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의 판도라 상자

개화기 선각자 尹致昊의 영문일기〈3〉

조선정부 對日書信, 민비를 살해한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 군인”

  • 글 : 윤경남 譯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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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慶男
⊙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캐나다 토론토 거주.
⊙ 저서: 《부부의 십계명》 《노년학을 배웁시다》 《유니스의 지구촌 여행》
    《성지의 향기(The Fragrance of the Holy Land)》 《고독》 《꿈꾸는 어른》(역서)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역서)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역술서)
    《윤치호 일기 제4권에 나타난 역사의 흐름》(역술서).
⊙ 現 국제펜클럽본부 회원, 한국번역가협회 회원, 좌옹 윤치호 문화사업회 이사.
1895년 일본의 청일전쟁 승리 직후 경복궁 안의 모습. 일본군이 궁 안으로 들어와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고종은 이런 상황에 1896년 2월 한밤중에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을 빠져나와 인근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1부 (1895~1896년)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1895년 9월에 일어난 일들
 
  ● 건국 기념행사.
  ● 이노우에 공사가 본국으로 떠나고 미우라(三浦)가 후임으로 온다.
  ● 일본이 300만 엔을 차관해 주고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 한다.
  ● 박영효 때 제정한 법령을 모두 취소한다.
  ● 임금이 김홍집, 유길준, 김윤식 등 구당파를 숙청할 것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려서 동정심을 사려고
      획책한다.
  ● 윤치호가 종2품 품계를 받는다.
 
 
  9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 유길준(兪吉濬·1856~1914): 37세. 친일내각의 실권자. 어윤중의 문하생.
  ●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1836~1915): 59세. 일본 공사. 원로 정치인으로 조선 책략의 수장.
  ● 김학우(金鶴羽·1862~1894): 33세. 법무대신. 이준용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
  ● 이준용(李埈鎔·1870~1917): 25세. 대원군의 장손. 착복사건으로 처벌을 받게 됨.
  ● 이채연(李采淵·1861~1900): 34세. 농상공부 협판, 주미 서기관 역임. 한성판윤.
 
  9월 4일 수요일
 
  지난 며칠 동안 지독하게 쏟아지던 장대비가, 운 좋게도 건국기념 축제가 열린 동안에 멈추었다. 여름궁전(경복궁-옮긴이)을 일주일 동안 밝혀줄 온갖 종류의 낮은 초롱불들을 준비했다. 오후 3시에 전하께서 수완이 좋은 외교관들에게 알현할 기회를 주셨다. 5시에는 왕비께서도 외국 대표들 부인과 조선 대신들과 협판(協辦)들에게도 똑같이 알현을 허락하셨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아내와 아기도 상감님의 큰 은총을 입었다. 전하께서는 우리 딸 로라에게 예쁜 조선 부채를 하나 하사하셨다. 어린 소녀는 상감님과 악수하는 귀한 특권을 기쁘게 누렸다.
 
  오후 8시에 오색 등불과 일본등, 중국등, 조선 야등이 휘황한 여름궁전 뜰에서 만찬이 시작되었다. 큰 방을 장막을 쳐서 둘로 갈라놓았다. 큰 방은 조선 신사와 외국인 신사들이 차지하고, 나머지 방은 숙녀들이 가득히 들어찼다. 정해진 시각이 되자 전하께서 짧은 연설을 하심으로써 모임의 시작을 알렸다.
 
  그런 다음 전하는 손님들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물러나셨다. 중전마마께서도 숙녀들의 방에서 똑같이 자리를 비켜주셨다. 사람들이 그 모임을 모두 즐겼다. 조선 사람들은 모두 춤추고 음악에 따라 노래를 불렀다. 전통 불꽃놀이도 모두 좋아했다.
 
  신사들이 모인 방 안에서, 나는 전하의 하명을 받고 전하와 대신들을 위해 통역을 했다. 나는 전하가 말씀하시는 진지한 찬양의 메시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외국인들 앞에서 통역을 한 것이다.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웨베르 공사와 씰 공사가 나의 성공과 나의 건강을 기원하며 건배한 일이다. 밤 12시가 되어서야 해산했다.
 
 
  9월 7일 토요일.
  오전에 비 내리다
 
영선군 이준용은 이재면의 장자로 노락당 뒤쪽에 송정 사랑채를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운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896년 을미사변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문을 연마한 후 12년 만인 1908년에 귀국하여 운현궁에서 살았다. 그의 부친 이재면이 세상을 떠난 5년 후인 1917년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유와 대책
 
  1. 김학우가 암살된 이유. 그는 얼음처럼 냉철한 법무대신으로서 대원군의 큰손자인 이준용이 나라의 재산을 착복한 것을 조사하게 되었다. 이준용과 공모한 자 중에 두 명이 붙잡히자, 이준용이 착복한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김학우는 당연히 김홍집(金弘集) 총리에게 그 자백 내용을 보고했다. 김 총리대신은 전하에게 보고하지 않고 대원군에게 먼저 일러바쳤다. 그 노인은 그날 밤으로 김학우를 없애버린 것이다(이하영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2. 전하께서 김윤식(金允植) 전 탁지부 대신을 싫어하시는 이유. 중국의 원세개(袁世凱) 장군은 여러 해 전에 무한대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인데, 김윤식이 전하를 해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 그 계획은 실패했지만, 그만큼 원세개의 영향으로 김윤식이 밀려난 것이다(이하영의 말).
 
  3. 이채연이 전하의 측근이 된 이유. 작년에 일본인들이 서울로 몰려 들어올 때, 이채연이 전하에게 아뢰기를, 그가 엉클 샘(미국인-옮긴이)을 보내서 임금을 구해드리게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물론 그 말 같지 않은 작전은 실패했으며, 이채연은 일본인 아래에서는 감당키 어려움을 알았다. 그래서 전하께서 그가 위기를 잘 피할 수 있도록 먼 지방 관찰사로 임명하셨다. 위기가 지나자 전하께서 그를 다시 불러들이셨다.
 
  4. 이노우에가 대궐을 손아귀에 넣은 방법. 일본 정부가 조선에 300만 엔을 꿔줌으로써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노우에는 이것을 미끼로 조정의 큰 환심을 샀다.
 
