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 죽은 권력과 살아 있는 권력 동시에 겨냥” (노무현 사망 전날밤 민정수석실 행정관)
⊙ 87년 6월 계엄 준비하던 全斗煥에 쿠데타 준비로 맞섰던 민병돈 당시 특전사령관과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전두환이 미소를 지은 이유는?
⊙ 판문점서 만난 북한 기자가 “간첩 50명보다 조갑제 한 명이 더 낫다”고 한 이유는?
⊙ 중국을 방문한 金正日이 묵었던 상하이 호텔방에서 목도한 독재자의 부끄러운 민낯
⊙ 기자생활 21년, 청와대 생활 3년 동안 저자가 겪은 현대사 주요 인물 20인의 비화
함영준
⊙ 59세.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졸업.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
⊙ 《조선일보》사회부장·국제부장·《주간조선》편집장,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2018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 부위원장.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
現 고려대 미디어학부 초빙 교수, 한국문화포럼 이사장.
⊙ 관훈클럽 최병우 기자 기념 국제보도상 수상. 저서로 《한국, 너 잘났다》
《나의 심장은 코리아로 벅차 오른다》 《마흔이 내게 준 선물》.
⊙ 87년 6월 계엄 준비하던 全斗煥에 쿠데타 준비로 맞섰던 민병돈 당시 특전사령관과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전두환이 미소를 지은 이유는?
⊙ 판문점서 만난 북한 기자가 “간첩 50명보다 조갑제 한 명이 더 낫다”고 한 이유는?
⊙ 중국을 방문한 金正日이 묵었던 상하이 호텔방에서 목도한 독재자의 부끄러운 민낯
⊙ 기자생활 21년, 청와대 생활 3년 동안 저자가 겪은 현대사 주요 인물 20인의 비화
함영준
⊙ 59세.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졸업.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
⊙ 《조선일보》사회부장·국제부장·《주간조선》편집장,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2018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 부위원장.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
現 고려대 미디어학부 초빙 교수, 한국문화포럼 이사장.
⊙ 관훈클럽 최병우 기자 기념 국제보도상 수상. 저서로 《한국, 너 잘났다》
《나의 심장은 코리아로 벅차 오른다》 《마흔이 내게 준 선물》.
언론인 출신 함영준(咸永準) 전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이 쓴 책 《내려올 때 보인다》가 화제다. 함 비서관이 이 책에서 다룬 20인(人).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노무현(盧武鉉), 이명박(李明博), 김정일(金正日), 민병돈(閔丙敦), 조영래(趙英來), 조갑제(趙甲濟), 박지원(朴智元), 정명훈(鄭明勳), 김태촌(金泰村) 등의 이름이 갖고 있는 우리 현대사에서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그 이름에 걸맞은 무게를 지닌 비화(話)를 털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그가 기자생활 21년과 청와대 생활 3년 동안 직간접적으로 지켜보았던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주요 목차를 20인으로 구분해 놨지만 그 20인에 대한 비화를 설명하기 위해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이건희(李健熙), 문재인(文在寅) 등 우리 현대사에서 굵직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도 곁들여있다. ‘인물 현대사’라고도 할 만하다. 기자라는 직업을 가졌던 사람의 체험에서 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굳이 서평(書評)을 하자면 ‘생동감이 있고 군더더기 없는 서술이 특징’이다.
함 비서관은 이 책에서 1987년 6월에 있었던 전두환 정부의 계엄 선포 시도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당시 민병돈 특전사령관의 쿠데타 준비, 2009년 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성공을 위해 이건희 삼성 회장에 대한 ‘원 포인트’ 사면 추진, 2009년 5월 노무현 전(前) 대통령이 사망하기 하루 전날 저녁 문화체육관광비서관으로 가기 전까지 자신이 몸담았던 민정수석실 직원들과 벌인 ‘노무현 수사’를 둘러싼 대화 등의 비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를 만나 책 속에서 세세하게 밝힐 수 없었던 비화와 책이 출간된 이후 이 책에 등장하는 당사자들의 반응 등을 들어봤다.
—내려올 때보다는 정상에 있을 때 잘 보이는 것 아닌가요.
“글쎄요. 정상에 있을 때는 자기가 최고인데 뭐가 보이겠습니까. 자기만 보일 겁니다. 기자를 그만두고 또 그 이후 청와대를 떠난 후 잠시 한데 바람을 쐬게 됐을 때 느낀 건데 내려올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제가 정상에 서 봤다는 뜻은 아니지만 기자로서 비교적 잘나갈 때 참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밥도 많이 샀고 얻어먹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광야로 내 몸을 던지고 나니까 제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내려와 힘들었을 때 그를 격려해 준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따뜻한 설렁탕 한 그릇’이었다. 신문사를 나와 고생하고 있을 때 민병돈 장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로 “요즘 얼마나 힘들어. 식사나 해” 하는 민 장군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새삼 얼마나 오랜만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밥이나 먹자” 하는 소리를 들었는가를 셈해 봤다. 그것은 이미 아득한 추억이 돼 있었다.
두 사람은 서울 대학로 설렁탕집에서 만나 설렁탕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계산은 민 장군이 했다.
“제가 그때 깨달은 게 있어요. 어려운 사람한테 밥 한 끼를 사는 게 이렇게 중요한 일이구나. 제가 살아오면서 얻어먹은 밥 중에 그날의 설렁탕 맛이 최고였어요.”
민병돈 장군과 설렁탕에 얽힌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함 비서관은 자신이 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비교적 따스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조폭 두목 김태촌이나 연쇄살인범 김대두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등장인물들에 대해 너무 긍정적인 면만 부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우리 현대사에서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큰 역할을 했던 인물들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남겨 놓은 인생의 결과를 평가할 때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는 자기 편이 아닌 사람에 대해 90%는 잘해도 10%를 잘못하면 그 10% 때문에 용서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잖아요. 이제는 바뀌어야지요. 제 시선에서 긍정적인 면이 많아 보인다면 그런 제 생각이 은연중에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긍정적으로 묘사하려고 애썼다고 하지만 그래도 책 출간 이후 등장인물들로부터 항의 전화는 안 받았습니까.
“주로 고맙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항의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고교 동창인 손석희 앵커로부터 문자를 받았습니다. 제가 손 앵커에 대해 젊은 시절에는 생각이나 행동이 보수적이었다고 한 이야기 등이 손 앵커가 보기에는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대통령 문화체육관광비서관 시절 당시 이건희 삼성 회장에 대한 ‘원 포인트’ 사면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것으로 밝히고 있는데요.
