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韓蘇정상회담 앞두고 만난 도브리닌, “얼마나 지원해 줄 수 있나”
⊙ 장관 시절 매주 한 번씩 金大中 대통령과 만나 對外정책 조율
⊙ 파월, “클린턴의 對北유화정책 계승하겠다”고 DJ에게 확언했다가 부시 질책받고 하루 만에 입장 바꿔
⊙ “외교에서 대통령은 최후의 보루… 대통령이 앞장서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수 있어”
李廷彬
⊙ 78세. 서울대 법학과 졸업. 제11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 외무부 중동국장, 주시카고 총영사, 주네팔대사, 대통령 정무비서관, 주스웨덴대사,
외무부 제1차관보, 주인도대사, 외교안보연구원장, 주러시아대사,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외교통상부 장관 역임.
⊙ 장관 시절 매주 한 번씩 金大中 대통령과 만나 對外정책 조율
⊙ 파월, “클린턴의 對北유화정책 계승하겠다”고 DJ에게 확언했다가 부시 질책받고 하루 만에 입장 바꿔
⊙ “외교에서 대통령은 최후의 보루… 대통령이 앞장서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수 있어”
李廷彬
⊙ 78세. 서울대 법학과 졸업. 제11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 외무부 중동국장, 주시카고 총영사, 주네팔대사, 대통령 정무비서관, 주스웨덴대사,
외무부 제1차관보, 주인도대사, 외교안보연구원장, 주러시아대사,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외교통상부 장관 역임.
1989년 2월 나는 외무부 제1차관보(정무)가 되어 본부로 돌아왔다. 당시는 노태우(盧泰愚) 정부가 88올림픽 성공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북방(北方)외교를 의욕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얼마 후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가 전직정부수반협의회(IAC) 참석차 출국하게 됐다. 이 모임은 세계 각국의 국가원수, 총리, 고위공직자 출신 원로(元老)들이 참석하는 자리였다. 나는 외무부 정무차관보 자격으로 신 전 총리를 뵙고, 국제정세, 우리 정부의 외교정책 등에 대해 브리핑을 했다. 신 전 총리는 나와 식사하면서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 황허(黃河) 전 중국 외교부장, 아나톨리 도브리닌 전 주미(駐美) 소련 대사 등이 참석한다고 말해 주었다. 도브리닌은 1962년부터 1986년까지 24년간 주미 소련 대사를 지냈고,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외교고문으로 있던 거물 외교관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귀가 번쩍했다. 도브리닌을 한국으로 초청할 수 있다면, 한소(韓蘇)수교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비공식 라인을 통해 총리 도브리닌을 한국으로 초청할 수는 없겠느냐?”고 물었다. 신 전 총리는 “슈미트 전 독일 총리 등을 통해 알아보겠다”고 했다. 얼마 후 신현확 전 총리로부터 도브리닌의 방한(訪韓)이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이듬해 5월 20일 서울에서 전직정부수반협의회가 열렸다. 도브리닌도 왔다. 우리는 그의 방한을 비공개하기로 했다. 서울 한남동 외무부 장관 공관에서 최호중(崔浩中) 장관, 나, 도브리닌과 그의 수행원이 참석하는 만찬을 갖기로 했다. 도브리닌을 맞이하기 위해 외무부 심의관 한 명을 공항으로 내보냈다. 그런데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도브리닌 대사가 장관 공관으로 못 간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도브리닌 대사 말이, 청와대 외교안보보좌관이 오라고 해서, 그쪽으로 가야겠다고 합니다.”
韓蘇정상회담 교섭
당시 외교안보보좌관은 김종휘(金宗輝)씨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박철언(朴哲彦) 청와대 정책보좌관이 물밑에서 대(對)동구권 외교를 전개하고 있었다. 대외(對外)정책을 여러 군데서 수행하는 셈이었다. 외무부에서는 다른 곳의 교섭을 잘 알지 못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채널에서 도브리닌 초청을 추진하고 있었나’ 싶으면서도, 기가 막혔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외무부 장관이 초청한 인사를 다른 기관에서 가로채버리다니…. 하여튼 도브리닌은 청와대로 갔고, 외무부 장관 만찬은 취소해야 했다. 나도 도브리닌을 만나지 못했다.
도브리닌이 다녀간 지 며칠 후, 청와대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워싱턴에 가서 도브리닌과 접촉, 한소정상회담을 교섭하라는 것이었다. 도브리닌과 접촉할 수 있다는 전화번호도 주었다. 나는 사무실에 ‘휴가 중’이라는 팻말을 걸어놓고 비밀리에 워싱턴으로 출장을 갔다. 워싱턴에 있는 우리 대사관에도 알리지 않고, 내셔널호텔에 투숙했다.
청와대에서 받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관 정무과(政務課)였다. 도브리닌의 개인 전화번호가 아니면, 최소한 그의 비서 전화라도 될 줄 알았는데, 주미 소련 대사관 정무과라니 당혹스러웠다. 전화받는 사람에게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예브게니 아파나시예프 정무참사관’이라고 대답했다. 후일 주한 러시아 대사(1997~2001년)를 지냈고, 현재 주일(駐日) 러시아 대사로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도브리닌을 찾았더니 그는 “나는 도브리닌 고문이 주미 대사로 있을 때 그의 비서였고, 지금도 그에 대한 연락은 내가 다 하고 있다”고 답했다. 알고 봤더니, 도브리닌은 고르바초프의 캐나다와 미국 방문 준비를 위해 당시 캐나다에 가 있었다. 아파나시예프는 “도브리닌이 근일간 워싱턴에 올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워싱턴에 온 목적을 말하고, 그와의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수일 후 워싱턴에 온 도브리닌을 만났다. 주미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임성준(任晟準·외교안보수석비서관, 주캐나다 대사 역임) 참사관을 불러 협의내용을 기록하도록 했다. 도브리닌에게 “한소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왔다”고 했더니,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직 양국 정상회담을 논할 단계가 아닌데, 무슨 소리냐’는 식의 반응이었다.
도브리닌은 이후 교섭과정에서 “한국이 우리에게 얼마나 지원해 줄 수 있는지를 분명히 해달라”고 요구했다. 대소(對蘇)지원이라니? 나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차관보에 불과한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성격의 일도 아니었다. 정상회담 교섭은 겉돌았다.
도브리닌, 盧在鳳 비서실장과의 만남 거부
그러는 사이에 이병기(李丙琪·현 대통령비서실장) 의전수석비서관이 한소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날아왔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내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서 교섭에 진전이 있는지를 물어왔다. 정상회담에 대해 아무것도 합의한 게 없는데 대통령은 벌써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했다는 이병기 수석의 얘기를 듣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결국 도브리닌으로부터 한소정상회담에 대해 확답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나도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했다. 도브리닌도 고르바초프를 맞으러 샌프란시스코로 왔다. 거기서 만난 이병기 수석과 나는 “만일 정상회담을 못 하게 되면, 우리 두 사람은 금문교에서 투신해야 한다”는 농담을 나누었다.
나는 도브리닌에게 “대소지원 문제는 내가 확답할 수 없는 문제이니, 노재봉(盧在鳳) 대통령 비서실장과 만나 논의해 보라”고 했다. 노재봉 실장도 내게 자신과 도브리닌의 만남을 주선하라고 했다. 그런데 도브리닌은 노 실장과의 만남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나는 그 사람 안 만날 겁니다. 그런 무례(無禮)한 사람과는 만나지 않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지난번 한국에서 만났을 때 그가 내게 삿대질(Finger-point)을 했어요. 정말 불쾌했습니다. 모멸감을 느꼈어요.”
교수 출신인 노재봉 실장은 어떤 일을 설명할 때는 손가락을 세우고 지적(指摘)을 하듯이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게 도브리닌의 눈에는 삿대질을 하는 걸로 비친 모양이었다. 서양 사람들은 삿대질을 커다란 인격모독으로 받아들인다. 구미(歐美)의 외교무대에서 평생을 보낸 외교 거물인 도브리닌으로서는 노 실장을 더 없이 무례한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한 시간 반가량 도브리닌을 설득하다가 내 방으로 돌아왔더니, 노 실장의 비서가 전화를 걸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실장이 ‘도브리닌에게 가서 약속을 잡으라고 했더니, 하라는 약속은 않고, 자기가 뭘 한다고 한 시간 반씩이나 얘기하고 있느냐’고 노발대발하다가 조금 전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외교의 ‘외’자도 모르는 놈들이…”
큰일이다 싶었다. 정상회담을 하려면,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했다. 나는 밤 11시40분에 도브리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자다가 일어나서 전화를 받았다. 나는 “당신이 노 실장을 만나주지 않으면 내 목이 달아나게 생겼다”면서 “내일 새벽 5시도 좋고 6시도 좋다. 10분이 됐건, 20분이 됐건, 노 실장을 좀 만나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도브리닌은 같은 직업외교관 출신으로서 내 고충을 이해한 것 같았다. 다음날 새벽 5시 반에 노 실장과 만나겠다고 했다. 나는 노 실장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 5시 반에 도브리닌과 시간을 잡아놨으니, 늦지 않도록 하라”고 전했다. 노재봉 실장과 도브리닌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두 사람이 만난 다음날인 6월 4일(미국시각) 샌프란시스코 페어먼트호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최초의 양국 정상회담을 갖고 한소 관계 정상화 등에 합의했다. 그해 9월 30일(미국시각) 최호중 장관과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뉴욕 유엔본부에서 양국 외무장관 회담을 갖고 한소수교를 공식 발표했다.
노태우 정부는 탈냉전(脫冷戰)의 세계사적 흐름을 잘 포착하여 북방외교를 적극 추진함으로써 우리나라 외교의 지평을 넓혔다. 하지만 앞에서도 본 것처럼 그 과정에서 대통령의 측근들이 전면에 나서고, 외무부는 소외되는 문제도 있었다. 한번은 외무부 출입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외교의 ‘외’자도 모르는 놈들이 외교를 망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 얘기가 청와대로 들어갔다. 대학 후배인 정구영(鄭銶永·검찰총장 역임) 민정수석비서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 선배, 북방외교와 관련해서 청와대를 비난하는 말은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께서 ‘대(對)공산권 외교와 관련해서 외무부에서 시비를 거는 데, 진상을 조사해 보라’고 했습니다. 이 선배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 테니 협조해 주세요.”
나는 조사를 받으면서 “청와대를 비난한 게 아니라, 외교의 일반원칙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다행히 그걸로 넘어갈 수 있었다.
라오 印총리, 韓외무장관과 별도 만남 희망
1991년 나는 주인도 대사로 나갔다. 당시 나라시마 라오 인도 총리는 외무장관을 지낸 인물이어서 국제정세 변화에 관심이 많았다. 인도는 냉전시대 국제무대에서 비동맹(非同盟) 세력의 수장 역할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반(反)서방·친소(親蘇) 입장을 견지했었다. 그런데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소련마저 해체되자 외교노선을 재(再)설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라오 총리는 우리나라의 북방외교에 주목했다. 탈냉전의 흐름을 타고 동구권 국가들은 물론 소련, 중국과 잇달아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대외관계를 잘 관리하는 것이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들어선 후, 인도 총리 비서실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라오 총리가 한국 방문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물었다.
