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민-최우석의 유쾌한 직설 ⑧ 만화가 李賢世 : 월간조선

이현세(李賢世)씨는 1980~90년대 한국 만화의 르네상스 시대를 연 만화가다. 그는 《공포의 외인구단》《아마게돈》《버디》《천국의 신화》 등 숱한 히트작을 내놓으며 홀대받아 온 문화 장르인 만화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웹툰(Webtoon) 전성시대를 맞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웹툰은 인터넷을 의미하는 웹(Web)과 만화를 의미하는 카툰(Cartoon)을 합성한 말로서 종이로 출판한 만화가 아니라 인터넷·모바일에서 볼 수 있는 만화를 뜻한다. 서울 강남 소재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한 이유는 간단했다. 영원한 라이벌로 꼽히는 만화가 허영만(許英萬)씨와 비교되는 행보 때문이다. 허영만이 꾸준히 히트작을 내고, 신문, 잡지 인터뷰는 물론 TV 뉴스, 오락 프로그램 출연 등 여기저기서 눈에 띄는 활동을 이어가지만 이현세는 요즘 조용하다. 라이벌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한국 만화의 빛나는 중심이었던 그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린 것일까.

빨갱이 집안이라는 汚名

그에게 “어떻게 만화가가 됐느냐”는 뻔한 질문부터 던졌다. 대략 예상되는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데 뻔하지 않은 답이 돌아왔다.

“사실 6·25전쟁 때 인민군에 가담한 둘째 삼촌 때문에 빨갱이 집안이 됐습니다. 날카로운 눈을 가진 아저씨들이 저희 집을 지켜보다 가곤 했지요. 국가에서 혹시 삼촌이 접근하지 않을까 감시했던 것이지요. 이런 사실 때문에 할머니는 내게 살아남으라는 얘기를 자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할머니가 손자에게 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돼라’거나 ‘훌륭한 사람이 돼라’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생존만이 절대명제였던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밖에서 뛰어놀기 좋아하던 아이는 어느샌가 밖에 나가지 않고 책을 읽는 아이가 됐습니다. 만화책을 자주 봤는데, 공상(空想)의 세계가 있더군요. 만화책을 읽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어 아주 좋았습니다.

이때만 해도 만화를 그리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연좌제 때문에 공무원은 못할 텐데, 무엇을 해야 하나’하는 고민만 했지요. 그러다가 중학생이 됐는데, 우연한 기회에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를 읽게 됐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를 읽고 나니, 만화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군요.”

20세기 미국 최대의 국민적 시인으로 추앙받는 로버트 프로스트는 1915년 출판한 시집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서 인생의 선택을 이렇게 표현했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父親을 삼촌으로 알았던 이현세

2013년 2월 13일 TV조선 〈북잇수다〉 이현세편 녹화현장. 오른쪽부터 표정훈, 이현세, 손미나, 어수웅.

—자료를 찾아보니 출생연도와 출생지역이 제각각이던데요.(검색 사이트에는 이현세가 1956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난 것으로 나와 있다.)

“정확하게는 1954년 포항에서 태어났습니다. 6세 때부터는 쭉 경주에서 자랐습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울진은 본적(本籍)입니다. 그때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거죠. (6·25전쟁 이후) 울진에서 빨갱이 사냥이 심해져 친척·친구들이 다 손가락질을 하니까, 아버지께서 가족들을 데리고 포항으로 나온 겁니다. 포항(흥해)에서 농사지으며 정착하려 했는데 사라호 태풍 때문에 개간한 논밭이 다 없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경주로 나왔지요. 아버지는 경주 철도역 수리공장에서 근무하셨는데 제가 9세 때 감전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돌아가신 분이 아버지인지 몰랐습니다.”