  5. 내가 일본인들을 싫어하는 이유. 조선의 유일한 우방이 되겠다고 표방하면서, 조선에 와 있는 일본 공사와 영사들은 수십 년 전에 유럽이 일본을 가지고 농락했던 것과 똑같은 치사스런 함정을 파놓고 있다. 일본은 더 치사스럽고 쩨쩨한 방법으로 조금 더 멀리 겨냥하고 있다. 서울에서 같은 지역 안에 혼합거주지역법을 만들면서도, 조선인이 일본인들과 휩쓸리는 일은 피하려고 한다. 조선에 파견된 일본인들은 다루기도 힘든 가장 악질적인 인간들이다. 그들의 천박함은 우리를 자신들의 우방국가로 선전할수록 더 그 천박함이 드러난다. 그럴듯하게 선전하지만 우리를 더 오래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9월 17일 화요일.
  아름다운 날씨이다
 
  이노우에 백작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기 위해 용산에 갔다. 그는 오전 11시30분에 용산을 떠났다. 그가 조선에 두 번째 방문해 한 일이란, 조각조각 찢어진 오카모토(포병 소령 출신 오카모토 류노스케는 미우라 고로의 심복으로 미우라와 함께 을미사변을 일으킨다-옮긴이)의 옷을 풀로 붙여놓은 일에 비길 만하다.
 
 
  9월 22일 주일.
  날씨가 좋으나 구름이 끼다
 
  어떤 사람이 오늘 아침에 내게 말하기를, 전하께서 내쳐버리기 원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어젯밤에 작성해서 대궐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 추방 명단엔 어윤중(魚允中)과 유길준(兪吉濬), 김홍집이 들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일본인들의 동정심을 사려고 어떤 계략을 꾸며서 실행 불가능한 계획들을 날조해서 퍼트린 터무니없는 행동 때문일 것이다. 내가 대궐에서 들은 바로는 비밀을 드러내는 것을 아주 싫어하시는 전하께서 김홍집, 유길준, 어윤중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셨던 것을 생각하면 그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김홍집과 유길준 등이 왕비에 대항하는 대원군 세력 속에 끼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물론 어떤 소문이든 믿어봐야 소용도 없거니와 소문은 뜬소문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전하가 자신의 신하들을 불신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그런 다음에 쫓아내서 자포자기 상태에까지 몰아낸다는 것은 참 유감이라 여겨진다.
 
  전하께서는 요즘 내게 잘 대해주신다. 조정은 내게 종2품(從二品)으로 진급시켜 주는 성은(聖恩)도 베풀었다. 일주일 전에는 금관자(金貫子·종이품, 정이품에게 달아주는 금으로 만든 망건의 관자장식-옮긴이) 한 쌍을 하사하셨다. 나는 이 조정을 섬긴다는 게 진심으로 두렵다. 아직도 그 못된 무리들이 전하의 생각을 실마리를 찾을 수 없게 조정을 둘러싸고 있다. 그 독사 같은 자들을 궁궐에서 몰아내기 전에는 조국을 구할 길이 없다.
 
  이학균(李學均)은 전하에게 크게 신임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알렌 박사가 그를 고용한 적이 있다. 그는 알렌 박사의 약을 훔쳐 박사에게서 쫓겨났다. 다이 장군과 닌스테드 대령, 르 젠드로 장군 등은 하는 일 없이 비싼 월급만 챙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또한 이학균, 박용화(朴鏞和)에게서 뇌물을 받아 챙기며 독사보다 더한 독설을 날리고 다니는 것을 확실히 추측할 수가 있다. 가롯 유다 같은 김원제(金元濟), 전양묵(全良默)을 포함한 이 훌륭한 명사들은 치욕스런 일들을 대궐에 끌어들여 대궐을 파괴할 사람들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길은 다시 말해, 내 업무에만 일심전력을 기울일 것이며 결코 술책 꾸미는 일에 끼어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조용하게, 똑바로 곧은길로만 걸어가자. 나머지 일들은 하느님께 맡기자! 어여쁜 내 사랑하는 아내를 데리고 스크랜튼 박사의 만찬에 참석했다. 그는 슬하에 사랑스럽게 성장한 딸들을 두었다.
 
 
  9월 29일 주일.
  날씨가 서늘한 편이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 내무대신을 지냈고, 일본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큰 기여를 했다. 조선의 개화 사상가인 이동인, 유대치 등과 교류했고, 조선의 개화파 유길준, 윤치호 등을 적극 지원하기도 했다.
  집에서 지내다. 수집과 회상:
 
  1. 전하가 ‘신성한 권리회복’의 표시를 보이기로 결심하셨다. 궁중법에 오늘날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답호(조선시대에 입던 밑이 길고 소매가 없는 조끼형의 관복-옮긴이)를 쓴다는 것에 대해 논란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4째 달 초하루 전에 답호를 쓰고, 평민들은 보통 검은색 대신에 대개 물감들인 무색 옷을 입고 답호를 썼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사람들이 한 가지 색 옷을 입어야 한다는 지령을 내린 박영효(朴泳孝)에게는 아주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가 백성들에게 입도록 밀어붙인 검은색은 일반인들이 입는 색깔이 아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자주 뒤바뀌며 변덕을 부리는 악정(惡政)임에 틀림이 없다.
 
  전하께서 박영효가 제안한 법령을 무조건 무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박이 어떤 사안이든 전하로 하여금 왕의 직인을 찍으시게 해서 윤허(允許)를 얻어낸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박이 합법적으로 공포한 법률을 취소하는 것은 전하의 위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하의 관심을 끄는 일이란 하나도 없으므로. 더 나아가 그 법령은 제155조 대신 제1조로 둔갑해야 할 것이다.
 
  2. 엊그제 이노우에 백작이 서울을 떠났다. 김홍집 총리는 만찬을 베푼 자리에서 “백작이 순항하기를 원한다”면서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백작이 대답하기를, “친절한 기원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도 내각 안에 폭풍이 불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이노우에가 떠나기가 무섭게 내각 안에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몇 명의 대신이 바뀌는 것은 곧 알아차릴 만한 일이었다. 농부(農部)와 군부(軍部)가 새 대신을 맞으리라.
 