“라오 총리가 방한하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한국의 대(對)강대국 외교의 실상을 알아보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양국 간 경제협력 강화책을 협의하자는 것입니다.”
당시 오랫동안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유지하던 인도는 라오 총리 지도 아래 외자(外資)유치 등 개혁개방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호랑이’ 소리를 들으면서 한국 경제가 잘나가던 시절이라, 인도로서는 한국의 발전모델 연구를 위해 한국과의 경협(經協)을 추진하고 싶었을 것이다. 경제는 그렇다 해도, 우리나라의 외교정책까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뜻밖이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라오 총리의 방한이 구체화되자, 인도 측에서는 한 시간 정도 라오 총리와 한승주(韓昇洲) 외무부 장관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한국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총론은 정상회담 시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듣겠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외무장관으로부터 직접 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정상회담차 타국을 방문하는 정상이 그 나라 외무장관과 따로 시간을 갖겠다는 것은 외교 관례상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 사실을 본부에 보고했더니, 의전 담당자도 “전례(前例)가 없는 일”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나는 한승주 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망쳐버린 韓·印 頂上회담
“방한하는 인도 총리가 한국 외무장관을 만나서 같이 얘기를 좀 나누어보겠다는데, 그걸 꼭 의전을 따져서 안 된다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인도 측에서 저렇게 원하는데, 만나서 여러 가지 설명도 해주고 그러면 좋지 않겠습니까?” 한 장관도 내 건의를 받아들였다. 1993년 9월 9일 라오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다. 다음날 양국 역사상 첫 정상회담이 열렸다. 우리 측에서는 한승주 외무장관, 나, 정종욱(鄭鍾旭·주중 대사 역임)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이 배석했다. 통역은 박진(朴振·16~18대 국회의원) 비서관이 맡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라오 총리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물었다.
“인도는 지금 외교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주변 4강(强)과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외교를 잘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어떤 외교적 목표를 가지고 대외정책을 추진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라오 총리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자신이 단행한 금융실명제(實名制)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약속했던 정상회담 시간의 절반 이상이 실명제 얘기로 흘러갔다. 아무리 기다려도 자기가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자, 라오 총리는 통역이 자기가 한 말을 잘못 전달했나 싶어서인지,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을 끊고 다시 한 번 한국의 외교정책에 대해 질문했다. 라오 총리의 얼굴을 보니, 그의 얼굴이 상당히 굳어 있었다. 박진 비서관이 라오 총리의 질문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그 특유의 사투리 섞인 말투로 말했다.
“가만 있그래이. 내 하던 얘기 마저 하고…”
김영삼 대통령은 다시 실명제에 대한 얘기를 이어갔다. 라오 총리는 김영삼 대통령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이 몸을 돌리고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다. 양국의 첫 정상회담은 그렇게 끝이 나 버렸다.
門前逐客 당한 韓昇洲 장관
다음날 라오 총리가 묵고 있는 신라호텔로 한승주 외무장관이 찾아갔다. 그런데 라오 총리는 자기 방을 찾은 한 장관과 악수만 나눈 후 “갑자기 다른 일정이 생겨 시간을 내기 어렵겠다”며 한 장관을 내보냈다. 그런 식으로 문전축객(門前逐客)을 당한 한승주 장관도, 그걸 지켜보는 나도 황당했다. 한 장관이 내게 불만을 토로했다.
“자기가 보자고 해놓고는 갑자기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하면서 못 만나겠다고 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우요?”
나는 솔직하게 얘기했다.
“어제 정상회담 할 때 그 광경을 못 보았습니까? 라오 총리의 표정을 보면, 뭐라고 할까, 표현 못 할 야릇한 모습을 취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장관님을 못 만나겠다고 하는 것도, 어제 정상회담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승주 장관도 그제야 무슨 까닭인지 알겠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많은 한국인이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은 것만 보고, 인도를 후진국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인도는 대단한 나라다. 영토는 328만7260km2, 인구는 중국에 버금가는 12억명에 달한다.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때문에 나름 대국(大國)의식을 갖고 있고, 자존심이 강하다.
내 차량을 운전하는 인도인 기사가 잘못해서 홧김에 “그만두라”고 한 적이 있다. 그 기사는 일언반구 변명도 없이 그 길로 짐을 싸서 나가버렸다.
대사 재직 중 인도에서 큰 지진이 났다. 20만명이 죽었다. 우리 정부에서는 지원비로 5만 달러를 내놓으려 했다. 일본은 10만 달러를 내놓겠다고 했다. 나는 사망자 규모를 생각할 때, 5만 달러는 너무 적다고 생각했다. 지원비를 20만 달러로 증액해 달라고 본부를 설득해 성사시켰다. 나는 인도 외무차관에게 “사실 20만 달러는 우리나라가 외국에서 재해가 났을 때 지원한 금액으로는 사상 최고액수다. 한국 정부에 고맙다는 편지라도 보내주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인도 정부는 감사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런 인도인들의 심리를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자랑만 했던 것이다.
대우자동차의 인도 진출
인도는 오랫동안 외국 산업의 인도 진출을 막으면서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펴오다 보니, 경제가 상당히 낙후되어 있었다. 국민 대부분이 빈곤했지만, 내가 대사로 재직하고 있던 당시에 이미 연(年)소득 2만 달러를 넘는 사람이 1억명이 넘는다는 얘기가 있었다. 아시아 지역에서 2만 달러 소득의 인구가 1억명이 넘는 나라는 인도 말고는 없었다. 그런데도 거리를 다니면서 보면, 외제차를 보기 어려웠다. 인도 경제부 장관에게 물어보았다.
“어째서 인도에서는 유럽 자동차들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겁니까?”
“유럽 자동차 메이커들은 전부 구상만 하고 계획만 세우지, 그걸 실천에 옮기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벌써 여러 해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자동차 회사들이 인도에 진출할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아자동차, 현대자동차, 대우자동차 사장에게 직접 전보(電報)를 보냈다.
“내가 보기에는 인도 자동차 시장의 전망이 좋다. 유럽 자동차 회사들이 아직까지 인도 시장에 진출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 진출하기 전에 우리나라 회사들이 먼저 들어오면 좋겠다. 회사의 실무조사팀을 빨리 보내서, 인도 자동차 시장이 어떠한지 조사해 보고 진출 여부를 결정하면 좋겠다.”
기아자동차에서는 인도 시장에 진출할 여력이 없다는 연락이 왔다. 현대자동차에서는 실무조사팀을 보내겠다고 했다. 가장 적극적인 것은 대우의 김우중(金宇中) 회장이었다. 그는 직접 인도로 와서 시장 사정을 살펴본 후, 내게 인도 총리와의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했다. 김우중 회장은 인도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인도에 자동차 공장을 지을 경우 세금 문제 등에 대해 꼼꼼하게 질문했다. 인도 총리는 관련 경제부처 차관을 연결해 주었다.
“인도 IT인력 1000명 수입하자”
대우 측에 공장 건설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자동차 한 대 가격을 1만 달러로 잡고, 1대당 1000달러를 선금(先金)조로 받아서 충당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대우는 그렇게 받은 계약금을 가지고 인도에 공장을 지었고, 성공적으로 인도 시장에 진출했다.
나중에 정세영(鄭世永) 현대자동차 사장을 만난 기회에 “인도에 조사팀을 보낸다더니 왜 소식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실무팀을 보냈는데, 시장 전망이 안 좋다는 보고를 받고 인도 진출을 접었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는 대우가 인도 시장에서 성공한 것을 본 후, 1996년 인도 시장에 진출, 성공을 거두었다. 작년에는 인도 자동차 시장 점유율 2위에 올랐다.
당시 우리나라는 막 IT산업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있었다. 인도에는 IIT(Indian Institute of Technology)라는 국립공대가 여러 곳에 있었다. 영어에 능통하고 실력 있는 IT인력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었지만, 인도 국내에서는 이들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300달러 정도면 이들을 데려다 쓸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 중동에 진출한 우리나라 단순 노동자들의 월급이 1000달러 정도였다. 1000달러면 인도의 IT인재 3명을 데려올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나는 “인도의 IT인력을 1000명 정도 수입하자”고 건의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근래 인도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인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5월에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방한, 박근혜(朴槿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반가운 일이지만, 좀 더 일찍 인도에 대해 관심을 갖고 경협을 강화했으면 양국 모두에 더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장 힘들었던 러시아 대사 시절
1995년 나는 주러시아 대사로 나갔다. 주변 4강 중 한 나라의 대사가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시절은 내 외교관 시절 중 가장 어려운 시절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러시아어(語)를 하지 못하는 것이 큰 걸림돌이었다. 영어로라도 의사소통을 하면 좋은데, 러시아 정부에서는 자국(自國)에 주재하는 외국 대사가 차관급 이상 고위 공직자와 만날 때에는 반드시 통역을 사용하도록 하고 있었다. 모든 대화를 통역에 의존해야 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구(舊)동구권 출신 몇 나라 대사를 제외하면, 다른 나라 대사들도 러시아어를 할 줄 몰랐다. 미국 대사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대사는 “일본과 러시아가 수교한 지 100년이 넘었는데, 내가 러시아어를 구사할 줄 아는 최초의 대사”라고 말했다.
게다가 러시아는 당시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소련이 해체된 지 4년이 지났지만,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더디기만 했다. 옐친 정부가 국유(國有)기업을 민영화(民營化)하는 과정에서 권력과 유착해 국부(國富)를 가로채는 마피아집단이 등장했다. 사회주의 배급체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국민들은 식량 등 물자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체첸 등 소수(少數)민족들이 분리독립을 외치며 곳곳에서 테러를 자행하고 게릴라전을 벌였다.
설상가상으로 병약(病弱)한 옐친 대통령은 국정(國政)을 틀어쥐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경우, 옐친 대통령이 6개월 이상 국사(國事)를 돌보지 못하는 바람에 부임한 지 6개월여가 지난 후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총리에게 신임장을 제정해야 했다. 공산당이 다수당(多數黨)을 차지하고 있는 국회는 사사건건 대통령과 충돌했다.
한·러 트레이드센터 사업 중단
그 바람에 노태우 대통령이 한소수교를 전후해 추진했던 양국 간 경협사업들도 모두 지지부진한 상태에 있었다. 그중 하나가 모스크바 한·러 트레이드센터(KRTC) 사업이었다. 나호트카 공단 건설 사업과 함께 1990년 양국 각료회담에서 합의한 사업이었다. 한국 측이 모스크바대학 근처 120만m2의 부지에 상하수도, 도로, 주거 및 산업시설 등의 인프라를 개발해 주는 대가로, 러시아 측에서는 5만m2의 부지를 제공해 주고, 한국 측은 이 땅에 트레이드센터와 아파트 등을 건설해 활용하는 사업이었다.
1996년 7월 22일 기공식이 열렸다. 나도 주관사인 KOTRA의 초청을 받아 이 자리에 참석했다. 행사는 요란하게 진행됐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기공식이 끝난 후, 러시아 측 대표로 참석했던 경제부 차관이 말했다.