—아버지인지 몰랐다니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만주에서 사셨는데 고향에 와서도 살기가 여전히 어려우니 둘째 삼촌이 만주에 다시 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38선’이 그어져 둘째 삼촌이 못 넘어왔습니다. 이후 6·25전쟁이 일어났고, 둘째 삼촌은 인민군이 돼 집으로 왔습니다. 집에서 저녁 한 끼 먹고 갔는데 그 모습을 동네 사람들이 다 봤고, 졸지에 빨갱이 집안이 됐습니다. 둘째 삼촌으로 인해 큰아버지가 헌병대에 잡혀가 총살당했습니다. 큰아버지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큰집에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저를 큰집에 양자(養子)로 보냈지요. 젖을 떼자마자 갔으니까 저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집안 식구들은 다 알았는데 저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버지가 감전사고로 돌아가실 때도 삼촌이라고 알았기 때문에 상주가 되지 못했습니다. 작은어머니가 한 번도 제 부탁을 거절하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자랐는데… 제 친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이현세는 민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담히 털어놨다. 그는 과거 학력위조 논란이 신경 쓰였는지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이유도 밝혔다.

“홍익대 미대와 서라벌예대를 목표로 입시를 준비했어요. 그림을 좀 그리는 편이었거든요. 그런데 적록 색약 판정을 받았습니다. 응시자격 자체를 잃은 것이지요. 좋게 생각했어요. ‘입시를 앞두고 색약 판정을 받게 된 건 어쩌면 흑백으로 세상을 그리는 만화가가 되라는 운명이다’ 이렇게요.”

이현세는 고졸 학력을 서라벌예대 중퇴라고 속인 바 있다.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돼 처음 하는 인터뷰에서 대학을 중퇴했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만화가라면 한 수 내려보는 풍토에서 차마 (고졸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역시 만화나 그리는 것들이 그렇지’ 그럴까 싶어서…. 이때부터 학력은 25년간 벗어날 수 없는 핸디캡이 됐습니다. 고등학교 나온 게 핸디캡이 아니라 그걸 숨긴 거 자체가 핸디캡이 된 것이지요. 2007년 용기를 내 스스로 (학력위조를) 공개하고 용서를 구했는데 신정아씨 사건이 딱 터져버린 거예요. ‘그래 세상에 공짜는 없지, 무던하게 넘어가려고 한 내가 잘못이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나하나 선생의 門下生

만화가의 꿈을 가진 이현세는 고교 졸업 후인 1974년 서울에 올라왔다. 첫 상경 때는 만화가 화실이 많았던 모래내(남가좌동) 근처에 둥지를 틀었다. “어릴 때는 만화가 중에 손의성을 제일 좋아했고 오명천, 이종진의 작품을 즐겨 봤어요. 그 선생님들의 작품은 빠짐없이 봤죠. 펜 선이 칼처럼 날카롭고 율동미가 넘쳤어요. 그림을 흉내 내서 화실에 보내면 책 맨 뒤에 있는 독자만화 코너에 단골로 실리곤 했죠.”

만화를 좋아했고 그것밖에 잘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현세였지만 만화계 입문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스무 살인데도 몸에 털이 많아서 나이가 더 들어 보였는지 늙었다고 안 받아줬어요. 진짜 스무 살이라 말하니 이번엔 ‘금방 군대 가야 하니까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독자(獨子)라 군대도 파주에서 6개월만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제 태도가 불량했던 것 같아요. 반항적인 성격과 거만한 모습에 아무도 저를 반겨주지 않은 것이지요. ‘이제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순정만화를 그리는 나하나 선생님이 받아줬습니다. 그분께 데생(Dessin)을 배웠습니다.”

—마초적인 이현세와 순정만화는 잘 안 어울리는데요.

“제가 액션을 좋아하긴 했지요. 그래서 오래 있지는 못했습니다.”

—나하나 선생 화실에서 나오고 나서 독립한 것입니까.

“아니요. 극화 쪽으로 옮겨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선생 밑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그 시절에는 작업 속도가 다른 문하생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고 한 번 본 것을 모사하는 것에도 능했죠. 당시 《새소년》이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부끄러운 일을 많이 했어요. 선생은 그 잡지사에 가서 유행하는 일본만화나 미국만화를 가져왔고, 내 역할은 그걸 보고 그림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었어요. 만화 아니면 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 시키는 대로 그림만 그리던 때였죠. 창피했지만 그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나 미국의 만화를 섭렵할 수 있었고, 필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까치’와 ‘이현세’는 이때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3일 밤낮 만화만 그리기도

1980년대 빅히트작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다른 문하생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업 속도가 빨랐다고 했는데요.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합니까.