“최종 결정권자는 대통령이기 때문에 결심은 당연히 대통령이 하신 거고요. 저는 그런 결심을 굳히도록 역할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회장 사면 과정을 소개하면서 당시 정정길 대통령 비서실장, 박용성 대한체육회장 등 많은 분들의 실명이 그대로 등장하던데 혹시 그들로부터 “사실과 다르다”는 항의는 안 받았습니까.
“제가 자신이 있으니까 실명을 공개한 것입니다. 사실과 다르다면 제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식사하는 자리에서 이번에 낸 책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번 광복 70주년 기념 사면에서도 경제인들에 대한 사면을 놓고 논란이 벌어진 데서 알 수 있듯이 경제인 사면은 정치적으로도 부담이 많은 사안인데요.
“그렇죠. 하지만 2018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내 영향력이 큰 이건희 회장의 사면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문제가 된다면 제가 정치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생각으로 추진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책임을 진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다 보면 해당 정부 부처가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청와대 눈치를 보는 것을 체감하게 됩니다. 청와대가 지침을 내려주기를 원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문제가 생기면 청와대가 시켜서 한 일이라고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런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언론은 ‘왜 부처 자율에 맡기지 않고 간섭하느냐’며 청와대를 비판하죠. 청와대에서 일을 하다 보면 그런 딜레마에 자주 부딪히게 돼요. 그래서 청와대에서 하는 일은 상당 부분 문서로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회장에 대한 사면 추진도 마찬가지였어요.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청와대의 지시가 아니라 비서관인 내 개인의 생각’이라고 말하겠다고 마음먹고 추진을 했죠.”
당시 함영준 비서관의 이건희 회장 사면 추진 작업은 다음과 같이 진행됐다.
2009년 들어 우리 체육계는 2018 동계올림픽, 2020 하계올림픽, 2022 월드컵 유치전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들 국제대회의 규모상 유치를 위해서는 우리 체육계뿐만 아니라 국가적 역량을 한 곳에 집중시켜도 유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동계올림픽은 강원도가, 하계올림픽은 부산·경남이 희망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지역 간의 갈등을 초래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당연히 체육계는 청와대에 국가적 역량을 한 대회 유치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교통정리를 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함 비서관은 당시 정정길 실장과 부산·경남(PK) 출신의 박재완 국정기획수석과 박형준 홍보수석과의 대화를 통해 청와대의 의견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지원으로 이끌어 냈다.
이명박 대통령은 모든 일을 주무부처인 문체부가 하게 하고 청와대는 도와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문제는 유치위 구성에서부터 벽에 부닥쳤다. 100여 명의 유치위원 선정을 둘러싸고 문체부와 대한체육회, 강원도 간 의견차가 작지 않았다. 게다가 유치위원을 하기 위해서 실력자들을 앞세운 일부 인사들의 청탁도 쇄도했다. 그 가운데는 국제 체육계에서 한동안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들도 있었다. 하지만 비리 등 이들의 과거 전력 때문에 문체부와 대한체육회, 강원도의 입장이 달랐다. 이들은 이 문제도 청와대가 교통정리해 주기를 요청해 왔다.
함 비서관은 고심 끝에 이런 원칙을 제시했다.
“문체부, 대한체육회, 강원도 등 세 군데서 모두 찬성하는 사람은 선정하고, 모두 반대하는 사람은 제외시키겠다.”
이 원칙에 따라 전직 체육계의 고위층 인물도, 전직 국회의원도 탈락했다. 위원장은 공동위원장 체제로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과 김진선 강원도지사를 임명했다. 동계올림픽 유치는 IOC 총회에서 투표로 결정하기 때문에 유치 성공을 위해서는 110명의 IOC 위원을 설득하는 게 관건이었다. 평창과 함께 유치전에 뛰어든 독일 뮌헨의 유치를 주도하는 인물은 현 IOC 위원장이고 당시 수석 부위원장이었던 토마스 바흐였다.
대통령도 모르게 사면 추진
유치전 라이벌인 뮌헨의 상황과 비교하면 우리는 아주 비관적이었다. 우리나라의 IOC 위원은 태권도 선수 출신의 문대성 현 새누리당 의원뿐이었다. IOC 위원 설득에 나서기에는 국제 체육계에서 문대성 IOC 위원의 힘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없으면 하나 마나였다. 이 회장은 IOC 위원이었지만 2008년 ‘김용철 변호사 비자금 폭로 사건’으로 유죄가 선고돼 자격이 정지된 상태였다. 이 회장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미 두 차례나 평창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벌였고 IOC 내에서 영향력도 상당했다. 이 회장의 IOC 위원 복귀 여부가 유치전 성패에 관건이 된 셈이다. 복귀를 위해서는 이 회장이 사면을 받아야 했다.
청와대도 문체부도 이 회장의 사면 문제를 거론하는 데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나섰다가 재벌인 삼성을 비호한다는 비판을 받을까 봐서였다. 함 비서관은 평소 알고 지내던 김영수 전 문체부장관에게 의견을 구했다. 김 전 장관은 대통령이 사면에 나설 수 있도록 사면 여론을 조성하되 청와대 내부에서도 은밀하게 추진하면서 혹시 문제가 생기면 비서관 선에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
함 비서관은 정정길 실장에게 저간의 상황을 구두로 보고했다. 그러면서 “정치적 논란이 일어난다면 제 선에서 책임지겠습니다. 실장님과도 상의한 바 없는 겁니다”라고 했다. 보고를 마치고 함 비서관은 박용성 체육회장, 조양호·김진선 공동위원장을 만났다. 청와대의 지침을 목말라하던 그들에게 ‘비서관 개인의 생각’을 전제한 뒤, 이 회장의 사면을 위한 국민여론 조성 작업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곧 강원도민들이 이건희 회장의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냈고 김진선 지사가 이 회장의 사면을 건의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어서 조양호 회장,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 최경환 당시 지식경제부장관 등의 건의가 이어졌다. 언론도 이들 이 회장 사면 건의 소식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이명박 대통령은 12월 31일자로 이 회장 한 명만 특별사면, 복권했다. 그리고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는 3수 만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건희 회장에 대한 사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말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보고를 안 했습니까.
“보고는 없었습니다. 김영수 장관이 ‘그 일을 대통령에게 먼저 보고하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되니까 보고하지 마시오. 불필요한 정치적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완종 회장 같은 사면은 안 되지만 이건희 회장 같은 경우처럼 명분 있는 사면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대통령 회고록에도 평창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건희 회장을 사면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회장 사면을 위한 작업을 함 비서관이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라도 이 대통령이 알았습니까.
“정정길 실장이 나중에 보고해서 알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삼성에서 나중에라도 고맙다는 전화는 안 왔습니까.
“없었습니다.”
청와대 말을 듣지 않는 검찰
함 비서관은 노무현 대통령과 얽힌 일화도 소개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본인이 취재기자 시절 노 대통령을 무명 변호사에서 일약 전국구 스타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이다.
