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의 詩] 김선재 : 월간조선

많은 글을 썼지만, 방을 글의 소재로 삼은 적은 없었다.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해서 딱히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러나 내가 쓴 글들에는 모두 이 방의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와 세계를 구분하는 네 개의 벽과 그럼에도 아주 혼자인 것은 아니라고 위안을 삼을 만한 창과 하는 일도 없이 늘 어지러운 책상과 읽기도 전에 도착하는 책들뿐인 이 방에서 나는 두 권의 소설책과 한 권의 시집을 냈다. 또 언젠가는 책으로 묶일 원고도 쓴다.

방의 모든 것

김선재의 작품들. 왼쪽부터 시집 《얼룩의 탄생》, 소설집 《그녀가 보인다》, 장편소설 《내 이름은 술래》.

이사를 와서 처음 몇 년간 이 방은 잡동사니들을 모아 놓던 방이었다. 원고는 주로 식탁에 앉아 썼고 책은 거실에서 읽었다. 그런데 점점 나를 가둘 공간이 절실해졌다. 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중해야 할 시간이 늘어난 것만은 분명했다.

외딴 방이 필요했다. 일상과 격리된 공간을 가질 수 없다면 최소한 벽으로 가로막힌 방이라도 있었으면 싶었다. 잡동사니들을 정리해 이 방으로 들어왔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때야 나만의 방을 가진 게 태어나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안과 밖을 지운 이상한 마음의 쓸쓸한 정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 밖을 바라보니 안이 보이지 않았다
이 세상은 작고 좁고 캄캄해
‌이 방처럼 이 방의 상자처럼 상자 안의 편지처럼
편지 안의 나처럼

‌안을 보여준 적 없으니 내보일 바깥도 없었다
다만 모든 목소리는 고백의 형식

이러다 영영 말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젊은 부부는 자신들의 실패를 믿을 수 없었다
흔들리며 흔들었다
‌말을 해 나를 따라 해봐 내가 네 애비야 이 에미 애비도 모르는
처음이 중요합니다 시작이 전부입니다
‌나는 목소리를 얻은 적이 없으니 득음을 꿈꾸지 않습니다
다만 공이 되어 튀어 오르기를 반복할 뿐
공(空)이 되기를 희망할 뿐
그러니까 탄력적인 사람이라고 해둡시다
탄력을 꿈꾸는 사람이라고 해둡시다

밤마다 내 양들은 늙었다 천천히 나와 함께
에미 애비도 모르는 내가
에미 애비도 없는 내 양들의 목자가 되어
실낱같은 잠에 기대
‌운명의 실패를 쥐고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마음이 중요합니다 자세가 필요합니다
‌똑바로 앉아본 적 없는 나에게는 들려줄 풍경이 없습니다
‌소리 내어 부를 이름도 갖지 못했습니다 다만

가려진 이름 위에 마음을 얹어
침묵의 행간 위에 진심을 얹어

누구도 돌아갈 길은 찾지 못한다
심장 소리를 내어준 이여 지금은
안과 밖을 지운 이상한 마음의 쓸쓸한 정오
곧 아무 일도 없는 그림자가 걸어와
우리를 끌고 갈 것이다

실낱같은 길이 있는 동안은 가야 한다
어떻게든 어디론가

-‘이상한 마음의 쓸쓸한 정오’ 전문

책상도 없는 방에서 시집 원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방에서 지내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밤에는 숲이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원고를 읽었고, 낮에는 멍하니 앉아 창 밑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었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오전에는 햇살을 피해 벽에 기대앉았고, 오후가 되면 어두컴컴해지는 방에서 옛날을 생각하거나 지금을 생각했다. 작고 좁고 캄캄한 방에서 할 수 있는 건 쓰고 생각하고 바라보고 귀기울이는 일이 전부였다. 그게 내가 쓰는 시의 전부라는 걸 알았다. 위의 시는 그 과정에서 쓴 시다. 한 번도 방에 대해 쓴 적이 없었지만 동시에 한 번도 방을 벗어난 적 없는 시를 오랫동안 쓰고 있었다.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

그녀는 말한다. “많은 글을 썼지만, 방을 글의 소재로 삼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쓴 글들에는 모두 방의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어떤 방법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돌이키는 건 쓸모없는 일이었고, 애초부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문학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배웠다.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 책으로 배웠던 그 사실을 이 방에서 조금씩 몸으로 알아 간다. 나는 끝없이 옛날로 돌아가며 지금의 나를 확인한다. 부끄럽고 가슴 아픈 기억을 언어로 옮기는 일에는 언제나 서툴러서 혀끝까지 밀려나온 말을 어떻게 뱉어야 할지 망설이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쓰는 시들은 늘 방백과 같은 형식을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짐짓 모른 척하며 끊임없이 나에게 태도를 고치라고 다그치고 분명해지라고 채근한다. 그런 시간들은 나의 안과 밖을 지우고 과거와 현재를 뒤섞기도 한다. 그 혼돈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끊임없이 내 사고(思考)를 흔들고 앞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인 것은 분명했다.