“행사가 끝나면 제 사무실에서 만났으면 합니다. 올 때는 경제 담당 참사관 등 실무자들을 꼭 데리고 와주십시오.”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걸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경제부 차관을 찾아갔다. 경제부 차관은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한·러 트레이드센터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양국 간 조세, 외환(外換), 기타 행정적인 문제들에 대한 협의를 선행(先行)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양국 실무자 간에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기공식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양국 간 실무작업을 잘 진행해 드디어 기공식을 여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내게는 날벼락 같은 얘기였다. 알고 보니 문제는 러시아 측에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진 후 급진적인 시장경제화 정책을 펴면서 외자유치 등을 위해 우리나라의 대통령긴급명령과 같은 대통령 명령(命令)들을 발포(發布)했다. 이런 대통령 명령들은 국회가 제정한 법률들과 상충(相衝)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산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는 대통령 명령이 법률보다 하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트레이드센터 건립을 위한 조세 특례 제공도 법률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사업 진행은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덜컥 기공식을 해버린 것이었다.
이 사업에는 5000만 달러를 투자한 LG를 비롯해 5개 회사가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하고 있었다. 나는 주관사 측에 지금까지 사업을 백지로 돌리고 상업적 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검토 끝에 원래 정치적 고려에서 시작된 사업이어서, 상업적 베이스에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대답이 나왔다. 나는 더 이상 사업을 끌고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주관사 측에서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결국 컨소시엄은 해체되고, 트레이드센터 사업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기아자동차 조립공장 사건
나호트카 공단 개발은 당초 330만m2(100만 평)를 개발하기로 했으나, 역시 지지부진했다. 2002년 김대중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19만8000m2(6만 평)만 개발하기로 합의했으나, 여전히 진척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황당한 사건도 있었다. 발트해 연안에 있는 러시아 영토 칼리닌그라드에 기아자동차가 조립공장을 짓게 되었다. 연산(年産) 1000대 정도로 그다지 크지 않은 사업이었다. 칼리닌그라드의 한 호텔에서 조인식을 하니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이 왔다. 가보니 요란했다. 러시아 경제부처 장관들은 물론, 러시아 주재 외국 대사들도 여러 명 참석했다. TV방송사들도 많이 나왔다.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걸리는 칼리닌그라드로 내빈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비행기도 두 대나 준비했다. 김선홍 기아 회장도 “이렇게 호들갑을 떨 만한 사업이 아닌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어리둥절해했다.
공장 부지라는 곳을 가보았는데, 구소련 북해함대 사령부가 있던 곳이라고 했다. 대지 면적이 수만 평인데, 그중 일부에 기아자동차 조립공장을 짓는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부 러시아 인사들이 기아자동차 조립공장을 짓는다는 핑계로 사령부 부지를 불하(拂下)받기 위해 꾸민 짓이었다. 염불보다는 잿밥에 눈이 어두운 꼴이라고 할까? 결국 그 땅은 몇몇 사람이 착복했고, 기아자동차 조립공장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러시아와의 경제협력과 관련해 가장 큰 현안은 한소수교 때 제공한 차관(借款)의 회수 문제였다. 한소수교를 하면서 우리 정부는 소련에 30억 달러의 차관을 약속했고, 이 중 14억5000만 달러가량을 실제로 제공했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차관은 중단됐지만, 이자가 붙어서 22억 달러 정도로 상환해야 할 비용이 불어났다. 그런데 1998년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버렸다. 우리 정부는 러시아와 교섭, 이자는 탕감해 주고, 원금은 일부는 매년 얼마씩 현금으로 돌려받고, 나머지는 무기로 돌려받으려 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현금으로 갚는 것은 못 하겠다고 버텼다. 나는 정부에 “러시아에 제공한 차관은 처음부터 상업적 베이스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만큼, 차라리 미해결 상태로 남겨놓아 대(對)러시아 외교의 지렛대로 활용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결국 ‘불곰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로부터 대형 헬기, 전차(戰車), 장갑차 등을 들여오는 걸로 타결을 보았다.
러시아 정보기관 FSB 국장과 만나
당시 러시아가 관심을 보인 것은 남북한, 러시아, 3각 경협사업이었다. 북한에는 구소련 시절에 소련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건설한 비료공장, 발전시설 등이 많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시설들이 노후화되어 당시에는 거의 가동 중단 상태에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한국이 자금을, 자기들이 기술과 부품을 대는 형식으로 북한의 노후화된 산업인프라를 재건하는 사업을 진행하자고 여러 번 제안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차관을 완전히 변제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해서 성사되지 못했다.
주러시아 대사 재임 중 기억에 남는 일 가운데 하나는 KGB(국가보안위원회)의 후신인 러시아 정보기관 FSB(연방보안국) 청사를 방문, FSB 국장을 만난 일이다. 대사가 주재국 정보기관장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나는 그를 만난 자리에서 ▲ 러시아 첩보위성이 촬영한 한국 정보를 북한에 넘기지 말 것 ▲ 원자력 및 미사일 관련 과학기술자들과 우라늄 물질 등 핵개발 관련 물자들의 북한 유출을 막아줄 것 등을 요청했다.
FSB 국장에게 그런 요청을 한 것은 당시 북한의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이 한창 논란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극도로 궁핍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러시아의 원자력, 미사일 관련 과학기술자들이나 핵물질이 북한으로 유출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었다.
러시아는 당시 한반도에 대한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내정이 어렵기도 했지만,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구성에 참여해 실질적인 기여를 할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러시아가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소리가 많이 나왔다. 나는 러시아 측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지만, 방해는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솔직한 토로였다.
入部 40년 만에 외교부 장관 돼
2000년 1월 나는 김대중(金大中) 정부의 3번째 외교통상부 장관이 됐다. 1960년 수습행정관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지 꼭 40년 만이었다.
워싱턴스쿨이니 재팬스쿨이니 하는 외교부 주류(主流) 출신이 아닌 내가 외교장관이 되자 호남 출신인 덕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외교관 생활을 하는 동안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거나, 혹은 혜택을 보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호남 출신이면서도 대구 출신인 박동진(朴東鎭) 전 외무부 장관의 아낌을 받으며 ‘박동진사단’의 일원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대통령 비서관도 지냈다. 다른 부서는 어떤지 몰라도 외무부는 비교적 지역색(地域色)이 적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때문에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영남 지역 출신들이 물갈이되고 호남 출신이 약진하는 식의 인사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장관 시절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 대외정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당시 대통령과 주례회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국무총리와 국가정보원장 말고는 나밖에 없었다. 때문에 다른 부처 장관 중에는 청와대에 “왜 외교부 장관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 덕분에 나는 대통령이 대외정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고, 대통령과 혼연일체가 되어 외교를 추진할 수 있었다.
이는 김대중 대통령이 기본적으로 외교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비스마르크의 외교 등 세계 외교사에 대해서도 해박했다. 나는 “대통령께서 외교장관을 했으면, 훌륭한 장관이 되었을 것”이라고 농담을 한 적도 있다.
DJ, “조금 돌려서 말하세요”
내가 장관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 6·15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내 재임기간 중의 외교는 ‘햇볕정책’을 뒷받침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북한을 신뢰하기 어려운 상대라고 늘 생각해 왔다. 다만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다 보니 바깥세상을 너무 모르는 것이 문제고, 북한이 고립에서 탈피해서 세상 돌아가는 걸 알게 되면 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른 나라 외교관이나 언론인들에게 햇볕정책에 대해 “북한을 고립에서 탈피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그런데 그게 북한의 심기를 자극한 것 같다. 2000년 9월 19일 유엔총회에서 나는 “남북정상회담은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 결과”라는 취지로 연설했다. 북한 평양방송은 이에 대해 “흑백을 전도하는 망발이며, 언어도단”이라고 비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장관 얘기가 옳은 얘기요. 외교장관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북한이 싫어하는 데에는 포커스를 두지 말고, 말할 때에는 조금 돌려서 말하세요.”
이런 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그해 7월 26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ARF(ASEAN Regional Forum·아세안 지역안보포럼)에서 나는 백남순(白南淳) 북한 외무상과 만나 첫 남북 외교장관 회담을 가졌다. ARF는 1994년 발족했는데, 북한이 이 행사에 참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의장국인 태국은 영어 알파벳순으로 좌석을 배치하는 관행을 깨고 남북한이 나란히 앉을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백남순 외무상은 의제별 토의를 할 때마다 내게 “저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곤 했다. 백 외무상은 영어도 약했지만, 제기되는 문제가 무엇인지 자체를 잘 모르는 듯했다. 그때마다 나는 귓속말로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남북 간 화해무드를 타고 남북한이 공동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한 결의안을 제55차 유엔총회에서 통과시키는 방안을 추진했다. 남북한 간의 대화 노력을 지지하고, 남북한 공동선언의 내용과 합의 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의 결의안이었다. ‘한반도 평화, 안보, 통일’이란 제목의 이 결의안은 남북한 등 148개국이 공동발의해 그해 10월 31일 유엔총회를 통과했다.
이 결의안은 사실 의례적인 내용을 담은 데 불과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오랜 염원이었다. 1970년대에 유엔에서 한국 문제 토의를 놓고 표 대결을 벌이던 시절, 다른 나라 대표들을 붙잡고 표를 부탁하면서 나는 늘 생각했었다.
‘언제까지 남북한이 이렇게 유엔에서 소모적인 표 대결을 해야 하나? 언제쯤 우리는 유엔회원국이 되어 우리가 주도적으로 멋있는 결의안을 발의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외교장관이 되어 젊은 날의 한(恨)풀이를 해본 셈이다.
마늘분쟁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된 후인 2000년 4월 27일부터 사흘간 중국 베이징(北京)을 방문, 탕자쉬안(唐家璇) 중국 외교부장과 회담을 가졌다. 탕자쉬안은 남북한 관계 개선과 관련해 참고할 만한 얘기를 많이 했다. 그는 “남북한 간에 하루아침에 급속한 관계개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구동존이(求同存異・같은 것을 추구하되 다름은 남겨둔다)를 강조했다. 그는 “중국으로서는 한반도에 급격한 변화가 있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북한 경제개혁의 시금석(試金石)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개혁에 대해서 그는 비관적으로 보았다. “북한의 농업구조 개혁은 굉장히 어려울 거다.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어서 남쪽에서 보는 것처럼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탕자쉬안이 그때 했던 얘기들은 15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의미가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중국과 중요 현안 가운데 하나가 ‘마늘분쟁’이었다. 그보다 여러 해 전부터 중국산 마늘 수입이 급증하면서 마늘값이 폭락했다. 전남 등지의 마늘 재배 농민들은 정부에 대책을 호소했다. 2000년 4월 총선을 앞둔 이 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인지, 정부는 1999년 11월 중국산 마늘의 수입관세를 30%에서 315%로 인상하는 잠정 긴급관세 부과조처를 내렸다. 중국은 이에 맞서 2000년 6월 한국산 휴대폰, 폴리에틸렌 제품의 수입을 중단하는 보복조치를 취했다. 결국 우리가 손을 드는 수밖에 없었다. 마늘 재배 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은 우리 측의 양보를 문제 삼았다. 나는 국회에서 이렇게 항변했다.