1987년 1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전국이 들끓던 때였다. 그해 2월 9일 《조선일보》 기자였던 함 비서관은 당시 서소문에 있던 법조기자실에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서 제보 전화가 왔다. 부산에 노무현이라는 인권변호사가 있는데 검찰이 그날 구속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검찰 경비 전화로 확인해 보니 노 변호사에 대한 영장을 담당 판사가 기각했는데 검찰이 다시 구속시켜야 한다며 수석 부장판사 집을 찾아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담당 판사가 영장을 기각하면 피의자를 곧바로 석방하는 것이 통례다. 그러나 검찰은 이날 밤 노 변호사에 대한 영장을 4번이나 청구했고, 법원은 계속 기각했다. 검찰 사상 전무후무한 ‘하룻밤 네 번 영장 청구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새벽까지 이런 상황을 취재하고 나니 기사 마감 시간은 이미 지났다. 고민 끝에 함 기자는 당시 석간인 《동아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에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이날 오전 공개했다. 당시는 정부의 간섭이 심해 하루 더 기다린다고 해도 보도될 가능성이 적었고, 어쨌든 무리한 구속을 막아야 했다.
이날 석간 신문에 일제히 ‘하룻밤 새 네 번 영장 기각’이란 제하 기사가 크게 나가자 검찰은 그날 오후 노 변호사를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는 지난 2012년 발간한 회고록 《운명》에서 이 사건을 자세히 설명하고 그날 보도로 “무명의 노 변호사는 단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했다.
함 비서관은 자신이 그 이름 석 자를 중앙 무대에 알렸던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2008년 5월 23일 아침 9시 무렵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알게 됐다. 토요일이라 늦잠을 자고 있는데 이상기 전 기자협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 뉴스 들었어요? 노통이 자살했어. 자기 집 뒷산에 올라가서….”
그날의 전화가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공교롭게도 바로 전날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들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당시 진행 중이던 ‘노무현 수사’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 때문이다. 함 비서관은 문화체육관광비서관으로 가기 전 민정수석실에서 근무했었다. ‘노무현 수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고 청와대의 검찰 담당이 민정수석실이었기 때문에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화제는 단연 노 전 대통령 수사와 관련한 것이었다.
함 비서관은 “검찰이 왜 그래? 기소도 하지 않고 어정쩡한 수사를 계속하면서…. 너무한 것 아냐?” 하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검찰이 양쪽 다 잡으려고 합니다”였다.
“양쪽 다라니?”
“과거 권력 노통과 현재 권력 모두 말입니다.”
검찰이 노 대통령 쪽과 함께 이명박 대통령의 친구인 천신일씨도 수사하고 있으며 나중에는 칼끝이 이상득 의원으로 향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함 비서관은 “도대체 민정수석실은 뭐해?”라고 또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지금 검찰이 청와대 말을 듣습니까?”였다.
—이명박 대통령 회고록을 집필한 김두우 전 수석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께서는 ‘전직 대통령을 함부로 소환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 예우를 갖춰서 하라’고 했다. 하지만 검찰에서 돌아온 답은 ‘전직 대통령도 법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이야기였다”고 했는데 당시 검찰이 정말 청와대의 말을 안 들었습니까.
“노무현 대통령 수사 때는 제가 민정수석실에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일했던 사람들로부터 분위기를 전해 들은 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제가 민정수석실에 근무했을 때도 검찰이 청와대의 말을 잘 듣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검찰이 상지상(上至上)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고마움을 모르는 문재인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책에 보면 문재인 대표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했던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겁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지 2개월여가 지난 2003년 5월 1일 문재인 민정수석과 주간지 편집장단과 만나는 자리가 있었어요. 당시 저는 《주간조선》 편집장이었고요. 그때 화물연대가 불법파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파업을 바라보는 문재인 당시 수석의 시각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제가 이렇게 말했죠.
‘보수든 진보든 방법은 다르지만 부강하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목적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지지로 선출된 노무현 정부가 왜 화물연대의 일탈행위를 방관만 합니까?’ 그랬더니 당시 문 수석의 논리가 묘했어요.
‘역대 정부는 민(民)에 대해 불법적인 행동을 많이 자행했습니다. 때문에 노동계의 요구에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참고 인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는 거예요. 국가운영은 관용이 아니라 원칙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는 법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당시 문 수석은 한 나라의 사법권과 법질서를 수호해야 하는 민정수석이 아니라 대한변협 인권위원장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거죠.”
—그게 감사하는 마음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겁니까.
“노무현과 그의 사람들은 자신들도 인정하듯이 비주류요, 소수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스템과 절차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 그런 정권을 탄생시킨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현대사를 그들은 결코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죠. 대한민국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함 비서관은 같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으면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대표와 크게 비교되는 사람으로 인권운동의 시조급인 조영래 변호사를 꼽았다.
40대 초반인 1990년에 세상을 떠난 조 변호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수재였다. 1964년 경기고 3학년 때 한일(韓日)회담 반대 시위로 정학을 맞고도 서울대 전체 수석을 차지했다. 공부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서 출중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학생운동에 투신한 조 변호사는 유신 시절 내내 구속-수감-석방-수배를 이어가며 지냈다. 1980년 수배가 풀린 후 83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망원동 수재 소송,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의 변호를 맡으면서 인권변호사로서 이름을 날렸다. 함 비서관과 조 변호사는 기자와 인권변호사 신분으로 만났다. 함 비서관은 조 변호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지금도 가슴에 아로새기고 있다고 한다.
“정의란 누구의 독점물도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남용의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 말 때문에 조영래 변호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대표가 비교된다는 말입니까.
“제가 굳이 비교된다고 한 이유는 용서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조 변호사는 유신 시절 수감되고 고문당하고 핍박받았지만 누구를 증오하거나 독설을 내뱉지 않았습니다. 10·26이 발생했을 때 그는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에게 조의를 표하자고 주장했고, 전두환 대통령의 업적인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자 ‘한민족 5000년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쾌거’라며 행복해했습니다. 조영래는 오래 참고 성내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온유함과 겸손함을 갖고 있습니다”
함 비서관은 조영래 변호사를 당시 《월간조선》 기자였던 조갑제 전 편집장에게 소개했다. 지금 와서 보면 보수와 진보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고향(경북 청송)과 성씨가 같았고 학번(65)까지 같았으며 금세 친해지고 의기투합했다.
함 비서관은 이 책에서 지금 ‘보수 논객’으로 지칭되는 조갑제 기자가 ‘한때 북한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남조선 기자였다’는 비화도 소개하고 있다.