“어릴 때 제가 살던 동네에서는 제가 만화를 제일 잘 그렸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가 보니까, 나보다 더욱 뛰어난 천재가 있더군요. 중·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성인이 돼 만난 천재들은 한 달 내내 술만 마시고도 며칠 휘갈겨 쓴 원고로 저의 원고를 휴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 친구를 볼 때마다 주눅이 들었습니다. 일반인들에 비하면 제가 만화를 잘 그리겠지만, 전문 만화가들 사이에서는 도토리 키 재기였습니다.”

—인정한 천재 중 이현세만큼 성공한 만화가가 있습니까.

“불행하게도 없는 것 같네요.”

—범재(凡才)가 천재(天才)를 넘어선 것이네요. 비결이 뭡니까.

“저는 천재들과 정면으로 겨루지 않았습니다. 천재를 먼저 보내놓고 10년이든 20년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꾸준히 제 갈 길을 간 것이죠. 그러다 보니 어느 날 제가 멈춰버린 천재를 추월해서 지나가고 있더군요. 그런데 솔직히 성실한 천재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 분을 만나면 이기려고 하기보다 ‘만나는 것만 해도 영광이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죠.”

—몰입도가 다른 만화가에 비해 훨씬 높다는 평이 있던데요.

“제가 유별난 편입니다. 그림을 그리다 밥을 먹으러 가거나 화장실을 가는 만화가를 싫어합니다. 일에 몰입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저 같은 경우에는 한번 몰입하면 허기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는 성격 때문에 3일 밤낮을 자지도 않고 만화를 그린 적도 있거든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치우는 것을 싫어해서 어지르지 않는 성격입니다. 데생을 해도 가능하면 지우개 가루가 안 날리도록 하지요. 안 지우려면 열심히 연습하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지금도 3일씩 밤새워 가면서 만화를 그리는지요.

“나이가 있는데 그렇게는 못하죠. 그래도 한번 작업하면 하루 10시간 이상 하죠. 학교 강의(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도 이틀은 가야 하고, 주말에는 친구들과 골프도 치고, 일주일에 3일 정도 집중해서 작업합니다. 정말 몰입하면 10시간을 그려도 엉덩이가 하나도 안 배겨요. 그리고 4일은 앉아서 하는 것은 전혀 안 합니다.”

斗酒不辭

그의 주량은 ‘마다하지 않음’으로 알려져 있다. 기절할 때까지 마셔보긴 했는데 정확한 양은 세보지 않았단다.

—한창 잘 마실 때 어느 정도까지 마셔봤습니까.

“한때 하룻밤에 폭탄주 20잔을 마시고, 하루에 담배 4갑을 피웠습니다. 술과 담배 탓에 남아 있는 잇몸이 하나도 없어 6년 동안 임플란트 시술을 받았습니다. 심장병, 당뇨, 위암 때문에 술과 담배는 끊었습니다.”

—술과 담배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생각나는 건 아닌데 여전히 그립긴 하죠. 작가라는 직업은 작업할 때는 혼자 해야 하잖아요. 작업이 만족스러울 때도 있지만 외로울 때도 있으니까 뭔가 위안거리가 있어야죠. 그럴 때 달래주는 게 때로는 자상한 아내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장기나 바둑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다른 잡기가 하나도 없어서 술과 담배가 그 역할을 했었거든요. 큰딸이 제가 술을 끊으니까 슬퍼해요. ‘거세당한 호랑이를 보는 것 같다’면서요.”

이현세는 2012년 초 위암 판정을 받아 수술했다. 현재는 완치 판정을 받은 상태다.

—위암 수술 이후 삶의 방식이 많이 바뀌었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든 내일의 태양은 뜨겠지’라는 마음가짐이었다면 지금은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삽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신없이 사는 것은 여전합니다만 마음가짐이 바뀐 것이지요.”

—술과 담배를 끊었으니 저축 많이 했겠습니다.