“한 해에 우리가 수입하는 중국산 마늘은 5000만 달러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휴대폰이나 폴리에틸렌 제품 수입 중단으로 우리가 입는 피해는 5억 달러가 넘습니다. 의원님이라면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의원들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달라이 라마 訪韓 문제 거론
마늘분쟁을 거치면서 보니 우리가 대중(對中)외교에 활용할 만한 지렛대가 너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달라이 라마의 방한 문제였다. 그 무렵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추진하고 있었다. 중국은 지금도 달라이 라마의 방문을 허용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여러 가지 형태로 보복을 한다. 당시에도 중국은 이 문제가 나오면 강하게 반발하곤 했지만, 지금보다는 그 강도가 약했다.
나는 탕자쉬안과 만난 자리에서 이 문제를 꺼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문제와 관련되어 있어 중국 정부로서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라는 걸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불교 인구는 120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달합니다. 불교계에서는 ‘달라이 라마를 정치와 무관한,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초청하려 하는데, 왜 정부가 비자 발급을 거부하느냐’고 정부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입장을 바꾸어서 중국에서 인구의 3분의 1인 3억~4억명 정도가 어떤 요구를 한다면, 정부가 그걸 마냥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불교계를 설득해서 달라이 라마의 초청을 자제하도록 노력하겠지만, 우리 정부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입장입니다.”
탕자쉬안은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양국 외교장관 회담에서 이 문제를 거론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해 버렸다. 달라이 라마의 방한 문제는 그 후에도 계속 논란이 됐다. 중국 정부는 그때마다 “달라이 라마에게 비자를 발급하면 상응하는 보복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해 10월 주룽지(朱镕基) 중국 총리가 방한했다. 함께 방한한 탕자쉬안은 이렇게 말했다.
“달라이 라마의 비자 발급 문제는, 발급을 하더라도 주룽지 총리가 다녀간 지 6개월 이내에는 절대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총리가 다녀간 지 6개월도 안 돼서 달라이 라마에게 비자를 발급하면,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적어도 ‘달라이 라마에 대한 비자 발급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에서는 많이 후퇴한 셈이었다. 이로써 우리는 대중외교의 지렛대 하나를 확보한 셈이 되었다. 이후 이 지렛대를 더 이상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한·러 정상회담과 ABM 파문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아니 어쩌면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국내외 일각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해 의구심(疑懼心)이 있어 왔던 것 같다. 내연(內燃)하던 그 의구심이 표출된 사건이 2001년 한러정상회담과 ABM(Antiballistic Missile・탄도탄요격미사일) 파문이었다.
2001년 2월 27일 김대중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런데 공동성명에 “ABM 조약이 보존되고 강화돼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당시 러시아는 미국이 추진 중인 국가미사일방어체계(NMD・National Missile Defense) 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고 있었다. 러시아는 NMD가 1972년에 미국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ABM조약에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한-러시아 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미국 《뉴욕타임스》지(誌)는 다음날 ‘한국이 러시아 편을 들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 난리가 났다.
엄밀히 말하면 《뉴욕타임스》지의 이 보도는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ABM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한다(Preserve and strengthen)”라는 문구는 “NMD에 반대한다”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 표현은 ABM 및 NMD와 관련해 미국과 러시아가 이미 합의한 내용이었다. 미국은 NMD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ABM조약을 개정(Amend)하려 했지만, 러시아(구소련 포함)가 완강하게 반대하자, ‘strengthen’이라는 표현을 내놓았다. 상황에 따라서 조약을 개정한다는 암시(Implication)를 가지고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었다. “ABM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한다”는 표현이 NMD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미국이 그런 표현을 제안하고 거기에 합의했을 리 없다. 이 합의가 나온 후인 1993년 미 의회에서는 NMD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1995년 유엔 NPT(핵확산금지조약)평가회의에서는 150개국이 이 문안에 대해 지지했다. 2000년 7월의 오키나와 G8(러시아 포함)에서도 이 표현을 그대로 원용(援用)했다. 그 후 러시아·캐나다, 러시아·일본 공동성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러시아는 한·러시아 정상회담 공동성명 초안(草案)을 제시하면서 “ABM체제를 유지하고, NMD를 반대한다”고 명시하자고 제안해 왔다. 러시아는 중국·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공동성명에는 ABM과 관련해 그런 표현을 집어넣곤 했었다. 그걸 우리에게도 제안해 온 것이다. 우리는 “그건 곤란하다. 러시아와 미국이 ABM과 관련해 이미 합의한 문구대로 하면 된다”고 반대했다. 그래서 “ABM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한다”는 표현이 공동성명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르는 《뉴욕타임스》 기자가 그걸 ‘한국이 러시아 편을 들어 미국의 NMD에 반대한다’는 식으로 보도한 것이다.
이 문제가 논란이 되자, 미 국무부 대변인은 “한·러시아 공동성명 문안은 미국의 NMD정책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논평을 냈다. 러시아와 이 문구에 합의했던 미국의 군축 대사도 기자회견을 통해 같은 뜻을 피력했다. 그런 와중에 그해 3월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게 됐다.
DJ, “외교장관은 NMD 문제 절대 거론 말라”
사실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의 NMD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 나름 생각을 갖고 있었다. 2000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식 행사를 수행했을 때의 일이었다. 김 대통령은 수상식 행사 중간 쉬는 시간에 내게 물었다.
“외교장관은 NMD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NMD는 군사적·경제적·기술적으로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고, 논란이 거듭되고 있는 문제입니다. 아직도 연구 중이고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는 프로젝트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가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자마자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NMD 문제는 대통령이 적절히 대처할 것이니, 외교장관 입장에서는 절대 거론하지 마세요.”
나는 깜짝 놀랐다. ‘아, 김대중 대통령이 앞으로 미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이 문제를 하나의 외교적 지렛대로 활용하려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2001년 3월 한미정상회담에 앞서, 그해 2월 나는 미국을 방문했다. 콜린 파월 신임 미 국무장관과 현안에 대한 사전(事前) 조율을 하기 위해서였다. 파월 장관과 약속된 시간은 한 시간에 불과했다. 여러 현안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나는 파월 장관에게 제안했다.
“여러 가지 문제를 논의하는 외교장관 회담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외교장관이 신임 국무장관에게 브리핑해 주는 시간으로 이해해 주면 좋겠습니다. 시간 제약상 내가 먼저 설명을 해줄 테니까, 들어보고 더 알고 싶은 게 있을 경우 내게 질문을 하면 대답하는 식으로 회담을 진행합시다.”
나는 남북한 관계를 비롯해 여러 현안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었다. 파월은 크게 만족스러워했다.
“NMD 문제에 대해 美 입장 이해하지만…”
3월 6일(한국시각)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면서 나는 파월 장관에게 급한 친전(親展)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NMD 문제에 대해 미국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공개적으로 그런 의사를 표시할 상황은 못 된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대북(對北) 문제에 대한 한미공조체제, 전통적 한미동맹관계 등을 고려한 공동성명서 초안을 보내니, 이를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에 도착한 다음날인 3월 6일(현지시각) 파월 국무장관과 점심식사를 같이했다. 이 자리에서 파월 장관은 “이정빈 장관을 통해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면서 “부시 행정부는 한국 측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이제까지 유지해 왔던 양국 공조체제하에서 대북정책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전임(前任) 클린턴 행정부가 임기 말에 추진했던 대북 유화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파월 장관의 말에 김대중 대통령은 고무된 표정이었다.
파월 장관은 기자들에게도 “북한이 건설적으로 행동한다면 우리가 북한에 제안할 것이 많다”면서 “클린턴 행정부가 남겨놓고 떠난 곳에서 시작함으로써 북한을 포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것도 ‘햇볕정책’을 추진하던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좋은 신호였다.
다음날 한미정상회담이 열렸다. 회담장에 들어가자마자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의전상 부시 대통령 옆에 앉아 있어야 할 파월 국무장관이 문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우리 측 수행원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말했다.
파월의 입장이 하루 만에 바뀐 이유
“정상회담이 끝나고 나서 발표할 공동성명은 양국 외교장관이 이미 합의한 대로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할 얘기는 하도록 합시다.”
부시 대통령의 말을 듣고, 파월 국무장관이 내가 보낸 공동성명문 초안을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그대로 수용하기로 허락을 받았음을 알았다. 안심이 됐다. 그런데 정상회담을 하자마자 부시 대통령이 파월 장관에게 눈짓을 했다. 파월 장관은 밖에 나갔다가 한참만에 돌아왔다. 나는 속으로 ‘의회 관계로 무슨 일이 있나’하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밖에 나가서 파월 장관은 부시 행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을 천명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온 것이었다. 그는 이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미사일 계획을 중단시키기 위한 협상을 조기에 재개할 계획이 없다”며 북한을 ‘위협(Threat)’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하원 외교위원회에 출석해서도 “북한에 대해 강한 입장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하루 사이에 파월 장관의 입장이 180도 바뀐 것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파월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오찬에서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유화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겠다”고 밝힌 사실을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가 크게 질책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미국 외교안보팀은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 등 매파(派)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파월 장관은 비둘기파였지만,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야단을 맞고 나자 자신의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양국 정상회담 도중 밖으로 나가 북한에 대한 강경입장을 피력하는 기자회견을 한 것도 부시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그 바람에 양국 대통령의 공동성명은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는데 미 국무장관은 그와는 거리가 있는 발언을 하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때 한국 언론들은 하루 만에 파월 장관의 입장이 바뀐 이유를 궁금해했는데, 거기에는 이런 곡절이 있었던 것이다.
DJ, ABM 논란에 대해 유감 표명
미국에서도 한·러시아 정상회담 당시 ABM 문제와 관련한 《뉴욕타임스》지의 보도는 계속 논란이 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3월 7일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그 점에 대해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 기간 내내 따라다녔다. 3월 9일 열린 미국기업연구소(AEI)와 외교협회(CFR) 공동주최의 오찬 간담회에서 조지프 시스코 전 미 국무부 차관보는 “워싱턴을 놀라게 한 한·러 정상회담의 ABM 조약 지지 공동성명 합의를 설명해 달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것은 한국이 러시아 편을 들어서 미국이 추진하는 NMD체제에 반대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면서 “한·러 정상회담 이후 NMD체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다
대통령이 외국 방문 중, 외교 현안 문제를 놓고 사과하는 모습이 된 것이다. 당연히 외교팀에 대한 문책(問責) 얘기가 나왔다.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는 “나라가 망신당하는 심각할 정도의 외교적 실책들이 드러났다”면서 정상회담을 준비한 외교팀의 교체를 주장했다.
장관 자리에 연연할 생각은 없었다. 나도 그 문제로 대통령에게 누를 끼친 것이 더없이 죄송스러웠다.
귀국 후인 3월 23일 나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한·러시아 정상회담과 관련된 논란에 대해 해명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당초 공동선언 문안을 협의할 때, 러시아 측 초안에는 주한미군 철수, 명시적인 MD반대 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지만, 이를 다 물리치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밝혔다.