뭔가를 이루겠다는 거창한 생각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뭔가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내가 두려웠던 건 실패가 아니라 실패한 줄도 모르고 삶을 허비하는 사람으로 사는 일이었다. 내게 보이는 세상에 내 방식대로 반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마치 공처럼 말이다. 공의 내부가 텅 비어 있다고 하더라도 괜찮았다.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고 기쁘면 기쁨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그런 바람과 두려움으로 잠은 늘 얕았고 꿈은 항상 어지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
어제는 얼음을 쓰다듬다가 얼음의 결정에 눈을 찔렸지
내일은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동공 안의 공동(空洞)이
공동 안의 적막이 나를 쓰다듬어준다면

낡은 양탄자의 보푸라기처럼 떠는 날들과
‌혼자인 구름과 함께 혼자가 되는 구름의 날들

-꼭, 다시 만나자 사라지도록
누군가 내 머리맡에 써놓고 간 낙서
꼭 다시 만나요
침묵의 영토 끝에서

-‘북극의 피아노’ 부분

미처와 차마 사이. 기억은 대부분 그 안에 존재한다.

꼭 다시 만나자 사라지도록, 이라는 말은 처음 이 집에 이사를 오던 날 이 방에서 발견한 낙서였다. 어린아이가 쓴 것처럼 서툰 글씨였고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었다. 청소를 하고 가구를 배치하면서도 나는 그 낙서를 생각했다. 지워버리거나 가리고 싶지 않았다. 종종 그 낙서를 들여다보곤 했다. 그 문장 안에 깃든 마음이 궁금했다. 정확히 이유를 댈 수는 없었다. 다만 누군가 살던 집과 방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얼굴을 모르는 그들은 여기서 무슨 꿈을 꾸고 누굴 그리워하며 살았을까. 왜 하필 ‘사라지도록’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일까. 나는 오래 ‘다시 만나자’와 ‘사라지도록’ 사이에 숨은 말들을 상상했다. 그게 시인 것 같았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은 말들을 상상하는 일. 상상하라고 부추기는 언어들. 시의 행간은 그토록 사적인 침묵들로 가득하다. 어느 날 발견한 낙서가 나에게 그 행간의 비밀들을 알려준 거였다.

시뿐만 아니라 언어로 쓰인 모든 문장은 제각각 고유한 행간을 가진다. 그건 빤히 보이지만 동시에 빤히 보지 않으면 안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보이고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계. 투명한 얼음과 같은 세계다. 얼음의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 어차피 투명한 것을 굳이 들여다볼 필요까지 있는지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그런 사람들은 결코 얼음을 봤다고 말할 수 없다. 그저 얼음이 거기 있음을 알 뿐. 시는, 오랜 시간을 들여 얼음을 만지고, 들여다보고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그것을 쥐어보는 일의 기록이다. 더불어 먼지처럼 사소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성실하게 그것들을 기록하는 일이 전부다. 누군가 남기고 떠난 낙서를 내가 오래오래 들여다보는 것도 그와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시간은 미처 보지 못한 것과 차마 볼 수 없는 사이에 존재

서른한 살에 새내기로 다시 입학하게 되었을 때의 기분이란 매일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느낌이었다는 김선재 시인. 사진 : 백다흠.

미처 보지 못한 것과 차마 볼 수 없는 것 사이. 지금이라는 시간은 거기에 있다. 종종 미처 보지 못한 풀들이 어느새 들판을 이루고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는 풍경이 역사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한다. 또 가끔은 사랑한다 여겼던 이름들과 뜨거운 계절을 함께 걸었던 얼굴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가끔 그중에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름과 얼굴은 얼마나 될까.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우연히 오래된 수첩을 발견할 때, 낡은 상자 안에서 손으로 쓴 편지들을 꺼내어 볼 때 느릿느릿 걸어오는 기억들. 그럴 때마다 내가 그 이름과 얼굴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과 차마 떠올릴 수 없는 부끄러운 기억들 사이에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언제나 그 사이에 있었다. 그 시간들이 내 안에 내재되어 주름과 표정을 만들어 간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창 밑에서 누군가 노래를 부르며 지나간다. 허공으로 퍼진 노래가 내 방에 도착하는 그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그것을 상상하고 기록하는 것이 시인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그것이 비록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일지라도, 깨어 있는 동안에는 늘 벽 너머의 당신들과 창문 너머의 목소리들을 나는 기억할 것이다. 그게 이 방과 이 방 안의 내 전부다.⊙

