상하지 않게 배려해 준 것이죠. 각하께서는 뒤끝이 전혀 없었어요. 한번 이야기하면 끝이었죠.”

―YS가 장학로씨도 굉장히 아꼈던 것으로 아는데, 비리 때문에 구속됐지 않습니까. 그때 반응은 어땠습니까.

“제가 걔한테 몇 번 경고했어요. 누가 술 사준다고 해도 가지 말고, 돈도 받지 말고, 호텔 드나든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그런데 학로가 좀 방만했던 것이지요. 각하가 청렴결백을 강조하고 칼국수 드시다 터진 사건이다 보니 타격이 컸습니다. 각하께서는 성역 없는 수사를 강조하셨죠. 원래 스타일이 그렇지 않습니까.”

김영삼 정부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었던 장학로씨는 17개 기업에서 27억여 원의 뇌물을 받아 물의를 빚었다. 장씨는 96년 6월 재판에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죄로 징역 5년, 추징금 6억12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지병이 악화, 그해 11월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크게 혼난 기억이 있나요.

“장례식장에서 JP가 말씀하셨잖아요. 각하가 저한테 한강물에 빠져 죽으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그때죠.”

―언제 무슨 이유로 혼난 겁니까.

“각하가 민자당 대표 시절 외교사절들이 참석하는 청와대 행사에 초대받았어요. 제가 이날 드레스코드가 ‘연미복’이라고 전했는데, 막상 가보니 다들 정장 차림이었습니다. 제가 초청장의 드레스코드를 잘못 본 것이죠. 각하는 혼자 연미복을 입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사를 마쳤지요. 상도동 집으로 가는 길 자동차가 한강대교를 건널 때 각하가 말씀하시더라고요. ‘기수야, 니 한강에 뛰어내리래이.’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상도동에 도착하니 손명순 여사님이 ‘대표님 얘기가 너무 과하셨지요. 괜찮아요’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YS가 칭찬은 대놓고 못하시죠.

“가만 계시면 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YS가 현직 대통령일 때 수행실장이었는데, 권력자와 가까울수록 실세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변의 시기 질투는 없었습니까.

“제가 겸손하게 행동해서 그런 건 없었습니다. 제 집사람한테도 감사한 것이, 뒷말이 나올까 봐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모범을 보인 것이죠.”

김 실장의 부인은 대학교수다.

―박근혜 정부의 이른바 ‘문고리 권력 3인방’이 국정 운영에 광범위하게 개입한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나오는데요. 왜 대통령 측근 대부분은 문제의 중심에 설까요.

“청와대에 들어오면 사람 변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냉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권력 주변으로 몰려드는 파리떼에게 당하기 마련이지요. 그리고 대통령과 측근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보는데, 각하는 저희를 동지라 부르고 생각했습니다. 어른이 동지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그분에게 피해가 가는 일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측근과 동지적 관계를 가진 정권은 문민정부 외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YS에게 서운했던 점은 없었습니까.

“부자간에도 서운하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제가 각하에게 더 미쳤었는데요, 뭐.”

―후배들이 공천을 받고 국회의원이 되는 모습을 보면 조금 서운하기도 했을 것 같은데요.

“1984년 말에 마포에 공천 신청을 했는데 동교동계인 노승환(전 국회부의장)씨랑 붙으면 되느냐며 빼라고 해 철회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공천신청비 낸 거 돌려준다고 했는데 안 주더라고요. (웃음) 도영심 전 의원(민정당 전국구)이 자기가 점을 봤는데 전생에는 각하와 내 위치가 거꾸로였다고 하면서 위로해 주더군요.”

―스스로 공천신청 철회한 것에 대해 YS는 뭐라고 하던가요.

“‘한번 기회를 줬어야 했는데 미안하데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는 (이북 출신이어서) 평양 가서 하겠습니다’고 했지요. 공천을 받으려면 최형우·김동영 전 의원 등 계보 보스들에게 세배도 다니고 해야 하는데 제가 그런 걸 안 했습니다. 다 지난 일이죠. 저는 각하와 함께 민주화를 위해 일했다는 것에 누구보다 보람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함남 함흥 출신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YS는 경상도 사투리가 심한데, 알아듣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제가 1·4후퇴 때 세 살의 나이에 부모님과 함께 남하, 거제도로 피란 갔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부산 충무초등학교) 부산에서 살았습니다. 부산말을 좀 쓸 줄 알지요. 제가 사투리 쓰면 선후배들이 ‘부산이 지역구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초산테러와 23일 단식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74년 8월 22일 명동 예술극장에서 열린 신민전당대회에서 신민당 새 총재로 당선됐을 때 모습. 사진=조선일보

YS는 1963년 군정 연장 반대 집회로 수감된 이후 일관되게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 섰다. 그의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초산테러와 23일간의 단식이다.