“제가 돈을 많이 벌긴 했는데 돈 관리를 못 하고 사업한다고 다 털어먹었어요. 사업을 안 하고 그 돈으로 부동산을 샀으면 돈에 치여 죽었을 것 같아요. 어린 시절 남자어른 없이 자랐기에 권력·명예·사업 이런 쪽에는 재능이 없는 거 같습니다. 지금은 2017년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때가 제가 오래 부어놓은 적금을 타는 해거든요.”

영원한 라이벌 許英萬

만화가 허영만씨. 이현세씨는 라이벌 허영만씨에 대해 “대단한 에너지를 가진 분”이라고 했다.

남성적인 필체로 1980년대 절대적인 일인자로 올라선 이현세와 전문적인 취재를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흔들림 없이 정상을 고수한 허영만은 한국 만화계의 대표적인 라이벌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최근 위상(位相)은 차이가 난다. 냉정히 봤을 때 허영만이 경쟁에서 한발 앞선 모습이다.

—만화계에서는 최고 라이벌로 허영만씨를 꼽던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상무 선배가 빠지면서 허영만 선배와 내가 성인만화의 라이벌로 부각됐어요. 허 선배나 나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언론이나 평론가들이 그렇게 붙이기를 좋아해요. 스포츠신문 간에 경쟁하니까 거기에 연재하는 허 선배와 제 만화가 붙기도 했고, 작품 스타일부터 사는 방식까지 어쩌면 허 선배와 나는 정반대기 때문에 더 비교되는 것 같아요. 나고 자란 배경과 정서에도 영호남이라는 지역색이 있고요.” 허영만씨의 고향은 전남 여수다.

—만화가 허영만씨는 어떤 사람입니까.

“허 선배가 내일모레면 70인데(허영만씨는 1947년생이다) 아직도 잘나가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한 에너지를 가진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아는 허 선배는 자기관리가 아주 철저합니다. 일정표를 짜놓고 거기에 맞춰서 행동하지요. 술을 먹다가도, 내일 할 일이 생기면 키핑(Keeping)하고 탁 돌아서는 스타일입니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엄청난 재능에도 불구, 허 선배가 최고의 위치에 머문 시간이 짧았다는 것입니다. 1970년대는 이상무 작가의 ‘독고탁’에, 1980년대는 저의 까치에 밀렸습니다. 최근 《식객》으로 다시 최고의 자리에 앉았는데 그 밑 문하생으로 있던 윤태호(《미생》의 작가)에게 곧바로 1위 자리를 뺏겼지요.”

이는 허영만 본인도 인정한다. 그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이야기했다.

“젊었을 때는 ‘독고탁’ 이상무와 《공포의 외인구단》 이현세, 두 이(李)씨에게 당했는데(웃음) 혼자 남다 보니 1등이 됐나 했죠. 하지만 요즘엔 내 문하생이던 《미생》의 윤태호가 최고 스타지요.”

—허영만씨와는 친합니까.

“나쁠 것은 없는데 솔직히 친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저와 허 선배는 사는 스타일이 완전히 다릅니다. 혼자 주로 지내며 자기관리가 철저한 허 선배가 호랑이라면, 무리지어 어울리길 좋아하는 저는 사자입니다. 허 선배는 《먼나라 이웃나라》를 그린 이원복 선생하고 친한데 두 분은 비가 오면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칵테일 마시는 것을 즐깁니다. 저는 소줏집에서 기절할 때까지 먹는 것을 좋아했고요.”

—술 마시는 것 말고 다른 것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허 선배는 요트, 히말라야 등반 같은 것을 좋아하는데 저는 그런 운동을 싫어합니다. 같이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사람들이 허 선배는 매우 서민적이고, 이현세는 권위적이고 화려할 것으로 보는데 실제는 전혀 반대입니다.”

만화가 이현세씨의 골프 실력은 수준급이다. 그는 알기 쉽게 골프를 풀어나간 책 《까치 이현세의 골프가 뭐길래》를 발간하기도 했다.

—골프를 매우 좋아한다고 알려졌는데요. 허영만씨와 같이 필드에 나간 적은 없습니까.