김정일의 침실을 보다
1987년 11월 김현희의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이 났을 때 함 비서관은 뉴욕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북한 공작원에 의한 테러가 자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두고 남북한은 유엔 안보리에서 첨예한 대결을 벌였다. 함 비서관은 유엔본부로 가서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을 놓고 벌어지는 남북한 대결을 취재했다.
정황은 북한 공작원의 테러를 입증하는 각종 증거 자료가 제시됨으로써 우리 측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런데 당시 북한 유엔주재 대사 박길연은 대한항공 폭파 사건과 관계 없는 한국 내 상황을 언급하며 남한을 비난했다. 그 발언 가운데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얼마 전 남조선 스파이 집단 두목을 지낸 이후락이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1973년 박정희의 지시로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고 폭로했다.”
박길연이 말한 “이후락이 박정희의 지시로 김대중을 납치했다”는 주장도 해당 기사에는 없는 말이었고, 당시 이후락을 인터뷰한 기자는 조갑제 기자가 아니라 오효진 기자였다. 박길연이 이후락 인터뷰 기사를 쓴 기자를 조갑제로 착각한 것은 당시 《월간조선》의 특종이나 폭로기사 상당 부분이 조갑제 기자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조갑제라는 이름은 당시 북한에서도 유명했다.
압권은 함 비서관이 귀국해 국방부 출입을 하면서 생긴 일이다. 판문점 군사정전 회담을 취재하러 갔다가 북한 기자들을 만났다. 당시 북한 기자들이 가장 궁금해했던 ‘남조선’ 기자는 단연 조갑제였다. 북한 기자들은 같은 조선일보사에 근무하는 함 비서관에게 조갑제 기자에 대한 이야기를 묻곤 했다.
“조갑제는 어떤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기사를 쓸 수 있지?”, “남산(국정원 지칭) 아이들이 가만 놔두나?”, “미 8군이니 CIA니 다 까발렸던데 양키들이 항의 안 해?” 하면서 “조갑제 최고야, 안부 좀 전해 줘” 등등의 이야기를 전해 왔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북한 기자단 중 맏형 격인 《민주조선》 김상현 기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함 기자, 스파이(남파 간첩) 50명보다 조갑제 1명이 더 나아….”
그랬던 조갑제는 지금은 북한이 가장 싫어하는 남한 언론인 중의 한 명이 됐다. 함 비서관은 그 이유를 “조갑제 기자는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사실을 좇는 기자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함 비서관은 시대적 상황 때문에 북한 독재자 김정일의 부끄러운 뒷모습을 취재해 놓고도 쓰지 못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김대중·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지 7개월여가 흐른 후인 2001년 1월 김정일이 상하이를 방문했다. 홍콩 특파원이었던 함 비서관은 김정일이 묵고 있다는 상하이로 갔다. 보안이 철저해 확인이 어려웠던 김정일의 숙소를 찾는 데만 많은 시간이 흘렀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김정일의 숙소를 확인했는데 1998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묵었던 상하이 신시가지의 최고급 호텔 둥팡빈장 호텔이었다.
함 비서관은 그 호텔 청소부를 포섭(?)해 정보를 캐냈다. 김정일 일행은 호텔 전체 14개 층 중 4개 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머지 층은 중국 국가안전부 요원들이 사용하거나 비어 있었다. 수행원들이 묵는 방은 미화 150달러짜리지만 김정일이 묵는 방은 3000달러짜리였다. 10층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인 ‘총통방’으로 목욕탕이 3개, 회의장 1개, 침실 2개로 이루어진 방이었다.
호텔 청소부는 김정일이 중국 음식, 미국 스테이크 등을 가리지 않고 잘 먹으며 술은 마오타이주는 물론 프랑스나 1995년산 스페인 포도주 등을 잘 먹었고 도착 첫날부터 마오타이주처럼 50도가 넘는 독주를 계속 마셨다는 정보를 주었다. 모든 경비는 중국 측이 부담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베이징으로 떠난 다음 날 아침 함 비서관은 홍콩에서 온 사업가로 위장해 예약을 핑계로 김정일이 묵었던 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청소부들이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침실의 침대는 제멋대로 구겨진 채 한쪽에 놓여 있었고 시트도 흐트러져 있었다. 젊은이들이 질탕하게 놀다가 그대로 떠난 듯한 광경이었다. 청소부들이 정리해 놓은 헤네시 XO 등 코냑과 프랑스산 와인 등 수십 개의 빈 술병도 눈에 들어왔다. 북한이라는 나라의 국격(國格)이 떠올랐고 한 독재자의 민낯을 그대로 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그 사실을 기사로 쓰지 않았습니까.
“당시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후 한국은 들뜬 분위기였잖습니까. 김정일은 ‘통큰 지도자’로 칭송되고 있었고 통일이 금방이라도 될 듯한 정서가 팽배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김정일의 침실을 보고 느낀 대로 썼다면 아마 저는 통일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반(反)통일 분자가 돼 버렸겠지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북한 최고 지도자의 침실을 본 최초의 사람이었다는데 만족 아닌 만족을 해야 했지요.”
전두환과 민병돈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우리의 이야기는 ‘따뜻한 설렁탕 한 그릇’의 주인공인 민병돈 장군 이야기로 돌아갔다.
1987년 ‘6월 항쟁’을 전후해 항간에는 전두환 대통령을 위한 친위쿠데타설 등이 난무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위수령을 검토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민병돈 장군은 과거 기자와 인터뷰에서 전두환 정부가 검토했던 것은 위수령이 아닌 계엄령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런데 함 비서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두환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할 경우 쿠데타를 일으켜 이를 저지하려 했다는 민 장군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다음은 그 증언을 요약한 것이다.
1987년 6월 19일 육군참모총장 명의의 ‘작전 명령 제87-4호’가 전군에 하달됐다. 휴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부대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군을 소요진압 작전에 대비하도록 하고, 전국에 비상계엄 사령부를 설치해 운용하며 필요시 발포도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당시 민 장군은 “지금 상황에서 군이 나서면 내란상황이 될 것이다. 7년 전 광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사태가 초래될 것이며 대한민국이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오고 있었다.
민 장군은 육사 동기(15기)이자 당시 보안사령관인 고명승 장군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작전 명령의 취소를 요청했다. 만약 대통령이 자신의 요청을 거부한다면 특전사를 동원해 청와대를 점령하는 계획까지 세워 놓은 상태였다. 쿠데타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 장군은 하나회 출신으로 전두환 대통령과는 아주 친밀한 사이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신혼 시절 단칸방에 가서 가운데에 전두환 대통령을 두고 왼쪽에는 이순자 여사가, 오른쪽에는 민병돈 장군이 자는 일도 있었을 정도로 상관으로서 부하로서 서로 상당한 신뢰를 가진 사이였다. 그 결과 서로의 성품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이이기도 했다. 쿠데타를 결심했을 때 이러한 인간적 관계가 부담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민 장군은 인간관계보다는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음은 고명승 장군이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나눈 대화다.