  3. 황해도에 한 늙은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의 명성은 한때 사방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내 친구 한 사람이 그 명성에 반해서 이 고명한 학자를 찾아가서 알게 된 것은 그가 한 마리 늙은 노새에 지나지 않는 자란 사실이었다. 몹시 실망한 내 친구가 그 대접받을 수 있는 명성의 원인을 폭넓게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 노신사는 바로 성숙한 찬양자들의 모임인 상거회(?) 회원이었던 것이다.
 
  4. 대궐과 다른 참모들은 도쿄(일본)와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의 내각이 각기 조선을 어떻게 하려는 속셈일까를 알아내기 위해 진통을 겪고 있다. 온갖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수다쟁이들이 이쪽저쪽에 대고 소곤소곤 거리고, 그들이 주워 모은 싸구려 소문들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고개를 끄덕이고,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듯이 바라보기도 하면서. 이런 멍텅구리들의 대부분이 탄탄한 신용을 구가하는 달러를 벌기 위해서, 그리고 황족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한 온갖 중요한 뉴스거리를 얻기 위해 온갖 종류의 자료를 들이밀며 번창일로의 거래를 튼다. 외국인 내각에서 진행하거나 계획하고 있는 이런 일들은 내게는 유치하게만 보인다.
 
  예를 들어 일본이나 러시아 정부가 2만명의 군인을 조선에 급파해서 제물포나 원산으로 행진해 들어가고 있다는 비밀정보 내지 믿을 만한 정보를 입수했다고 추측해 보라. 이런 정보가 조선의 현지 여건을 개선할 좋은 정보 역할을 할 것인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귀중한 시간과 돈과 자존심까지 버리면서 그 정보를 추적하면서, 우리 자신의 국내 사업엔 관심을 돌리지 않는 것일까. 아니, 아니, 절대 아니다! 조선이 두려워하는 것은 만사가 아주 고약하게 된 국내의 혼란 상태에서 오는 두려움이지 일본이나 러시아 정부 때문에 오는 공포가 아니다.
 
예조, 병조, 형조판서를 지낸 민영환.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다 1905년 11월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자결하였다.
  5. 전하는 대궐 안에서 검은색 옷이나 어두운 색깔의 예복을 입는 것을 싫어하신다.
 
  6. 그레잇하우스 영사가 안장을 잘 골라잡았다. 하지만 그것을 잘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는 정부에 영향을 주는 범위의 사람이 누구인가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가 일단 말안장에 올려태울 작정을 한 사람은 김가진(金嘉鎭)과 유길준, 안경수(安駉壽), 그리고 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는 이미 석 달 전에 두 사람을 내정해 놓았는데, 한 사람은 나이고, 다른 한 사람은 김가진이다. 민상호(閔商鎬)는 떠오르는 별이며, 대궐이 기대하는 영원한 별이다. 그래서 원격조정을 하기 위해 김가진을 앉히기로 계획했으나, 그는 고위관료가 될 자질이 아주 낮은 사람이다. 나는 어떤가? 나로 말하면, 나는 그 ‘영예로운’ 안장에 올라타는 위인이 될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들 말한다. 하지만 말안장에 올라앉는 일이야말로 그레잇하우스 영사의 문화와 지성에 알맞은 미국 신사만이 그것을 연출하거나, 위약한 데 빠져버리거나 하게 된다.
 
  〈*1895년 5월 14일 미국인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 한국명 具禮)를 외부의 고문관으로 임명하는 내용의 외부대신 김윤식과 그레이트하우스 사이에 체결된 재계약서, 구례속약(具禮續約)이 있다. 그는 조선에 오기 전 일본에서 1886년부터 미국 총영사로 4년간 재직한 사람으로, 윤치호 일기에는 ‘General’로 나와 역술자도 장군으로 번역했다. 영사 혹은 고문관이란 호칭이 더 적합한데도 불구하고 윤치호가 두 사람을 ‘장군들’이라고 부른 이유를 굳이 들자면, ‘장군’ 호칭은 일종의 야유인 것 같다. 그 당시 윤치호 협판의 월급은 134달러인데, 이 두 ‘장군들’은 300달러씩을 받았고, 그들의 요리사는 더 많은 돈을 받았기 때문이란 생각을 해본다.
 
  *고종의 또 다른 고문관 르 장드르(C. W. Le Gendre, 한국명 이선득, 1830~1899)도 윤치호 일기에는 ‘General’로 나오지만, 영사 혹은 고문관으로 부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는 경제개발안과 화폐개혁안을 주장한 ‘부국책’의 제안자이다.
 
  *1888년 10월 28일자 서울의 정치공문 제24호의 첨부본 ‘조선주재 미군 사절단’ 보고서에 ‘윌리엄 M. E. 다이 장군(58세). 미국 웨스트포인트 졸업. 정규군의 기병대 대장, 남북전쟁 동안 여단장 경력. 전쟁이 끝난 후 사직함. 1867년 이집트로 감. 거기서 이집트 군대의 참모로서 스톤 장군의 휘하에서 복무했음. 미국으로 돌아와 대대장에 임명되었고, 워싱턴 경찰에서 연금부서 심사위원장으로 취임하기 위해 군을 떠남. 그리고 그는 이 직위를 1년에 5000원(약 2만 프랑)의 봉급을 받는 장군으로서 조선에 오기 위해 포기했다’고 보고함. 이때 르 장드르가 다이 장군과 함께 복무한 듯하다. 이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정치서한 1888~1896 【31】 미국인 군사교관 고용의 전후’에 나온다.〉
 

 
10월에 일어난 일
 
  ●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되다.
  ● 친일내각은 서둘러서 왕비의 지위를 서민으로 격하시키는 칙령을 공포한다.
  ● 김윤식 등 대신들은 민비가 살해된 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 민영환(閔泳煥)이 주미 공사로 임명되었으나 민비시해로 무산된다.
  ● 서광범(徐光範)이 주미 공사로 발령난다.
  ● 우범선(禹範善), 이주회(李周會)가 국정을 주도하여 대신들이 무서워한다.
  ● 일본은 미우라를 소환하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를 후임 공사로 보낸다.
  ● 제2 왕자를 일본으로 보내면서 유럽으로 가지 못하도록 여비를 제한한다.
  ● 남감리교 헨드릭 감독과 리드 선교사가 처음으로 방문한다.
 