YS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 투쟁 중인 1969년 6월 20일 초산 테러를 당했고, 1983년엔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23일간의 단식 농성으로 정국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강고하던 군부 정권은 김 전 대통령의 결기에 손을 들었고 정치 통제를 완화하는 조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꼬가 트인 민주화의 거센 흐름은 결국 1987년 6·29선언을 만들어내게 된다.

김 실장은 1969년 초산테러에 대해 “중앙정보부 김형욱이 지시한 것”이라며 초산테러 당시 상황을 설명해 줬다. 그는 바로 며칠 전에 일어난 일처럼 초산테러 사건을 자세하게 기억해 냈다.

“각하가 1969년 6월 13일 제70회 국회 제2차 본회의 때 ‘국정 전반에 관한 질문’을 통해 3선 개헌은 박정희의 종신집권 음모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만인 1969년 6월 20일 초산테러가 일어났는데요. 각하가 청진동에 있던 음식점 장원에서 유진오 신민당 총재, 그리고 양일동 의원(전 통일당)과 함께 3선 개헌 반대전략을 숙의하고 귀가하는데 자택 골목 어귀에서 두 명의 사내가 싸우고 있더랍니다. 싸움은 보통 신체가 건장한 사람이 우세한 법인데, 이상하게도 키가 작은 사람이 오히려 키가 크고 건장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때리기에 각하가 운전기사에게 ‘별 이상한 싸움도 다 있다’고 말하는 순간 싸우던 두 사람 말고, 다른 누군가가 각하가 앉아 있는 오른쪽 뒷좌석 문을 열려고 했답니다. 각하가 놀라서 그 사람을 바라봤는데 오른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더랍니다. 수류탄인 줄 알고 기사에게 빨리 가자고 했고, 손에 든 물체로 각하에게 해를 입히는 데 실패한 괴한은 어쩔 수 없이 물체를 달리는 각하의 차에다 던졌습니다. 집에서 확인해 보니 그 괴한이 던진 것은 초산이 담긴 병이었습니다. 초산을 뒤집어쓴 각하 차의 철판은 녹아내렸고, 초산이 흘러내린 콘크리트 바닥은 구멍이 패 부글부글 끓었다고 합니다. 각하가 미국 방문했을 때 미국인들로부터 배운 습관대로 항상 문을 안에서 잠그고 다녔기 때문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당시 서울 시경국장이 정상천이라고 각하의 경남고등학교 후배였는데 ‘범인을 꼭 잡겠다’고 했지만 잡긴 뭘 잡습니까. 끝내 진상이 묻혔죠. 하지만 우리는 중앙정보부의 짓이란 증거가 있었습니다.”

초산테러, 중앙정보부 작전이었다는 증거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부영 전 의원이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였어요. 거기가 이 사건을 취재하는데, 동네 미장원 아가씨로부터 각하 집 주변에 수상한 제미니(소형 자동차) 한 대가 계속 서 있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하더군요. 확신이 섰지요. 《중앙일보》 오흥근 부장 테러 사건 때도 수상한 차량이 발견됐고, 그 차가 육군 정보사령부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오흥근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은 군사정권하에서 사회에 만연한 군사문화를 비판하는 칼럼을 게재했는데 1988년 8월 6일 트레이닝복을 입은 두 명의 청년에게 공격을 당했다. 죽을 위기였으나 마침 출근하던 아파트 경비원 덕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경찰은 경비원의 증언으로 포니 차량이 용의자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차량 번호를 조회한 결과 육군 정보사령부 소속이라는 걸 밝혀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23일간의 단식으로 넘어갔다.

―YS는 1983년에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23일간의 단식 농성으로 정국의 흐름을 바꿔놓았는데요. 일각에서는 YS가 단식 중에 음식물을 섭취했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각하를 깎아내리는 놈들이 상도동에서 단식한다니까 건강 단식이라고 말하더군요. 각하는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가 감시하는 상황에서 단식하셨습니다. 뭘 먹었다면 안기부가 가만있었을까요. ‘김영삼은 거짓말쟁이’라고 선전하지 않았겠습니까. 요즘 보니까 어떤 스님은 100일, 또 어떤 분은 40일 이상 단식해도 끄떡없더라고요. 건강해서 그런 것일까요. 각하가 이야기하셨잖아요. 굶으면 확실히 죽는다고요. 진짜 단식을 하면 40일, 50일을 살 수가 없습니다. 각하의 단식은 차원이 다른 단식이었습니다.”