나로서는 실상을 제대로 알리려 한 것인데, 이 기자회견이 역효과를 낳았다. 언론에서는 “외교장관이 상대국과의 교섭 과정을 밝힌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나는 “언론에서도 국익(國益)을 염두에 두어야지, 내용도 잘 모르는 《뉴욕타임스》 기자 한 사람이 잘못 쓴 기사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해서 야단들 하고, 미국 언론이 이쪽으로 가면 이에 따르고, 저쪽으로 가면 거기에 따라가서야 되겠느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진실이나 정확한 내용과는 관계없이 정치적으로 밀려오는 쓰나미에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
기자회견 사흘 후인 3월 26일 개각(改閣)이 단행되었다. 나는 외교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지 42년, 외무부에 들어간 지 41년 만이었다.⊙
얼마 후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가 전직정부수반협의회(IAC) 참석차 출국하게 됐다. 이 모임은 세계 각국의 국가원수, 총리, 고위공직자 출신 원로(元老)들이 참석하는 자리였다. 나는 외무부 정무차관보 자격으로 신 전 총리를 뵙고, 국제정세, 우리 정부의 외교정책 등에 대해 브리핑을 했다. 신 전 총리는 나와 식사하면서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 황허(黃河) 전 중국 외교부장, 아나톨리 도브리닌 전 주미(駐美) 소련 대사 등이 참석한다고 말해 주었다. 도브리닌은 1962년부터 1986년까지 24년간 주미 소련 대사를 지냈고,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외교고문으로 있던 거물 외교관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귀가 번쩍했다. 도브리닌을 한국으로 초청할 수 있다면, 한소(韓蘇)수교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비공식 라인을 통해 총리 도브리닌을 한국으로 초청할 수는 없겠느냐?”고 물었다. 신 전 총리는 “슈미트 전 독일 총리 등을 통해 알아보겠다”고 했다. 얼마 후 신현확 전 총리로부터 도브리닌의 방한(訪韓)이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이듬해 5월 20일 서울에서 전직정부수반협의회가 열렸다. 도브리닌도 왔다. 우리는 그의 방한을 비공개하기로 했다. 서울 한남동 외무부 장관 공관에서 최호중(崔浩中) 장관, 나, 도브리닌과 그의 수행원이 참석하는 만찬을 갖기로 했다. 도브리닌을 맞이하기 위해 외무부 심의관 한 명을 공항으로 내보냈다. 그런데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도브리닌 대사가 장관 공관으로 못 간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도브리닌 대사 말이, 청와대 외교안보보좌관이 오라고 해서, 그쪽으로 가야겠다고 합니다.”
韓蘇정상회담 교섭
당시 외교안보보좌관은 김종휘(金宗輝)씨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박철언(朴哲彦) 청와대 정책보좌관이 물밑에서 대(對)동구권 외교를 전개하고 있었다. 대외(對外)정책을 여러 군데서 수행하는 셈이었다. 외무부에서는 다른 곳의 교섭을 잘 알지 못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채널에서 도브리닌 초청을 추진하고 있었나’ 싶으면서도, 기가 막혔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외무부 장관이 초청한 인사를 다른 기관에서 가로채버리다니…. 하여튼 도브리닌은 청와대로 갔고, 외무부 장관 만찬은 취소해야 했다. 나도 도브리닌을 만나지 못했다.
도브리닌이 다녀간 지 며칠 후, 청와대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워싱턴에 가서 도브리닌과 접촉, 한소정상회담을 교섭하라는 것이었다. 도브리닌과 접촉할 수 있다는 전화번호도 주었다. 나는 사무실에 ‘휴가 중’이라는 팻말을 걸어놓고 비밀리에 워싱턴으로 출장을 갔다. 워싱턴에 있는 우리 대사관에도 알리지 않고, 내셔널호텔에 투숙했다.
청와대에서 받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관 정무과(政務課)였다. 도브리닌의 개인 전화번호가 아니면, 최소한 그의 비서 전화라도 될 줄 알았는데, 주미 소련 대사관 정무과라니 당혹스러웠다. 전화받는 사람에게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예브게니 아파나시예프 정무참사관’이라고 대답했다. 후일 주한 러시아 대사(1997~2001년)를 지냈고, 현재 주일(駐日) 러시아 대사로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도브리닌을 찾았더니 그는 “나는 도브리닌 고문이 주미 대사로 있을 때 그의 비서였고, 지금도 그에 대한 연락은 내가 다 하고 있다”고 답했다. 알고 봤더니, 도브리닌은 고르바초프의 캐나다와 미국 방문 준비를 위해 당시 캐나다에 가 있었다. 아파나시예프는 “도브리닌이 근일간 워싱턴에 올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워싱턴에 온 목적을 말하고, 그와의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수일 후 워싱턴에 온 도브리닌을 만났다. 주미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임성준(任晟準·외교안보수석비서관, 주캐나다 대사 역임) 참사관을 불러 협의내용을 기록하도록 했다. 도브리닌에게 “한소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왔다”고 했더니,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직 양국 정상회담을 논할 단계가 아닌데, 무슨 소리냐’는 식의 반응이었다.
도브리닌은 이후 교섭과정에서 “한국이 우리에게 얼마나 지원해 줄 수 있는지를 분명히 해달라”고 요구했다. 대소(對蘇)지원이라니? 나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차관보에 불과한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성격의 일도 아니었다. 정상회담 교섭은 겉돌았다.
도브리닌, 盧在鳳 비서실장과의 만남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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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년간 주미소련대사를 지낸 아나톨리 도브리닌. |
나는 도브리닌에게 “대소지원 문제는 내가 확답할 수 없는 문제이니, 노재봉(盧在鳳) 대통령 비서실장과 만나 논의해 보라”고 했다. 노재봉 실장도 내게 자신과 도브리닌의 만남을 주선하라고 했다. 그런데 도브리닌은 노 실장과의 만남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나는 그 사람 안 만날 겁니다. 그런 무례(無禮)한 사람과는 만나지 않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지난번 한국에서 만났을 때 그가 내게 삿대질(Finger-point)을 했어요. 정말 불쾌했습니다. 모멸감을 느꼈어요.”
교수 출신인 노재봉 실장은 어떤 일을 설명할 때는 손가락을 세우고 지적(指摘)을 하듯이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게 도브리닌의 눈에는 삿대질을 하는 걸로 비친 모양이었다. 서양 사람들은 삿대질을 커다란 인격모독으로 받아들인다. 구미(歐美)의 외교무대에서 평생을 보낸 외교 거물인 도브리닌으로서는 노 실장을 더 없이 무례한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한 시간 반가량 도브리닌을 설득하다가 내 방으로 돌아왔더니, 노 실장의 비서가 전화를 걸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실장이 ‘도브리닌에게 가서 약속을 잡으라고 했더니, 하라는 약속은 않고, 자기가 뭘 한다고 한 시간 반씩이나 얘기하고 있느냐’고 노발대발하다가 조금 전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외교의 ‘외’자도 모르는 놈들이…”
큰일이다 싶었다. 정상회담을 하려면,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했다. 나는 밤 11시40분에 도브리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자다가 일어나서 전화를 받았다. 나는 “당신이 노 실장을 만나주지 않으면 내 목이 달아나게 생겼다”면서 “내일 새벽 5시도 좋고 6시도 좋다. 10분이 됐건, 20분이 됐건, 노 실장을 좀 만나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도브리닌은 같은 직업외교관 출신으로서 내 고충을 이해한 것 같았다. 다음날 새벽 5시 반에 노 실장과 만나겠다고 했다. 나는 노 실장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 5시 반에 도브리닌과 시간을 잡아놨으니, 늦지 않도록 하라”고 전했다. 노재봉 실장과 도브리닌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두 사람이 만난 다음날인 6월 4일(미국시각) 샌프란시스코 페어먼트호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최초의 양국 정상회담을 갖고 한소 관계 정상화 등에 합의했다. 그해 9월 30일(미국시각) 최호중 장관과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뉴욕 유엔본부에서 양국 외무장관 회담을 갖고 한소수교를 공식 발표했다.
노태우 정부는 탈냉전(脫冷戰)의 세계사적 흐름을 잘 포착하여 북방외교를 적극 추진함으로써 우리나라 외교의 지평을 넓혔다. 하지만 앞에서도 본 것처럼 그 과정에서 대통령의 측근들이 전면에 나서고, 외무부는 소외되는 문제도 있었다. 한번은 외무부 출입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외교의 ‘외’자도 모르는 놈들이 외교를 망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 얘기가 청와대로 들어갔다. 대학 후배인 정구영(鄭銶永·검찰총장 역임) 민정수석비서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 선배, 북방외교와 관련해서 청와대를 비난하는 말은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께서 ‘대(對)공산권 외교와 관련해서 외무부에서 시비를 거는 데, 진상을 조사해 보라’고 했습니다. 이 선배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 테니 협조해 주세요.”
나는 조사를 받으면서 “청와대를 비난한 게 아니라, 외교의 일반원칙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다행히 그걸로 넘어갈 수 있었다.
라오 印총리, 韓외무장관과 별도 만남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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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도대사로 부임, 신임장을 제정한 후 인도의장대를 사열했다. |
그런 상황에서 라오 총리는 우리나라의 북방외교에 주목했다. 탈냉전의 흐름을 타고 동구권 국가들은 물론 소련, 중국과 잇달아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대외관계를 잘 관리하는 것이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들어선 후, 인도 총리 비서실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라오 총리가 한국 방문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물었다.
“라오 총리가 방한하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한국의 대(對)강대국 외교의 실상을 알아보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양국 간 경제협력 강화책을 협의하자는 것입니다.”
당시 오랫동안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유지하던 인도는 라오 총리 지도 아래 외자(外資)유치 등 개혁개방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호랑이’ 소리를 들으면서 한국 경제가 잘나가던 시절이라, 인도로서는 한국의 발전모델 연구를 위해 한국과의 경협(經協)을 추진하고 싶었을 것이다. 경제는 그렇다 해도, 우리나라의 외교정책까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뜻밖이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라오 총리의 방한이 구체화되자, 인도 측에서는 한 시간 정도 라오 총리와 한승주(韓昇洲) 외무부 장관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한국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총론은 정상회담 시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듣겠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외무장관으로부터 직접 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정상회담차 타국을 방문하는 정상이 그 나라 외무장관과 따로 시간을 갖겠다는 것은 외교 관례상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 사실을 본부에 보고했더니, 의전 담당자도 “전례(前例)가 없는 일”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나는 한승주 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망쳐버린 韓·印 頂上회담
“방한하는 인도 총리가 한국 외무장관을 만나서 같이 얘기를 좀 나누어보겠다는데, 그걸 꼭 의전을 따져서 안 된다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인도 측에서 저렇게 원하는데, 만나서 여러 가지 설명도 해주고 그러면 좋지 않겠습니까?” 한 장관도 내 건의를 받아들였다. 1993년 9월 9일 라오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다. 다음날 양국 역사상 첫 정상회담이 열렸다. 우리 측에서는 한승주 외무장관, 나, 정종욱(鄭鍾旭·주중 대사 역임)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이 배석했다. 통역은 박진(朴振·16~18대 국회의원) 비서관이 맡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라오 총리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물었다.