 
  10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 유길준: 37세. 친일내각의 실권자.
  ● 김윤식: 60세. 외부대신. 민비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일에 앞장섬.
  ● 민영환: 34세. 고종의 외사촌 동생. 주미 공사로 발령받았으나 무산됨.
  ● 우범선: 37세. 민비시해를 주도함. 후에 일본으로 도피. 고영근(高永根)에게 피살.
      우장춘(禹長春) 박사의 아버지.
  ● 이두황(李斗璜): 37세. 군부협판. 민비시해 가담.
  ● 의화공: 18세. 제2 왕자 이강(李堈). 일본의 견제를 받음.
  ● 미우라: 47세. 군인 출신 일본 공사. 민비시해 혐의받고 소환됨.
  ● 서광범: 36세. 주미 공사. 갑신정변 가담자. 사면받은 후 연립내각에서 법무대신 역임.
  ● 현흥택(玄興澤): 무관. 종로 YMCA 부지를 기증한 사람.
 
  10월 3일 목요일.
  아름다운 날씨가 밤낮으로 계속 이어지다
 
고종의 두 번째 외교고문으로 초빙된 데니. 그는 청국의 조선 종주권을 국제법으로 부인한 《청한론》을 저술했고, 원세개와의 투쟁에서 선봉에 섰다.
  해가 진 후에 군인들과 경관들 사이에 시비가 터졌다. 못된 군인들이 무법자 무리 속에 들어가 경찰서를 때려부수고, 사람을 죽이고 경관들을 두들겨 패고 부상을 입혔다. 좋은 징조로다! 조선인 ‘마부’나 하인은 제가 갖고 싶으면 양심의 거리낌없이 속이거나 훔친다. 내가 제일 속상한 것은 그런 사람들은 친절하게 대해줄수록 더 무례하게 군다는 점이다. 저녁 8시에 설사약을 받으러 스크랜튼 박사에게 다녀왔다.
 
 
  10월 6일 주일.
  아름다운 낮과 밤이 이어진 날씨
 
  민영환이 며칠 전에 미국 주재 공사로 임명됐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민상호는 그의 비서관이 될 터이고. 온통 세도가 민씨들 세상이다! 밤 11시쯤 군인의 한 떼가 함성을 지르며 중부경찰서로 몰려갔다. 경관들은 늘어진 칼을 질질 끌고, 군인들은 단지 지휘곤봉을 들고 뛰어간다.
 
  경찰과 군인들 간의 싸움에서 닥쳐올 폭풍을 암시하는 듯한 뭔가를 느끼게 한다. 대궐에서는 경찰을 제지하는 것을 구실삼고 있는 것일까? 늙은 대원군은 대궐과 병정 사이에 싸움을 부추겨 놓고 그가 간섭할 기회를 노리는 건 아닐까? 그레잇하우스 영사는 후자의 경우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다.
 
 
  10월 8일 목요일
 
이승만의 책 《독립정신》에 실려 있던 사진으로 일제시대부터 1980년대까지 명성황후 사진으로 알려졌던 사진. 사진의 주인공이 명성황후라고 밝힌 유일한 사진이다.
  이순근(李巡根) 때문에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그는 길에서 주워온 쪽지 한 장을 보여주었다. 이두황과 일본 교관 무라이(村井)가 제1연대 병정을 거느리고 부대에서 나오더니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났다는 내용이다. 그 쪽지에는 군 장교인 이민굉(李敏宏)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편지를 경찰서장에게 보이려고 이순근을 경찰서로 보냈다.
 
  5시쯤 제2 왕자, 의화군이 대궐에서 나왔다. 그가 나오는 길에 수많은 일본 군인이 영추문(迎秋門)과 대궐 담이 붙어 있는 서대문을 향해 행진하더라고 했다. 그리고 조선군 훈련대(訓練隊)는 건춘문(建春文·경복궁 동쪽문-옮긴이)과 춘생문(春生門·경복궁 동북쪽 문-옮긴이)을 향해 가더라는 것이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려고 전하께서 왕자를 내보낸 것이다.
 
  5시30분쯤, 요란한 총소리가 몇 분 동안 들려왔다. 온통 고요에 잠겼다. 일본 군인들이 대궐 문을 때려부수고 있었다. 조선 훈련대는 도망쳐버렸다. 홍재희 장군이 살해되었다. 대원군은 일본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대궐에 들어갔다. 대궐 문은 일본 병정들이 지키고 있었다. 오직 김홍집, 김윤식, 조희연(趙羲淵)만이 대궐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오후 1시가 되자 제2 왕자 의화군이 와서 이렇게 전한다. 왕자가 대궐을 나서자마자, 왕실 안채가 칼을 찬 일본 낭인들에게 습격당했다고. 그자들은 왕비를 쫓아가, 외관상 왕비처럼 보이는 두세 명의 시녀들을 아주 무참하게 죽였고, 왕세자비를 붙잡아 머리채를 잡고 두들겨 패면서 “왕비가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다그쳤다. 세자비가 대답을 거절하자, 그자들은 젊은 세자비를 다 죽어가거나 이미 시체가 된 군인들 틈에 내던졌다.
 
  일본인 중의 한 놈이 왕세자를 붙잡아 머리채를 잡고 그를 발로 찼다. 한편에선 100명이 넘는 여인들이 모여 서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왕비가 들어섰다. 한 왜놈이 그녀를 붙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녀는 먹을 것을 찾아 부엌에 들어온 시녀였으며, 왕비가 아니었다. 살인자들은 그 시녀가 죽을 때까지 발로 짓밟았다. 그러고는 방안으로 끌고 들어가 이불 홑청을 씌웠다. 그러고는 그 시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일본 통역관 스즈키(鈴木)를 불렀다.
 
  스즈키가 안상궁(安尙宮)에게 그 장소를 가리키며, “왕비가 ‘저 방’ 안에 누워 계신다”고 말했다. 방 안으로 들어간 안상궁은 피가 낭자한 광경에 충격을 받고 뛰어나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 왕비마마가 돌아가셨어요!” 이 소리를 들은 살인마들은 그 방으로 다시 뛰어들어가 시신을 끌어내어 마당의 화단 구덩이에 집어던졌다. 그 살인자들은 그 자리를 불구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이 모든 이야기는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하다.
 