〈“각하, 군 출동 명령을 재고해 달라는 군내 여론이 높습니다.”
“누가 주도하는가?”
“민병돈 특전사령관입니다.”
“뭐야? 민병돈이?”
순간 전 대통령의 얼굴에 뜻 모를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알았어, 가 봐.”
결국 군 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사실은 고명승 장군에게도 확인한 사실입니까.
“당연히 확인했죠. 고명승 장군도 인정한 사실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주도자가 민병돈 장군이라고 했을 때 왜 뜻 모를 미소를 띠었다고 생각합니까.
“제가 보기에 작전 명령은 ‘엄포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 대통령은 당시 여러 경로를 통해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고 최우방인 미국 레이건 행정부도 우려의 뜻을 전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 대통령은 민 장군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미소를 띠었다고 생각합니다. 민병돈은 옳다면 실행하는 우직한 용기가 있기 때문이죠.”
민병돈 장군 이야기를 하며 함 비서관은 활짝 웃었다. 그는 자신이 만난 20인에 대한 공과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얘기하려고 노력했지만 사람들 각자에 대한 애정의 더하고 덜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모양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그가 기자생활 21년과 청와대 생활 3년 동안 직간접적으로 지켜보았던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주요 목차를 20인으로 구분해 놨지만 그 20인에 대한 비화를 설명하기 위해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이건희(李健熙), 문재인(文在寅) 등 우리 현대사에서 굵직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도 곁들여있다. ‘인물 현대사’라고도 할 만하다. 기자라는 직업을 가졌던 사람의 체험에서 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굳이 서평(書評)을 하자면 ‘생동감이 있고 군더더기 없는 서술이 특징’이다.
함 비서관은 이 책에서 1987년 6월에 있었던 전두환 정부의 계엄 선포 시도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당시 민병돈 특전사령관의 쿠데타 준비, 2009년 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성공을 위해 이건희 삼성 회장에 대한 ‘원 포인트’ 사면 추진, 2009년 5월 노무현 전(前) 대통령이 사망하기 하루 전날 저녁 문화체육관광비서관으로 가기 전까지 자신이 몸담았던 민정수석실 직원들과 벌인 ‘노무현 수사’를 둘러싼 대화 등의 비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를 만나 책 속에서 세세하게 밝힐 수 없었던 비화와 책이 출간된 이후 이 책에 등장하는 당사자들의 반응 등을 들어봤다.
—내려올 때보다는 정상에 있을 때 잘 보이는 것 아닌가요.
“글쎄요. 정상에 있을 때는 자기가 최고인데 뭐가 보이겠습니까. 자기만 보일 겁니다. 기자를 그만두고 또 그 이후 청와대를 떠난 후 잠시 한데 바람을 쐬게 됐을 때 느낀 건데 내려올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제가 정상에 서 봤다는 뜻은 아니지만 기자로서 비교적 잘나갈 때 참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밥도 많이 샀고 얻어먹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광야로 내 몸을 던지고 나니까 제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내려와 힘들었을 때 그를 격려해 준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따뜻한 설렁탕 한 그릇’이었다. 신문사를 나와 고생하고 있을 때 민병돈 장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로 “요즘 얼마나 힘들어. 식사나 해” 하는 민 장군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새삼 얼마나 오랜만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밥이나 먹자” 하는 소리를 들었는가를 셈해 봤다. 그것은 이미 아득한 추억이 돼 있었다.
두 사람은 서울 대학로 설렁탕집에서 만나 설렁탕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계산은 민 장군이 했다.
“제가 그때 깨달은 게 있어요. 어려운 사람한테 밥 한 끼를 사는 게 이렇게 중요한 일이구나. 제가 살아오면서 얻어먹은 밥 중에 그날의 설렁탕 맛이 최고였어요.”
민병돈 장군과 설렁탕에 얽힌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함 비서관은 자신이 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비교적 따스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조폭 두목 김태촌이나 연쇄살인범 김대두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등장인물들에 대해 너무 긍정적인 면만 부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우리 현대사에서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큰 역할을 했던 인물들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남겨 놓은 인생의 결과를 평가할 때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는 자기 편이 아닌 사람에 대해 90%는 잘해도 10%를 잘못하면 그 10% 때문에 용서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잖아요. 이제는 바뀌어야지요. 제 시선에서 긍정적인 면이 많아 보인다면 그런 제 생각이 은연중에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긍정적으로 묘사하려고 애썼다고 하지만 그래도 책 출간 이후 등장인물들로부터 항의 전화는 안 받았습니까.
“주로 고맙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항의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고교 동창인 손석희 앵커로부터 문자를 받았습니다. 제가 손 앵커에 대해 젊은 시절에는 생각이나 행동이 보수적이었다고 한 이야기 등이 손 앵커가 보기에는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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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사면을 받은 이건희 IOC위원이 2011년 7월 6일 남아공 더반 국립컨벤션센터에서 각국 IOC위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최종 결정권자는 대통령이기 때문에 결심은 당연히 대통령이 하신 거고요. 저는 그런 결심을 굳히도록 역할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회장 사면 과정을 소개하면서 당시 정정길 대통령 비서실장, 박용성 대한체육회장 등 많은 분들의 실명이 그대로 등장하던데 혹시 그들로부터 “사실과 다르다”는 항의는 안 받았습니까.
“제가 자신이 있으니까 실명을 공개한 것입니다. 사실과 다르다면 제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식사하는 자리에서 이번에 낸 책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번 광복 70주년 기념 사면에서도 경제인들에 대한 사면을 놓고 논란이 벌어진 데서 알 수 있듯이 경제인 사면은 정치적으로도 부담이 많은 사안인데요.
“그렇죠. 하지만 2018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내 영향력이 큰 이건희 회장의 사면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문제가 된다면 제가 정치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생각으로 추진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책임을 진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다 보면 해당 정부 부처가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청와대 눈치를 보는 것을 체감하게 됩니다. 청와대가 지침을 내려주기를 원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문제가 생기면 청와대가 시켜서 한 일이라고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런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언론은 ‘왜 부처 자율에 맡기지 않고 간섭하느냐’며 청와대를 비판하죠. 청와대에서 일을 하다 보면 그런 딜레마에 자주 부딪히게 돼요. 그래서 청와대에서 하는 일은 상당 부분 문서로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회장에 대한 사면 추진도 마찬가지였어요.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청와대의 지시가 아니라 비서관인 내 개인의 생각’이라고 말하겠다고 마음먹고 추진을 했죠.”