“인도는 지금 외교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주변 4강(强)과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외교를 잘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어떤 외교적 목표를 가지고 대외정책을 추진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라오 총리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자신이 단행한 금융실명제(實名制)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약속했던 정상회담 시간의 절반 이상이 실명제 얘기로 흘러갔다. 아무리 기다려도 자기가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자, 라오 총리는 통역이 자기가 한 말을 잘못 전달했나 싶어서인지,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을 끊고 다시 한 번 한국의 외교정책에 대해 질문했다. 라오 총리의 얼굴을 보니, 그의 얼굴이 상당히 굳어 있었다. 박진 비서관이 라오 총리의 질문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그 특유의 사투리 섞인 말투로 말했다.
“가만 있그래이. 내 하던 얘기 마저 하고…”
김영삼 대통령은 다시 실명제에 대한 얘기를 이어갔다. 라오 총리는 김영삼 대통령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이 몸을 돌리고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다. 양국의 첫 정상회담은 그렇게 끝이 나 버렸다.
門前逐客 당한 韓昇洲 장관
다음날 라오 총리가 묵고 있는 신라호텔로 한승주 외무장관이 찾아갔다. 그런데 라오 총리는 자기 방을 찾은 한 장관과 악수만 나눈 후 “갑자기 다른 일정이 생겨 시간을 내기 어렵겠다”며 한 장관을 내보냈다. 그런 식으로 문전축객(門前逐客)을 당한 한승주 장관도, 그걸 지켜보는 나도 황당했다. 한 장관이 내게 불만을 토로했다.
“자기가 보자고 해놓고는 갑자기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하면서 못 만나겠다고 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우요?”
나는 솔직하게 얘기했다.
“어제 정상회담 할 때 그 광경을 못 보았습니까? 라오 총리의 표정을 보면, 뭐라고 할까, 표현 못 할 야릇한 모습을 취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장관님을 못 만나겠다고 하는 것도, 어제 정상회담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승주 장관도 그제야 무슨 까닭인지 알겠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많은 한국인이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은 것만 보고, 인도를 후진국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인도는 대단한 나라다. 영토는 328만7260km2, 인구는 중국에 버금가는 12억명에 달한다.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때문에 나름 대국(大國)의식을 갖고 있고, 자존심이 강하다.
내 차량을 운전하는 인도인 기사가 잘못해서 홧김에 “그만두라”고 한 적이 있다. 그 기사는 일언반구 변명도 없이 그 길로 짐을 싸서 나가버렸다.
대사 재직 중 인도에서 큰 지진이 났다. 20만명이 죽었다. 우리 정부에서는 지원비로 5만 달러를 내놓으려 했다. 일본은 10만 달러를 내놓겠다고 했다. 나는 사망자 규모를 생각할 때, 5만 달러는 너무 적다고 생각했다. 지원비를 20만 달러로 증액해 달라고 본부를 설득해 성사시켰다. 나는 인도 외무차관에게 “사실 20만 달러는 우리나라가 외국에서 재해가 났을 때 지원한 금액으로는 사상 최고액수다. 한국 정부에 고맙다는 편지라도 보내주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인도 정부는 감사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런 인도인들의 심리를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자랑만 했던 것이다.
대우자동차의 인도 진출
인도는 오랫동안 외국 산업의 인도 진출을 막으면서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펴오다 보니, 경제가 상당히 낙후되어 있었다. 국민 대부분이 빈곤했지만, 내가 대사로 재직하고 있던 당시에 이미 연(年)소득 2만 달러를 넘는 사람이 1억명이 넘는다는 얘기가 있었다. 아시아 지역에서 2만 달러 소득의 인구가 1억명이 넘는 나라는 인도 말고는 없었다. 그런데도 거리를 다니면서 보면, 외제차를 보기 어려웠다. 인도 경제부 장관에게 물어보았다.
“어째서 인도에서는 유럽 자동차들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겁니까?”
“유럽 자동차 메이커들은 전부 구상만 하고 계획만 세우지, 그걸 실천에 옮기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벌써 여러 해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자동차 회사들이 인도에 진출할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아자동차, 현대자동차, 대우자동차 사장에게 직접 전보(電報)를 보냈다.
“내가 보기에는 인도 자동차 시장의 전망이 좋다. 유럽 자동차 회사들이 아직까지 인도 시장에 진출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 진출하기 전에 우리나라 회사들이 먼저 들어오면 좋겠다. 회사의 실무조사팀을 빨리 보내서, 인도 자동차 시장이 어떠한지 조사해 보고 진출 여부를 결정하면 좋겠다.”
기아자동차에서는 인도 시장에 진출할 여력이 없다는 연락이 왔다. 현대자동차에서는 실무조사팀을 보내겠다고 했다. 가장 적극적인 것은 대우의 김우중(金宇中) 회장이었다. 그는 직접 인도로 와서 시장 사정을 살펴본 후, 내게 인도 총리와의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했다. 김우중 회장은 인도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인도에 자동차 공장을 지을 경우 세금 문제 등에 대해 꼼꼼하게 질문했다. 인도 총리는 관련 경제부처 차관을 연결해 주었다.
“인도 IT인력 1000명 수입하자”
대우 측에 공장 건설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자동차 한 대 가격을 1만 달러로 잡고, 1대당 1000달러를 선금(先金)조로 받아서 충당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대우는 그렇게 받은 계약금을 가지고 인도에 공장을 지었고, 성공적으로 인도 시장에 진출했다.
나중에 정세영(鄭世永) 현대자동차 사장을 만난 기회에 “인도에 조사팀을 보낸다더니 왜 소식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실무팀을 보냈는데, 시장 전망이 안 좋다는 보고를 받고 인도 진출을 접었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는 대우가 인도 시장에서 성공한 것을 본 후, 1996년 인도 시장에 진출, 성공을 거두었다. 작년에는 인도 자동차 시장 점유율 2위에 올랐다.
당시 우리나라는 막 IT산업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있었다. 인도에는 IIT(Indian Institute of Technology)라는 국립공대가 여러 곳에 있었다. 영어에 능통하고 실력 있는 IT인력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었지만, 인도 국내에서는 이들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300달러 정도면 이들을 데려다 쓸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 중동에 진출한 우리나라 단순 노동자들의 월급이 1000달러 정도였다. 1000달러면 인도의 IT인재 3명을 데려올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나는 “인도의 IT인력을 1000명 정도 수입하자”고 건의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근래 인도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인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5월에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방한, 박근혜(朴槿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반가운 일이지만, 좀 더 일찍 인도에 대해 관심을 갖고 경협을 강화했으면 양국 모두에 더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장 힘들었던 러시아 대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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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약한 옐친 대통령 대신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총리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
구(舊)동구권 출신 몇 나라 대사를 제외하면, 다른 나라 대사들도 러시아어를 할 줄 몰랐다. 미국 대사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대사는 “일본과 러시아가 수교한 지 100년이 넘었는데, 내가 러시아어를 구사할 줄 아는 최초의 대사”라고 말했다.
게다가 러시아는 당시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소련이 해체된 지 4년이 지났지만,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더디기만 했다. 옐친 정부가 국유(國有)기업을 민영화(民營化)하는 과정에서 권력과 유착해 국부(國富)를 가로채는 마피아집단이 등장했다. 사회주의 배급체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국민들은 식량 등 물자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체첸 등 소수(少數)민족들이 분리독립을 외치며 곳곳에서 테러를 자행하고 게릴라전을 벌였다.
설상가상으로 병약(病弱)한 옐친 대통령은 국정(國政)을 틀어쥐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경우, 옐친 대통령이 6개월 이상 국사(國事)를 돌보지 못하는 바람에 부임한 지 6개월여가 지난 후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총리에게 신임장을 제정해야 했다. 공산당이 다수당(多數黨)을 차지하고 있는 국회는 사사건건 대통령과 충돌했다.
한·러 트레이드센터 사업 중단
그 바람에 노태우 대통령이 한소수교를 전후해 추진했던 양국 간 경협사업들도 모두 지지부진한 상태에 있었다. 그중 하나가 모스크바 한·러 트레이드센터(KRTC) 사업이었다. 나호트카 공단 건설 사업과 함께 1990년 양국 각료회담에서 합의한 사업이었다. 한국 측이 모스크바대학 근처 120만m2의 부지에 상하수도, 도로, 주거 및 산업시설 등의 인프라를 개발해 주는 대가로, 러시아 측에서는 5만m2의 부지를 제공해 주고, 한국 측은 이 땅에 트레이드센터와 아파트 등을 건설해 활용하는 사업이었다.
1996년 7월 22일 기공식이 열렸다. 나도 주관사인 KOTRA의 초청을 받아 이 자리에 참석했다. 행사는 요란하게 진행됐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기공식이 끝난 후, 러시아 측 대표로 참석했던 경제부 차관이 말했다.
“행사가 끝나면 제 사무실에서 만났으면 합니다. 올 때는 경제 담당 참사관 등 실무자들을 꼭 데리고 와주십시오.”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걸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경제부 차관을 찾아갔다. 경제부 차관은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한·러 트레이드센터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양국 간 조세, 외환(外換), 기타 행정적인 문제들에 대한 협의를 선행(先行)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양국 실무자 간에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기공식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양국 간 실무작업을 잘 진행해 드디어 기공식을 여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내게는 날벼락 같은 얘기였다. 알고 보니 문제는 러시아 측에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진 후 급진적인 시장경제화 정책을 펴면서 외자유치 등을 위해 우리나라의 대통령긴급명령과 같은 대통령 명령(命令)들을 발포(發布)했다. 이런 대통령 명령들은 국회가 제정한 법률들과 상충(相衝)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산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는 대통령 명령이 법률보다 하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트레이드센터 건립을 위한 조세 특례 제공도 법률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사업 진행은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덜컥 기공식을 해버린 것이었다.
이 사업에는 5000만 달러를 투자한 LG를 비롯해 5개 회사가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하고 있었다. 나는 주관사 측에 지금까지 사업을 백지로 돌리고 상업적 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검토 끝에 원래 정치적 고려에서 시작된 사업이어서, 상업적 베이스에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대답이 나왔다. 나는 더 이상 사업을 끌고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주관사 측에서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결국 컨소시엄은 해체되고, 트레이드센터 사업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기아자동차 조립공장 사건
나호트카 공단 개발은 당초 330만m2(100만 평)를 개발하기로 했으나, 역시 지지부진했다. 2002년 김대중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19만8000m2(6만 평)만 개발하기로 합의했으나, 여전히 진척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황당한 사건도 있었다. 발트해 연안에 있는 러시아 영토 칼리닌그라드에 기아자동차가 조립공장을 짓게 되었다. 연산(年産) 1000대 정도로 그다지 크지 않은 사업이었다. 칼리닌그라드의 한 호텔에서 조인식을 하니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이 왔다. 가보니 요란했다. 러시아 경제부처 장관들은 물론, 러시아 주재 외국 대사들도 여러 명 참석했다. TV방송사들도 많이 나왔다.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걸리는 칼리닌그라드로 내빈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비행기도 두 대나 준비했다. 김선홍 기아 회장도 “이렇게 호들갑을 떨 만한 사업이 아닌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어리둥절해했다.