  밤에 한숨도 못 잤다. 왕비마마가 당한 그 야만적인 만행이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아마도 나는 왕비의 치세가 좋은 통치였다고 수긍하는 마지막 사람이리라. 왕비께서 온갖 음모를 포기하셨더라면, 나도 왕비의 입장을 변호해 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왕비마마가 일본 살인자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되셨음을 증명할 마지막 사람이 되고 말았다. 외국인들은 예외 없이 그 행위를 저지른 조선인과 일본인 패거리들에게 욕지기나는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1895 October 8th. (20th) Tuesday.
 
1895년 10월 8일 새벽 한무리의 일본 낭인들(사진)이 경복궁 건청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증거인멸을 위해 시신을 불태웠다. 황후 시해는 의병운동(을미의병)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일본에 의해 경복궁에서 감금생활을 하던 고종은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1년을 지내다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시해된 왕비 민씨도 명성황후로 추존하고, 을미사변 당시 낭인들에 맞서다 순국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과 휘하 장병 및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을 제사지내는 장충단(현재 장충단공원)도 설치했다.
  Awakend at 4 a.m. by Yi Sun Kun(李巡根). He showed me a letter picked up in the street informing the commander of the First Regiment that several companies under 李斗璜 and a Japanese instructor 村井 had left the barrack for nobody knows where. The letter was signed by an army officer 李敏宏. Sent Yi Sun Kun to show the letter to the Chief of Police.
 
  At 5 the 2nd Prince came from the Palace. On his way out, he saw a large number of Japanese soldiers marching toward 迎秋門 or the West Gate of the palace wall, and columns of Corean soldiers (訓練隊) going toward 建春門 and 春生門. The Prince was sent out by H.M. to find out what the trouble was.
 
  About 5:30 a brisk firing was heard for a few minutes. All quiet. Palace broken in by Japanese soldiers.—The Corean 訓練隊 refusing to join the attack ran away.—General Hong (洪載熙) killed—Tai Won Koon escorted by Japanese, went into the Palace. The gates guarded by Japanese soldiers. Only Kim Hong Chip, Kim Yun Sik and Cho Hui Yon admitted.
 
  At 1 p.m. the 2nd prince came and reported thus: Soon after he had left the Palace, the Royal Quarters, occupied by T.M. and the Crown Prince, were attacked by a band of Japanese with drawn swords. They hunted after Her Majesty—Killed 2 or 3 waiting maids with great cruelty, apparently to make sure of the Queen. They seized the Princess (wife of the Crown Prince) by her hair, kicked her, beat her, dragged her forcing her to tell them where the Queen was. Refusing to answer, they threw the young lady down among the dying and dead soldiers.
 
  One of the Japanese seized the Crown Prince by the hair and kicked him. In the meantime there were nearly a hundred women huddled together with fear—the Queen came in-a Jap seized her and kicked her down—She cried out that she was not the Queen but came in to get something to eat. The assassins kicked her until she was insensible—dead. Then the murderers dragged her to an apartment—covered her with a sheet—then to make sure of it, Suzuki (鈴木), a Japanese interpreter, told An Sang Kung(安尙宮) that Her Majesty was laid in "that room," pointing to the place. The lady went in and shocked at the bloody sight rushed out in horror crying "Oh, the Queen is dead!" Hearing this the assassins rushed in and dragged the body to the nearest flower pit. There they placing it, committed it to flames. The whole story is too horrible to think about.
 
  Could not sleep in the night, the nerves so worked up by the barbarous fate Her Majesty met with. I would be the last man in the world to admit that the Queen's reign was a good one. I may even advocate her deposition, if she could not be in any other way made to give up her intrigues and evil favorites. But I am the last man in the world to approve her cruel murder committed by Japanese assassins. Foreigners without an exception, are disgusted with the parties, Corean and Japanese, who committed the deed(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sa_027).
 
[편집자주] 윤치호 영문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에 접속하면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호 《월간조선》은 지면관계상 명성황후 시해 날 일기만 보여드립니다.
 
 
  10월 9일 수요일
 
  조정에서 왕비의 폐서인(廢庶人)을 시도했다는 말이 들려와서, 바로 김윤식 외부대신에게 달려갔다. 그러곤 이런 조치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를 표명했다. 내가 말했다. “외국 공관에서는 왕비를 살해한 그 흉악한 살인자에게 굉장히 격분해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지만….” 김윤식이 약간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외국인들은 객관적이거나 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소. 그 사람들은 왕비를 생각할 때 단지 그들에게 와인을 권했던 분, 악수를 했던 분 정도로 여길 뿐이오. 그들 중에는 왕비가 나빴다고 찬동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오.”
 
  “네, 그건 사실입니다. 외국인들은 내가 왕비 치하에서 귀신 잡귀 행위를 관련시켜 이야기했다고 해도, 왕비가 국가를 파멸시켰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왕비께서 당한 가장 잔혹한 살해 행위, 치욕적인 죽음으로 몰아간 가장 악독한 죄악상은 외교관들을 분개하게 만들고 동정심을 일으키고 있지요. 예를 들어 김옥균은 잘 알려진 반역자입니다. 만일 우리 정부가 그를 법대로 처벌했었더라면, 어느 누구도 그의 죽음에 대해 입을 벌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된 사건은, 그를 사정없이 해치운 사건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죄상은 잊어버리게 하고 오직 잔인하고 비겁하게 그리고 조선 정부의 위약행위로만 기억하게 합니다. 지금 대감께서는 왕비가 김옥균만큼 나쁜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 당시 김옥균은 배신자의 몸이었고, 왕비는 국모(國母)였습니다. 그런데도 외국인들이 왕비의 불행을 마음 아프게 동정한다는 사실이 이상해 보이십니까?”
 
  김윤식이 말하기를 “외국인들이 그렇게 동정하고 싶어한다면 하게 내버려두시오. 외국인들이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미국인들은 말하고, 또 말하고, 말장난이나 하는 게 고작일 게고. 러시아인들은 괜한 소동이나 피울 뿐 일본과 협력할 줄도 모르잖소. 우리는 이제 독립했소. 외국인들이 우리 정치에 간섭해서 말할 권리가 하나도 없단 말이오.”
 