詩人이 만난 詩人

“부끄러움을 아는 시인이고 싶다”

⊙ ‌서른한 살에 두 번째 대학의 새내기가 되어서야 ‘백석’과 ‘김수영’ 읽어
⊙ ‌누가 시켜 해야 하는 일이었다면 견뎌내지 못했을 것… 뭐든 남들보다 두 배로 노력
⊙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들에 천착해… 등에도 표정이 있다

김선재는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시집 《얼룩의 탄생》, 장편소설 《내 이름은 술래》, 소설집 《그녀가 보인다》 등을 출간하며 문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있다.

―가을학기가 시작됐네요. 당연 바쁘실 거고요. 완벽한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거나 한숨을 돌릴 수 있는 그런 시간은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합니다.

“여느 성실하고 부지런한 소설가들에 비하면 턱없이 게으른 편이죠. 등단 초기에는 자나깨나 무슨 시를 쓸까, 무슨 소설을 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지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사는 게 저 자신이나 주변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늘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세상을 바라보니 편하게 살 수가 없었던 거죠. 늦은 나이에 등단을 하다 보니 스스로 뭔가를 빨리 해야 한다는 조급증 혹은 강박이 생긴 게 아마 그 이유였던 것 같아요. 언젠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그 영화를 본 이유는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죠. 오랫동안 불안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괴롭혔다는 걸 알게 된 즈음이었어요. 실패와 반성을 거듭하면서 요즘은 많이 편해졌습니다. 어느 정도의 불안이 저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고요.”

시인은 “틈틈이 글을 쓰는 스타일은 아니고 한꺼번에 몰아서 쓰고 그런 후에 오랫동안 넋 놓고 있기도 하고, 그렇게 지낸다”고 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얘기했다.

시나 소설이나 ‘쓴다’는 면에서는 같아

김선재 시인은 “부끄러움을 아는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항상 그녀를 응원한다.

“완벽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완벽하게 혼자라고 느낄 만큼의 여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고요. 그저 틈나는 대로 읽고, 읽다가 잠들고, 다시 깨어나 창 밖에서 들리는 소리들에 귀기울였다가 여기가 아닌 먼 곳을 상상하기를 반복하죠. 그런 상상을 하며 제가 항상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여기가 아닌 먼 곳을 상상하는 일이야말로, 늘 제가 여기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없음을 통해 있음을 확인한 겁니다. 그런 아이러니가 제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아요. 여행을 가고 싶다가도 막상 떠나게 되면 여러 걱정 때문에 안절부절 못 하는 저를 발견해요.”