공장 부지라는 곳을 가보았는데, 구소련 북해함대 사령부가 있던 곳이라고 했다. 대지 면적이 수만 평인데, 그중 일부에 기아자동차 조립공장을 짓는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부 러시아 인사들이 기아자동차 조립공장을 짓는다는 핑계로 사령부 부지를 불하(拂下)받기 위해 꾸민 짓이었다. 염불보다는 잿밥에 눈이 어두운 꼴이라고 할까? 결국 그 땅은 몇몇 사람이 착복했고, 기아자동차 조립공장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러시아와의 경제협력과 관련해 가장 큰 현안은 한소수교 때 제공한 차관(借款)의 회수 문제였다. 한소수교를 하면서 우리 정부는 소련에 30억 달러의 차관을 약속했고, 이 중 14억5000만 달러가량을 실제로 제공했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차관은 중단됐지만, 이자가 붙어서 22억 달러 정도로 상환해야 할 비용이 불어났다. 그런데 1998년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버렸다. 우리 정부는 러시아와 교섭, 이자는 탕감해 주고, 원금은 일부는 매년 얼마씩 현금으로 돌려받고, 나머지는 무기로 돌려받으려 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현금으로 갚는 것은 못 하겠다고 버텼다. 나는 정부에 “러시아에 제공한 차관은 처음부터 상업적 베이스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만큼, 차라리 미해결 상태로 남겨놓아 대(對)러시아 외교의 지렛대로 활용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결국 ‘불곰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로부터 대형 헬기, 전차(戰車), 장갑차 등을 들여오는 걸로 타결을 보았다.
러시아 정보기관 FSB 국장과 만나
당시 러시아가 관심을 보인 것은 남북한, 러시아, 3각 경협사업이었다. 북한에는 구소련 시절에 소련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건설한 비료공장, 발전시설 등이 많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시설들이 노후화되어 당시에는 거의 가동 중단 상태에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한국이 자금을, 자기들이 기술과 부품을 대는 형식으로 북한의 노후화된 산업인프라를 재건하는 사업을 진행하자고 여러 번 제안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차관을 완전히 변제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해서 성사되지 못했다.
주러시아 대사 재임 중 기억에 남는 일 가운데 하나는 KGB(국가보안위원회)의 후신인 러시아 정보기관 FSB(연방보안국) 청사를 방문, FSB 국장을 만난 일이다. 대사가 주재국 정보기관장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나는 그를 만난 자리에서 ▲ 러시아 첩보위성이 촬영한 한국 정보를 북한에 넘기지 말 것 ▲ 원자력 및 미사일 관련 과학기술자들과 우라늄 물질 등 핵개발 관련 물자들의 북한 유출을 막아줄 것 등을 요청했다.
FSB 국장에게 그런 요청을 한 것은 당시 북한의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이 한창 논란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극도로 궁핍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러시아의 원자력, 미사일 관련 과학기술자들이나 핵물질이 북한으로 유출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었다.
러시아는 당시 한반도에 대한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내정이 어렵기도 했지만,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구성에 참여해 실질적인 기여를 할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러시아가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소리가 많이 나왔다. 나는 러시아 측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지만, 방해는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솔직한 토로였다.
入部 40년 만에 외교부 장관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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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3월 29일 외교통상부 업무보고에 참석한 김대중 대통령. 김 대통령은 외교에 대한 식견이 뛰어났다. |
워싱턴스쿨이니 재팬스쿨이니 하는 외교부 주류(主流) 출신이 아닌 내가 외교장관이 되자 호남 출신인 덕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외교관 생활을 하는 동안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거나, 혹은 혜택을 보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호남 출신이면서도 대구 출신인 박동진(朴東鎭) 전 외무부 장관의 아낌을 받으며 ‘박동진사단’의 일원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대통령 비서관도 지냈다. 다른 부서는 어떤지 몰라도 외무부는 비교적 지역색(地域色)이 적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때문에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영남 지역 출신들이 물갈이되고 호남 출신이 약진하는 식의 인사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장관 시절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 대외정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당시 대통령과 주례회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국무총리와 국가정보원장 말고는 나밖에 없었다. 때문에 다른 부처 장관 중에는 청와대에 “왜 외교부 장관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 덕분에 나는 대통령이 대외정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고, 대통령과 혼연일체가 되어 외교를 추진할 수 있었다.
이는 김대중 대통령이 기본적으로 외교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비스마르크의 외교 등 세계 외교사에 대해서도 해박했다. 나는 “대통령께서 외교장관을 했으면, 훌륭한 장관이 되었을 것”이라고 농담을 한 적도 있다.
DJ, “조금 돌려서 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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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7월 26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ARF 회담 시, 백남순 북한 외무상과 함께 첫 남북외교장관회담을 했다. |
나는 개인적으로는 북한을 신뢰하기 어려운 상대라고 늘 생각해 왔다. 다만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다 보니 바깥세상을 너무 모르는 것이 문제고, 북한이 고립에서 탈피해서 세상 돌아가는 걸 알게 되면 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른 나라 외교관이나 언론인들에게 햇볕정책에 대해 “북한을 고립에서 탈피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그런데 그게 북한의 심기를 자극한 것 같다. 2000년 9월 19일 유엔총회에서 나는 “남북정상회담은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 결과”라는 취지로 연설했다. 북한 평양방송은 이에 대해 “흑백을 전도하는 망발이며, 언어도단”이라고 비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장관 얘기가 옳은 얘기요. 외교장관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북한이 싫어하는 데에는 포커스를 두지 말고, 말할 때에는 조금 돌려서 말하세요.”
이런 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그해 7월 26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ARF(ASEAN Regional Forum·아세안 지역안보포럼)에서 나는 백남순(白南淳) 북한 외무상과 만나 첫 남북 외교장관 회담을 가졌다. ARF는 1994년 발족했는데, 북한이 이 행사에 참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의장국인 태국은 영어 알파벳순으로 좌석을 배치하는 관행을 깨고 남북한이 나란히 앉을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백남순 외무상은 의제별 토의를 할 때마다 내게 “저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곤 했다. 백 외무상은 영어도 약했지만, 제기되는 문제가 무엇인지 자체를 잘 모르는 듯했다. 그때마다 나는 귓속말로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남북 간 화해무드를 타고 남북한이 공동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한 결의안을 제55차 유엔총회에서 통과시키는 방안을 추진했다. 남북한 간의 대화 노력을 지지하고, 남북한 공동선언의 내용과 합의 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의 결의안이었다. ‘한반도 평화, 안보, 통일’이란 제목의 이 결의안은 남북한 등 148개국이 공동발의해 그해 10월 31일 유엔총회를 통과했다.
이 결의안은 사실 의례적인 내용을 담은 데 불과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오랜 염원이었다. 1970년대에 유엔에서 한국 문제 토의를 놓고 표 대결을 벌이던 시절, 다른 나라 대표들을 붙잡고 표를 부탁하면서 나는 늘 생각했었다.
‘언제까지 남북한이 이렇게 유엔에서 소모적인 표 대결을 해야 하나? 언제쯤 우리는 유엔회원국이 되어 우리가 주도적으로 멋있는 결의안을 발의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외교장관이 되어 젊은 날의 한(恨)풀이를 해본 셈이다.
마늘분쟁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된 후인 2000년 4월 27일부터 사흘간 중국 베이징(北京)을 방문, 탕자쉬안(唐家璇) 중국 외교부장과 회담을 가졌다. 탕자쉬안은 남북한 관계 개선과 관련해 참고할 만한 얘기를 많이 했다. 그는 “남북한 간에 하루아침에 급속한 관계개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구동존이(求同存異・같은 것을 추구하되 다름은 남겨둔다)를 강조했다. 그는 “중국으로서는 한반도에 급격한 변화가 있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북한 경제개혁의 시금석(試金石)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개혁에 대해서 그는 비관적으로 보았다. “북한의 농업구조 개혁은 굉장히 어려울 거다.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어서 남쪽에서 보는 것처럼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탕자쉬안이 그때 했던 얘기들은 15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의미가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중국과 중요 현안 가운데 하나가 ‘마늘분쟁’이었다. 그보다 여러 해 전부터 중국산 마늘 수입이 급증하면서 마늘값이 폭락했다. 전남 등지의 마늘 재배 농민들은 정부에 대책을 호소했다. 2000년 4월 총선을 앞둔 이 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인지, 정부는 1999년 11월 중국산 마늘의 수입관세를 30%에서 315%로 인상하는 잠정 긴급관세 부과조처를 내렸다. 중국은 이에 맞서 2000년 6월 한국산 휴대폰, 폴리에틸렌 제품의 수입을 중단하는 보복조치를 취했다. 결국 우리가 손을 드는 수밖에 없었다. 마늘 재배 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은 우리 측의 양보를 문제 삼았다. 나는 국회에서 이렇게 항변했다.
“한 해에 우리가 수입하는 중국산 마늘은 5000만 달러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휴대폰이나 폴리에틸렌 제품 수입 중단으로 우리가 입는 피해는 5억 달러가 넘습니다. 의원님이라면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의원들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달라이 라마 訪韓 문제 거론
마늘분쟁을 거치면서 보니 우리가 대중(對中)외교에 활용할 만한 지렛대가 너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달라이 라마의 방한 문제였다. 그 무렵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추진하고 있었다. 중국은 지금도 달라이 라마의 방문을 허용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여러 가지 형태로 보복을 한다. 당시에도 중국은 이 문제가 나오면 강하게 반발하곤 했지만, 지금보다는 그 강도가 약했다.
나는 탕자쉬안과 만난 자리에서 이 문제를 꺼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문제와 관련되어 있어 중국 정부로서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라는 걸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불교 인구는 120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달합니다. 불교계에서는 ‘달라이 라마를 정치와 무관한,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초청하려 하는데, 왜 정부가 비자 발급을 거부하느냐’고 정부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입장을 바꾸어서 중국에서 인구의 3분의 1인 3억~4억명 정도가 어떤 요구를 한다면, 정부가 그걸 마냥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불교계를 설득해서 달라이 라마의 초청을 자제하도록 노력하겠지만, 우리 정부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입장입니다.”
탕자쉬안은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양국 외교장관 회담에서 이 문제를 거론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해 버렸다. 달라이 라마의 방한 문제는 그 후에도 계속 논란이 됐다. 중국 정부는 그때마다 “달라이 라마에게 비자를 발급하면 상응하는 보복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해 10월 주룽지(朱镕基) 중국 총리가 방한했다. 함께 방한한 탕자쉬안은 이렇게 말했다.