  “우리가 정말 독립한 걸까요?” 내가 물었다. “우리가 정말로 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습니까? 어떤 점이 그런가요? 일본놈들이 대궐을 쳐들어오게 만들고 우리 왕비를 살해했는데도 말씀입니까? 일본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간섭한다면, 다른 나라들도 우리에게 그와 똑같이 굴지 않을까요? 보세요! 이 시점에서 대감이 하실 최선책은 왕비마마가 돌아가신 것을 공포하는 일입니다. 돌아가신 왕비마마의 명예를 실추해선 안 됩니다. 이 일은 아마도 외국인의 흥분한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대감이 만일 가장 잔혹한 왕비 살해를 선동하고 나서, 왕비를 폐위시키고, 왕비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 왕비의 죄를 열거하는 데만 열을 올린다면, 서방세계가 대감에게 등을 돌리기 십상일 것입니다. 일본은 이제 조선에서 이곳에 주둔한 외국인들의 호의적인 여론들을 끌어내는 데 모두 실패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 외에 달리 더 기대할 일이 있으십니까?”
 
  노 대감은 그 일에 관해 총리대신과 의논하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나는 일반 사면으로 공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제2 왕자 의화군이 언더우드 박사 댁에 나흘째 피신해 있다. 대원군을 두려워해서이다.
 
 
  10월 10일 목요일
 
  오늘 아침 가제트 신문에 ‘조정이 왕비의 직위를 서민으로 격하한다’는 조칙(詔勅)이 내려졌다고 보도됐다. 외부(外部)는 일본 법무성에 여러 통의 편지를 써보냈다. 일본이 조선 왕궁에서 최근에 일어난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중에 중요한 편지 한 통이 있는데, 그 피투성이 현장에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 군인들이었으며, 자신들이 살해한 것을 감추기 위해 일본 옷으로 위장한 것이었다는 내용이다. 외국 공사들은 전하를 조문하는 일을 일과로 삼고 있다.
 
 
  10월 14일 월요일
 
  평상시대로 사무실에 출근했다. 오늘 오후 미국, 영국, 러시아 공사관은 대궐에서 일어난 사건과 왕비 폐위에 대해 김홍집 내각이 보낸 공문에 대한 회답을 보냈다. 공사관은 왕비 살해 진상을 조사하려 했으나, 외부는 그 사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전하가 조치를 내릴 왕비의 폐위를 알리는 판결만 믿게 하려고 분명하게 거절을 표시한 것이다.
 
 
  10월 15일 화요일.
  아름다운 날씨, 사무실에 평상 출근
 
민비가 평소 거처로 사용하던 옥호루. 을미사변 당시 이곳에서 시해당했다.
  이근호(李根澔)씨는 뉴스를 수집하여 정확한 소식을 모으는 데 뛰어난 재간을 가진 사람이라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내게 말하기를, 자기가 오랫동안 탐지한 바로는 내가 친 왕비파와 친 외국인파들로부터 끊임없이 의심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인 또는 누구나 싫어하는 새 내각의 비밀을 외국인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각은 군인과 관리 출신인 우범선과 이두황 등이 펼치는 공포 분위기 아래 놓여 있다.
 
  오후 4시에 독판(督辦)들과 협판들을 모두 소집하여 ‘왕’의 칭호를 ‘황제’로 바꾸자는 대책을 의논하는 확대 내각회의를 했다. 조희연, 권형진(權瀅鎭), 정동하(鄭東夏) 등 제씨가 강력하게 주도해 나갔다. 권형진이 말하기를, 이 제도는 사람들이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독립함을 인식하게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제도라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일본도 청국도 우리가 황제라는 칭호를 붙였다고 해도 조금도 더 영예롭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며, 오히려 우리나라를 조롱거리로 삼을 거라고 말했다. 외부대신과 총리대신은 내게 동의를 표했으나, 감히 군부의 지원을 받는 주류파에 정면으로 대고 반대하진 못했다. 서광범은 어느 누구도 황제의 칭호로 인해 속국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말해서 대신들의 빈축을 샀다. 황제 칭호에 대한 제안은 오후 6시에 전하의 제의로 받아들여졌다. 내 마음은 당장 왕실로 달려가 가공할 재난을 겪으신 전하를 뵙고 싶었다.
 
  유길준이 내게 제2 왕자 의화군과 동행하도록 요청했다. 한 일본인이 우리와 함께 가게 되리라고들 말한다. 내가 지나치게 자유롭게 외국인과 대화를 많이 나누는 국가로 쫓겨가게 될 확실한 증거이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외국으로 나가게 될 전망이 보인다고도 말한다. 오늘 새 왕비 간택 조칙령이 내려졌다.
 
 
  10월 16일 수요일
 
유길준과 1895년에 발간된 그의 대표작 《서유견문》.

  유길준이 내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 아니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 왕비의 지시를 받은 심상훈(沈相薰)과 유동근(柳東根) 등이 일본군 훈련을 받은 군인들을 경찰과의 마찰을 핑계로 해체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 그 당시 궁궐 수비 군대가 각국에 소속된 모든 관리와 하인들을 완전히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다는 것. 그 대량학살 계획은 음력 8월 25일 혹은 10월 13일로 정해졌다고 한다.
 
  2. 웨베르 공사는 그의 영향력으로 이 음모를 지원하려고 했으며, 필요하면 러시아 해병을 동원하려고 했다. 이 공로로 러시아는 원산항을 손에 넣으려 했다. 웨베르는 현직 대신들을 향해 압박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10월 8일 사건으로 그의 금광사업 계획이 갑자기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전하가 러시아 황제에게 쓴 2통의 비밀편지가 대궐 안에서 발각되었다. 그중의 1통은 러시아 황제에게 웨베르가 조선에 더 머물게 해달라는 비밀편지였다.
 
  3. 호러스 알렌과 프랑스 판무관이 웨베르의 음모를 막기 위해 개입했다. 운산의 금광은 미국 상사가 혜택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알렌을 포섭하려고 한 함정이었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의 능력 중 한 가지를 말하자면, 모든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때로는 거짓말하면서, 때로는 허풍을 떨면서 성취한다. 그가 가질 수 있는 대상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성취하고 만다. 이렇게 웨베르에 대해 꾸며낸 이야기도 풍성한 그의 이야깃거리 중 하나이다.
 