―시와 소설, 두 장르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두 작업을 동시에 하는 문인들이 예전에 비해 드뭅니다. 윤후명, 한강, 김선우 정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시와 소설은 표현방식이 다르다는 장르적 특성도 있겠지만 문학적인 에너지의 차이도 크지 않을까 싶어요. 시와 소설 각각의 매력과 에너지의 차이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두 장르를 거의 동시에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아마 시를 먼저 쓰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짧은 건 시이고 긴 건 소설이라는, 그야말로 형식적인 장르 구분밖에 할 수 없는 수준이었어요. 생각해 보면 그게 두 장르를 편견 없이 대하게 된 이유였던 것 같아요. 우연히 시를 알게 됐고 시를 쓰면서 소설을 같이 공부했죠. 시 창작 수업에서 시를 쓰고 소설 창작 수업에서는 소설을 쓰는 게 당연한 시절이었어요. 처음부터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제게는 그저 ‘쓴다’는 행위뿐이었습니다. 사실 쓰기 위해 입학한 학교가 아니라 잘 읽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입학한 학교였으니 ‘읽고 쓴다’는 것 외에는 별로 구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시인은 “등단에 대한 욕심도 없었다”고 했다. 시를 쓰는 일은 늘 하지 못한 과제와 같은 것이었고, 소설을 쓰는 일은 해야 하는 과제와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매일 시를 썼고 시를 쓰면서 소설을 썼습니다. 민망하지만 별로 어렵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때 제가 쓴 글은 그야말로 소설도 아니고 시도 아닌, 그저 ‘쓴다’는 행위에만 충실한 글들이었죠. 시와 소설은 이래야 한다는, 장르적 특성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소설과 시를 동시에 써야 하는 지경이 생겼는데 그때 저 또한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생각했어요.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주변의 말을 들어야 하나 하는 고민도 했었죠. 그런데 역시 시나 소설 모두 ‘쓴다’는 면에서 같은 텍스트라고 생각해요. 억지로 뭔가를 쥐어 짜내는 기계적인 글쓰기가 아닌 한,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날아가는 새를 보는 동안은 시를 쓰고 또 길에서 폐지를 줍는 어르신들을 보면 그들의 지나온 삶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건 의식적인 게 아니라 그저 습관처럼 하게 되는 생각들인 것 같아요. 어떤 때는 시를 쓰면서 소설을 쓰고, 또 어떤 날은 소설을 쓰면서 시를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틈틈이 메모를 합니다. 그저 단어 몇 개나 풍경에 대한 단상, 또는 어떤 글의 첫 문장 같은 것들입니다. 뭔가를 써야 할 때면 그것들을 꺼내 보죠. 소설이 되는 단어와 시가 되는 문장도 있고, 시가 되는 단어나 소설이 되는 문장들도 있습니다. 그 둘의 차이를 설명할 명확한 말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요. 그러니까 제게 시와 소설이란 의식적으로 구분한 두 장르가 아니라 ‘쓴다’는 행위를 해야 하는 하나의 백지 같은 느낌입니다. 큰 새가 낮게 날아가는 걸 보면 아마 시가 쓰고 싶어질 거 같아요. 그리고 그 새가 싼 똥이 제가 읽던 책 위에 떨어진다면 아마 소설을 쓰고 싶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서른한 살에 다닌 대학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느낌

―2006년 《실천문학》에 소설로 등단하고, 2007년 《현대문학》에 시로 등단했습니다. 문청 시절엔 시와 소설을 함께 공부하지만 등단을 목표로 할 때는 우선적으로 갈망하는 장르가 있기 마련인데요. 문청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불안’과 연결지어 말할 수 있어요. 저는 두 곳의 대학을 다녔어요. 20대 때는 문학의 ‘ㅁ’자도 모르는, 아주 평범하고 지루한 삶을 살았죠. 30대가 돼서야 처음으로 백석을 읽었고 김수영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뒤처져 있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어요. 서른한 살에 새내기로 다시 입학하게 되었을 때의 기분이란 정말 매일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알던 세계와는 너무 다른 세계였고 그 세계에서 저는 그야말로 백치 상태의 존재였기 때문에 뭐든 남들보다 두 배로 노력해야 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해야 하는 것이었다면 아마 견뎌내지 못했을 정도로 열심히 읽고, 썼던 시간이었어요.”

시인이 먼저 쓰기 시작했던 건 시였다. 물론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늘 강의실 맨 앞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딱히 잘하는 게 없는 시인에게 어느 날 시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시 모임에 나오라고 권해서 시작한 게 시였다는 것이다.

“시를 미친 듯이 썼던 건 아마 그 때문이었어요. 누군가 제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얻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마 제게 모임을 권했던 게 소설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다면 소설을 먼저 썼겠죠. 소설을 먼저 쓰기 시작했더라면 시를 가까이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이 든 건 최근이에요. 소설이 갖는 형식과 내용을 먼저 익혔더라면 시를 쓰는 게 좀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제 경우 논리를 토대로 논리 너머의 세계를 구현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거예요.”

―김선재 시인의 시와 소설을 읽다 보면 다소 관념이 강하지만 사랑과 상처 혹은 슬픔의 잔상이 짙게 남고 가끔은 가슴이 아리기도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시의 화자(話者)나 소설의 인물들이 대부분 결핍과 불안과 고독에 자신의 삶을 배치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모르는 그런 취향이 있어요. 제가 살아온 시간 모두가 결핍과 불안으로 점철된 시간이었는지도 모르죠. 아주 오랫동안 떠올리게 되는 하나의 단상 같은 게 있어요. 가을이었고 해가 질 무렵이었는데 누군가 그 가을볕을 안고 서 있는 걸 보았어요. 얼굴은 보이지 않는 그의 등이 너무나 쓸쓸해 보여서 울고 싶은 지경이었습니다. 등에도 표정이 있다는 걸 그날에야 알게 된 거였죠.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들에 천착하게 된 건 그날부터인 것 같아요. 사람과 사람, 관계와 관계 안에서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감정들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그런 보이지 않는 감정들을 발견할 때마다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관념적인 혐의가 짙은 것 또한 그 때문인 것 같아요.”