“달라이 라마의 비자 발급 문제는, 발급을 하더라도 주룽지 총리가 다녀간 지 6개월 이내에는 절대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총리가 다녀간 지 6개월도 안 돼서 달라이 라마에게 비자를 발급하면,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적어도 ‘달라이 라마에 대한 비자 발급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에서는 많이 후퇴한 셈이었다. 이로써 우리는 대중외교의 지렛대 하나를 확보한 셈이 되었다. 이후 이 지렛대를 더 이상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한·러 정상회담과 ABM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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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2월 27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위한 만찬에서 양국 정상이 건배를 하고 있다. |
2001년 2월 27일 김대중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런데 공동성명에 “ABM 조약이 보존되고 강화돼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당시 러시아는 미국이 추진 중인 국가미사일방어체계(NMD・National Missile Defense) 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고 있었다. 러시아는 NMD가 1972년에 미국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ABM조약에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한-러시아 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미국 《뉴욕타임스》지(誌)는 다음날 ‘한국이 러시아 편을 들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 난리가 났다.
엄밀히 말하면 《뉴욕타임스》지의 이 보도는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ABM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한다(Preserve and strengthen)”라는 문구는 “NMD에 반대한다”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 표현은 ABM 및 NMD와 관련해 미국과 러시아가 이미 합의한 내용이었다. 미국은 NMD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ABM조약을 개정(Amend)하려 했지만, 러시아(구소련 포함)가 완강하게 반대하자, ‘strengthen’이라는 표현을 내놓았다. 상황에 따라서 조약을 개정한다는 암시(Implication)를 가지고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었다. “ABM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한다”는 표현이 NMD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미국이 그런 표현을 제안하고 거기에 합의했을 리 없다. 이 합의가 나온 후인 1993년 미 의회에서는 NMD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1995년 유엔 NPT(핵확산금지조약)평가회의에서는 150개국이 이 문안에 대해 지지했다. 2000년 7월의 오키나와 G8(러시아 포함)에서도 이 표현을 그대로 원용(援用)했다. 그 후 러시아·캐나다, 러시아·일본 공동성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러시아는 한·러시아 정상회담 공동성명 초안(草案)을 제시하면서 “ABM체제를 유지하고, NMD를 반대한다”고 명시하자고 제안해 왔다. 러시아는 중국·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공동성명에는 ABM과 관련해 그런 표현을 집어넣곤 했었다. 그걸 우리에게도 제안해 온 것이다. 우리는 “그건 곤란하다. 러시아와 미국이 ABM과 관련해 이미 합의한 문구대로 하면 된다”고 반대했다. 그래서 “ABM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한다”는 표현이 공동성명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르는 《뉴욕타임스》 기자가 그걸 ‘한국이 러시아 편을 들어 미국의 NMD에 반대한다’는 식으로 보도한 것이다.
이 문제가 논란이 되자, 미 국무부 대변인은 “한·러시아 공동성명 문안은 미국의 NMD정책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논평을 냈다. 러시아와 이 문구에 합의했던 미국의 군축 대사도 기자회견을 통해 같은 뜻을 피력했다. 그런 와중에 그해 3월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게 됐다.
DJ, “외교장관은 NMD 문제 절대 거론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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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린 파월 미 국무부 장관과 2001년 2월 7일 만나 양국 간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
“외교장관은 NMD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NMD는 군사적·경제적·기술적으로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고, 논란이 거듭되고 있는 문제입니다. 아직도 연구 중이고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는 프로젝트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가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자마자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NMD 문제는 대통령이 적절히 대처할 것이니, 외교장관 입장에서는 절대 거론하지 마세요.”
나는 깜짝 놀랐다. ‘아, 김대중 대통령이 앞으로 미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이 문제를 하나의 외교적 지렛대로 활용하려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2001년 3월 한미정상회담에 앞서, 그해 2월 나는 미국을 방문했다. 콜린 파월 신임 미 국무장관과 현안에 대한 사전(事前) 조율을 하기 위해서였다. 파월 장관과 약속된 시간은 한 시간에 불과했다. 여러 현안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나는 파월 장관에게 제안했다.
“여러 가지 문제를 논의하는 외교장관 회담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외교장관이 신임 국무장관에게 브리핑해 주는 시간으로 이해해 주면 좋겠습니다. 시간 제약상 내가 먼저 설명을 해줄 테니까, 들어보고 더 알고 싶은 게 있을 경우 내게 질문을 하면 대답하는 식으로 회담을 진행합시다.”
나는 남북한 관계를 비롯해 여러 현안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었다. 파월은 크게 만족스러워했다.
“NMD 문제에 대해 美 입장 이해하지만…”
3월 6일(한국시각)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면서 나는 파월 장관에게 급한 친전(親展)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NMD 문제에 대해 미국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공개적으로 그런 의사를 표시할 상황은 못 된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대북(對北) 문제에 대한 한미공조체제, 전통적 한미동맹관계 등을 고려한 공동성명서 초안을 보내니, 이를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에 도착한 다음날인 3월 6일(현지시각) 파월 국무장관과 점심식사를 같이했다. 이 자리에서 파월 장관은 “이정빈 장관을 통해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면서 “부시 행정부는 한국 측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이제까지 유지해 왔던 양국 공조체제하에서 대북정책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전임(前任) 클린턴 행정부가 임기 말에 추진했던 대북 유화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파월 장관의 말에 김대중 대통령은 고무된 표정이었다.
파월 장관은 기자들에게도 “북한이 건설적으로 행동한다면 우리가 북한에 제안할 것이 많다”면서 “클린턴 행정부가 남겨놓고 떠난 곳에서 시작함으로써 북한을 포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것도 ‘햇볕정책’을 추진하던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좋은 신호였다.
다음날 한미정상회담이 열렸다. 회담장에 들어가자마자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의전상 부시 대통령 옆에 앉아 있어야 할 파월 국무장관이 문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우리 측 수행원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말했다.
파월의 입장이 하루 만에 바뀐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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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3월 7일(미국시각) 정상회담을 가진 뒤 오찬장으로 향하면서 손을 흔드는 김대중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 |
부시 대통령의 말을 듣고, 파월 국무장관이 내가 보낸 공동성명문 초안을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그대로 수용하기로 허락을 받았음을 알았다. 안심이 됐다. 그런데 정상회담을 하자마자 부시 대통령이 파월 장관에게 눈짓을 했다. 파월 장관은 밖에 나갔다가 한참만에 돌아왔다. 나는 속으로 ‘의회 관계로 무슨 일이 있나’하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밖에 나가서 파월 장관은 부시 행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을 천명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온 것이었다. 그는 이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미사일 계획을 중단시키기 위한 협상을 조기에 재개할 계획이 없다”며 북한을 ‘위협(Threat)’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하원 외교위원회에 출석해서도 “북한에 대해 강한 입장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하루 사이에 파월 장관의 입장이 180도 바뀐 것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파월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오찬에서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유화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겠다”고 밝힌 사실을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가 크게 질책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미국 외교안보팀은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 등 매파(派)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파월 장관은 비둘기파였지만,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야단을 맞고 나자 자신의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양국 정상회담 도중 밖으로 나가 북한에 대한 강경입장을 피력하는 기자회견을 한 것도 부시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그 바람에 양국 대통령의 공동성명은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는데 미 국무장관은 그와는 거리가 있는 발언을 하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때 한국 언론들은 하루 만에 파월 장관의 입장이 바뀐 이유를 궁금해했는데, 거기에는 이런 곡절이 있었던 것이다.
DJ, ABM 논란에 대해 유감 표명
미국에서도 한·러시아 정상회담 당시 ABM 문제와 관련한 《뉴욕타임스》지의 보도는 계속 논란이 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3월 7일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그 점에 대해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 기간 내내 따라다녔다. 3월 9일 열린 미국기업연구소(AEI)와 외교협회(CFR) 공동주최의 오찬 간담회에서 조지프 시스코 전 미 국무부 차관보는 “워싱턴을 놀라게 한 한·러 정상회담의 ABM 조약 지지 공동성명 합의를 설명해 달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것은 한국이 러시아 편을 들어서 미국이 추진하는 NMD체제에 반대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면서 “한·러 정상회담 이후 NMD체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다
대통령이 외국 방문 중, 외교 현안 문제를 놓고 사과하는 모습이 된 것이다. 당연히 외교팀에 대한 문책(問責) 얘기가 나왔다.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는 “나라가 망신당하는 심각할 정도의 외교적 실책들이 드러났다”면서 정상회담을 준비한 외교팀의 교체를 주장했다.
장관 자리에 연연할 생각은 없었다. 나도 그 문제로 대통령에게 누를 끼친 것이 더없이 죄송스러웠다.
귀국 후인 3월 23일 나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한·러시아 정상회담과 관련된 논란에 대해 해명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당초 공동선언 문안을 협의할 때, 러시아 측 초안에는 주한미군 철수, 명시적인 MD반대 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지만, 이를 다 물리치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밝혔다.
나로서는 실상을 제대로 알리려 한 것인데, 이 기자회견이 역효과를 낳았다. 언론에서는 “외교장관이 상대국과의 교섭 과정을 밝힌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나는 “언론에서도 국익(國益)을 염두에 두어야지, 내용도 잘 모르는 《뉴욕타임스》 기자 한 사람이 잘못 쓴 기사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해서 야단들 하고, 미국 언론이 이쪽으로 가면 이에 따르고, 저쪽으로 가면 거기에 따라가서야 되겠느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진실이나 정확한 내용과는 관계없이 정치적으로 밀려오는 쓰나미에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
기자회견 사흘 후인 3월 26일 개각(改閣)이 단행되었다. 나는 외교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지 42년, 외무부에 들어간 지 41년 만이었다.⊙
| [취재 후기] 편집장으로부터 “이정빈 전 외교부 장관을 만나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외교관 출신으로부터 무슨 얘기가 나올 수 있을까’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외교관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외교관 출신이면 보나마나 ‘외교적 답변’으로 일관할 텐데, 거기서 무슨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까 싶었다. 오래전에 그야말로 ‘외교적 답변’으로 일관하는 주한(駐韓) 사우디아라비아 대사를 인터뷰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래도 자유당 말기부터 김대중 정권까지 격동의 시대에 외교관 생활을 한 분인데, 들을 얘기가 있지 않겠나’하는 생각으로 이정빈 전 장관을 만났다. 의외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규하 전 외무장관을 국무총리로 발탁한 이유, 유양수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갈등 등의 이야기(《월간조선》 2015년 7월호)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라오 인도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실명제 자랑만 했다는 얘기에는 배꼽을 잡으면서도 입맛이 썼다. 이정빈 장관의 말에 따르면, 그가 모신 대통령 가운데 외교에 대한 감각이 가장 뛰어났던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이 전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은 어떤 외교 현안이 있을 때, 자신이 먼저 전면(全面)에 나서는 적이 없었다. 먼저 외교장관을 통해 떠본 후에, 일을 본격적으로 추진(Take-off)했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외교에서 대통령은 최후의 보루”라면서 “대통령이 앞장을 서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정빈 전 장관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면서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 계속 비판하자 듣다 못한 독일 총리가 ‘나는 독일 총리지, 일본 총리가 아닙니다’라고 했다더라”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에 꼭 갔어야 했느냐?”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에도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이 있지만, 그것 때문에 양국 외교가 마비되지는 않는다”는 얘기도 했다. 근래의 대통령들이 과거사 문제나 독도 문제에 매몰되어 한일관계를 경색되게 만든 데 대한 비판의 소리로 들렸다. 42년 동안 외교라는 한 우물을 팠던 분의 내공을 느끼게 하는 얘기들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