천성산 터널 공사에 반대한 지율스님은 100일이 넘도록 물과 소금으로 단식했고, 세월호 유가족 ‘유민 아빠’는 46일간 굶었다.

김 실장은 진로 관련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했다.

“제가 YS 단식이 끝나고 나서 친구 회사의 이사직 자리로 가게 됐어요. 그래서 YS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니까 ‘내가 월급은 못 줘도 차비는 줄 테니 같이 하재이. 앞으로 좋은 날이 오지 않겠나’고 하시더라고요. 하늘 같은 분이 저를 잡아주는데 정말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씰데 없는 걱정하지 마래이”

1993년 취임 초 YS는 김일성과 남북정상회담을 약속하고, 남북고위급회담과 적십자회담을 통해 이를 준비했다. 그러나 회담을 목전에 두고 1994년 7월 김일성이 갑자기 죽으면서 남북 관계는 임기 내내 풀리지 않았다. 김 비서관이 말한 바로는 YS는 임기 중 가장 안타까운 순간으로 남북정상회담 무산을 꼽았다고 한다. 그는 “각하께서 ‘아쉽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퇴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각하께서는 김일성이 카터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제안을 즉석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볼 때 (회담의) 성공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습니다. 회담에 상당한 자신을 가지고 계셨지요. 김일성에게 할 이야기를 자구(字句)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메모해 놓고 외우다시피 하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김일성이 죽으면서 무산됐으니 얼마나 아쉬웠겠습니까. 만약 당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면 한반도가 획기적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회고록에 있는 YS의 메모 내용은 이렇다.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라. 전쟁은 절대 안 된다. 어떠한 경우든 남북 간에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남북전쟁은 공멸의 길이다. 전쟁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북한은 멸망할 것이다. 북한 땅에는 한 사람의 생존자조차 남기 어려울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면 당신은 역사와 민족 앞에 씻을 수 없는 죄인이 될 것이다.〉

김 실장의 얘기.

“각하는 북한의 핵과 전쟁 포기, 남북 정상 간 핫라인 설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핵과 전쟁을 포기하면 북한 주민의 고통스러운 식량난을 해결해 줄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또 북한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독일식의 흡수통일은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는 입장도 전달하려 하셨습니다.”

―2000년 DJ와 김정일의 첫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셨겠습니다.

“DJ 정상회담과 각하가 하려고 했던 정상회담은 성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우리 때는 김일성이 궁지에 몰려서 요청을 한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얻을 것이 훨씬 많았지요. 하지만 2000년 정상회담은 DJ가 김정일에게 요청한 것 아닙니까. 각하께서 퇴임 후에도 ‘그때 정상회담을 했으면 후세에게 큰 선물을 줄 수 있었을 텐데’ 자주 말씀하신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남북정상회담 관련 이야기를 하던 김 실장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기자에게 이같이 말했다.

“1994년 남북정상회담 준비하면서 각하에게 ‘씰데 없는 소리’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2주 정도 앞둔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박상범 경호실장에게 ‘경호 계획은 어때’라고 물었는데, 박 실장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 구두 뒤축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착하고 가겠다고 하더군요. 구두 뒤축으로 바닥을 강하게 차면 터지는 것을 개발했다면서요. 북한 애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면 자기가 구두로 바닥을 찰 것인데 그전에 제가 각하를 안고 대피하라는 이야기였어요. 제가 이 계획을 각하께 보고드렸더니 각하가 ‘와 그냥 원자탄을 가지고 가지. 거기 전 세계 기자들이 모인다. 그 기자들이 있는데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노. 행여 테러를 당해 죽는다고 하더라도,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죽는 것 아니가. 제발 씰데 없는 소리 하지 마래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노출 꺼렸던 YS 장남 은철씨

2015년 11월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엄수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영결식에서 참석자들이 많은 눈을 맞으며 고인을 추도하고 있다. 왼쪽부터 삼녀 김혜숙, 차녀 김혜경, 장녀 김혜영, 차남 김현철, 장남 김은철, 손명순 여사. 사진=공동취재단

YS와 손 여사는 장녀 혜영씨, 차녀 혜정씨, 장남 은철씨, 차남 현철씨, 3녀 혜숙씨 등 2남 3녀를 뒀다. 현철씨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은 외부 활동은 하지 않은 채 생업에만 전념했다. 노출이 없다 보니 이들을 두고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특히 2015년 11월 26일 YS 영결식에 중절모에 검은색 선글라스 차림으로 참석한 장남 은철씨에 대해서는 ‘아버지인 YS와 불화가 심하다’ ‘술값도 지불하지 못할 만큼 어렵게 살고 있다’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진실은 무엇일까.