 
  10월 17일 목요일
 
  헨드릭스 감독과 리이드 박사가 우리와 함께 한식으로 점심식사를 들었다. 로스 브릴더 양도 함께했다. 오후 2시에 웨베르가 김윤식을 방문했다. 웨베르는 공식적인 답변으로 거듭거듭 설명을 했다. 즉 “사건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지도 않은 현재 상황은 아직도 왕비 살해에 대한 진상을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만든다”고. 그리고 왕의 칭호를 바꾼다는 것은 이 시점에서 볼 때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고. 또한 왕비 살해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지금, 새 왕비를 간택한다는 법령에도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웨베르는 수치스러운 이 모든 일의 진행은 상감의 선택이 아닌 음모에서 온 것이라고 책임을 돌렸다. 김윤식이 답변했다. 즉 대궐은 지금 ‘반항하는 군인들’의 수중에 있으며, 조사가 아직도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7시30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교회에 갔다. 우리 아기가 헨드릭 감독에게 세례를 받는 날이다. 아내는 오랜 예배시간 내내 그녀 특유의 아름다운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10월 21일 월요일
 
  사랑하는 아내가 심한 감기에 걸렸다. 헨드릭 감독과 리이드 박사가 오늘 아침 9시30분에 제물포를 향해 서울을 떠났다. 상해의 영 알렌 박사에게 편지를 썼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 아버님과 어머님이 울산에서 서울집으로 무사히 귀가하셨군요. 우리 식구가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순간인가요. 평화로운 가정이 되어 사랑의 중심인 이 가정이 무너지지 않게 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요!〉
 
  일본 정부는 미우라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고무라가 대신 최근 사태를 조사한다는 명분을 거창하게 내세우며 서울에 왔다. 그는 미국인과 유럽인들의 눈에 겉이 번지르르하게 잘 보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조선에서 가장 눈에 띄는 하류층의 조짐의 하나는 아이들의 장난감이 안 보이는 일이다. 최근에 일본과 중국의 장난감들이 조선인의 가난한 살림을 감안해 초라하고, 적은 수량으로 가게에 나오기 시작했다. 케이크나 비스킷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오늘날의 조선 어린이는 10년 전의 어른들에 비해 이런 물건들을 자주 보게 된 셈이다.
 
  옛날엔 연날리기도 정월 초하루 설날과 보름날, 12일에서 15일 사이와 매달 첫날 외에는 날릴 수 없는 금지된 풍습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매달 어느 날이건 연날리기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가 있다.
 
  일본인과 친일파(유길준과 그 일당)들은 조선의 왕자들을 모조리 그들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제2 왕자 의화군이 유럽 왕실로 파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유길준과 그 일당은 의화군이 도쿄를 먼저 들러서 가게 하려고 한다. 나는 왕자 의화군이 미카도(일본-옮긴이)의 수도보다 더 멀리 가지 못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10월 24일 목요일
 
  왕자 의화군과 내 사촌 치오가 어젯밤에 서울을 떠났고, 오늘 아침에는 용산을 떠났다. 캔들러 박사와 호스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10월 25일 금요일
 
구한말 외무대신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한 운양 김윤식은 을미사변에 연루돼 제주에 종신 유배됐다.
  외부대신 김윤식이 내게 말하기를, 조정의 대신들이 군대를 동원해서 왕가의 호칭 변경, 새 왕비 간택, 그리고 상투 자르는 일 등을 서두르도록 협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정은 이제 공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황제 호칭을 결정하는 일은 내일 조치를 취하게 된다. 새 왕비 간택은 빠른 시일 안에 시행될 것이다. 상투 자르기는 재고하게 될 것이다. 그레잇하우스 영사가 분별 있는 충고를 하자, 김윤식 대신은 외국 공사관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황제로 칭호 변경을 고려하도록 설득하고 있다.
 
  스기무라(杉村)가 오늘 오전에 서울을 떠났다. 니오(仁尾) 재무부 고문관은 아주 단순한 핑계를 대면서, 의화군의 유럽여행 비용 지불에 보증하기를 미루고 있다. 그는 여행 경비의 조목별 명세표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는 내게 “의화군의 그 일람표-시각과 거리, 나라와 나라 사이의 거리, 경유지의 임무 등을 적어 내라”고 하기에 나는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조선 정부가 하는 일은 삼륜차와 같다. 하나는 조선 내각용이고, 또 하나는 일본 쪽 요인이고, 세 번째는 외국의 영향이다. 조선 내각과 일본 쪽 요인들은 어딘가 조화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세 번째, 외교 관례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러니 일이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 외국 사절들은 반대하는 일은 접어두고 후임 공사가 와서 그 일을 떠맡도록 뒤로 미뤄둔다. 아니면 파멸에 관해 이미 결정한 대로 왕비 찬탈을 기정사실화하려고 한다. 그들의 친절해 보이는 듯한 개입은 모든 사람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며, 일본인들의 시각에는 더 엉뚱하게 크게 보이게 만든다.
 
 
  10월 26일 토요일
 
  조정의 일본 고문관 이시즈카(石塚)가 오늘 아침에 서울을 떠났다. 나는 그에게 현재 조선을 안정시키는 최상의 방법은 이노우에 백작이 외국인 대표들과 협력하여 모든 정당이 수긍할 만한 새 내각을 조직하는 일이라고 암시했다. 따라서 이번 일에 대해 외국이 군사개입을 하는 불상사와 위험을 내포한 사태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니오 재무부 고문관에게는 왕자가 방문하게 될 국가들과 장소의 거리를 적은 명세서를 건네주었다. 니오 재정고문관은 다시 추가해서 말하기를, 장소마다 매일 쓰는 경비에 대한 명세서를 내란다. 나는 절망과 분노가 끓어올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자와 토론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해 버렸다.
 
  나는 그 특별사절단의 임무란 것이 유길준이 꾸며낸 수작이며, 일본인들이 의화군을 도쿄에 보내려는 것도 그들의 함정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니오는 왕자 의화군이 일본에서 쓰게 될 비용 1300엔 지출에 대해서는 쓸데없이 소동을 부리지 않았다.
 