당시 함영준 비서관의 이건희 회장 사면 추진 작업은 다음과 같이 진행됐다.
2009년 들어 우리 체육계는 2018 동계올림픽, 2020 하계올림픽, 2022 월드컵 유치전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들 국제대회의 규모상 유치를 위해서는 우리 체육계뿐만 아니라 국가적 역량을 한 곳에 집중시켜도 유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동계올림픽은 강원도가, 하계올림픽은 부산·경남이 희망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지역 간의 갈등을 초래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당연히 체육계는 청와대에 국가적 역량을 한 대회 유치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교통정리를 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함 비서관은 당시 정정길 실장과 부산·경남(PK) 출신의 박재완 국정기획수석과 박형준 홍보수석과의 대화를 통해 청와대의 의견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지원으로 이끌어 냈다.
이명박 대통령은 모든 일을 주무부처인 문체부가 하게 하고 청와대는 도와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문제는 유치위 구성에서부터 벽에 부닥쳤다. 100여 명의 유치위원 선정을 둘러싸고 문체부와 대한체육회, 강원도 간 의견차가 작지 않았다. 게다가 유치위원을 하기 위해서 실력자들을 앞세운 일부 인사들의 청탁도 쇄도했다. 그 가운데는 국제 체육계에서 한동안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들도 있었다. 하지만 비리 등 이들의 과거 전력 때문에 문체부와 대한체육회, 강원도의 입장이 달랐다. 이들은 이 문제도 청와대가 교통정리해 주기를 요청해 왔다.
함 비서관은 고심 끝에 이런 원칙을 제시했다.
“문체부, 대한체육회, 강원도 등 세 군데서 모두 찬성하는 사람은 선정하고, 모두 반대하는 사람은 제외시키겠다.”
이 원칙에 따라 전직 체육계의 고위층 인물도, 전직 국회의원도 탈락했다. 위원장은 공동위원장 체제로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과 김진선 강원도지사를 임명했다. 동계올림픽 유치는 IOC 총회에서 투표로 결정하기 때문에 유치 성공을 위해서는 110명의 IOC 위원을 설득하는 게 관건이었다. 평창과 함께 유치전에 뛰어든 독일 뮌헨의 유치를 주도하는 인물은 현 IOC 위원장이고 당시 수석 부위원장이었던 토마스 바흐였다.
대통령도 모르게 사면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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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비비(오른쪽)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1998년 8월 8일 자카르타 대통령궁 집무실에서 당시 함영준 조선일보 홍콩특파원과 단독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삼성 이건희 회장이 없으면 하나 마나였다. 이 회장은 IOC 위원이었지만 2008년 ‘김용철 변호사 비자금 폭로 사건’으로 유죄가 선고돼 자격이 정지된 상태였다. 이 회장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미 두 차례나 평창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벌였고 IOC 내에서 영향력도 상당했다. 이 회장의 IOC 위원 복귀 여부가 유치전 성패에 관건이 된 셈이다. 복귀를 위해서는 이 회장이 사면을 받아야 했다.
청와대도 문체부도 이 회장의 사면 문제를 거론하는 데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나섰다가 재벌인 삼성을 비호한다는 비판을 받을까 봐서였다. 함 비서관은 평소 알고 지내던 김영수 전 문체부장관에게 의견을 구했다. 김 전 장관은 대통령이 사면에 나설 수 있도록 사면 여론을 조성하되 청와대 내부에서도 은밀하게 추진하면서 혹시 문제가 생기면 비서관 선에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
함 비서관은 정정길 실장에게 저간의 상황을 구두로 보고했다. 그러면서 “정치적 논란이 일어난다면 제 선에서 책임지겠습니다. 실장님과도 상의한 바 없는 겁니다”라고 했다. 보고를 마치고 함 비서관은 박용성 체육회장, 조양호·김진선 공동위원장을 만났다. 청와대의 지침을 목말라하던 그들에게 ‘비서관 개인의 생각’을 전제한 뒤, 이 회장의 사면을 위한 국민여론 조성 작업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곧 강원도민들이 이건희 회장의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냈고 김진선 지사가 이 회장의 사면을 건의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어서 조양호 회장,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 최경환 당시 지식경제부장관 등의 건의가 이어졌다. 언론도 이들 이 회장 사면 건의 소식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이명박 대통령은 12월 31일자로 이 회장 한 명만 특별사면, 복권했다. 그리고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는 3수 만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건희 회장에 대한 사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말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보고를 안 했습니까.
“보고는 없었습니다. 김영수 장관이 ‘그 일을 대통령에게 먼저 보고하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되니까 보고하지 마시오. 불필요한 정치적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완종 회장 같은 사면은 안 되지만 이건희 회장 같은 경우처럼 명분 있는 사면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대통령 회고록에도 평창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건희 회장을 사면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회장 사면을 위한 작업을 함 비서관이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라도 이 대통령이 알았습니까.
“정정길 실장이 나중에 보고해서 알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삼성에서 나중에라도 고맙다는 전화는 안 왔습니까.
“없었습니다.”
청와대 말을 듣지 않는 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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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운구차가 2009년 5월 29일 오전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떠나고 있다. 그가 사망하기 전날 함 비서관은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들과 만나 ‘노무현 수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눴다. |
1987년 1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전국이 들끓던 때였다. 그해 2월 9일 《조선일보》 기자였던 함 비서관은 당시 서소문에 있던 법조기자실에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서 제보 전화가 왔다. 부산에 노무현이라는 인권변호사가 있는데 검찰이 그날 구속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검찰 경비 전화로 확인해 보니 노 변호사에 대한 영장을 담당 판사가 기각했는데 검찰이 다시 구속시켜야 한다며 수석 부장판사 집을 찾아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담당 판사가 영장을 기각하면 피의자를 곧바로 석방하는 것이 통례다. 그러나 검찰은 이날 밤 노 변호사에 대한 영장을 4번이나 청구했고, 법원은 계속 기각했다. 검찰 사상 전무후무한 ‘하룻밤 네 번 영장 청구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새벽까지 이런 상황을 취재하고 나니 기사 마감 시간은 이미 지났다. 고민 끝에 함 기자는 당시 석간인 《동아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에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이날 오전 공개했다. 당시는 정부의 간섭이 심해 하루 더 기다린다고 해도 보도될 가능성이 적었고, 어쨌든 무리한 구속을 막아야 했다.
이날 석간 신문에 일제히 ‘하룻밤 새 네 번 영장 기각’이란 제하 기사가 크게 나가자 검찰은 그날 오후 노 변호사를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는 지난 2012년 발간한 회고록 《운명》에서 이 사건을 자세히 설명하고 그날 보도로 “무명의 노 변호사는 단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했다.