문학을 하지 않았다면…

―일 년 사이에 시와 소설로 연이어 등단을 할 정도면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글을 써왔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습작을 할 때 많은 일을 겪었을 텐데, 어떤 문제에 봉착하거나 한계에 부딪힌 일은 없었나요.

“서른이 넘어 겨우 알게 된 문학이라는 거대한 대지를 어떻게 걸어야 하나 늘 막막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이켜보면 문학을 하는 동안만큼 살아 있음을 실감해요. 서른 이전의 저는 늘 누군가의 말을 들어야 하고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하는 사람이었어요. 점수에 맞춰 대학을 갔고, 학점을 고려해 수업을 들었고, 졸업 후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취업해서 회사와 집을 오가는 사람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버스 정류장에서 바닥을 뒹구는 신문을 주워 읽었는데, 저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이유로 눈물이 났어요. 글자를 읽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였죠. 남은 제 삶을 생각하니 갑자기 두려워졌어요. 고작 20대 후반이었는데 그런 상태로 평생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어요. 그날로 당장 사표를 쓰고 싶었지만 그 후의 일 또한 막막했습니다. 뭘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고 내가 과연 뭘 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었죠. 그때야 저는 제가 늘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고 자신감이 결여된 삶을 살아왔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후 평생에 딱 한 번 하고 싶은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뭘 고를까를 생각했죠. 그래서 서른이 넘어 다시 대학에 입학한 거예요. 열아홉에 가고 싶었던 학과를 서른하나에야 가게 된 거였죠. 날마다 한계를 느끼고 여전히 두렵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글을 쓰는 일밖에 없는 것 같아요. 문학을 하지 않았다면…, 기쁨도 모르고 슬픔도 모르는, 그야말로 감정이 거세된 사물처럼 지내고 있겠죠.”

―쑥스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시인으로서 그리고 소설가로서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나요.

“부족한 게 많습니다. 소설집을 내고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문장이 좋다는 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칭찬이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것이 칭찬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죠. 한동안 소설 쓰기가 두려웠어요.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 두려웠던 것 같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매일 읽기만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제는 어느 정도 저 자신으로부터도, 또 타인의 평가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워지는 걸 느낍니다. 그저 묵묵히 제가 쓸 수 있는 걸 쓰고, 반성하고 노력하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그 상투적인 문장의 의미를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아요.”

―글을 쓰는 일은,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스스로 깨우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세계를 갈망하지만 세계와 만날 수 없고, 소통을 갈망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는 작가들만의 심리가 전제된 말이기도 한데요. 글을 쓰는 일이 그리고 문학을 하는 일이 김선재 시인에게는 어떤 힘이 되었나요.

“누구나 말하고 싶은 욕망과 말하고 싶지 않은 욕망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난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보여주고 싶은 욕망과 보여주고 싶지 않은 욕망 사이에서 늘 길항하곤 하는데요, 그때마다 서른 살 초반의 그 맹목적이고 무식한 열정을 떠올립니다. 날마다 내일을 희망하고 어제를 돌아보게 하고 또 상상 너머에 존재하는 무한한 세계를 잊지 않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문학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요.”

부끄러움을 아는 시인이고 싶어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어떤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한 말씀 해주세요.

“다음 시집을 준비 중입니다. 어쩌면 그 사이에 소설집이 나올지도 모르겠고요. 사실 제 삶에서 분명하고 반듯한 계획이 언제는 있었는가 싶어요. 번번이 상처받거나 낙담하고 의기소침한 채로 지내기도 하지만 그 또한 제 모양이니 어쩔 수 없이 감수하고 삽니다. 사실 지금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지요. 누군가 제가 쓴 글을 읽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얼마 전 제가 쓴 시집을 들고 와 저자 사인을 청한 분이 계셨어요. 불현듯 부끄러웠고,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하는 반성도 들었어요. 그러고는 다짐했어요.

‘부끄러움을 잊지 말자’고요. 부끄러움을 아는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그것이야말로 제가 낼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낮은 목소리예요.”

시인을 만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귀한 시간이었고 강력한 이미지를 받았다. 시와 소설을 통해 각각의 개성적 세계를 펼쳐가고 있는 김선재 시인의 내면과 일상을 함께 들여다보면서 글을 쓰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김선재 작가의 새로운 시집과 소설집을 기대한다. “애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항상 응원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김병호 시인·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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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재

시인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은 말들을 상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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