  황제 폐하 호칭 잔치는 오늘 열리지 않았다. 전하가 그 호칭 제안이 황당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외국 공사들의 직언이 뭔가 유효하게 작용한 것 같다. 서광범이 미국 공사관으로 간다. 미국 공사 씰에게 워싱턴에 있는 조선 공사로 가고 싶다고 암시를 준 듯하다. 씰 노인이 내게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그러는데, 왕비의 폐위론에 찬동하는 데 서명한 사람은 워싱턴 공사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는 것이다(그레잇하우스).
 
 
  10월 27일 주일
 
  유길준을 방문해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현상은 종결지을 수 없는 일이다. 무력으로 간섭하는 공사관은 참담하게 된다. 사건을 쉽게 마무리하고 조사하기 위해 일본군을 불러들였다. ‘자유에 대한 개념’이 외국인들에 대해 호의를 갖는 고마운 저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암시를 했다. 내게는 현재 조정이 안정된 다른 어떤 단단한 기반보다 이 점을 더 인정해야 할 것 같아 보인다.”
 
  이에 대해 유길준이 말하기를, ‘여행 경비’는 특별사절단과 일행이 현재의 위기 상황이 가라앉아 해결이 날 때까지는 지불할 수 없다고 한다. 이 점이 왕자를 도쿄로 보내려는 음모일 것이라고 생각한 내 추측을 확인해 주었다. 어찌되었든 새 정부가 들어설 것이며, 유길준은 한 자리 차지하게 될 것이다. 1896년 1월 1일부터 양력달력을 채택하기로 했다. 감리교 예배당에서 예배드렸다.
 
 
  10월 29일 화요일
 
미우라 후임 공사로 조선에 온 고무라 주타로 외무 대신.
  제물포. 오전 9시30분에 서울을 떠나 제물포로 갔다. 내일 제물포에 도착할 예정인 이노우에 백작을 맞으러 나갔다. 그는 조문사절로 온다. 편안하게 여행했다.
 
  수집과 명상들!
 
  1. 미우라가 10월 8일 사태가 있기 2주일 전에 전하를 알현했다. 그는 평소와 달리 전하가 취한 방안들에 찬성의 뜻을 표하면서 그 사안들에 대해 건의하기를, “‘무엇보다 먼저’ 귀족을 활용하시라”는 조언을 드렸다. 그리고 “‘아문’이라는 옛 관직 칭호를 다시 쓰시라”는 말씀을 드렸다. 그는 새로운 사안과 변경된 법규, 그리고 전하께서 방금 새로 해 입으신 의상까지 칭찬했다.
 
  2. 대원군의 첩자인 김경하(金京河)는 큰 지방의 감사가 되었다. 그는 전하께서 왜 왕비를 폐위시키셨나, 하는 이유를 다시 인쇄하여 온 고을에 돌렸다. 불행한 왕비 전하의 기억을 손상시키는 김경하와 그의 패거리들의 더럽고 비열한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3. 미우라, 히로시마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체포되어 감옥에 구금됐다. 그들의 ‘구원의 요새’였던 스기무라에게 신임을 받았던 ‘내각의 인간들’은 그가 소환되어 구금까지 당한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4. 유길준이 자신의 국가에서 인간쓰레기로 규정한 외국인 사절들을 위협하는 태도는, 결국 ‘내각의 인종’들과 똑같은 종자로 보인다.
 
  5. 500년을 두고 인민이 피를 흘리게 하는 왕국의 수도에서 가까운 강둑에는 말도 안 되는 흉측한 풍경들이 펼쳐져 있다. 벌거벗은 언덕배기, 길가에 늘어서 있는 황량한 오막살이들, 백성들에게 함부로 굴며 악마같이 학대만 하는 자칭 고상한 자들이 무의식중에 한 행패들이 한 조선인으로 하여금 종내는 누구에겐가 -일본이건, 러시아건- 건네주는 것이 정의다, 공평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이 어떻게 다스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6. 이노우에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게 될 이재순(李載純)의 종자들은 마치 도적떼 일당같이 아주 나쁜 버릇이 들어 있다. 그 하인들도 그 주인에 그 종자다. 이재순은 인간의 형상을 한 뚱보 돼지이다. 서상집(徐相集)의 여인숙 지키는 이야기는 지금도 재미있게 생각난다. 그는 어떤 조선 사람이 좋은 여인숙을 운영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고 한다. 이유인즉, 이른바 ‘지체 높은 분’이라 불리는 그 불한당들이 강제징수를 해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7. 기록해 둘 만한 일본 공사가 두 명 있다. 조선 음모단 사건으로 직장을 잃고 소환된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다케조에(竹添)라는 유교학파이고, 또 한 사람은 미우라라는 불교신자이다.
 
  8.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궁궐에서 실종된 시녀는 한 명도 없다고 한다. 살인자들은 왕비의 사진을 손에 들고, 여인들을 모두 대조하며 조사했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하다!
 
  9. 대원군은 10월 8일, 아침 일찍 침소(寢所)에서 일본인의 한 무리가 와서 데리고 나갔다고 한다. 그의 가마는 조선 경찰 복장을 한 일본인 네 명이 메고, 그 경찰들이 대원군 노인을 집에서 데려간 것이다.
 
 
  10월 30일 수요일
 
  제물포. 오전 12시에 이노우에가 타고 온 요코하마마루 수송선이 들어왔다. 이노우에를 방문하여 조선 정부의 환영인사를 늘어놓았다. 나중에 그의 숙소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내게 말하기를, 자신이 특별사절이라는 임무 외엔 조선의 사건에 있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노라고 한다.
 
  전 군부대신 안경수와 술을 몇 잔 같이 마셨다. 그는 내게 말하기를, 왕비께서 새로 발령받은 정부의 내각관리들을 모두 살해할 음모를 꾸미셨다는 사실은 충격이라고 말한다. 그가 지난 10월 7일 오후 늦게 일본 공사관에서 우범선을 보았다는 것이다. 조희연이 안경수에게 말한 바로는, 이두황이 그 음모를 7일에서야 제보했다는 것. 현 내각이 자기에게 왕자 의화군을 유럽으로 보내도록 제안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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