함 비서관은 자신이 그 이름 석 자를 중앙 무대에 알렸던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2008년 5월 23일 아침 9시 무렵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알게 됐다. 토요일이라 늦잠을 자고 있는데 이상기 전 기자협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 뉴스 들었어요? 노통이 자살했어. 자기 집 뒷산에 올라가서….”
그날의 전화가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공교롭게도 바로 전날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들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당시 진행 중이던 ‘노무현 수사’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 때문이다. 함 비서관은 문화체육관광비서관으로 가기 전 민정수석실에서 근무했었다. ‘노무현 수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고 청와대의 검찰 담당이 민정수석실이었기 때문에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화제는 단연 노 전 대통령 수사와 관련한 것이었다.
함 비서관은 “검찰이 왜 그래? 기소도 하지 않고 어정쩡한 수사를 계속하면서…. 너무한 것 아냐?” 하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검찰이 양쪽 다 잡으려고 합니다”였다.
“양쪽 다라니?”
“과거 권력 노통과 현재 권력 모두 말입니다.”
검찰이 노 대통령 쪽과 함께 이명박 대통령의 친구인 천신일씨도 수사하고 있으며 나중에는 칼끝이 이상득 의원으로 향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함 비서관은 “도대체 민정수석실은 뭐해?”라고 또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지금 검찰이 청와대 말을 듣습니까?”였다.
—이명박 대통령 회고록을 집필한 김두우 전 수석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께서는 ‘전직 대통령을 함부로 소환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 예우를 갖춰서 하라’고 했다. 하지만 검찰에서 돌아온 답은 ‘전직 대통령도 법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이야기였다”고 했는데 당시 검찰이 정말 청와대의 말을 안 들었습니까.
“노무현 대통령 수사 때는 제가 민정수석실에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일했던 사람들로부터 분위기를 전해 들은 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제가 민정수석실에 근무했을 때도 검찰이 청와대의 말을 잘 듣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검찰이 상지상(上至上)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고마움을 모르는 문재인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책에 보면 문재인 대표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했던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겁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지 2개월여가 지난 2003년 5월 1일 문재인 민정수석과 주간지 편집장단과 만나는 자리가 있었어요. 당시 저는 《주간조선》 편집장이었고요. 그때 화물연대가 불법파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파업을 바라보는 문재인 당시 수석의 시각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제가 이렇게 말했죠.
‘보수든 진보든 방법은 다르지만 부강하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목적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지지로 선출된 노무현 정부가 왜 화물연대의 일탈행위를 방관만 합니까?’ 그랬더니 당시 문 수석의 논리가 묘했어요.
‘역대 정부는 민(民)에 대해 불법적인 행동을 많이 자행했습니다. 때문에 노동계의 요구에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참고 인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는 거예요. 국가운영은 관용이 아니라 원칙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는 법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당시 문 수석은 한 나라의 사법권과 법질서를 수호해야 하는 민정수석이 아니라 대한변협 인권위원장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거죠.”
—그게 감사하는 마음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겁니까.
“노무현과 그의 사람들은 자신들도 인정하듯이 비주류요, 소수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스템과 절차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 그런 정권을 탄생시킨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현대사를 그들은 결코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죠. 대한민국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함 비서관은 같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으면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대표와 크게 비교되는 사람으로 인권운동의 시조급인 조영래 변호사를 꼽았다.
40대 초반인 1990년에 세상을 떠난 조 변호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수재였다. 1964년 경기고 3학년 때 한일(韓日)회담 반대 시위로 정학을 맞고도 서울대 전체 수석을 차지했다. 공부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서 출중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학생운동에 투신한 조 변호사는 유신 시절 내내 구속-수감-석방-수배를 이어가며 지냈다. 1980년 수배가 풀린 후 83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망원동 수재 소송,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의 변호를 맡으면서 인권변호사로서 이름을 날렸다. 함 비서관과 조 변호사는 기자와 인권변호사 신분으로 만났다. 함 비서관은 조 변호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지금도 가슴에 아로새기고 있다고 한다.
“정의란 누구의 독점물도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남용의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 말 때문에 조영래 변호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대표가 비교된다는 말입니까.
“제가 굳이 비교된다고 한 이유는 용서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조 변호사는 유신 시절 수감되고 고문당하고 핍박받았지만 누구를 증오하거나 독설을 내뱉지 않았습니다. 10·26이 발생했을 때 그는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에게 조의를 표하자고 주장했고, 전두환 대통령의 업적인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자 ‘한민족 5000년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쾌거’라며 행복해했습니다. 조영래는 오래 참고 성내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온유함과 겸손함을 갖고 있습니다”
함 비서관은 조영래 변호사를 당시 《월간조선》 기자였던 조갑제 전 편집장에게 소개했다. 지금 와서 보면 보수와 진보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고향(경북 청송)과 성씨가 같았고 학번(65)까지 같았으며 금세 친해지고 의기투합했다.
함 비서관은 이 책에서 지금 ‘보수 논객’으로 지칭되는 조갑제 기자가 ‘한때 북한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남조선 기자였다’는 비화도 소개하고 있다.
김정일의 침실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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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이 중국 상하이를 방문 중이던 2001년 1월 18일 오전 9시30분 김정일 일행이 탄 승용차와 미니버스 등이 경찰의 삼엄한 경비속에서 호텔을 출발, 상하이 증권거래소로 향하고 있다. 홍콩 특파원이었던 함 비서관은 김정일이 묵었던 침실을 취재했다. |
정황은 북한 공작원의 테러를 입증하는 각종 증거 자료가 제시됨으로써 우리 측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런데 당시 북한 유엔주재 대사 박길연은 대한항공 폭파 사건과 관계 없는 한국 내 상황을 언급하며 남한을 비난했다. 그 발언 가운데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얼마 전 남조선 스파이 집단 두목을 지낸 이후락이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1973년 박정희의 지시로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고 폭로했다.”
박길연이 말한 “이후락이 박정희의 지시로 김대중을 납치했다”는 주장도 해당 기사에는 없는 말이었고, 당시 이후락을 인터뷰한 기자는 조갑제 기자가 아니라 오효진 기자였다. 박길연이 이후락 인터뷰 기사를 쓴 기자를 조갑제로 착각한 것은 당시 《월간조선》의 특종이나 폭로기사 상당 부분이 조갑제 기자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조갑제라는 이름은 당시 북한에서도 유명했다.
압권은 함 비서관이 귀국해 국방부 출입을 하면서 생긴 일이다. 판문점 군사정전 회담을 취재하러 갔다가 북한 기자들을 만났다. 당시 북한 기자들이 가장 궁금해했던 ‘남조선’ 기자는 단연 조갑제였다. 북한 기자들은 같은 조선일보사에 근무하는 함 비서관에게 조갑제 기자에 대한 이야기를 묻곤 했다.