―김홍조 옹께서 외아들인 YS를 경제적으로 굉장히 많이 지원했지요.

“8대 국회의원을 할 때까지만 해도 아버님께서 각하의 정치자금을 대주셨습니다. 김홍조 옹께서 각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자네한테 들어간 돈이 마산 무악산 높이 두 배만큼이네.’”

YS는 최연소·최다선(3·5·6·7·8·9· 10·13·14대 의원, 9선) 기록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김홍조 옹은 거제에서 큰 멸치어장을 운영했다.

―세간에 YS와 장남 은철씨의 사이가 아주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 사이가 좋지 않다고 소문이 났던가요.”

―아버지인 YS가 정치하느라 할아버지의 큰 재산을 많이 사용한 것에 대해 은철씨 불만이 컸다는 이야기가 돌더라고요.

“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여기 가족 중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은철씨는 왜 갑자기 미국으로 간 것입니까.

“은철씨가 삼영화학이라는 중소기업에 취직했어요. 사장이 승진을 시켜줬는데,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사장한테 왜 승진시켜 줬느냐고 물었대요. 일종의 압박이었죠. 그리고 수위실에서 자리를 잡고 장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어요. 회사 입장에서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뒀는데, 이후 한국에서 취직이 어려웠죠. 중앙정보부가 계속 감시하는데 누가 뽑아주겠어요. 그래서 미국으로 간 것입니다. (장남이) 미국에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YS가 많이 못 도와줬나 봅니다.

“그때 각하께서 수입이 하나도 없었어요. 연금 상태니 돈을 벌 수가 있습니까. 각하도 끼니를 겨우 때울 시기였습니다.”

―은철씨가 지금은 한국에 있지요.

“네.”

―술값도 못 낼 만큼 어렵게 살았다는 전언도 있습니다.

“그건 아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은철씨에게 접근이 어려운 분이 인터뷰했던데요.”

이상휘(李尙徽)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지난 2015년 11월 23일 YTN 라디오 〈신율의 출발 새 아침〉에서 “김은철씨는 비운의 황태자다. 96년도에 허름한 술집에서 술집 외상값을 대신 갚아줬던 적이 있다. 물론 술집 주인은 그가 대통령의 아들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당시에 김은철씨는 기가 많이 눌린 느낌이었고 본인의 처지에 비관적인 면이 많아 보였다”고 말했다.

―지금 생활은 어떤가요.

“첫째 며느리(은철씨 부인)가 착하고 생활력이 있습니다. 장손도 똑똑하고요. 생전 각하가 장손을 얼마나 예뻐했는지 모릅니다. 장손이 연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는데, 각하가 당신이 나온 서울대학보다 연세대학교를 더 좋아했어요.”

은철씨는 경동교회 장로이며 농장을 경영하던 고 황철씨의 딸 경미씨와 1982년 결혼했다.

당시 상도동에 가택 연금돼 있던 YS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신군부는 “결혼식에는 가도 된다”고 했지만, YS는 “그러면 국민이 내가 자유로운 몸이라고 잘못 알게 될 것 아니냐”며 거부했다.

―YS 영결식에 중절모에 검은색 선글라스 차림으로 참석한 것이 건강이 안 좋아서라고 하던데요.

“썩 좋진 않습니다.”

YS, 딸들에게 ‘사랑한데이’ 자주 말해

―딸들도 모두 외국에서 생활했는데요.

“우선 큰사위는 경기고, 연세대 나온 인재로 기업체에 다니고 있었는데, 회사 회장이 묻더래요. ‘자네 장인이 YS야?’라고요. 어떤 뉘앙스였겠어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간 것입니다.”

큰사위 이창해씨는 1992년 대선 때 잠시 귀국해 장인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드러나지 않게 헌신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논공행상’도 바라지 않고 선거 뒤 조용히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둘째, 셋째 딸도 비슷한 경우였나요.

“그렇진 않고요. 둘째 사위는 재미교포고, 셋째 사위는 미국에서 대학교를 나왔습니다.”