“허 선배와 저는 골프 치는 스타일도 완전히 다릅니다. 허 선배는 실수하면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저는 아주 산만하게 치는 스타일이고요.”(웃음)

이현세의 골프 실력은 수준급이다. 그는 자신의 핸디캡이 10 정도(싱글 수준) 된다고 소개했다. 처음 골프를 시작한 것이 1996년이라고 했으니 올해로 구력 12년째가 되는 것이다. 미국 올랜도에 있는 친구와 함께 바다낚시를 갔다가 날씨가 좋지 않아 골프장으로 발길을 돌린 게 본격적으로 골프를 치게 된 계기라고 한다.

—허영만씨에 비해 최근에는 활동이 뜸한 것 같습니다. 이현세의 전성시대도 저문 것입니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겠지요. 지금 시대는 마초적 성향의 영웅 이야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재 최고의 만화가는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지금은 윤태호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윤태호의 고민도 클 것입니다. 캐릭터가 없으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상무 하면 독고탁, 이현세 하면 까치, 엄지라는 캐릭터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윤태호 하면 떠오르는 캐릭터가 없습니다. 캐릭터가 없으면 후속작이 히트하기가 어렵습니다. 《미생》은 엄청나게 성공했지만, 후속작인 《인천상륙작전》은 《미생》에 비해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가르치던 문하생이 잘되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우선 너무 기분이 좋고요. ‘내 시대가 가는구나’라는 것을 느낍니다. 질투의 감정은 아닙니다.”

‘까치’와 ‘엄지’

만화가 이현세와 두 딸. 사진=SBS.

오늘날 이현세를 있게 한 작품 《공포의 외인구단》의 주인공인 까치는 1979년에 태어났다. 그는 까치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한국인의 한과 정서를 드러낼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흐트러진 머리에 외로운 방랑자 같은 분위기와 감성을 가진 캐릭터를 생각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 캐릭터는 불의나 역경에 부딪혀서 은하수처럼 산화되는 불 같은 폭발력을 가진 캐릭터였으면 했어요.”

—까치라는 캐릭터 때문에 《공포의 외인구단》이 큰 성공을 거둔 것입니까.

“그렇지요. 그리고 가족만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복선구조도 있고 성인들의 정서를 담아낸 게 큰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 보수적인 연애관에서 인스턴트 사랑으로 넘어가던 시기의 반작용으로 인한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한 갈망, 그리고 욕망을 위한 프로스포츠(야구)의 탄생 등이 맞물리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됐지요.”

‘까치’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은 ‘엄지’다. 엄지는 여린 외모와는 달리 강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 지고지순한 사랑의 대명사인 엄지는 뭇 남자들의 로망이 된다. 그리고 엄지를 만들어낸 이현세 또한 엄지를 동경하는 남자 중 하나였다. 그러다 이현세는 살아 숨 쉬는 엄지를 만나게 된다. 바로 지금의 아내 안영순씨다.

—부인과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아내는 만화가 친구 안춘회의 여동생으로 애니메이터였습니다. 안춘회 집에 놀러갔다가 만났습니다. 아내를 보자마자 제 그림 속의 ‘엄지’가 튀어나온 것 같아 숨이 멎었습니다. 아내는 아주 작고 여려 보였지만 성격은 당차고 여물었어요. 한번은 아내가 친구들과 놀러가서 찍은 사진을 나눠주는데 1원까지 정확하게 계산해서 돈을 걷더군요. 그런 모습을 보고 ‘살림을 잘하겠구나’하고 생각했죠. 1979년 아내와 결혼했는데 그때 저는 그야말로 땡전 한 닢 없는 빈털터리였습니다. 결혼자금 마련하려고 출판사에서 50만원 가불하고, 친구들과 50만원짜리 계(契)를 만들어서 제가 첫 번째로 곗돈을 탔습니다. 그렇게 100만원 만들어서 광명 철산리에 전세로 방 한 칸을 마련했습니다. 신혼살림은 말 그대로 젓가락 두 짝과 숟가락 두 벌이 전부였습니다.”

—아내 분이 애니메이터였는데 작품에 대한 조언도 해주고 합니까.