“조갑제는 어떤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기사를 쓸 수 있지?”, “남산(국정원 지칭) 아이들이 가만 놔두나?”, “미 8군이니 CIA니 다 까발렸던데 양키들이 항의 안 해?” 하면서 “조갑제 최고야, 안부 좀 전해 줘” 등등의 이야기를 전해 왔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북한 기자단 중 맏형 격인 《민주조선》 김상현 기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함 기자, 스파이(남파 간첩) 50명보다 조갑제 1명이 더 나아….”
그랬던 조갑제는 지금은 북한이 가장 싫어하는 남한 언론인 중의 한 명이 됐다. 함 비서관은 그 이유를 “조갑제 기자는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사실을 좇는 기자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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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영준 비서관은 조선일보 홍콩특파원이던 1999년 1월 11일 관훈클럽 창립 42주년 기념식에서 박권상 당시 KBS사장으로부터 ‘제10회 최병우기자 기념 국제보도상’을 받았다. |
김대중·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지 7개월여가 흐른 후인 2001년 1월 김정일이 상하이를 방문했다. 홍콩 특파원이었던 함 비서관은 김정일이 묵고 있다는 상하이로 갔다. 보안이 철저해 확인이 어려웠던 김정일의 숙소를 찾는 데만 많은 시간이 흘렀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김정일의 숙소를 확인했는데 1998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묵었던 상하이 신시가지의 최고급 호텔 둥팡빈장 호텔이었다.
함 비서관은 그 호텔 청소부를 포섭(?)해 정보를 캐냈다. 김정일 일행은 호텔 전체 14개 층 중 4개 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머지 층은 중국 국가안전부 요원들이 사용하거나 비어 있었다. 수행원들이 묵는 방은 미화 150달러짜리지만 김정일이 묵는 방은 3000달러짜리였다. 10층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인 ‘총통방’으로 목욕탕이 3개, 회의장 1개, 침실 2개로 이루어진 방이었다.
호텔 청소부는 김정일이 중국 음식, 미국 스테이크 등을 가리지 않고 잘 먹으며 술은 마오타이주는 물론 프랑스나 1995년산 스페인 포도주 등을 잘 먹었고 도착 첫날부터 마오타이주처럼 50도가 넘는 독주를 계속 마셨다는 정보를 주었다. 모든 경비는 중국 측이 부담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베이징으로 떠난 다음 날 아침 함 비서관은 홍콩에서 온 사업가로 위장해 예약을 핑계로 김정일이 묵었던 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청소부들이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침실의 침대는 제멋대로 구겨진 채 한쪽에 놓여 있었고 시트도 흐트러져 있었다. 젊은이들이 질탕하게 놀다가 그대로 떠난 듯한 광경이었다. 청소부들이 정리해 놓은 헤네시 XO 등 코냑과 프랑스산 와인 등 수십 개의 빈 술병도 눈에 들어왔다. 북한이라는 나라의 국격(國格)이 떠올랐고 한 독재자의 민낯을 그대로 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그 사실을 기사로 쓰지 않았습니까.
“당시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후 한국은 들뜬 분위기였잖습니까. 김정일은 ‘통큰 지도자’로 칭송되고 있었고 통일이 금방이라도 될 듯한 정서가 팽배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김정일의 침실을 보고 느낀 대로 썼다면 아마 저는 통일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반(反)통일 분자가 돼 버렸겠지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북한 최고 지도자의 침실을 본 최초의 사람이었다는데 만족 아닌 만족을 해야 했지요.”
전두환과 민병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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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7월 20일 전쟁기념관 앞에서 국군격려국민대회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민병돈 장군. 그는 전두환 정권의 계엄령 선포 시도를 쿠데타 위협으로 막았다. |
1987년 ‘6월 항쟁’을 전후해 항간에는 전두환 대통령을 위한 친위쿠데타설 등이 난무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위수령을 검토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민병돈 장군은 과거 기자와 인터뷰에서 전두환 정부가 검토했던 것은 위수령이 아닌 계엄령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런데 함 비서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두환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할 경우 쿠데타를 일으켜 이를 저지하려 했다는 민 장군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다음은 그 증언을 요약한 것이다.
1987년 6월 19일 육군참모총장 명의의 ‘작전 명령 제87-4호’가 전군에 하달됐다. 휴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부대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군을 소요진압 작전에 대비하도록 하고, 전국에 비상계엄 사령부를 설치해 운용하며 필요시 발포도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당시 민 장군은 “지금 상황에서 군이 나서면 내란상황이 될 것이다. 7년 전 광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사태가 초래될 것이며 대한민국이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오고 있었다.
민 장군은 육사 동기(15기)이자 당시 보안사령관인 고명승 장군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작전 명령의 취소를 요청했다. 만약 대통령이 자신의 요청을 거부한다면 특전사를 동원해 청와대를 점령하는 계획까지 세워 놓은 상태였다. 쿠데타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 장군은 하나회 출신으로 전두환 대통령과는 아주 친밀한 사이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신혼 시절 단칸방에 가서 가운데에 전두환 대통령을 두고 왼쪽에는 이순자 여사가, 오른쪽에는 민병돈 장군이 자는 일도 있었을 정도로 상관으로서 부하로서 서로 상당한 신뢰를 가진 사이였다. 그 결과 서로의 성품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이이기도 했다. 쿠데타를 결심했을 때 이러한 인간적 관계가 부담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민 장군은 인간관계보다는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음은 고명승 장군이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나눈 대화다.
〈“각하, 군 출동 명령을 재고해 달라는 군내 여론이 높습니다.”
“누가 주도하는가?”
“민병돈 특전사령관입니다.”
“뭐야? 민병돈이?”
순간 전 대통령의 얼굴에 뜻 모를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알았어, 가 봐.”
결국 군 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사실은 고명승 장군에게도 확인한 사실입니까.
“당연히 확인했죠. 고명승 장군도 인정한 사실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주도자가 민병돈 장군이라고 했을 때 왜 뜻 모를 미소를 띠었다고 생각합니까.
“제가 보기에 작전 명령은 ‘엄포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 대통령은 당시 여러 경로를 통해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고 최우방인 미국 레이건 행정부도 우려의 뜻을 전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 대통령은 민 장군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미소를 띠었다고 생각합니다. 민병돈은 옳다면 실행하는 우직한 용기가 있기 때문이죠.”
민병돈 장군 이야기를 하며 함 비서관은 활짝 웃었다. 그는 자신이 만난 20인에 대한 공과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얘기하려고 노력했지만 사람들 각자에 대한 애정의 더하고 덜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