과거 자료를 찾아보니 둘째 딸 혜경씨는 하와이대 건축과를 다닌 재미교포 송영석씨와 셋째 딸 혜숙씨는 미 코넬대를 졸업한 이병로 변호사와 결혼했다.

―YS와 딸들의 관계는 어땠나요.

“각하께서는 딸들에게 특히 자상했습니다. 퇴임 이후에도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데이’라고 스스럼없이 말씀하셨죠. 아마 미안한 마음 때문에 더 그랬을 겁니다.”

―딸들에게 어떤 점이 미안했을까요.

“상도동 좁은 집에 수많은 사람, 주로 남자가 드나들었습니다. 딸들이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특히 막내딸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각하가 연금당할 때 사춘기였는데, 하교하고 집에 올 때마다 지키는 경찰들이 가방 검사하고 그랬어요. 일부러 더 짓궂게 했어요. 얼마나 기분이 상했는지 집에 들어오면 책가방을 던지고 그랬어요.”

YS는 회고록에서 가족, 특히 막내딸에 대한 미안함을 이같이 밝혔다.

〈연금은 나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에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대학에 갓 들어갔던 사춘기의 막내딸 혜숙이도 우울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연금 중에는 내 집안에 정보형사가 상주했을 뿐 아니라, 큰길에서 내 집에 이르는 길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에는 전투경찰들이 24시간 감시하며 늘어서 있었다. 이제 막 소녀티를 벗은 그 아이에게 전투경찰들이 보내는 시선은 상당한 스트레스가 되었다. 혜숙에게는 학교와 집만 왕복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다. 친구를 집으로 초대할 수도 없고, 친구의 집에 가도 환영을 못 받은 딸의 심정, 아내에게 쏟아낸 딸아이의 아픔을 전해들은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유난히 영리하고 똑똑했던 그 아이는 나중에 재미교포 신랑에게 시집을 갔다.〉

―5남매가 서로 사이는 좋은가요.

“기본적으로 좋죠. 같이 밥도 먹고 합니다.”

―차남 현철씨만 나서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습니까.

“김 소장(현철씨) 제외하고 나머지 분들은 본인이 드러나는 것을 불편해하고 싫어합니다. 학생 시절에 많이 당했으니까요. 영결식 때도 드러나지 않는 곳에 앉으려 했습니다.”

―아까 셋째 따님이랑 같이 계시던데요. 여사님 건강은 어떻습니까.

“괜찮으세요.”

요즘 국회의원들 愛國心 없어

김 실장은 정치 9단 YS를 40년 가까이 보좌했다. 웬만한 정치인보다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이 정확하고 날카로울 것이다. 그에게 요즘 정치권에 대해 물었다.

“요새 정치권은 수준이 정말 많이 낮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내공 없는 사람이 줄 타고 내려와서 그런 것 같아요. 편 갈라서 싸우기만 하잖아요. 갑(甲)질만 하고요. 특히 야당이 제 몫을 못하고 있어요. 법안도 웬만한 것은 통과시켜 주고 해야 하는데 초선 둘(문재인 대표, 안철수 의원)이 핑퐁게임만 하고 있잖아요. 나라가 올 스톱 되는지도 모르고 말이에요. 각하께서 요즘 정치인은 애국심이 없다고 안타까워하셨는데 그 말씀이 딱 맞습니다. 자꾸 옛날이야기 해서 그렇지만, 과거에는 하고자 하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니죠. 아무나 국회의원을 해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계속 1급 비서관 역할을 하시나요.

“저는 정년입니다. 연금 받을 나이예요. 많이 했으니까 후진에게 누가 안 되게 물러나야지요.”

―그럼 손 여사는 누가 모십니까.

“제가 그만둬도 왔다갔다해야지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뭐 하시고 지낼 겁니까. YS 모시느라 평생 골프도 안 배운 것으로 아는데요.

“벌써 두 달치 스케줄이 꽉 차 있어요. 우리나라도 안 가본 데가 많더라고요. 우리 아이들이 007 영화를 보다가 한 건물을 가리키며 저게 뉴욕 박물관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각하랑 여러 번 미국을 갔는데, 저는 처음 보는 곳이더라고요. 일만 하느라 몰랐던 거죠. 각하께서도 퇴임 이후 워싱턴 가셔서 ‘여기 경치가 이래 좋았나’ 하시는 거예요. 요즘 말로 하면 저는 ‘기-승-전-각하’네요. 여전히 그리워요. 각하가. 평생 그리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