“제 아내는 결혼 후 내조에만 전념했습니다. 한 번도 내 만화를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을 쓰고 멋진 그림을 그리는 작가’라고 전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애들 역시 내 작품에 대해 절대로 품평하지 않습니다. 재미있느니, 없느니란 말을 아예 꺼내지 않는 것이지요. 밖에서 독자·평론가에게 충분히 비판받는데 집에서까지 욕먹을 필요가 있나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제가 365일 만화만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제 아내 덕입니다. 아내는 젊어서부터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다 해줬습니다. 저는 아내와 같이 집을 보러 가거나 이사할 때도 도와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사 전날, ‘내일 이사하니까 오늘은 들어오지 마세요’라고 아내에게서 연락이 와요. 그러면 저는 집에 안 들어가고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죠. 그러다 아내가 ‘몇 동 몇 호로 오세요’하면 그제야 새집에 찾아가서는 ‘여기가 앞으로 내가 살 집이구나’하고 둘러보는 식이었죠. 그리고 집 안에 못 하나 박는 것까지 모두 아내가 했습니다. 정말 고마운 사람이지요.”

—방송에 미모의 두 딸 모습이 공개돼 화제가 됐었는데요. 자녀도 만화와 관련한 일을 합니까.

“아니요. 어릴 때부터 ‘아빠처럼 밤샘하면서 살 자신 없어서 만화가는 못 하겠다’고 딱 잘라 말하더군요. 그저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다행이라든지, 서운하다든지 하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다 자기 길을 가는 거니까요. 애들이 도움을 청할 때만 멘토 역할을 해줍니다. 아빠지만 아주 객관적으로 조언합니다. 그래야 애들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다시 물어오니까요.”

—둘째딸 이름이 《공포의 외인구단》 주인공 이름(엄지)과 똑같던데요.

“작품 성공 후 딸이 태어나 만화 여주인공 이름을 붙였습니다.”

마지막 작품

《미생》의 작가 윤태호씨. 이현세씨는 “지금 만화판은 윤태호의 시대”라고 했다.

이현세는 최근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 종이책만 고집해 온 그가 이번에 처음으로 웹툰 연재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사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는 구멍가게식이었던 우리나라 만화시장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대중문화로 끌어올리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했던 사람이다. 일본처럼 독자들이 기꺼이 값을 치르고 서점에서 만화책을 사보는 문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가 꿈꾸던 이상향과는 차이가 있었다.

“2013년까지만 해도 저는 온라인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만화시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독자가 변한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신작을 네이버 웹툰에 연재할 예정입니다. 두려운 마음도 크지만, 하늘에 맡기고 일단 뛰어들 것입니다. 주제는 남자의 로망입니다.”

—이번에도 마초적 성향의 남자 이야기네요. 아까 이런 주제는 현 시대적 상황과 잘 맞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제가 걸어온 길을 갈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의 만화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60년을 살면서 한길만 걸어왔는데 지금 유행을 쫓아가서 뭐 하겠습니까. 젊은 작가들이 못 하는 이야기를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습니다. 저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40~50대를 위로하는 만화를 하고 싶습니다. 제 만화를 보기 위해 50대들이 컴퓨터 앞에 앉는다면, 참으로 멋진 일일 것입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진수무미(眞水無味)란 표현이 있습니다. 저는 이 문구를 액자로 만들어 집 현관에 오랫동안 걸어놓고 있는데요. 이 말은 ‘진짜 물은 맛이 없다’, 즉 순수한 사람이 되자는 의미입니다. 저는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약속은 기어코 지킬뿐더러 제 색깔도 분명히 밝힙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나도 모르게 나한테 속아서 다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 선보일 신작이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나요.

“장편이니까요. 제 나이도 있고요. 아마 성인물로는 그렇게(마지막 작품) 되겠지요?”

—한국 만화의 미래는 어떻게 보십니까.

“한국 만화의 장래는 밝다고 봅니다. 다만 만화 하나에만 매달리는 작가는 힘들 수 있죠. 토털 콘텐츠를 이해하는 이야기꾼(Storyteller)으로서의 성장이 제일 중요하겠죠. 이제는 하나의 콘텐츠가 터지면 만화가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가 먹고살 수도 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우리와는 달리 만화를 하나의 문화로서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 온 젊은 후배들에게 미래의 희망이 있는 거죠.”⊙